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四一. 越王句踐世家
越王句践, 其先禹之苗裔,1) 而夏后帝少康之庶子也. 封於会稽, 以奉守禹之祀. 文身断髪, 披草莱而邑焉. 後二十余世, 至於允常.2) 允常之時, 與呉王闔廬戦而相怨伐. 允常卒, 子句践立, 是為越王.
元年, 呉王闔廬聞允常死, 乃興師伐越. 越王句践使死士挑戦, 三行, 至呉陳, 呼而自剄. 呉師観之, 越因襲撃呉師, 呉師敗於檇李,3) 射傷呉王闔廬. 闔廬且死, 告其子夫差曰:「必毋忘越.」
월왕(越王) 구천(句踐)의 조상은, 하후(夏后)의 임금 소강(少康)의 서자로서 우(禹)임금의 자손이다. 그의 선조는 회계(會稽) 땅에 봉해졌고, 우임금의 제사를 모셨다. 그들은 몸에 문신을 하고 머리를 짧게 잘랐으며, 초목을 제거하고 황무지를 개척해 도읍을 건설했다. 이때로부터 20여 대가 흘러 윤상(允常)의 시대에 이르렀다. 윤상이 왕으로 있을 때, 오왕(吳王) 합려(闔廬)와 싸우게 되니 그들은 서로 미워해 공격했다. 윤상이 죽고 아들 구천이 즉위하니, 그가 곧 월왕이다.
월왕 구천 원년(기원전 496년)에, 오왕 합려는 윤상이 죽은 것을 알고는 군사를 일으켜 월나라를 공격했다. 구천이 죽기를 각오한 병사들로 하여금 싸우게 하니, 그들은 세 줄을 이루어 오나라의 진영에 이르러 크게 외치고 자살했다. 오나라 군대가 쳐다만 보고 있는 사이 월나라의 군대는 그들을 습격해 취리(檇李)에서 물리치고, 오왕 합려를 쏘아 상처를 입혔다. 합려가 죽으려 할 때 그 아들 부차(夫差)를 불러, “월나라를 잊지 말라.”고 당부했다.
三年, 句践聞呉王夫差日夜勒兵, 且以報越, 越欲先呉未発往伐之. 范蠡諫曰:「不可. 臣聞兵者凶器也, 戦者逆徳也, 争者事之末也. 陰謀逆徳, 好用凶器, 試身於所末, 上帝禁之, 行者不利.」越王曰:「吾已決之矣.」遂興師. 呉王聞之, 悉発精兵撃越, 敗之夫椒.4) 越王乃以余兵五千人保棲於会稽.5) 呉王追而囲之.
구천 3년에, 오왕 부차가 밤낮으로 군대를 훈련시켜 월나라에 복수하려 한다는 것을 듣고, 오나라가 군대를 일으키기 전에 선수를 쳐서 토벌하려고 했다. 이에 범려(范蠡)가 다음과 같이 간했다. “안 됩니다. 제가 듣기로 무기는 사람을 죽이는 흉기이고, 전쟁은 도리를 거스르는 것으로서 모든 일 중에서 가장 저급한 것입니다. 음모를 꾸며 도리를 거스르고, 흉기를 사용하기를 즐겨 전쟁에 친히 관여하시려 함은 하늘도 허락하지 않는 것으로서, 행해도 이득이 없습니다.” 구천은 “내가 이미 결정했다.”라고 말하면서, 즉시 군사를 일으켰다. 부차는 이 소식을 듣고, 정예 병사를 모두 동원해 월나라 군사를 부초산(夫椒山)에서 패퇴시켰다. 이에 구천은 남은 병사 5,000명을 후퇴시켜 회계산(會稽山)을 지키게 했는데, 부차는 추격해 그들을 포위했다.
