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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歷史와文學/史記列傳

史記 卷九五. 樊酈滕灌列傳

by 柳川 2019. 6. 2.

樊酈滕灌列傳



樊噲


舞陽侯樊噲者,沛人也。以屠狗為事,與高祖俱隱。

初從高祖起豐,攻下沛。高祖為沛公,以噲為舍人。從攻胡陵、方與,還守豐,擊泗水監豐下,破之。復東定沛,破泗水守薛西。與司馬夷戰碭東,卻敵,斬首十五級,賜爵國大夫。常從,沛公擊章邯軍濮陽,攻城先登,斬首二十三級,賜爵列大夫。復常從,從攻城陽,先登。下戶牖,破李由軍,斬首十六級,賜上閒爵。從攻圍東郡守尉於成武,卻敵,斬首十四級,捕虜十一人,賜爵五大夫。從擊秦軍,出亳南。河閒守軍於杠里,破之。擊破趙賁軍開封北,以卻敵先登,斬候一人,首六十八級,捕虜二十七人,賜爵卿。從攻破楊熊軍於曲遇。攻宛陵,先登,斬首八級,捕虜四十四人,賜爵封號賢成君。從攻長社、轘轅,絕河津,東攻秦軍於尸,南攻秦軍於犨。破南陽守齮於陽城。東攻宛城,先登。西至酈,以卻敵,斬首二十四級,捕虜四十人,賜重封。攻武關,至霸上,斬都尉一人,首十級,捕虜百四十六人,降卒二千九百人。

項羽在戲下,欲攻沛公。沛公從百餘騎因項伯面見項羽,謝無有閉關事。項羽既饗軍士,中酒,亞父謀欲殺沛公,令項莊拔劍舞坐中,欲擊沛公,項伯常(肩)[屏]蔽之。時獨沛公與張良得入坐,樊噌在營外,聞事急,乃持鐵盾入到營。營衛止噲,噲直撞入,立帳下。項羽目之,問為誰。張良曰:「沛公參乘樊噲。」項羽曰:「壯士。」賜之卮酒彘肩。噲既飲酒,拔劍切肉食,盡之。項羽曰:「能復飲乎?」噲曰:「臣死且不辭,豈特卮酒乎!且沛公先入定咸陽,暴師霸上,以待大王。大王今日至,聽小人之言,與沛公有隙,臣恐天下解,心疑大王也。」項羽默然。沛公如廁,麾樊噲去。既出,沛公留車騎,獨騎一馬,與樊噲等四人步從,從閒道山下歸走霸上軍,而使張良謝項羽。項羽亦因遂已,無誅沛公之心矣。是日微樊噲奔入營譙讓項羽,沛公事幾殆。

明日,項羽入屠咸陽,立沛公為漢王。漢王賜噲爵為列侯,號臨武侯。遷為郎中,從入漢中。

還定三秦,別擊西丞白水北,雍輕車騎於雍南,破之。從攻雍、斄城,先登。擊章平軍好畤,攻城,先登陷陣,斬縣令丞各一人,首十一級,虜二十人,遷郎中騎將。從擊秦車騎壤東,卻敵,遷為將軍。攻趙賁,下郿、槐裏、柳中、咸陽;灌廢丘,最。至櫟陽,賜食邑杜之樊鄉。從攻項籍,屠煮棗。擊破王武、程處軍於外黃。攻鄒、魯、瑕丘、薛。項羽敗漢王於彭城,盡復取魯、梁地。噲還至滎陽,益食平陰二千戶,以將軍守廣武。一歲,項羽引而東。從高祖擊項籍,下陽夏,虜楚周將軍卒四千人。圍項籍於陳,大破之。屠胡陵。

項籍既死,漢王為帝,以噲堅守戰有功,益食八百戶。從高帝攻反燕王臧荼,虜荼,定燕地。楚王韓信反,噲從至陳,取信,定楚。更賜爵列侯,與諸侯剖符,世世勿絕,食舞陽,號為舞陽侯,除前所食。以將軍從高祖攻反韓王信於代。自霍人以往至雲中,與絳侯等共定之,益食千五百戶。因擊陳豨與曼丘臣軍,戰襄國,破柏人,先登,降定清河、常山凡二十七縣,殘東垣,遷為左丞相。破得綦毋卹、尹潘軍於無終、廣昌。破豨別將胡人王黃軍於代南,因擊韓信軍於參合。軍所將卒斬韓信,破豨胡騎橫谷,斬將軍趙既,虜代丞相馮梁、守孫奮、大將王黃、將軍、(太卜)太仆解福等十人。與諸將共定代鄉邑七十三。其後燕王盧綰反,噲以相國擊盧綰,破其丞相抵薊南,定燕地,凡縣十八,鄉邑五十一。益食邑千三百戶,定食舞陽五千四百戶。從,斬首百七十六級,虜二百八十八人。別,破軍七,下城五,定郡六,縣五十二,得丞相一人,將軍十二人,二千石已下至三百石十一人。

噲以呂后女弟呂須為婦,生子伉,故其比諸將最親。

先黥布反時,高祖嘗病甚,惡見人,臥禁中,詔戶者無得入群臣。群臣絳、灌等莫敢入。十餘日,噲乃排闥直入,大臣隨之。上獨枕一宦者臥。噲等見上流涕曰:「始陛下與臣等起豐沛,定天下,何其壯也!今天下已定,又何憊也!且陛下病甚,大臣震恐,不見臣等計事,顧獨與一宦者絕乎?且陛下獨不見趙高之事乎?」高帝笑而起。

其後盧綰反,高帝使噲以相國擊燕。是時高帝病甚,人有惡噲黨於呂氏,即上一日宮車晏駕,則噲欲以兵盡誅滅戚氏、趙王如意之屬。高帝聞之大怒,乃使陳平載絳侯代將,而即軍中斬噲。陳平畏呂后,執噲詣長安。至則高祖已崩,呂后釋噲,使復爵邑。

孝惠六年,樊噲卒,謚為武侯。子伉代侯。而伉母呂須亦為臨光侯,高后時用事專權,大臣盡畏之。伉代侯九歲,高后崩。大臣誅諸呂、呂須婘屬,因誅伉。舞陽侯中絕數月。孝文帝既立,乃復封噲他庶子市人為舞陽侯,復故爵邑。市人立二十九歲卒,謚為荒侯。子他廣代侯。六歲,侯家舍人得罪他廣,怨之,乃上書曰:「荒侯市人病不能為人,令其夫人與其弟亂而生他廣,他廣實非荒侯子,不當代後。」詔下吏。孝景中六年,他廣奪侯為庶人,國除。


<번쾌>
무양후() 번쾌()는 패현() 사람이다. 그는 개 도살을 일삼으면서 유방()과 같이 은둔하고 있었다.

처음에 그는 유방을 따라 풍읍()에서 군사를 일으켜 패현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유방은 패공()이 되자 번쾌를 사인()으로 삼았다. 그는 또 호릉()과 방여(輿)를 공격하고 돌아오다가 풍읍을 방비하면서, 사수군()의 감()을 풍현 부근에서 공격해 무찔렀다. 다시 동쪽으로 패현을 평정하고는 설현() 서쪽에서 사수() 군수()의 군대를 격파했다.

