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歷史와文學/史記

史記 卷三. 殷本記

柳川 2017. 6. 22. 10:00

契,1) 母曰簡狄,2) 有娀氏之女,3) 爲帝嚳次妃. 三人行浴, 見玄鳥墮其卵, 簡狄取呑之, 因孕生契.4) 契長而佐禹治水有功. 帝舜乃命契曰:「百姓不親, 五品不訓, 汝爲司徒而敬敷五敎, 五敎在寬.」封于商,5) 賜姓子氏.6) 契興於唐、虞、大禹之際, 功業著於百姓, 百姓以平.

 

 

은(殷)의 (시조인) 설(契)의 어머니는 간적(簡狄)이다. 그녀는 유융씨(有娀氏) 부족의 딸이며 제곡의 둘째 부인이었다. 간적 등 세 사람이 함께 목욕을 갔다가 제비가 알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고, 간적이 이를 삼켜 임신해 설을 낳았다. 설은 장성해 우의 치수사업을 도와서 공을 세웠다. 순이 설에게 “백관이 화친하지 않고 오품이 화목하지 못하니, 그대가 사도를 맡아서 오교를 정중히 전파하고, 백성들을 너그럽게 감화시켜주시오”라고 명했다. 순은 설에게 상(商)을 봉지로 내리고 자씨(子氏)라는 성을 하사했다. 설은 요, 순, 우 시기에 일어나 백성들을 위해 공적을 드러냄으로써 백성들이 평안해졌다.

 

 

 

 

 

契卒, 子昭明立. 昭明卒, 子相土立.7) 相土卒, 子昌若立. 昌若卒, 子曹圉立.8) 曹圉卒,9) 子冥立.10) 冥卒, 子振立.11) 振卒, 子微立.12) 微卒, 子報丁立. 報丁卒, 子報乙立. 報乙卒, 子報丙立. 報丙卒, 子主壬立. 主壬卒, 子主癸立. 主癸卒, 子天乙立, 是爲成湯.13)

 

 

 

 

 

 

설이 죽자 그의 아들 소명(昭明)이 즉위했다. 소명이 죽자 아들 상토(相土)가 즉위했다. 상토가 죽자 아들 창약(昌若)이 즉위했고, 창약이 죽자 아들 조어(曹圉)가 즉위했으며, 조어가 죽자 아들 명(冥)이 즉위했다. 명이 죽자 아들 진(振)이 즉위했고, 진이 죽자 아들 미(微)가 즉위했다. 미가 죽자 아들 보정(報丁)이 즉위했다. 보정이 죽자 아들 보을(報乙)이 즉위했고, 보을이 죽자 아들 보병(報丙)이 즉위했다. 보병이 죽자 아들 주임(主壬)이 즉위했다. 주임이 죽자 아들 주계(主癸)가 즉위했고, 주계가 죽자 아들 천을(天乙)이 즉위했는데, 이가 성탕(成湯)이다.

 

 

 

成湯, 自契至湯八遷.14) 湯始居亳,15) 從先王居,16) 作帝誥.17)

 

 

성탕 때, 설에서 성탕에 이르기까지 여덟 번 천도했다. 탕은 처음에 박(亳)에 거처했는데, 선왕을 따라서 그 옛 땅에 거주한 것이다. 「제고(帝誥)」를 지었다.

 

 

 

湯征諸侯.18) 葛伯不祀, 湯始伐之.19) 湯曰:「予有言:人視水見形, 視民知治不.」伊尹曰:「明哉! 言能聽, 道乃進. 君國子民, 爲善者皆在王官. 勉哉, 勉哉!」湯曰:「汝不能敬命, 予大罰殛之, 無有攸赦.」作湯征.