越王謂范蠡曰:6)「以不聴子故至於此, 為之柰何?」蠡対曰:「持満者與天,7) 定傾者與人,8) 節事者以地.9) 卑辞厚礼以遺之, 不許, 而身與之市.」10)句践曰:「諾.」乃令大夫種行成於呉,11) 膝行頓首曰:「君王亡臣句践使陪臣種敢告下執事:句践請為臣, 妻為妾.」呉王将許之. 子胥言於呉王曰:「天以越賜呉, 勿許也.」種還, 以報句践. 句践欲殺妻子, 燔宝器, 触戦以死. 種止句践曰:「夫呉太宰嚭貪, 可誘以利, 請閒行12)言之.」於是句践以美女宝器令種閒献呉太宰嚭.13) 嚭受, 乃見大夫種於呉王. 種頓首言曰:「願大王赦句践之罪, 尽入其宝器. 不幸不赦, 句践将尽殺其妻子, 燔其宝器, 悉五千人触戦, 必有當也.」14)嚭因説呉王曰:「越以服為臣, 若将赦之, 此国之利也.」呉王将許之. 子胥進諫曰:「今不滅越, 後必悔之. 句践賢君, 種、蠡良臣, 若反国, 将為亂.」呉王弗聴, 卒赦越, 罷兵而帰.
구천은 범려에게, “그대의 말을 듣지 않아 이 지경에 빠졌소. 어찌해야 좋단 말이오?”라고 하자, 범려가 대답하기를, “충만함을 지속하려면 하늘의 도리를 본받아야 하고, 넘어지려는 것을 안정시키고자 하면 사람의 도리를 알아야 하며, 사리를 통제하고자 하면 땅의 이치를 본받아야 합니다. 겸허한 말과 두둑한 예물을 갖추어 그에게 보내십시오. 만약 그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왕께서 스스로 볼모가 되어 그를 섬기십시오.”라 했다. 구천이 대답하기를 “그렇게 하겠소.”라고 말한 후, 대부 문종(文種)으로 하여금 강화를 청하게 했다.
문종은 무릎걸음을 하고 머리를 조아려 말하기를 “임금님의 신하인 구천이 저를 보내어 임금님의 하급관원에게 ‘구천은 신하가 되고, 처는 첩이 되기를 청합니다.’라고 감히 고합니다.”라 했다. 부차가 이를 승낙하려 하자 오자서(伍子胥)가 말하기를 “하늘이 월나라를 우리 오나라에 주는 것이니, 응낙하지 마십시오.”라 했다. 문종이 돌아와 구천에게 이를 보고하자, 구천은 생각하기를 부인과 자녀는 죽이고 보물은 불태운 다음 죽음을 무릅쓰고 항전하려 했다. 문종은 구천을 제지하며 이렇게 말했다. “오나라의 태재(太宰) 백비(伯嚭)는 탐욕스러운 사람이라 뇌물으로써 그를 유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몰래 이를 알리십시오.” 이에 구천은 문종을 시켜 미녀와 보물을 은밀히 백비에게 주니, 그는 문종을 부차에게 알현시켜 주었다.
문종은 머리를 조아려 말하기를 “원컨대 대왕께서는 구천의 죄를 사해 주시고, 보물을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불행하게도 사해 주시지 않으면, 구천은 부인과 자식을 죽이고 보물을 불태운 후 5,000의 병사로서 결전을 할 터인즉, 반드시 대왕께서는 상당한 피해를 입게 될 것입니다.”라 했다. 백비가 부차에게, “월나라가 이미 신하로 항복하니, 사해 주시면 이는 나라의 이익이 됩니다.”라고 권하자, 부차는 이를 허락하려 했다. 오자서가 간해 말하기를 “지금 월나라를 멸하지 않으면, 후에 반드시 후회하게 됩니다. 구천은 어진 왕이고, 범려와 문종은 훌륭한 신하입니다. 만약 지금 그들을 월나라로 돌려보낸다면, 틀림없이 반란을 일으킬 것입니다.”라 했다. 부차는 이를 듣지 않고 마침내 구천을 사해 주었고, 철병해 돌아갔다.
句践之困会稽也, 喟然嘆曰:「吾終於此乎?」種曰:「湯繋夏台, 文王囚羑里, 晉重耳奔翟, 斉小白奔莒, 其卒王霸. 由是観之, 何遽不為福乎?」
呉既赦越, 越王句践反国, 乃苦身焦思, 置胆於坐, 坐臥即仰胆, 飲食亦嘗胆也. 曰:「女忘会稽之恥邪?」身自耕作, 夫人自織, 食不加肉, 衣不重采, 折節下賢人, 厚遇賓客, 振貧弔死,15) 與百姓同其勞. 欲使范蠡治国政, 蠡対曰:「兵甲之事, 種不如蠡;填16)撫国家, 親附百姓, 蠡不如種.」於是挙国政属大夫種, 而使范蠡與大夫柘稽17)行成, 為質於呉. 二歳而呉帰蠡.