사마이(이)와 탕현() 동쪽에서 전쟁을 벌여 물리치고, 적군 15명의 머리를 베고 국대부()의 작위를 받았다. 상비군으로 패공을 지원해 복양현()에서 장한()의 군대를 공격할 때, 성을 먼저 올라가 공략하고 적군 23명의 머리를 베고 열대부()의 작위를 하사받았다.

다시 상비군으로 패공을 지원해 성양현()을 공략할 때도 가장 먼저 성에 올라갔다. 호유향()을 함락시키고, 이유()의 군사를 격파해 적군 16명의 머리를 베고 상간작()의 벼슬을 받았다. 패공을 따라 성무현()에서 동군()의 수위()를 공격하고 포위해 적을 물리쳤으며, 적군 14명을 참수하고, 포로 11명을 잡아 오대부()의 작위를 하사받았다.

패공을 따라 진()의 군사를 공격하고, 박()땅 남쪽으로 나아가, 강리()에 주둔하고 있던 하간군() 군수의 군대를 격파했다. 또한 개봉() 북쪽에 주둔하고 있던 조분()의 군대를 격파해, 적을 물리치고 척후병 한 명과 적군 68명의 머리를 베고, 27명의 포로를 잡아 경()의 작위를 하사받았다. 패공을 따라 곡우()에 주둔하고 있던 양웅()의 군대를 격파했다.

원릉()을 공략하고 가장 먼저 성에 올라 적군 8명을 참수하고, 44명의 포로를 잡아 현성군()의 봉호를 하사받았다. 패공을 따라 장사()와 환원()을 공략하고 하진()을 봉쇄했으며, 동쪽으로 시향()에 주둔하고 있던 진()의 군대를 공격하고, 남쪽으로 주()에 주둔하고 있던 진의 군대를 공략했다. 남쪽으로 양성현()에 있던 남양군()군수 여의()를 격파했다. 동쪽으로 완현()의 성을 공격했는데 가장 먼저 성에 올라갔다.

서쪽으로 역현()에 이르러 적을 물리치고, 적군 24명의 목을 베고 포로 40명을 잡아 추가로 녹봉을 받았다. 무관()을 공격하고, 패상()에 이르러 도위() 한 명과 적군 10명의 목을 베었으며 포로 46명을 잡고, 병졸 2천 9백 명을 항복시켰다.



항우()가 희하()에서 주둔하고 있으면서 패공을 공격하려고 했다. 패공은 1백여 명의 기마병을 대동하고 항백()을 통해서 항우를 만나 함곡관()을 봉쇄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사죄했다.

항우가 병사들에게 주연을 베풀었고, 술자리가 무르익자 아부()는 패공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며, 항장()에게 좌중에서 칼춤을 추다가 패공을 치라고 명령했지만, 항백이 항상 패공을 엄호하고 있었다. 당시에 패공과 장량()만이 연회에 참석해 있었고, 번쾌는 병영 밖에 있다가 사태가 급박하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철 방패를 들고 병영 안으로 뛰어들었다. 병영의 보초가 번쾌를 저지하자, 번쾌 가 곧장 돌진해 장막 아래에 섰다.

항우가 그를 목격하고 누구냐고 물으니, 장량이 “패공의 경호원 번쾌라는 자입니다.”라고 대답하자, 항우는 “장사로다.”라고 말하고, 술 한 주전자와 돼지 다리를 하사했다. 번쾌는 술을 다 마시고 나서 칼을 뽑아 고기를 잘라서 다 먹어치웠다. 항우가 “더 마실 수 있는가?”라고 물으니, 번쾌가 말했다. “신은 죽음도 사양하지 않거늘, 어찌 술 한 주전자를 사양하오리까? 그런데 패공께서 먼저 국경을 넘어 함양()을 평정했지만, 패상에 주둔하면서 대왕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헌데 대왕께서는 오늘 도착해 소인배들의 말은 듣고 패공과의 사이에 틈을 만들고 계십니다. 신은 천하가 분열되어 사람들이 대왕의 의심하지 않을까 걱정 되옵니다.”

항우는 묵묵부답이었다. 패공이 변소로 가면서 손짓해 번쾌를 불러내었다. 병영을 벗어나자, 패공은 수레를 남겨둔 채 혼자 말을 탔고, 번쾌 등 네 사람은 걸어서 뒤를 따랐으며, 산 아래 샛길을 따라 패상의 군영으로 도망쳐 돌아온 뒤 장량을 시켜 항우에게 사과하게 했다. 항우 역시 마음이 흡족해 패공을 죽이려는 마음을 먹지 않았다. 이날 번쾌가 병영에 달려들어 항우를 나무라지 않았다면, 패공의 과업은 거의 끝났을 것이다.



다음날, 항우는 함양에 들어가 함양을 피로 물들이고 패공을 한왕()으로 세웠다. 한왕은 번쾌에게 열후()의 작위를 내리고 임무후()로 불렀다. 번쾌는 낭중()으로 승진했고, 한왕을 따라 한중()으로 진입했다.

한왕은 회군해 삼진()을 평정했고, 번쾌는 단독으로 백수() 북쪽에서 서현(西) 현승()의 군대를 공격했으며, 옹현() 남쪽에서 옹왕()의 날쌘 기마병을 격파했다. 한왕을 따라 옹현과 태성()을 공격했을 때 가장 먼저 성에 올라갔다.

호치현()에서 장평()의 군대를 공격할 때, 성을 공격하고 가장 먼저 올라가 진지를 함락시켰고, 현령과 현승 각각 한 사람씩의 목을 잘랐으며, 적군 11명을 참수했고, 포로 20명을 잡아서 낭중기장()으로 승진했다.

번쾌는 한왕을 따라 양향() 동쪽에서 진()의 기마병을 공격해 적을 물리치고 장군으로 승진했다. 조분()을 공격해 미()·괴리()·유중()·함양()을 함락시켰다. 폐구()를 수몰시킨 것은 번쾌의 최고의 공적이었다. 역양현()에 이르러 식읍으로 두현()의 번향()을 받았다.

한왕을 따라 항우를 공격해 자조() 땅을 몰살시켰다. 외황현()에서 왕무()와 정처()의 군대를 격파했다. 추()·노()·하구()·설()을 공략했다. 항우는 팽성()에서 한왕을 무찌르고 노()와 양() 땅을 수복했다.

번쾌는 형양()으로 돌아와 평음()의 2천 호()를 식읍으로 더 받았고, 장군으로서 광무산()을 수비했다. 1년 뒤, 항우가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가자, 한왕을 따라 항우를 공격해 양하현()을 함락시키고 초() 주장군()의 병졸 4천 명을 사로잡았다. 진현()에서 항우를 포위해 크게 격파했고, 호릉()에서 항우를 죽였다.

항우가 죽자 한왕은 황제가 되었으며, 번쾌는 견고한 수비와 전공() 때문에 8백 호의 식읍을 더 받았다. 번쾌는 고조를 따라 반란을 일으킨 연왕() 장도()를 공격해 사로잡고 연 땅을 평정했다.

