兩班傳
士迺天爵。士心爲志, 其志如何? 非謨勢利, 達不離士, 窮不失士。不飭名節, 徒貨門地, 酤鬻世德, 商賈何異? 於是述兩班。
선비는 하늘이 내린 작위이다. 선비(士)의 마음(心)이 곧 뜻(志)이니 그 뜻이 무엇인가? 권세와 이익을 도모하지 않으며 영달하여도 선비의 본분을 떠나지 않고 궁하여도 선비의 기개를 잃지 않는 것이다.
명분과 절의에 힘쓰지 않고 함부로 문벌을 기화(奇貨)로 여겨 조상의 미덕을 사고 파니 장사치와 어찌다르겠는가? 이에 양반전을 쓴다.
兩班傳
兩班者, 士族之尊稱也。 旌善之郡有一兩班, 賢而好讀書, 每郡守新至, 必親造其廬而禮之。
然家貧歲食郡糶, 積歲至千石。觀察使巡行郡邑, 閱糶糴大怒曰, 「何物兩班乃乏軍興。」命囚其兩班。郡守意哀其兩班貧無以爲償, 不忍囚之, 亦無可奈何。兩班日夜泣, 計不知所出。
其妻罵曰, 「平生子好讀書, 無益縣官糶, 咄兩班兩班不直一錢。」
其里之富人私相議曰, 「兩班雖貧常尊榮, 我雖富常卑賤不敢騎馬。見兩班則跼蹜屛營, 匍匐拜庭 曳鼻膝行。我常如此 其僇辱也。今兩班 貧不能償糴 方大窘 其勢誠不能保其兩班 我且買而有之。」
遂踵門而請償其糴, 兩班大喜許諾 於是 富人立輸其糴於官。
양반이란 사족(士族)을 높여 부르는 것이다. 정선군에 한 양반이 있었는데 어질고 책읽는 것을 좋아하여 군수가 새로 부임할 때마다 반드시 몸소 그 집에 가서 예를 표하였다.
그러나 집안이 가난하여 해마다 군으로부터 환곡을 가져다 생활했는데 해가 거듭되니 천석에 이르렀다.
관찰사가 군읍을 순시하던 중 환곡장부를 보고 대노하여,
"어떤 놈의 양반이 군량미를 축냈단 말이냐. 그 양반을 하옥하라." 하고 명하였다.
군수는 그 양반이 가난하여 갚을 방도가 없음을 매우 애석히 여겨 차마 하옥치 못하였으나 어찌할 수가 없었다.
양반은 주야로 울기만 할뿐 그 방도를 알지 못했다.
그 처가 꾸짖어 말했다.
"평생 그대는 독서를 좋아하더니 관곡을 갚는데에는 아무 쓸모가 없구려. 양반, 양반이란 것은 한푼의 가치도
없네요."
그 마을에 부자가 살았는데 가족과 의논하기를,
"양반이 비록 가난하지만 항상 존귀하고 영광스럽다. 나는 부자이지만 항상 비천하여 감히 말을 타지도 못하고,
양반을 만나면 몸을 굽혀 종종걸음으로 숨을 죽이고 두려워하며 기어가듯이 가서 뜰에서 절을 하고 코가 땅에 닿
도록 무릎걸음으로 간다.
나는 항상 이렇게 욕되게 산다. 지금 양반이 가난하여 관곡을 상환할 수 가 없는데 크게 어려울 것이다. 가세가
양반을 보전할 수 없다면 내가 그 양반을 사서 가지리라."
마침내 양반의 집에 가서 관곡을 상환하겠다 청하니 양반이 크게 기뻐하며 허락하였다.
이에 부자는 환곡을 싣고가 관에 갚았다.