구천이 회계산에 포위되어 있을 때 탄식해 말하기를 “나는 이렇게 끝나는가?”라고 하자, 문종은 이와 같이 말했다. “탕(湯)은 하대(夏臺)에 갇히었고 문왕(文王)은 유리(羑里)에 구속되었습니다. 중이(重耳)는 적(翟)나라로 도망쳤고, 소백(小白)은 거(莒)나라로 도망쳤습니다만, 그들은 모두 천하를 얻었습니다. 이를 볼 때, 지금 이 상황 역시 복이 되지 말란 법이 있습니까?”
부차가 구천을 사면해 주자 구천은 월나라로 돌아가서, 고통을 받으며 고심을 하는데, 자리 옆에 쓸개를 매달아놓고서, 앉아 있거나 누워 있거나 간에 이를 쳐다보며, 음식을 먹을 때도 이것을 핧곤 했다. 스스로에게 말하기를, “너는 회계산에서의 치욕을 잊지 않았겠지?”라 했다. 스스로 밭을 갈고, 부인은 길쌈을 하며, 음식으로는 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의복은 이중으로 된 옷을 입지 않았다. 자세를 낮추어 어진 이를 공경하고, 손님을 후하게 접대하며, 가난한 사람을 돕고 죽은 자를 애도하며 백성과 함께 수고를 같이했다. 범려에게 국정을 맡기려 하자, 범려가 말하기를 “군사의 일이라면, 제가 문종보다 낫습니다. 그러나 국가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따르게 하는 일은 문종이 더 뛰어납니다”라 했다. 그래서 국정을 문종에게 맡기고, 범려와 대부 자계(柘稽)를 보내 강화를 맺고 오나라에 인질로 남게 했다. 2년이 지나자 오나라는 범려 등을 보내주었다.
句践自会稽帰七年, 拊循其士民, 欲用以報呉. 大夫逢同18)諫曰:「国新流亡, 今乃复殷給, 繕飾備利, 呉必懼, 懼則難必至. 且鷙鳥之撃也, 必匿其形. 今夫呉兵加斉、晉, 怨深於楚、越, 名高天下, 実害周室, 徳少而功多, 必淫自矜. 為越計, 莫若結斉, 親楚, 附晉, 以厚呉. 呉之志広, 必軽戦. 是我連其権, 三国伐之, 越承其弊, 可克也.」句践曰:「善.」
구천이 회계산에서 돌아온 지 7년 되던 해에, 군대와 백성을 훈련시켜 오나라에 복수하려 했다. 대부 봉동(逢同)이 간해 말하기를 “나라가 망했다가 이제서야 조금 나아졌습니다. 우리가 군대를 정돈하면, 오나라는 반드시 두려워할 것입니다. 그들이 두려워하면 재난은 반드시 닥치게 되어 있습니다. 매나 수리와 같은 사나운 새는 습격을 할 때 자신의 모습을 감추는 법입니다. 지금 오나라는 제나라와 진(晉)나라를 치고 있으며, 초 나라와 월나라에 깊은 원한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이름은 천하에 떨치고 있으나, 실제로는 주 왕실을 해하고 있습니다. 덕은 적은데 무력으로 이룬 공이 많아 틀림없이 자만에 빠져 있을 것입니다.
우리 나라를 위해서 계략을 도모하자면, 제나라와 교류를 하고 초 나라와 친하게 지내며, 진(晉)나라에 의지하고 오나라를 후하게 받드는 것이 좋습니다. 오나라가 야심이 커지면 틀림없이 경솔하게 전쟁을 도발할 것입니다. 이렇다면 우리는 제, 초, 진(晉) 나라의 힘을 한데 묶어 이들 세 나라가 오나라를 공격하게 하고, 오나라가 지친 틈을 이용하면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라 했다. 이에 구천은 “좋은 계책이오.”라고 대답했다.