초왕() 한신()이 반란이 일으키자, 번쾌는 고조를 따라 진()땅에 도착해 한신을 체포하고 초를 평정했다. 다시 열후의 작위를 하사하고, 제후의 부절()을 주어 대대로 세습하게 했으며, 무양현()을 식읍으로 주고 무양후()라고 불렀으며, 이미 책봉했던 식읍을 해제했다. 번쾌는 장군으로서 고조를 따라 대()땅에서 모반을 일으킨 한왕() 신()을 공격했다.

강후()등과 함께 곽인()에서 운중()으로 가면서 대() 땅을 평정해, 식읍 5백 호를 더 받았다. 진회()와 만구신()의 군대를 공격한 것 때문에 양국현()에서 전쟁했고, 백인현()을 격파할 때에는 가장 먼저 성에 올라 청하()와 상산()등 모두 27개의 현을 함락시켜 평정했고, 동원현()을 파괴해 좌승상()으로 승진했다.

무종()과 광창()에서 기무앙()과 윤반()의 군대를 격파했다. 대() 땅의 남쪽에서 진희의 부대장으로 흉노족()인 왕황()의 군대를 격파하고, 그 기세로 삼합()에서 한신의 군대를 공격했다. 번쾌 휘하의 장졸이 한신을 베고, 횡곡()에서 진희의 오랑캐 기마병을 공격해 장군 조기()를 침수했으며, 대()의 승상 풍량()·군수 손분()·대장 왕황()·태복() 해복() 등 10명을 생포했다.

번쾌는 여러 장군들과 함께 대() 땅의 73개 향읍(향)을 평정했다. 그 후 연()의 노관()이 반란을 일으키자, 번쾌는 재상으로서 노관을 공격해 계()의 남쪽에서 승상인 저()를 격파하고, 연의 18현과 51개 향읍을 평정했다. 1천 3백 호의 식읍을 더 받아 무향현 5천 4백 호의 식읍을 확정했다.

번쾌는 고조를 따라 적군 176명을 참수하고 288명을 생포했다. 단독으로 군 7개 대대를 격파하고, 5개의 성을 함락시켰으며, 6개 군과 52현을 평정해 승상 1명, 장군 12명, 2천석()에서 3백석까지 관리를 모두 11명을 체포했다.

번쾌는 여후()의 여동생 여수()를 아내로 맞이해 아들 항()을 낳았기 때문에 다른 여러 장군들에 비해 고조와 가장 가까웠다.

앞서 경포()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고조는 병이 깊어 사람을 만나기 싫어하고 궁중에서 누워있었다. 호위병을 불러 군신들을 들지 못하게 명령하자, 강후()와 관영() 등의 군신들이 들어가지 못했다.

10여 일이 지나자, 번쾌가 궁중의 작은 문을 열어젖히고 곧바로 들어갔고 대신들이 뒤를 따랐다. 고조는 홀로 환관을 베고 누워 있었다. 번쾌 등이 고조를 보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처음 폐하께서 신등과 함께 패현()의 풍읍()에서 일어나 천하를 평정하셨을 때 그 얼마나 씩씩하셨습니까? 이제 천하가 이미 평정되었는데 어찌 그리 지쳐 보이시는지요? 폐하의 병이 깊어져 대신들이 놀라 두려워하고 있는데 신 등을 만나 국사를 논의하시지 않으시고, 환관 한 사람과 세상을 회피하고 계십니까? 폐하께서는 홀로 조고()의 일을 보지 않았사옵니까?”

고제는 웃으면서 일어났다.

그 후 노관이 반란을 일으키자, 고조는 번쾌에게 상국으로서 연을 공격하게 했다. 이때 고조의 병이 심했는데 어떤 사람이 번쾌가 여씨()와 작당한다고 비방했다. 즉 황제가 어느 날 서거하면 번쾌가 군대를 이끌고 척씨()와 조왕() 여의()의 일족을 멸살시키려 한다는 것이었다.

고조가 이 소리를 듣고 크게 진노하고 곧바로 진평()을 시켜 강후를 싣고 번쾌를 대신해 군대를 통솔하고 번쾌를 즉각 참수하라 했다. 진평은 여후가 두려워 번쾌를 장안()으로 압송했다. 고조가 서거하자, 여후는 번쾌를 석방하고 작위와 식읍을 되돌려주었다.


효혜제() 6년, 번쾌가 죽자 무후()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아들 번항()이 대신해 후작()이 되었고, 번항의 어머니 여수 역시 임광후()가 되었다. 고후()가 때때로 전권을 휘둘러 대신들이 모두 두려워했다. 번항이 후작을 대신한 지 9년 만에 고후가 세상을 떠났다.

대신들이 여씨 자제들과 여수의 가솔들을 주살하고, 이때 번항도 주살했다. 이로써 무양후의 가통은 몇 개월 동안 끊어졌다. 그러나 효문제()가 즉위하자 곧바로 번쾌의 또 다른 서자 번불인(巿)을 무양후로 책봉했고, 옛 작위와 식읍을 되돌려주었다. 번불인은 후작이 된 지 29년 만에 죽었고, 시호는 황후()였다. 그의 아들 번타광()이 대를 이어 후작이 되었다. 6년 뒤, 후작 집안의 가신이 타광에게 죄를 짓고, 원한을 품고 곧바로 상서를 올렸다.

“황후 번불인은 병이 있어 사람 노릇을 하지 못하고, 부인과 동생에게 음란한 행위를 시켜 타광을 낳았습니다. 타광은 실제로 황후의 아들이 아니므로 후작을 잇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조칙을 내려 조사하게 했다. 효경제() 6년, 타광은 후작을 박탈당하고 평민이 되었으며, 봉지도 해제되었다.


酈商

曲周侯酈商者,高陽人。陳勝起時,商聚少年東西略人,得數千。沛公略地至陳留,六月餘,商以將卒四千人屬沛公於岐。從攻長社,先登,賜爵封信成君。從沛公攻緱氏,絕河津,破秦軍洛陽東。從攻下宛、穰,定十七縣。別將攻旬關,定漢中。

項羽滅秦,立沛公為漢王。漢王賜商爵信成君,以將軍為隴西都尉。別將定北地、上郡。破雍將軍焉氏,周類軍栒邑,蘇駔軍於泥陽。賜食邑武成六千戶。以隴西都尉從擊項籍軍五月,出鉅野,與鐘離眛戰,疾鬬,受梁相國印,益食邑四千戶。以梁相國將從擊項羽二歲三月,攻胡陵。

項羽既已死,漢王為帝。其秋,燕王臧荼反,商以將軍從擊荼,戰龍脫,先登陷陣,破荼軍易下,卻敵,遷為右丞相,賜爵列侯,與諸侯剖符,世世勿絕,食邑涿五千戶,號曰涿侯。以右丞相別定上谷,因攻代,受趙相國印。以右丞相趙相國別與絳侯等定代、鴈門,得代丞相程縱、守相郭同、將軍已下至六百石十九人。還,以將軍為太上皇衛一歲七月。以右丞相擊陳豨,殘東垣。又以右丞相從高帝擊黥布,攻其前拒,陷兩陳,得以破布軍,更食曲周五千一百戶,除前所食,凡別破軍三,降定郡六,縣七十三,得丞相、守相、大將各一人,小將二人,二千石已下至六百石十九人。

