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歷史/三國史記

三國史記 卷第四

柳川 2016. 9. 19. 12:45

                                     三國史記 卷第四

 


新羅本紀 第四 智證麻立干 法興王 眞興王 眞智王 眞平王。

 

智證麻立干 姓金氏 諱智大路(或云智度路 又云智哲老) 奈勿王之曾孫 習寶葛文王之子 照知王之再從

弟也 母金氏 鳥生夫人 訥祈王之女 妃朴氏 延帝夫人 登欣 伊飡女 王體鴻大 膽力過人 前王薨 無子 故繼

位 時年六十四歲.


論曰新羅王稱居西干者一 次次雄者一 尼師今者十六 麻立干者四 羅末名儒崔致遠作帝王年代曆 皆稱某

王 不言居西干等 豈以其言鄙野不足稱也 曰左 漢中國史書也 猶存楚語穀於菟-匈奴語撑犁孤塗等 今記

新羅事 其存方言 亦宜矣.


三年 春三月 下令禁殉葬 前國王薨 則殉以男女各五人 至是禁焉 親祀神宮 三月 分命州郡主 勸農 始用

             牛耕.

四年 冬十月 群臣上言 始祖創業已來 國名未定 或稱斯羅 或稱斯盧 或言新羅 臣等以爲 新者德業日新 

             羅者網羅四方之義 則其爲國號宜矣 又觀自古有國家者 皆稱帝稱王 自我始祖立國 至今二

             十二世 但稱方言 未正尊號 今群臣一意 謹上號新羅國王 王從之.

五年 夏四月 制喪服法 頒行 秋九月 徵役夫 築波里-彌實-珍德-骨火等十二城.

六年 春二月 王親定國內州郡縣 置悉直州 以異斯夫爲軍主 軍主之名 始於此(君主以下七字 疊見于伐

             休尼師今二年條 然 接以此爲是) 冬十一月 始命所司藏氷 又制舟楫之利.

七年 春夏 旱 民饑 發倉賑救之

十年 春正月 置京都東市 三月 設檻穽 以除猛獸之害 秋七月 隕霜殺菽.

十一年 夏五月 地震 壞人屋有死者 冬十月 雷.

十三年 夏六月 于山國歸服 歲以土宜爲貢 于山國 在溟州正東海島 或名鬱陵島 地方一百里 恃嶮不服 伊

               飡異斯夫爲何瑟羅州軍主 謂于山人愚悍 難以威來 可以計服 乃多造木偶師子 分載戰船 

               抵其國海岸 誑告曰 汝若不服 則放此猛獸踏殺之 國人恐懼則降.

十五年 春正月 置小京於阿尸村 秋九月 徙六部及南地人戶充實之 王薨 諡曰智證 新羅諡法 始於此.

 



[교주:04권1] 奈
原本 缺刻. 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보충.
[교주:04권2] 炤
原本 「照」. 本書 卷3 炤知麻立干 卽位年條에 의거 수정. 本書 目錄 및 鑄字本 「照」. 朝·權·燾·浩 「照」.
[교주:04권3] 膽
原本 「瞻」. 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수정. 烈 「瞻」.
[교주:04권4] 二
原本 「三」. 三國史節要에 의거 수정. 鑄字本 「三」. 榮·朝·北·權·烈·燾·浩 「三」.
[교주:04권5] 之
原本 「救」. 東國史略·三國史節要에 의거 수정. 鑄字本 「救之」.
[교주:04권6] 抵
原本 「柢」. 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수정.


[역주:04권1] 지증 마립간(智證麻立干)
신라의 제22대 왕. 재위기간은 500년 ~ 514년이다. 지증왕은 영토의 확장, 국호 및 왕호의 개칭, 牛耕의 실시, 殉葬 금지, 군현의 설치 등 신라 국가 발전의 기틀을 조성하였다.
[역주:04권2] 지도로(智度路) 혹은 지철로(智哲老)라고도 하였다
《三國遺事》권1 紀異篇 智哲老王條에서는 지증왕의 이름을 智大路 또는 智度路라 하였고, (迎日 冷水里新羅碑)에는 '至都盧葛文王'으로 표기되어 있다.
[역주:04권3] 습보갈문왕(習寶葛文王)
《三國遺事》 王曆篇에 의하면, 지증왕의 아버지는 눌지왕의 동생 期寶葛文王이라 하였다. 습보와 기보의 동일인 여부는 알 수 없다.
[역주:04권4] 조생부인(鳥生夫人)
《三國遺事》 王曆篇에는 烏生夫人으로 기록되어 있다.
[역주:04권5] 연제부인(延帝夫人)
《三國遺事》王曆篇에는 迎帝夫人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같은 책 권1 紀異篇 智哲老王條에 의하면, 왕이 牟梁部 相公의 딸을 왕비로 삼았는데 그녀는 키가 7尺 5寸이었다고 한다.
[역주:04권6] 등흔(登欣)
《三國遺事》 王曆篇에는 지증왕비의 아버지를 '漢只 登許'라 하였다. 漢只는 신라 6부 중의 漢祗部이고 登許는 본서에서 말하는 登欣과 같다. 한편 같은 책 권1 紀異篇 智哲老王條에서는 왕비의 아버지를 牟梁部 相公이라 하였다.
[역주:04권7] 왕은 체격이 … 남보다 뛰어났다
《三國遺事》 권1 紀異篇 智哲老王條에서는 왕의 신체가 건장하다는 표현을 『陰莖의 길이가 한 자[尺] 다섯 치[寸]』라는 식으로 나타내고 있다.
[역주:04권8] 신라 왕으로서 …. 마립간(立干)이라 칭한 이가 네 사람
본기사와는 달리 《三國遺事》 王曆篇에는 이사금을 칭한 사람이 14명, 麻立干을 칭한 사람이 6명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차이는 麻立干을 처음으로 칭한 왕을 본서에서는 19대 눌지 마립간으로 기술한 반면, 《三國遺事》에서는 17대 나물왕으로부터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역주:04권9] 최치원(崔致遠)
신라 王京의 사량부 사람으로 자는 孤雲 혹은 海雲이다. 12세에 입당, 유학하여 당나라 賓貢科에 급제한 후 귀국한 신라 말의 유학자이다. 본서 권46 열전 崔致遠傳 참조.
[역주:04권10]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
명칭으로 보아 우리나라와 중국의 왕력을 대비한 年表로 추정되는데 현존하지 않는다. 최치원이 이러한 연표를 만든 것은 당시 우리나라 학자에게 중국 연대와 우리나라의 연대를 대조한 年表의 필요성에서 편찬된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 《三國遺事》의 王曆篇은 〈帝王年代曆〉을 참고하여 작성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李基白 外, 《우리 歷史를 어떻게 볼 것인가》, 삼성문화문고, 1976, 28 ~31쪽).
[역주:04권11] 곡오도(穀於菟)
중국 楚나라의 方言으로, ‘穀은 '젖' 또는 '젖먹이다'라는 말이고 ‘於菟’는 ‘호랑이'라는 말로 호랑이가 젖을 먹인다 뜻이다. 이는 초나라 令尹인 子文이 불륜관계로 태어나자 외할머니가 연못가에 버리니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였으므로 子文을 '鬪穀於菟’로 칭하였다는 데서 나온 것이다. 《春秋左氏傳》 宣公 4년조 참조.
[역주:04권12] 탱리고도(撑犁孤塗)
‘撑犁’는 하늘[天], ‘孤塗'는 아들[子]을 뜻하는 흉노 말이다. 탱리고도는 천자라는 뜻으로 흉노의 單于(선우)를 이렇게 칭하였다. 《漢書》 권94 열전 匈奴傳 참조.
[역주:04권13] 순장(殉葬)을 금하였다
殉葬에는 사람을 묻는 경우와 개·돼지와 같은 동물을 묻는 경우가 있었는데, 신라·가야 고분에서 많이 발견되는 토우 역시 의례화한 순장으로 볼 수 있다. 한국에서의 殉葬에 대한 기록은 《三國志》 권30 魏書 東夷傳 夫餘條에 『사람이 죽으면 남을 죽여 殉葬하는데 많은 경우에는 100명이 넘는다』고 한 것이 처음이다. 지금까지 발굴 ·조사된 고분 가운데 殉葬의 사례로 일컬어 지는 것으로는 梁山 夫婦塚, 高靈 池山洞 44.45호분, 그리고 皇南大塚으로 알려진 慶州의 皇南洞 98호분 중 南墳 등이 있다(金鍾徹, 〈古墳에 나타나는 三國時代 殉葬樣相〉, 《尹武炳博士回甲紀念論叢》, 1984). 이들 가운데 왕릉으로 추정되는 황남동 98호분 南墳에 함께 매장된 15세쯤 되어 보이는 여성의 경우는 그 가능성이 높다 하겠으나, 앞의 두 곳은 이를 同時葬이 아닌 追加葬으로 볼 수도 있어 논란의 여지가 남아 있다.
殉葬은 청동기 시대 이후 지배층 세력이 강화되면서 생긴 것이다. 殉葬이 행해진 사상적 배경으로는 永生思想, 犧牲, 死者守護思想을 들 수 있으며, 殉葬이 금지된 이유로는 농업이 발전함에 따른 인간의 노동력의 중시, 불교전래로 인한 살생금지 사상의 영향, 인간 문화의 발달 등을 들 수 있다(朱容立, 〈韓國 古代의 殉葬硏究〉, 《손보기교수정년기념 한국사학논총》, 1988). 한편 殉葬의 금지를 인간의 노예적 지배로부터의 전환으로 해석하여 고대와 중세의 시대적 전환의 계기로 보는 견해도 있다(북한과학원 편, 《조선전사》 2, 1979).
[역주:04권14] 소를 부려 논밭갈이를 하였다
중국에서 牛耕이 일반화된 것은 戰國時代인 서기전 3세기경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劉仙洲, 〈中國古代在農業機械方面的硏究〉, 《中國農業機械學報》 5-1, 1962, 1~36쪽. 朴虎錫, 〈東·西洋 쟁기의 起源과 發達〉, 충북대대학원 農學博士學位論文, 1988, 34쪽). 우리나라에서의 牛耕도 신라 지증왕대 보다 훨씬 앞선 시기에 시작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三國遺事》 권1 紀異篇 努禮王條에 우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쟁기와 보습이 弩禮王 때에 제작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점에서 그러한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따라서 智證王 때 牛耕이 始作되었다는 본서 신라본기의 기사는 국가적인 입장에서 국왕이 적극적으로 우경 보급정책을 시작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洪以燮, 《朝鮮科學史》, 正音社, 1946).
牛耕의 실시는 신라 사회에 여러 가지 변화를 가져 왔다. 첫째, 이전에 비하여 토지 면적당 생산량이 증가하였다(李基東, 〈新羅 花郞徒의 起源에 대한 一考察〉, 《新羅 骨品制社會와 花郞徒》, 一潮閣,1984, 325쪽, 全德在, 〈4~6세기 농업생산력의 발달과 사회변동〉, 《역사와 현실》, 1990, 26쪽). 둘째, 사회 계층분화를 촉진하였다. 즉 생산력의 증대는 빈부의 격차를 가속화시키고 공동체간의 균형을 깨뜨렸다. 셋째, 우경의 실시는 신라를 비롯한 여러 나라들이 지속적으로 정복전쟁을 수행하여 점차 영토를 확장, 고대국가로 발전함에 있어 중요한 경제적 배경이 되었다.
[역주:04권15] 나라 이름[國號]
신라의 국호는 여러 가지로 표기되었다. 《三國史記》와 《三國遺事》에는 徐那伐·徐耶伐·徐羅伐·徐伐·斯羅·斯盧·鷄林·新羅·鷄貴·矩矩叱䃜說羅,《帝王韻紀》에는 戶羅로 표기되어 있다. 《三國志》·《晉書》·《梁書》·《南史》·《大唐西域求法高僧傳》 등의 중국측 기록에는 斯盧·薛羅·新盧·新羅·斯羅·矩矩叱䃜說羅, 《日本書紀》・《古事記》・《風土記》 등 일본측 기록에는 新羅·新郎·斯羅·鷄林·志羅紀 등으로 나타난다. 이 밖에 최근 국내에서 발견된 〈迎日 冷水里新羅碑〉와 〈蔚珍 鳳坪新羅碑〉에는 각각 '斯羅’와 ‘新羅’로 적혀 있다. 이렇듯 다양한 신라의 국호에 대한 학자들의 해석 또한 다양하다. 일찍이 朝鮮後期에 韓鎭書가 新國[새나라]說(《海東繹史續》)을 주장한 이래, 근대에 들어와 安在鴻은 新羅의 語義를 실[谷] ·시로[城]로 해석하여 峽谷에 있는 城砦에서 起源했다 하였고(《朝鮮上古史鑑》 上, 1947, 169~170쪽), 梁柱東은 斯羅·新羅·斯盧 등을 모두 'ㅅㆎㄴㆎ’로 읽는 한편 徐伐·鷄林 등은 'ㅅㆎㅂㆍㄹ'로 읽어 原音形은 徐羅伐이고 뜻은 동쪽의 밝은 나라로서 'ㅅㆎㄴㆎㅂㆍㄹ[東川原]'에서 發祥하였다고 보았다(《古歌硏究》, 1945, 40~42쪽). 또 李丙燾는 徐羅伐·蘇伐에서 비롯한 首邑 내지 上邑의 뜻으로 보았으며(〈新羅의 起源問題〉, 《韓國古代史硏究》, 1976, 595 ~ 596쪽), 趙芝薰은 原音形이 徐羅伐·斯盧國으로서 音은 'ㅅㄹ블' 이고 뜻은 上國·高國이라 하였다(〈新羅國號硏究論考〉, 《高麗大學校50周年記念論文集》, 1955). 그리고 三品彰英(〈骨品制社會〉, 《古代史講座》 7, 1963)과 文暻鉉(〈新羅國號의 硏究〉, 《大丘史學》 2, 1970) 등은 이를 'ㅅㆎㅂㆍㄹ'로 읽어 金國·鐵國으로 해석하였다.
이처럼 다양하게 불리고 해석될 수 있는 新羅의 國號가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智證王 4년에 新羅로 통일된 것은 그만큼 국가의 기반이 안정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한편 신라 국호의 변천과정에 대하여서는 본서 권1 신라본기 赫居世居西干 즉위년 기사에 徐那伐로 국호를 정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三國遺事》 권1 紀異篇 新羅始祖 赫居世王條에서는 徐伐·徐羅伐·鷄林 가운데 鷄林이라는 국호는 脫解王 때에 비롯되었다고 하는 異說을 소개하고 있다. 중국측 기록으로는 《梁書》 권54 新羅傳에 『魏時日新盧 宋時日新羅 或日斯羅』라고 하였다. 따라서 이를 〈迎日 冷水里新羅碑〉 및 〈蔚珍 鳳坪新羅碑〉와 연결시켜 살펴보면, 신라의 국호는 斯盧→斯羅→新羅 순으로 변천한 것이 아난가 생각된다.
[역주:04권16] 사라(斯羅)
신라의 국호를 斯羅로 표기한 예는 본서와 《三國遺事》 뿐만 아니라 중국측 기록인 《魏書》 권8 世宗 景明 3년(502)조와 같은 책 永平 원년(508)조, 〈梁職貢圖〉 百濟國記가 있다. 한편 金石文으로는 〈迎日 冷水里新羅碑〉에서도 斯羅로 표기하였다. 斯羅의 '斯'는 15세기의 ‘ㅅㆍ’로서 현대음의 ‘시’ 혹은 '사', 羅는 '라' 혹은 '로' 또는 ‘루(luo)'이었을 가능성이 높다(金永萬, 〈迎日冷水里新羅碑의 語文學的 考察〉, 《韓國古代史硏究》 3, 1990, 67~68쪽).
[역주:04권17] 사로(斯盧)
《三國遺事》와 중국측 기록에도 보인다. 특히 《三國志》 권30 魏書 東夷傳에 辰韓 12國 중의 한 나라로 기록되어 있어 城邑國家 이래의 국호로 생각된다.
[역주:04권18] 신라(新羅)
斯羅·斯盧 등의 국호를 漢式으로 의미를 새로 부여한 명칭으로, 이것이 최종 국호로 정착되었다. 한편 《三國遺事》 王曆篇에서는 15대 基臨尼師今 때에 ‘德業日新’의 新과 ‘網羅四方之民'의 羅를 따서 국호를 신라로 改定하였다고 기록하면서, 신라의 국호 개정이 智證王 혹은 法興王 때의 일이라는 說도 함께 소개하고 있다. 지증왕대 국호의 제정은 炤知王 이후 新羅의 비약적인 발전을 상징한다.
[역주:04권19] 신라국왕(新羅國王)이라는 칭호를 올립니다
지증왕 4년부터 '王'의 칭호를 사용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이제까지 사용하던 麻立干의 칭호를 완전히 廢棄한 것이 아니라 法興王代까지는 여전히 ‘麻立干’ 내지 그와 같은 뜻인 ‘寐錦’을 ‘王’과 함께 중복 사용하였다(李丙燾, 〈中原高句麗碑에 대하여〉, 《史學志》 13, 1979, 25쪽). 〈蔚珍 鳳坪新羅碑〉에 '牟卽智寐錦王'이라는 기사가 그것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過渡期的인 現狀으로도 볼 수 있는 이러한 왕호의 중복사용 현상은 眞興王代에 가서야 비로소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역주:04권20] 상복(喪服)에 관한 … 시행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이보다 2년 전에 내린 殉葬 금지령을 포함한 葬禮의 제반 의식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역주:04권21] 파리성(波里城)
현재의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으로 비정된다. 이는 본서 권35 잡지 지리(2) 三陟郡條에 나오는 波利縣과 동일지명 이다. 지증왕 6년에 이 성을 쌓은 것은 悉直州 설치를 위한 준비작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역주:04권22] 미실성(彌實城)
현재의 慶北 포항시 興海邑 소재 南彌秩夫城에 비정된다(李炯佑, 〈迎日地方의 歷史·地理的 考察〉, 《韓國古代史硏究》3, 1990, 25쪽). 본서 권3 신라본기 炤知麻立干 3년조에 보이는 彌秩夫와 《新增東國輿地勝覽》 권22 興海郡 古跡條에 나오는 彌秩夫城은 동일한 지명이다.
[역주:04권23] 골화성(骨火城)
현재의 경북 영천시 완산동으로, 助貫王 때 이곳에 있던 骨火小國을 쳐서 복속한 땅이다. 본서 권34 주석 270 참조.
[역주:04권24] 실직주(悉直州)
현재의 강원도 삼척시이다. 파사왕 23년에 실직국을 복속하여 편입한 곳이다. 본서 권35 주석 366 참조.
[역주:04권25] 이사부(異斯夫)
奈勿王의 4世孫으로, 苔宗 혹은 伊宗(《三國遺事》 권1, 紀異篇 智哲老王條), 伊史夫智(〈丹陽赤城碑〉), 伊叱夫禮智(《日本書紀》 권17, 繼體紀)라고도 하였다. 본서에서는 이사부의 姓을 金씨라 하였으나, 《三國遺事》 권1 紀異篇에는 朴씨라 하였다. 본서 권44 열전 異斯夫傳 참조.
[역주:04권26] 군주(軍主)
州의 軍事 및 行政의 최고 책임자이다. 신라에서 군주란 원래 군대의 최고위 통솔자로서, 서기 3~4세기 경부터는 將軍이란 칭호와 병용되기도 하였지만, 지증왕 때부터 주로 州의 長官을 지칭하는 용어로서만 사용되었다. 특히 중고기 이후 신라가 정복 활동을 통하여 점차 영역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설치된 州는 행정 단위라기 보다 오히려 각 지방의 군사적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였으므로, 州長官인 軍主는 治民보다 대규모 州軍의 지휘에 주력하였다. 삼국통일 후에는 北朝와 隋·唐 官制의 영향을 받아 摠管·都督 등의 명칭으로 바뀌기는 하였으나, 기본적인 성격에 있어서는 軍主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軍主·摠管·都督 등의 職位는 모두 眞骨 신분이 독점하였다.
[역주:04권27] 군주(軍主)의 명칭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본서 권2 신라본기 伐休尼師今 2년(185)조에 左右軍主의 임명기사와 함께 『군주의 이름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여 비슷한 내용이 있다. 그런데 伐木王 때의 軍主는 지방에 설치된 州의 책임자가 아니라 중앙관으로서 유사시 군대의 통솔자를 일컫는 것이었으므로, 지증왕대의 軍主와는 그 성격이 다르다고 하겠다. 따라서 본문의 기사는 州長官으로서의 軍主라는 명칭의 시작을 의미하는 셈이다.
[역주:04권28] 처음으로 … 얼음을 저장하게 하였다
본서 권39 잡지 직관(中) 內省條의 水庫典 설치와 대응하는 기사이다. 현재의 경주시 半月城 안에, 비록 朝鮮後期에 축조된 것이기는 하지만, 신라의 터에 개축한 것으로 여겨지는 石氷庫가 아직도 남아 있다.
[역주:04권29] 동시(東市)
신라 서울의 동쪽에 만들어진 市場, 본서 권38 잡지 직관(上)에 의하면 東市를 주관하는 관료로 監 2인, 大舍 2인을 두었다고 한다.
[역주:04권30] 우산국(于山國)
현재의 경상북도에 속해 있는 鬱陵島이다. 武陵 혹은 羽陵이라고도 하였는데, 지증왕 13년에 신라에 복속되었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일시 空島政策을 써서 이곳 주민을 육지로 옮겨 울릉도가 빈 섬이 되기도 하였다.
[역주:04권31] 명주(溟州)
현재의 강원도 강릉시이다. 원래는 濊의 古國으로 처음에는 고구려에 속해 있다가 신라에 편입되었다. 본서 권35 주석 318 참조.
[역주:04권32] 하슬라주(何瑟羅州)
현재의 강원도 강릉지방이다. 고구려 때의 河西良으로 본서 권44 열전 異斯夫傳에서는 ‘阿瑟羅’라 하였다. 본서 권35 주석 319 참조.
[역주:04권33] 아시촌(阿戶村)
현재의 경북 의성군 안계면인 阿尸兮縣과 동일지명으로 보인다(千寬宇, 〈三韓의 國家形成〉, 《韓國學報》 3, 1976, 146쪽). 한편 아시촌의 위치를 경북 경주시 안강읍(李丙燾, 《韓國史》(古代篇), 을유문화사, 1959, 442쪽) 혹은 경남 咸安지방에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林炳泰, 〈新羅小京考〉, 《歷史學報》 35·36 합집, 1967, 95~96쪽). 본서 권34 주석 117 참조.
[역주:04권34] 소경(小京)
왕경을 모방한 신라의 특수 행정구역으로, 阿尸村에 처음으로 소경이 설치되었다. 소경에는 장관인 仕臣이 중앙에서 파견되었다. 신라는 영토의 확장에 따른 지방지배의 효율성을 높이고 또 정복한 지역의 지배층을 연고지로부터 유리시켜 공동체적 기반을 없에기 위하여 지배층을 다른 일정한 지역으로 옮겨 놓을 목적으로 소경을 설치하였다(林炳泰, 앞의 논문, 1967, 84~94쪽), 州와 郡은 군사적 거점으로서의 성격이 강한데 반하여 소경은 지방의 정치·문화의 중심지로서의 성격이 강했고, 한편으로는 주와 군을 감시하는 기능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藤田亮策, 〈新羅九州五京考〉, 《朝鮮學報》 5, 1953).
[역주:04권35] 신라에서 시호를 … 시작되었다
《三國遺事》 王曆篇에는 본서와 마찬가지로 지증왕부터 시호를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法興王부터 諡號制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相異한 설을 동시에 소개하고 있다.






