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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歷史와文學/史記

史記 卷 一二. 孝武本紀 Ⅱ

by 柳川 2019. 5. 11.

史記 卷 一二孝武本紀 Ⅱ



文成死明年, 天子病鼎湖1)甚, 巫醫無所不致, (至)不愈. 游水發根2)乃言曰:「上郡有巫, 病而鬼下之.」上召置祠之甘泉. 及病, 使人問神君.3) 神君言曰:「天子毋憂病. 病少愈, 强與我會甘泉.」於是病愈, 遂幸甘泉, 病良已.4) 大赦天下, 置壽宮神君.5) 神君最貴者(大夫)[太一], 其佐曰大禁、司命之屬, 皆從之. 非可得見, 聞其音, 與人言等. 時去時來, 來則風肅然也. 居室帷中. 時晝言, 然常以夜. 天子祓, 然后入.6) 因巫爲主人, 關飮食. 所欲者言行下.7) 又置壽宮、北宮,8) 張羽旗, 設供具, 以禮神君. 神君所言, 上使人受書其言, 命之曰「畫法」.9) 其所語, 世俗之所知也, 毋絶殊者, 而天子獨喜. 其事袐, 世莫知也.

 

문성장군이 죽은 지 2년 후에 천자는 정호궁(鼎湖宮)에서 중병을 얻었는데, 무의(巫醫)들이 각종의 방술을 다 써보았지만 병은 호전되지 않았다. 유수발근(游水發根)이라는 사람이 “상군(上郡)에 무사(巫師)가 살고 있는데, 그는 병을 앓으면서 신령이 자기 몸으로 강림하게 할 수 있습니다.”라고 아뢰자 천자는 그를 불러와서 감천궁에서 제사 지내게 했다. 이윽고 무사가 병이 나자 천자는 그를 통해서 신령에게 물어보게 했다. 그러자 무사를 병이 나게 한 귀신은 “천자의 병은 그리 걱정할 필요가 없소이다. 천자의 병세가 조금 나아지거든 억지로라도 감천궁으로 와서 나를 만나면 됩니다.”라 했다.

 

그 후 천자의 병이 호전되어 감천궁으로 행차하자 병이 정말로 낫게 되었다. 이에 천자는 천하에 대사면령을 베풀고 수궁(壽宮)을 지어서 신군(神君)을 받들어 모셨다. 신군 중에서 제일 높은 신은 태일신이며, 그를 보좌하는 대금(大禁), 사명(司命)과 같은 무리들은 모두 태일신을 따랐다. 그들의 모습은 볼 수 없었고 단지 그들이 말하는 소리만 들을 수 있었는데, 마치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과 같았다. 때로 그들은 왔다 갔다 했는데, 올 때에는 “살랑살랑” 하는 바람소리를 내었다. 그들은 실내의 장막 속에 살았고, 어떤 때는 낮에 이야기할 때도 있었지만 보통 밤에 이야기를 했다.

 

천자는 악을 제거하고 복을 비는 제사를 지낸 후에서야 비로소 수궁에 들어가곤 했다. 신과 천자는 무사를 매개로 해 음식을 받았으며, 신들이 하고자 하는 말은 무사를 통해서 전달되었다. 또한 수궁과 북궁(北宮)을 증수했고 깃털로 장식한 깃발을 세웠으며, 제사에 사용되는 각종의 기구를 진열해 신군에게 예의를 표했다. 신군이 한 말은 천자가 사람을 보내어 받아 적게 했는데, 이것을 일컬어서 ‘화법(畵法)’이라 했다. 이런 말들은 일반인들도 알 수 있는 것이었고 특별히 심오한 내용도 없었지만, 천자는 이를 보며 혼자 즐거워했다. 이러한 일들은 비밀리에 이루어져 세상 사람들은 알 수 없었다.

 

其後三年, 有司言元宜以天瑞命, 不宜以一二數.10) 一元曰建元, 二元以長星曰元光, 三元以郊得一角獸曰元狩云.11)

 

3년 뒤, 관원들이 기원(紀元)은 응당 하늘이 내려준 길조로 이름을 짓되, 단지 1, 2라는 숫자로 계산해선 안 된다는 의견을 제출했다. 따라서 첫 번째 연호는 ‘건원(建元)’이라고 하고, 두 번째 연호는 혜성이 나타났으므로 ‘원광(元光)’, 세 번째 연호는 제사 지낼 때 뿔이 하나 있는 짐승을 잡았으므로 ‘원수(元狩)’라고 칭할 것을 건의했다.

