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國史記 卷 第一
三國史記卷第一.
輸忠定難靖國贊化同德功臣開府儀同三司檢校太師守太保門下侍中判尙書吏禮部事集賢殿太學士監修國
史上柱國致仕臣<金富軾>奉宣撰.
新羅本紀第一.
始祖 赫居世居西干․南解次次雄․ 儒理尼師今․脫解尼師今․婆娑尼師今․祗摩尼師今․逸聖尼師今.
始祖 姓朴氏 諱赫居世 前漢孝宣帝五鳳元年甲子 四月丙辰(一曰正月十五曰) 卽位 號居西干 時年十三 國號
徐那伐 先是 朝鮮遺民 分居山谷之間爲六村 一曰閼川楊山村 二曰突山高墟村 三曰觜山珍支村(或云干珍村)
四曰茂山大樹村 五曰金山加利村 六曰明活山高耶村 是爲辰韓六部 高墟村長蘇伐公 望楊山麓 蘿井傍林間
有馬跪而嘶 則往觀之 忽不見馬 只有大卵 剖之 有嬰兒出焉 則 收而養之 及年十餘歲 岐嶷然夙成 六部人
以其生神異 推尊之 至是 立爲君焉 辰人謂瓠爲朴 以初大卵如瓠故 以朴爲姓 居西干 辰言王(或云呼貴人之稱)
四年 夏四月辛丑朔 日有食之。
五年 春正月 龍見於閼英井 右脇誕生女兒 老嫗見而異之 收養之 以井名名之 及長有德容 始祖聞之 納以爲妃
有賢行能內輔 時人謂之二聖。
八年 倭人行兵 欲犯邊 聞始祖有神德 乃還
九年 春三月 有星孛于王良
十四年 夏四月 有星孛于參
十七年 王巡撫六部 妃閼英從焉 勸督農桑 以盡地利
十九年 春正月 卞韓以國來降
二十一年 築京城 號曰金城 是歲 高句麗始祖東明立
二十四年 夏六月壬申晦 日有食之
二十六年 春正月 營宮室於金城
三十年 夏四月己亥晦 日有食之 樂浪人將兵來侵 見邊人夜戶不扃 露積被野 相謂曰 此方民不相盜 可謂有
道之國 吾儕潛師而襲之 無異於盜 得不愧乎 乃引還
三十二年 秋八月乙卯晦 日有食之
三十八年 春二月 遣瓠公聘於馬韓 馬韓王讓瓠公曰 辰卞二韓 爲我屬國 比年不輸職貢 事大之禮 其若是乎
對曰 我國自二聖肇興 人事修 天時和 倉庾充實 人民敬讓 自辰韓遺民 以至卞韓 樂浪 倭人 無不
畏懷 而吾王謙虛 遣下臣修聘 可謂過於禮矣 而大王赫怒 劫之以兵 是何意耶 王憤欲殺之 左右諫
止乃許歸 前此 中國之人 苦秦亂 東來者衆 多處馬韓東 與辰韓雜居 至是 寖盛 故馬韓忌之 有責
焉 瓠公者未詳其族姓 本倭人 初以瓠繫腰 渡海而來 故稱瓠公
三十九年 馬韓王薨 或說上曰 西韓王前辱我使 今當其喪征之 其國不足平也 上曰 幸人之災 不仁也 不從乃
遣使 弔慰
四十年 百濟始祖溫祚立
四十三年 春二月乙酉晦 日有食之
五十三年 東沃沮使者來 獻良馬二十匹曰(十 新(鑄字)本作百未知孰是) 寡君聞南韓有聖人出(聞 舊(木板)本
作問 蓋誤也) 故遣臣來享
五十四年 春二月己酉 星孛于河鼓
五十六年 春正月辛丑朔 日有食之
五十九年 秋九月戊申晦 日有食之
六十年 秋九月二龍見於金城井中 暴雷雨 震城南門
六十一年 春三月 居西干升遐 葬蛇陵 在曇巖寺北(曇 新書(木板)本缺 今補之)
[역주:01권1] 혁거세(赫居世)신라의 건국 시조. 재위 기간은 서기전 57~서기 4년이다. 《三國遺事》 권1 紀異 新羅始祖 赫居世王條에 의하면, 혁서세는 일명 弗矩內라고도 하는데 이는 밝게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라 하였다. 이러한 해석에 의거하여, 弗矩內는 '밝은'의 音寫로서 光明을 뜻하고 혁거세왕은 '밝은 임금' 혹은 '明王'을 의미하였다고 한다(李丙燾, 〈新羅의 起源問題〉,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597쪽).
[역주:01권2] 전한(前漢) 효선제(孝宣帝)서기 8년에 王莽이 漢나라를 찬탈하고 세운 新니라(서기 8~23)를 기준으로, 그 이전의 漢을 前漢 혹은 西漢이라하고 그 이후를 後漢 혹은 東漢이라 한다. 孝宣帝는 前漢의 제 7대 임금으로 서기전 74년에서 서기전 49년가지 25년간 재위하였다. 漢代에는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채택하였으므로 孝를 강조하기 위하여 제왕의 칭호에 일반적으로 '孝'자를 앞에 붙였다.
[역주:01권3] 병진《三正綜覽》에 의하면, 五鳳 원년 4월 초하루는 己丑이었으므로 丙辰은 이 달 28일에 해당한다.
[역주:01권4] 오봉(五鳳) 원년 … 즉위하여五鳳은 서기전 57부터 서기전 54년까지 4년간 사용된 漢 宣帝代의 연호이다. 五鳳 원년 즉 서기전 57년에 박혁거세가 즉위함으로써 신라가 건국되었다는 본서의 기록에 대하여, 이것을 사실로 인정하는 견해와 그렇지 않은 견해가 있어 왔다. 이 사실을 부정하는 논자들은, 본서 신라본기 가운데 4세기 이전의 기사 내용을 不信한다는 전제 위에서 특히 서기전 57년의 干支가 甲子年이고 혁거세를 이은 南解次次雄이 즉위한 연대 역시 甲子年(서기 4)인 점을 들어, 이를 참위설의 甲子革命說에 입각하여 만들어진 허구적인 紀年이라 하였다(今西龍, 《新羅史硏究》, 國書刊行會, 東京, 1933, 8~10쪽. 末松保和, 〈舊三國史と三國史記〉, 《靑丘史草》 2, 1966, 8~9쪽. 三品彰英, 《三國遺事考證》(上), 塙書房, 東京, 1975, 444쪽. 李基白·李基東, 《韓國史講座》 1(古代篇), 一潮閣, 1982, 141쪽). 한편 긍정론자들은 古朝鮮 遺民의 이동시기와 최근의 고고학적인 연구 성과에 의거하여 혁거세가 사로국을 건국한 시기를 늦어도 서기전 1세기 중엽으로 추정할 수 있으므로, 본서의 신라 건국 연대를 믿을 수 있다고 한다(金元龍, 〈三國時代의 開始에 관한 一考察〉, 《東亞硏究》 7, 1967 및 〈斯盧六村과 慶州古墳〉, 《歷史學報》 70, 1976, 4~13쪽. 李鍾旭, 《新羅國家形成史硏究》, 一潮閣, 1982, 16쪽).
[역주:01권5] 거서간(居西干)신라 건국 시조인 혁거세의 王號. 《三國遺事》 권1 紀異 新羅始祖 赫居世王條에서는 '居瑟邯'이라고도 하엿다. 거서간의 王號는 혁거세에게만 사용되었다. 거서간의 원래 뜻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본서 및 《三國遺事》의 찬자는 거서간을 辰韓에서 왕을 일컫는 말 또는 왕에 대한 존칭이라 하였다. 혹은 이는 高句麗의 高鄒加와 같은 말로서 部族長의 뜻을 가진다고도 한다. 李丙燾, 앞의 책, 1976, 661쪽).
[역주:01권6] 서나벌(徐那伐)신라 초기의 국호. 신라의 국호는 여러 가지로 표기되어다. 본서 및 《三國遺事》에는 徐伐·徐那伐·徐耶伐·徐羅伐·斯盧·斯羅·新羅·鷄林이라 하였고 《帝王韻紀》(下)에서는 尸羅라 하였다. 그리고 《三國志》, 《晉書》, 《梁書》, 《南史》, 《大唐西域求法高僧傳》 등의 중국측 기록에는 斯盧·新良·斯羅·鷄林·新盧·新羅·薛羅·鷄貴·矩矩吒䃜說羅라 하였으며, 《古事記》, 《日本書紀》, 《風土記》와 같은 일본측 문헌에는 新羅·新良·斯羅·鷄林·志羅紀 등으로 표기하였다. 그리고 근년에 발견된 〈迎日 冷水里新羅碑〉에는 斯羅로, 〈蔚珍鳳坪里新羅碑〉에는 新羅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音借 혹은 訓借로서 같은 말을 다르게 표기한 것으로 지증왕대에 이르러 新羅로 통일, 정착되었다. 서나벌의 의미에 대한 해석으로, 1)동쪽의 밝은 나라라는 뜻(梁柱東, 《古歌硏究》(增補版), 일조각, 1970, 385쪽), 2) 崍谷에 있는 城砦에서 기원했다는 뜻(安在鴻, 《朝鮮上古史鑑》, 민우사, 1948, 169~170쪽), 3) 上邑 혹은 首都라는 뜻(李丙燾, 앞의 책, 1976, 596쪽), 4) 上國·高國·神國·靈國의 뜻(三品彰英, 〈骨品制社會〉, 《古代史講座》 7, 1963, 181쪽) 등이 있다.
[역주:01권7] 조선(朝鮮)의 유민여기서의 조선은 이른바 古朝鮮을 가리킨다. 고조선 유민의 南下는 위만정권의 수립과 漢 武帝의 고조선 침입이 주요한 계기가 되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고고학적인 자료에 의해서도 입증된다고 한다(李鍾旭, 앞의 책, 1982, 16쪽. 李賢惠, 《三國社會形成過程硏究》, 일조각, 1982, 53~70쪽). 한편 본서에서 말하는 사로 6촌을 형성한 고조선 유민의 주력집단은 위만세력에 밀려난 소위 기자조선의 유이민일 수도 있고, 혹은 한나라 세력에 쫓긴 위만조선의 유민이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본서에서는 이른바 단군조선이나 위만조선에 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은 반면에 소위 기자조선에 대하여서는 특별히 강조하였고, 또 혁거세가 대두한 서기전 1세기경에 이르러서야 慶州지역에 위만조선계의 철기문화가 본격적으로 유입되는 점 등으로 보아(李賢惠, 앞의 책, 1982, 73~74쪽), 여기서 말하는 조선유민은 구체적으로 소위 기자조선을 지칭했을 가능성이 높다.
[역주:01권8] 육촌(六村)사로국을 구성한 여섯 개의 촌락. 본서(권1) 및 《三國遺事》(권1)에 의하면 사로국이 개창될 당시에 현재의 경북 경주지역 혹은 경주를 포함한 慶尙道 일대에 알천 양산촌, 돌산 고허촌, 취산 진지촌, 무산 대수촌, 금산 가리촌, 명활산 고야촌의 6촌이 있었다고 한다. 6촌의 위치에 관하여, 1) 경주분지 일대로 한정하는 설(李丙燾, 앞의 책, 1976, 599~603쪽. 金元龍, 《斯盧六村과 慶州古墳》, 《歷史學報》 70, 1976, 5~12쪽. 李基東, 〈新羅 金入宅考〉, 《新羅 骨品制社會와 花郞徒》, 일조각, 1984, 194쪽), 2) 慶尙道 일대의 12촌이 2부체제로 편성되어 6개의 촌이 되었다는 설(金哲埈, 《新羅上代社會의 Dual Organization》(上·下), 《歷史學報》 1·2, 1952), 3) 경주분지에만 한정하지 않고 현재의 경주시 安康邑과 陽南·陽北面을 제외한 경주시 일원으로 보는 설(李鍾旭, 앞의 책, 1982, 22~23쪽) 등이 있다. 그리고 6촌의 사회적 성격에 관해서는, 1) 혈연과 지연으로 결합된 氏族社會로 보는 설(李丙燾, 앞의 책, 1976, 600쪽), 2) 계급(Rank)을 가진 혈연집단으로서의 氏族(Clan) 社會인 酋長社會(Chiefdom)로 보는 설(李鍾旭, 앞의 책, 1982, 17~47쪽)이 있다. 이외에 각 촌의 구체적인 위치 및 변천과정에 대하여서는 다음의 본서 권1 주석 9~14 참조.
[역주:01권9]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알천의 위치에 대하여, 1) 현재의 경주시 北川으로 보는 견해((金哲埈, 《新羅上代社會의 Dual Organization》(上), 《歷史學報》 1·2, 1952, 27쪽. 三品彰英, 앞의 책, 1975, 416쪽. 李鍾旭, 앞의 책, 1982, 23쪽), 2) 현재의 경주시 南川 이남의 南山 서북쪽 일대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혹은 경주시 皇南洞·皇吾洞 일대로 비정되기도 한다(이종욱, 앞의 책, 1982, 23쪽). 《三國遺事》 권1 紀異篇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 의하면, 謁評이 하늘에서 瓢巖峯에 내려와 이 村의 우두머리가 되었다고 한다. 알천 양산촌은 儒理王 9년(서기 32)에 梁部(혹은 及梁部)로 개명되어, 高麗太祖 23년(940)에 中興部로 개칭되었다(《高麗史》 권57, 地理2).
[역주:01권10]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돌산 기슭에 잇던 고허촌으로, 돌산과 고허촌의 정확한 위치는 미상이다. 高墟에 관한 기록은 본서 권4 신라본기 眞平王 48년조에 '築高墟城'이라 하였고, 본서 권32 雜誌 제사조에 신라 小祀의 대상지 중의 하나로서 '高墟[沙梁]가 보인다. 돌산 고허촌의 위치에 관하여, 1) 慶州의 北川과 西川 그리고 南川에 의하여 ㄷ字 형으로 둘러사인 현재의 경북 경주시 沙政洞 일대로 보는 설(李丙燾, 앞의 책, 1976, 602쪽), 2) 경북 尙州 부근으로 비정하는 설(金哲埈, 앞의 논문, 1952, 45쪽), 3)경주시 西岳洞 일대로 보는 설(金元龍, 〈三國時代의 開始에 관한 一考察〉, 《東亞硏究》 7, 1976, 7~10쪽), 4) 경주시 南川 이남의 남산 서북쪽 일대로 보는 설(이종욱, 앞의 책, 1982, 23쪽) 등이 있다. 《三國遺事》 권1 紀異篇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 의하면, 이 村의 우두머리 蘇伐都利는 兄山에서 내려왔다고 한다. 유리왕 9년(서기 32)에 고허촌은 沙梁部(혹은 沙喙部)로 개명되었고, 고려 태조 23년(940)에는 다시 南山部로 개칭되었다(《高麗史》 권57, 地理2).
[역주:01권11] 취산(觜山) 진지촌(珍支村)觜山 기슭에 있던 진지촌으로, 珍支는 干珍(본서 권1), 賓之·賓子 혹은 氷子(《三國遺事》 권1 紀異篇 신라시조 혁거세왕조)로도 쓰여졌다. 진지촌의 위치에 관하여, 1) 현재의 경북 경주시 仁旺洞 일대로 보는 설(李丙燾, 앞의 책, 602쪽), 2) 경북 星州郡의 동남지역설(金哲埈, 앞의 논문, 1952, 46쪽), 3) 처음에는 경주시 狼山이 그것의 주 거주지였으나 후에 月城 서쪽으로 진출했다는 설(金元龍, 앞의 논문, 1976, 10~11쪽) 등이 있다. 《三國遺事》 권1 紀異篇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 의하면, 진지촌의 우두머리는 智伯虎로서 처음에 花山에서 내려왔다고 한다. 그러나 본서 권1 신라본기 유리 이사금 9년조에는 『干珍部를 本彼部로 바구고 성을 鄭이라 하였다』고 하여 양 기록간에 차이가 잇다. 고려 태조 23년(940)에 본피부는 通仙部로 개명되었다(《高麗史》 권57, 地理2).