商事孝惠、高后時,商病,不治。其子寄,字況,與呂祿善。及高后崩,大臣欲誅諸呂,呂祿為將軍,軍於北軍,太尉勃不得入北軍,於是乃使人劫酈商,令其子況紿呂祿,呂祿信之,故與出游,而太尉勃乃得入據北軍,遂誅諸呂。是歲商卒,謚為景侯。子寄代侯。天下稱酈況賣交也。

孝景前三年,吳、楚、齊、趙反,上以寄為將軍,圍趙城,十月不能下。得俞侯欒布自平齊來,乃下趙城,滅趙,王自殺,除國。孝景中二年,寄欲取平原君為夫人,景帝怒,下寄吏,有罪,奪侯。景帝乃以商他子堅封為繆侯,續酈氏後。繆靖侯卒,子康侯遂成立。遂成卒,子懷侯世宗立。世宗卒,子侯終根立,為太常,坐法,國除。


<역상>
곡주후() 역상()은 고양현() 사람이다. 진승()이 봉기했을 때, 역상은 젊은 사람을 모아 동서로 노략질을 해 수천 명을 모았다. 패공이 토지를 공략하며 진류현()에 이른 지 6개월여 뒤, 역상은 병졸 4천 명을 끌고 기()땅에서 패공에게 귀순했다.

역상은 패공을 따라 장사()를 공격할 때, 성에 가장 먼저 올라갔으므로 신성군()의 작위를 하사했다. 역상은 패공을 따라 구지현()을 공격하고, 황하의 나루터를 봉쇄했으며, 낙양() 동쪽에서 진()의 군대를 격파했다. 패공을 따라 완()과 양()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17현을 평정했다. 역상은 단독으로 군대를 동원해 순관()을 공격하고 한중()을 평정했다.

항우가 진을 멸망시키자 패공이 한왕이 되었다. 한왕은 역상에게 신성군의 작위를 하사하고, 장군으로서 농서(西) 도위()로 삼았다. 역상은 단독으로 군대를 동원해 북지()와 상군()을 평정했다. 언씨()에서 옹()장군을, 순읍()에서 주류()의 군대를, 이양()에서 소장()의 군대를 각각 격파하자, 식읍으로 무성현()의 6천 호를 하사했다. 역상은 농서 도위로서 한왕을 따라 항우를 5개월 공격했고, 거야()로 나가 종리매()와 싸워서 이기자 양() 상국의 인수를 주고, 식읍을 4천 호 더 하사했다. 양의 상국으로서 한왕을 따라 항우를 2년 3개월 공격했고 호릉()에서 격파시켰다.

항우가 죽자, 한왕은 황제가 되었다. 그해 가을, 연왕() 반란을 일으키자, 역상은 장군으로서 한왕을 따라 장도를 공격했고, 용탈현()에서 전투를 했는데, 성에 먼저 올라가 진지를 함락시켰고, 장도의 군대를 역현() 아래에서 격파했다. 적을 물리친 공로로 우승상()으로 승진했고, 열후의 작위를 받고, 제후의 부절을 받아 대대로 이어졌으며, 식읍으로 탁현(涿)의 5천 호를 받았고, 봉호는 탁후(涿)였다.

역상은 우승상 신분으로서 단독으로 상곡()을 평정했고, 그 기세로 대() 땅을 공격해 조의 재상의 인장을 인수했다. 역상은 우승상과 조 재상의 자격을 가지고 단독으로 강후 등과 함께 대()와 안문()을 정벌해 대의 승상 정종()· 임시 재상 곽동(곽)·장군 이하 6백석을 받는 관원 19명을 생포했다. 역상은 귀국해 장군으로서 태상황()을 1년 7개월 동안 호위했다.

역상은 우승상으로 진희()를 공격했고, 동원현()을 몰살시켰다. 역상은 또 우승상 자격으로서 고조를 따라 경포를 치고, 그의 선두 진지를 공략하고 6개 군, 73현을 항복시켰으며, 승상·임시 재상·대장 각 한사람·소장() 두 사람·2천석 이하 6백석까지의 관원 19명을 생포했다.

역상은 효혜제와 여후를 섬겼을 때, 병이 나서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그 아들 역기()는 자()가 황()으로 여록(祿)과 친하게 지냈다. 여후가 서거하자 대신들이 여씨 일족을 주살하려고 했다. 여록은 장군이 되어 북군()에 주둔하고 있었다. 태위() 주발()은 북군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되자, 사람을 시켜 역상을 위협해 그의 아들 역황()에게 여록을 유인 하게 했다. 여록은 그것을 믿고, 그와 함께 외출했고, 태위 주발은 곧바로 북군에 들어가 장악하고 마침내 여씨 일족을 주살했다.

이해에 역상이 죽었고, 경후()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의 아들 역기가 후작의 대를 이었다. 천하의 사람들은 역황이 친구를 팔았다고 수군대었다.

효경제() 3년, 오()·초()·제()·조()가 반란을 일으키자, 고조는 역기를 장군으로 삼아 조의 성을 포위하게 했지만, 10개월 동안 함락시키지 못했다. 유후() 난포()가 제를 평정하고 돌아와서 조의 성을 함락하고, 조를 멸망시켜 왕은 자살하고 봉국이 해제되었다.

효경제 2년, 역기가 평원군()을 부인으로 삼으려고 하자, 경제()가 진노하며 역기를 재판하게 했고, 죄가 드러나자 후작을 박탈했다. 경제는 곧바로 역상의 다른 아들 역견()을 목후()로 책봉해 역씨후()를 계승하도록 했다. 목정후()가 죽자, 그의 아들 강후() 수성()이 계승했다. 수성이 죽자, 그의 아들 회후() 세종()이 계승했다. 세종이 죽고, 아들 종근()이 후작을 계승해 태상()이 되었으나, 죄를 지어 봉국이 해제되었다.


夏侯嬰

汝陰侯夏侯嬰,沛人也。為沛廄司御。每送使客還,過沛泗上亭,與高祖語,未嘗不移日也。嬰已而試補縣吏,與高祖相愛。高祖戲而傷嬰,人有告高祖。高祖時為亭長,重坐傷人,告故不傷嬰,嬰證之。後獄覆,嬰坐高祖系歲餘,掠笞數百,終以是脫高祖。

高祖之初與徒屬欲攻沛也,嬰時以縣令史為高祖使。上降沛一日,高祖為沛公,賜嬰爵七大夫,以為太仆。從攻胡陵,嬰與蕭何降泗水監平,平以胡陵降,賜嬰爵五大夫。從擊秦軍碭東,攻濟陽,下戶牖,破李由軍雍丘下,以兵車趣攻戰疾,賜爵執帛。常以太仆奉車從擊章邯軍東阿、濮陽下,以兵車趣攻戰疾,破之,賜爵執珪。復常奉車從擊趙賁軍開封,楊熊軍曲遇。嬰從捕虜六十八人,降卒八百五十人,得印一匱。因復常奉車從擊秦軍雒陽東,以兵車趣攻戰疾,賜爵封轉為滕公。因復奉車從攻南陽,戰於藍田、芷陽,以兵車趣攻戰疾,至霸上。項羽至,滅秦,立沛公為漢王。漢王賜嬰爵列侯,號昭平侯,復為太仆,從入蜀、漢。