郡守大驚異之, 自往勞其兩班, 且問償糴狀, 兩班氈笠衣短衣, 伏塗謁稱小人, 不敢仰視。郡守大驚下扶曰, 「足下 何自貶辱若是。」
兩班益恐懼, 頓首俯伏曰, 「惶悚小人非敢自辱 已自鬻其兩班以償糴 里之富人乃兩班也 小人復安敢冒其舊號而自尊乎。」 郡守歎曰, 「君子哉 ! 富人也。 兩班哉 ! 富人也。 富而不吝 義也。 急人之難 仁也, 惡卑而慕尊 智也, 此眞兩班。雖然私自交易, 而不立券, 訟之端也。 我與汝約, 郡人而證之, 立券而信之。郡守當自署之。」
군수가 크게 놀라고 괴이히 여겨 몸소 가서 양반을 위로하고자 하고 또 환곡을 상환한 사정을 묻고자 하였는데
양반은 전립을 쓰고 짧은 옷을 입은 모습으로 땅에 엎드려 소인이라 칭하며 감히 올려다보지를 못하였다.
군수가 크게 놀라 내려와 부축해 일으키며 말했다.
"선생께서는 어찌하여 이와같이 스스로를 낮춰 욕되게 하십니까?"
양반은 더욱 두려워하며 머리를 조아리고 말했다.
"황송하옵니다. 소인이 감히 스스로를 욕되게 하겠습니까? 이미 스스로 양반을 팔아 환곡을 상환하였아오니 마
을의 부자가 곧 양반입니다. 소인이 다시 어찌 감히 옛호칭을 모용하여 스스로를 높일수 있겠습니까."
군수가 탄식하여 말했다.
" 군자로다, 부자여. 양반이로다. 부자여. 부자이면서도 인색하지 않으니 의로움이라, 남의 어려움을 구하니 어
짐이며 비천함을 싫어하고 귀함을 바라나 지혜로움이라. 이자는 참으로 양반이로다. 그러나 사사로이 사고팔아
문서를 작성하지 않으면 송사의 단초가 될 것이라, 내가 그대와 더불어 약정한 바를 군민을 증인으로 세우고 문
서를 작성하여 믿음이 가게 하리라. 군수가 친히 서명함이 당연하다."
於是 郡守歸府, 悉召郡中之士族及農工商賈, 悉至于庭, 富人坐鄕所之右, 兩班立於公兄之下, 乃爲立券曰,
「乾隆十年九月日, 右明文段。屈賣兩班, 爲償官穀, 其直千斛。維厥兩班, 名謂多端, 讀書曰士, 從政爲大夫, 有德爲君子, 武階列西, 文秩敍東, 是爲兩班, 任爾所從。絶棄鄙事, 希古尙志, 五更常起, 點硫燃脂, 目視鼻端, 會踵支尻, 東萊博議, 誦如氷瓢, 忍餓耐寒, 口不說貧。叩齒彈腦。細嗽嚥津, 袖刷毳冠, 拂塵生波 盥無擦拳, 漱口無過。長聲喚婢, 緩步曳履, 古文眞寶, 唐詩品彙, 鈔寫如荏, 一行百字, 手毋執錢, 不問米價。署毋跣襪, 飯毋徒髻, 食毋先羹, 歠毋流聲。下箸毋舂, 毋餌生葱。飮醪毋嘬鬚, 吸煙毋輔窳。忿毋搏妻, 怒毋蹋器, 毋拳敺兒女, 毋詈死奴僕。叱牛馬 毋辱鬻主, 病毋招巫, 祭不齊僧, 爐毋煮手, 語不齒唾。毋屠牛, 毋賭錢。 凡此百行, 有違兩班, 持此文記, 卞正于官。 城主旌善郡守押, 座首別監證署。」
於是, 通引搨印錯落, 聲中嚴鼓, 斗縱參橫, 戶長讀旣畢。
公兄 : 戶長, 吏房, 首刑吏를 三公兄이라 함.
硫 : 유황 류. 성냥(石硫黃)
東萊博議 :南宋때 呂祖謙이 지은 東萊左氏博議를 말함.春秋左氏傳에서 주제를 취해 평론한 것 科擧에서 논설을 짓는 데 도움되는
책으로 중국과 조선에서 널리 읽혔다.