[역주:01권12]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무산 기슭에 있던 대수촌으로, 무산은 현재의 어느 山을 가리키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 茂山을 山名이 아닌 지명으로 보아 충북 제천시 淸風面 혹은 경북 義城지방에 비정하는 설도 있으나(金哲埈, 앞의 논문, 1952, 45쪽. 千寬宇, 〈三韓의 國家形成〉(上), 《韓國學報》 2, 1976, 23쪽) 확실치는 않다. 무산 대수촌의 위치에 관하여, 1) 현재 경북 경주시 西川의 지류인 牟梁川 유역으로, 孝峴洞이 그 중심이라는 설(李丙燾, 앞의 책, 1976, 602~603쪽), 2) 충북 제천세와 경북 醲川郡의 2개촌으로 파악하는 설(金哲埈, 앞의 논문, 1952, 45쪽), 3) 경주 서쪽의 乾川 牟梁里, 金尺里 일대로 보는 설(金元龍, 앞의 논문, 1976, 11쪽) 등이 있다. 《三國遺事》 권1 紀異篇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 의하면, 무산 대수촌의 우두머리는 俱(仇)禮馬로서 처음에 伊山 혹은 皆比山에 내려왔다고 한다. 신라 유리왕 9년에 무산 대수촌은 牟梁部 혹은 漸梁部로 개명되었으며, 고려 태조 23년(940)에는 長福部로 바뀌었다(《高麗史》 권57, 地理2).
[역주:01권13]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금산 기슭에 있던 가리촌으로, 加利村을 加里村으로도 표기하였다. 《三國遺事》 권1 紀異篇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 금산은 고려시대의 金剛山 栢栗寺 北山이라 하였다. 그 위치에 관하여, 1) 현재의 경주시 小金剛山 栢栗寺 부근으로 보는 설(李丙燾, 앞의 책, 1976, 603쪽. 金元龍, 앞의 논문, 1976, 12쪽), 2) 현재의 경북 金泉市와 高靈郡 星山面 부근의 2개 촌으로 파악하는 설(金哲埈, 앞의 논문, 1952, 44쪽), 3) 경북 경주시 陽南面과 陽北面에 위치했다고 보는 견해(慶州市 編 《新羅의 傳說集》, 1980, 14쪽) 등이 있다. 《三國遺事》 권1 紀異篇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 의하면, 금산 가리촌의 우두머리는 祗沱 혹은 只他로서 처음에 明活山에 내려왔다고 한다. 그러나 祗沱가 명활산에 내려왔다는 기록은 그가 金剛山에 내려왔다는 설화의 잘못이다. 금산 가리촌은 신라 유리왕 9년에 漢祗部로 개명되었으며 고려 태조 23년(940)에는 다시 加德部로 개칭되었다(《高麗史》 권57, 地理2).
[역주:01권14]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명활살 기슭에 있던 고야촌으로, 명활산은 현재 경북 경주시의 북천 南邊에 있는 산으로 천문동과 보문동에 걸쳐 있다. 그 곳에는 신라시대의 城址가 현재도 남아 있으며 명활산성의 축성과 관련된 明活山城作城碑가 최근에 발견되기도 하였다. 고야천의 위치에 관하여, 1) 명활산 서남쪽 기슭의 경주시 普門洞 및 狼山 부근이라는 설(李丙燾, 앞의 책,1976, 603쪽), 2) 명활산은 慶州의 명활산이고 고야촌을 현재의 경북 永川市로 비정하는설(金哲埈, 앞의 논문, 1952, 46쪽), 3) 경주시 보문동 일대로서 낭산은 포함되지 않는다는 설(金元龍, 앞의 논문, 1967, 12쪽) 등이 있다. 《三國遺事》 권1 紀異篇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 의하면 명활산 고야촌의 우두머리는 虎珍으로, 처음에 金剛山에 내려와 薛씨의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호진이 금강산에 내려왔다는 기록은 그가 명활산에 내려온 설화의 잘못이다. 고야촌은 신라 유리왕 9년(서기 32)에 習比部로 개명되었으며 고려 태조 23년(940)에 臨川部로 개칭되었다(《高麗史》 권57, 地理2).
[역주:01권15] 진한(辰韓) 6부(六部)진한은 삼국시대 이전 진한은 삼국시대 이전 韓半島 동남부에 있었던 三韓 중의 하나로 처음에는 6개, 나중에는 12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졌다. 《三國志》 권30 魏書 東夷傳을 비롯한 《後漢書》 권85 東夷傳 등에는 진한의 母胎를 秦의 유망민이라고 하였는데, 본서(권1)에도 이와 유사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 권1 紀異篇 辰韓條에 인용된 崔致遠의 말에 의하면, 진한은 본래 燕나라 사람이 도망해와서 이룩한 것이라 하였다. 辰韓이란 명칭의 유래에 관하여, 1) 秦나라 사람들이 苦役을 피하여 韓에 망명하여 세웠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기록(《後漢書》 권85 東夷傳 辰韓條), 2) 조선왕 準이 위만에게 쫓겨 남쪽으로 내려가 辰國의 동북지역에 거주한 이래로 북방 유이민 社會를 ‘韓’이라 일컬었는데, 그들은 辰王의 보호와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낙랑의 漢人들이 辰韓이라 불렀다고 하는 설(李丙燾, 〈三韓問題의 硏究〉, 《韓國古代史硏究》, 1976, 238~299쪽), 3) 眞番에서 유래했다는 설(千寬宇, 《古朝鮮史·三韓史硏究》, 일조각, 1989, 146~154쪽) 등이 있다. 진한의 위치는 낙동강 동쪽의 慶尙道 지방으로 비정되지만, 漢江 유역을 중심으로 한 禮成江 이남의 경기도 일원과 春川 서쪽의 江原道 일부지역으로 보기도 한다(李丙燾, 〈‘韓’名稱의 擴大와 三韓의 區別〉, 《韓國古代史硏究》, 1976, 256~259쪽). 진한의 사회조직은 마한·변한과 유사하였는데, 각 소국의 우두머리를 臣智, 險側, 邑借 등이라 불렀으며 원시적인 통치조직과 그에 따른 관료기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진한 사회는 정치와 제사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다. 진한은 사로국의 성장에 따라 사로국을 중심으로 점차 통합되었다. 한편 6부는 혈연으로 결합된 씨족적 취락인 6촌을 유리왕대에 개명한 것으로 행정구역적인 성격이 강한 사회조직이다. 그런데 본서 및 《三國遺事》에서는 종종 6村과 6部를 혼용하였다. 6부에 관해서는 본서 권1 신라본기 유리 이사금 9년조 참조.
[역주:01권16] 소벌공(蘇伐公)돌산 고허촌의 우두머리. 《三國遺事》 권1 紀異篇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서는 蘇伐都利라고도 하였다. 본서에 의하면 소벌공은 혁거세의 降臨을 맞이하고 그를 양육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이는 곧 6촌장 중에서 소벌공이 가장 유력한 촌장이었음을 의미한다. 또 그는 崔氏 혹은 鄭氏의 시조로 전해지고 있다.
[역주:01권17]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三國遺事》 권1 紀異篇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는, 前漢 地節 원년(서기전 69년) 3월 1일에 6부의 시조들이 각기 자제들을 데리고 閼川 가에 모여 임금을 찾아 나라를 세우자 의논하고 높은 곳에서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 아래의 나정 곁에서 이상한 기운이 있어 찾아가 보았다고 하여 본서와는 달리 6촌장 모두가 혁거세의 강림을 맞이했다고 한다.
[역주:01권18] 나정(蘿井)新羅 始祖 혁거세가 誕降한 곳으로, 현재의 경북 경주시 탑동 700-1번지에 소재한다. 소지왕 혹은 지증왕 대 시조가 誕降한 곳인 奈乙에 神宮을 創置했다고 하는데, 여기서의 奈乙을 蘿井과 동일시하는 견해도 있다(梁柱東, 〈鄕歌의 解釋 특히 願往生歌에 대하여〉, 《靑丘學叢》 19, 1935, 16쪽). 혁거세가 우물 곁에서 태어난 것과 같은 靈井信仰은 알영부인의 경우 외에도 연개소문이 스스로 물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사람들을 현혹시켰다 하였고(본서 권49, 열전 蓋蘇文傳), 《後漢書》 권85 東夷傳 東沃沮條에, 바다 가운데 이는 女人國에는 神井이 있어 여자들이 그 신정을 엿보면 곧 자식을 낳는다는 설화에서도 보인다. 이는 곧 물이 솟아나는 우물을 생명의 근원으로 신성시해온 당시의 관념을 반영해 주고 있다.
[역주:01권19] 말이 무릎을…있었으므로《三國遺事》 권1 紀異篇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는 『有一白馬 拜之狀』라 하여, 흰 말 한 마리가 꿇어앉아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등장하는 말은 성스러운 인물의 降臨을 알리는 使者 즉 天馬의 관념과도 통한다. 특히 白馬는 신령스럽고 祥瑞로운 동물로서 고대 동서양의 여러 나라에서 숭배되었다. 그리고 혁거세의 출생에 말이 관련되는 점에서 박씨족을 기마술에 익숙한 北方 유이민 계통으로 파악하기도 한다(金哲俊, 〈新羅 上古世系와 그 紀年〉, 《韓國古代社會硏究》, 지식산업사, 1975, 72~73쪽).
[역주:01권20] 큰 알만 있었다《三國遺事》 권1 紀異篇 신라 시조 혁거세왕조에는 ‘자줏빛 알[紫卵]’ 혹은 ‘푸른색의 큰 알[靑大卵]’이라 하였다. 건국설화 중에서 알[卵]을 모티브로 한 것을 卵生說話라 하는데, 우리나라의 東明王說話, 脫解說話, 赫居世說話, 首露說話 등이 이에 속한다. 이처럼 알이 신성한 건국설화에 자주 등장하는 것은 알이 생명의 원천 혹은 태양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한편 혁거세가 양산 기슭에 내려온 큰 알에서 태어났다는 것과는 달리 西述聖母가 그를 낳았다는 설화도 있다(《三國遺事》 권1, 紀異篇 신라 시조 혁거세왕조 및 같은 책 권5, 感通篇 仙桃聖母隨喜佛事條). 이는 山神信仰과 건국설화가 습합되어 나타난 현상이다.
[역주:01권21] 그것을… 거두어서 길렀다《三國遺事》 권1 紀異篇 신라 시조 혁거세왕조에는 이 부분의 기록이 보다 자세하다. 즉 『그 알을 깨어보니 모양이 단정한 아름다운 동자가 나왔다. 驚異하게 여겨 그 아이를 東川에 목욕시키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이 따라 춤추며 天地가 振動하고 해와 달이 淸明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를 혁거세왕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역주:01권22] 박(朴)을 성으로 삼았다신라에서의 실제 성씨 사용은 565년을 下限으로 김씨 성이 처음이었고, 박씨와 석씨는 김씨에 뒤이어 6세기 중엽 혹은 6세기 후반 무렵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고 한다(李純根, 〈新羅時代 姓氏取得과 그 意味〉, 《韓國史論》 6, 서울대 국사학과, 1980, 11~21쪽). 이 학설에 따른다면, 본문에서 혁거세가 박씨 성을 일컬었다는 것은 후대의 계보관념으로 소급하여 추기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역주:01권23] 일식(日食)달이 태양을 가리는 천체 현상으로 部分日食, 皆旣日食, 金環日食이 있다. 본서에 기록된 66회의 일식 기록은 오폴쳐(T. V. von Oppolzer)의 日食表와 대부분 일치한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이는 삼국의 독자적인 천체관측에 의한 기록이 아니라 中國 正史의 일식기록을 전재한 것에 불과하다는 설(飯島忠夫, 〈三國史記の日食記事に就いて〉, 《東洋學報》 15-3, 1925, 126~140쪽)과, 최소한 삼국통일 이후의 일식기록은 新羅에서 독자적으로 천체를 관측한 결과에 의한 것이라는 설(金容雲·金容局, 《韓國數學史》, 科學과 人間事, 1977, 36~42쪽). 朴星來, “Portentography in Korea”, Journal of Social and Humanities No 46, 1977, 53~71쪽)이 있다. 한편 《漢書》 권8 宣帝本紀에는 五鳳 4년 4월 그믐 신묘에 일식이 있었다고 한다.
[역주:01권24] 용(龍)상상의 동물로서 우리말로는 ‘미르’ 혹은 ‘바리’라 한다. 용은 옛부터 물을 지배하는 水神으로 신앙되었는데, 여기서 용이 우물에서 출현한 것도 용과 물의 親緣關係를 말해 준다. 특히 본서에 등장하는 용에 관한 기사 21건 중에서 출현 장소가 명기된 것은 11건인데, 이 중 9건이 우물 혹은 연못가였다. 이 점 또한 용이 물과 관련이 깊음을 방증해 준다(金貞淑, 〈新羅文化에 나타난 動物의 象徵〉, 《新羅文化》 7, 1990, 73~76쪽).
[역주:01권25] 알영정(閼英井)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왕비가 되는 알영이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우물. 《三國遺事》 권1 紀異篇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서는 娥利英井이라고도 하였다. 《新增東國輿地勝覽》 권21, 慶州府, 古蹟條와 《東京雜記》 권2 古蹟條에 의하면, 알영정은 慶州府의 남쪽 5里 되는 곳에 있다고 한다. 그 위치는 《三國遺事》(권1)에서 沙梁里라 하였는데, 현재의 경북 경주시 南山 서북쪽 기슭 일대일 것으로 추정된다.
[역주:01권26] 용(龍)이… 여자아이를 낳았다《三國遺事》 권1 紀異篇 신라 시조 혁거세왕조에도 알영의 탄생 설화를 전하고 있으나, 몇가지 점에서 본서와 다르게 기술되어 있다. 1) 알영의 출생 연대를 혁거세의 탄생시기와 같은 漢나라 地節 원년(서기전 69)이라 한 점, 2) 鷄龍의 왼쪽 옆구리에서 알영이 태어났다고 한 점, 3) 閼英井의 위치를 沙梁里로 밝히고 있는 점, 4) 알영은 출생 당시에 입술이 닭부리 같이 생겨서 그것을 北川에서 씻어 떨어뜨렸다고 한 점, 5) 알영의 탄생을 목도한 사람이 老嫗가 아닌 6부의 시조 및 그들의 子弟였다는 점, 6) 용의 출현 지점을 우물 곁이라 한 점 등이다. 한편 알영이 용의 옆구리에서 태어났다고 한 것은, 불교에서 釋迦牟尼가 摩耶夫人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右脇誕生을 신성시하는 것과 같은 의식에서 나온 설화로 여겨진다.
[역주:01권27] 할멈(老嫗)나이 많은 늙은 여자를 말한다. 본서에 가끔 등장하는 老嫗를 豫知와 占卜을 행하는 샤만(Shaman)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崔光植, 〈三國史記 所在 老嫗의 性格〉, 《史叢》 25, 1981, 9쪽).
[역주:01권28] 왕비혁거세의 부인인 閼英을 말한다. 알영을 娥利英, 娥伊英, 娥英이라고도 하였다. 알영의 출자를 閼智와 연결시켜 닭 토템을 가진 김씨 부족으로 보기도 하고, 혹은 용 토템을 가진 이주민 집단으로 보기도 한다. 알영은 죽어 五陵에 묻혔다.
[역주:01권29] 두 성인[二聖]혁거세와 왕비 알영을 지칭한다. 중국에서는 주나라의 文王과 武王, 혹은 周公과 孔子를 二聖이라 하였고 또는 당나라 高宗과 그 황후 則天武后를 二聖이라 하였다.
[역주:01권30] 왜인(倭人)본서에 빈번히 나타나는 6세기 이전에 신라를 침략한 倭는 일본의 대마도 혹은 北九州 등지에 100여 국으로 흩어져 있던 倭集團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본서 신라 초기에 자주 등장하는 왜의 실체를 , 1)한반도 남부에 있던 가야 혹은 가야에 거주하던 倭로 보는 설(井上秀雄, 〈韓鮮における 古代史硏究と 倭について〉, 《任那日本府と倭》, 1973년, 407~409쪽. 鬼頭淸明, 〈任那日本府の檢討〉, 《日本古代國家の形成と東アジア》, 1976. 鈴木英夫, 〈三國史記新羅本紀倭人·倭兵記事の檢討〉, 《國史學》 101, 1977), 2)韓族이 일본열도에 진출하여 세운 韓人倭라는 설(李鍾恒, 〈三國史記에 보이는 倭의 實體〉, 《國民大論文集》 4, 1976) 등이 있다. 그들은 주로 계절풍이 불며 춘궁기인 4, 5월에 집중적으로 신라를 침범하였고 그들의 침입이 대부분 동해 연안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 등으로 보아, 식량 등의 생활필수품 약탈이 그들의 주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旗田巍, 〈三國史記新羅本紀にみえる倭〉, 《日本文化と朝鮮》, 1975, 93쪽).