 

其明年冬, 天子郊雍, 議曰:「今上帝朕親郊, 而后土毋祀, 則禮不答也.」有司與太史公、12) 祠官寬舒等議:「天地牲角繭栗. 今陛下親祀后土, 后土宜於澤中圜丘爲五壇, 壇一黃犢太牢具, 已祠盡瘞, 而從祠衣上黃.」於是天子遂東, 始立后土祠汾陰脽上,13) 如寬舒等議. 上親望拜, 如上帝禮. 禮畢, 天子遂至滎陽而還. 過雒陽, 下詔曰:「三代邈絶, 遠矣難存. 其以三十里地封周後爲周子南君, 以奉先王祀焉.」是歲, 天子始巡郡縣, 侵尋於泰山矣.14)

 

그 이듬해 겨울, 천자가 옹현에서 제사 지내면서 대신들에게 “오늘 상제께는 짐이 직접 제사지냈으나 후토(后土)께는 제사지내지 않았는데, 이러한 예절은 완전한 것이 아니오.”라고 말하자, 관계 관원과 태사공(太史公), 사관인 관서 등이 의논해 이렇게 아뢰었다.

 

“천지신께 제사 지낼 때 사용하는 가축은 뿔이 누에고치나 밤같이 작은 것이어야 합니다. 지금 폐하께서 친히 후토께 제사 지내시려면 호수에 떠 있는 구릉에 원형 제단 다섯 채를 만들고, 각 제단마다 누렁 새끼 송아지 한 마리씩을 희생으로 바쳐야 합니다. 제사가 끝난 후에는 제사 때의 희생을 전부 땅에 묻어야 하며, 제사 지내는 사람들은 모두 황색의 옷을 입어야만 합니다.”라 했다.

 

그래서 천자는 곧 동쪽으로 가서 분음수(汾陰脽) 위에 후토의 제단을 건립했는데, 그 양식은 관서 등의 의견에 따랐다. 천자는 하늘에 제사 지내던 예의대로 친히 지신(地神)께 두루 제사 지내었고, 제사가 끝나자 천자는 형양(滎陽)을 거쳐서 돌아오다가, 낙양(雒陽)을 지나면서 “삼대(三代)가 끊어진 지 오래되어 그 후 예가 보존되기 어렵구나! 사방 30 리의 땅에 주 왕조의 후예인 주 자남군(周子南君)을 봉해 그곳에서 그의 조상들을 모시도록 하라.”라고 명했다. 이해에 천자는 각 군현을 순수하기 시작해, 점차 태산 가까이까지 이르렀다.



其春, 樂成侯1)上書言欒大. 欒大, 膠東宮人,2) 故嘗與文成將軍同師, 已而爲膠東王尙方. 而樂成侯姊爲康王后,3) 毋子. 康王死, 他姬子立爲王. 而康后有淫行, 與王不相中(得), 相危以法. 康后聞文成已死, 而欲自媚於上, 乃遣欒大因樂成侯求見言方. 天子旣誅文成, 後悔恨其早死, 惜其方不盡, 及見欒大, 大悅. 大爲人長美, 言多方略, 而敢爲大言, 處之不疑. 大言曰:「臣嘗往來海中, 見安期、羨門4)之屬. 顧以爲臣賤, 不信臣. 又以爲康王諸侯耳, 不足予方. 臣數言康王, 康王又不用臣. 臣之師曰:『黃金可成, 而河決可塞, 不死之藥可得, 僊人可致也.』臣恐效文成, 則方士皆掩口, 惡敢言方哉!」上曰:「文成食馬肝死耳. 子誠能脩其方, 我何愛乎!」大曰:「臣師非有求人, 人者求之. 陛下必欲致之, 則貴其使者, 令有親屬, 以客禮待之, 勿卑, 使各佩其信印, 乃可使通言於神人. 神人尙肯邪不邪. 致尊其使, 然后可致也.」於是上使先驗小方, 鬥旗,5) 旗自相觸擊.