瓢 : 박 표. 박, 박으로 만든 그릇.바가지, 표주박. 一簞食 一瓢飮, 瓢囊. 球技의 總稱
嗽 : 기침 수, 빨 삭. 기침하다.양치질하다. 嚥 : 삼킬 연. 津 : 진액, 침, 땀.
盥 : 대야 관, 깨끗할 관. 대야. 강신제(내림굿). 깨끗하다. 씻다. 양치질하다.
漱 : 양치질할 수. 양치질하다. 빨다. 빨래하다. 씻다. 헹구다.
漱口無過 : 입냄새를 口過라 한다. 唐 則天武后는 宋之問이 재주 있는 시인임을 알았으나 그의 입냄새가 심한 것을 싫어하여
기용하지않았다. 古文眞寶에 수록되어 있는 송지문의 걸작 明河編은 그러한 자신의 처지를 슬퍼하여 지은 시라고 한다.
唐詩品彙 : 明나라 때 高棅이 편찬한 唐詩集. 모두 90권으로 시인 620인의 작품 5700여 수를 형식별로 수록하였다.
따로 拾遺10권이 있다.
鈔 : 노략질할 초. 노략질하다. 베끼다. 현묘하다. 지전, 지폐. 초(부피의 단위), 문집, 영수증, 끝, 아득함, 심원함.
荏 : 들깨 임. 들깨, 잠두, 천연(遷延)하다. 부드럽다. (세월이)흐르다. 구르다. 점점. 점차로
跣 : 맨발 선. 맨발, 맨발로 다니다. 襪 : 버선 말. 버선, 족의. 허리띠.
髻 : 상투 계. 조왕신 결. 상투, 묶은머리, 산봉우리의 비유, 부엌귀신, 조왕신(결)
葱 : 파 총, 짐수레 창. 파. 부들, 名劒의 이름. 섬섬옥수의 비유. 푸른색, 푸르다. 짐수레 창, 창문(창)
醪 : 막걸리 료. 막걸리, 탁주. 술. 嘬 : 깨물 최. 깨물다. 뭄. 한입에 넣다. 탐욕을 부리다.
窳 : 이지러질 유. 이지러지다. 약해지다. 게으르다. 거칠다. 무너지다. 문란해지다. 우묵하다.
蹋 : 밟을 답. 밟다. (공을)차다.
詈 : 꾸짖을 리(이). 꾸짖다. 매도하다. 빗대어 욕하다.
☞ 연암집.권3 酬素玩亭夏夜訪友記에 “죽으라고 악담하다惡言詈死”와 같은 표현이 있다. 이덕무의 士小節 권1 士典1 言語條에,
종에게 ‘뒈질 놈〔可殺〕’ ‘왜 안 뒈지냐〔胡不死〕’와 같은 욕을 하지 말라고 하였다.
搨 : 베낄 탑. 베끼다. 박다. 탑본하다. 모사하다. 늘어뜨리다. 쌓다. 축적하다.
이에 군수가 관아로 돌아와 군내의 사족과 농공상인들을 모두 소집하여 모두 관아에 이르자, 부자는 향소의 오른
쪽에 앉게 하고 양반은 공형(이방등 형리의 우두머리)의 아래에 서 있도록 하여 문서를 작성하도록 하고는 말
했다.
"건륭 10년 9월일에 다음과 같이 문권으로 밝힌다. 양반을 팔아 관곡을 갚았으니 그 값이 천석이라. 양반이란 것
은 여러가지로 일컬어지는데, 책을 읽으면 선비요, 정무에 종사하면 사대부라 하며, 덕이 있으면 군자라 한다.
무반은 서쪽에 서고 문반은 동쪽에 서니 이를 양반이라 하는데 너는 마음대로 골라라. 지저분한 일들을 깨끗이
버리고 옛 고상한 뜻을 좇아 5경이 되면 등불을 켜고 코끝을 바라보며 발뒤꿈치를 모아 엉덩이를 붙이고 동래
박의를 얼음판에 박구르듯이 외우고, 배고픔을 참고 추위를 견디며 입으로는 가난을 말하지 않는다.