法興王立 諱原宗 (冊府元龜 姓募名(泰 遺事王曆作秦)) 智證王元子 母延帝夫人 妃朴氏 保刀夫人 王

身長七尺 寬厚愛人.


三年 春正月 親祀神宮 龍見楊山井中.

四年 夏四月 始置兵部.

五年 春二月築株山城.

七年 春正月 頒示律令 始制百官公服 朱紫之秩.

八年 遺使於梁貢方物.

九年 春三月 加耶國王遣使請婚 王以伊飡比助夫之妹送之.

十一年 秋九月 王出巡南境拓地 加耶國王來會.

十二年 春二月 以大阿飡伊登爲沙伐州軍主.

十五年 肇行佛法 初訥祈王時 沙門墨胡子 自高句麗 至一善郡 郡人毛禮 於家中 作窟室安置 於時 梁遣使 

               賜衣著香物 群臣不知其香名與其所用 遣人䝴香徧問 墨胡子見之 稱其名目曰 此焚之 則香

               氣芬馥 所以達誠於神聖 所謂神聖 未有過於三寶 一曰佛陀 二曰達摩 三曰僧伽 苦燒此發願 

               則必有靈應 時王女病革 王使胡子焚香表誓 王女之病尋愈 王甚喜 餽贈尤厚 胡子出見毛禮 

               以所得物贈之 因語曰 吾今有所歸 請辭 俄而不知所歸 至毗處王時 有阿道(一作我道)和尙 

               與侍者三人 亦來毛禮家 儀表似黑胡子 住數年 無病而死 其侍者三人留住 講讀經律 往往有

               信奉者 至是 王亦欲興佛敎 群臣不信 喋喋騰口舌 王難之 近臣異次頓(或云處道)奏曰 請斬

               小臣 以定衆議 王曰 本欲興道 而殺不辜非也 答曰 若道之得行 臣雖死無憾王 於是 召群臣

               問之 僉曰 今見僧徒 童頭異服 議論奇詭 而非常道 今若縱之 恐有後悔 臣等雖卽重罪 不敢

               奉詔 異次頓獨曰 今群臣之言非也 夫有非常之人 然後有非常之事 今聞佛敎淵奧 恐不可不

               信 王曰 衆人之信 牢不可破 汝獨異言 不能兩從 遂下吏將誅之 異次頓臨死曰 我爲法就刑 

               佛若有神 吾死必有異事 及斬之 血從斷處湧 色白如乳 衆怪之 不復非毁佛事(此據金大文鷄

               林雜傳所記書之 韓奈麻金用行所撰我道和尙碑所錄(恐與字之誤) 殊異)十六年 下令禁殺生.

十八年 春三月 命有司修理堤防 夏四月 拜伊飡哲夫爲上大等 摠知國事 上大等官始於此 如今之宰相.

十九年 金官國主金仇亥 與妃及三子 長曰奴宗 仲曰武德 季曰武力 以國帑寶物來降 王禮待之 授位上等 

               以本國爲食邑 子武力仕至角干.

二十二年 上大等哲夫卒.

二十三年 始稱年號 云建元元年.

二十五年 春正月 敎許外官携家之任.

二十七年 秋七月 王薨 諡曰法興 葬於哀公寺北峰.

 


[교주:04권7] 秦

原本 「泰」. 冊府元龜 卷996 外臣部 鞮譯條와 三國遺事 王曆篇에 의거 수정. 榮·朝·北·權·烈·浩 「泰」, 燾 「泰(秦)」.
[교주:04권8] 祇
三國史節要·鑄字本 「祗」. 榮·北·烈·舜·浩 「祗」.
[교주:04권9] 君
鑄字本 「群」. 榮·朝·權·烈·燾·浩 「群」.
[교주:04권10] 辭
原本 「辝」. 「辤」의 古篆. 「辤」는 「辭」의 本字.
[교주:04권11] 辜
原本 「古辜」. 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古」 삭제.
[교주:04권12] 怪
原本 「恠」은 「怪」의 俗字.
[교주:04권13] 與
原本 「奭」. 文意로 보아 수정. 榮·烈 「奭」, 培·燾 「奭(與)」.
[교주:04권14] 錄
原本 「綠」. 鑄字本에 의거 수정.