 

 

그해 봄, 낙성후(樂成侯)가 글을 올려서 난대(欒大)를 소개했다. 난대는 교동왕(膠東王)의 궁인(宮人)으로, 옛날 문성장군과 같은 스승 밑에서 공부했는데, 곧 교동왕의 약제사가 되었다. 낙성후의 누이는 교동(膠東) 강왕(康王)의 왕후가 되었으나 아들이 없었으므로, 강왕이 죽자 다른 희첩(姬妾)의 아들이 왕위를 계승했다. 그런데 낙성후의 누이는 음탕한 행동을 했기에 새 왕과 잘 화합하지 못하고 법률이라는 수단을 이용해 서로 배척했다. 그녀는 문성장군이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듣고서 천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난대를 파견한 다음, 자신의 오라버니 낙성후의 천거로 천자를 알현하고 방술을 이야기하게 했다. 천자는 안 그래도 문성장군을 살해한 후 너무 빨리 죽였다고 후회하고 있었고, 그의 방술을 완전히 전수받지 못했음을 애석해하고 있었다. 그러한 때에 난대를 보자 천자는 매우 기뻐했다.

 

난대는 외모도 뛰어났고, 수많은 계획과 책략을 이야기했으며, 또한 감히 큰소리를 치면서도 전혀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난대는 왕에게 허풍을 치며 이렇게 말했다. “신은 일찍이 바다를 왕래하며 안기생, 선문고(羨門高) 등의 선인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신의 신분이 미천하다고 생각했는지 신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으며, 강왕은 제후에 지나지 않아서 그에게 방술을 전수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이 여러 차례 이러한 사정을 강왕에게 아뢰었으나 강왕은 신을 중용하지 않았습니다. 신의 스승은 ‘황금을 연금할 수 있고, 황하의 터진 둑도 막을 수 있으며, 불사약도 구할 수 있고, 신선도 불러올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허나 신도 문성장군처럼 될까 두렵습니다. 그렇게 방사들의 입을 틀어막는다면 어찌 방술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황제는 “문성장군은 말〔馬〕의 간을 잘못 먹어서 죽은 것일 뿐이오. 그대가 만약 문성장군의 방술을 연구해서 정리해낸다면, 내 어찌 재물을 아까워하겠소!”라 했다. 그러자 난대는 이렇게 아뢰었다. “신의 스승은 다른 사람을 찾아가지 않는데 다른 사람들이 그를 찾아옵니다. 폐하께서 꼭 신선을 불러오고 싶으시다면 반드시 신선의 사자(使者)를 존중해 주셔야만 합니다. 사자가 친족을 거느릴 수 있게 해주시고, 그를 빈객의 예우로 대해주셔야 하며 업신여기셔서는 안 됩니다. 또한 그에게 각종 신인(信印)을 지니게 해야만 비로소 그가 신선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더라도 신선이 만나줄 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선의 사자를 특별히 존중해야만 신선을 불러올 수 있는 것입니다.” 천자는 작은 방술이라도 좋으니 한번 영험을 보여 달라 했다. 난대가 바둑돌을 바둑판 위에 놓자 바둑돌들이 서로 부딪쳤다.

 

是時上方憂河決, 而黃金不就,6) 乃拜大爲五利將軍. 居月餘, 得四金印, 佩天士將軍、地土將軍、大通將軍、天道將軍印. 制詔御史:「昔禹疏九江, 決四瀆. 閒者河溢皐陸, 隄繇不息.7) 朕臨天下二十有八年, 天若遺朕士而大通焉.8) 乾稱『蜚龍』, 『鴻漸于般』,9) 意庶幾與焉. 其以二千戶封地士將軍大爲樂通侯.」10) 賜列侯甲第,11) 僮千人. 乘輿斥車馬12)帷帳器物以充其家. 又以衛長公主妻之,13) 齎金萬斤, 更名其邑曰當利公主.14) 天子親如五利之第. 使者存問所給, 連屬於道. 自大主15)將相以下, 皆置酒其家, 獻遺之. 於是天子又刻玉印曰「天道將軍」, 使使衣羽衣, 夜立白茅上, 五利將軍亦衣羽衣, 立白茅上受印, 以示弗臣也. 而佩「天道」者, 且爲天子道天神也. 於是五利常夜祠其家, 欲以下神. 神未至而百鬼集矣, 然頗能使之. 其後治裝行, 東入海, 求其師云. 大見數月, 佩六印, 貴振天下, 而海上燕齊之閒, 莫不搤捥16)而自言有禁方, 能神僊矣.