 

 

탕이 제후들을 정벌했는데, 갈(葛)의 수령이 하늘에 제사를 올리지 않아 그를 가장 먼저 정벌했다. 탕은 “내가 전에 말했듯이, 맑은 물을 바라보면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처럼, 백성들을 살펴보면 그 나라가 제대로 다스려지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소”라 했다. 이윤(伊尹)이 “현명하십니다! 남의 훌륭한 말을 귀담아 듣고 따른다면 도덕이 발전할 것입니다. 군주가 백성을 자식처럼 여긴다면 훌륭한 인물들이 모두 왕궁으로 몰려들 것입니다. 힘쓰십시오, 힘쓰십시오”라 했다. 탕이 갈백(葛伯)에게 “그대가 천명을 공손히 받들어 제사 지내지 않는다면 큰 벌을 내릴 것이며, 사면은 없을 것이오”라 했다. 「탕정(湯政)」을 지었다.

 

 

 

伊尹名阿衡.20) 阿衡欲奸湯而無由, 乃爲有莘氏媵臣,21) 負鼎俎, 以滋味說湯, 致于王道. 或曰, 伊尹處士, 湯使人聘迎之, 五反然後肯往從湯, 言素王及九主之事.22) 湯擧任以國政. 伊尹去湯適夏. 旣醜有夏, 復歸于亳. 入自北門, 遇女鳩、女房, 作女鳩女房.23)

 

 

이윤은 이름을 아형(阿衡)이라 했다. 아형이 탕을 만나고자 했으나 통로가 없자 유신씨(有莘氏)의 혼수품인 잉신(媵臣)이 되어 솥과 도마를 메고 탕에게 가서는 음식의 맛으로 유세해 왕도를 실행하게 했다. 혹자는 “이윤은 처사였는데, 탕이 사람을 시켜서 그를 맞아들이고자 했으나, 다섯 번이나 거절한 뒤에야 비로소 탕에게 가서 그의 신하가 되어 소왕(素王, 무관의 제왕)과 구주(九主, 아홉가지 유형의 군주)에 대해 이야기했다”라고 말한다. 탕은 이윤을 등용해 국정을 맡겼다. 이윤은 탕을 떠나서 하나라로 들어가서 하나라가 이미 부패했음을 목격하고 다시 박(亳)으로 돌아왔다. 북문으로 입성하다가 여구(女鳩)와 여방(女房)을 만나고는 「여구」와 「여방」을 지었다.

 

 

 

湯出, 見野張網四面, 祝曰:「自天下四方皆入吾網.」湯曰:「嘻, 盡之矣!」乃去其三面, 祝曰:「欲左, 左. 欲右, 右. 不用命, 乃入吾網.」諸侯聞之, 曰:「湯德至矣, 及禽獸.」

 

 

탕이 교외로 나갔다가 사방에 그물을 치고 “천하의 모든 것이 모두 내 그물로 들어오게 하소서”라고 축원하는 사람을 만났다. 탕은 “허! 한꺼번에 다 잡으려고 하다니”라고 하며, 세 면의 그물을 거두게 하고는 “왼쪽으로 가고 싶은 것은 왼쪽으로 가게 하고, 오른쪽으로 가고 싶은 것은 오른쪽으로 가게 하소서. 내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것만 내 그물로 들어오게 하소서”라고 축원했다. 이 소식을 들은 제후들은 “탕의 덕이 지극하시구나! 그 덕이 금수에까지 이르렀으니”라 했다.

 

 

當是時, 夏桀爲虐政淫荒, 而諸侯昆吾氏爲亂.24) 湯乃興師率諸侯, 伊尹從湯, 湯自把鉞以伐昆吾, 遂伐桀. 湯曰:「格女衆庶, 來, 女悉聽朕言. 匪台小子25)敢行擧亂, 有夏多罪, 予維聞女衆言, 夏氏有罪. 予畏上帝, 不敢不正.26) 今夏多罪, 天命殛之. 今女有衆, 女曰『我君不恤我衆, 舍我嗇事而割政』.27) 女其曰『有罪, 其柰何』? 夏王率止衆力, 率奪夏國.28) 衆有率怠不和,29) 曰『是日何時喪? 予與女皆亡』!30) 夏德若茲, 今朕必往. 爾尙及予一人致天之罰, 予其大理女.31) 女毋不信, 朕不食言.32) 女不從誓言, 予則帑僇女, 無有攸赦.」以告令師, 作湯誓. 於是湯曰「吾甚武」, 號曰武王.33)

 

 

당시 하걸이 포악한 정치를 일삼으며 음탕한 일에 빠져 지내자 제후국인 곤오씨(昆吾氏)가 반란을 일으켰다. 탕이 곧 군대를 일으키고 제후들을 인솔하니 이윤도 함께 따라 나섰다. 탕은 큰도끼를 들고 곤오를 정벌하고 내친 김에 걸까지 정벌하고자 했다. 탕은 이렇게 선포했다.