[역주:04권36] 법흥왕(法興王)
신라의 제23대 왕. 재위기간은 514년 ~ 539년 이다. 법흥왕의 이름에 대하여 《梁書》 권54 신라전에는 ‘王姓募名秦'이라 하였고, 《南史》 권79 신라전에는 '王姓募名泰'라 하였으며 《通典》 권 185 邊防 신라 전에는 '王姓慕名秦'이라 하였다. 그리고 〈蔚珍 鳳坪 新羅碑〉에는 왕의 이름을 '牟卽'이라 하였다. 이 왕은 율령의 반포, 상대등·병부의 설치 등을 통하여 국가의 통치기반을 확립하였고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를 공인하여 고대국가의 이념으로 삼았으며 금관가야를 정복하여 신라의 영토를 확장하였다. 《三國遺事》 王曆篇 에서는 법흥왕대부터를 中古期라 하여 앞 시대와 구분하고 있다.
[역주:04권37] 책부원귀(冊府元龜)
중국 송나라 眞宗 景德 2년(1005)에 王欽若, 揚億 등이 칙명을 받아 찬술하기 시작하여 大中祥符 6년(1013)에 완성한 당시 최대의 역사 百科全書이다. 전체 31部 1,000권으로 되어 있는데, 《太平御覽》, 《太平廣記》, 《文苑英華》와 함께 宋代 4大 部書로 칭하여진다. 한편 본서에서 인용한 법흥왕의 성은 募이고 이름은 秦이라 한 것은 《冊府元龜》 권996 外臣部 鞮譯條에 실려 있다.
[역주:04권38] 보도부인(保刀夫人)
《三國遺事》 王曆篇에는, 巴刀夫人으로 법흥왕이 죽은 후 출가하여 永興寺에 머물며 법명은 法流라 하였다. 한편 같은 책 권3 흥법편 原宗興法條에서는 영흥사를 개창하고 중이 되어 법명을 妙法이라 하였고, 《海東高僧傳》 권1 法雲傳에도 법흥왕비가 중이 되어 영흥사에 머물렀다고 한다. 〈蔚州 川前里書石〉에 보이는 ‘夫乞支妃’가 곧 보도부인이라는 견해도 있다(金龍善, 〈蔚州 川前里銘文의 檢討〉, 《歷史學報》 81, 1979, 19쪽).
[역주:04권39] 병부(兵部)
군사 업무를 총괄하던 중앙관서로, 본서 권38 잡지 직관(上)에는 법흥왕 3년(516)에 兵部에 令을 설치했다고 한다. 병부령의 설치가 곧 병부의 설치를 의미한다면, 본서의 新羅本紀와 雜志 사이에 1년의 차이가 난다. 본서 권38 잡지 직관(上) 兵部條 참조.
[역주:04권40] 율령을 반포하고
법흥왕 7년에 반포된 율령은 중국 晉나라 泰始律令을 母法으로 한 고구려의 율령을 이어받은 것으로 구체적 내용은 잘 알 수 없으나, 백관의 公服과 17관등, 골품제 등에 관한 규정이 포함되었을 것이다(田鳳德, 〈新羅律令考〉, 《서울대논문집》 4(인문 사회과학편), 1956, 311~358쪽), 법흥왕대의 율령반포는 신라의 왕권강화와 국가의 통일적인 통치를 가능하게 한 法的 기초라 할 수 있는데, 최치원이 찬술한 〈鳳巖寺智證大師碑銘〉에 『我法興王 剬律條八載也』라 하여 법흥왕의 율령반포를 말하고 있다.
[역주:04권41] 양(梁)나라에 … 토산물을 바쳤다
《梁書》권3 武帝 普通 2년(521) 11월조와 같은 책 권54 新羅傳에 동일한 내용의 기사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때 신라 사신은 백제 사신을 따라 梁나라에 들어갔다고 한다. 양나라와 신라의 통교사실은 이것이 유일한 기록이다.
[역주:04권42] 비조부(比助夫)
《新增東國輿地勝覽》 권29 高靈縣 建置沿革條에 인용되어 있는 최치원의 〈釋順應傳〉에 보이는 比枝輩와 동일인물이다. 이때 신라에 청혼한 가야왕은 대가야의 異腦王이었다고 한다.(金泰植, 〈大加耶의 世系와 道設智〉, 《震檀學報》 81, 1996, 15~22쪽).
[역주:04권43] 가야국왕(加耶國王)
법흥왕 11년에 법흥왕을 찾아온 가야왕을 金官加耶의 마지막 왕인 仇亥(衡)王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平野邦雄, 〈繼體·欽明期の對外關係記事〉, 《古代東アジア史論集》(下), 吉川弘文館, 1978, 131쪽. 朱甫暾, 〈加耶滅亡問題에 대한 - 考察-新羅의 膨脹과 관련하여 -〉, 《慶北史學》 4, 1982, 170쪽), 당시 가야연맹의 대표세력이었던 대가야왕으로 보는 편이 타당할 듯하다(千寬宇, 〈復元加耶史〉 下, 《文學과 知性》, 31, 1978, 111쪽. 鬼頭淸明, 〈加羅諸國史的發展について〉, 《朝鮮史硏究會論文集》 11, 1974, 202쪽. 金泰植, 《加耶聯盟史》, 일조각, 1993, 191쪽). 나아가 이 때 법흥왕과 대가야 왕이 만났던 것은 신라와 가야의 영토경계를 상호 확인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金泰植, 앞의 책, 1993, 191쪽).
[역주:04권44] 불교를 처음으로 시행하였다
신라의 불교 공인연대에 대하여 본서에서는 법흥왕 15년(528)이라 하였으나, 《三國遺事》권3 興法篇 原宗興法條에는 법흥왕 14년, 《海東高僧傳》권1 法空傳에는 동왕 16년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본서의 책임 편수자 金富軾이 본서를 편찬하기 전에 지은 〈靈通寺大覺國師碑文〉에는 신라의 불교 공인을 丁未年 곧 법흥왕 14년이라 했음에도 불구하고 본서에서는 동왕 15년이라 하여 본서의 불교 공인연대에 대하여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최치원이 지은(鳳巖寺智證大師碑銘)에는 법흥왕이 율령을 반포한 지 8년째 되는 해에 신라 땅에 불교의 뿌리가 내렸다고 한 점에서 최치원은 법흥왕 15년에 불교가 공인되었던 것으로 이해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신라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 창건 공사가 시작된 해를 실질적인 불교 공인연대로 보아야 한다고 하여 신라에서의 불교 공인은 법흥왕 22년이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李基白, 〈三國時代 佛敎 受容과 그 社會的 意義〉, 《新羅時代의 國家佛敎와 儒敎》, 韓國硏究院, 1978, 7~8쪽).
[역주:04권45] 묵호자(墨胡子)
《三國遺事》 권3 흥법편 阿道基羅條에서, 묵호자는 阿道의 별명이라 하여 묵호자와 아도를 동일인물로 이해하였다. 한편 《海東高僧傳》(권1)에서는 ‘黑胡子'라 하였다. 胡子는 異邦人의 뜻이고, 墨 혹은 黑은 피부색이 검은 것을 지칭한 것으로 판단된다.
[역주:04권46] 일선군(一善郡)에 왔는데
일선군은 현재의 경북 구미시 善山邑이다. 고구려로부터 신라에 온 묵호자가 일선군에 정착한 것은 당시 신라의 북쪽 교통로인 鷄立嶺과 竹嶺이 모두 일선군 지방을 거쳤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역주:04권47] 모례(毛禮)
《三國遺事》 권3 흥법편 阿道基羅條에는 毛祿이라고도 하였다. 현재의 경북 구미시 善山지방에 그의 집터가 전해지고, 毛禮에 관한 여러 가지 전승이 전해지고 있다(鄭永鎬, 《善山地區古蹟調査報告書》, 단국대 출판부, 1968), 毛禮는 '토레' 혹은 '톨'이라 불리어지는데, ‘절'이라는 말과 일본어의 '데라(てら)' 그리고 이곳에 세워진 桃李寺의 명칭은 毛禮에서 유래하였다는 설도 있다(權相老, 《朝鮮佛敎史槪說》, 불교시보사, 1939, 鄭永鎬, 앞의 책, 1968).
[역주:04권48] 양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訥祇王(417~457) 때에는 梁나라가 아직 건국되기 전이었므로 梁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왔다는 본서의 기사는 杜撰이다. 《三國遺事》 권3 흥법편 阿道基羅條에서도 일찍이 이러한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그러면서도 《三國遺事》에서는 이때 양나라에서 元表라는 使僧을 보내고 溟檀과 經像을 보내왔다는 高得相의 시를 소개하였다. 그리고 《海東高僧傳》(권1)에는 묵호자가 天竺國 또는 吳나라에서 왔다는 說을 싣고 있다. 한편 이때 양나라 사신이 가져왔다고 하는 옷과 香을 외국 상인이 가져온 것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辛鍾遠, 〈新羅의 佛敎傳來와 佛敎受容에 대한 再檢討〉, 《白山學報》 22, 1977).
[역주:04권49] 불타(佛陀)
‘깨달은 자'라는 뜻의 범어 'Buddha'의 音譯이다.
[역주:04권50] 달마(達摩)
범어 'Darma'의 音譯으로, 이는 부처님이 설법한 사상 또는 진리를 뜻하는 것으로 '法'으로 意譯된다.
[역주:04권51] 승가(僧伽)
불교수행을 하는 집단 또는 개인 승려를 뜻한다. 이는 범어 'Shanga'의 音譯이다.
[역주:04권52] 왕의 딸
눌지왕의 딸로 구체적인 이름은 알 수 없다.
[역주:04권53] 비처왕(毗處王)
炤知王의 다른 이름이다. 본서의 다른 곳에서는 ‘炤知'라 하였으나 이곳에서만은 ‘毗處'로 표기하였다. 그 이유는 법흥왕 15년의 불교공인 기사는 김대문의 《鷄林雜傳》에서 인용한 것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역주:04권54] 아도화상(阿道和尙)
《三國遺事》 권3 흥법편 阿道基羅條에 인용된 〈我道本碑〉와 《海東高僧傳》 권1 阿道傳에 인용된 朴仁亮의 〈殊異傳〉에 의하면, 阿道는 고구려인으로 어머니는 高道寧이고 아버지는 魏나라 我堀摩인데, 그는 중국에 가서 玄彰和尙으로부터 불교를 배워 고구려에 傳敎하였고 또한 신라에도 전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三國遺事》에서 阿道는 墨胡子와 동일 인물이고, 小獸林王 4년(374)에 중국에서 고구려에 왔던 阿道가 그 곳을 거쳐 신라에 왔다고 하였다. 그러나 아도와 묵호자를 동일인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李丙燾, 〈新羅佛敎의 浸透過程과 異次頓 殉敎問題의 新考察〉, 《韓國古代史硏究》, 1976, 652쪽).
[역주:04권55] 경(經)과 율(律)
부처가 설법한 것을 기록한 책이 ‘經'이고, 승려 및 신도가 지켜야할 계율을 ‘律'이라 한다.
[역주:04권56] 뭇 신하들
《三國遺事》 권3 흥법편 原宗興法 厭髑滅身條에는 鄕傳을 인용하여 '뭇 신하[群臣]'를 구체적으로 工目과 謁恭 등이라 하였다.
[역주:04권57] 이차돈(異次頓)
厭髑또는 異處頓이라고도 하고 ‘頓'은 道, 規, 獨으로도 표기되었다. 《三國遺事》에서 一然은 그의 姓이 朴씨라고 하였으나, 憲德王(809~826) 때 南澗寺의 僧 一念이 지은 〈獨香墳禮佛結社文〉에는 習寶葛文王의 아들인 아찬 宗郞의 손자라고 기록하여 김씨임을 나타내고 있다. 후자에 따르면 법흥왕의 堂姪이자 奈勿王 孫인 셈이다. 그러나 《三國遺事》에 인용된 金用行의 〈阿道碑〉에는 성은 박씨, 아버지는 吉升, 할아버지는 功漢, 증조는 乞解大王이라 하는 異說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一念의 〈髑香墳禮佛結社文〉에서는 이차돈이 순교했을 때의 나이를 〈阿道碑〉의 26세와는 달리 22세로 기록하고 있다.
[역주:04권58] 이차돈을 관리에게 넘겨 목을 베게 하니
이차돈을 처형하게 된 이유에 대하여 본서와는 달리 《三國遺事》권3 흥법편 原宗興法條 에서는 법흥왕과 이차돈이 사전에 모의하고 사찰을 지으라고 한 왕명을 어긴 죄로 처형되었다는 설과 왕명을 거짓으로 전하여 사찰을 짓게 하였다는 鄕傳의 설을 동시에 수록하였다.
[역주:04권59] 그 색이 우유빛처럼 희었다
《賢愚經》(권2)에는 大仙士 산제 파리가 국왕으로부터 양 팔, 양 다리, 귀, 코가 잘렸으나 안색이 조금도 변하지 않고 그 고통을 참아내었고 또 忍辱의 진실성을 왕에게 보이기 위하여 흘린 피가 우유로 변하였다는 설화가 실려 있다. 본서의 설화도 이러한 경전으로부터 이 표현을 빌려 왔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차돈의 경우 죽음에 임박하여 하등의 괴로움을 느끼지 않았으며 이는 信心의 굳음에서 나온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이를 취했다고 이해된다. 또한 우유는 불교에서 참된 진리를 상징한다.
[역주:04권60] 계림잡전(鷄林雜傳)
신라시대 金大問이 신라에서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나 잡다한 설화 등을 수록한 것으로 추정되는 책으로, 현전하지 않는다. 《鷄林雜傳》에는 신라의 불교 공인설화 뿐만 아니라 신라 王號에 대한 김대문의 해석 등도 실려 있었을 것으로 추정 된다(李基白, 〈金大問과 그의 史學〉, 《歷史學報》 77, 1978, 2~4쪽).
[역주:04권61] 한나마(韓奈麻)
韓은 '크다'는 뜻이므로 韓奈麻는 곧 大奈麻를 의미한다.
[역주:04권62] 아도화상비(阿道和尙碑)
《三國遺事》권3 흥법편 阿道基羅條와 原宗興法條에 인용되어 있는 阿道本碑 및 阿道碑와 동일한 것으로, 아도가 고구려에서 신라에 불교를 전한 과정과 신라에서의 불교공인에 관한 사실이 수록된 것으로 보인다.
[역주:04권63] 살생을 금지시켰다
이는 모든 생명체를 죽이지 말라는 명이라기보다 무고한 살생 내지는 일시적인 살생의 금지를 뜻한다. 《三國遺事》 王曆篇 법흥왕조에는 『始行十齋日禁殺』 이라 하여 十齋日에는 살생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는 기록과 상응하는 기사이다.
[역주:04권64] 상대등(上大等)
上臣이라고도 하였다. 이는 大等이라는 원래의 관직에서 유래한 것인데, 대등은 부족장적인 성격이 짙은 부족연 맹체 회의의 구성원이었다. 上大等은 부족연맹회의를 주재하는 의장으로서, 신라에서는 和白會議의 주재자이자 의장이었다. 법흥왕 때에 이러한 관직이 생긴 것은 왕권이 성장하여 부족연맹장의 지위에서 초월한 존재로 성장하였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상대등에 임명된 자는 진골신분 가운데 고위 官等을 지닌 사람이 맡았는데, 신라의 上代에는 왕의 교체 시기에 상대등도 함께 교체되었다. 고구려의 大對盧와 유사한 성격의 관직이라 할 수 있다(李基白, 〈上大等考〉, 《新羅政治社會史硏究》, 1974, 89~128쪽). 본서 권38 잡지 직관(上) 上大等條 참조.
[역주:04권65] 금관국(金官國)
김해에 있었던 금관가야 곧 駕洛國을 말한다. 《三國遺事》 권2 紀異篇에 인용된 〈駕洛國記〉에 의하면, 서기 42년에 首露가 건국했다고 한다. 가락국은 前期 加耶聯盟의 宗主國으로서 세력을 떨치다가 법흥왕 19년(532)에 신라에 병합되었다.
[역주:04권66] 김구해(金仇亥)
仇衡, 仇衝 혹은 伐次休라고도 하였다. 《三國遺事》 권2 紀異篇에 실려 있는 〈駕洛國記〉에 의하면 仇亥는 鉗知王의 아들로 521년에 즉위했다고 한다. 김구해가 법흥왕 19년에 신라에 항복한 후, 그의 자손들은 진골에 편입되어 무열왕계와 결합하여 삼국통일을 이루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한편 현재의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에 仇衡王陵 곧 김구해의 陵으로 전해지는 방형의 석축이 있으나, 그 사실성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역주:04권67] 무력(武力)
金庾信의 祖父로 금관가야의 마지막왕 구형왕의 손자이다. 그는 진흥왕 12년(551)경에 세워진 〈丹陽赤城碑〉에 大衆等의 이름이 열거된 고위 臣僚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당시 신라가 한강 유역으로 진출할 때에 지휘관으로 활약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진흥왕 14년(553)에 그는 阿湌으로서 新州 軍主가 되었고 다음해에는 管山城 전투에 참여하여 백제군과 싸워 백제 聖王을 살해하고 佐平 4명과 군사 1만여 명을 목베는 大戰果를 올렸다.
[역주:04권68] 상등(上等)
《日本書紀》권17 繼體 23년(530) 4월조에, 신라에 서는 大臣을 ‘上臣'이라 했다고 한다. 이 점으로 보아 上等은 혹시 大等 또는 그것에 버금가는 관직의 異稱이 아니었을까 한다.
[역주:04권69] 식읍(食邑)
국가에서 왕족, 공신, 封爵者 등에게 지급하던 일정지역의 收租權 혹은 收租戶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食邑의 존재가 나타나는데, 삼국시대의 그것은 금관가야의 경우와 같이, 주로 주변으로부터 탈취한 지역을 원래 그 곳을 지배하던 지배층에게 식읍으로 주던 것이 일반적인 형태였다. 조선 세조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食邑이 완전히 폐지되었다.
[역주:04권70] 처음으로 연호(年號)를 칭하여
법흥왕대의 연호 사용은 대내적으로 왕권이 확립되었고 대외적으로는 중국 등과 대등한 국가임을 표방하기 위한 조처였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은 모두 독자적인 年號를 사용하였으나, 본서에서는 연호로써 연대를 표기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러한 관행이 멸망까지 지속되지 못하였으므로 연대 표기방식으로서는 부적당하였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역주:04권71] 건원(建元)
신라 최초의 연호로, 원래 의미는 ‘年號를 처음으로 정한다'는 뜻이다.
[역주:04권72] 애공사(哀公寺) 북쪽 산봉우리에 장사지냈다
哀公寺의 현재 위치는 알 수 없다. 法興王陵은 영조 6년(1730)에 村老의 말에 근거하여 현재의 경북 경주시 효현동 선도산 서남지역 중턱 깊은 곳에 있는 고분을 법흥왕의 陵으로 지정하여 사적으로 관리, 보호하고 있다. 이 고분의 봉토 높이는 3m 내외, 밑지름은 9.5m이다. 그러나 신라 왕릉의 發達史로 보아 이처럼 고지대에 법흥왕릉이 만들어질 수 없다고 하여 경주시 西岳洞 武烈王陵 북쪽의 제1호분(4基 가운데 동편의 고분)을 법흥왕릉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姜仁求, 〈新羅王陵의 再檢討(1)〉, 《東方學志》 41, 1984).






眞興王立 諱三麥宗(或作深麥夫) 時年七歲 法興王弟葛文王立宗之子也 母夫人金氏 法興王之女 妃朴氏 

             思道夫人 王幼少 王太后攝政.

元年 八月 大赦 賜文武官爵一級 冬十月 地震 桃李華.

二年 春三月 雪一尺 拜異斯夫爲兵部令 掌內外兵馬事 百濟遣使請和 許之.

五年 春二月 興輪寺成 三月 許人出家爲僧尼 奉佛.

六年 秋七月 伊飡異斯夫 奏曰 國史者 記君臣之善惡 示褒貶於萬代 不有修撰 後代何觀 王深然之 命大

             阿飡居柒夫等 廣集文士 俾之修撰.

九年 春二月 高句麗與穢人 攻百濟獨山城 百濟請救 王遣將軍朱玲 領勁卒三千擊之 殺獲甚衆.

十年 春 梁遣使與入學僧覺德 佛舍利(新舊本皆作逸 今據海東高僧傳改之) 王使百官 奉迎興輪寺前路.

十一年 春正月 百濟拔高句麗道薩城 三月 高句麗陷百濟金峴城 王乘兩國兵疲 命伊飡異斯夫 出兵擊之 

             取二城 增築 留甲士一千戍之.

十二年 春正月 改元開國 三月 王巡守次娘城 聞于勒及其弟子尼文知音樂 特喚之 王駐河臨宮 令奏其樂 

             二人各製新歌奏之 先是 加耶國嘉悉王 製十二弦琴 以象十二月之律 乃命于勒製其曲 及其

             國亂 操樂器投我 其樂名加耶琴 王命居柒夫等 侵高句麗 乘勝取十郡.

十三年 王命階古知-萬德三人(樂志作注) 學樂於于勤 干勒量其人之所能 敎階古以琴 敎法知以歌 敎

             萬德以舞 業成 王命奏之 曰與前娘城之音無異 厚賞焉.