 

당시에 천자는 황하의 범람을 걱정하고 있었고, 황금 또한 제조해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난대를 곧 5리장군(五利將軍)에 봉했다. 한 달 남짓 지나자 난대는 4개의 금인(金印)을 얻었고, 몸에는 천사장군(天士將軍), 지사장군(地士將軍), 대통장군(大通將軍)과 천도장군(天道將軍) 등의 인신(印信)을 달게 되었다. 천자는 또 어사(御史)에게 다음과 같은 조칙을 내렸다.

“옛날 하우(夏禹)는 구강(九江)을 소통시켰고, 사독(四瀆)을 개통시켜서 흐르게 했다. 근자에 황하에 홍수가 나서 높은 지대까지 물에 잠겼으며, 제방을 쌓느라 노역이 쉴 새 없었다. 짐이 천하를 다스린 지 28년이나 되었는데, 하늘이 만약 짐에게 방사를 보내주신다면 난대는 하늘의 뜻에 통할 수 있을 것이다. 『역경(易經)』의 「건괘(乾卦)」에 ‘마치 비룡(飛龍)이 하늘에서 노닐며 자유자재로 솟아오르고, 큰 기러기가 물가 둑을 따라서 날아가듯 일사천리라네’라고 했는데, 아마도 이것은 난대를 칭찬하는 말일 것이다. 지사장군 난대에게 2천 호의 땅을 봉토로 주어 낙통후(樂通侯)에 봉하라.”

 

또한 난대에게 최상급의 제후에게 주는 부제(府第)와 1천 명의 노복을 주었으며, 황제가 쓰지 않는 거마와 궁중의 기물들을 모두 난대에게 주어서 그의 집안을 가득 채웠다. 또한 위황후(衛皇后)가 낳은 장공주(長公主)를 그에게 시집보내고 황금 1만 근을 주었으며 아울러 그녀의 봉호(封號)를 당리공주(當利公主)로 개명했다. 천자가 친히 5리 장군의 부제를 방문했다. 또한 그를 위문하거나 그가 필요로 하는 물품을 공급하는 사자들의 행렬이 길게 이어졌다. 천자의 고모인 대장공주(大長公主)로부터 조정의 장상(將相) 이하의 벼슬아치들은 좋은 술과 안주를 그의 집으로 보내는 등 정성을 다 바쳤다. 그리고 천자는 또 ‘천도장군’이라는 옥인(玉印)을 새겨서 우의(羽衣)를 입은 사자를 보내어 밤에 백모(白茅) 위에서 옥인을 받도록 했고, 5리 장군 역시 우의를 입고 백모 위에서 옥인을 받았으니, 이는 5리 장군이 황제의 신하가 아님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천도(天道)’라는 옥인을 달고 다니는 자는 천자를 대신해서 천신의 왕림을 인도하는 임무를 맡은 사람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때부터 5리 장군은 밤마다 자기 집에서 신선이 강림하기를 비는 제사를 지냈는데, 결국 신령은 내려오지 않고 백귀(百鬼)가 다 모였는데, 그는 또 그들을 부릴 수 있었다. 그 후로 난대는 행장을 가다듬고 나와서, 동해로 가서 그의 선사(仙師)를 만나겠다고 말했다. 난대는 천자를 만난 지 몇 달 만에 몸에는 여섯 개의 대인(大印)을 달았고 부귀와 명성을 천하에 떨쳤다. 때문에 연(燕), 제(齊) 연해 지역의 방사들은 자기들에게도 신선을 불러올 수 있는 방술이 있는데 난대처럼 부귀영화를 누리지 못한다고 모두들 억울해했다.



其夏六月中, 汾陰巫錦1)爲民祠魏脽后土營旁,2) 見地如鉤狀, 掊視3)得鼎. 鼎大異於衆鼎, 文鏤毋款識,4) 怪之, 言吏. 吏告河東太守勝, 勝以聞. 天子使使驗問巫錦得鼎無姦詐, 乃以禮祠, 迎鼎至甘泉, 從行, 上薦之.5) 至中山,6) 晏溫,7) 有黃雲蓋焉. 有麃過, 上自射之, 因以祭云.8) 至長安, 公卿大夫皆議請尊寶鼎. 天子曰:「閒者河溢, 歲數不登, 故巡祭后土, 祈爲百姓育谷. 今年豐廡未有報, 鼎曷爲出哉?」有司皆曰:「聞昔大帝興神鼎一,9) 一者一統, 天地萬物所繫終也. 黃帝作寶鼎三, 象天地人也. 禹收九牧之金, 鑄九鼎, 皆嘗鬺烹10)上帝鬼神.11) 遭聖則興,12) 遷于夏商. 周德衰, 宋之社亡,13) 鼎乃淪伏而不見. 頌云『自堂徂基,14) 自羊徂牛;15)鼐鼎及鼒,16) 不虞不驁,17) 胡考之休』. 今鼎至甘泉, 光潤龍變, 承休無疆. 合茲中山, 有黃白雲降18)蓋, 若獸爲符,19) 路弓乘矢,20) 集獲壇下, 報祠大饗.21) 惟受命而帝者心知其意22)而合德焉. 鼎宜見於祖禰, 藏於帝廷, 以合明應.」制曰:「可.」