 

 

“자, 여러분! 와서 모두 내 말을 들으시오. 나같이 보잘것없는 사람이 감히 난을 일으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오. 하가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이오. 여러분이 나를 원망하는 소리를 들었소. 하씨가 죄를 지었으니 나는 상제의 뜻이 두려워서 바로잡지 않을 수 없는 것이오. 지금 하가 죄를 많이 저질러 하늘이 그를 벌하라고 명하신 것이오! 지금 여러분 가운데는 ‘우리 군주가 우리를 어여삐 여기지 않아 농사를 그만두고 전쟁에 참여하게 했다’라고 말하거나, 혹 ‘(하왕이) 죄를 지었다는데 무슨 죄를 지었느냐’라고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오. 하왕은 많은 사람의 힘을 다 빼앗고, 나라의 재물을 약탈해 백성들이 나태해지고 서로 화목하지 않게 만들었소. ‘저 태양은 언제나 지려는고? 나 차라리 너와 함께 사라지리라’라 말하게 되었소. 하의 덕이 이와 같으니, 지금 짐이 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오. 내가 하늘의 징벌을 대신하게 도와준다면, 여러분에게 큰 상을 내릴 것이오. 여러분은 내 말을 믿으시오. 짐은 석언하지 않소. 만일 여러분이 내 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가족을 데려다가 죽이거나 노비로 삼고,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

 

 

탕이 이 말을 영사(令師)에게 알려서 「탕서(湯誓)」를 짓게 했다. 이때 탕이 “나는 무용(武勇)이 뛰어나다”라고 했기에, 그를 무왕(武王)이라고 불렀다.

 

 

 

桀敗於有娀之虛, 桀奔於鳴條,34) 夏師敗績. 湯遂伐三, 俘厥寶玉,35) 義伯、仲伯作典寶.36) 湯旣勝夏, 欲遷其社, 不可,37) 作夏社.38) 伊尹報.39) 於是諸侯畢服, 湯乃踐天子位, 平定海內.

 

 

걸왕이 유융(有娀)의 허(虛)에서 패해 명조로 달아나자 하의 군대는 지리멸렬해졌다. 탕이 삼종을 정벌해 많은 보물들을 획득하자 탕의 신하인 의백(義伯)과 중백(仲伯)이 「보전(寶典)」 편을 지었다. 탕이 하를 정벌한 다음 하의 사당을 옮기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게 되자 「하사(夏社)」 편을 지었다. 이윤이 바른 정치를 공포하자 제후들이 모두 복종했고, 탕이 마침내 천자의 지위에 올라 전국을 평정했다.

 

 

 

湯歸至于泰卷陶,40) 中壘作誥.41) 旣絀夏命,42) 還亳, 作湯誥:「維三月, 王自至於東郊. 告諸侯群后:『毋不有功於民, 勤力迺事. 予乃大罰殛女, 毋予怨.』曰:『古禹、皐陶久勞于外, 其有功乎民, 民乃有安. 東爲江, 北爲濟, 西爲河, 南爲淮, 四瀆已修, 萬民乃有居. 后稷降播, 農殖百穀. 三公咸有功于民, 故后有立.43) 昔蚩尤與其大夫作亂百姓, 帝乃弗予,44) 有狀.45) 先王言不可不勉.』46)曰:『不道, 毋之在國,47) 女毋我怨.』」以令諸侯. 伊尹作咸有一德,48) 咎單作明居.49)

 

 

탕왕이 박으로 돌아가는 길에 태권도(太卷陶)에 이르자 중뢰가 고명(誥命)을 지었다. 탕은 하의 정령을 없애고 박으로 돌아와서 아래의 「탕고(湯誥)」를 지었다.