[역주:01권31] 살별[星孛]살별에는 孛星·彗星·長星이 있다. 패성은 내뿜는 빛줄기가 짧고 그 빛이 사방으로 분출되는 것이고, 혜성은 빛의 꼬리가 길게 늘어뜨려진 것이며, 장성은 빛의 꼬리가 직선으로서 대체로 긴 것을 말한다(《漢書》 권4, 文帝 8년조 文潁의 注). 살별이 나타나면 나쁜 기운이 생긴다고 한다.
[역주:01권32] 왕량(王良)카시오페아 별자리에 속해 있는 벼로서 東方에 있다. 天馬星이라도고 한다. 《史記》에 의하면, 왕량은 東馬를 맡아 다스린다는 天駟星 옆에 있다고 한다.
[역주:01권33] 삼(參)오리온 별자리의 남족에 있는 3개의 별과 그 주위의 4개별 총 9개의 별로 구성된 별자리로서 西方에 있다. 이 가운데 3개의 별이 쟁기[犁] 모양을 하기 때문에 犁星이라고도 한다.
[역주:01권34] 변한(卞韓)이 … 항복해 왔다.변한은 한반도 동남부의 낙동강 하류를 중심으로 한 小國聯盟體로 '弁韓' 혹은 ‘(弁辰)’이라고도 하였다. 변한은 弁辰狗倻國, 弁辰彌烏邪馬國 등 12개의 小國으로 구성되었으며, 철을 생산하여 倭·樂浪 등지와 교역하였다. 변한의 언어, 법속, 의식주 생활은 진한과 같았고 제사 풍속만은 달랐으며, 특히 변한에는 편두와 文身의 풍습이 있었다. 변한 소국들은 후에 가야연맹으로 발전하였다. 《三國志》 권30, 魏書 東夷傳에 의하면, 3세기 중엽가지 변한 12국이 존속해 있었다고 하므로 본서에서 혁거세 19년(서기전 39)에 변한이 신라에 항복해 왔다고 한 것은 그 신빙성이 의심된다. 설령 본서의 기록을 그래도 받아들인다 해도, 이는 실제 落東江 하류 지역에 있던 변한 小國이 來降해 온 것이 아니라 변한이 진한의 附庸的 지위에 있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이해하던지(千寬宇, 〈三國考(1부)-三韓의 成立過程〉, 《古朝鮮史 ·三韓史硏九》, 일조각, 1989, 182쪽), 혹은 변한 12소국 중의 한 나라가 사로국에 투항해온 것으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역주:01권35] 금성(金城)혁거세 21년(서기전 37)에 금성을 쌓은 사실은 본서 권34 잡지 地理(1)와 《三國遺事》 王曆篇에서도 확인된다. 금성의 위치에 대하여, 1) 현재의 경북 경주시 남산 서북쪽의 蘿井 부근 일대로 추정하는 설(李鍾旭, 《新羅上代王位繼承硏究》, 영남대 출판부, 1980, 57쪽), 2)분황사 북족의 알천 유역으로 보는 설(蕂島玄治郞, 《朝鮮建築史論》, 1930, 18쪽), 3)조선시대의 경주 邑城地로 보는 설(金秉模, 〈都市計劃〉, 《歷史都市 慶州》), 4)미추왕릉 동족의 무너진 토성지로 보는 설(慶州市史編纂委員會 編, 《慶州市誌》, 1971, 528쪽), 5)金城의 본래 의미를 '검城' 즉 '임금城[王城]'으로 보아 현재의 월성을 가리킨다는 설(朴方龍, 〈都城·城址〉, 《韓國史論》 15, 國史編纂委員會, 1985, 341~342쪽) 등이 있다.
[역주:01권36] 동명(東明)고구려의 시조. 재위기간은 서기전 37년~서기전 19년이다. 본서 권13 주석 1 참조.
[역주:01권37] 여름 6월 그믐 임신에 일식이 있었다《漢書》 권9 元帝 建昭 5년 6월 임신조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日食은 해와 달의 黃經이 같은 매달 초하루에 일어난다. 그런데 본서의 기록에는 종종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고 하는 데, 그 이유는 당시 사용되었던 朔望月의 길이가 현재의 값보다 조금 길었기 때문이었다(玄正晙, 〈韓國의 古代 日食紀錄에 관하여〉 《東方學志》 22, 1979, 106쪽).
[역주:01권38] 금성(金城)에 궁실을 지었다《三國遺事》 권1 紀異篇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 의하면, 남산 서쪽 기슭에 궁실을 지었는데 고려시대의 昌林寺라 하엿다. 그리고 《新增東國輿地勝覽》 권21, 경주부, 고적 昌林寺條에는 『金鰲山 기슭에 신라시대의 宮殿 터가 있었는데 후대 사람들이 그 땅에 이 절을 세웠다』고 한다. 위의 문헌기록에 따른다면 금성에 지었다는 궁실의 위치를 창림사지로 추정되는 현재의 拜洞 일대로 비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아직 궁실과 관계있는 고고학적인 유적과 유물이 전혀 발견된 적이 없다.
[역주:01권39] 여름 4월 그믐 기해에 일식이 있었다《漢書》 권10 成帝 河平 원년 4월 기해조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역주:01권40] 낙랑인(樂浪人)이… 침범하려다가낙랑은 漢 武帝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하였던 漢四郡 중의 하나로서, 서기전 108년에서 313년까지 존속하였다. 본문에서의 낙랑 침입기사에 대하여, 중국 본토에서 漢四郡에 와있던 관리·상인집단이 군대를 대동하고 교역을 위하여 海路로 사로국에 왔다가 충돌을 일으킨 사실로 이해하기도 하고(李鍾旭, 〈斯盧國의 城將과 辰韓〉, 《韓國史硏究》 25, 1979, 10~11쪽), 혹은 이른바 北辰韓 세력이 남하하던 도중에 낙랑과 충돌한 사건으로 파악하기도 한다(千寬宇, 앞의 책, 1989, 180~181쪽). 그러나 이 기사를 낙랑지역에서 남하하던 위만조선의 유민과 신라가 충돌한 사실로 해석하면 어떨까 한다.
[역주:01권41] 가을 8월 그믐 을묘에 일식이 있었다《漢書》 권10 成帝 河平 3년 8월 을묘조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역주:01권42] 호공(瓠公)族姓과 생몰년은 미상이다. 본서에 의하면, 호공은 본래 왜인으로 신라에 건너와서 혁거세 38년(서기전 20) 마한에 使臣으로 파견되었으며 脫解王 2년(서기전 58)에는 大輔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三國遺事》 권1 紀異篇 金閼智 脫解王代條에 의하면, 호공은 탈해왕 4년(서기 60)에 始林에서 閼智의 誕降을 처음 목도하여 왕에게 아뢰었다 하고, 일찍이 그는 楊山 아래 즉 현재의 半月城에 거주하였는데 탈해의 꾀에 속아 집을 빼앗겼다는 설화가 본서 권1 신라본기 탈해 이사금 즉위년조와 《三國遺事》 권1 紀異篇 金閼智 脫解王條에 실려 있다.
[역주:01권43] 마한(馬韓)삼국이 鼎立되기 이전 한반도의 서남부 즉 경기도·충청도·전라도 일대에 있었던 小國聯盟體로, 마한은 백제국·목지국 등 54개의 小國으로 구성되었으며 三韓 중에서 가장 강력한 연맹체였다. 본서 권23 주석 50 참조.
[역주:01권44] 진한과 변한 두 나라는 우리의 속국인데靑銅器文化 단계의 馬韓 小國연맹체는 진한이나 변한보다 선진집단이었음이 考古學的인 遺物들에 의하여 증명된다(李賢惠, 앞의 책,1982, 37~45쪽). 그러므로 철기문화를 소지한 부여계의 백제와 위만조선 및 漢族 流民이 남하하기 이전에는 진한과 변한이 마한에 예속되어 있었을 법하다. 이러한 사실은 《三國志》 권30 魏書 東夷傳의 기사, 즉 弁辰韓 24국 중에서 12국은 辰王 곧 馬韓王에 臣屬되어 있었다든지 혹은 마한이 그들의 동쪽 땅을 분할하여 진한에게 주어 살게 했다는 기록과 《後漢書》 권85 東夷傳 韓條의 『마한이 가장 강대하여 그 종족들이 함께 王을 세워 辰王으로 삼고 目支國에 도읍하여 전체 삼한지역의 王으로 군림하였는데, 諸國王의 先代는 모두 馬韓 種族의 사람이다』라고 한 기사에서도 확인된다. 《삼국사기》의 이 기사도 위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는 기록이다.
[역주:01권45] 중국의 사람들이… 섞여 살았다서기전 2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북방 유이민들이 대거 남하하여 辰韓 지역에 거주한 사실은 考古學的인 유물과 각종 문헌자료에 의하여 확인된다. 본서의 이 기록은 《三國志》 권30 魏書 東夷傳 辰韓條와 《後漢書》 권85 東夷傳 韓條의 내용에 상응한다.
[역주:01권46] 서한(西韓)사로국의 서쪽에 있는 韓이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馬韓을 가리킨다.
[역주:01권47] 온조(溫祖)백제의 건국 시조로 재위 기간은 서기전 18년~서기 28년이다. 본서 권23 주석 2 참조.
[역주:01권48] 2월 그믐 을유에 일식이 있었다《漢書》 권10 成帝 永始 2년 2월 을유조에 동일한 사실이 실려 있다.
[역주:01권49] 동옥저(東沃沮)삼국시대 이전 현재의 함경남도 함흥 일대를 중심지로 하여 존속하던 나라. 동옥저보다 북쪽인 두만강 유역에 있던 집단을 北沃沮라 하였다. 《三國志》 권30 魏書 東夷傳 東沃沮條에 의하면, 동옥저는 蓋馬大山의 동쪽에 있는데 해안에 연접하여 천리에 뻗어 있고 戶數는 5천 호였으며 大君王은 없고 읍락마다 각기 三老라는 우두머리가 있어 그들을 통솔했다고 한다. 또 동옥저에는 민며느리제도와 二次葬의 풍습이 있었고 그 나라 사람들은 步戰에 能했다고 한다. 동옥저는 고구려 등 강대국의 주변에 있었기 때문에 항상 그들의 지배를 받아 왔다. 즉 일찍이 위만조선의 지배를 받다가 漢郡縣에 편입되었고 마침내는 고구려 太祖王 4년(56)에 고구려에 병합되었다.
[역주:01권50] 남한(南韓)동옥저의 남쪽에 있는 韓이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사로국을 가리킨다.
[역주:01권51] 하고(河鼓)牽牛星 북쪽에 있는 세 개의 별로서 何鼓, 天鼓, 黃鼓라고도 한다. 《晉書》권21 天文志에 『何鼓는 세 개의 별로, 牽牛의 북쪽에 있으며 天鼓라고도 하는데 軍鼓를 주관한다』고 하였다. 한편 《漢書》 권11 哀帝 建坪 3년(서기전 4) 3월 乙酉條에 살별이 何鼓에 나타났다는 동일한 사실이 실려 있다. 본서에서는 '2월 을유'라 하였으나, 서기전 4년 2월 초하루는 壬子이므로 乙酉가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본서의 이 기사는 《漢書》의 '3월'을 '2월'로 잘못 전재한 것이 아닌가 한다.
[역주:01권52] 정월 초하루 신축에 일식이 있었다《漢書》 권11 哀帝 元壽 원년 정월 신축조에 동일한 사실이 실려 있다.
[역주:01권53] 9월 그믐 무신에 일식이 있었다《漢書》 권12 平帝 元始 2년 9월 무신조에 동일한 사실이 실려 있다.
[역주:01권54] 죽었다[昇遐]昇遐는 왕의 죽음을 높이는 말로, 升遐라고도 쓴다. 본서의 본기에서는 신라와 고구려 시조에게만 이 용어를 사용하였고 연표에서는 고구려 시조에게만 사용하였다. 그 외의 다른 왕의 죽음에 대하여서는 諸侯의 죽음을 뜻하는 '薨'자를 사용하였다.
[역주:01권55] 사릉(蛇陵)현재의 경북 경주시 탑정동 67번지에 소재하고 있는 五陵을 말한다. 《三國遺事》 권1 紀異篇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 의하면, 혁거세가 죽은 지 7일 후에 遺體가 흩어져 땅에 떨어졌으며 왕후도 따라 죽었으므로 사람들이 합하여 장사지내려 했으나, 큰 뱀이 나타나 그것을 못하도록 막았기 때문에 五體를 각각 따로 장사지내어 五陵이라 하고 또한 蛇陵이라 했다고 한다. 그런데 본서(권1)에 혁거세의 후손인 남해왕, 유리왕, 파사왕을 각각 蛇陵園에 장사지냈다고 한 점으로 보아, 사릉은 혁거세와 閼英을 장사지냈을 때의 처음 이름이고 五陵은 남해왕 등 세 왕의 陵이 부가된 후의 이름이라 하겠다.
[역주:01권56] 담암사(曇巖寺)신라의 이른바 '前世七處伽藍'의 하나로, 《三國遺事》 권3 興法篇 阿道基羅條에 서술된 내용으로 보아 이 절은 문무왕대 이후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世宗實錄地理志》와 《新增東國輿地勝覽》 그리고 《東京雜記》 등의 기록을 대조해 보면, 담암사는 15세기 후반에서 17세기 후반 사이에 廢寺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姜仁求 外, 《新羅五陵》,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0, 18쪽). 이 절의 위치는 현재의 경북 경주시 탑동에 소재하는 崇德殿 부근으로 추정된다(姜仁求 外, 앞의 책, 1990, 18쪽).
南解次次雄立 (次次雄 或云慈充 金大問云 方言謂巫也 世人以 巫事鬼神 尙祭祀 故畏敬之 遂稱尊長者 爲
慈充) 赫居世嫡子也 身長大 性沈厚 多智略 母閼英夫人 妃雲帝夫人(一云阿婁夫人) 繼父卽位 稱元論曰
人君卽位 踰年稱元 其法 詳於春秋 此先王不刊之典也 伊訓曰 成湯旣沒 太甲元年 正義曰 成湯旣沒 其歲
卽太甲元年 然孟子曰 湯崩 太丁未立 外丙二年 仲壬四年 則疑若尙書之脫簡 而正義之誤說也 或曰 古者
人君卽位 或踰月稱元年 或踰年而稱元年 踰月而稱元年者 成湯旣沒 太甲元年 是也 孟子云太丁未立者 謂
太丁未立而死也 外丙二年 仲壬四年者 皆謂 太丁之子 太甲二兄 或生二年 或生四年而死 太甲所以得繼湯
耳 史記便謂此仲壬 外丙爲二君 誤也 由前 則以先君終年 卽位稱元 非是 由後 則可謂得商人之禮者矣。
元年 秋七月 樂浪兵至 園金城數重 王謂左右曰 二聖棄國 孤以國人推戴 謬居於位 危懼若涉川水 今鄰國
來侵 是孤之不德也 爲之若何 左右對曰 賊幸我有喪 妄以兵來(妄 舊本作妾 誤也) 天必不祐
不足畏也 賊俄而退歸
三年 春正月 立始祖廟 冬十月丙辰朔 日有食之
五年 春正月 王聞脫解之賢 以長女妻之
七年 秋七月 以脫解爲大輔 委以軍國政事
八年 春夏 旱
十一年 倭人遣兵船百餘艘 掠海邊民戶 發六部勁兵以禦之 樂浪謂內虛 來攻金城甚急 夜有流星 墜於賊營
衆懼而退 屯於閼川之上 造石堆二十而去 六部兵一千人追之 自吐含山東至閼川 見石堆知賊衆 乃止。
十三年 秋七月戊子晦 日有食之
十五年 京城旱 秋七月 蝗 民饑 發倉廩救之
十六年 春二月 北溟人耕田 得濊王印獻之
十九年 大疫 人多死 冬十一月 無氷
二十年 秋 太白入太微
二十一年 秋九月 蝗 王薨 葬蛇陵園內
[역주:01권57]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신라의 제 2대 임금. 혁거세의 아들로 재위기간은 서기 4~24년이다. 이 왕대에 처음으로 始祖廟를 세워 혁거세를 제사지냈다. 《三國遺事》 王曆篇에서는 남해의 왕호 역시 居西干이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역주:01권58] 차차웅(次次雄)신라 초기 왕의 칭호로서 慈充이라고도 하였다. 차차웅과 자충은 같은 말을 달리 표기한 것으로, 이는 남해왕에게만 붙였던 칭호이다. 金大問에 의하면, 차차웅은 원래 무당을 일컫는 말이었으나 후에 존장자의 칭호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차차웅을 군장이 靈能者의 역활을 하였던 祭政一致時代 왕의 칭호로 해석하기도 하고(李丙燾, 〈신라의 기원문제〉, 앞의 책, 1976, 611쪽) 혹은 차차웅 또는 자충의 半切이 ‘중’인 점에서 차차웅은 원래 남자무당을 의미하였으나 불교수용 후에는 남자 승려의 뜻이 되었다고 한다(鮎貝房之進, 〈新羅王位號及び追封王號について〉, 《雜攷》 1, 44~59쪽).