還定三秦,從擊項籍。至彭城,項羽大破漢軍。漢王敗,不利,馳去。見孝惠、魯元,載之。漢王急,馬罷,虜在後,常蹶兩兒欲棄之,嬰常收,竟載之,徐行面雍樹乃馳。漢王怒,行欲斬嬰者十餘,卒得脫,而致孝惠、魯元於豐。

漢王既至滎陽,收散兵,復振,賜嬰食祈陽。復常奉車從擊項籍,追至陳,卒定楚,至魯,益食茲氏。

漢王立為帝。其秋,燕王臧荼反,嬰以太仆從擊荼。明年,從至陳,取楚王信。更食汝陰,剖符世世勿絕。以太仆從擊代,至武泉、雲中,益食千戶。因從擊韓信軍胡騎晉陽旁,大破之。追北至平城,為胡所圍,七日不得通。高帝使使厚遺閼氏,冒頓開圍一角。高帝出欲馳,嬰固徐行,弩皆持滿外向,卒得脫。益食嬰細陽千戶。復以太仆從擊胡騎句注北,大破之。以太仆擊胡騎平城南,三陷陳,功為多,賜所奪邑五百戶。以太仆擊陳豨、黥布軍,陷陳卻敵,益食千戶,定食汝陰六千九百戶,除前所食。

嬰自上初起沛,常為太仆,竟高祖崩。以太仆事孝惠。孝惠帝及高后德嬰之脫孝惠、魯元於下邑之閒也,乃賜嬰縣北第第一,曰「近我」,以尊異之。孝惠帝崩,以太仆事高后。高后崩,代王之來,嬰以太仆與東牟侯入清宮,廢少帝,以天子法駕迎代王代邸,與大臣共立為孝文皇帝,復為太仆。八歲卒,謚為文侯。子夷侯灶立,七年卒。子共侯賜立,三十一年卒。子侯頗尚平陽公主。立十九歲,元鼎二年,坐與父御婢姦罪,自殺,國除。


<하후영>
여음후() 하후영()은 패현() 사람이다. 패현의 마구간 사어()를 지냈다. 매번 사신과 빈객을 전송하고 돌아올 때는 패현의 사상정()을 지나면서 유방과 대화를 나누었는데, 하루를 넘기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얼마 있다가 하후형은 시험 삼아 현을 돕는 아전이 되어 유방과 서로 사이좋게 지냈다. 유방이 하후영을 희롱하다가 상처를 입히니, 어떤 사람이 유방을 고발했다. 유방은 당시에 정장()이었고, 남에게 상처를 입히면 가중처벌을 받게 되었다. 유방은 결코 하후영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았다고 진술했고, 하후영은 이를 증언했다. 나중에 이 사건은 번복되었고 하후영은 유방의 죄에 연루되어 1년여 동안 수감되었고, 수백 대의 매질을 당했다. 결국 유방은 이 때문에 사건에서 벗어났다.



유방이 처음 노역자들과 함께 패현을 공격하려고 했을 때, 하후영은 현령의 부관으로서 유방의 사신 역할을 했다. 유방은 패현을 하루 만에 항복시키고 패공이 되자 하후영에게 칠대부()의 작위를 하사하고 태복()을 삼았다. 하후영이 패공을 따라 호릉()을 공격했을 때, 하후영이 소하()와 함께 사수군()의 군감() 평()을 항복시키자, 평은 호릉을 가지고 투항했다. 이 공로로 하후영에게 오대부()의 작위를 하사했다. 그는 또 패공을 따라 탕현()에서 진() 군대를 공격했고, 제양현()을 공략했으며, 호향()을 항복시켰고, 옹구() 아래에서 이유()의 군대를 격파했다. 전차로 질주하면서 치열하게 전투를 벌인 공로로 집규()의 작위를 하사받았다.

또한 일찍이 패공을 수레에 모시고 개봉()에서 조분()의 군대를, 곡우()에서 양웅()의 군대를 공격했다. 하후영은 포로 68명을 잡고, 군졸 850명을 항복시켰으면, 인장 한 상자를 노획했다. 그 뒤에 패공을 수레에 모시고 낙양동쪽에서 진() 군대를 공격했을 때, 전차로 질주하면서 치열하게 전투를 벌인 공로로 등공()의 작위를 받았다. 그 뒤에 수레에 패공을 모시고 남양()을 공격했고, 남전현()과 지양현()에서 전투를 할 때, 전차로 질주하면서 치열하게 전무를 벌이면서 패상에 이르렀다.

항우가 도착해 진()을 멸망시키고, 패공을 한왕에 봉했다. 한왕은 하후영에게 열후의 작위를 내리고, 봉호를 소평후()라고 했다. 그는 다시 태복이 되어 촉()·한() 지역으로 한왕을 따라 돌아갔다.

하후영은 귀국해 삼진()을 평정하고, 한왕을 따라 항우를 공격했다. 한왕은 패하여 불리하자 급히 달아나다가 효혜()와 노원()을 발견하고 수레에 실었다. 한왕은 사태가 다급하고, 말이 지쳐있고, 적이 뒤에서 추격해오자 두 아이를 발로 차서 버리려고 했다. 하후영이 수래 아래에서 이들을 받아 겨우 싣고, 느릿느릿 달리다가 두 자녀가 포옹할 수 있게 되자 곧바로 치달렸다.

한왕은 진노하여, 가다가 하후영을 10여 차례 참수하려고 했다. 마침내 탈출해 효혜와 노원을 풍()으로 보냈다.

한왕은 형양()에 도착해, 흩어진 병사를 규합하고 다시 세력을 회복하자, 하후영에게 기양()을 식읍으로 하사했다. 그는 다시 한왕을 수레에 모시고 항우를 공격했는데, 진현()까지 추격했고, 마침내 초() 지방을 평정했다. 하후영은 노() 땅으로 돌아갔고, 자지현()의 식읍을 더 받았다.

한왕이 황제에 즉위했다. 그해 가을, 연왕() 장도가 반란을 일으키자, 하후영은 태복으로서 고조를 따라 장도를 공격했다. 다음해에 고조를 따라 진() 땅에 도착해 초왕() 신()을 체포했다. 고조는 하후영에게 다시 여음현()을 식읍으로 하사했고, 부절을 내려 대대로 계승하게 했다.

하후영은 태복의 자격으로 고조를 따라 대() 땅을 공격하면서, 무천()과 운중()에 까지 이른 공로로 식읍 1천 호를 더 받았다. 고조를 따라 진양현() 부근에 있던 한신()의 군대의 흉노 기마병을 공격해 크게 무찔렀다. 계속 패잔병을 추격해 평성현()에 이르렀다가 흉노에게 포위되어 7일 동안 연락이 두절되었다. 고조가 사신을 시켜 연지()에게 후한 예물을 보내자, 묵돌()이 한쪽 포위망을 해제 했다. 고조는 포위망을 벗어나 달아나려고 했지만, 하후영은 일부러 천천히 걸으면서 쇠뇌를 마음껏 당겨 밖으로 향하게 해 마침내 탈출할 수 있었다. 그 공로로 세양현()의 1천 호를 식읍으로 더 받았다. 다시 태복으로서의 고조를 따라 구주산() 북쪽에서 흉노의 기마병을 공격해 대파했다.