 

 

3월에 왕이 동쪽 교외에 나가서 여러 제후들에게 ‘백성을 위해 공로를 세우지 못하거나 자신의 직무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내 그대들을 징벌할 것이니 원망하지 말라’라고 경고했다. 왕이 ‘옛날 하우와 고요는 오랫동안 밖에서 일하며 백성에게 많은 공을 세워서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었다. 이들은 동쪽 장강, 북쪽 제수, 서쪽 황하, 남쪽 회수 등 네 강물이 잘 흐르도록 다스리어 만민이 이곳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후직이 씨를 뿌리는 방법을 전해주어 농민들이 백곡을 경작하게 되었다. 이들 삼공은 모두 백성을 위한 일에 공로를 세웠기에 그들의 후대가 모두 나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옛날 치우와 그의 대부들이 난을 일으켰으나 하늘이 그들을 돕지 않았던 선례가 있소. 선왕들의 말씀을 따르는 데 힘써야만 하오’라 했다. 왕이 또 ‘바른 길을 행하지 않으면 그대들의 나라가 존재하지 못하게 할 것이니, 그때 가서 나를 원망하지 말라’고 했다.

 

 

이윤이 「함유일덕(咸有一德)」을 지었고, 고단(咎單)은 「명거(明居)」를 지었다.

 

 

 

湯乃改正朔, 易服色, 上白, 朝會以晝.

 

 

탕이 달력을 바꾸고, 복장의 색을 바꾸어 백색을 숭상했으며 조회를 낮에 열었다.

 

 

 

湯崩,50) 太子太丁未立而卒, 於是迺立太丁之弟外丙, 是爲帝外丙. 帝外丙卽位三年, 崩, 立外丙之弟中壬,51) 是爲帝中壬. 帝中壬卽位四年, 崩, 伊尹迺立太丁之子太甲.52) 太甲, 成湯適長孫也, 是爲帝太甲. 帝太甲元年, 伊尹作伊訓, 作肆命, 作徂后.53)

 

 

탕이 세상을 떴으나 태자 태정(太丁)이 즉위하지 못하고 죽어서 태정의 동생인 외병(外丙)이 즉위하니, 이가 바로 외병 임금이다. 외병 임금이 즉위한 지 3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외병제의 동생 중임(中壬)이 즉위해 중임 임금이 되었으며, 중임이 즉위한 지 4년 만에 세상을 뜨자 이윤은 태정의 아들 태갑(太甲)을 즉위시켰다. 태갑은 성탕(成湯)의 직계 장손으로 태갑 임금이 되었다. 태갑 임금 원년에 이윤은 「이훈(伊訓)」, 「사명(肆命)」, 「조후(徂后)」를 지었다.

 

 

 

帝太甲旣立三年, 不明, 暴虐, 不遵湯法, 亂德, 於是伊尹放之於桐宮.54) 三年, 伊尹攝行政當國, 以朝諸侯.

 

 

태갑제가 즉위한 지 3년, 정치를 못하고 포악해져 탕의 법령을 지키지 않고 도덕을 문란하게 하자, 이윤이 그를 동궁(桐宮)으로 내쫓았다. 3년 동안 이윤이 섭정하면서 제후들의 조회를 받았다.

 

 

 

帝太甲居桐宮三年, 悔過自責, 反善, 於是伊尹迺迎帝太甲而授之政. 帝太甲修德, 諸侯咸歸殷, 百姓以寧. 伊尹嘉之, 迺作太甲訓三篇, 褒帝太甲, 稱太宗.

太宗崩, 子沃丁立. 帝沃丁之時, 伊尹卒. 旣葬伊尹於亳,55) 咎單遂訓伊尹事, 作沃丁.

 

 

태갑이 3년 동안 동궁에 머물면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착하게 돌아서자 이윤은 태갑을 맞아들여 정권을 되돌려주었다. 태갑이 덕을 수양하니 제후들이 모두 은에 복종하게 되었고 백성들도 평안하게 되었다. 이에 이윤이 태갑 임금의 공적을 칭송하기 위해서 「태갑훈(太甲訓)」 3편을 지었고, 태갑 임금을 기리어 태종(太宗)이라고 불렀다.