[역주:01권59] 김대문(金大問)신라 성덕왕대에 한산주 총관을 역임했던 진골출신의 관리 및 저술가. 본서 권46 주석 117 참조. 한편 본서에 인용된 차차웅에 관한 김대문의 설명은 그의 저술 《鷄林雜傳》으로부터 인용했을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李基白, 〈金大問과 그의 史學〉, 《歷史學報》, 77, 1978, 2~8쪽).
[역주:01권60] 방언(方言)중국 말에 대한 신라 고유의 말을 뜻한다.
[역주:01권61] 운제부인(雲帝夫人)《三國遺事》 권1, 紀異篇, 南解王條에, 雲帝를 '雲梯’로 쓰기도 하는데 고려시대 迎日縣 서쪽에 雲梯山 聖母가 있어 가뭄 때 빌면 영험이 있었다고 한다. 가계와 행적에 관해서는 미상이다.
[역주:01권62] 사론(史論)역사가가 史書를 편찬할 때 본 기사의 내용과 구별하여 자신의 견해를 밝힌 글. 史論은 史書에 따라 贊, 論, 評, 議 또는 某曰 등으로 각기 달리 표현하였다. 본서에서는 사론을 모두 ‘論曰’이라고 하였으며 31편의 사론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들은 모두 본서의 監修者인 金富軾이 직접 쓴 것으로 생각된다(鄭求福, 〈高麗時代 史學史硏求〉, 서강대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85, 9~10쪽).
[역주:01권63] 춘추(春秋)孔子가 저술한 편년체의 魯나라 역사책. 여기에는 隱公부터 哀公까지 242년 동안의 사적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을 주석한 것으로는 左氏傳, 公羊傳, 穀梁傳, 鄒氏傳, 夾氏傳이 있었으나 鄒氏傳과 夾氏傳은 전해지지 않고 앞의 3傳만 전해지는데, 이를 春秋 3傳이라 한다. 춘추는 五經의 하나로, 동양에서 역사서술의 典範이 되어 왔다.
[역주:01권64] 이훈(伊訓)(書經)의 편목 이름. 중국 은나라 成湯王 대의 賢臣이었던 伊尹이 탕왕의 아들 太甲을 警戒하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역주:01권65] 성탕(成湯)은나라를 건국한 湯王을 말한다. 履 또는 天乙 혹은 太乙이라고도 하였는데, 夏나라 桀王을 내쫓고 즉위하여 13년간 재위하였다.
[역주:01권66] 태갑(太甲)《史記》 권3 殷本紀에 의하면, 商나라 제4대 임금이다. 湯王의 장손으로 仲壬을 이어서 즉위하였으나, 성격이 포악하고 현명치 못하여 湯王을 보좌한 적이 있는 伊尹에 의하여 桐宮에 유폐되었다가 3년 후에 復位하였다.
[역주:01권67] 정의(正義)唐의 孔穎達, 顔師古 등이 5경을 주해하여 이를 正義라고 하였다. 여기서는《書經正義》를 지칭한다.
[역주:01권68] 맹자(孟子)四書의 하나로, 맹자가 공자의 道와 仁義를 설하고 왕도를 펴기 위하여 여러 나라를 두루 다니면서 諸侯 및 諸子들과 문답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본서에 인용된 《孟子》의 句節은 萬章篇(上)에 있는 말로서, 萬章이 禹王은 왜 천하를 현인에게 맡기지 않고 자기의 아들에게 전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맹자의 대답 속에 들어 있다.
[역주:01권69] 태정(太丁)《史記》 권3 殷本紀에 의하면, 태정은 湯王의 태자였으나 즉위하기 전에 죽었으므로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殷의 卜辭에 태정의 이름이 자주 나타나는 점에서 태정이 즉위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역주:01권70] 외병(外丙)은나라 탕왕의 아들로 《史記》 권3 殷本紀에 의하면, 태자였던 태정이 즉위하기 전에 죽었기 때문에 동생인 외병이 즉위하여 3년간 재위했다고 한다.
[역주:01권71] 중임(仲壬)은나라 탕왕의 아들 《史記》 권3 殷本紀에는 仲壬이 형인 외병을 이어 즉위하여 4년간 재위했다고 하였으나, 《書經》 伊訓篇의 서문에는 외병과 중임의 즉위 사실을 기술하지 않았다. 또 지금까지 발견된 殷의 卜辭에도 주임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역주:01권72] 태갑의 두 형본서에는 外丙과 仲壬을 태정의 아들 태갑의 형이라 하였으나, 《史記》 권3 殷本紀에서는 외병과 중임을 태정의 동생이라 하여 차이를 보이고 있다.
[역주:01권73] 2년 혹은 4년만에 죽었음이는 《孟子》 萬章篇(上)의 《外丙二年仲壬四年》 이라 한 句節에 대한 《삼국사기》 찬자의 해석이다.
[역주:01권74] 사기(史記)에서…두 임금이라 하였으나《史記》는 漢나라 司馬遷이 黃帝로부터 漢 武帝에 이르기까지 1,300여년 간의 사적을 紀傳體로 찬술한 역사책으로 13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에서 외병과 중임을 두 임금이라 한 것은 《史記》 권3 殷本紀에서 외병을 帝外丙, 中(仲)壬을 帝中壬이라 한 것을 가리킨다.
[역주:01권75] 전자(前者)해를 넘겨 원년을 칭하는 이른바 踰年 稱元法을 주장하는 《春秋》의 論法을 말한다.
[역주:01권76] 후자(後者)卽位年 稱元法을 주장하는《尙書》의 論法을 말한다.
[역주:01권77] 상(商)탕왕이 夏나라 桀을 내쫓고 세운 나라로, 처음에는 현재의 중국 山東省 曹縣 薄城 혹은 安徽省 亳縣인 亳에 도읍하였다가 후에 盤庚이 현재의 중국 河南省 安陽인 殷으로 천도하였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商을 殷이라 칭한다. 28왕이 이어서 다스리다가 서기전 1,223년에 周의 武王에게 멸망하였다.
[역주:01권78] 상(商)나라 사람의 예법을 얻었다이 구절은 본서의 찬자가 신라에서의 즉위년 칭원법 사용을 정당화한 부분이다. 즉 《春秋》에 의거한다면 즉위년 칭원법이 잘못이다. 그러나 《春秋》 이전에 지어진 《尙書》 伊訓篇에서 이미 즉위년칭원법을 채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尙書》를 예로 들어 신라에서의 즉위년 칭원법 사용을 정당화하였다(정구복, 앞의 논문).
[역주:01권79] 시조묘(始祖廟)본서 권32 잡지 祭祀條에서 남해왕 3년 봄에 세웠다는 『太祖赫居世廟』로, 신라의 건국시조 혁거세를 제사지내던 사당이다. 본서 권32 주석 3 참조.
[역주:01권80] 10월 초하루 병진에 일식이 있었다《漢書》 권99 王莽傳 居攝 원년 10월 병진조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역주:01권81] 탈해(脫解)신라의 제4대 임금. 재위기간은 서기 57년~서기80년이다. 吐解라고도 하였다. 본서 권1 주석 135 참조.
[역주:01권82] 맏딸탈해왕비가 되었던 阿孝夫人을 가리킨다.
[역주:01권83] 대보(大輔)신라 초기에 국정을 총괄하던 관직으로 고구려에도 초기에 大輔의 관직이 있었다. 본서 권38 잡지 직관(上)에 『以軍國事委任大臣 謂之大輔』라 한 것을 볼 때 大輔는 신라에서 군국의 일을 총괄하던 재상과 같은 존재였음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는 천자를 보필하는 임무를 맡은 주요한 관리를 통틀어 四輔라고 하였는데, 신라의 대보도 그러한 성격을 가진 재상의 우두머리 관직으로 생각된다. 신라에서 대보에 임명된 예는 脫解와 瓠公 그리고 閼知가 있었다. 신라에서 대보의 관직은 탈해왕대 이후에는 보이지 않고 대신 伊伐湌, 伊湌 등의 官等을 가진 사람이 종래의 대보의 역활을 대신 수행하였다.
[역주:01권84] 유성(流星)우주의 별 사이에 있던 微粒子가 대기층으로 들어올 때 공기와의 마찰에 의하여 별처럼 빛을 내며 흐르는 것으로 奔星, 隕星 혹은 별똥별이라고도 한다. 이때 타다가 남은 물체가 隕石이다.
[역주:01권85] 토함산(吐含山)현재의 경북 경주시 동남쪽에 있는 산으로 신라시대 五嶽 중의 東岳으로서 中祀의 대상지였다. 이 산은 신라의 동쪽 경계에 위치하여 왜병의 침략을 막는 요충으로서 국경의 산악으로 중시되었고, 昔氏部族의 상징적 산악으로 신성시되었다. 본서 권32 주석 51 참조.
[역주:01권86] 가을 7월 그믐 무자에 일식이 있었다《漢書》 권99 王莽傳 天鳳 3년 7월 무자조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역주:01권87] 15년본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三國遺事》 권1 紀異篇 南解王條와 《三國史節要》 권1 남해왕 15년 4월조에, 이 해에 고구려에 속해 있던 일곱 나라가 신라에 와서 투항했다는 기록이 있다.
[역주:01권88] 누리의 재해메뚜기과에 속하는 곤충인 누리[蝗]가 떼를 지어 날아 다니며 농작물을 갉아먹는 재해이다. 徐光啓의 《農政全書》 권44 除蝗疏에 의하면, 누리의 발생 시기는 4월부터 8월인데 6월에 가장 많다고 한다. 삼국시대 우리나라에서는 7~8월에 누리가 가장 많이 나타났다(李昊榮, 〈韓國古代社會의 災害와 九賓策〉, 《史學志》 5, 1971, 27쪽).
[역주:01권89] 북명(北溟)현재의 강원도 강릉지방 혹은 함경남도 안변 일대로 비정하기도 한다(李丙燾, 〈臨屯郡考〉, 앞의 책, 1976, 205~206쪽). 이 지역은 원래 동예족의 거주지였는데 고조선 멸망 후 漢나라가 이곳에 임둔군을 설치하여 다스렸다. 후에 이 지역은 고구려에 복속되었다가 진흥왕대에 이르러서 다시 신라의 영역에 편입되었다. 그런데 본서에서는 남해왕 16년(서기 19)에 이미 이 지방이 신라에 예속된 것처럼 서술하고 있으나, 그 사실성 與否가 의심스럽다.
[역주:01권90] 예왕(濊王)의 인장濊는 한반도 중북부와 함경남도 安邊, 강원도 강릉 일대의 동해안에 있던 나라 혹은 종족 이름으로 남해왕 16년 당시 이 지역은 낙랑군의 東部都尉에 속해 있었다. 그런데 이 시기에 北溟 사람이 濊王의 인장을 신라에 바쳤다는 본문의 기사는 시기적으로 믿기 어렵다. 만약 그런 사실이 있었다면 이는 아마도 이 지역이 신라의 영역으로 편입된 지증왕 혹은 진흥왕대 이후의 사실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리고 濊王의 인장이라는 것은 현재 유물이 전해지고 있는 ‘夫租薉君’의 인장과 마찬가지로 안변 혹은 강릉 일대에 살던 濊의 족장이 漢의 郡縣으로부터 받은 인장일 것이다.
[역주:01권91] 금성[太白]태양계에 딸린 별의 하나로 지구에서 가장 가깝고 태양에서 두번째에 있다. 금성은 나타나는 시각과 방위에 따라 달리 불리워지는데, 초저녁에 서쪽에 보일 때를 개밥바라기 혹은 太白星이라 하고 새벽에 동쪽에 보이는 것을 샛별 혹은 啓明星이라 한다.
[역주:01권92] 태미(太微)翼·軫의 북쪽 즉 獅子 별자리의 서쪽 끝 부근에 있는 별자리로 10개의 별로 구성되었다. 이 별자리는 천자의 宮庭을 상징하며 天市, 紫微와 함께 三垣이라 불리운다
[역주:01권93] 왕이 죽어[薨]‘薨’은 제후의 죽음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말로, 천자의 죽음은 ‘崩’이라 하였다. 《新唐書》 권46 百官志(1)에 의하면, 3품 이상의 죽음을 薨이라 하고 5품 이상은 卒, 6품부터 庶人의 죽음은 死라 일컫는다고 하였다.
[역주:01권94] 사릉원(蛇陵園)시조 혁거세와 알영부인을 장사지낸 蛇陵의 묘역으로, 현재의 경북 경주시 탑정동 67번지에 있는 五陵의 묘역이 그것이다.