 

이해 여름 6월에 분음(汾陰)의 무사(巫師)인 금(錦)이 위수(魏脽)의 후토 사당 옆에서 제사를 지낼 때, 땅에 갈고리 같은 돌출물이 있는 것을 보고 흙을 파보았다가 정(鼎)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정은 다른 정과는 달리 매우 컸으며, 꽃무늬만 조각되어 있고 문자는 새겨져 있지 않았다. 무사가 이상히 여겨서 그 지방의 관리에게 이를 말하자, 관리는 하동(河東)의 태수 승(勝)에게 알렸고, 승은 다시 이 일을 위에 보고했다.

 

 

천자는 사자를 보내 무사인 금을 심문해 정을 얻은 일이 꾸며낸 이야기가 아님을 알고는, 예의를 갖추어 천지에 제사 지내고 정을 감천궁으로 맞아들여서 백관이 수행하는 가운데 하늘에 제사 지냈다. 정을 영접하는 무리들이 중산(中山)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날씨가 화창하고 따뜻해졌으며, 하늘에는 황운(黃雲)이 떠 있었고, 마침 고라니 한 마리가 뛰어가므로 천자가 몸소 활을 쏘아 잡아서 그것으로 제사 지냈다. 장안에 이르자 공경대부들은 보정(寶鼎)을 존중할 것을 의논해 황제께 주청했다. 천자가 “근래 황하가 범람하고 흉년이 여러 해 계속되었소. 그러므로 내가 순수를 나와서 후토에 제사 지내면서 곡식이 풍성해지기를 빌었고, 이제 풍년이 들었소. 그런데 올해의 풍작에 대해서 아직 신께 감사하는 제사를 올리지도 못했는데, 이 정은 왜 나왔단 말이오?”라고 묻자, 제사를 담당하는 관리들이 입을 모아서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옛날 대제(大帝)께서 신정(神鼎)을 하나 만들었는데, 하나〔一〕란 통일(統一)이란 뜻이며, 신정은 천지 만물의 귀결이라고 들었습니다. 또한 황제(黃帝)께서는 보정 세 개를 만들어 천(天), 지(地), 인(人)을 각각 상징하셨습니다. 하우(夏禹)는 구주(九州)의 금속을 모아 아홉 개의 정을 만들어, 추수 후에 제물(祭物)을 삶아 하늘에 제사지내는 데 사용했습니다. 어진 군주를 만나면 정(鼎)이 출현했고, 그렇게 하(夏)와 상(商)에 전해졌습니다. 주(周)의 덕이 쇠하고 송(宋)의 사직이 황폐해지자 정은 땅 속에 묻혀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시경(詩經)』의 「주송(周頌)」 “사의(絲衣)”에서 ‘본채에서 문 밖 택지까지 가며 제기(祭器)를 살펴보고, 양부터 소까지 모든 제물을 살펴보니, 큰 정과 작은 정 모두 청결하구나. ······시끄러이 떠들거나 오만하지 않으며 엄숙히 장수(長壽)와 복을 구하네!’라고 했습니다.

 

지금 보정이 감천궁에 도착했는데, 보정의 광채는 마치 용이 노닐듯 변화무쌍하고, 무궁무진한 복록을 이어받았습니다. 이는 전번에 중산에서 짐승 모양을 한 황백색의 구름이 어가(御駕) 덮개로 내려온 길조와 부합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폐하께서 커다란 활의 화살 네 발을 쏘아서 고라니를 잡으셨으니, 이 모든 길조가 제단 아래 강림해 함께 모여 천지 귀신께 보답하는 성대한 제사가 된 것입니다. 오직 하늘의 명을 이어받은 제왕만이 하늘의 뜻을 알 수 있고 하늘의 덕행에 부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정은 반드시 조상의 묘당에 바쳐야 하며, 감천궁에 있는 천제(天帝)의 전정(殿廷)에 소중히 모셔서 신명(神明)의 상서로운 징조에 부응해야 합니다.”