 

 

태종이 세상을 뜨자 아들 옥정(沃丁)이 즉위했다. 옥정 임금 때 이윤이 세상을 떠나니, 그를 박에다 장사 지냈고, 고단(咎單)은 이윤의 행적을 통해서 후세인들을 깨우치기 위해 「옥정(沃丁)」을 지었다.

 

 

 

沃丁崩, 弟太庚立, 是爲帝太庚. 帝太庚崩, 子帝小甲立.56) 帝小甲崩, 弟雍己立, 是爲帝雍己. 殷道衰, 諸侯或不至.

 

 

옥정이 세상을 떠나자 동생 태경(太庚)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태경 임금이다. 태경이 세상을 뜨고 아들 소갑(小甲)이 즉위했다. 소갑이 세상을 뜨자 동생 옹기(雍己)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옹기 임금이다. 은의 도가 쇠해지자 조회에 오지 않는 제후가 생겼다.

 

 

 

帝雍己崩, 弟太戊立, 是爲帝太戊. 帝太戊立伊陟爲相.57) 亳有祥桑谷共生於朝, 一暮大拱.58) 帝太戊懼, 問伊陟. 伊陟曰:「臣聞妖不勝德, 帝之政其有闕與? 帝其修德.」太戊從之, 而祥桑枯死而去.59) 伊陟贊言于巫咸.60) 巫咸治王家有成, 作咸艾,61) 作太戊. 帝太戊贊伊陟于廟, 言弗臣, 伊陟讓, 作原命.62) 殷復興, 諸侯歸之, 故稱中宗.

 

 

옹기 임금이 세상을 뜨고 동생 태무(太戊)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태무 임금이다. 태무 임금은 즉위해 이척(伊陟)을 재상으로 삼았다. 박에서 뽕나무와 닥나무가 함께 자라기 시작하더니 하룻밤 사이에 한 아름 넘게 커지는 불길한 일이 일어났다. 태무 임금이 두려워 이척에게 물었다. 이척은 “신이 듣자니 요사스러움도 덕행을 이기지는 못한다고 하옵니다. 임금의 정치에 모자란 점은 없었는지요? 임금께서는 덕행의 수양에 힘쓰십시오”라고 아뢰었다.

태무가 이에 따르자 불길한 징조인 뽕나무가 말라서 죽었다. 이척은 무함(巫咸)에게 모든 공을 돌려서 그를 칭찬했다. 무함은 왕가의 사무를 잘 처리했으며 「함애(咸艾)」와 「태무(太戊)」를 지었다. 태무가 태묘에서 이척을 칭송하면서 그를 신하 이상으로 대우하려고 하자 이척이 사양하고 「원명(原命)」을 지었다. 은이 다시 흥해 제후들이 은에 귀의했기에 태무 임금을 중종(中宗)이라 불렀다.

 

 

 

中宗崩, 子帝中丁立. 帝中丁遷于隞.63) 河亶甲居相.64) 祖乙遷于邢.65) 帝中丁崩, 弟外壬立, 是爲帝外壬. 仲丁書闕不具.66) 帝外壬崩, 弟河亶甲立, 是爲帝河亶甲. 河亶甲時, 殷復衰.

 

 

중종이 세상을 뜨고 아들 중정(中丁)이 즉위했다. 중정 임금은 오(隞)로 도읍을 옮겼다. 하단갑 때 상(相)으로 천도했고, 조을(祖乙)은 형(邢)으로 천도했다. 중정 임금이 세상을 떠나자 동생인 외임(外壬)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외임 임금이다. 「중정(仲丁)」은 글에 빠진 부분이 있어 완전치 못하다. 외임 임금이 세상을 뜨고 동생 하단갑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하단갑 임금이다. 하단갑 때 은이 다시 쇠퇴했다.

 

 

 

河亶甲崩, 子帝祖乙立. 帝祖乙立, 殷復興. 巫賢任職.