儒理尼師今立 南解太子也 母雲帝夫人 妃日知葛文王之女也(或云妃姓朴許婁王之女) 初南解薨 儒理當立
以大輔脫解素有德望 推讓其位 脫解曰 神器大寶 非庸人所堪 吾聞聖智人多齒 試以餠噬之 儒理齒理多
乃與左右奉立之 號尼師今 古傳如此 金大問則云 尼師今方言也 謂齒理 昔南解將死 謂男儒理 壻脫解曰
吾死後 汝朴昔二姓 以年長而嗣位焉 其後 金姓亦興 三姓以齒長相嗣 故稱尼師今。
二年 春二月 親祀始祖廟 大赦
五年 冬十一月 王巡行國內 見一老嫗飢凍將死 曰予以眇身居上 不能養民 使老幼至於此極 是予之罪也
解衣以覆之 推食以食之 仍命有司 在處存問 鰥寡孤獨老病不能自活者 給養之 於是 鄰國
百姓聞而來者 衆矣 是年 民俗歡康 始製兜率歌 此歌樂之始也。
九年 春 改六部之名 仍賜姓 楊山部爲梁部 姓李 高墟部爲沙梁部 姓崔 大樹部爲漸梁部(一云牟梁) 姓孫
于珍部爲本彼部(于 新本作干) 姓鄭 加利部爲漢祈部 姓裴 明活部爲習北部 姓薛 又設官
有十七等 一伊伐湌 二伊尺湌 三迊湌 四波珍湌 五大阿湌 六阿湌 七一吉湌 八沙湌 九級伐
湌 十大奈麻 十一奈麻 十二大舍 十三小舍 十四吉士 十五大烏 十六小烏 十七造位 王旣定
六部 中分爲二 使王女二人 各率部內女子 分朋造黨 自秋七月旣望 每日早集大部之庭(大
恐六之誤) 績麻 乙夜而罷 至八月十五日 考其功之多少 負者置酒食 以謝勝者 於是 歌舞百
戱 皆作謂之嘉俳 是時 負家一女子起舞 歎曰會蘇會蘇 其音哀雅 後人因其聲而作歌 名會蘇曲。
十一年 京都地裂 泉湧 夏六月 大水
十三年 秋八月 樂浪犯北邊 攻陷朶山城
十四年 高句麗王無恤 襲樂浪滅之 其國人五千來投 分居六部
十七年 秋九月 華麗-不耐二縣人 連謀率騎兵犯北境 貊國渠帥以兵 要曲河西敗之 王喜 與貊國結好
十九年 秋八月 貊帥獵得禽獸 獻之
三十一年 春二月 星孛于紫宮
三十三年 夏四月 龍見金城井 有頃 暴雨自西北來 五月 大風拔木
三十四年 秋九月 王不豫 謂臣寮曰 脫解身聯國戚 位處輔臣 屢著功名 朕之二子 其才不及遠矣 吾死之後
俾卽大位 以無忘我遺訓 冬十月 王薨 葬蛇陵園內
[역주:01권95]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신라의 제3대 임금. 남해왕의 태자로 재위기간은 24~57년이다. 《三國遺事》 권1, 王曆篇과 같은 책 권1 紀異篇 弩禮王條에서는 弩禮王 혹은 儒禮王이라고도 하였다. 이 왕대에 6村의 이름을 바꾸고 6部에 성을 내려주었으며, 17관등을 제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성을 내려주었다는 기록은 믿을 수 없으며, 또한 17관등이 과연 유리왕 9년(서기 32)에 완벽하게 갖추어졌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역주:01권96] 유리 이사금이 왕위에 올랐다본서 권1 신라본기와 같은 책 권29 年表(上) 및 《三國遺事》 王曆篇에는 서기 24년(甲申)에 즉위했다고 하였으나, 《三國遺事》 권1 紀異篇 弩禮王條에는 서기 23년(癸未)에 즉위했다고 하여 1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역주:01권97] 일지갈문왕(日知葛文王)본서 권1 신라본기 일성 이사금조에서는 일지갈문왕을 일성왕의 아버지라 하였고, 《三國遺事》 王曆篇에서는 『△禮夫人 日知葛文王之父(女의 誤記: 역주자 註)』라 하여 일성왕비 △禮夫人의 아버지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일지갈문왕은 일성왕 혹은 일성왕비의 아버지라기 보다는 본문에서와 같이 유리왕비의 아버지였던 것으로 보인다(李基白, 〈新羅時代의 葛文王〉, 《新羅政治社會史硏求》, 일조각, 1974, 10쪽).
[역주:01권98] 허루왕(許婁王)의 딸허루는 漢祇部 사람으로 파사왕비인 史省夫人의 아버지이다. 성은 박씨 혹은 김씨라 하였다. 파사왕대에 그의 딸을 태자였던 祇摩에게 시집보내려 하였으나 성사시키지 못하고 대신 파사왕으로부터 후대의 角干에 해당되는 酒多의 벼슬을 받았다. 한편 《三國遺事》 王曆篇에서는 유리왕의 비를 辝要王의 딸 김씨라 하였으나, 사요왕이 허루왕과 同一人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역주:01권99] 이사금(尼師今)신라 초기의 왕호로 《三國遺事》에서는 제3대 유리왕부터 제16대 흘해왕까지 이사금의 왕호를 사용하였으나, 본서에서는 제18대 실성왕까지 사용하였다. 尼叱今 또는 齒叱今이라고도 하였는데, 이는 모두 ‘잇금’의 다른 표기이다. 金大問은 이사금을 연장자의 표징인 잇금[齒理]을 의미한다 하였고, 李丙燾는 ‘잇’ 혹은 ‘이스’의 對譯으로 嗣王 혹은 후계왕의 뜻으로 해석하였다. 그리고 유리왕대부터 왕호를 이사금이라 칭한 이유는 이때 이르러 몇개 부족의 연맹이 성립된 결과 부족연맹장이라는 의미에서 사용하게 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金哲俊, 〈高句麗 新羅의 官階組織의 成立過程〉, 《韓國古代社會硏究》, 지식산업사, 1975, 143쪽).
[역주:01권100] 김대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이사금에 관한 金大問의 설명은 그의 저서 《鷄林雜傳》에서 인용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李基白, 〈金大問과 그의 史學〉, 《歷史學報》 77, 1978, 2~8쪽).
[역주:01권101] 6부의 이름을 바꾸고…성을 내려 주었다6村을 6部로 개명한 시기에 관하여 대략 7가지의 주장이 있다. 1)시조 혁거세왕대설(崔在鍚, 〈新羅의 6村 ·6部〉, 《韓國古代社會史硏究》, 일지사, 1987, 373~374쪽). 2) 유리왕 9년설(丁仲煥, 〈斯盧 6村과 6部人의 出自에 대하여〉, 《歷史學報》, 17·18합집, 1962, 414~424쪽. 李鍾旭, 〈신라상고기의 6촌과 6부〉, 《震檀學報》 49, 1980, 31쪽). 3) 자비왕 12년설(李丙燾, 〈新羅의 起源問題〉,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602쪽). 4)소지왕대설(金哲埈, 《新羅上代社會의 Dual Organization》(下), 《歷史學報》 2, 1952, 87~88쪽. 盧泰敦, 〈三國時代 部에 關한 硏究〉, 《韓國史論》 2, 서울대 국사학과, 1975, 19쪽). 5) 6세기 중엽설(村上四男 〈新羅王都考〉, 《朝鮮學報》 24, 1962, 46쪽). 6) 4세기에서 7세기 성립설(末松保和, 〈新羅六部考〉, 《新羅史の諸問題》, 東京, 1954, 253~254쪽). 7)사로국의 발전과정 중에 단계적으로 성립되었다는 前提下에서 3세기 후반 以前說(全德在, 《新羅六部體制硏究》, 일조각, 1996, 27~37쪽). 그러나 근년에 발견된 신라 금석문을 검토해 보면, 최소한 6세기 이전의 상당히 이른 시기에 6부가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신라에서의 姓氏 사용은 王姓인 경우에도 6세기에서야 비로소 시작되었고 6부의 성은 통일과정 및 통일 후에 걸쳐 순차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에, 이 때 각 부에 성을 내려주었다는 기사는 그대로 믿기 어렵다(李純根, 앞의 논문, 1980, 16~23쪽). 그래서 이 기사를 고려 태조 23년(940)에 6부의 개편시 각 部의 土官에게 성을 내려준 사실을 소급, 추기한 것으로 파악하기도 한다(李丙燾, 〈新羅의 起源問題〉, 앞의 책, 1976, 599쪽).
[역주:01권102] 양부(梁部)及梁部 혹은 중고기 신라 금석문에서는 喙部라 하였다. 6부 중에서 가장 우세한 部로서 현재의 경북 경주시 南川 이남의 남산 서북일대 혹은 皇南洞·皇吾洞 일대에 소재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양부는 고려 태조 23년(940)에 中興部로 개명되었다.
[역주:01권103] 사량부(沙梁部)중고기 신라 금석문에는 沙喙部로 표기되었다. 양부와 함께 6부를 주도했던 部로, 현재의 경북 경주시 남천 이북 서천 이동 그리고 북천 이남 일대에 그 근거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는 남천 이남의 남산 서북쪽일대로 비정되기도 한다. 사량부는 고려 태조 23년(940)에 南山部로 개칭되었다.
[역주:01권104] 성은 최(崔)《三國遺事》 권1 紀異篇 신라 시조 혁거세왕조에는 사량부의 성을 鄭氏로 삼았다고 하여, 본서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역주:01권105] 점량부(漸梁部)牟梁部 혹은 《蔚珍 鳳坪新羅碑》에는 岑喙部로도 표기되었다. 현재의 경북 경주시의 西川 지류인 毛良川 북쪽의 서형산 기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 태조 23년(940)에 長福部로 개칭되었다.
[역주:01권106] 본피부(本彼部)중고기 신라 금석문에는 本波部로도 표기되었다. 6부 중에서 양부, 사량부 다음으로 우세했던 부로 추정된다. 현재의 경북 경주시 인왕동 일대에 소재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고려 태조 23년(940)에 通仙部로 개칭되었다.
[역주:01권107] 성은 정(鄭)《三國遺事》 권1 紀異篇 신라 시조 혁거세왕조에는 본피부의 성을 崔氏로 삼았다고 하여, 본서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역주:01권108] 한기부(漢祇部)경북 경주시 안압지에서 출토된 調露 2년명 벽돌에는 '漢只伐部'로 표기되었고 또는 漢歧部라고도 하였다. 태조 23년(940)에 加德部로 고쳐졌다.
[역주:01권109] 습비부(習比部)〈迎日 冷水里新羅碑〉에는 習比를 '斯波'로 표기하였다. 현재의 경북 경주시에 있는 명활산 서남쪽의 보문리 일대와 낭산 부근이 습비부의 근거지로 추정되며, 고려 태조 23년(940)에 臨川部로 개칭되었다.
[역주:01권110] 17등급이 있었다본서 권38 잡지 직관(上)에도 유리왕 9년에 17관등이 설치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 설치된 官等은 후대처럼 완비된 형태의 그것이 아니라, 17관등제의 母體가 되는 몇몇 관등이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역주:01권111] 이벌찬(伊伐湌)17관등 중의 최고 관등. 伊罰干, 于伐干, 于伐湌, 角干, 角粲, 徐發翰, 舒弗邯이라고도 하였다. 본서 권38 주석 10참조.
[역주:01권112] 이척찬(伊尺湌)17관등 중의 2번째 관등. 일반적으로 伊湌이라 하였는데 혹은 伊干, 一尺干, 乙粲이라고도 하였다. 본서 권38 잡지 직관(上)에 의하면 位和部의 衿荷臣은 이찬 이상의 관등 소지자만이 補任될 수 있었다고 하낟. 본서 권38 주석 12 참조.
[역주:01권113] 잡찬(迊湌)17관등 중의 3번째 관등. 迊判, 迊判 ,蘇判이라고도 하였다. 본서 권38 주석 13 참조.
[역주:01권114] 파진찬(波珍湌)신라 17관등 중의 4번째 관등. 海干, 破彌干, 海湌 이라고도 하였다. 본서 권 38 주석 14 참조.
[역주:01권115] 대아찬(大阿湌)신라 17관등 중의 5번째 관등. 大阿干支, 大阿干, 大閼粲, 韓粲이라고도 하였다. 대아찬 이상의 관등은 진골만이 가질 수 있었고, 대아찬 이상의 服色은 자주색이었다. 본서 권 38 주석 15 참조.
[역주:01권116] 아찬(阿湌)신라 17관등 중의 6번째 관등. 阿干支, 阿干, 阿尺干, 閼粲이라고도 하였다. 이 관등은 6두품이 승진할 수 있던 최고 관등이었고, 重阿湌 4重阿湌까지 重位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아찬은 阿干支-阿干-阿湌-阿干의 순서로 시대에 따라 표기가 변천되었다(權悳永, 〈新羅官等 阿湌·奈麻에 대한 考察〉, 《國史館論叢》 21, 1991, 36~49쪽). 본서 권 38 주석 18 참조.
[역주:01권117] 일길찬(一吉湌)신라 17관등 중의 7번째 관등. 一吉干, 乙吉干이라도고 하였다. 본서 권 38 주석 21 참조.
[역주:01권118] 사찬(沙湌)신라 17관등 중의 번째 8관등. 沙尺干, 沙干, 薩湌, 沙咄干이라고도 하였다. 본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窺興寺鍾銘〉에 의하면 사찬에는 최소한 3重沙湌까지의 重位가 설치,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본서 권 38 주석 22 참조.
[역주:01권119] 급벌찬(級伐湌)신라 17관등 중의 9번째 관등. 及尺干, 居伐干支, 級伐干, 及干, 及伏干이라고도 하였다. 급벌찬에서 아찬까지의 복색은 緋色이었다. 본서 권 38 주석 23 참조.
[역주:01권120] 대나마(大奈麻)신라 17관등 중의 10번째 관등. 大奈(乃)末 혹은 韓奈麻라고도 하였다. 대나마는 5두품이 오를 수 있던 최고 관등이었고 重大奈麻에서 9重大奈麻까지의 重位가 설치되어 있었다. 한편 '奈'의 현재 음은 '내'와 '나'가 있는데, 삼국시대에는 重母音이 없었으므로 '나'로 읽는 것이 당시의 발음과 가깝다고 하겠다. 본서 권 38 주석 24 참조.
[역주:01권121] 나마(奈麻)신라 17관등 중의 11번째 관등. 奈(乃)末, 那末이라고도 하였다. 나마와 대나마의 복색은 푸른색이었고, 나마에는 重奈麻에서 7重奈麻까지 重位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마의 표기는 奈麻- 奈(乃)末- 奈麻- 奈(乃)末의 순서로 시기에 따라 표기가 변천되었다(權悳永, 앞의 논문, 1991, 36~49쪽). 본서 권 38 주석 27 참조.
[역주:01권122] 대사(大舍)신라 17관등 중의 12번째 관등. 大舍帝, 大舍第, 韓舍라고도 하였다. 이 관등은 4두품이 승진할 수 있었던 최고 관등이었고 대사 이하의 복색은 黃色이었다. 본서 권 38 주석 29 참조.
[역주:01권123] 소사(小舍)신라 17관등 중의 13번째 관등. 小舍帝, 小舍第, 舍知라고도 하였다. 본서 권 38 주석 30 참조.
[역주:01권124] 길사(吉士)신라 17관등 중의 14번째 관등. 吉之, 稽知, 吉次라고도 하였다. 본서 권 38 주석 31 참조.
[역주:01권125] 대오(大烏)신라 17관등 중의 15번째 관등. 大烏第, 大烏知(之)라고도 하였다. 본서 권 38 주석 32 참조.
[역주:01권126] 소오(小烏)신라 17관등 중의 16번째 관등. 小烏帝知, 小烏知라고도 하였다. 본서 권 38 주석 33 참조.
[역주:01권127] 조위(造位)신라 17관등 중의 최하위 관등. 先沮知라고도 하였다. 본서 권 38 주석 34 참조.
[역주:01권128] 무휼(無恤)고구려의 제3대 임금인 大武神王의 이름이다. 재위 기간은 18~44년이다. 본서 권14 주석 1 참조.
[역주:01권129] 고구려왕 무휼(無恤)이…멸망시켰다.본서 권14, 고구려본기 大武神王 20년(서기 37)조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한편 《三國遺事》 권1, 紀異篇2, 樂浪國條에는 弩禮王 4년(서기 27)에 고구려왕 무휼이 낙랑을 멸망시키자 그 나라 사람과 帶方人이 신라에 來投했다고 하여 본서와 10년의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三國遺事》의 이 기사는 '弩禮王 十四年'의 誤記로 보인다.
[역주:01권130] 화려현(華麗縣)임둔 15현 중의 하나였는데, 서기전 82년에 임둔군이 현도군에 병합될 때 현도군에 예속되었다. 후에 현도군의 治所가 渾河 상류로 옮겨감에 따라 낙랑군에 이속되어 東部都尉의 관할하에 놓이게 되었고, 고구려 太祖王 때 마침내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華麗縣의 위치는 현재의 함경남도 영흥군 順寧面 일대로 추정되는데, 順寧面에 있는 土城址가 아마 당시 華麗縣의 治所가 아닐까 한다(李丙燾, 〈臨屯郡考〉, 앞의 책, 1976, 207~208쪽).
[역주:01권131] 불내현(不耐縣)《漢書》 권28 지리지 낙랑군조에는 ‘不而’로 표기하였다. 不耐縣은 임둔 15현 중의 하나였는데, 서기전 82년에 임둔군이 현도군에 병합될 때 현도군의 관할이 되었고 후에 현도군치가 渾河 상류로 옮겨감에 따라 낙랑군에 이속되어 東部都尉의 치소가 되었다. 서기 30년경에 後漢이 동부도위를 혁파했을 때 불내현은 侯國이 되었으나 오래지 않아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불내현의 위치는 현재의 함경남도 安邊 내지 通川 부근으로 비정된다(李丙燾, 〈臨屯郡考〉, 앞의 책, 1976, 195~202쪽).