태복의 자격으로 평성현 남쪽에서 흉노의 기마병을 공격해 진지를 세 차례 함락시켰는데, 공로가 많아 빼앗은 읍의 5백 호를 받았다. 태복으로서 진회와 경포의 군대를 공격해 진지를 함락시키고 적을 물리쳐 1천 호의 식읍을 더 받았으며, 여음현()의 6천 9백 호의 식읍을 확정하고 이전의 식읍은 반납했다.

하후영은 유방이 처음 패현에서 봉기할 때부터 서거할 때까지 항상 태복의 자리에 있었고, 태복으로서 효혜제까지 섬겼다.

효혜제와 고후는 하후영이 하읍현()에서 효혜제와 노원공주까지 탈출시킨 것에 감사해 하후영에게 궁궐 북쪽에 제일 훌륭한 저택을 지어주면서 “가깝게 지냅시다.”라고 말하고, 그를 각별히 존중했다.

효혜제가 서거하자, 하후영은 태복으로서 고후를 섬겼다. 고후가 서거하고, 대왕()이 들어오게 되자, 하후영은 태복으로서 동모후()와 함께 궁중으로 들어가 잔당을 말끔히 정리하고 소제()를 폐위시켰으며, 천자의 어가를 가지고 대왕()을 대저(, 관저의 이름)에서 영접했고, 대신들과 함께 효문황제()을 세웠으며, 다시 태복이 8년 뒤에 하후영이 죽었다. 그의 시호는 문후()였다.

그의 아들 이후() 조()가 계승했는데, 7년 뒤에 죽었다. 조의 아들 공후() 사()가 작위를 계승했고, 31년 뒤에 죽었다. 사의 아들 파()는 평양공주()와 결혼했다. 작위를 계승한 지 19년 뒤인 원정() 2년, 그는 부친의 하녀와 간통죄에 연루되어 자살했고, 봉국도 없어졌다.


灌嬰

潁陰侯灌嬰者,睢陽販繒者也。高祖之為沛公,略地至雍丘下,章邯敗殺項梁,而沛公還軍於碭,嬰初以中涓從擊破東郡尉於成武及秦軍於扛裏,疾鬬,賜爵七大夫。從攻秦軍亳南、開封、曲遇,戰疾力,賜爵執帛,號宣陵君。從攻陽武以西至雒陽,破秦軍尸北,北絕河津,南破南陽守齮陽城東,遂定南陽郡。西入武關,戰於藍田,疾力,至霸上,賜爵執珪,號昌文君。

沛公立為漢王,拜嬰為郎中,從入漢中,十月,拜為中謁者。從還定三秦,下櫟陽,降塞王。還圍章邯於廢丘,未拔。從東出臨晉關,擊降殷王,定其地。擊項羽將龍且、魏相項他軍定陶南,疾戰,破之。賜嬰爵列侯,號昌文侯,食杜平鄉。

復以中謁者從降下碭,以至彭城。項羽擊,大破漢王。漢王遁而西,嬰從還,軍於雍丘。王武、魏公申徒反,從擊破之。攻下黃,西收兵,軍於滎陽。楚騎來眾,漢王乃擇軍中可為(車)騎將者,皆推故秦騎士重泉人李必、駱甲習騎兵,今為校尉,可為騎將。漢王欲拜之,必、甲曰:「臣故秦民,恐軍不信臣,臣願得大王左右善騎者傅之。」灌嬰雖少,然數力戰,乃拜灌嬰為中大夫,令李必、駱甲為左右校尉,將郎中騎兵擊楚騎於滎陽東,大破之。受詔別擊楚軍後,絕其餉道,起陽武至襄邑。擊項羽之將項冠於魯下,破之,所將卒斬右司馬、騎將各一人。擊破柘公王武,軍於燕西,所將卒斬樓煩將五人,連尹一人。擊王武別將桓嬰白馬下,破之,所將卒斬都尉一人。以騎渡河南,送漢王到雒陽,使北迎相國韓信軍於邯鄲。還至敖倉,嬰遷為御史大夫。

三年,以列侯食邑杜平鄉。以御史大夫受詔將郎中騎兵東屬相國韓信,擊破齊軍於歷下,所將卒虜車騎將軍華毋傷及將吏四十六人。降下臨菑,得齊守相田光。追齊相田橫至嬴、博,破其騎,所將卒斬騎將一人,生得騎將四人。攻下嬴、博,破齊將軍田吸於千乘,所將卒斬吸。東從韓信攻龍且、留公旋於高密,卒斬龍且,生得右司馬、連尹各一人,樓煩將十人,身生得亞將周蘭。

齊地已定,韓信自立為齊王,使嬰別將擊楚將公杲於魯北,破之。轉南,破薛郡長,身虜騎將一人。攻(博)[傅]陽,前至下相以東南僮、取慮、徐。度淮,盡降其城邑,至廣陵。項羽使項聲、薛公、郯公復定淮北。嬰度淮北,擊破項聲、郯公下邳,斬薛公,下下邳,擊破楚騎於平陽,遂降彭城,虜柱國項佗,降留、薛、沛、酂、蕭、相。攻苦、譙,復得亞將周蘭。與漢王會頤鄉。從擊項籍軍於陳下,破之,所將卒斬樓煩將二人,虜騎將八人。賜益食邑二千五百戶。

項籍敗垓下去也,嬰以御史大夫受詔將車騎別追項籍至東城,破之。所將卒五人共斬項籍,皆賜爵列侯。降左右司馬各一人,卒萬二千人,盡得其軍將吏。下東城、歷陽。渡江,破吳郡長吳下,得吳守,遂定吳、豫章、會稽郡。還定淮北,凡五十二縣。

漢王立為皇帝,賜益嬰邑三千戶。其秋,以車騎將軍從擊破燕王臧荼。明年,從至陳,取楚王信。還,剖符,世世勿絕,食潁陰二千五百戶,號曰潁陰侯。

以車騎將軍從擊反韓王信於代,至馬邑,受詔別降樓煩以北六縣,斬代左相,破胡騎於武泉北。復從擊韓信胡騎晉陽下,所將卒斬胡白題將一人。受詔并將燕、趙、齊、梁、楚車騎,擊破胡騎於硰石。至平城,為胡所圍,從還軍東垣。

從擊陳豨,受詔別攻豨丞相侯敞軍曲逆下,破之,卒斬敞及特將五人。降曲逆、盧奴、上曲陽、安國、安平。攻下東垣。

黥布反,以車騎將軍先出,攻布別將於相,破之,斬亞將樓煩將三人。又進擊破布上柱國軍及大司馬軍。又進破布別將肥誅。嬰身生得左司馬一人,所將卒斬其小將十人,追北至淮上。益食二千五百戶。布已破,高帝歸,定令嬰食穎陰五千戶,除前所食邑。凡從得二千石二人,別破軍十六,降城四十六,定國一,郡二,縣五十二,得將軍二人,柱國、相國各一人,二千石十人。

嬰自破布歸,高帝崩,嬰以列侯事孝惠帝及呂太后。太后崩,呂祿等以趙王自置為將軍,軍長安,為亂。齊哀王聞之,舉兵西,且入誅不當為王者。上將軍呂祿等聞之,乃遣嬰為大將,將軍往擊之。嬰行至滎陽,乃與絳侯等謀,因屯兵滎陽,風齊王以誅呂氏事,齊兵止不前。絳侯等既誅諸呂,齊王罷兵歸,嬰亦罷兵自滎陽歸,與絳侯、陳平共立代王為孝文皇帝。孝文皇帝於是益封嬰三千戶,賜黃金千斤,拜為太尉。

三歲,絳侯勃免相就國,嬰為丞相,罷太尉官。是歲,匈奴大入北地、上郡,令丞相嬰將騎八萬五千往擊匈奴。匈奴去,濟北王反,詔乃罷嬰之兵。後歲餘,嬰以丞相卒,謚曰懿侯。子平侯阿代侯。二十八年卒,子彊代侯。十三年,彊有罪,絕二歲。元光三年,天子封灌嬰孫賢為臨汝侯,續灌氏後,八歲,坐行賕有罪,國除。


<관영>
영음후() 관영()은 수양현()에서 비단을 파는 사람이었다. 고조가 패공이 되어 각지를 공략하며 옹구() 일대에 이르렀을 때, 장한이 항량()을 격파하고 죽이자, 패공은 탕현()으로 회군했다.

