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연의에 관하여
삼국지연의에 관하여
1494년경에 만들어진 책으로, 후한 말기에 조조(曹操), 손권(孫權), 유비(劉備)가 건국한 위(魏), 오(吳), 촉(蜀)의 흥망에 관한 이야기이다. 각 장으로 나누어 사건을 서술한 구어체 소설로, 진(晋)나라의 진수(陳壽)가 편찬한 정사(正史) 『삼국지(三國志)』를 평이하게 다시 쓴 것이다. 정사가 위나라를 정통 왕조로 기술한 데 반해, 이 책은 촉나라의 유비가 한나라의 정통을 계승한 것으로 보고 유비를 중심으로 서술했다.
작자 나관중의 이름은 본(本), 자는 관중(貫中)이다. 호는 호해산인(湖海散人)이며, 태원(太原) 사람이라고 한다. 원나라 말기에 태어나 명나라 초기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 외에 알려진 바가 없다. 『삼국지연의』외에 현재 알려진 것은 『수당지전(隋唐志傳)』, 『잔당오대사연의(殘唐五代史演義)』, 『삼수평요전(三遂平妖傳)』 등의 작품이 있고, 『수호전(水滸傳)』 집필에도 참가했다고 한다. 또한 잡극 『풍운회(風雲會)』, 『비호자(蜚虎子)』, 『연환주(連環珠)』 3편의 작가이기도 하다.
그런데 『삼국지연의』는 나관중 혼자만의 작품이 아니다. 당나라 때에 벌써 삼국의 역사 이야기가 강석(講釋, 알기 쉽게 풀이한 이야기)의 재료로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송나라 때에는 강담(講談, 강연식 이야기극) 속에서 『삼국지』 이야기는 ‘설삼분(說三分) ’ 이라 하여 민중이 가장 즐기는 이야기로 정착되었다. 그리고 원나라에 이르러서는 그림과 글로 구성된 『전상삼국지평화(全相三國志平話)』가 간행되었는데, 여기서 비로소 삼국의 이야기는 ‘이야깃거리’에서 ‘읽을거리’로 변화했다.
나관중은 이 『전상삼국지평화』와 정사 『삼국지』를 토대로 하여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줄여서 『삼국지연의』 또는 『삼국연의』)를 쓴 것이다.
현존하는 『삼국지연의』의 판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명나라 홍치(弘治) 연간의 갑인년(1494)과 가정(嘉靖) 연간의 임오년(1522)에 출판된 판본으로, 서문이 달린 24권, 240절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을 ‘홍치본(弘治本)’이라 한다.
그 뒤로도 다양한 판본이 나왔는데, 청나라 초기 사람인 모륜(毛綸)과 모종강(毛宗岡) 부자가 교정한 판본이 청나라 강희(康熙) 18년 전후에 출판되자, 그 이전의 판본은 자취를 감추었다.
이것을 ‘모본(毛本)’이라 하는데, 종전에 간행된 판본의 2절을 1회로 하여 240절을 120회로 고치고 거기에 상세한 평을 달았다. 이후 ‘모본’만이 널리 읽히게 되었다. <以上은 다음백과에서 인용>
국내에서 나온 삼국지는 정음사판을 위시해서 을유문화사판, 일본에서 쓴 삼국지를 번역한 아리랑출판사본도 읽었고 최근 황석영작가의 삼국지도 읽었으나 의역부분이 너무 많다보니 번역본마다 다른 부분이 많아 원본을 접하고 싶은 욕구가 강했는데 다행스럽게도 인터넷에서 우연히 원문을 접하게 되었다. 모두 120회본인 것을 보면 위에서 적시한 모본인 것으로 보여진다. 원문을 제공한 분에게 감사를 드린다.
원문을 기쁜 마음으로 올리게 되었는데 원문을 직접 읽으며 그 음미하는 맛을 살리도록 주(注)와 고사에 대한 주석만 달기로 하였다.
삼국지의 번역본을 읽으면서 스스로 느낀 것은 첫째, 원문을 충실히 전달하여야 하고, 둘째로 문체가 좋아 읽어가면서 재미를 느낄 수 있어야 하며, 셋째로 고사가 많이 인용되는데 이에 대한 주석이 풍부하여야 한다는점인데, 항상 느끼고 있는 점은 주석이 거의 없어 이해하는데 애를 먹은 적이 많았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 그간 나온 책중 원문에 가장 가깝고 문체가 수려한 판은 정음사판(박태원의 번역본이었으나 월북으로 인하여 정음사의 사장이던 최영해의 번역본으로 표기됨)으로 생각하고 있으나 정음사판은 지금 구할수 없고, 최근에 출간된 황석영판도 그에 못지않다고 본다. 황석영판은 소설가 특유의 감각으로 덧붙인 바가 없지는 않지만 기존의 다른 책들에 비해 비교적 의역이 적은 것 같다. 글의 해석이 막힐 때나 詩句의 해석등은 참고할만 하다.
역자가 스스로 밝혔듯이 한학자들의 도움을 충분히 받은 바 있으므로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
☞ 說三分 :
위 삼국지를 소개하는 문장에 나타난 설삼분은 송나라시대에 도시를 중심으로 와사(瓦肆 : 오락장)등을 중심으로 각종 기예가 공연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설화인(說話人)이 있어 삼국시대(三分天下)의 전개와 고사등을 말로 풀어서 대중에게 설명해 주는 하나의 공연 분야로 추측된다.
그런데 이와는 별개로 설삼분이라는 고사가 있어 그 내용을 참고하도록 소개해 올린다.
명심보감에 다음과 같은 격언이 있다.
"사람을 만나면 서푼정도만 말을 해야 하지 한조각 마음을 전부 다 내 던져서는 안된다. 호랑이에게 입이 세개나 있으니 두려운 것이 아니라 오로지 사람의 속내가 두가지 마음일까 두렵다."
이미 조선 전기에 유희춘은 자손들에게 훈화를 남겨 벗을 가려서 사귀고 남에게 말을 할 때는 조심하라는 뜻에서 진정한 친구가 아니라면 마음속 일을 전부 말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친 바 있다. 아무리 진실한 말이라고 하더라도 맥락과 환경에 따라서는 남에 오해를 사거나 반대로 남에게 상처를 입힐 수도 있다.
금인(金人)이 신언인(愼言人)의 의미라는 말은 『공자가어』 「관주(觀周)」편의 함구(緘口) 고사에 나온다. 곧, 공자가 주나라에 관광하러 가서, 마침내 태조 후직(后稷)의 사당에 들어갔는데, 사당의 오른쪽 계단 앞에 금인이 서 있는데, 입을 세 번 감아두었으며, 그 등에는 명문(銘文)이 있어 “옛날의 신언인(말을 삼간 사람)이다(古之愼言人也)”라고 쓰여 있었다고 한다. 뒷날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는 것을 ‘함구’라 하게 되었다는 고사다.
지금은 여러 매체의 발달로 한사람의 말이 여과없이 신속하게 전파되는 시대이다. 아무리 진실한 말이라도 사람들이 그 속뜻을 충분히 곱씹어 볼 여유를 갖지 못한다. 따라서 진실한 말도 간혹 오해를 낳을 수 있다.
서푼의 말이란 달리 해석하면 겉 껍데기를 버린 진실한 말 가운데서도 그 골자만을 가르킨다고 보아도 좋다.
"서푼만 말한다." 설삼분(說三分)이라는 가르침은 우리 모두 되새길 필요가 있다.
<라디오시사고전 고려대 한문학과 심경호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