居二年, 呉王将伐斉. 子胥諫曰:「未可. 臣聞句践食不重味, 與百姓同苦樂. 此人不死, 必為国患. 呉有越, 腹心之疾, 斉與呉, 疥■19)也. 願王釈斉先越.」呉王弗聴, 遂伐斉, 敗之艾陵,20) 虜斉高、国21)以帰. 譲子胥. 子胥曰:「王毋喜!」王怒, 子胥欲自殺, 王聞而止之. 越大夫種曰:「臣観呉王政驕矣, 請試嘗之貸粟, 以卜其事.」請貸, 呉王欲與, 子胥諫勿與, 王遂與之, 越乃私喜. 子胥言曰:「王不聴諫, 後三年呉其墟乎!」太宰嚭聞之, 乃數與子胥争越議, 因讒子胥曰:「伍員貌忠而実忍人, 其父兄不顧, 安能顧王? 王前欲伐斉, 員彊諫, 已而有功, 用是反怨王. 王不備伍員, 員必為亂.」與逢同共謀, 讒之王. 王始不従, 乃使子胥於斉, 聞其託子於鮑氏, 王乃大怒, 曰:「伍員果欺寡人!」役反, 使人賜子胥属鏤剣以自殺. 子胥大笑曰:「我令而父霸,22) 我又立若,23) 若初欲分呉国半予我, 我不受, 已, 今若反以讒誅我. 嗟乎, 嗟乎, 一人固不能独立!」報使者曰:「必取吾眼置呉東門, 以観越兵入也!」24)於是呉任嚭政.
2년의 세월이 지나, 부차는 제나라를 치려 했다. 오자서가 간해 말하기를 “안 됩니다. 신이 듣건대, 구천은 음식으로는 두 가지 이상 맛있는 것을 먹지 않으며, 백성과 더불어 고락을 같이한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죽지 않으면 반드시 우리 나라에게 화근이 될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게 월나라는 뱃속의 큰 질병과 같으며, 제나라는 피부병인 옴 정도에 불과합니다. 바라건대, 왕께서는 제나라는 놔두고 우선 월나라를 공격하시기 바랍니다.”라 했다. 부차는 듣지 않고 제나라를 공격해 애릉(艾陵)에서 물리치고, 제나라의 대신 고장(高張)과 국하(國夏)를 포로로 데리고 돌아와서 오자서를 책망했다.
오자서가 “왕께서는 너무 기뻐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하자, 부차는 크게 노했고 이에 오자서는 자결하려 했는데, 이것을 들은 부차가 그를 제지했다. 월나라 대부 문종은 “신이 보건대, 부차는 정치하는 것이 매우 교만합니다. 시험삼아 식량을 빌려달라고 해, 우리 나라에 대한 태도를 짐작해 보십시오.”라 했다. 과연 그들이 식량을 빌려달라고 하자, 부차는 그렇게 하려 하는데, 오자서가 반대를 했다. 그러나 부차는 이내 빌려주니, 구천은 속으로 기뻐했다. 오자서는 말하기를 “왕께서 내 간언을 듣지 않으시는구나. 3년 후에 오나라는 폐허가 될 것이다.”라 했다.
백비는 이를 듣고서 여러 차례 오자서와 함께 월나라를 처리하는 것에 대해 쟁론을 벌였고, 왕에게 그를 참언해 말하기를 “오자서는 밖으로는 충성스러워 보이나, 실제로는 잔인한 사람입니다. 아버지와 형을 돌아보지 않았는데, 어찌 왕을 고려하겠습니까? 왕께서 이전에 제나라를 치시려고 할 때, 그는 강하게 반대를 했는데, 전쟁에 이기자 오히려 이 때문에 왕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왕께서 그를 경계하지 않으시면, 그는 반드시 반란을 일으킬 것입니다.”라 했다. 백비는 또한 월나라의 대부 봉동과 함께 음모를 꾸며, 왕에게 그를 비방했다.
부차가 처음에는 믿지 않고서, 오자서를 제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오자서가 자기 아들을 제나라의 대부 포목(鮑牧)에게 맡겼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서, 부차는 크게 화를 내며, “오자서가 나를 속였구나!”라고 말했다. 오자서가 돌아오자, 부차는 촉루검(屬鏤劍)을 보내 자결하게 했다. 오자서는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나는 이전에 그대의 아버지가 천하를 얻도록 했고, 또 그대를 옹립했다. 그대는 애초에 나에게 오나라의 절반을 주려 했는데, 나는 받지 않았다. 그 뒤로 얼마 지나지 않은 지금, 참언을 믿고 나를 죽이려 하는구나. 아아! 부차는 혼자 서지 못할 것이다!”라 했다. 또한 사자에게 말하기를 “반드시 내 눈을 오나라의 동쪽 문에 매달아 놓아라. 월나라 군사가 쳐들어오는 것을 보겠다.”라 했다. 마침내 부차는 백비로 하여금 집정하게 했다.