위아랫니를 부딛쳐 소리를 내고 머리를 두드린다. 잔기침후 가래를 삼키고 소매로 관을 털 때에는 먼지가 나도
록 턴다. 세수를 할 때에는 주먹을 문지르지 말고 양치질을 하여 입냄새가 나지 않도록 한다.
여종을 부를 때는 긴 소리로 부르고, 천천히 가되 신을 끌고 가며, 고문진보와 당시품휘를 깨알같이 베끼되 한
줄에 백자를 쓰고, 손으로 돈을 만지지 않으며 쌀값을 묻지 않는다.
더워도 버선을 벗지 않고, 상투바람으로 밥을 먹지 않으며 식사때 국을 먼저 마시지 않고 마실때에는 소리를 내
서는 안된다. 젓가락을 아래로 찧지 말며 파를 생으로 먹지 않는다. 술을 마실 때에는 수염을 빨지 말며, 담배를
태울 때에는 볼이 들어가지 않게 한다. 화가 나도 마누라를 구타하지 말며, 그릇을 발로 차지 않는다. 주먹으로
어린 여자를 때려도 안되고 노복들에게 '죽어라'하며 꾸짖지 않는다. 소나 말을 꾸짖을 때에도 그것을 판 사람을
욕해서는 안된다. 병이 나도 무당을 부르지 않으며 제를 지낼때에도 중을 청하지 않는다.
화롯불에 손을 쬐지 않고 말할 때에는 침이 튀지 않도록 한다. 소를 도살하지 않고 돈으로 도박을 하지 않는다.
무릇 이와 같은 모든 행동을 위반하는 양반이 있을 때에는 이 문서로써 관에서 바로잡을 것이다. 성주 정선군수
가 주관하며 좌수와 별감이 증서에 서명한다."
이에 통인이 도장을 내리찍으니 소리가 엄고소리같고 그 모양이 세로로는 북두칠성같고가로로는 삼성(三星)같
았다. 호장이 읽기를 마쳤다.
富人悵然, 久之曰, 「兩班只此而已耶 吾聞兩班如神仙 審如是太乾沒 願改爲可利。」
於是 乃更作券曰, 「維天生民, 其民四維。四民之中, 最貴者士, 稱以兩班, 利莫大矣, 不耕不商。粗涉文史, 大決文科, 小成進士。文科紅牌, 不過二尺, 百物具備, 維錢之槖。進士三十, 乃筮初仕, 猶爲名蔭, 善事雄南, 耳白傘風 腹皤鈴諾。室珥冶妓, 庭穀鳴鶴。窮士居鄕, 猶能武斷, 先耕隣牛, 借耘里氓。孰敢慢我 ? 灰灌汝鼻, 暈髻汰鬢, 無敢怨咨。」
富人中其券而吐舌曰, 「已之已之, 孟浪哉。 將使我爲盜耶 ?」 掉頭而去, 終身不復言兩班之事。
<연암집 燕巖集≫<방경각외전 放璚閣外傳>
그 대가가 너무도 보잘것없어서 그렇게 말한 것.
槖 : 전대 탁. 전대, 풀무, 절구질하는 소리.
筮 : 점 서. 점. 점대, 점치다. 雄南行 : 음관을 南行이라 함. 雄南行은 位品이 높은 음관.
耳白傘風 腹皤鈴諾 : 수령은 행차할 때 일산을 받쳐 얼굴에 그늘을 드리우므로 햇빛을 쏘이지 않아 귀가 희어지고, 일을 시킬 때
설렁줄을 당겨 사람을 부르면 되므로 편해서 배에 살만 찐다는 뜻.
皤 : 흴 파. 희다. 불룩하다. 氓 : 백성 맹. 백성, 서민.
冶 : 풀무 야. 풀무, 대장간, 대장장이, 들, 초야. 불리다. 단련하다. 예쁘다. 꾸미다.