 

하단갑이 세상을 뜨고 아들 조을(祖乙)이 즉위했다. 조을 임금이 즉위해 은은 다시 부흥했다. 무현(巫賢)이 정무를 담당했다.

 

 

祖乙崩, 子帝祖辛立. 帝祖辛崩, 弟沃甲立, 是爲帝沃甲.67) 帝沃甲崩, 立沃甲兄祖辛之子祖丁, 是爲帝祖丁. 帝祖丁崩, 立弟沃甲之子南庚, 是爲帝南庚. 帝南庚崩, 立帝祖丁之子陽甲, 是爲帝陽甲. 帝陽甲之時, 殷衰.

 

 

조을제가 세상을 떠나자 아들 조신(祖辛)이 즉위했다. 조신 임금이 세상을 떠나자 동생 옥갑(沃甲)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옥갑 임금이다. 옥갑 임금이 세상을 뜨고 옥갑의 형 조신의 아들인 조정(祖丁)이 즉위하니, 이가 바로 조정 임금이다. 조정 임금이 세상을 떠나자 옥갑제의 아들인 사촌동생 남경(南庚)이 즉위하니, 이가 바로 남경 임금이다. 남경 임금이 세상을 뜨고 조정 임금의 아들인 양갑(陽甲)이 즉위하니, 이가 바로 양갑 임금이다. 양갑 임금 때 은이 다시 쇠퇴했다.

 

 

 

自中丁以來, 廢適而更立諸弟子, 弟子或爭相代立, 比九世亂, 於是諸侯莫朝.

 

 

중정 이래로 적자 계승이 폐지되고 형제와 형제 아들로 바뀌어 자리를 놓고 서로 다투니 9세 동안 혼란이 이어졌다. 이 때문에 제후들이 조회에 오지 않았다.

 

 

 

帝陽甲崩, 弟盤庚立, 是爲帝盤庚. 帝盤庚之時, 殷已都河北, 盤庚渡河南, 復居成湯之故居, 迺五遷, 無定處.68) 殷民咨胥皆怨, 不欲徙.69) 盤庚乃告諭諸侯大臣曰:「昔高后成湯與爾之先祖俱定天下, 法則可修. 舍而弗勉, 何以成德!」乃遂涉河南, 治亳,70) 行湯之政, 然後百姓由寧, 殷道復興. 諸侯來朝, 以其遵成湯之德也.

 

 

양갑 임금이 죽고 동생 반경(盤庚)이 즉위하니, 이가 반경 임금이다. 반경 임금 때 은은 이미 하북에 도읍했는데, 반경제는 다시 하남으로 옮겨 성탕의 옛 도읍에 거주하려고 한 것이었다. 이미 다섯 차례나 천도하면서 정해진 거처가 없었기에 은의 인민들은 걱정과 원망으로 옮기려 하지 않았다. 이에 반경은 제후와 대신들에게 “예전 고후(高后)이셨던 성탕과 그대들의 선조들께서 함께 힘을 모아 천하를 평정하셨고 그 법은 따를 수 있는 것이었소. 그것을 버리고 힘쓰지 않는다면 어떻게 덕정을 이룰 수 있겠소?”라 했다. 이에 마침내 하남으로 옮겨 박을 정돈하고 탕의 정치를 시행하니 백성들이 편안하게 되었고, 은의 도는 다시 일어섰다. 제후들이 입조한 것은 성탕의 덕정을 준수했기 때문이다.

 

 

帝盤庚崩, 弟小辛立, 是爲帝小辛. 帝小辛立, 殷復衰. 百姓思盤庚, 迺作盤庚三篇.71) 帝小辛崩, 弟小乙立, 是爲帝小乙.

 

 

반경제가 세상을 뜨고 동생 소신(小辛)이 즉위하니, 이가 소신 임금이다. 소신 임금이 즉위한 후 은이 다시 쇠퇴해지자 (반경을 생각하며) 「반경(盤庚)」 3편을 지었다. 소신 임금이 세상을 뜨고 동생 소을(小乙)이 즉위하니, 이가 소을 임금이다.