居三年, 句践召范蠡曰:「呉已殺子胥, 導諛者衆, 可乎?」対曰:「未可.」
3년이 지나, 구천은 범려를 불러 말하기를 “부차는 이미 오자서를 죽였고, 또한 주위에는 아부를 일삼는 자들만 있는데, 공격해도 되겠소?”라고 물었다. 범려는 “아직 안 됩니다.”라고 대답했다.
至明年春, 呉王北会諸侯於黄池,25) 呉国精兵従王, 惟独老弱與太子留守.26) 句践复問范蠡, 蠡曰「可矣」. 乃発習流二千人,27) 教士四萬人,28) 君子六千人,29) 諸御千人,30) 伐呉. 呉師敗, 遂殺呉太子. 呉告急於王, 王方会諸侯於黄池, 懼天下聞之, 乃袐之. 呉王已盟黄池, 乃使人厚礼以請成越. 越自度亦未能滅呉, 乃與呉平.
다음해 봄, 부차는 북쪽으로 가서 황지(黃池)에서 제후와 회맹했는데, 정예 병사들로 하여금 왕을 수행하게 했고, 수도는 노약한 병사와 태자로 하여금 지키게 했다. 구천이 다시 범려에게 공격 여부를 묻자, 그는 “가능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수군(水軍) 2천명, 훈련받은 병사 4천명, 친위병 6천명, 그 밖에 영중에서 직무를 관장하는 군관(軍官) 1천명을 보내 오나라 군대를 패배시키고, 태자를 죽였다.
오나라에서는 부차에게 급박한 상황을 보고했는데, 부차는 황지에서 제후와 회맹중이어서, 천하가 이를 알까봐 두려워 비밀로 했다. 부차가 회맹을 끝내고, 사람을 보내 예를 후하게 해 구천에게 강화를 청했다. 구천 역시 아직 오나라를 완전히 물리칠 수 없음을 알고, 오나라와 강화를 맺었다.
其後四年, 越复伐呉. 呉士民罷弊, 軽鋭尽死於斉、晉. 而越大破呉, 因而留囲之三年, 呉師敗, 越遂复棲呉王於姑蘇之山. 呉王使公孫雄31)肉袒膝行而前, 請成越王曰:「孤臣夫差敢布腹心, 異日嘗得罪於会稽, 夫差不敢逆命, 得與君王成以帰. 今君王挙玉趾而誅孤臣, 孤臣惟命是聴, 意者亦欲如会稽之赦孤臣之罪乎?」句践不忍, 欲許之. 范蠡曰:「会稽之事, 天以越賜呉, 呉不取. 今天以呉賜越, 越其可逆天乎? 且夫君王蚤朝晏罷, 非為呉邪? 謀之二十二年, 一旦而棄之, 可乎? 且夫天與弗取, 反受其咎. 『伐柯者其則不遠』, 君忘会稽之厄乎?」句践曰:「吾欲聴子言, 吾不忍其使者.」范蠡乃鼓進兵, 曰:「王已属政於執事,32) 使者去, 不者且得罪.」33)呉使者泣而去. 句践憐之, 乃使人謂呉王曰:「吾置王甬東, 君百家.」34)呉王謝曰:「吾老矣, 不能事君王!」遂自殺. 乃蔽其面,35) 曰:「吾無面以見子胥也!」越王乃葬呉王而誅太宰嚭.
그 후 4년이 흘러, 월나라는 다시 오나라를 공격했다. 오나라 병사와 백성은 지치게 되었고, 정예 병사들은 모두 제나라 및 진(晉)나라와의 싸움에서 죽었다. 월나라는 오나라를 크게 물리쳤는데, 3년 동안 포위 공격하다가 마침내 부차를 고소산(姑蘇山)에 가두었다.
부차는 대부 공손웅(公孫雄)을 보냈는데, 그는 어깻죽지를 드러내고 무릎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가 구천에게 강화를 청하며 말하기를 “왕의 신하 부차가 속마음을 털어놓겠습니다. 이전에 회계산에서는 왕께 죄를 지었습니다. 부차는 감히 왕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하며, 강화를 맺어 돌아가기를 바랄 뿐입니다. 지금 왕께서는 친히 저를 징벌하려 하시는데, 절대적으로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바라건대, 회계산에서 제가 왕께 그러했던 것처럼 역시 저를 용서해 주실 수 없으시겠습니까?”라 했다.