관영은 당포 중연()로서 패공을 따라 성무()에서 동군()의 군위()를, 강리()에서 진()의 군대를 각각 격파했다. 치열하게 전투를 벌인 공로로 칠대부()의 작위를 받았다. 관영은 패공을 따라 박()의 남쪽·개봉()·곡우()에서 진의 군대를 공격했는데,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공로로 집백()의 작위를 받았고, 선릉군()이라고 불렀다.

패공을 따라 양무() 서쪽에서 낙양에 이르기까지 공략해, 진의 군대를 시() 북쪽에서 격파하고 북쪽으로 황하의 나루를 봉쇄했으며, 남쪽으로는 남양() 군수인 여의()를 양성() 동쪽에서 격파해 마침내 남양군을 평정했다. 또한 서쪽 무관()으로 진입해 남전()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패상()에 이른 공로로 집규()의 작위의 받았으며, 창문군()이라고 불렀다.

패공이 한왕으로 즉위해 관영을 낭중()에 제수하자, 관영은 한왕을 따라 한중()으로 진입했으며, 10개월 사이에 다시 중알자()에 제수되었다. 한왕을 따라 회군해 삼진()을 평정하고, 역양()을 함락시켰으며, 새왕()을 항복시켰다. 관영은 돌아와 폐구()에서 장한을 포위했으나,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다시 한왕을 따라 동쪽으로 임진관()을 경유해 은왕()을 공격해 항복시키고 그 땅을 평정했다. 정도() 남쪽에서 항우의 장군 용저()와 위() 재상 항타()의 군대를 공격했고, 치열한 전투를 벌여 이들을 격파했다. 그 공로로 열후의 작위를 받았고, 창문후()라고 불렀으며, 두현()의 평향()을 식읍으로 받았다.

관영은 다시 중알자로서 한왕을 따라 탕현을 항복시키고, 팽성에 도착했다. 항우가 한왕을 공격해 대파했다.

한왕이 서쪽으로 달아나자, 관영은 한왕을 따라 회군해 옹구에 주둔했다. 왕무()와 위공() 신도()가 반란을 일으키자, 관영은 한왕을 따라 그들을 격파했으며, 하황현()을 공격했고, 서쪽으로 병사들을 수습해 형양()에 주둔했다. 초의 기병대가 많이 밀려와 한왕이 군중()에서 기병대 장군을 뽑으려고 하자 모두가 옛 진의 기사로서 중천() 사람인 이필()과 낙갑()이 기마에 익숙하고 현재 교위()로 있기 때문에 기마 대장으로 삼을 만하다고 추천했다.

한왕이 그들을 임명하려고 하니, 이필과 낙갑이 “신들은 옛 진의 백성들이니, 아마도 군인들이 신들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대왕의 측근에서 기마에 능한 사람이 선발되면 신들이 그분을 보좌하게 해주십시오.”라고 말했다. 한왕은 관영이 비록 나이가 어렸지만 그가 여러 차례 치열한 전투 경험이 있으므로 곧바로 관영을 중대부()로 임명했고, 이필과 노갑은 좌우 교위()를 맡도록 했다.

관영은 낭중의 군대를 거느리고 형양 동쪽에서 초의 기병대를 공격해 대파했다. 관영은 조서를 받고 단독으로 초의 군대 후방을 공격해, 그들의 군량 보급선을 차단하고, 양무에서 출발해 양읍()에 이르렀다.

관영은 노현() 일대에서 항우의 장군 항관()을 공격해 무찔렀고, 그 휘하의 사병이 우사마()와 기병대장 각각 한사람씩의 머리를 베었다. 관영은 자공() 왕무()를 공격하고 연()땅 서쪽에 주둔했는데, 그 휘하의 장졸들이 누번()의 장군 5명과 연윤() 한 명을 참수했다.

관영은 백마현() 일대에서 왕무의 별동대장 환영(영)을 공격해 무찔렀는데, 그 휘하의 장졸이 도위() 한 사람을 참수했다. 관영은 기마병을 이끌고 황하 남쪽을 건너 한왕을 낙양으로 전송했고, 사신으로 북쪽 한단()에 도착해 재상 한신의 군대를 영접했다. 관영은 오창()으로 돌아와 어사대부()로 승진했다.

3년 뒤, 관영은 열후로서 두현()의 평향()을 식읍으로 받았다. 관영은 어사대부로서 조서를 받고 낭중의 기마병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재상 한신에 예속되어 역성() 일대에서 제() 군대를 격파했으며, 그 휘하의 장졸이 거기장군() 화무상()과 장리() 46명을 포로로 잡았다.

전영은 임치()를 함락시키고 제 임시 재상 전광()을 생포했고, 제 재상 전횡()을 추격해 영()과 박()에 이르러 그의 기마부대를 격파했으며, 휘하의 병사가 기마대장 중 1명을 참수하고 4명을 생포했다.

관영은 영과 박을 공격해 천승현()에서 제 장군 전흡()을 격파했고, 그의 휘하 병사가 전흡을 참수했다. 관영은 동쪽으로 한신을 따라 고밀현()에서 용저와 유공() 선()을 공격했는데, 휘하의 병사가 용저를 참수하고 우사마와 연윤 각각 한 사람씩과 누번의 장군 10명을 생포하고, 그 자신은 부대장 주란()을 생포했다.

제 땅이 이미 평정되자, 한신은 스스로 제왕()이 되어 관영을 별동대장으로 삼아 노() 북쪽에서 초 장군 공고()를 공격해 무찌르도록 했다. 관영은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설군()의 군장()을 격파했으며, 자신은 기병대장 한 사람을 포로로 잡았다. 관영은 부양()을 공격하고, 더 전진해 하상()과 그 동남쪽으로 동()·취려()·서()에 이르렀다. 관영은 회수()를 건너 그 성읍()을 모두 항복시키고 광릉()에 이르렀다.

항우는 항성()·설공()·담공()을 시켜 다시 회수 북쪽을 평정하게 했다. 관영은 회수 북쪽을 하비()에서 항성과 담동을 격파했고, 설공을 참수했으며, 하비를 항복시켰으며, 평양()에서 초의 기마병을 격파하고 마침내 팽성을 함락시켰고, 주국()인 항타를 포로로 잡고 유()·설()·패()·찬()·소()·상()을 항복시켰다.