十四年 春二月 王命所司 築新宮於月城東 黃龍見其地 王疑之改爲佛寺 賜號曰皇龍 秋七月 取百濟東北

             鄙 置新(恐州之訛 濟紀作州) 以阿飡武力爲軍主 冬十月 娶百濟王女爲小妃.

十五年 秋七月 修築明活城 百濟王明襛與加良 來攻管山城 軍主角干于德-伊飡耽知等 逆戰失利 新州軍

             主金武力 以州兵赴之 及交戰 裨將三年山郡高于都刀 急擊殺百濟王 於是 諸軍乘勝大克之 

             斬佐平四人-士卒二萬九千六百人 匹馬無反者.

十六年 春正月 置完山州於比斯伐 冬十月 王巡幸北漢山 拓定封疆 十一月 至自北漢山 敎所經州郡 復一

             年租調 曲赦 除二罪皆原之.

十七年 秋七月 置比列忽州 以沙飡成宗爲軍主.

十八年 以國原爲小京 廢沙伐州 置甘文州 以沙飡起宗爲軍主 廢新州 置北(?)漢山州.

十九年 春二月 徙貴戚子弟及六部豪民 以實國原 奈麻身得作砲弩上之 置之城上.

二十三年 秋七月 百濟侵掠邊戶 王出師拒之 殺獲一千餘人 九月 加耶叛 王命異斯夫討之 斯多含副之 斯

             多含領五千騎 先馳入栴檀門 立白旗 城中恐懼 不知所爲 異斯夫引兵臨之 一時盡降 論功 斯

             多含爲最 王賞以良田及所虜二百口 斯多含三讓 王强之 乃受其生口 放爲良人 田分與戰士 

             國人美之.

二十五年 遣使北齊朝貢.

二十六年 春二月 北齊武成皇帝詔 以王爲使持節東夷校尉樂浪郡公新羅王 秋八月 命阿飡春賦 出守國原 

             九月 廢完出州 置大耶州 陳遣使劉思與僧明觀 來聘 送釋氏經論千七百餘卷.

二十七年 春二月 祗園 實際二寺成 立王子銅輪爲王太子 遣使於陳貢方物 皇龍寺畢功.

二十八年 春三月 遣使於陳貢方物.

二十九年 改元大昌 夏六月 遣使於陳貢方物 冬十月 廢北(?)漢山州 置南川州 又廢比列忽州 置達忽州.

三十一年 夏六月 遣使於陳獻方物.

三十二年 遣使於陳貢方物.

三十三年 春正月 改元鴻濟 三月 王太子銅輪卒 遣使北齊朝貢 冬十月二十日 爲戰死士卒 設八關筵會

             於外寺 七日罷.

三十五年 春三月 鑄成皇龍寺丈六像 (銅重三萬 五千七十斤 鍍金重一萬一百九十八分 三十六年 春夏 

             旱 皇龍寺丈六像)出淚至踵.

三十七年 春 始奉源花 初君臣病無以知人 欲使類聚群遊 以觀其行義 然後擧而用之 遂簡美女二人 一曰

             南毛 一曰俊貞 聚徒三百餘人 二女爭娟相妬 俊貞引南毛於私第 强勸酒至醉 曳而投河水以

             殺之 俊貞伏誅 徒人失和罷散 其後 更取美貌男子 粧飾之 名花郞以奉之 徒衆雲集 或相磨

             以道義 或相悅以歌樂 遊娛山水 無遠不至 因此 知其人邪正 擇其善者 薦之於朝 故金大問

             花郞世記曰 賢佐忠臣 從此而秀 良將勇卒 由是而生 崔致遠鸞郞碑序曰 國有玄妙之道 曰風

             流 設敎之源 備詳仙史 實乃包含三敎 接化群生 且如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諸惡莫作 諸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 唐令狐澄新羅

             國記曰 擇貴人子弟之美者 傳粉粧飾之 名曰花郞 國人皆尊事之也 安弘法師 入隋求法 與胡

             僧毘摩羅等二僧廻 上稜伽勝鬘經及佛舍利 秋八月 王薨 諡曰眞興 葬于哀公寺北峰 王幼年

             卽位 一心奉佛 至末年祝髮 被僧衣 自號法雲 以終其身 王妃亦効之爲尼 住永興寺 及其薨也 

             國人以禮葬之.

 



[교주:04권15] 太
原本 「大」. 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수정.
[교주:04권16] 玲
本書 卷26 聖王 26年條 및 東國史略·三國史節要 「珍」. 舜 「珍」.
[교주:04권17] 送
原本 「逸」. 三國史節要에 의거 수정.
[교주:04권18] 于
原本 「千」. 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수정.
[교주:04권19] 法
本書 卷33 樂志 「注」. 北·燾 「法(注)」.
[교주:04권20] 州
原本 「興」. 本書 卷26 聖王 31年條와 三國史節要에 의거 수정. 榮·烈 「興」, 燾 「興(州)」.
[교주:04권21] 干
原本 「于」. 本書 卷40 職官志 外官條와 三國史節要에 의거 수정. 榮·燾 「于」.
[교주:04권22] 主
原本 「王」. 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수정.
[교주:04권23] 二
本書 卷44 斯多含傳 및 三國史節要 「三」. 舜 「三」.
[교주:04권24] 口
「百口」, 原本 判讀不能. 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보충.
[교주:04권25] 十
原本 誤刻. 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수정.
[교주:04권26] 祇
原本 「祗」. 印度 祇園精舍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아 수정. 鑄字本 「祗」. 榮·北·烈·燾 「祗」.
[교주:04권27] 三
原本 「二」. 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수정.
[교주:04권28] 使
原本 誤刻. 鑄字本·三國史節要에 의거 수정.
[교주:04권29] 竺
原本 「笁」. 鑄字本에 의거 수정.
[교주:04권30] 太
原本 「大」. 鑄字本에 의거 수정.