구천은 차마 모질게 하지 못해 그에게 허락하려 했다. 그러나 범려가 말하기를 “회계산에서의 일은 하늘이 월나라를 오나라에게 주었던 것인데, 오나라는 취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하늘이 오나라를 월나라에게 넘겨주는데, 월나라가 어찌 하늘을 거스른다는 말입니까? 왕께서 조정에 일찍 납시고, 저녁에 늦게 물러나셨던 것은 오나라를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22년간 도모했는데, 하루아침에 이를 버릴 수 있겠습니까?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는다면 오히려 천벌을 받는 법입니다. 『시경(詩經)』에서도 ‘나무 베어 도끼자루 만들려면, 그 본이 가까운 데 있는 것을’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왕께서는 회계산에서의 재난을 잊지는 않으셨겠지요?”라 했다.
구천은 말하기를 “나는 그대의 말을 따르고 싶으나, 차마 그 사자(使者)를 그렇게 대할 수는 없소.”라 했다. 이에 범려는 북을 쳐 병사를 진격시키며, “왕께서는 이미 나에게 소임을 맡기셨으니, 사자는 가시오. 그렇지 않으면 그대에게 죄를 묻겠소.”라고 말했다.
부차의 사자는 울면서 갔는데, 구천은 연민을 느껴 사람을 부차에게 보내 “나는 그대를 용동(甬東)으로 보내니, 그곳에서 1백호의 통치자가 되시오.”라 했다. 부차는 사절하며, “나는 이미 늙었으니, 왕을 섬길 수 없소.”라고 말하고 나서 자결했는데, 물건으로 얼굴을 덮으면서, “나는 오자서를 대할 면목이 없다.”라 했다. 구천은 부차를 장사지내고, 태재 백비를 주살했다.
句践已平呉, 乃以兵北渡淮, 與斉、晉諸侯会於徐州, 致貢於周. 周元王使人賜句践胙, 命為伯. 句践已去, 渡淮南, 以淮上地與楚,36) 帰呉所侵宋地於宋, 與魯泗東方百里. 當是時, 越兵横行於江、淮東, 諸侯畢賀, 号称霸王.37)
구천이 오나라를 평정한 후, 군대를 이끌고 북상해 회하(淮河)를 건너, 제나라 및 진(晉)나라 제후와 서주(徐州)에서 회맹하고 주(周) 왕실에 공물을 올렸다. 주 원왕(周元王)은 구천에게 제사 지낸 고기를 내리고, 제후의 수령으로 삼았다. 구천은 이곳을 떠나, 회하를 건너 남하했다. 회하 유역 일대의 땅을 초 나라에게 주고, 오나라가 약탈한 송나라의 땅은 송나라에 다시 돌려주었으며, 노나라에게는 사수(泗水) 동쪽의 사방(四方) 백리에 달하는 땅을 주었다. 당시, 월나라의 군대는 양자강 및 회하 동쪽을 주름잡았고, 제후들은 모두 축하하며 구천을 패왕(覇王)이라고 칭했다.
范蠡遂去, 自斉遺大夫種書曰:「蜚鳥尽, 良弓蔵;狡免死, 走狗烹.38) 越王為人長頚鳥喙, 可與共患難, 不可與共樂. 子何不去?」種見書, 称病不朝. 人或讒種且作亂, 越王乃賜種剣曰:「子教寡人伐呉七術,39) 寡人用其三而敗呉, 其四在子, 子為我従先王試之.」種遂自殺.
범려는 월나라를 떠나, 제나라에서 대부 문종에게 편지로써 말하기를 “나는 새가 다 잡히면, 좋은 활은 거두어지는 것이고, 교활한 토끼가 모두 잡히면, 사냥개는 삶아지는 법이오. 월왕 구천은 목이 길고 입은 새처럼 뾰쪽하니, 어려움은 함께 할 수 있어도, 즐거움은 같이할 수 없소. 그대는 왜 월나라를 떠나지 않는 것이오?”라 했다.