暈 : 무리훈, 어지러울 운. 무리(불그스름한 둥근 테), 햇(달)무리, 안개. 어지럽다(운), 희미하다(운)(눈이)침침하다.(운) 멀미(운).
汰 : 일 태. 일다. 걸러내다. 가려뽑다. 도태시키다. 교만하다. 사치하다. 지나다. 스쳐가다. 미끄러지다. 미끄럽다. 적시다.
윤택하게 하다. 물결, 파도.
掉 : 흔들 도. 흔들다. 움직이게 하다. 흔들리다. 요동하다. 바로잡다. 정돈하다. 떨치다. 상앗대, 삿대.
부자가 한탄스러운 모습으로 한참 있다가 말했다.
"양반이라는 것이 겨우 이것뿐입니까? 내가 듣기로는 신선과 같다 하던데 이렇다면 큰 손해아니요? 바라건대
더 이롭게 고쳐주시오."
이에 문서를 다시 작성토록 하고는 말했다.
"무릇 하늘이 백성을 내었는데 백성에는 네갈래가 있다. 네갈래 백성중 제일 귀한자가 선비이며 양반이라 하는데
그 이로움이 막대하여 농사를 짓지도 장사를 하지도 않는다. 대강 글과 역사를 읽어 크게 되면 문과급제요 적게
이루면 진사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받은 홍패는 2척도 안되는데 백가지 물품이 구비된 것과 같고 오히려 돈전대
와 같다. 진사로 30세가 되어 처음 벼슬에 나가더라도 오히려 이름난 음관이 될 수 있고 지체높은 음관을 잘 섬
기면 귀는 일산바람에 희어지고 배는 대답소리에 살이 찐다.
방에서는 기녀가 치장을 하고 뜰에서는 곡식을 쪼아먹으며 학이 운다. 궁한 선비가 시골에 산다면 무력을 사용할
수 있어 이웃집 소로 밭을 먼저 갈 수 있고 마을 백성을 데려다가 김을 매게 할 수도 있다. 누가 감히 나를 업신여
길것인가? 재를 탄 물을 그대의 코에 붓고 상투를 잡아 흔들고 수염을 뽑아도 감히 원망을 못할 것이다."
부자가 문권을 작성중 혀를 내밀고는 말했다.
"그만 두시오, 그만둬. 맹랑하도다. 장차 나를 도적으로 만들셈이오?"
머리를 흔들고는 가버렸다. 그러고는 종신토록 다시는 양반의 일을 말하지 않았다.
박지원(朴趾源, 1737 ~ 1805)
조선 후기의 문신, 실학자이자 사상가, 외교관, 소설가이다.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미중(美仲) 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 연상(煙湘), 열상외사(洌上外史)이고,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1765년 처음 과거에 응시한 그는 차라리 고의적으로 과거 낙방했는데, 이후 계속해서 과거를 피했으며 학문 연구와 저술에 전념하였다.
저서로는 열하일기, 허생전이 있다.
그는 청나라의 신문물에 관심을 두었다. 정조 즉위 후 여러번 학문과 문장력으로 추천받았지만 고사하다가 집안의 거듭된 권고로 1786년 문음으로 출사하게 된다.
1786년 음서로 선공감 감역이 되어 평시서주부(平市署主簿)·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 한성부판관, 안의현감(安義縣監), 면천군수(沔川郡守), 양양부사 역임. 안의현감 재직 중 북경여행을 다녀왔으며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실험적 작업을 시도하였으며, 면천군수 재직 중 《과농소초 (課農小抄)》《한민명전의 (限民名田議)》, 《안설 (按說)》 등의 저서를 남겼다.
당색으로는 노론이었으나, 노론의 한 분파인 북학파(北學派)를 세워 그 영수가 되었다. 홍대용, 박제가 등과 함께 청나라의 우수한 점을 배워야 한다며 상공업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중상주의를 주장하였다. 그의 제자로는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이 있다.[출처 :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