[역주:04권73] 진흥왕(眞興王)
신라의 제24대 왕. 입종갈문왕의 아들로, 540년에 7세 혹은 15세의 어린나이로 즉위하여 576년까지 재위하였다. 진흥왕은 竹嶺을 넘어 한강유역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高靈의 대가야를 정복하는 등 강역을 크게 확장하였다. 또 국경 지방을 순수하고 창녕,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에 순수비와 拓境碑를 세웠다. 진흥이라는 칭호는 본서에서 시호라 하였으나, 진흥왕 순수비에 이미 사용되고 있었으므로 생존시의 칭호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花郞徒라는 청소년 집단을 공인하여 인재 등용의 길로 이용하였고 國史를 편찬하게 하였으며 황룡사 장육존상을 주조하였고 팔관회를 최초로 개최하였다.
[역주:04권74] 삼맥종(彡麥宗)
〈蔚州 川前里書石〉에는 '深麥夫知'로 표기하였는데, ‘彡’과 ‘深’, 宗’과 ‘夫知'는 각각 음과 훈으로 相通한다.
[역주:04권75] 그 때 나이는 일곱살이었다
《三國遺事》 권1 紀異篇 진흥왕 조에는 15세에 즉위하였다고 하여 본서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역주:04권76] 갈문왕(葛文王) 입종(立宗)
입종은 법흥왕의 동생으로 진흥왕의 아버지이다. 〈蔚珍 鳳坪新羅碑〉에는 입종을 '徙夫智’라 하였고, 〈蔚州 川前里書石〉에는 ‘徙夫知'로 표기하였다. 그는 왕의 동생으로서 왕위에 오르지 못하였으므로 갈문왕에 봉해진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李基白, 〈新羅葛文王考〉, 《新羅政治社會史硏究》, 1974, 9쪽).
[역주:04권77] 어머니는 김씨로 법흥왕의 딸이고
《三國遺事》 王曆篇에는 진흥왕의 어머니를 只召夫人이라 하면서, 또는 息道夫人 박씨로 英史(失) 각간의 딸이라 하였다. 그러나 박씨 息道夫人은 진흥왕의 어머니가 아니라 진흥왕의 妃이다. 한편 지소부인은 〈蔚州 川前里書石〉 명문에 보이는 ‘只須尸兮妃'와 동일인이다(金龍善, 〈蔚州 川前里書石 銘文의 硏究〉, 《歷史學報》 81, 1979, 15~17쪽).
[역주:04권78] 사도부인(思道夫人)
《三國遺事》 王曆篇에서 진흥왕의 어머니라 한 息道夫人과 동일인이다. 또는 色刁夫人이라고도 하였다. 그렇다면 사도부인은 牟梁里 출신으로 각간 英史(失)의 딸이라 하겠다.
[역주:04권79] 왕태후(王太后)
진흥왕의 어머니 只召夫人을 말한다. 이를 법흥왕의 妃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李丙燾, 《國譯 三國史記》, 1977, 56쪽) 잘못이다. 왜냐하면 《三國遺事》 권1 紀異篇 진흥왕조에 진흥왕을 섭정한 태후는 법흥왕의 딸로 입종갈문왕의 妃라 하였기 때문이다.
[역주:04권80] 백제에서 사신을 … 허락하였다
본서 권26 백제본기의 해당 年月條에는 이러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지 않다.
[역주:04권81] 흥륜사(興輪寺)
현재의 경북 경주시 沙正洞에 있던 신라 최초의 왕실 사찰로, 고려시대 몽고의 침입 때에 소실되었다. 《三國遺事》 권3 흥법편 東京興輪寺金堂十聖條와 탑상편 興輪寺壁畵普賢條에 의하면 一然 당시까지 홍륜사 금당 안에는 阿道, 猒髑, 惠宿, 安含, 義湘, 表訓, 䖳巴, 元曉, 惠空, 慈藏 등 10聖의 塑像이 봉안되어 있었고, 신라 경명왕 때 그렸다는 普賢菩薩像이 보존되고 있었다고 한다. 1972년 문화재관리국에 의하여 흥륜사지의 回廊과 講堂址 일부가 발굴되었으나 보존상태가 불량한 편이었고, 1978년에는 금당지로 추정되는 토단의 서남방에 속칭 탑자리로 전해지는 유구를 발굴한 바 있다. 탑의 기단부는 하단 직경 약 11m, 상단 직경 약 9m, 높이 1.5m로 2단으로 축조한 것으로 보아 원형 또는 8각형의 탑이 세워졌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金正基, 〈寺院 建築〉, 《歷史都市 慶州》, 열화당, 1984, 304쪽).
[역주:04권82] 포폄(褒貶)
‘褒'는 칭찬하는 것이고, ‘貶'은 비판한다는 뜻이다. 褒貶은 공자가 《春秋》를 지을 때에 역점을 두었던 것으로, 전통적인 동양의 역사 편찬에 있어서 史家들이 가장 중요시한 가치관 중의 하나였다.
[역주:04권83] 거칠부(居柒夫)
荒宗으로도 표기되는데, 〈丹陽赤城碑〉와 〈昌寧 眞興王拓境碑〉에 보이는 居朼(七)夫智, 《日本書紀》 권17, 繼體紀 23년 조에 보이는 久遲布禮 등과 동일인이다. 나물왕의 5세손으로 각간 仍宿의 손자이며, 이찬 勿力의 아들이다. 일찍이 중이 되어 고구려에 몰래 들어가 惠亮法師의 講義를 듣고 특별한 교분을 맺고 돌아 왔으며 진흥왕 12년에는 백제와 제휴하여 죽령 이북의 10여 군을 탈취한 공을 세웠다. 본서 권44 열전 居柒夫傳 참조.
[역주:04권84] 국사를 편찬케 하였다
삼국의 국사 편찬은 모두 율령 반포와 국가의 제도 정비 그리고 대외적으로 팽창하던 시기에 국가와 왕실의 위엄을 내외에 과시할 목적으로 행하여졌다. 신라 진흥왕대에 편찬된 國史도 中古王室의 정통성을 천명하고 나아가 유교적 정치이념에 입각하여 王者의 위엄을 과시하려는 역사서였다고 한다(李基東, 〈古代國家의 歷史認識〉, 《韓國史論》 6, 국사편찬위원회, 1979, 9쪽).
[역주:04권85] 예인(穢人)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던 동예인으로, 본서 권19 고구려본기 陽原王 4년(548) 조에는 신라본기의 '2월'과 달리 정월에 濊兵 6,000을 동원하여 독산성을 공격했다고 한다. 한편 본서 권26 백제본기 성왕 26년 정월조에도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고구려본기와 백제본기에서는 機를 '濊'로 표기하였다.
[역주:04권86] 주령(朱玲)
본서 권19 고구려본기 양원왕 4년조와 권26 백제 본기 성왕 26년조 및 《三國史節要》 해당 연월조에는 朱玲을 '朱珍'으로 기록하였다.
[역주:04권87] 각덕(覺德)
신라 최초로 중국에 유학한 승려로, 일찍이 梁나라에 건너가 불교를 공부한 후 진흥왕 10년에 양나라 사신을 따라 귀국하여 신라에 불교를 홍포하였다. 《海東高僧傳》 권2 覺德傳 참조.
[역주:04권88] 도살성(道薩城)
본서 권37 잡지 지리(4)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수록된 지명으로, 현재의 충북 槐山郡 道安面으로 추정된다(閔德植, 〈高句麗 道西縣城考〉, 《史學硏究》 36, 1983), 혹은 충남 천안지방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李丙燾, 《國譯 三國史記》, 1977, 57쪽),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을 함락시킨 사실은 본서 권19 고구려본기 양원왕 6년 정월조와 같은 책 권26 백제본기 성왕 28년 정월조에도 수록되어 있다.
[역주:04권89] 금현성(金峴城)
본서 권37 잡지 지리(4)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수록된 지명으로, 현재의 충북 진천군 진천읍(閔德植, 〈高句麗 道西縣城考〉, 《史學硏究》 36, 1983) 혹은 충남 연기군 全義 지방으로 추정된다(李丙燾, 《國譯 三國史記》, 1977, 57쪽).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을 함락시킨 사실은 본서 권19 고구려본기 양원왕 6년 3월조와 같은 책 권26 백제본기 성왕 28년 3월조에도 수록되어 있다.
[역주:04권90]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바꾸었다
본서의 기록대로 진흥왕이 7세에 즉위하였다면, 開國으로 연호를 바꾼 진흥왕 12년은 그가 18세 였을 때이다. 이때 비로소 나라를 새로 연다는 뜻의 '開國'이라는 연호로 바꾼 것은 종래 只召太后의 섭정으로부터 벗어나 진흥왕이 親政을 시작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李丙燾, 〈眞興大王의 偉業〉, 《韓國古代史硏究》, 1976, 669쪽. 村上四男, 〈新羅眞興王と其の時代〉, 《朝鮮古代史硏究》, 1978, 86쪽).
[역주:04권91] 낭성(娘城)
현재의 충북 청원군 琅城面으로 추정된다. 《新增東國輿地勝覽》 권15 淸州牧 建置沿革條에, 이곳은 본래 백제의 上黨縣이었는데 娘城 또는 娘子谷이라고도 했다고 한다.
[역주:04권92] 우륵(于勒)
대가야 省熱縣 사람으로, 嘉實王의 명으로 가야금 12곡을 지었는데 그 명칭은 본서 권32 잡지 樂條에 전하고 있다. 그 후 대가야가 어지러워지자 가야금을 가지고 신라에 귀화하여, 진흥왕으로부터 환대를 받고 國原京에 거처하면서 階古 등에게 가야의 음악을 전수하였다.
[역주:04권93] 이문(尼文)
우륵의 제자로 '泥文'이라고도 하였다. 그가 지었다는 곡조 세 곡의 명칭이 본서 권32 잡지 樂條에 전하고 있다.
[역주:04권94] 하림궁(河臨宮)
현재의 충북 충주시 남한강 가에 있던 別宮인 듯한데 구체적인 위치는 알 수 없다. 가야금의 두 가지 調律 가운데 河臨調가 있는 바, 이는 진흥왕 12년에 하림궁에서의 연주곡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丁若鏞은 〈弁辰別考〉에서 하림궁이 安東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였으나 잘못이다.
[역주:04권95] 12달의 음률을 본 뜬 것이다
東洋의 12음계는 1년 12달에 부는 바람에 비정한다. 즉 黃鍾은 11월(정북풍), 大呂는 12월(동북풍), 太簇는 1월(동북풍), 夾鍾은 2월(정동풍), 姑洗은 3월(동남풍), 仲呂는 4월(동남풍), 蕤賓은 5월(정남풍), 林鍾은 6월(서남풍), 夷則은 7월(서남풍), 南呂는 8월(정서풍), 無射은 9월(서북풍), 應鍾은 10월(서북풍)의 바람소리를 본떠서 만들었다.
[역주:04권96] 왕이 … 10개 군을 빼앗았다
본서 권44 열전 居柒夫傳에 의하면, 이 전쟁에 참여한 장군으로는 거칠부 외에 대각간 仇珍, 각간 比台, 잡찬 耽知·非西, 파진찬 奴夫·西力夫, 대아찬 比次夫, 아찬 未珍夫 등 8장군이었고 10군의 범위는 죽령 이북 高峴 이남이라 하였다. 본서 권44 열전 居柒夫傳 참조. 한편 1978년에 발견된 〈丹陽赤城碑)는 거칠부 등이 고구려의 10개 郡을 공취한 시기 전후에 건립된 것이다.
[역주:04권97] 계고(階古)
본서 권32 잡지 樂條에 의하면 그의 관등은 대나마였다.
[역주:04권98] 법지(法知)
본서 권32 잡지 樂條에는 注知라 하였고, 관등은 대나마였다.
[역주:04권99] 황룡사(皇龍寺)
진흥왕 12년에 짓기 시작하여 동왕 27년(566) 혹은 동왕 30년(《三國遺事》 권3, 탑상편 皇龍寺文六條)에 완성되었다. 완공 후 황룡사에는 여러 가지 조영물들이 만들어졌는데, 丈六像과 大鎭을 鑄成하였고 金堂을 개축하였으며 9층목탑을 조성하였다. 이러한 황룡사는 신라 최대의 호국사찰로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운영되었다(李基白, 〈皇龍寺와 그 創建〉, 《新羅時代 國家佛敎와 儒敎》, 1978: 《新羅思想史硏究》, 1986, 51~74쪽). 현재의 경북 경주시 구황동에 皇龍寺址가 남아 있는데, 이곳은 1976년부터 1983년까지 발굴·조사되었다. 황룡사 발굴 조사 결과에 관해서는 文化財管理局 編, 《皇龍寺 - 遺蹟發掘調査報告書》(1986) 참조.
[역주:04권100] 신주(新州)
漢江 하류지역을 통괄하던 행정 단위로, 그 중심 지는 현재의 경기도 하남시와 廣州郡 지역으로 추정된다.
[역주:04권101] 왕이 백제 왕의 딸을 … 삼았다
본서 권26 백제본기 성왕 31년 10월조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역주:04권102] 관산성(管山城)
현재의 충북 옥천군 옥천읍 지역으로 추정된다. 管山은 古尸山, 古利山 혹은 環山이라고도 하였다. 본서 권34 주석 153 참조.
[역주:04권103] 탐지(眈知)
진흥왕 12년에 거칠부 등과 함께 竹嶺 이북의 10개 군을 빼앗았을 때에 참여한 장군으로, 그 때의 관등은 잡찬이었다. 한편 〈丹陽赤城碑〉에 보이는 豆彌智를 眈知와 동일인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武田幸男, 〈眞興王代における新羅の赤城經營〉, 《朝鮮學報》 93, 1979, 13쪽).
[역주:04권104] 고간(高干)
신라 外位의 제3관 등으로, 그 지위는 京位의 제9 관등인 級湌에 해당한다.
[역주:04권105] 도도(都刀)
《日本書紀》 권19 欽明 15년 12월조에는 苦都 혹은 谷智라 하였고, 都刀의 출신지와 신분을 본서와는 달리 佐知村의 飼馬奴라 하였다. 한편 백제 성왕이 도도에게 죽음을 당한 사실은 본서 권26 백제본기 성왕 32년 7월조와 《日本書紀》 권19 欽明 15년 12월조에도 수록되어 있다. 특히 《日本書紀》에는 관산성 전투의 전후 사정과 백제 聖王이 죽음을 당하는 광경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역주:04권106] 좌평(佐平)
백제 16관등 중의 최고관등으로, 품계로는 1품이고 服色은 자주색이었으며 銀花로써 冠을 장식하였다. 본서 권24 백제본기에 의하면 고이왕 27년(260)에 처음으로 좌평이 설치되었다고 하나 확실치는 않다. 사비시대 초기에는 정원이 5명이었으나 후기에 와서 6명으로 고정되어 6좌평제도가 확립되었다. 그 가운데 內臣佐平(上佐平)이 수석좌평으로 귀족회의를 주재하였다. 말기에 와서 의자왕이 庶子 41명을 좌평으로 임명한 예에서 알 수 있듯이 그 기능은 허식화되었다.
[역주:04권107] 비사벌(比斯伐)
比自火라고도 하였다. 현재의 경남 창녕지방으로, 경덕왕 때 火王郡으로 개명하였다. 본서 권34 잡지 지리(1) 良州 火王郡條 참조.
[역주:04권108] 완산주(完山州)를 설치하였다
본서 권36 잡지 지리(3) 全州條에도 이와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완산은 현재의 전북 전주지방으로 백제 땅이었기 때문에 신라가 이곳에 주를 설치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진흥왕 16년(555)에 설치된 완산주는 창녕에 설치된 比斯伐州를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역주:04권109] 비열홀주(比列忽州)
현재의 함경남도 안변 지방으로, 比列州라고도 하였다. 본서 권35 잡지 지리(2) 朔州 朔庭郡條 참조.
[역주:04권110] 국원(國原)
현재의 충북 충주시로, 진흥왕대 고구려로부터 탈취한 곳이다. 본서 권35 잡지 지리(2) 漢州 國原小京條 참조.
[역주:04권111] 감문주(甘文州)
현재의 경북 김천시 개령면 일대로, 원래 甘文小國이었던 것을 신라가 병합한 땅이다. 진흥왕 18년(557)에 州가 설치되었다가 진평왕대에 폐지되었다. 본서 권34 잡지 지리(1) 尙州 開寧郡條 참조.
[역주:04권112] 북한산주(北漢山州)
현재의 서울특별시 강북 일대인데, 진흥왕 29년에 씨가 폐지되었다가 진평왕 25년에 다시 설치되었다. 본서 권 35 잡지 지리(2) 漢州 漢陽郡條 참조.
[역주:04권113] 포노(砲弩)
한 번에 여러 개의 화살을 쏠 수 있는 무기 곧 多發式 활이다.
[역주:04권114] 백제가 …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본서 권27 백제본기 威德王 8년(561) 7월조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으나, 신라본기와 1년의 차이가 난다.
[역주:04권115] 가야
여기서의 가야는 현재의 경북 고령군 고령읍에 있던 대가야를 말한다.
[역주:04권116] 사다함(斯多含)
나물왕의 9대손으로 급찬 仇梨知의 아들이다. 어려서 화랑이 되어 낭도를 이끌고 대가야 토벌전에 참가하였고, 17세 때 親友 武官郎의 죽음을 슬퍼하다가 따라 죽었다. 본서 권44 열전 斯多含傳 참조.
[역주:04권117] 전단문(栴檀門)
대가야 왕성의 성문 이름으로 추정된다. 본서 권44 열전 사다함전에는 栴檀梁이라 하였는데, 가야 말로 門을 '梁'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역주:04권118] 포로 200명
본서 권44 열전 사다함전에는 300명이라 하여 차이를 보이고 있다.
[역주:04권119] 북제(北齊)
중국 남북조시대 北朝의 하나로, 559년에 高洋이 鄴에 도읍하고 나라를 세운 이래 5왕 28년 만인 577년에 北周에 의하여 망하였다.
[역주:04권120] 북제(北齊)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北齊書》 권7 武成 河淸 3년(564)조와 《冊府元龜》 권969 외신부 조공 河淸 3년조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역주:04권121] 무성황제(武成皇帝)
北齊의 4대 왕으로, 이름은 高湛이고 시호는 武成이며 묘호는 世祖이다. 孝昭帝의 遺命으로 즉위하여 562년부터 565년까지 4년간 재위하다가 태자 緯에게 位를 물려주었다.
[역주:04권122] 사지절(使持節)
중국 고대 장군이 소지하는 符節 즉 使持節·持節·假節 가운데 최고의 권위를 가지는 것으로, 사지절을 부여받은 장군은 자신이 거느리는 관리 가운데 秩 2千石 이하의 관리를 자의대로 죽일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역주:04권123] 동이교위(東夷校尉)
校尉는 한나라 武帝 때 처음 설치하여 屯兵을 통괄하게 하던 무관직이었으나 후에는 散官이 되었는데, 位階는 장군 다음이었다. 東夷校尉는 東夷를 관장하는 校尉라는 뜻이다.
[역주:04권124] 낙랑군공(樂浪郡公)
진흥왕이 北齊로부터 이러한 관작을 받은 사실은 《北齊書》권7 武成 河淸 4년 2월조에도 수록되어 있다.
[역주:04권125] 대야주(大耶州)
현재의 경남 합천군 합천읍으로, 大良州 혹은 大梁州라고도 하였다. 대야주는 선덕왕 11년에 백제에게 빼앗겼다가 백제 멸망 후인 문무왕 8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본서 권34 잡지 지리(1) 康州 江陽郡條 참조.
[역주:04권126] 진(陳)나라
중국 남북조시대 南朝의 하나로, 557년에 陳霸先이 梁으로부터 禪讓을 받아 建康에 도읍하고 세운 나라이다. 5왕을 거쳐 589년에 隋나라에게 망하였다.
[역주:04권127] 경론(經論)
부처가 직접 說法한 것을 적은 經 곧 불경과 그것을 자세하게 해석한 고승들의 저술을 論이라 한다.
[역주:04권128] 기원사(祇園寺)
인도 摩揭陀國의 祇陀太子가 소유한 동산이 祇園이었는데, 須達長者가 석가모니를 위하여 이 동산을 사서 절을 지어 祇園精舍라 하였다. 신라의 祇園寺는 인도의 祇園精舍로부터 그 이름을 채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절의 현재 위치는 알 수 없으나, 당나라에서 구법하고 돌아온 順憬이 한때 이 절에 머문 적이 있었다(본서 권47, 열전 裂起傳).
[역주:04권129] 동륜(銅輪)
진흥왕의 맏아들로 이때 태자가 되었다가 동왕 33년(572)에 죽었다. 진평왕은 동륜의 아들이다.
[역주:04권130] 황룡사가 준공되었다
《三國遺事》 권3 塔像篇 皇龍寺文六條에는, 공사를 시작한 지 17년 만인 己丑年 곧 진흥왕 30년에 공사를 마쳤다고 하여 본서 및 《海東高僧傳》 권1 法雲傳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차이에 대하여, 본서와 《海東高僧傳》의 기록은 황룡사의 중요한 시설물이 갖추어진 시기이고 《三國遺事》의 그것은 담장 등 마무리 공사가 완전히 끝난 것을 뜻하므로, 실제 황룡사가 완공된 해는 진흥왕 30년으로 이해해야만 한다는 견해도 있다(李基白, 〈皇龍寺와 그 創建〉, 《新羅時代 國家佛敎와 儒敎》, 1978: 《新羅思想史硏究》, 1986, 64~65쪽).
[역주:04권131] 태창(太昌)
568년부터 571년까지 4년간 사용된 진흥왕대의 연호로, 〈磨雲嶺 眞興王巡守碑〉에 『太昌元年歲次戊子』라 하여 太昌의 연호를 실제로 사용한 사례가 보인다.
[역주:04권132] 남천주(南川州)
현재의 경기도 利川市 지방으로, 진평왕 26년에 南川郡으로 삼았다. 본서 권40 잡지 직관(下) 6停條에 의하면 이곳에 남천주를 설치하였을 때 南川停도 함께 설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본서 권35 주석 5 참조.
[역주:04권133] 달홀주(達忽州)
현재의 강원도 고성군 高城邑 지역이다. 본서 권35 주석 383 참조.
[역주:04권134]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陳書》 권5 宣帝 太建 2년 6월조, 《冊府元龜》 권969 외신부 조공 太建 2년 6월조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역주:04권135]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陳書》 권5 宣帝 太建 3년 5월조, 《冊府元龜》 권969 외신부 조공 太建 3년 5월조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역주:04권136] 북제(北齊)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北齊書》 권8 後主 武平 3년조, 《冊府元龜》 권969 외신부 조공 武平 3년조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역주:04권137] 팔관연회(八關筵會)
불교의 八關齋戒와 고유신앙이 결합된 종교의식으로, 八關會라고도 하였다. 팔관재계는 在家信徒가 하루밤 하루낮 동안 받아 지니는 계율로, 8關은 살생·도둑질·淫行 등 8가지의 죄를 금한다는 뜻이고 齋는 오전 중에 한 끼만 먹고서 마음의 不淨을 맑게 하는 의식이다.
[역주:04권138] 장륙상(丈六像)
높이가 1丈 6尺되는 불상이라는 뜻으로, 부처의 키가 周尺으로 1장 6척이었던 데서 비롯되었다.
[역주:04권139] 푼[分]
分은 여러 가지의 단위로 사용되는데, 尺度의 단위로서 1尺의 1/100, 重量의 단위로서 1兩의 1/100, 角度의 단위로서 1度의 1/60, 時間의 단위로서 1時間의 1/60, 地積의 단위로서 1畝 1/10, 貨幣의 단위로서 1文의 1/10이다. 여기서는 重量의 단위로서 사용되었다.
[역주:04권140] 원화(源花)
화랑의 전신으로 《三國遺事》권3 탑상편 彌勒仙花 未戶郞 眞慈師條에서는 ‘原花’라 하였는데, 原花는 곧 여성 화랑을 의미한다고 한다(三品彰英, 《新羅花郞の硏究》, 平凡社, 1974).
[역주:04권141] 화랑(花郞)
신라의 청소년 수련집단을 이끄는 중심인물 혹은 그 집단자체를 말한다. 《三國遺事》에서는 이를 주로 國仙이라 칭하였다. 화랑은 삼한사회의 청년집회로부터 시원하여 발전·법제화되었는데, 그 조직은 매 화랑집단마다 진골 출신의 花郞 1명과 그를 지도·顧問하는 승려 郎徒 1명, 그리고 진골 이하 평민에 이르는 천여 명의 郎徒들로 구성되었다. 화랑집단의 成員은 원칙상 3년을 수련기간으로 정하고 適齡은 대체로 15~18세까지로 추정된다. 이 기간동안 그들은 忠과 孝 등의 덕목을 수련, 연마하고 山水를 유람하며 歌樂을 즐기고 집단의식과 人性을 배양하였다. 그래서 화랑집단 성원 상호간에는 死友를 약속할 정도로 서로간의 인간적인 유대가 긴밀하였다. 화랑도는 불교의 彌勒思想과도 밀접한 관련성이 있었다. 이러한 화랑 제도는 삼국통일 과정에서 戰士集團으로 그리고 官人選拔의 場으로 널리 활용되었고, 아울러 사회학적인 면에서 그들의 활동은 계층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신분계층간의 갈등을 완화하는데 일부 기여했다고 한다(李基東, 〈新羅 花郞徒의 社會學的 考察〉, 《新羅 骨品制社會와 花郞徒》, 1984, 354~366쪽). 한편 화랑의 설치연대에 대하여 본서에서는 진흥왕 37년이라 하였으나, 《新增東國輿地勝覽》 권21 慶州府條에는 법흥왕 원년이라 하였고 《三國遺事》에는 막연히 진흥왕대라 하였다. 그리고 《三國史節要》 권6 진흥왕 원년 12월조에, 容儀가 단정한 1男을 風月主로 삼고 무리를 모아 孝悌忠信을 닦게 했다고 한다. 더욱이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흥왕 23년조와 같은 책 권44 열전 斯多含傳에 화랑 斯多含과 武官郎 그리고 낭도들의 군사활동이 보인다. 따라서 화랑제도가 국가에서 공인된 것이 진흥왕대인 것은 분명하나, 본서에서처럼 반드시 진흥왕 37년이었다는 데는 의문이다.
[역주:04권142] 화랑세기(花郞世記)
金大問이 지은 화랑에 대한 傳記로, 현전하지 않으므로 구체적인 내용에 관해서는 알 수 없다. 본서의 편찬자는 이 책으로부터 화랑에 대한 기록을 많이 취하여 본서의 편찬에 이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1989년에 경남 김해시에서 김대문의 《花郞世記》를 필사했다는 이른바 필사본 《花郞世紀》가 발견되어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으나, 종합적으로 검토한 결과 필사본 《花郞世紀》는 위작일 가능성이 높다(權悳永, 〈筆寫本 花郞世紀의 史料的 檢討〉, 《歷史學報》 123, 1989, 154~201쪽. 盧泰敦, 〈筆寫本 花郞世紀의 史料的 價値〉, 《歷史學報》 147, 1995, 325~362쪽).
[역주:04권143] 난랑비(鸞郞碑)
鸞郞이란 화랑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석으로 추정되는데, 현전하지 않는다. 鸞郞은 언제 어떤 활동을 한 사람인지 알 수 없으나, 최치원이 이 비문을 지은 점으로 미루어 보아 아마 신라 하대의 화랑이었을 것이다.
[역주:04권144] 선사(仙史)
仙은 國仙 곧 화랑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므로 仙史는 화랑의 역사서로, 혹시 金大問의 《花郞世記》를 말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역주:04권145] 삼교(三敎)
유교, 불교, 도교의 가르침을 말한다.
[역주:04권146] 뭇 백성들과 접(接)하여 교화한다
사회와 동떨어진 공허한 가르침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의 생활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가르침으로써 그들을 교화한다는 뜻이다. 한편 '接化羣生’을 ‘相接融化하여 同根叢生한다'고 풀이하는 견해도 있다(金裕成, 〈鸞郞碑序 解釋에 考察〉, 《大邱韓醫科大學 論文集》 1, 1983, 55~68쪽).
[역주:04권147] 들어와서는 … 나라에 충성함
《論語》學而篇의 『入則孝 出則悌』에서 인용하여 응용한 말이다.
[역주:04권148] 노나라 사구(司寇)
司寇는 중국의 고대왕조인 夏·殷·周 3대에 刊獄을 맡은 6卿 중의 하나이다. 孔子는 50세 때인 魯나라 定公 9년에 大司寇에 임명된 적이 있었으므로(《史記》 권47, 孔子世家) 공자를 지칭하여 司寇라 하였다.
[역주:04권149] 하였다고 … 가르침을 행함
《道德經》 제2장 『天下皆知美之爲善 斯惡已 知善之爲善 斯不善已 故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形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是以聖人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弗居 去唯弗居 是以不去』라는 대목에서 인용한 것으로, '無爲'는 인위적이 아닌 자연스럽게 또는 망령되이 하지 않는 것을 뜻하고, 不言은 명령이나 지시를 하지 않아도 저절로 행하여지도록 하는 것을 뜻한다.
[역주:04권150] 주나라 주사(柱史)
柱史는 柱下史의 약칭으로, 중국 周나라 藏書室의 일을 맡아보던 관직이다. 秦나라 때에 侍御史로 바뀌었다. 노자가 한때 주나라의 藏書室 일을 맡아보았으므로 노자를 일컬어 柱史라 하였다(《史記》권63, 老子列傳)
[역주:04권151] 모든 악을 짓지 말고 … 행하라 함
『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의 줄임말로, 이 4句偈는 大·小乘을 막론하고 중시 하는 偈頌이다. 《涅築經》과 《法華玄義》 등에서 이 구절의 중요성을 언급하였다.
[역주:04권152] 축건태자(竺乾太子)
축건은 天竺 곧 인도의 별칭인데, 석가모니가 인도 카필라(Kapila) 국왕의 태자였으므로 그를 일컬어 축건태자라 하였다.
[역주:04권153] 신라국기(新羅國記)
혜공왕 4년(768)에 당의 책봉사 歸崇敬을 따라 신라에 왔던 顧愔이 신라를 견문하고 돌아가 지은 책이다. 《新唐書》 권58 藝文志에 의하면 單卷으로 되어 있다고 하였으나 현전하지 않는다. 본서에서는 《新羅國記》를 세 곳에서 인용하고 있는데, 모두 令狐澄의 著作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는 본서 찬자가 令狐澄의 《大中遺事》에 인용되어 있는 《新羅國記》의 내용을 재인용하면서, 《新羅國記》의 저자를 영호징으로 착각한 데서 생긴 잘못이다(岡田英弘, 〈新羅國記 と大中遺事について〉, 《朝鮮學報》 2, 1951, 103~118쪽).
[역주:04권154] 안홍법사(安弘法師)
斷俗寺 神行禪師가 그의 증손에 해당한다는 사실 외에는 그의 俗緣에 관하여 알려진 바 없다. 《三國遺事》 권3 塔像篇 皇龍寺九層塔條에 의하면, 그는 《東都成立記를 지었다고 한다. 《海東高僧傳》(권2)에서는 安含과 安弘을 동일인으로 취급하여 두 사람의 행적을 합하여 하나의 傳記를 만들었으나 잘못이다. 한편 《海東高僧傳》(권2)에 인용된 최치원의 〈義相傳〉에, 진평왕 建福 42년(625)에 안홍이 西域僧 3인과 함께 신라에 돌아왔다고 하여 본서와 달리 기록하였다. 그런데 본서에서 안홍이 진흥왕 37년(576)에 귀국했다고 하였으나, 이 기사에는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신빙성에 의문의 여지가 많다(權悳永, 〈三國時代 新羅 求法僧의 活動과 役割〉, 《淸溪史學》, 4, 1987, 6~8쪽).
[역주:04권155] 능가경(綾伽經)
稜伽는 곧 楞伽로, 獅子國에 있다는 험준한 산이름이다. 사람이 들어가기 힘든 이곳에 부처가 거처하며 설한 법문을 능가경이라 한다. 능가경을 漢譯한 것으로는 求那跋陀羅의 《楞伽阿跋多羅寶經》 4권, 菩提流支의 《入楞伽經》 10권, 實又難陀의 《大乘入楞伽經》 7권 등이 있다.
[역주:04권156] 승만경(勝鬘經)
《勝鬘師子吼一乘大方便方廣經》의 약칭으로, 인도 舍衛國의 波斯匿王의 딸 勝鬘이 부처의의 威神力을 입고 攝受正法 등의 법문을 설한 것이다. 求那跋陀羅가 漢譯한 것이 있다.
[역주:04권157] 시호를 진흥이라 하고
진흥왕 29년에 북한산과 황초령 그리고 마운령에 세워진 巡狩碑에서 그를 '眞興太王'이라 하였으므로, 본서에서처럼 眞興은 시호일 수가 없다. 그가 생시에 진흥이란 칭호를 사용한 것은 불교를 振興시키는 왕임을 자부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역주:04권158] 애공사(哀公寺)
현재의 경북 경주시 효현동 望星山 기슭에 있던 사찰로, 지금도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三層石塔이 남아 있다.
[역주:04권159] 영흥사(永興寺)
법흥왕대 王妃의 발원으로 세운 신라 최초의 尼寺로, 진평왕 18년(596)에 불이 났고 경덕왕 13년(754)에 수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신문왕 4년(684)에 영흥사에 成典을 두어 관리하였다. 이 절의 폐사시기와 그 위치는 잘 알 수 없다. 그런데 1980년에 문화재관리국에서 영흥사지로 추정되는 경북 경주시 西川邊의 건물지를 발굴하였으나, 가람의 내용을 밝힐 수 있는 유구는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申昌秀, 〈中古期 王京의 寺刹과 都市計劃〉, 《新羅文化祭學術發表會論文集-新羅王京硏究》, 1995, 128~129쪽).