[역주:01권132] 맥국(貊國)현재의 강원도 춘천지방에 있던 小國. 중국측 문헌에 보이는 貊은 濊와 함께 요동·만주지방에 있던 종족을 가리키며, 《日本書紀》(권19)에서의 貃國 즉 貊國은 고구려를 지칭한다. 그러나 본서 권35 잡지 지리(2) 및 《高麗史》 권58 지리지, 《新增東國輿地勝覽》 권 46 春川都護府 建置沿革條 등에서는 한결같이 맥국을 강원도 춘천으로 비정하고 잇다. 따라서 여기서의 맥국 소재지는 춘천지방이라 할 수 있다(金澤均, 〈春川 貊國說에 관한 硏究〉, 《백산학보》 30·31 합집, 1985, 131~138쪽).
[역주:01권133] 자궁(紫宮)북두성의 북쪽에 있는 별로 天帝가 사는 곳이라 한다. 紫微宮으로도 불리운다.
[역주:01권134] 두 아들본서 권1 신라본기에 따르면, 유리왕의 두 아들은 일성왕과 파사왕이다. 그러나 일성왕은 갈문왕 朴阿道의 아들, 파사왕은 유리왕의 동생 奈老의 아들로 파악하는 설도 있다(李鍾旭, 《新羅上代 王位繼承硏究》, 영남대 출판부, 1980, 62~66쪽).
脫解尼師今立(一云吐解) 時年六十二 姓昔 妃阿孝夫人 脫解 本多婆那國所生也 其國在倭國東北一千里
初其國王娶女國王女爲妻 有娠七年 乃生大卵 王曰 人而生卵不祥也 宜棄之 其女不忍 以帛裹卵並寶物
置於櫝中 浮於海 任其所往 初至金官國海邊 金官人怪之不取 又至辰韓阿珍浦口 是始祖赫居世在位三十
九年也 時海邊老母 以繩引繫海岸 開櫝見之 有一小兒在焉 其母取養之 及壯身長九尺 風神秀朗 智識過
人 或曰 此兒不知姓氏 初櫝來時 有一鵲飛鳴而隨之 宜省鵲字 以昔爲氏 又解韞櫝而出 宜名脫解 脫解
始以漁釣爲業 供養其母 未嘗有懈色 母謂曰 汝非常人 骨相殊異 宜從學以立功名 於是 專精學問 兼知地
理 望楊山下瓠公宅 以爲吉地 設詭計 以取而居之 其地後爲月城 至南解王五年 聞其賢 以其女妻之 至七
年 登庸爲大輔 委以政事 儒理將死曰 先王顧命曰 吾死後 無論子壻 以年長且賢者 繼位是以 寡人先立
今也 宜傳其位焉
二年 春正月 拜瓠公爲大輔 二月 親祀始祖廟
三年 春三月 王登吐含山 有玄雲如蓋 浮王頭上 良久而散 夏五月 與倭國結好交聘 六月 有星孛于天船
五年 秋八月 馬韓將孟召 以覆嚴城降
七年 冬十月 百濟王拓地 至娘子谷城 遣使請會 王不行
八年 秋八月 百濟遣兵 攻蛭山城 冬十月 又攻狗壤城 王遣騎二千 擊走之 十二月 地震 無雪
九年 春三月 王夜聞 金城西始林樹間 有鷄鳴聲 遲明 遣瓠公視之 有金色小櫝掛樹枝 白鷄鳴於其下 瓠
公還告 王使人取櫝開之 有小男兒在其中 姿容奇偉 上喜 謂左右曰 此豈非天遺我以令胤乎
乃收養之 及長聰明多智略 乃名閼智 以其出於金櫝姓金氏 改始林名鷄林 因以爲國號。
十年 百濟攻取蛙山城 留二百人居守 尋取之
十一年 春正月 以朴氏貴戚 分理國內州郡 號爲州主-郡主 二月 以順貞爲伊伐湌 委以政事
十四年 百濟來侵
十七年 倭人侵木出島 王遣角干羽烏禦之 不克 羽烏死之
十八年 秋八月 百濟寇邊 遣兵拒之
十九年 大旱 民饑 發倉賑給 冬十月 百濟攻西鄙蛙山城 拔之
二十年 秋九月 遣兵伐百濟 復取蛙山城 自百濟來居者二百餘人 盡殺之
二十一年 秋八月 阿湌吉門與加耶兵 戰於黃山津口 獲一千餘級 以吉門爲波珍湌
賞功也
二十三年 春二月 彗星見東方 又見北方 二十日乃滅
二十四年 夏四月 京都大風 金城東門自壤 秋八月 王薨 葬城北壤井丘
[역주:01권135]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신라의 제4대 임금. 多婆那國 혹은 龍城國 사람으로 아버지는 含達婆 혹은 含達王이라 한다. 본서 권1 신라본기에 의하면 탈해는 서기전 19년, 《三國遺事》 권2 紀異篇 〈駕洛國記〉에 의하면 서기 44년 경에 바다를 통하여 금관극을 거쳐 신라에 도착하여 남해왕의 사위가 되었다가 유리왕을 이어 즉위하였다. 한편 탈해의 즉위연월에 대하여 《三國遺事》 권1 紀異篇 탈해왕조에서는 서기 57년 6월에 탈해가 즉위했다고 하였으나 본서 권1 신라 본기에는 유리왕이 서기 75년 10월에 죽고 탈해가 즉위했다고 하여 서로 약간의 차이가 있다. 탈해왕은 백제와의 전쟁을 통하여 백제 지역의 영토를 크게 넓혔다.
[역주:01권136] 아효부인(阿孝夫人)남해왕의 맏딸로서 남해왕 5년(서기 8)에 탈해에게 시집갔다. 《三國遺事》 권1 紀異篇 탈해왕조와 같은 책 王曆篇에서는 阿尼夫人 혹은 阿老夫人이라 하였다.
[역주:01권137] 다파나국(多婆那國)《三國遺事》 권1 紀異篇 탈해왕조와 같은 책 王曆篇에서는 龍城國, 正明國, 琓夏國, 花厦國이라 하고, 그 나라는 왜국의 동북쪽 1,500리 되는 곳에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魏書》 권8 世宗紀 永平 원년 3월 己亥條에 『斯羅 阿陀 比羅 阿夷乂 多婆那伽 伽師達 于闐諸國 竝遺使朝獻』 이라 하여 다파나국의 이름이 보인다. 다파나국의 현재 위치에 대하여 다파나와 음이 비슷한 일본의 但馬(다지마)國 혹은 肥後國 玉名(다나마)郡에 비정하기도 하고, 혹은 西域에 있던 소국으로 보기도 한다(三品彰英, 《三國遺事考證》(上), 1975, 490쪽. 姜仁求, 〈新羅五陵의 再檢討(2)-脫解王陵〉, 《尹武炳博士回甲紀念論叢》, 1984, 307~308쪽). 한편 다파나국의 다른 이름이라 한 龍城國은 탈해의 출생국이 아니라 탈해집단이 이주해오는 과정에서 정복한 東海나 南海에 있던 어떤 섬일지도 모른다는 견해(金杜珍, 〈新羅 昔脫解神話의 成立基盤〉, 《韓國學論叢》 8, 1986, 11쪽), 그리고 《三國遺事》에 시린 탈해 도래 설화가 용과 관련되어 있는 점에 주목하여 탈해의 출신지를 匈奴地域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千寬宇, 《古朝鮮史·三韓史硏究》, 1989, 281~283쪽).
[역주:01권138] 여국왕(女國王)《三國遺事》 권1, 紀異篇 탈해왕조에서는 積女國의 왕이라 하였다. 이 나라의 위치에 대하여, 《三國志》 권30 魏書 東夷傳 동옥저조에 이른바 동해 가운데 있다는 女人國을 가리킨다고도 하고(三品彰英, 《日本神話傳說の硏究》, 1963, 273쪽), 혹은 어떤 특정한나라를 지칭한다기 보다는 地神族 계통의 女家長國으로 이해하기도 한다(金杜珍, 앞의 논문, 1986, 9쪽).
[역주:01권139] 그 왕다파나국의 왕인 含達婆 혹은 含達王을 말한다.
[역주:01권140] 금관국(金官國)서기 42년에 수로왕이 현재의 경남 김해 지방에 건국하여 532년까지 존속했던 6가야 중의 하나인 金官加耶를 말한다. 초기에 금관가야가 가야연맹의 맹주국이었기 때문에 本加耶라고도 하고 또는 남쪽에 있었기 때문에 南加耶라고도 하였다. 《三國志》 권30 魏書 東夷傳의 弁辰狗邪國과 倭人傳의 狗邪韓國은 바로 금관가야를 지칭한다. 금관가야의 역사는 《三國遺事》 권2 紀異篇에 인용되어 있는 《駕洛國記》에 자세히 실려 있다.
[역주:01권141] 아진포(阿珍浦)현재의 경북 경주시 陽南面 下西里 일대에 비정하기도 하고(三品彰英, 《三國遺事考證》(上), 1975, 488쪽), 혹은 경북 경주시 甘浦의 옛 지명으로 추정하기도 한다(千寬宇, 《古朝鮮史·三韓史硏究》, 1989, 283쪽).
[역주:01권142] 이때는 … 39년 되는 해이다박혁거세 39년은 서기전 19년[壬寅]이다. 그런데 탈해는 서기 57년에 62세의 나이로 즉위했으므로, 탈해가 금관국에 도래한 시기는 혁거세 39년일 수가 없다. 한편 《三國遺事》 권1 紀異篇 탈해왕조에는 남해왕대 혹은 古本을 인용하여 壬寅年에 왔다고 하였다. 혁거세 후의 임인년은 유리왕 19년(42년)과 파사왕 23년(102)인데 이 해도 역시 탈해의 즉위시 나이와 부합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三國遺事》의 찬자 一然은 탈해가 도래한 干支는 임인년이 아니라 하였다. 그런데 서기 57년에 62세의 나이로 즉위했다는 본서의 기사가 정확하다면, 탈해는 서기전 5년 경에 도래했다고 하겠다. 한편 탈해의 도래시기를 102년(壬寅年)으로 추측하기도 한다(李德星, 《朝鮮古代社會硏究》, 1949, 64~66쪽).
[역주:01권143] 바닷가에 있던 할멈《三國遺事》 권1, 紀異篇 탈해왕조에는 그 노파를 '海尺之母'인 阿珍義先이라 하였다.
[역주:01권144] 궤짝《三國遺事》 권1 紀異篇 탈해왕조에서는 길이가 20척 넓이가 13척인 궤짝이라 하였다.
[역주:01권145] 까치 한마리본서와는 달리 《三國遺事》 권1 紀異篇 탈해왕조에는 ‘鵲集而鳴’이라 하여 까치가 떼지어 모여서 울었다고 한다.
[역주:01권146] 석(昔)으로 성을 삼고昔氏를 칭하게 된 유래에 관하여, 《三國遺事》 권1 紀異篇 탈해왕조에는 탈해가 옛날[昔]에 남의 집을 빼앗아 자기의 집으로 삼았기 때문에 ‘昔’을 성으로 삼았다는 또다른 설명을 덧붙여 놓았다.
[역주:01권147] 호공(瓠公)의 집을… 빼앗아《三國遺事》 권1 紀異篇 탈해왕조에 탈해가 호공의 집을 빼앗은 과정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즉 탈해가 호공의 집터가 吉地임을 알고 그 집을 차지하기 위하여 숫돌과 숯을 그 곁에 몰래 묻어 두어다. 얼마 후 그 곳이 자신의 선조가 살던 곳이라 하여 돌려주기를 호공에게 청하였으나 호공이 이를 거부하자 전에 묻어 두었던 숫돌과 숯을 꺼내 보임으로써 그 사실을 증명하였다. 그 결과 호공의 집을 탈해가 차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역주:01권148] 월성(月城)경북 경주시 인왕동의 평지 위에 돌출한 구릉지에 위치한 토성으로 둘레는 약 1,841m이다. 성의 형태가 초생달 같다고 하여 新月城 혹은 半月城, 또는 在城이라고도 한다. 최근의 발굴 조사 결과 이 성에는 垓子 둘러져 있었음이 확인되었고, 9개의 門址가 남아 있다고 한다(張慶洁, 〈統一新羅時代의 宮殿建築〉, 《考古美術》 162 ·163 합집, 1984, 42~43쪽).
[역주:01권149] 선왕(先王)남해왕을 가리킨다.
[역주:01권150] 천선(天船)王良 별자리 옆의 8개 별로 이루어진 성좌로 은하수를 가로 지르고 있다. 天潢 또는 天橫이라고도 한다.
[역주:01권151] 낭자곡성(娘子谷城)현재의 충북 淸州市 혹은 청원군 지역이다. 본서 권37 잡지 지리(4)에는 西原을 娘臂城 또는 娘子谷이라 하였다. 그리고 《新增東國輿地勝覽》 권15 淸州牧은 본래 백제의 上黨縣 혹은 娘臂城 또는 娘子谷이었는데, 신문왕 5년에 비로소 西原小京을 두었다고 한다. 낭자곡성의 구체적인 유적지로는 충북 청원군 琅城面의 산성으로 추정된다(千寬宇, 《古朝鮮史·三韓史硏究》, 1989, 184쪽). 그러나 구양성은 충북 옥천지방이 아닐까 하는 견해도 있다(李丙燾, 《國譯 三國史記》, 1977, 12쪽).
[역주:01권152] 사자를 보내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왕은 가지 않았다보서 권23 백제본기 多婁王 36년(서기 63)조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역주:01권153] 와산성(蛙山城)현재의 충북 보은군 보은읍이다. 본서 권37 주석 337 참조.
[역주:01권154] 구양성(狗壤城)현재의 충북 괴산이방으로 비정된다(千寬宇, 《古朝鮮史·三韓史硏究》, 1989, 184쪽). 그러나 구양성은 충북 옥천지방이 아닐까 하는 견해도 있다(李丙燾, 《國譯 三國史記》, 1977, 12쪽).
[역주:01권155] 왕이 기병 2천 명을 보내 쫓아 보냈다본서 권23 백제본기 多婁王 37년(서기 64)조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역주:01권156] 9년(서기 65) 봄 3월《三國遺事》 권1 紀異篇 金閼智 脫解王代條에서는, 알지가 始林에 출현한 사실을 永平 3년(서기 60) 庚申 8월 4일의 일로 기록하여 본서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역주:01권157] 시림(始林)閼知가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숲으로 현재의 경주시 반월성 서쪽에 있다.
[역주:01권158] 왕이 밤에 소리를…들었다《三國遺事》 권1 紀異篇 金閼智 脫解王代條에서는, 왕이 직접 닭 우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 아니라 호공이 밤에 月城 西里르 가다가 큰 광명이 시림 속에서 나타난 것을 발견하고 왕에게 아뢰었다고 하였다.
[역주:01권159] 알지(閼智)경주 김씨의 시조로 전해지는 인물로, 탈해왕대 始林에 내려온 금궤 속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알지는 우리말로 ‘小兒’ 곧 아기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三國遺事》 권1 紀異篇 金閼智 脫解王代條). 후에 알지의 7세손 미추가 김씨로서 처음으로 신라의 왕이 되었다.
[역주:01권160] 계림(雞林)鳩林이라고도 하였다. 원래의 이름은 始林이었던 것을 알지가 거기서 탄생한 것을 계기로 시림의 이름을 바꾸어 鷄林이라 하고, 나라 이름도 역시 계림이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현재의 경북 경주시 교동에 있으며 사적 제19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편 알지의 탄생을 계기로 나라 이름을 鷄林으로 바꾸었다는 본서의 기사에 대하여, 경주 지역을 기반으로 한 김씨 세력이 鷄林國이라는 하나의 소국을 성립시킨 것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盧重國, 〈鷄林國考〉, 《歷史敎育論集》 13·14 합집, 1990, 182~184쪽).