문종이 편지를 읽고서 병을 핑계 삼아 궁궐에 들어가지 않으니, 어떤 사람이 그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참언했다. 구천은 그에게 칼을 내리며 말하기를 “그대는 오나라를 칠 수 있는 계책 일곱 가지를 가르쳐 주었소. 나는 그 중 세 가지만을 사용해 오나라를 물리쳤소. 나머지 네 가지는 그대에게 있으니, 그대는 선왕(先王)을 뒤좇아 가서 나를 위해 그것을 시험해 보기 바라오.”라 했다. 문종은 이내 자결하고 말았다.
句践卒,40) 子王鼫與立.41) 王鼫與卒, 子王不寿立. 王不寿卒,42) 子王翁立. 王翁卒,43) 子王翳立. 王翳卒, 子王之侯立.44) 王之侯卒, 子王無彊立.45)
구천이 죽자 그의 아들 석여(鼫與)가 뒤를 잇고, 석여가 죽자 그의 아들 불수(不壽)가 즉위했다. 불수가 죽자 그의 아들 옹(翁)이 뒤를 잇고, 옹이 죽자 그의 아들 예(翳)가 즉위했다. 예가 죽자 그의 아들 지후(之侯)가 뒤를 잇고, 지후가 죽자 그의 아들 무강(無彊)이 즉위했다.
각주
1 正義呉越春秋云:「禹周行天下, 還帰大越, 登茅山以朝四方群臣, 封有功, 爵有徳, 崩而葬焉. 至少康, 恐禹跡宗廟祭祀之絶, 乃封其庶子於越, 号曰無余.」賀循会稽記云:「少康, 其少子号曰於越, 越国之称始此.」越絶記云:「無余都, 会稽山南故越城是也.」
2 正義輿地志云:「越侯傳国三十余葉, 歴殷至周敬王時, 有越侯夫譚, 子曰允常, 拓土始大, 称王, 春秋貶為子, 號爲於越杜注云於語發聲也.」
3 集解杜預曰:「呉郡嘉興県南有檇李城.」 索隠事在左傳魯定公十四年.
4 集解杜預曰:「夫椒在呉郡呉県, 太湖中椒山是也.」 索隠夫音符. 椒音焦, 本又作「湫」, 音酒小反. 賈逵云地名. 国語云敗之五湖, 則杜預云在椒山為非. 事具哀公元年.
5 集解杜預曰:「上会稽山也.」 索隠鄒誕云:「保山曰棲, 猶鳥棲於木以避害也, 故六韜曰『軍処山之高者則曰棲』.」
6 正義会稽典錄云:「范蠡字少伯, 越之上将軍也. 本是楚宛三戸人, 佯狂倜儻負俗. 文種為宛令, 遣吏謁奉. 吏還曰:『范蠡本国狂人, 生有此病.』種笑曰:『吾聞士有賢俊之姿, 必有佯狂之譏, 内懐独見之明, 外有不知之毀, 此固非二三子之所知也.』駕車而往, 蠡避之. 後知種之必來謁, 謂兄嫂曰:『今日有客, 願仮衣冠.』有頃種至, 抵掌而談, 旁人観者聳聴之矣.」
7 集解韋昭曰:「與天, 法天也. 天道盈而不溢.」 索隠與天, 天與也. 言持満不溢, 與天同道, 故天與之.
8 集解虞翻曰:「人道尚謙卑以自牧.」 索隠人主有定傾之功, 故人與之也.
9 集解韋昭曰:「時不至, 不可彊生;事不究, 不可彊成.」 索隠国語「以」作「與」, 此作「以」, 亦與義也. 言地能財成萬物, 人主宜節用以法地, 故地與之. 韋昭等解恐非.
10 集解韋昭曰:「市, 利也. 謂委管籥属国家, 以身随之.」 正義卑作言辞, 厚遺珍宝. 不許平, 越王身往事之, 如市賈貨易以利, 此是定傾危之計.
11 索隠大夫, 官;種, 名也. 一曰大夫姓, 猶司馬、司徒之比, 蓋非也. 成者, 平也, 求和於呉也. 正義呉越春秋云:「大夫種姓文名種, 字子禽. 荊平王時為宛令, 之三戸之里, 范蠡従犬竇蹲而吠之, 従吏恐文種慚, 令人引衣而鄣之. 文種曰:『無鄣也. 吾聞犬之所吠者人, 今吾到此, 有聖人之気, 行而求之, 來至於此. 且人身而犬吠者, 謂我是人也.』乃下車拝, 蠡不為礼.」
12 索隠閒音紀閑反. 閒行猶微行.