관영은 고()와 초()를 공격해 다시 부대장 주란을 체포했다. 관영은 한왕과 함께 이향()에서 회동해, 한왕을 따라 진성() 아래에서 항우의 군대를 공격해 격파했는데, 휘하의 장졸이 누번의 장군 2명을 참수했고, 기병대장 8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 공로로 2천 5백 호의 식읍을 더 받았다.

항우가 해하() 전투에서 패하고 달아나자, 관영은 어사대부로서 조서를 받고 단독으로 기마병을 동원해 항우를 동성()까지 추격해 격파했다. 휘하의 병사 5명이 함께 항우를 참수해 모두에게 열후의 작위가 내려졌다. 관영은 좌우 사마 각각 한 사람씩과 병졸만 2천 명을 항복시켰고, 그 장리()를 모두 체포했다. 관영은 동성()과 역양()을 함락시켰다. 관영은 양자장을 건너 오군()의 군장()을 격파했고, 오군()의 성 아래에서 오군의 군수를 생포했고, 마침내 오군· 예장군()·회계군()을 평정했다. 관영은 귀국해 회북() 지역의 52현을 평정했다.

한왕은 황제에 즉위하자, 관영에게 3천 호의 식읍을 더 하사했다. 그해 가을, 관영은 거기장군으로서 고조를 따라 연왕 장도()를 공격했다.

그 다음해, 고조를 따라 진() 땅에 이르러 초왕() 신()을 체포했다. 귀국하자, 고조는 부절을 하사해 대대로 계승하게 했으며, 영음(영) 땅 2천 5백 호의 식읍을 하사하고 영음후()라고 불렀다.

관영은 거기장군으로서 고조를 따라 한왕() 신()을 대() 땅에서 공격했고 마읍()에 도착해 조서를 받고 단독으로 누번()에서부터 북쪽의 6개현을 함락시켰고, 대()의 좌상()을 참수했으며, 무천() 북쪽에서 흉노의 기마병을 격파했다. 다시 고조를 따라 진양() 일대에서 한신의 흉노 기마병을 공격했을 때, 휘하의 장졸들이 흉노족의 백제() 장군 한 사람을 참수했다. 관영은 조서를 받고 연()·조()·제()·양()·초()의 기마 전차부대를 병합해 이끌고 사석()에서 흉노의 기마병을 격파했다. 평성()에 이르렀을 때 흉노에게 포위되었다가 고조를 따라 동원()으로 회군했다.

고조를 따라 진희()를 공격했고, 조서를 받고 단독으로 곡역() 아래에서 진희의 승상인 후창()의 군대를 공격해 물리쳤는데, 휘하의 사병이 후창과 특장() 5명을 참수했고, 곡역()·노노()·상곡양()·안국()·안평()을 항복시켰다. 동원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경포가 반락을 일으키자, 관영은 거기장군으로서 먼저 나아가 상()에서 경포의 별동대장을 공격해 무찔렀고, 부대장과 누번의 장수 3명을 참수했다.

또한 진격하여 경포의 상주국()과 대사마()의 군대를 격파했다. 또 진격해 경포의 별동대장 비주()를 격파했다. 관영은 좌사마 한 사람을 생포했고, 휘하의 장졸들이 10명의 소대장을 참수하면서 북쪽으로 회수까지 추격했다. 그 공로로 2천 5백 호의 식읍을 더 받았다. 경포를 격파하고 나서, 고조는 귀국해 관영의 영음 땅 5천 호의 식읍을 확정하고 이전의 식읍을 해제했다.

고조를 따라 2천 석을 받는 관원 2명을 체포하과, 따로 16개의 군대를 격파했으며, 46성을 함락시켰고, 1개 국(), 2개 군(), 52현을 평정했으며, 장군 2명, 주국과 재상 각 1명, 2천 석을 받는 관원 10명을 체포했다.

관영이 경포를 격파하고 귀국했을 때, 고조가 붕어했다. 관영은 열후의 신분으로 효혜제와 여태후를 섬겼다. 태후가 붕어하자, 여록(祿) 등이 조왕()의 신분으로 스스로 장군이 되어 장안에 주둔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제 애왕()이 이 소식을 듣고, 군대를 동원해 서쪽으로 진격해 장차 왕이 될 수 없는 자를 죽이려고 했다. 상장군() 여록 등이 이 소문을 듣고, 곧 관영을 대장으로 삼아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그들을 치도록 했다. 관영은 출정해 형양에 이르자, 강후() 등과 모의해 형양에서 병사를 주둔시켰다. 또 제왕()에게 여씨를 죽일 것이라는 소문을 퍼트려 제의 군대가 더 이상 전진하지 않았다. 강후 등이 여씨 일족을 죽이자, 제왕은 군대를 거두어 돌아갔고, 관영 역시 철수해 형양에서 귀국한 뒤 강후·진평과 함께 대왕()을 효문 황제로 세웠다. 효문 황제는 이에 관영에게 3천 호의 식읍을 더 책봉하고, 황금 1천 근을 하사했으며, 태위()에 제수했다.

3년 후, 강후 주발()이 승상을 그만하고 봉국으로 돌아가자, 관영이 승상이 되어, 태위 벼슬을 그만두었다.

이해, 흉노들이 대대적으로 북지()와 상군()으로 침입하자, 황제는 승상 관영에게 기마병 8만 5천 명을 거느리고 가서 흉노를 공격라고 명령했다. 흉노가 퇴각하고, 제북왕()이 반란을 일으키자 조서를 내려 관영의 흉노 정벌을 멈추게 했다. 1년여가 지난 뒤에 관영이 승상 벼슬에 있다가 죽자 의후()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아들 평후() 관아()가 후작을 계승했다.

그가 28년 뒤에 죽자, 아들 관강()이 후작을 계승했다. 13년 뒤에 관강이 죄를 지어 2년 동안 후작 계승이 단절되었다. 원광() 3년, 천자가 관영의 손자 관현()을 임여후()로 삼고, 관씨() 후대를 계승하게 했다. 8년 뒤에 관현이 수뢰죄에 연루되어 처벌되자 봉국은 없어졌다.


評論

太史公曰:吾適豐沛,問其遺老,觀故蕭、曹、樊噲、滕公之家,及其素,異哉所聞!方其鼓刀屠狗賣繒之時,豈自知附驥之尾,垂名漢廷,德流子孫哉?余與他廣通,為言高祖功臣之興時若此云。

【索隱述贊】聖賢影響,雲蒸龍變。屠狗販繒,攻城野戰。扶義西上,受封南面。酈況賣交,舞陽內援。滕灌更王,奕葉繁衍。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패현()의 풍읍()에 가서 그곳 노인들에게 묻고, 옛날 소하()·조참()·번쾌()·등공()의 집과 그들의 평소 사람됨을 살펴보니, 들은 바와 달랐다.

그들이 칼을 휘두르며 개를 잡고 비단을 팔고 있었을 때, 어찌 준마의 꼬리에 붙어 한의 조정에 이름을 드날리고 날리고 은덕이 자손까지 내려 갈 것을 알았겠는가? 나는 번타광()과 교류했는데, 그는 나에게 고조의 공신들이 일어났을 때 이와 같았다고 말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