[역주:01권161] 백제가 …그것을 빼앗았다본서 권23 백제본기 多婁王 39년(서기 66)조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역주:01권162] 주주(州主)·군주(郡主)주와 군에 파견된 우두머리 관리. 그런데 신라에서 주와 군은 지증왕대에 정식으로 설치되었으므로 여기에서 말하는 州主와 郡主는 후대의 주 혹은 군에 상당하던 대취락에 파견된 장관을 소급, 추기한 것인 듯하다. 신라 초기의 州는 후대의 州와 달리 郡縣과 다름없는 작은 행정단위로 출발하였는데, 정복 활동을 통해 점차 영역이 확대되어 가는 과정에서 군사적 기능이 강화되고 또한 범위도 커진 것이다. 반면, 郡主는 신라가 정복 전쟁을 통하여 새로이 획득한 지방의 통치를 위해 설치한 郡의 행정 책임자로서, 주로 勸農·土木 등의 농사일에 관여했다고 한다(申瀅植, 《韓國古代史의 新硏究》, 일조각, 1984, 205쪽). 따라서 州主는 군사적인 면이 강하고 郡主는 행정적인 면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
[역주:01권163] 백제가 침입해 왔다본서 권23 백제본기 多婁王 43년(서기 70)조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역주:01권164] 목출도(木出島)본서 권37 잡지 지리(4) 三國有名未詳地分에 포함되어 있는데, 현재의 위치는 알 수 없다. 혹시 朴堤上이 왜인에게 처형당한 木島와 같은 지명인지도 모르겠다.
[역주:01권165] 각간(角干)신라 17관등 중의 최고 관등인 이벌찬의 다른 이름으로 角湌, 舒發翰, 伊伐干 또는 酒多라고도 하였다. 후에 각간 위에 大角干, 太大角干이 새로 설치되었다.
[역주:01권166] 백제가 변경을 노략질하였으므로 …막았다본서 권23 백제본기 多婁王 47년(서기 74) 8월조에, 백제가 군사를 보내 신라를 쳤다는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역주:01권167] 백제가 …공격하여 빼앗았다본서 권23 백제본기 多婁王 48년(서기 75)조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역주:01권168] 군사를 보내 …모두 주였다본서 권23 백제본기 多婁王 49년(서기 76)조에, 백제가 蛙山城을 다시 신라에게 빼앗겼다는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역주:01권169] 황산진(黃山津)《慶尙道地理誌》 金海 渡津條에 의하면 府의 동쪽에 황산진이 있다 하였고, 《新東國輿地勝覽》 권22 梁山郡 山川條에 黃山江은 府의 서쪽 18리 되는 곳에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黃山津은 현재의 경남 김해시와 양산시 일대를 흐르는 낙동강 하류에 있던 나루였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지금의 경남 김해시 대동면 덕산리 동쪽에 있었다는 '東院津'을 황산진으로 비정할 수 있을 듯하다(金泰植, 《加耶聯盟史》, 일조각, 1993, 70쪽).
[역주:01권170] 24년(서기 80)…가을 8월에 왕이 죽어《三國遺事》 권1 紀異篇 탈해왕조에서는 23년간 재위하다가 建初 4년(서기 79) 己卯에 죽었다고 하여 본서와는 1년의 차이가 있다.
[역주:01권171] 양정구(壤井丘)《三國遺事》 권1 紀異篇 탈해왕조에서는 䟽川丘 속에 장사지냈다 하였고, 같은 책 王曆篇에는 未召䟽井丘中에 水葬했다고 한다. 현재의 경북 경주시 東川洞 산 17번지에 있는 소형 고분을 탈해왕릉으로 비정하여 사적 제174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그러나 고분의 위치, 형태 및 문무왕대에 탈해의 뼈를 부수어 塑像을 만들었다는 《三國遺事》 권1 탈해왕조의 기록 등에 근거하여 현재 탈해왕릉으로 비정되고 있는 것은 탈해왕릉이 아닌 후대의 고분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姜仁求, 〈新羅王陵의 再檢討(2)-脫解王陵〉, 《尹武炳博士回甲紀念論叢》, 1984, 301~303쪽).
婆娑尼師今立 儒理王第二子也(或云儒理第奈老之子也) 妃金氏 史省夫人 許婁葛文王之女也 初脫解薨 臣
僚欲立儒理太子逸聖 或謂逸聖雖嫡嗣 而威明不及婆娑 遂立之 婆娑節儉省用 而愛民 國人嘉之。
二年 春二月 親祀始祖廟 三月 巡撫州郡 發倉賑給 慮獄囚 非二罪悉原之
三年 春正月 下令曰 今倉廩空匱 戎器頑鈍 儻有水旱之災-邊鄙之警 其何以禦之 宜令有司勸農桑-練兵革
以備不虞
五年 春二月 以明宣爲伊湌 允良爲波珍湌 夏五月 古陀郡主獻靑牛 南新縣麥連歧 大有年 行者不䝴糧
六年 春正月 百濟犯邊 二月 以吉元爲阿湌 夏四月 客星入紫微
八年 秋七月 下令曰 朕以不德 有此國家 西鄰百濟 南接加耶 德不能綏 威不足畏 宜繕葺城壘 以待侵軼
是月 築加召-馬頭二城
十一年 秋七月 分遣使十人 兼察州郡主不勤公事 致田野多荒者 貶黜之
十四年 春正月 拜允良爲伊湌 啓其爲波珍湌 二月 巡幸古所夫里郡 親問高年 賜穀 冬十月 京都地震
十五年 春二月 加耶賊圍馬頭城 遣阿湌吉元 將騎一千擊走之 秋八月 閱兵於閼川
十八年 春正月 擧兵 欲伐加耶 其國主遣使請罪 乃止
十九年 夏四月 京都旱
二十一年 秋七月 雨雹 飛烏死 冬十月 京都地震 倒民室有死者
二十二年 春二月 築城名月城 秋七月 王移居月城
二十三年 秋八月 音汁伐國與悉直谷國爭疆 詣王請決 王難之謂 金官國首露王 年老 多智識 召問之 首露
立議 以所爭之地 屬音汁伐國 於是 王命六部 會饗首露王 五部皆以伊湌爲主 唯漢祇部
以位卑者主之 首露怒 命奴耽下里 殺漢祇部主保齊而歸 奴逃依音汁伐主陀鄒干家 王使
人索其奴 陁鄒不送 王怒 以兵伐音汁伐國 其主與衆自降 悉直-押督二國王來降 冬十月
桃李華
二十五年 春正月 衆星隕如雨 不至地 秋七月 悉直叛 發兵討平之 徙其餘衆於南鄙
二十六年 春正月 百濟遣使請和 二月 京都雪三尺
二十七年 春正月 幸押督賑貧窮 三月 至自押督 秋八月 命馬頭城主 伐加耶
二十九年 夏五月 大水 民飢 發使十道 開倉賑給(倉 新舊本作食 誤也) 遣兵伐北只國-多伐國-草八國 幷之
三十年 秋七月 蝗害穀 王遍祭山川 以祈禳之 蝗滅 有年
三十二年 夏四月 城門自毁自五月 至秋七月 不雨
三十三年 冬十月 王薨 葬蛇陵園內
[교주:01권28] 弟原本 「第」. 鑄字本에 의거 수정.
[교주:01권29] 許原本 判讀不能. 本書 卷1 祇摩尼師今 卽位年條와 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보충.
[교주:01권30] 革原本 誤刻. 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수정.
[교주:01권31] 麥原本 「夌」. 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수정.
[교주:01권32] 允原本 「凡」. 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수정.
[교주:01권33] 請三國史節要 「謝」. 舜 「謝」.
[교주:01권34] 祇鑄字本 「祗」. 榮 「祗」.
[교주:01권35] 耽原本 「躭」은 「耽」의 俗字.
[교주:01권36] 祇鑄字本 「祗」. 榮 「祗」.
[교주:01권37] 桃原本 「栱」. 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수정.
[교주:01권38] 倉原本 「食」. 三國史節要에 의거 수정.
[교주:01권39] 祈原本 誤刻. 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수정.
[교주:01권40] 園原本 「圉」. 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수정.
[역주:01권172]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신라 제5대 임금. 유리왕의 아들로 재위 기간은 서기 80~112년이다. 이 왕대에는 音汁伐國, 悉直國, 押督國 등을 병합하는 등 정복활동이 활발하였다. 그래서 파사왕대를 신라에 있어서 領域國家로서의 고대국가가 성립된 시기로 파악하기도 한다(千寬宇, 《古朝鮮史·三韓史硏究》, 1989, 294~295쪽).
[역주:01권173] 혹은 유리왕의 동생 나로(奈老)의 아들이라고도 하였다본서와 《三國遺事》 王曆篇에는 모두 파사왕을 유리왕의 아들이라 하였다. 그러나 《三國遺事》 王曆篇에서 파사왕의 어머니가 辝要王의 딸이라고 한 점에 의거하여, 파사왕은 유리왕의 아들이 아니라 奈老의 아들이었다는 본서 細註의 說이 타당하다는 견해도 있다(李鍾旭, 《新羅上代王位繼承硏究》, 영남대 출판부, 1980, 62쪽). 한편 奈老에 관해서는 자세하지 않다.
[역주:01권174] 사성부인(史省夫人)許婁葛文王의 딸로, 《三國遺事》 王曆篇에서는 史肖夫人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는 史省夫人의 誤寫가 아닐까 한다.
[역주:01권175] 두 가지 사형죄[二罪]斬首와 絞首刑으로 사형을 받을 죄 혹은 大逆과 謀反罪에 의한 死刑을 가리킨다.
[역주:01권176] 윤량(允良)파사왕 5년에 파진찬이 되었다가 동왕 13년(서기 93)에 이찬으로 진급하였다. 그외의 행적은 알 수 없다.
[역주:01권177] 고타군주(古陁郡主)고타군의 우두머리 관리. 고타군은 현재의 경북 안동지방으로, 원래는 古陁耶郡이었는데 경덕왕대에 高昌郡으로 개명되었다. 고타군에 관해서는 본서 권34 주석 98 참조.
[역주:01권178] 백제가 변경을 침범하였다본서 권23 백제본기 己婁王 9년(서기 85)조에 동일한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역주:01권179] 길원(吉元)파사왕 6년에 아찬이 되었다가 동왕 14년(서기 94)에 馬頭城을 포위한 가야군사를 騎兵 1천 명으로써 격퇴하였다.
[역주:01권180] 객성(客星)恒星이 아닌 별로 평시에는 보이지 않다가 일적으로 나타나는 별. 객성으로는 周伯, 老子, 王蓬絮, 國皇, 溫星이 있으며 이 별이 나타나면 재앙이나 흉사가 일어난다고 한다.
[역주:01권181] 자미(紫微)北斗星의 북쪽에 있는 별로서 紫宮이라고도 하였다. 《晉書》 권11 天文志에 의하면, 紫微는 天帝가 사는 곳으로 命을 주관했다고 한다.
[역주:01권182] 가소성(加召城)가소성의 위치에 대하여 본서 권34 지리(1)에는 거창군의 領縣인 咸陰縣의 본래 이름이 加召縣이었다 하고, 《新增東國輿地勝覽》 권31 居昌郡 속현조에는 거창군의 속현인 加祚縣은 신라시대에 加召縣이었는데 召와 祚의 발음이 비슷하여 祚로 바꾸었다고 하여 가소성을 현재의 경남 거창군 가조면에 비정하였다. 그러나 丁若鏞은 〈弁辰別考〉에서 가소성은 백제지역이라 하였고, 李永植은 경주 남방이라 하는 등(〈加耶諸國의 國家形成問題-加耶聯盟說의 再檢討와 戰爭記事分析을 중심으로-〉, 《白山學報》 32, 1985, 71~72쪽) 여러가지 학설이 있다.
[역주:01권183] 마두성(馬頭城)현재의 경북 청도군과 경주시 그리고 경산시의 접경에 있는 馬谷山 일대로 비정하기도 하고(丁若鏞, 〈弁辰別考〉. 이영식, 앞의 논문, 1985, 71~72쪽), 경남 창녕 혹은 합천지역(申瀅植, 〈新羅君主考〉, 《白山學報》 19, 1975, 71쪽), 또는 경남 거창군 馬利面으로 보이는 설(李丙燾, 《國譯 三國史記》, 1977, 15쪽) 등이 있다.
[역주:01권184] 가성주(加城主)加城의 장관. 加城은 加召城의 약칭이거나 혹은 '召'자가 탈락된 것으로 보인다.
[역주:01권185] 음즙벌국(音汁伐國)《三國遺事》 王曆篇에서는 音質國이라 하였다. 본서 권34 잡지 지리(1)에, 음즙벌국을 취하여 설치한 音汁火縣이 고려시대에 안강현에 合屬되었다고 한 점으로 보아, 음즙벌국은 현재의 경북 경주시 안강읍 부근에 있던 소국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음즙벌국을 현재의 경북 울진지방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金哲俊, 〈新羅 上古世系와 그 紀年〉, 《韓國古代社會硏究》, 지식산업사, 1975, 176쪽).
[역주:01권186] 실직곡국(悉直谷國)본서 권35 잡지 지리(2)에 『三陟郡은 본래 悉直國이었는데 파사왕 때 신라에 항복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실직곡국은 현재의 강원도 삼척시에 있던 소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실직곡국을 경북 영덕군 영해면에 있던 소국으로 파악하기도 한다(申瀅植, 〈新羅君主考〉, 《白山學報》 19, 1975, 68쪽)
[역주:01권187] 수로왕(首露王)금관가야의 건국 시조로 전해지는 인물로 首陵이라고도 하였다. 《三國遺事》 권2 紀異篇에 인용된 〈駕洛國記〉에 의하면, 建武 18년 壬寅 즉 서기42년에 하늘로부터 龜旨峰에 내려온 황금알에서 태어나 君長이 되었는데 158년간 나라를 다스렸다고 한다. 그러나 김유신의 曾祖父 仇玄가 수로왕의 9세손이었던 점에서 그 출생연대의 사실성이 의심된다. 그래서 수로를 가락국 최초의 군장으로 이해하기보다는 금관국이 6가야연맹의 맹주국으로 대두했을 때의 왕으로 파악하기도 한다(李丙燾, 〈首露王考〉, 《韓國古代史硏究》, 1976, 313~324쪽). 首露의 의미에 대하여 《三國遺事》 권2 紀異篇 〈駕洛國記〉에서는 여섯 개의 황금알 가운데 처음으로 나타났다고 하여 이름을 首露 또는 首陵이라 했다 하고, 혹은 '수리'·'술'과 결부시켜 신성한 왕 혹은 높은 왕의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李丙燾, 앞의 책, 1976, 322쪽). 또는 滿洲語의 소로·소루는 신을 맞이하는 祭儀 때 사용하는 神杆을 가리키므로, 이와 음이 비슷한 수로는 신령·祖靈의 뜻을 갖는다고도 한다(三品彰英, 《三品彰英論文集》 3, 1971, 192쪽).
[역주:01권188] 음즙벌국을 치니…항복하였다파사왕대에 음즙벌국이 신라에 항복한 사실은 본서 권34 잡지 지리(1)에도 실려 있다. 반면 《三國遺事》 王曆篇에서는 音質國 곧 音汁火縣이 신라에 항복한 때를 祇摩王代라 하여 본서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역주:01권189] 압독국…항복하였다押督은 押梁으로도 표기되었는데, 현재의 경북 경산시 지역에 있던 소국이다. 그런데 압독국이 신라에 편입된 시기를 본서 권34 잡지 지리(1)와 《三國遺事》王曆篇에는 祇摩王 때라 하여 본서의 기사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역주:01권190] 백제가 사신을 보내 화해를 청하였다본서 권23 백제본기 己婁王 29년(105)조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역주:01권191] 10도(道)여기서의 道는 지방 행정구역으로서의 道가 아니라 여러 방향으로 나있는 통행로 혹은 방향을 가리킨다.
[역주:01권192] 비지국(比只國)현재의 경북 경주시 안강읍에 있던 소국으로 비정된다(李丙燾, 《國譯 三國史記》, 1977, 17쪽). 그러나 경남 창녕군 창녕읍에 있던 소국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千寬宇, 《古朝鮮史·三韓史硏究》, 1989, 293쪽). 본서 주석 287 참조.
[역주:01권193] 다벌국(多伐國)현재의 대구시에 있던 소국으로 추정된다(李丙燾, 앞의 책, 17쪽). 경북 포항시 興海邑(千寬宇, 《古朝鮮史·三韓史硏究》, 1989, 293쪽). 혹은 경북 경주시 강동면 일대(崔炳雲, 〈西紀 2세기경 新羅의 領域擴大〉, 《全北史學》 6, 1982), 경남 합천지방으로 비정하는 견해 등이 있다. 본서 권37 주석 312 참조.