眞智王立 諱舍輪(或云金輪) 眞興王次子 母思道夫人 妃知道夫人 太子早卒 故眞智立.

元年 以伊飡居柒夫爲上大等 委以國事.


二年 春二月 王親祀神宮 大赦 冬十月 百濟侵西邊州郡 命伊飡世宗出師 擊破之於一善北 斬獲三千七百級 

             築內利西城.

三年 秋七月 遣使於陳以獻方物 百濟閼也山城(恐侵之誤).

四年 春二月 百濟築熊峴城-松述城 以梗䔉山城-麻知峴城-內利西城之路 秋七月十七日 王薨 諡曰眞智 

             葬于永敬寺北.

 

[교주:04권31] 太

上同.
[교주:04권32] 與
燾 「與(侵)」, 北 「與(擧)」.
[교주:04권33] 䔉
三國史節要 「蒜」. 榮·烈·浩 「蒜」.




[역주:04권160] 진지왕(眞智王)
신라의 제25대 왕, 재위기간은 576년 ~ 579년이다. 진흥왕의 둘째 아들이었으나 진흥왕의 태자였던 銅輪이 일찍 죽었기 때문에 진흥왕을 이어 왕위에 올랐다. 《三國遺事》 권1 紀異篇 桃花女鼻荊郞條에 의하면, 나라가 어지럽고 음난한 짓을 많이 했기 때문에 나라 사람들이 그를 폐위시켰다고 한다.
[역주:04권161] 사륜(舍輪)
혹은 金輪이라고도 하였다. 轉輪聖王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舍’와 ‘金'은 음과 훈이 상통한다.
[역주:04권162] 지도부인(知道夫人)
《三國遺事》 王曆篇과 같은 책 권1 紀異篇 桃花女鼻荊郞條에 의하면, 知刀夫人이라 표기하고 起烏公의 딸로 성은 박씨라 하였다.
[역주:04권163] 태자가 일찍 죽었으므로
진흥왕의 태자 銅輪은 동왕 33년(572) 3월에 죽었다.
[역주:04권164] 백제가 …. 침입하였으므로
본서 권27 백제본기 威德王 24년 10월조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역주:04권165] 세종(世宗)
진평왕 원년에 상대등이 되었다가 동왕 10년에 죽은 弩里夫와 동일인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三國遺事》 王曆篇에, 제3대 儒理王을 弩禮王이라 하였고 제14대 儒禮王을 世里智王이라 하였으므로, ‘弩’와 ‘世'는 음과 훈으로 상통하고 ‘夫'는 ‘宗'과 상통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흥왕 11년(550)경에 세워진 〈丹陽赤城碑〉에 보이는 대아찬 內禮夫智 역시 세종과 동일인일 것이다(李基白, 〈丹陽赤 城碑 發見의 意義와 赤城碑 王敎事部分의 檢討〉, 《史學志》 12, 1978, 28쪽).
[역주:04권166] 백제에게 알야산성(閼也山城)을 주었다
閼也山城은 현재의 전북 익산시 낭산면에 있던 성으로 당시에는 백제 땅이었다. 그런 신라가 이를 백제에게 주었다는 것은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본문의 ‘與'를 ‘侵'의 誤字(李丙燾, 《國譯 三國史記》, 1977, 63쪽) 혹은 '擧'의 오자로 보고 있는데(북한 고전연구실 편, 《삼국사기》 상, 1958, 95 쪽), 타당한 해석으로 생각된다. 한편 본서 백제본기의 해당 年月條에는 이러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지 않다.
[역주:04권167] 산산성(蒜山城)
본서 권35 잡지 지리(2) 朔州 井泉郡條에 의하면, 산산현은 원래 고구려의 買尸達縣으로 경덕왕 때 산산현으로 개명하였다 하고, 《高麗史》 권58 지리지에는 문무왕 21년에 신라가 이를 점령했다고 하였는데, 현재의 함경남도 원산시이다. 그러나 산산현이 산산성의 위치와 일치하는지는 확실치 않다.
[역주:04권168] 영경사(永敎寺) 북쪽에 장사지냈다
영경사의 위치와 廢寺時期는 알 수 없다. 한편 진지왕의 陵을 현재의 경북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무열왕릉 뒷편의 능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姜仁求 外, 《新羅五陵》, 1990, 126쪽).





眞平王立 諱白淨 眞興王太子銅輪之子也 母金氏 萬呼(一云萬內)夫人 葛文王立宗之女 妃金氏 摩耶夫人 

葛文王福勝之女 王生有奇相 身體長大 志識沈毅明達.


元年 八月 以伊飡弩里夫爲上大等 封母弟伯飯爲眞正葛文王 國飯爲眞安葛文王.

二年 春二月 親祀神宮 以伊飡后稷爲兵部令.

三年 春正月 始置位和府 如今吏部.

五年 春正月 始置船府署大監-弟監 各一員.

六年 春二月 改元建福 三月 置調府令一員 掌貢賦 乘府令一員 掌車乘.

七年 春三月 旱 王避正殿減常膳 御南堂親錄囚 秋七月 高僧智明入陳求法.

八年 春正月 置禮部令二員 夏五月 雷震 星隕如雨.

九年 秋七月 大世仇柒二人適海 大世 奈勿王七世孫 伊飡冬臺之子也 資俊逸 少有方外志 與交遊僧淡水

             曰 在此新羅山谷之間 以終一生 則何異池魚籠鳥Ḁ不知滄海之浩大 山林之寬閑乎 吾將乘桴

             泛海 以至吳越 侵尋追師 訪道於名山 若凡骨可換 神仙可學 則飄然乘風於泬寥之表 此天下

             之奇遊壯觀也 子能從我乎 淡水不肯 大世退而求友 適遇仇柒者 耿介有奇節 遂與之遊南山

             之寺 忽風雨 落葉泛於庭潦 大世與仇柒言曰 吾有與君西遊之志 今各取一葉爲之舟 以觀其

             行之先後 俄而大世之葉在前 大世笑曰 吾其行乎 仇柒勃然曰 予亦南兒也 豈獨不能乎 大世

             知其可與 密言其志 仇柒曰 此吾願也 遂相與爲友 自南海乘舟而去 後不知其所往.

十年 冬十二月 上大等弩里夫卒 以伊飡首乙夫爲上大等.

十一年 春三月 圓光法師入陳求法 秋七月 國西大水 漂沒人戶三萬三百六十 死者二百餘人 王發使賑恤之.

十三年 春二月 置領客府令二員 秋七月 築南山城 周二千八百五十四步.

十五年 秋七月 改築明活城 周三千步 西兄山城 周二千步.

十六年 隋帝詔 拜王爲上開府樂浪郡公新羅王.

十八年 春三月 高僧曇育入隋求法 遣使如隋貢方物 冬十月 永興寺火 延燒三百五十家 王親臨救之.

十九年 三郞寺成.

二十二年 高僧圓光隋朝聘使奈麻諸文-大舍橫川 還.

二十四年 遣使大奈麻上軍 入隋進方物 秋八月 百濟來攻阿莫城 王使將士逆戰 大敗之 貴山-箒項死之 九           

               月 高僧智明 隨入朝使上軍還 王尊敬明公戒行爲大德.

二十五年 秋八月 高句麗侵北漢山城 王親率兵一萬 以拒之.

二十六年 秋七月 遣使大奈麻萬世-惠文等 朝隋 廢南川州 還置北(?)漢山州.

二十七年 春三月 高僧曇育 수入朝使惠文還 秋八月 發兵侵百濟.

三十年 王患高句麗屢侵封場 欲請隋兵以征高句麗 命圓光修乞師表 光曰 求自存而滅他 非沙門之行也 貧

               道在大王之土地 食大王之水草 敢不惟命是從 乃述以聞 二月 高句麗侵北境 虜獲八千人 

               四月 高句麗拔牛鳴山城.

三十一年 春正月 毛只嶽下地燒 廣四步 長八步 深五尺 至十月十五日滅.

三十三年 王遣使隋 奉表請師 隋煬帝許之行兵 事在高句麗紀 冬十月 百濟兵來圍椴岑城百日 縣令讚德固

               守 力竭死之 城沒.

三十五年 春 旱 夏四月 降霜 秋七月 隋使王世儀至皇龍寺 設百高座 邀圓光等法師 說經.

三十六年 春二月 廢沙伐州 置一善州 以一吉飡日夫爲軍主 永興寺塑佛自壞 末幾 眞興王妃比丘尼死.

三十七年 春二月 賜大酺三日 冬十月 地震.

三十八年 冬十月 百濟來攻母山城.

四十年 北(?)漢山州軍主邊品 謀復椴岑城 發兵與百濟戰 奚論從軍 赴適 力戰死之 論 讚德之子也.

四十三年 秋七月 王遣使大唐朝貢方物 高祖親勞問之 遣通直散騎常侍庾文素來聘 賜以璽書及畵屛風-錦

                  綵三百段.

四十四年 春正月 王親幸皇龍寺 二月 以伊飡龍樹爲內省私臣 初 王七年 大宮-梁宮-沙梁宮三所 各置私

                  臣 至是 置內省私臣一人 兼掌三宮.

四十五年 春正月 置兵部大監二員 冬十月 遣使大唐朝貢 百濟襲勒弩縣.