 

 

帝小乙崩, 子帝武丁立. 帝武丁卽位, 思復興殷, 而未得其佐. 三年不言, 政事決定於冢宰,72) 以觀國風. 武丁夜夢得聖人, 名曰說. 以夢所見視群臣百吏, 皆非也. 於是迺使百工營求之野, 得說於傅險中.73) 是時說爲胥靡, 築於傅險.74) 見於武丁, 武丁曰是也. 得而與之語, 果聖人, 擧以爲相, 殷國大治. 故遂以傅險姓之, 號曰傅說.

 

 

소을 임금이 세상을 뜨고 아들 무정(武丁)이 즉위했다. 무정 임금이 즉위해 은을 부흥시키려 했으나 도울 사람을 얻지 못했다. 3년을 말도 하지 않고 정사는 총재가 결재하게 하면서 나라의 기풍을 살폈다. 무정이 꿈에서 성인을 만났는데 이름을 열(說)이라 했다. 꿈에서 본 성인을 신하들과 백관들 중에서 찾았으나 모두 아니었다. 이에 백관들에게 재야에서 찾아보게 해 부험(傅險)이란 곳에서 열(說)을 찾아냈다. 이때 열은 죄를 짓고 노역에 끌려 나가서 부험에서 길을 닦고 있던 중이었다. 무정에게 보이니 무정은 “바로 이 사람이다”라 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과연 성인이었다. 이에 그를 등용해 재상으로 삼으니 은이 크게 다스려졌다. 이 따라 부험으로 성을 삼게 하고 부열(傅說)이라 불렀다.

 

 

帝武丁祭成湯, 明日, 有飛雉登鼎耳而呴,75) 武丁懼. 祖己曰:76)「王勿憂, 先修政事.」祖己乃訓王曰:「唯天監下典厥義,77) 降年有永有不永, 非天夭民, 中絶其命. 民有不若德, 不聽罪, 天旣附命正厥德,78) 乃曰其奈何. 嗚呼! 王嗣敬民, 罔非天繼, 常祀毋禮于棄道.」79)武丁修政行德, 天下咸驩, 殷道復興.

 

 

무정 임금이 성탕에게 제사를 올린 다음날 꿩이 날아와서 정(鼎)의 손잡이에 앉아 울었다. 무정이 두려워하자 조기(祖己)가 “왕께서는 걱정하지 마시고 먼저 정사를 바르게 처리하십시오”라 했다. 조기는 다시 왕에게 “무릇 하늘이 인간을 감찰하는 데는 도의를 기준으로 삼습니다. 하늘이 내려준 수명에 길고 짧음은 있으나, 하늘이 인민을 요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행동 때문에 자신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것입니다. 도덕을 지키지 않고, 자신의 죄를 시인하지 않는 사람이 있기 대문에 하늘이 재앙을 내려서 그 행동을 바로잡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제서야 ‘이를 어찌하나’며 한탄합니다. 아! 왕께서 백성을 위해서 힘껏 일하는 것이 하늘의 뜻을 계승하는 것이며, 제사는 예나 도에 어긋나서는 안 됩니다”라고 충고했다. 무정이 정사를 바로잡고 은덕을 베푸니 천하가 모두 즐거워하고, 은의 도가 부흥했다.

 

 

 

 

帝武丁崩, 子帝祖庚立. 祖己嘉武丁之以祥雉爲德, 立其廟爲高宗, 遂作高宗肜日及訓.80)

 

 

무정 임금이 세상을 뜨고 아들 조경제(祖庚帝)가 즉위했다. 조기는 무정 때 꿩이 정의 손잡이에 날아들어 울었던 일을 계기로 삼아 덕정을 베푼 일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세우고 고종(高宗)이라 하는 한편, 「고종융일(高宗肜日)」과 「고종지훈(高宗之訓)」을 지었다.

 

 

帝祖庚崩, 弟祖甲立, 是爲帝甲. 帝甲淫亂, 殷復衰.81)

 

 

조경 임금이 세상을 뜨고 동생 조갑(祖甲)이 즉위하니, 이가 갑 임금이다. 갑 임금은 음란해 은이 다시 쇠퇴해졌다.