[역주:01권194] 초팔국(草八國)본서 권34 잡지 지리(1)에 보이는 草八兮縣과 동일지명으로 현재의 경남 합천군 초계면 이대에 있던 소국이다(李丙燾, 《國譯 三國史記》, 1977, 17쪽). 혹은 草八을 兮芼의 誤記로 보아 경북 포항시 기계면 일대에 있던 나라로 추정하기도 한다(千寬宇, 《古朝鮮史·三韓史硏究》, 1989, 293~294쪽). 본서 권34 주석 423 참조.
祇摩尼師今立(或云祇味) 婆娑王嫡子 母史省夫人 妃金氏 愛禮夫人 葛文王摩帝之女也 初婆娑王獵於楡湌
之澤 太子從焉 獵後 過韓歧部 伊湌許婁饗之 酒酣 許婁之妻 携少女子出舞(携 新舊本皆作推門 蓋携之誤
也) 摩帝伊湌之妻 亦引出其女 太子見而悅之 許婁不悅 王謂許婁曰 此地名大庖 公於此 置盛饌美醞 以宴
衎之 宜位酒多 在伊湌之上 以摩帝之女 配太子焉 酒多 後云角干。
二年 春二月 親祀始祖廟 拜昌永爲伊湌 以參政事 玉權爲波珍湌 申權爲一吉湌 順宣爲級湌 三月 百濟遣
使來聘
三年 春三月 雨雹 麥苗傷 夏四月 大水 慮囚 除死罪餘悉原之
四年 春二月 加耶寇南邊 秋七月 親征加耶 帥步騎度黃山河 加耶人伏兵林薄 以待之 王不覺直前 伏發圍
數重 王揮軍奮擊 決圍而退
五年 秋八月 遣將侵加耶 王帥精兵一萬 以繼之 加耶嬰城固守 會久雨 乃還
九年 春二月 大星墜月城西 聲如雷 三月 京都大疫
十年 春正月 以翌宗爲伊湌 昕連爲波珍湌 林權爲阿湌 二月 築大甑山城 夏四月 倭人侵東邊
十一年 夏四月 大風東來 折木飛瓦 至夕而止 都人訛言 倭兵大來 爭遁山谷 王命伊湌翌宗等諭止之 秋七月
飛蝗害穀 年饑 多盜
十二年 春三月 與倭國講和 夏四月 隕霜 五月 金城東民屋陷爲池 芙蕖生
十三年 秋九月康申晦 日有食之
十四年 春正月 靺鞨大入北境 殺掠吏民 秋七月 又襲大嶺柵 過於泥河 王移書百濟請救 百濟遣五將軍助之
賊聞而退
十六年 秋七月甲戌朔 日有食之
十七年 秋八月 長星竟天 冬十月 國東地震 十一月 雷
十八年 秋 伊湌昌永卒 以波珍湌玉權爲伊湌 以參政事
二十年 夏五月 大雨 漂沒民戶
二十一年 春二月 宮南門災
二十三年 春夏 旱 秋八月 王薨 無子
[교주:01권41] 携原本 誤刻. 字形과 文意로 보아 수정. 三國史節要 「以」. 鑄字本 「推門」. 榮·烈 「推門」, 浩 「攜」, 舜 「以」.
[교주:01권42] 阿原本 「河」. 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수정.
[교주:01권43] 池原本 「他」. 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수정.
[역주:01권195] 지마이사금(祇摩尼師今)신라의 제 6대 임금. 재위기간은 112~134년이다. 祗磨 혹은 祇味라고도 하였는데, 파사옹의 아들로 성은 박씨이다.
[역주:01권196] 마제(摩帝)《三國遺事》 王曆篇에는 磨帝로 표기하였다. 한기부 사람으로 김씨이며 지마왕비 愛禮夫人의 아버지이다.
[역주:01권197] 주다(酒多)이찬보다 지위가 높고 후에 이것을 角干이라 일컬었다고 한 점으로 보아, 이벌찬의 이칭인 舒發翰·舒弗邯으로 훈독될 수 있다. 혹은 外位의 述干과 관련이 있다고도 한다(李宇泰, 〈新羅의 村과 村主〉, 《韓國史論》 7, 서울대 국사학과, 1981, 141쪽).
[역주:01권198] 창영(昌永)지마왕 2년에 이찬이 되어 정치에 참여하다가 동왕 18년(129)에 죽었다.
[역주:01권199] 옥권(玉權)지마왕 2년에 파진찬이 되었다가 동왕 18년(129)에 昌永을 이어서 이찬이 되어 정치에 참여하였다.
[역주:01권200] 백제가…예방하였다본서 권23 백제본기 己婁王 37년(113)조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역주:01권201] 황산하(黃山河)현재의 경남 양산시 院洞面 院洞里 부근에서 낙동강 하구 乙淑島 사이에 흐르던 강이다(金泰植, 《加耶聯盟史》, 일조각, 1993, 70쪽).
[역주:01권202] 익종(翌宗)지마왕 10년에 이찬이 되었고 이듬해인 122년에 왜병이 크게 쳐들어온다는 流言蜚語가 있어 도성이 어수선하였으므로 익종이 그들을 달랬다고 한다.
[역주:01권203] 대증산성(大甑山城)본서 권34 잡지 지리(1) 및 《新增東國輿地勝覽》 권23, 東萊縣 속현조에, 東萊縣의 속현인 東平縣은 본래 大甑縣이라 하였고, 《大東地志》 권7 東萊 城池條에 『東平古縣城은 신라 지마왕 10년에 쌓았던 대증산성이 바로 이것이다』 라고 한 점으로 보아 대증산성은 현재의 부산시 부산진구 堂甘洞과 釜岩洞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본서 권34 주석 280 참조.
[역주:01권204] 9월 그믐 경신에 일식이 있었다《後漢書》 권5 安帝 延光 3년 9월조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역주:01권205] 말갈(靺鞨)말갈은 원래 隋 ·唐代에 중국 동북지방에 살던 이민족에 대한 총칭이다. 그러나 본서에 등장하는 말갈은 중국에서 말하는 靺鞨과는 다른 이른바 '僞靺鞨'로 함경남도와 경기도, 강원도 일부에 흩어져 있던 東濊 세력으로 보인다(兪元載,〈三國史記 僞靺鞨考〉, 《史學硏究》 29, 1979, 1~42쪽).
[역주:01권206] 대령책(大嶺柵)현재의 강원도대관령에 있던 柵門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松井等, 〈渤海國の彊域〉, 《滿鮮歷史地理》, 1913, 244쪽, 李丙燾, 《國譯 三國史記》, 1977, 19쪽) 확실치는 않다.
[역주:01권207] 이하(泥河)泥河의 위치에 관하여, 1) 함경남도 德源에 있었다는 설(安鼎福, 《東史綱目》 권4 新羅疆域條), 2) 강원도 강릉시 부근의 소양강이라는 설(松井等, 앞의 논문, 1913, 423쪽), 3) 강원도 강릉시의 성남천이라는 설(李丙燾, 앞의 책, 《國譯 三國史記》, 1977, 19쪽). 4) 강원도 강릉시 連谷面의 연곡천이라는 설(徐炳國,〈渤海와 新羅의 國境線問題硏究〉, 《관동대 논문집》 9, 1981, 450~451쪽), 5) 남한강 상류라는 설(李康來, 〈三國史記에 보이는 靺鞨의 군사활동〉, 《領土問題硏究》 2, 1986, 52~55쪽) 등이 있다.
[역주:01권208] 7월 초하루 갑술에 일식이 있었다《後漢書》 권6 順帝 永建 2년 7월조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역주:01권209] 장성(長星)살별의 일종으로서 내어뿜는 빛의 꼬리가 특별히 긴 것을 말한다. 이 별이 나타나면 兵亂이 일어난다고 한다.
逸聖尼師今立 儒理王之長子(或云日知葛文王之子) 妃朴氏 支所禮王之女
元年 九月 大赦
二年 春正月 親祀始祖廟
三年 春正月 拜雄宣爲伊湌 兼知內外兵馬事 近宗爲一吉湌
四年 春二月 靺鞨入塞 燒長嶺五柵
五年 春二月 置政事堂於金城 秋七月 大閱閼川西 冬十月 北巡 親祀太白山
六年 秋七月 隕霜殺菽 八月 靺鞨襲長嶺 虜掠民口 冬十月 又來 雷甚乃退
七年 春二月 立柵長嶺 以防靺鞨
八年 秋九月辛亥晦 日有食之
九年 秋七月 召羣公 議征靺鞨 伊湌雄宣上言不可 乃止
十年 春二月 修葺宮室 夏六月乙丑 熒惑犯鎭星 冬十一月 雷
十一年 春二月 下令 農者政本 食惟民天 諸州郡修完堤防 廣闢田野 又下令 禁民間用金銀珠玉
十二年 春夏 旱 南地最甚 民飢 移其粟賑給之
十三年 冬十月 押督叛 發兵討平之 徙其餘衆於南地
十四年 秋七月 命臣寮 各擧智勇堪爲將帥者
十五年 封朴阿道爲葛文王(新羅追封王 皆稱葛文王 其義未詳)
十六年 春正月 以得訓爲沙湌 宣忠爲奈麻 秋八月 有星孛于天市 冬十一月 雷 京都大疫
十七年 自夏四月 不雨 至秋七月 乃雨
十八年 春二月 伊湌雄宣卒 以大宣爲伊湌 兼知內外兵馬事 三月 雨雹
二十年 冬十月 宮門災 彗星見東方 又見東北方
二十一年 春二月 王薨
[교주:01권44] 太原本 「大」. 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수정.
[교주:01권45] 雪原本 誤刻. 三國史節要에 의거 수정. 鑄字本 「雷」. 榮·朝·北·權·烈·燾·浩 「雷」.
[교주:01권46] 秋原本 「秧」. 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수정.
[역주:01권210] 일성이사금(逸聖尼師今)신라의 제7대 임금. 재위기간은 134~154년이다. 이 왕대에 政事堂을 서치하고 주·준의 제방을 수리하여 농사에 힘쓰도록 하였으며 민간에서 金銀과 珠玉을 사용하는 것을 금하였다.
[역주:01권211] 유리왕의 맏아들이고《三國遺事》王曆篇에서는 일성왕의 아버지를 弩禮王 즉 유리왕의 형이라 하고 혹은 지마왕이라 하였다. 그리고 본서에서는 유리왕의 맏아들이라 하였는데, 유리왕의 생존연대로 보아 일성왕은 유리왕의 맏아들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일성왕의 아버지는 동왕 15년에 갈문왕으로 추증된 朴阿道로 보기도 한다.(李基白, 〈新羅時代의 葛文王〉, 《新羅政治社會史硏究》, 일조각, 1974, 20쪽).
[역주:01권212] 또는 일지갈문왕(日知葛文王)의 아들이라고도 하였다본서 권1 신라본기 유리 이사금 즉위년조에 의하면, 유리왕의 비는 일지갈문왕의 딸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생존연대로 보아 일성옹은 일지갈문왕의 아들이 될 수 없다.
[역주:01권213] 왕비《三國遺事》王曆篇에 의하면, 일성왕의 妃는 △禮夫人이라 하였다.
[역주:01권214] 지소례왕(支所禮王)일성왕의 왕비. 《三國遺事》 王曆篇에는 『妃△禮夫人 日知葛文王之父(女의 誤字: 역주자 註)』라 하여 일성왕비의 아버지를 일지갈문왕이라 하였다. 支所禮王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역주:01권215] 웅선(雄宣)일성왕 3년(136) 이찬이 되어 중앙과 지방의 군사를 통괄하였고, 동왕 9년(142)에는 靺鞨을 정벌하려 했을 때 웅선이 不可하다고 간함으로써 그 일을 중지시켰다. 그는 동왕 18년(151)에 죽었다.
[역주:01권216] 장령(長嶺)鐵嶺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으나(韓鎭書, 《海東繹史續》, 新羅北界沿革條) 확실치는 않다.
[역주:01권217] 목책(木柵)나무로 말뚝을 박아서 엮어 만든 방어용 시설물로 오늘날 전남 완도 淸海鎭 유적에 남아 있는 圓木列과 같은 것이다.
[역주:01권218] 정사당(政事堂)신라 초기에 신료들이 모여서 국사를 의논하던 일종의 政廳. 종래에는 궁실이 정청의 구실을 하였으나 이때 정사당이 설치됨으로써 이곳이 정청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정사당이 설치된 이후부터 첨해왕대 南堂이 설치되기까지의 정치체제를 정사당 중심의 정치세제라고도 한다(李鍾旭, 《新羅國家形成史硏究》, 일조각, 1982, 206~211쪽).
[역주:01권219] 태백산(太白山)경북 봉화군과 강원도 대백시에 걸쳐있는 현재의 태백산으로 해발 1,567m이다. 이 산은 신라시대 五嶽 중의 하나인 北嶽으로 中祀의 대상지였다. 그런데 일성왕대에 신라의 영토가 태백산까지 미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므로, 과연 본서에서 처럼 일성왕이 태백산에 몸소 제사지냈을까는 의문이다.
[역주:01권220] 9월 그믐 신해에 일식이 있었다《後漢書》 권6 順帝 永和 6년 9월조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역주:01권221] 형혹(熒惑)태양계의 안쪽에서 4번째 惑星인 火星의 다른이름, 공전 주기는 780일이고 15년에서 17년마다 지구에 가장 가깝게 접근한다. 이 별이 나타나면 兵亂이 일어난다고 한다.
[역주:01권222] 진성(鎭星)土星의 다른 이름으로 塡星이라고도 한다. 태양계의 중심에서 6번째 惑星이고 공전 주기는 약 29.5년이다. 이 별이 보이면 災殃이 닥친다고 한다.
[역주:01권223] 박아도(朴阿道)본서 권45 열전 朴提上傳에 보이는 그의 할아버지 阿道葛文王 혹은 미추왕의 高祖인 阿道와 동일인인지 확실하지 않다. 그런데 일성왕이 박아도를 갈문왕에 봉한 점으로 미루어 그를 일성왕의 아버지라고 한 支所禮王과 동일인으로 보기도 하고(今西龍,〈新羅葛文王考〉, 《新羅史硏究》, 國書刊行會, 1933, 250쪽), 혹은 지소례왕과는 관계없이 일성왕의 아버지로 추정하기도 한다(李基白, 〈新羅時代의 葛文王〉, 《新羅政治社會史硏究》, 1974, 10~11쪽).
[역주:01권224] 갈문왕(葛文王)왕족 및 와비족, 王母族 등 왕과 특별한 관계가 있는 씨족집단의 씨족장 혹은 女王의 남편에게 부여하는 칭호이다. 이는 왕의 책봉에 의하여 주어지며 남성만이 그 대상이었다. 신라시대의 葛文王으로는 21명이 확인된다. 그 所任은 확실치 않으나 왕의 행차에 배종하거나 귀족회의 때에 왕을 대신하여 회의를 주관하기도 하였다. 갈문왕의 책봉대상은 시기에 따라 달랐는데, 朴氏王시대에는 왕비의 아버지가 주로 갈문왕에 책봉되었고 昔氏王 시대에는 형제상속에 의하여 왕위가 계승도미으로써 왕위에 오르지 못한 왕의 아버지나 외할아버지가 주로 갈문왕에 추대되었다. 그러나 눌지왕 이후에는 父子相續에 의한 왕위계승방법이 확립됨으로써 왕위에 오르지 못한 왕의 동생이 주로 갈문왕이 되었고, 中代에는 왕권이 전제화됨에 따라 갈문왕의 책봉이 일단 없어졌다. 그러나 宣德王 이후 下代가 되면 여러 가계 사이의 왕위쟁탈이 치열해짐에 따라 다른 가계의 長이 즉위하는 경우에 그 왕의 아버지에 한하여 갈문왕에 책봉하였다(李基白, 〈新羅時代의 葛文王〉, 《新羅政治社會史硏究》, 1974, 8~28쪽).
[역주:01권225] 천시(天市)房星과 心星의 동북방에 있는 별자리로서 22개의 별로 이루어져 있다. 이 별자리는 나라의 市場, 交易, 斬戮을 관장하며(《史記》권25, 天官書 正義注) 紫微, 太微와 함께 三垣이라 불리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