13 索隠国語云:「越飾美女二人, 使大夫種遺太宰嚭.」
14 索隠言悉五千人触戦, 或有能當呉兵者, 故国語作「耦」, 耦亦相當対之名. 又下云「無乃傷君王之所愛乎」, 是有當則相傷也.
15 集解徐広曰:「弔, 一作『葬』.」
16 索隠鎮音.
17 索隠越大夫也. 国語作「諸稽郢」.
18 索隠逢, 姓;同, 名. 故楚有逢伯.
19 索隠疥■音介尟.
20 索隠在魯哀十一年.
21 索隠国恵子、高昭子.
22 索隠而, 汝也. 父, 闔廬也.
23 索隠若亦汝也.
24 索隠国語云呉王慍曰「孤不使大夫得見」, 乃盛以鴟夷, 投之于江也.
25 索隠在哀十三年.
26 索隠拠左氏傳, 太子名友.
27 索隠虞書云「流宥五刑」. 按:流放之罪人, 使之習戦, 任為卒伍, 故有二千人. 正義謂先慣習流利戦陣死者二千人也.
28 索隠謂常所教練之兵也. 故孔子曰「以不教民戦, 是謂棄之」是也.
29 集解韋昭曰:「君子, 王所親近有志行者, 猶呉所謂『賢良』, 斉所謂『士』也.」虞翻曰:「言君養之如子.」索隠君子謂君所子養有恩恵者. 又按:左氏「楚沈尹戌帥都君子以済師」, 杜預曰「都君子謂都邑之士有复除者」. 国語「王以私卒君子六千人」.
30 索隠諸御謂諸理事之官在軍有職掌者.
31 集解虞翻曰:「呉大夫.」
32 集解虞翻曰:「執事, 蠡自謂也.」
33 集解虞翻曰:「我為子得罪.」 索隠虞翻注蓋依国語之文, 今望此文, 謂使者宜速去, 不且得罪於越, 義亦通.
34 集解杜預曰:「甬東, 会稽句章県東海中洲也.」 索隠国語云「與之夫婦三百」是也.
35 正義今之面衣是其遺象也. 越絶云:「呉王曰『聞命矣! 以三寸帛幎吾両目. 使死者有知, 吾慚見伍子胥、公孫聖;以為無知, 吾恥生者』. 越王則解綬以幎其目, 遂伏剣而死.」幎音覓. 顧野王云大巾覆也.
36 集解楚世家曰:「越滅呉而不能正江、淮北. 楚東侵広地至泗上.」
37 索隠越在蛮夷, 少康之後, 地遠国小, 春秋之初未通上国, 国史既微, 略無世系, 故紀年称為「於粵子」. 拠此文, 句践平呉之後, 周元王始命為伯, 後遂僭而称王也.
38 集解徐広曰:「狡, 一作『郊』.」
39 正義越絶云:「九術:一曰尊天事鬼;二曰重財幣以遺其君;三曰貴糴粟稿以空其邦;四曰遺之好美以熒其志;五曰遺之巧匠, 使起宮室高台, 以尽其財, 以疲其力;六曰貴其諛臣, 使之易伐;七曰彊其諫臣, 使之自殺;八曰邦家富而備器利;九曰堅甲利兵以承其弊.」
40 索隠紀年云:「晉出公十年十一月, 於粵子句践卒, 是為菼執.」
41 索隠鼫音石. 與音余. 按:紀年云「於粵子句践卒, 是菼執. 次鹿郢立, 六年卒」. 樂資云「越語謂鹿郢為鼫與也」.
42 索隠紀年云:「不寿立十年見殺, 是為盲姑. 次朱句立.」
43 索隠紀年於粵子朱句三十四年滅滕, 三十五年滅郯, 三十七年朱句卒.
44 索隠紀年云:「翳三十三年遷于呉, 三十六年七月太子諸咎弑其君翳, 十月粵殺諸咎. 粵滑, 呉人立子錯枝為君. 明年, 大夫寺区定粵亂, 立無余之. 十二年, 寺区弟忠弑其君莽安, 次無顓立. 無顓八年薨, 是為菼蠋卯.」故荘子云「越人三弑其君, 子捜患之, 逃乎丹穴不肯出, 越人薫之以艾, 乗以王輿」. 樂資云「号曰無顓」. 蓋無顓後乃次無彊也, 則王之侯即無余之也.
45 索隠蓋無顓之弟也. 音其良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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