 

그러자 천자는 그렇게 하라고 윤허했다.



각주


1 集解晉灼曰:「在湖縣.」韋昭曰:「地名, 近宜春.」索隱案:鼎湖, 縣名, 屬京兆, 後屬弘農. 昔黃帝採首陽山銅鑄鼎於湖, 曰鼎湖, 卽今之湖城縣也. 韋昭(云)以爲近宜春, 亦甚疏也.

2 集解服虔曰:「游水, 縣名. 發根, 人名姓.」晉灼曰:「地理志游水, 水名, 在臨淮淮浦也.」索隱顔師古以游水姓, 發根名. 蓋或因水爲姓. 服虔亦曰發根, 人姓字. 或曰發樹根者也.

3 集解韋昭曰:「卽病巫之神.」

4 集解孟康曰:「良已, 善已, 謂愈也.」

5 集解服虔曰:「立此便宮也.」瓚曰:「宮, 奉神之宮也. 楚辭曰『蹇將澹兮壽宮』.」

6 集解漢書音義曰:「崇絜, 自祓除然後入.」

7 集解李奇曰:「神所欲言, 上輒爲下之.」

8 正義括地志云:「壽宮、北宮皆在雍州長安縣西北三十里長安故城中. 漢書云武帝壽宮以處神君.」

9 集解漢書音義曰:「或云策畫之法也.」正義畫音獲. 案:畫一之法.

10 集解蘇林曰:「得黃龍鳳皇諸瑞, 以名年.」正義孝景以前卽位, 以一二數年至其終. 武帝卽位, 初有年號, 改元以建元爲始.

11 集解徐廣曰:「案諸紀元光後有元朔, 元朔後得元狩.」

12 集解韋昭曰:「說者以談爲太史公, 失之矣. 史記稱遷爲太史公者, 是外孫楊惲所稱.」索隱韋昭云談, 司馬遷之父也, 說者以談爲太史公, 失之矣. 史記多稱太史公, 遷外孫楊惲稱之也. 姚察按:遷傳亦以談爲太史公, 非惲所加. 又按:虞喜志林云「古者主天官皆上公, 自周至漢, 其職轉卑, 然朝會坐位猶居公上, 尊天之道, 其官屬仍以舊名, 尊而稱公, 公名當起於此」. 故如淳云「太史公位在丞相上, 天下郡國計書先上太史公, 副上丞相」, 其義是也. 而桓譚新論以爲太史公造書, 書成示東方朔, 朔爲平定, 因署其下. 太史公者, 皆朔所加之者也.

13 集解徐廣曰:「元鼎四年時也.」駰案:蘇林曰「脽音誰」. 如淳曰「河之東岸特堆堀, 長四五里, 廣二里餘, 高十餘丈, 汾陰縣在脽之上, 后土祠在縣西. 汾在脽之北, 西流與河合也」. 索隱脽, 丘. 音誰. 漢舊儀作「葵丘」者蓋河東人呼「誰」與「葵」同故耳.

14 集解晉灼曰:「遂往之意也.」索隱侵尋卽侵淫也. 故晉灼云「遂往之意也」. 小顔云「浸淫漸染之義」. 蓋尋淫聲相近, 仮借用耳. 師古叔父游秦亦解漢書, 故稱師古爲「小顔」也.


1 集解徐廣曰:「姓丁, 名義. 後與欒大俱誅也.」索隱韋昭云:「河閒縣.」按:郊祀志樂成侯登, 而徐廣據表姓丁名義, 未詳.

2 集解服虔曰:「王家人.」

3 集解孟康曰:「膠東王后也.」

4 索隱韋昭云:「仙人.」應劭云:「名子喬.」

5 正義音其. 文本或作「棋」. 說文云:「棋, 博棋也.」高誘注淮南子云:「取雞血與針磨擣之, 以和磁石, 用塗碁頭曝乾之, 置局上, 卽相拒不止也.」

6 正義鍊丹砂鉛錫爲黃金不就.