四十六年 春正月 置侍衛府大監六員 賞賜署大正一員 大道署大正一員 三月 唐高祖降使 冊王爲柱國樂浪

                 郡公新羅王 冬十月 百濟兵來圍我速含-櫻岑-岐岑-熢岑-旗懸-穴柵等六城 於是 三城

                 或沒或降 級飡訥催 合烽岑-櫻岑-旗懸三城兵堅守 不克死之.

四十七年 冬十一月 遣使大唐朝貢 因訟高句麗塞路 使不得朝 且數侵入.

四十八年 秋七月 遣使大唐朝貢 唐高祖遣朱子奢來 詔諭與高句麗連和 八月 百濟攻主在城 城主東所拒

                 戰死之 築高墟城.

四十九年 春三月 大風雨土 過五日 夏六月 遣使大唐朝貢 秋七月 百濟將軍沙乞拔西鄙二城 虜南女三白

                 餘口 八月 隕霜殺穀 冬十一月 遣使大唐朝貢.

五十年 春二月 百濟圍椴岑城 王出師擊破之 夏 大旱 移市 晝龍祈雨 秋冬 民飢 賣子女.

五十一年 秋八月 王遣大將龍春-舒玄 副將軍庾信 侵高句麗娘臂城 麗人出城列陣 軍勢甚盛 我軍望之懼 

                 殊武鬪心 庾信曰 吾聞振領而裘正 提綱而網張 吾其爲綱領乎 乃跨馬拔劍 向敵陣直前 

                 三入三出 每入 或斬將或搴旗 諸軍乘勝 鼓噪進擊 斬殺五千餘級 其城乃降 九月 遣使大

                 唐朝貢.

五十二年 大宮庭地裂.

五十三年 春二月 白狗上于宮墻 夏五月 伊飡柒宿與飡石品謀叛(當作阿) 王覺之 捕捉柒宿 斬之東市 

                 幷夷九族 阿飡石品亡至百濟國境 思見妻子 晝伏夜行 還至叢山 見一樵夫 脫依換樵夫

                 敝衣 衣之負薪 潛至於家 被捉伏刑 秋七月 遣使大唐獻美女二人 魏徵以爲 不宜受 上喜

                 曰 彼林邑獻鸚鵡 猶言苦寒 思歸其國 況二女遠別親戚乎 付使者歸之 白虹飮于宮井 土

                 星犯月.

五十四年 春正月 王薨 諡曰眞平 葬于漢只 唐太宗詔贈左光祿大夫 賻物段二百.(古記云 貞觀六年 壬辰

                 正月卒 而新唐書資通監皆云(理 避高麗成宗諱治) 貞觀五年幸卯羅王眞平卒 豈其誤耶)

 


[교주:04권34] 太
原本 「大」. 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수정.
[교주:04권35] 予
原本 「子」. 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수정.
[교주:04권36] 主
原本 「王」. 鑄字本에 의거 수정. 三國史節要 「軍主」를 「都督」으로 표기.
[교주:04권37] 正
三國史節要 「匠」. 舜 「匠」.
[교주:04권38] 提
原本 誤刻. 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수정.
[교주:04권39] 鼓
原本 「皷」은 「鼓」의 俗字.
[교주:04권40] 阿
原本 「伊」. 本文의 記事 및 本書의 官等 表記 方式에 의거 수정. 三國史節要·鑄字本 「伊」. 北·燾 「伊(阿)」.
[교주:04권41] 換
原本 誤刻. 鑄字本에 의거 수정.
[교주:04권42] 壬
原本 「王」. 鑄字本에 의거 수정.
[교주:04권43] 理
高麗 成宗의 이름 「治」의 代字避諱. 榮·烈 「治」.