7 正義顔師古云:「皐, 水旁地也. 廣平曰陸. 言水大汎溢, 自皐及陸, 而築作堤, 傜役甚多, 不暇休息.」

8 集解韋昭曰:「言欒大能通天意, 故封樂通.」索隱韋昭云:「言大能通天意, 故封之樂通.」樂通在臨淮高平縣也.

9 集解駰案:漢書音義曰「般, 水涯堆也. 漸, 進也」. 武帝云得欒大如鴻進于般, 一擧千里, 得道若飛龍在天.

10 集解韋昭曰:「樂通, 臨淮高平也.」

11 集解漢書音義曰:「有甲乙第次, 故曰第.」

12 集解漢書音義曰:「或云斥不用也.」韋昭曰:「嘗在服御.」索隱孟康云「斥不用之車馬」是也.

13 集解孟康曰:「衛太子妹.」如淳曰:「衛太子姊也.」蔡邕曰:「帝女曰公主, 儀比諸侯. 姊妹曰長公主, 儀比諸侯王.」駰案:此帝女也, 而云長公主, 未詳.

14 集解地理志云東萊有當利縣.

15 集解徐廣曰:「武帝姑也.」駰案:韋昭曰「竇太后之女也.」

16 集解服虔曰:「滿手曰搤.」瓚曰:「搤, 執持也.」


1 集解應劭曰:「錦, 巫名.」

2 集解應劭曰:「魏, 故魏國也. 脽, 若丘之類.」

3 索隱說文:「掊, 抱也.」音步溝切.

4 集解韋昭曰:「款, 刻也.」索隱韋昭云:「款, 刻也.」按:識猶表識也.

5 集解如淳曰:「以鼎從行, 上至甘泉, 將薦之於天也.」

6 集解徐廣曰:「河渠書鑿涇水自中山西.」索隱此山在馮翊谷口縣西, 近九嵕山, 土人呼爲中山. 河渠書韓使水工鄭國說秦鑿涇水自中山西, 卽此山.

7 集解如淳曰:「三輔謂日出淸濟爲晏. 晏而溫也.」索隱如淳云:「三輔俗謂日出淸濟爲晏. 晏而溫, 故曰晏溫.」許愼注淮南子云:「晏, 無雲也.」

8 集解徐廣曰:「上言從行薦之, 或曰祭鼎(乎)[也].」

9 索隱顔師古以大帝卽太昊伏犠氏, 以在黃帝之前故也.

10 集解徐廣曰:「烹, 煮也. 鬺音觴. 皆嘗以烹牲牢而祭祀也.」索隱言鼎烹牲而饗嘗也. 「鬺」字又作「觴」字, 音殤. 漢書郊祀志云鼎空足曰鬲, 以象三德. 鬲音歷. 謂足中不實者名之也.

11 集解服虔曰:「以祭祀上帝. 或曰嘗烹酌也.」

12 正義遭, 逢也. 鼎雖淪泗水, 逢聖興起, 故出汾陰, 西至甘泉也.

13 正義社主民也. 社以石爲之. 宋社卽亳社也. 周武王伐紂, 乃立亳社, 以爲監戒, 覆上棧下, 不使通天地陰陽之氣. 周禮衰, 國將危亡, 故宋之社爲亡殷復也.

14 正義此以下至「胡考之休」是周頌絲衣之詩. 自堂, 從內往外. 基, 門內塾也. 鄭玄云:「門側之堂謂之塾. 繹禮輕, 使士升堂, 視壺濯及籩豆之屬, 降往於塾. 牲自羊徂牛, 告充已, 乃擧鼎告絜, 禮之次也.」

15 正義自堂往塾, 先視羊, 後及牛也. 毛萇云:「先小後大也.」

16 集解韋昭曰:「爾雅曰鼎絶大謂之鼐, 圜奄上謂之鼒.」

17 索隱毛傳云:「虞, 譁也.」姚氏案:何承天云「虞」當爲「吳」, 音洪霸反. 又說文以「吳, 一曰大言也」. 此作「虞」者, 與吳聲相近, 故仮借也. 或者本文借此「虞」爲歡娛字故也.

18 集解韋昭曰:「與中山所見黃雲之氣合也.」

19 集解服虔曰:「雲若獸, 在車蓋也.」晉灼曰:「蓋, 辭也. 或云符謂瑞應也.」

20 集解韋昭曰:「路, 大也. 四矢爲乘.」

21 集解徐廣曰:「一云大報享祠也.」

22 集解服虔曰:「高祖受命知之也. 宜見鼎於其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