[역주:04권169] 진평왕(眞平王)
신라의 제26대 왕. 재위기간은 579년 ~ 632년이다. 진흥왕 대의 비약적인 영토확장과 제도정비를 바탕으로 하여 진평왕은 중앙의 통치제도를 크게 정비하였다. 즉 관리의 인사를 담당하는 位和府, 貢賦를 맡은 調府, 儀禮와 교육을 담당하는 禮部 그리고 船府와 乘府 등을 설치하여 신라 관제발달의 새로운 발전기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隋·唐과 통교하여 신라 對中外交 의 단서를 열었다.
[역주:04권170] 백정(白淨)
석가모니의 아버지 이름인 淨飯王으로부터 따온 이름이다. 신라 왕실에서 불교식 이름이 지어지는 경향은 진평왕의 家系에서부터 본격화되었다.
[역주:04권171] 동륜(銅輪)
《三國遺事》 王曆篇에는 東輪이라고도 하였다. 본서 권4 주석 129 참조.
[역주:04권172] 만호(萬呼)
《三國遺事》 王曆篇에는 萬寧으로 적기도 하였으며, 그의 이름은 行義라 하였다.
[역주:04권173] 마야부인(摩耶夫人)
석가모니 어머니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三國遺事》 王曆篇에 의하면 마야부인의 이름은 '福肹△'이고 진평왕의 先妃라 하였다. 그런데 ‘福肹△’는 마야부인의 이름이 아니고 그의 아버지 이름인 福勝의 誤記이다. 한편 앞의 책에서 진평왕에게는 孫氏 僧滿夫人이라는 후비가 있었다고 하나 본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역주:04권174] 신체가 장대하고
《三國遺事》 권1 紀異篇 天賜玉帶條에, 진평왕의 신장이 11尺이었는데 內帝釋宮에 거둥하였을 때 왕이 섬돌을 밟으니 세 개의 돌이 부러졌고, 진평왕이 매던 이른바 聖帶의 길이가 10圍라 하여 진평왕의 신체가 장대했음을 묘사하였다. 그리고 본서 권12 신라본기 경명왕 5년조에서도 진평왕이 사용하던 聖帶가 매우 길어 보통 사람이 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였다.
[역주:04권175] 노리부(弩里夫)
진지왕 2년(577)에 신라의 서쪽 변경을 침입한 백제군을 크게 깨뜨린 이찬 世宗, 〈丹陽赤城碑〉에 보이는 大阿干支 內禮夫智와 동일인으로 추정된다(李基白, 〈丹陽赤城碑 發見의 意義와 赤城碑 王敎事 部分의 검토〉, 《史學志》 12, 1978, 18쪽). 한편 弩里夫를 금관 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해왕의 장자 奴宗과 동일인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金泰植, 앞의 논문, 1996, 22~23쪽). 그는 진평왕 원년에 상대등이 되었다가 동왕 10년(588)에 죽을 때까지 10년 동안 상대등의 직을 수행하였다.
[역주:04권176] 백반(伯飯)
淨飯王의 아우로, 석가모니의 숙부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역주:04권177] 진정갈문왕(眞正葛文王)
왕권이 父子로 세습됨으로써 왕위에 오를 수 없던 왕의 동생을 갈문왕에 봉하는 관례에 따라 봉해졌다. '眞'은 불교적인 의미를 띤 것으로 이는 진흥, 진지, 진평의 왕호의 ‘眞'과 상통한다. 그의 행적에 관해서는 알 수 없다.
[역주:04권178] 국반(國飯)
진덕왕의 아버지로 본서 권5 신라본기 진덕왕 즉위조에서는 國芬, 《三國遺事》 王曆篇에서는 國其安으로도 표기하였다. 國飯 역시 불교식 이름으로, 이것은 석가모니의 숙부 이름이었다.
[역주:04권179] 후직(后稷)
지증왕의 증손으로, 진평왕이 狩獵을 지나치게 즐기는 것을 말리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죽은 후에도 諫하였다고 한다. 본서 권45 열전 金后稷傳 참조.
[역주:04권180] 위화부(位和府)
관리의 인사를 담당했던 관청으로, 경덕왕 때 일시 司位府로 개칭되었다가 혜공왕 때 복구되었다. 본서 권38 잡지 직관(上) 位和府條 참조.
[역주:04권181] 선부(船府)
선박 운항을 관장하는 관청으로, 이는 지증왕 6년 11월에 선박 이용의 제도를 정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본서 권38 잡지 직관(上) 船府條에, 이전에는 兵部의 大監 弟監이 이를 담당하다가 문무왕 18년에 비로소 선부를 설치했다고 하여 차이를 보이고 있다. 본서 권38 잡지 직관(上) 船府條 참조.
[역주:04권182] 대감(大監)
兵部에 소속된 군관직으로, 경덕왕 때 일시 侍郞으로 개칭하였다가 혜공왕 때 다시 복구되었다. 본서 권38 주석 71 참조.
[역주:04권183] 제감(弟監)
兵部에 소속된 군관직으로, 경덕왕 때 郞中으로 개칭하였다가 혜공왕 때 다시 大舍로 고쳤다. 본서 권38 주석 78 참조.
[역주:04권184] 조부(調府)
나라의 조세를 징수 ·관장하던 관청으로, 경덕왕 때 大府로 개칭하였다가 혜공왕 때 복구되었다. 본서 권38 잡지 직관(上) 調府條 참조.
[역주:04권185] 승부(乘府)
나라의 말과 수레를 관장하던 관청으로, 경덕왕 때 司御府로 개칭하였다가 헤공왕 때 복구하였다. 본서 권38 잡지 직관(上) 乘府條 참조.
[역주:04권186] 가물었으므로 … 죄수의 정상을 살폈다
동양에서는 자연적 變異가 나타나면 이는 인간이 잘못함으로써 일어나는 것으로 여기는 天人相關說이 있었는데, 이는 漢나라 때 董仲舒에 의하여 체계화되었다. 이 설에 의하면 왕의 통치권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았으므로 이를 天命이라 하고, 왕이 정치를 잘못하면 백성의 원망이 하늘을 감동시켜 변이가 나타나는 바 이것을 하늘이 왕에 대한 譴責 곧 ‘天譴'이라 하였다. 天譴이 자주 나타나면 군주는 자신의 덕이 부족한가를 반성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며,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음으로써 이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小島毅, 〈宋代天讚論の政治理念〉, 《東洋文化硏究所紀要》 107, 1988, 2~7쪽). 가뭄은 농경사회에서 그 중요성이 다른 變異에 비하여 지대한 영향을 가져오므로 군주들은 가뭄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旱魃에 대해 왕이 책임을 지는 의식은 이미 우리나라에서도 있었는데, 《三國志》 권30 魏書 동이전 부여조에 그러한 관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식사의 반찬을 줄이고 죄수를 사면하는 등의 조처는 중국문화의 영향이라 할 것이다.
[역주:04권187] 지명(智明)
진평왕 24년(602)에 귀국하자 왕은 그의 계행을 높이 받들어 大德으로 삼았고, 후에 다시 大大德으로 추앙했다고 한다. 《海東高僧傳》 권2 智明傳에 그의 행적이 비교적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역주:04권188] 예부(禮部)
교육과 儀禮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던 관청이다. 본서 권38 잡지 직관(上) 禮部條 참조.
[역주:04권189] 나물왕의 7세손
본서 원문은 『大世奈勿王七世孫伊湌冬臺之子也』라 하여 나물왕의 7세손이 大世인지 冬臺인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게 서술하였다. 李丙燾의 《國譯 三國史記》(1977, 64쪽)에는 冬臺를 나물왕의 7세손이라 하였고, 북한 고전연구실 편 《삼국사기》(상, 1958, 97쪽)는 大世를 나물왕의 7세손이라 하였다.
[역주:04권190] 오월(吳越)
吳越은 구체적인 國名이 아니라, 중국의 長江 이 남의 남중국 지방에 대한 범칭이다.
[역주:04권191] 원광법사(圓光法師)
성은 薛氏 혹은 朴氏로 13세에 출가하여 30세에 三岐山 金谷寺에서 수도하던 중 깨달은 바가 있어 진평왕 11년(589)에 陳나라로 가서 金陵 莊嚴寺에서 閔公의 제자로부터 강설을 듣고 成實論, 涅槃經, 阿含經을 깊이 공부하였다. 隋가 천하를 통일하자 興善寺로 가서 머물다가 진평왕 22년(600)에 신라 사신 諸文과 橫川을 따라 돌아와 加悉寺에 주석하면서 貴山과 箒項에게 世俗五戒를 지어 주었다. 진평왕 30년(608)에 수나라에 군사를 청한 〈乞師表〉를 지었고 동왕 35년에 수나라 사신 王世儀가 신라에 왔을 때 개최한 百高座會를 주도하였다. 《三國遺事》 권4 義解篇 圓光西學條, 《海東高僧傳》 권2 圓光傳, 《續高僧傳》권13 圓光傳 참조.
[역주:04권192] 영객부(領客府)
외국사신을 접대하던 관청. 본서 권38 잡지 직관(上) 領客府條에는 진평왕 43년에 왜전을 領客典으로 고쳤다 하였고, 진덕왕 5년에 令 2인을 두었다고 하여 신라본기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 본서 권38 잡지 직관(上) 領客府條 참조.
[역주:04권193] 남산성(南山城)
현재의 경북 경주시에 있는 남산 꼭대기를 중심으로 하여 쌓은 石城으로, 사적 제22호로 지정·관리하고 있다. 1935년 이래로 이곳 주위에서 발견된 碑片에 의하면, 이 성을 '南山 新城’이라 하였고 '辛亥年'에 축성되었다고 하는데, 신해년은 본서에서 말하는 진평왕 13년(591)에 해당한다. 지금까지 발견된 9개의 비편에 의하면, 이 성은 각 지방의 백성들을 징발하여 구간별로 분담하여 쌓았음을 알 수 있다(秦弘燮, 〈南山新城碑의 綜合的 考察〉, 《歷史學報》 26, 1965, 38~40쪽), 그 후 문무왕 3년(663)에 이곳에 長倉을 지었고 동왕 19년(679)에 성을 증축하였는데, 현재도 이 성의 일부가 남아 있다.
[역주:04권194] 서형산성(西兄山城)
현재의 경북 경주시 西岳洞에 있는 仙桃山城을 가리킨다. 선도산성을 중심으로 한 서악동 일대는 본래 신라의 西兄山郡이었다.
[역주:04권195] 상개부(上開府)
後周代에 독자적인 관청과 관원을 둘 수 있도록 한 開府 위에 증치한 관작으로, 隋代에는 종1품이었다.
[역주:04권196] 수나라 황제가 … 삼았다
《隋書》 권81 新羅傳, 《通典》 권 185 邊防 新羅條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역주:04권197] 담육(曇育)
진평왕 18년에 수나라에 들어갔다가 동왕 27년(605)에 신라 사신 惠文을 따라 본국으로 돌아왔다. 《海東高僧傳》 권 2 曇育傳에 의하면 담육은 당시 大德으로 추앙받던 智明과 비길 정도로 재능이 뛰어났고 함께 이름을 드러냈다고 한다.
[역주:04권198] 삼랑사(三郞寺)
진평왕 19년(579)에 창건된 절로 憬興과 正秀 등이 住錫 했던 곳이다. 이 절의 폐사시기는 알 수 없지만 그 遺址는 현재의 경주시 城乾洞 西川 가에 있는데, 당간지주와 地臺石 등이 남아 있다. 한편 《三國遺事》 권5 感通篇 憬興過聖條에 의하면, 이 책의 찬술 당시까지도 삼랑사지에는 玄本이 찬술한 三郞寺碑가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최근에 三郞寺碑片이 1점 발견되어 현재 단국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역주:04권199] 아막성(阿莫城)
阿英城·母山城이라고도 하였는데, 현재의 전북 남원시 雲峯面 동쪽의 '할미성'으로 추정된다. 본서 권34 주석 396 참조. 한편 이때 백제가 신라의 아막성을 공격해온 사실은 본서 권27 백제본기 무왕 3년 8월조에도 수록되어 있다.
[역주:04권200] 귀산(貴山)과 추항(箒項)
귀산은 王京 사량부 사람으로 아찬 武殷의 아들이다. 추항과 함께 원광법사를 찾아가 세속오계를 받고 아막성 전투에 참가하여 전사하였다. 箒項 역시 사량부 사람으로 귀산과 함께 아막성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본서 권45 열전 貴山傳 참조.
[역주:04권201] 대덕(大德)
지혜와 덕망이 높은 승려에 대한 호칭. 처음에는 부처를 일컫는 말이었으나 후에 沙門의 존칭이 되었다.
[역주:04권202] 고구려가 … 이끌고 그들을 막았다
본서 권20 고구려본기 영양왕 14년(603)조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한편 이때 신라를 침입한 고구려 장군은 高勝이었다.
[역주:04권203]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침략하였다
본서 권27 백제본기 무왕 6년 8월조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역주:04권204] 고구려가 우명산성(牛鳴山城)을 빼앗았다
본서 권20 고구려본기 영양왕 19년 4월조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역주:04권205] 모지악(毛只嶽) 아래의 땅이 불에 탔다
모지악은 신라의 毛只亭 곧 東畿亭이 있던 곳으로 현재의 경북 경주시 東方洞 혹은 경주시 外洞邑 부근에 있던 산으로 추정된다. 이곳의 땅이 정월부터 10월까지 불에 탔다는 것은 아마 땅속의 천연가스가 분출하여 그것이 불에 탄 것이 아닐까 하는 견해가 있다(李丙燾, 《國譯 三國史記》, 1977, 67쪽).
[역주:04권206] 군사를 움직인 … 고구려본기에 실려 있다
본서 권20 고구려본기 영양왕 22년(611) 2월조에 수나라 煬帝가 고구려 토벌의 조서를 내렸고, 4월조에 정벌군이 涿郡에 모였다는 기사를 지칭한다. 한편 611년 수나라의 고구려 원정에 관하여서는 《隋書》권3 煬帝本紀와 《資治通鑑》권181 大業 7년조에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역주:04권207] 가잠성(椵岑城)
본서 권37 잡지 지리(4)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수록된 지명으로, 현재의 충북 괴산지방으로 보는 견해(井上秀雄 譯註, 《三國史記》 1, 1980, 118쪽)와 경기도 안성군 죽산면으로 보는 견해(金泰植, 〈百濟의 加耶地域 關係史 : 交涉과 征服〉, 《百濟의 中央과 地方》, 충남대 백제 연구소, 1997, 77쪽)가 있다.
[역주:04권208] 찬덕(讚德)
신라 王京 모량부 사람으로 진평왕 32년(610)에 가잠성 현령이 되었다가 다음해 백제의 공격을 받고 전사하였다. 본서 권47 열전 奚論傳에 이때의 전투상황이 자세하게 수록되어 있다.
[역주:04권209] 백고좌회(百高座會)
《仁王經》에 근거한 불교행사로, 獅子座 100개를 만들고 고승을 초빙하여 설법을 듣는 큰 법회이다. 본서의 이 기사는 우리나라에서 백고좌회를 거행한 최초의 기록이다.
[역주:04권210] 진흥왕비인 비구니(比丘尼)
《三國遺事》 권3 흥법편 原宗興法條와 《海東高僧傳》권1 法空傳에 의하면, 법흥왕의 妃가 비구니가 되어 이름을 妙法이라 하고 영흥사에 머물다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永興寺는 법흥왕대에 창건되지도 않았으므로 여기서 말하는 妙法은 바로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흥왕 37년조와 진평왕 36년조에서 말하는 진흥왕의 妃가 아니었을까 한다.
[역주:04권211] 큰 잔치를 … 술과 음식을 내려 주었다[大酺]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왕이 모든 백성들에게 술과 음식을 내려주고 함께 경축하는 것을 '大酺'라 하는데, 이는 중국의 秦·漢代부터 시행되었다.
[역주:04권212] 백제가 모산성을 공격해 왔다
본서 권27 백제본기 무왕 17 년 10월조에, 백제의 장군 달솔 苩奇가 군사 8천 명을 이끌고 신라의 모산성을 공격했다고 하여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역주:04권213] 해론(癸論)
신라 왕경 牟梁部 사람으로 가잠성 현령이었던 찬덕의 아들이다. 진평왕 40년(618)에 金山幢主의 직책으로 邊品을 따라 가잠성 전투에 참가하였다가 전사하였다. 본서 권47 열전 癸論傳 참조.
[역주:04권214] 왕이 당나라에 … 바쳤다
《舊唐書》 권199 신라전, 《新唐書》 권220 신라전과 《冊府元龜》 권970 외신부 조공조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이것이 신라 최초의 遣唐使였다.
[역주:04권215] 통직산기상시(通直散騎常侍)
당나라 정4품의 文散官이다. 한편 《舊唐書》권199 신라전, 《新唐書》 권220 신라 전에는 從5品上의 문산관인 '通直散騎侍郞'이라 하였다.
[역주:04권216] 300단(段)
段은 직물의 量을 재는 단위로, 반필을 1단이라 하였다. 폭이 2尺 2寸이고, 길이가 4丈이 1필이므로( 《漢書》 권24, 食貨志 下) 1필은 2段이 되는 셈이다. 300단은 곧 150필이다.
[역주:04권217] 용수(龍樹)
진지왕의 아들이고 태종 무열왕의 아버지이다. 龍春이라고도 하였다. 진평왕 44년에 內省 私臣이 되었고 동왕 51년 에는 김서현·김유신 등과 함께 고구려 낭비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그리고 선덕왕 4년 10월에는 이찬 水品과 함께 지방의 주현을 두루 돌며 백성들을 위무하였고, 同王代에 황룡사 9층목탑을 건립할 때 그는 監君으로서 총책임을 맡았다(〈皇龍寺九層木塔刹柱本記〉), 그리고 死後 그는 무열왕 원년에 文興大王으로 추봉되었다. 한편 《三國遺事》권1 王曆篇에서는 龍樹를 文興葛文王이라 하였다.
[역주:04권218] 내성 사신(內省私臣)
내성은 궁정업무를 총괄하던 관청으로 경덕왕대 일시 殿中省으로 개칭된 바 있다. 私臣은 각 궁의 장관이었으나, 이때 와서 3궁을 통합적으로 관리함으로써 이 내성에만 사신이 두어졌다. 본서 권39 잡지 직관(中) 內省條 참조.
[역주:04권219] 대궁(大宮)
국왕이 거처하는 대궐.
[역주:04권220] 양궁(梁宮)
신라 6부의 하나인 梁部에 설치한 궁궐.
[역주:04권221] 사량궁(沙梁宮)
신라 6부의 하나인 사량부에 설치한 궁궐.
[역주:04권222]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冊府元龜》 권970 외신부 조공 武德 6년 10월조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역주:04권223] 백제가 늑노현(勒弩縣)을 습격하였다
본서 권27 백제본기 무왕 24년조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역주:04권224] 시위부(侍衛府)
왕과 왕궁의 수비와 儀杖을 맡은 관청으로, 법제적으로 완성된 것은 진덕왕 5년이었다. 본서 권40 잡지 직관(下) 武官條 참조.
[역주:04권225] 상사서(賞賜署)
倉部 소속의 관청으로, 유공자에 대한 포상 업무를 맡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본서 권38 잡지 직관(上) 賞賜署條 참조.
[역주:04권226] 대정(大正)
대도서의 우두머리 관직으로, 경덕왕 때 일시 '正'으로 개칭하였다가 복구하였다. 본서 권38 잡지 직관(上) 大道署條 참조.
[역주:04권227] 대도서(大道署)
예부 소속의 관청으로 寺典·內道監이라고도 하였다. 본서 권39 잡지 직관(上) 大道署條 참조.
[역주:04권228] 주국(柱國)
당나라 종2품의 勳官이다.
[역주:04권229] 당 고조가 … 책봉하였다
《舊唐書》 권199 신라전, 《新唐書》 권220 신라전, 《資治通鑑》 권190 고종기, 《冊府元龜》 권963 외 신부 封冊 武德 7년조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한편 《舊唐書》와 《新唐書》에서는 본서의 ‘樂浪郡公'과는 달리 ‘樂浪郡王'이라 하였다.
[역주:04권230] 속함성(速含城)
현재의 경남 함양군 함양읍 지역으로 비정 된다. 본서 권34 주석 393 참조.
[역주:04권231] 앵잠성(櫻岑城)
본서 권37 잡지 지리(4)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수록된 지명으로, 현재의 경남 함양군 수동면 상백리 일대로 추정된다. 본서 권37 주석 333 참조.
[역주:04권232] 기잠성(歧岑城)
본서 권37 잡지 지리(4)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수록된 지명으로, 이를 신라의 康州 江陽郡 三岐縣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全榮來, 〈百濟南方境域의 變遷〉, 《千寬宇先生還曆紀念 韓國史學論叢》 1985, 154쪽) 확실치는 않다.
[역주:04권233] 혈책성(穴柵城)
본서 권37 잡지 지리(4)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수록된 지명으로, 신라의 康州 闕城郡(현재의 경남 산청군 단성면)의 옛 지명인 闕支郡과 같은 곳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全榮來, 앞의 논문, 1995, 154쪽).
[역주:04권234] 눌최(訥催)
신라 왕경 沙梁部 사람으로 대나마 都非의 아들이다. 눌최가 이 전투에서 장렬하게 죽자 진평왕이 급찬의 관등을 추증하였다고 한다. 본서 권47 열전 訥催傳 참조.
[역주:04권235]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 호소하였다
《舊唐書》, 권199 고려전, 《冊府元龜》 권1000 외신부 讐怨 武德 9년조에 동일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역주:04권236]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舊唐書》 권2 太宗本紀 武德 9년조, 《資治通鑑》 권192 高祖紀 武德 9년조, 《冊府元龜》 권 970 외신부 조공 武德 9년 7월조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역주:04권237] 주자사(朱子奢)
중국 蘇州 사람으로 일찍이 隋나라에 벼슬하여 直秘書學士가 되었다가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사임하였다. 후에 당에 벼슬하여 諫議大夫·弘文館學士·國子司業 등을 역임하였는데, 歷史와 諸子百家書에 밝았고 문장에 능하였다. 한편 당에서 주자사를 보내 삼국간의 평화를 주선했다는 내용은 《舊唐書》 권189 열전 朱子奢傳, 같은 책 권199 고려전 및 백제전, 《新唐書》 198 열전 朱子奢傳, 같은 책 권220 고려전, 《資治通鑑》 권192 高祖紀 武德 9년조에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본서 권20 고구려본기 영류왕 9년조, 같은 책 권27 무왕 27년조에도 수록되어 있다.
[역주:04권238] 백제가 주재성(主在城)을 공격하자 … 전사하였다
본서 권27 백제본기 무왕 27년조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다만 백제 본기에서는 ‘王在城’이라 하였으나 主在城과 동일 지명이다. 현재의 위치는 알 수 없다.
[역주:04권239] 고허성(高墟城)
신라 사로 6촌의 하나였던 突山 고허촌에 쌓은 성으로, 《三國遺事》 권3 塔像篇 天龍寺條에서 경주 남산의 남쪽에 있다는 ‘高位山'이 그 중심이 아니었을까 한다. 지금은 이를 金熟山이라 부르는데, 부근에 天龍寺址와 石壁의 일부가 남아 있다(朴方龍, 〈新羅-都城·城址〉, 《韓國史論》 15, 국사편찬위원회, 1985, 379~381쪽).
[역주:04권240]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冊府元龜》 권970 외신부 조공 貞觀 원년 6월조에 동일한 내용의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역주:04권241] 백제 장군 사걸(沙乞)이 … 사로잡아 갔다
본서 권27 백제 본기 무왕 28년 7월조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역주:04권242]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冊府元龜》 권970 외신부 조공 貞觀 원년 11월조에 동일한 내용의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역주:04권243] 백제가 가잠성을 … 깨뜨렸다
본서 권27 백제본기 무왕 29년 2월조에 동일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으나, 백제본기에는 신라본기의 椵岑城과 달리 椵峯城을 공격하였다고 한다. 椵岑城과 椵峯城은 동일지명이다.
[역주:04권244] 시장을 옮기고 용을 그려 비내리기를 빌었다
가뭄이 들었을 때 비가 내리기를 비는 祈雨祭의 한 형태로, 시장이 있는 곳은 陰氣가 성한 까닭에 시장을 陽氣가 성한 남쪽으로 옮김으로써 비가 내린다고 믿었다. 그리고 龍은 비구름을 자유롭게 다스린다고 믿었기 때문에 용을 그리거나 흙으로 빚어 제사지냈다. 이러한 습속은 고려·조선시대에도 널리 행해지던 祈雨祭의 한 방식이었다.
[역주:04권245] 용춘(龍春)
태종 무열왕의 아버지인 龍樹의 다른 이름이다. 본서 권4 주석 217 참조.
[역주:04권246] 서현(舒玄)
김유신의 아버지로 금관가야 首露王의 11세손이다. 본서 권41 열전 金碩信傳(上)에 인용된 〈庾信碑〉에는 逍衍이라 했다고 한다. 그는 萬弩郡 태수, 소판으로서 大梁州 都督, 安撫大梁州諸軍事를 역임하였고 관등은 이찬에까지 이르렀다.
[역주:04권247] 유신(庾信)
금관가야 首露王의 12세손으로, 진평왕 17년(595)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舒玄이고 어머니는 肅乾宗의 딸 萬明夫人이다. 어려서 화랑으로 활동하였고 장성하여 김춘추와 합심하여 삼국통일의 주역이 되었다. 死後 그는 興武大王으로 추증되었다. 본서 권41·42·43 열전 金庾信傳 참조.
[역주:04권248] 낭비성(娘臂城)
현재의 충북 청주시로 추정된다. 진평왕 51년의 낭비성 전투에 관해서는 본서 권20 고구려본기 영류왕 12년 8월조와 같은 책 권41 열전 金庾信傳(上)에도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열전 김유신전에 의하면, 이 전투에 참가한 신라 장군으로 용춘과 서현 그리고 유신 외에 이찬 任末里, 파진찬 白龍, 소판 大因 등이 있었다고 한다.
[역주:04권249]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冊府元龜》 권970 외신부 조공 貞觀 3년 9월조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역주:04권250] 구족(九族)
高祖로부터 증조 ·조부 ·아버지 ·본인 ·아들 ·손자·會孫·玄孫까지의 직계 친족을 중심으로 하여 방계 친족으로 고조의 4대손이 되는 형제·從兄弟·再從兄弟·三從兄弟를 포함하는 동족의 친족을 말한다. 또는 9족을 父系 친족 넷, 母系 친족 셋, 妻族 둘의 合稱이라는 해석도 있다.
[역주:04권251] 위징(魏徵)
당나라 태종대의 문신·학자로, 자는 玄成이었다. 諫議大夫와 秘書監 등을 역임하며 태종에게 直諫을 잘 하던 諫臣 이었고, 《隋書》·《周書》·《北齊書》·《梁書》·《陳書》 등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舊唐書》권71 열전 魏徵傳 참조.
[역주:04권252] 임읍(林邑)
현재의 베트남 북부와 라오스 동쪽지역에 있던 나라로, 원래는 중국 秦나라의 林邑縣이었으나 後漢 말에 독립하여 林邑國을 칭하였다. 그 후 隋代에 일시 중국에 복속되어 林邑 등 3군이 설치되었으나 수나라 末의 혼란기에 다시 독립하여 당나라에 항상 조공하였다.
[역주:04권253] 사신에게 부쳐 돌려보냈다
태종이 신라에서 바친 여자를 돌려보낸 사실은 《舊唐書》 권199 신라전, 《新唐書》 220 신라전, 《資治通鑑》권193 태종 貞觀 5년조, 《冊府元龜》 권163 帝王部 却貢獻條 등에 수록되어 있다.
[역주:04권254] 한지(漢只)
신라 6부 가운데 하나인 漢祗部를 말한다. 진평왕을 한기부에 장사지냈다는 본서의 기록에 근거하여, 현재의 경북 경주시 보문동 698번지에 있는 원형 봉토분을 진평왕릉으로 추정하여 사적 제180호로 지정·관리하고 있다.
[역주:04권255]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
당나라 초기의 종1품 文散官이다.
[역주:04권256] 당 태종이 … 200 단(段)을 주었다
《舊唐書》 권199 신라전, 《新唐書》 권220 신라전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역주:04권257] 신당서(新唐書)
宋나라 인종 慶歷 4년(1044)에서 嘉祐 5년(1060) 사이에 歐陽修·宋神 등이 칙명을 받아 찬술하고 會公亮이 감수한 唐代 290년간의 正史로, 본기 10권, 지 50권, 표 15권, 열전 150권 총 225권으로 구성되었다. 본서에서 거론한 진평왕의 卒年이 정관 5년이라 한 기사는 《新唐書》 권220 신라전에 수록되어 있다.
[역주:04권258] 자치통감(資治通鑑)
송나라 司馬光이 주나라 威烈王부터 唐未 五代까지의 사실을 편년체로 기록한 사서로, 총 294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서에서 거론한 진평왕의 卒年이 정관 5년이라 한 기사는 《資治通鑑》권193 태종 貞觀 5년조에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