 

 

帝甲崩, 子帝廩辛立.82) 帝廩辛崩, 弟庚丁立, 是爲帝庚丁. 帝庚丁崩, 子帝武乙立. 殷復去亳, 徙河北.

 

갑 임금이 세상을 떠나니 아들 늠신(廩辛)이 즉위했다. 늠신 임금이 세상을 뜨자 동생 경정(庚丁)이 즉위하니, 이가 경정 임금이다. 경정 임금이 세상을 뜨고 무을(武乙)이 즉위했는데, 은은 다시 박을 떠나서 하북으로 천도했다.

 

 

 

帝武乙無道, 爲偶人,83) 謂之天神. 與之博, 令人爲行.84) 天神不勝, 乃僇辱之. 爲革囊, 盛血, 卬而射之, 命曰「射天」. 武乙獵於河渭之閒, 暴雷, 武乙震死. 子帝太丁立. 帝太丁崩, 子帝乙立. 帝乙立, 殷益衰.

 

 

무을 임금은 무도해 우상을 만들고 이를 ‘천신(天神)’이라고 불렀다. 천신과 내기를 하면서 옆 사람에게 심판을 보게 하고는 천신이 지면 천신을 모욕했다. 가죽 주머니를 만들어 그 속에 피를 가득 채우고 높이 매달아 활로 쏘면서 ‘사천(射天)’이라 부르게 했다. 무을은 황하와 위수 사이로 사냥을 갔다가 갑자기 치는 천둥 소리에 놀라 죽었다. 아들 태정(太丁)이 즉위했고, 태정 임금이 세상을 뜨자 아들 을(乙)이 즉위했다. 을 임금이 즉위하면서 은은 더욱 쇠해졌다.

 

 

 

帝乙長子曰微子啓,85) 啓母賤, 不得嗣.86) 少子辛, 辛母正后, 辛爲嗣. 帝乙崩, 子辛立, 是爲帝辛, 天下謂之紂.87)

 

 

을 임금의 큰아들은 미자계(微子啓)였으나, 계의 어머니가 천했기 때문에 후계자가 되지 못했다. 작은아들 신(辛)은 그 어머니가 정비였기 때문에 신이 후계자가 되었다. 을 임금이 세상을 뜨자 아들 신이 즉위했다. 이 신 임금인데, 천하는 그를 ‘주(紂)’라 불렀다.

 

 

 

帝紂資辨捷疾, 聞見甚敏;材力過人, 手格猛獸;88)知足以距諫, 言足以飾非;矜人臣以能, 高天下以聲, 以爲皆出己之下. 好酒淫樂, 嬖於婦人. 愛妲己,89) 妲己之言是從. 於是使師涓作新淫聲, 北里之舞, 靡靡之樂. 厚賦稅以實鹿臺之錢,90) 而盈鉅橋之粟.91) 益收狗馬奇物, 充仞宮室. 益廣沙丘苑臺,92) 多取野獸蜚鳥置其中. 慢於鬼神. 大聚樂戱於沙丘,93) 以酒爲池,94) 縣肉爲林,95) 使男女裸96)相逐其閒, 爲長夜之飮.

 

 

주 임금은 자질이 총명하고 말재간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일처리가 신속하며, 힘이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서 맨손으로 맹수와 싸울 정도였다. 지혜는 신하의 간언을 물리칠 정도였고, 말재주는 자신의 허물을 감출 수 있을 정도였다. 자신의 재능을 신하들에게 과시해 천하에 그의 명성을 드높이려고 했으며, 모두가 자기 밑이라 여겼다. 술과 음악을 지나치게 좋아했으며, 여자를 좋아했다. 달기(妲己)를 총애해 달기의 말이면 무엇이든 들어주었다.

 

 

그는 사연(師涓)에게 음탕한 악곡을 작곡하게 하고, 북리(北里)에서 추는 것 같은 저속한 춤과 음탕하고 퇴폐적인 가락을 새로 만들도록 했다. 세금을 무겁게 매겨 녹대(鹿臺)를 돈으로 채우고 거교(鉅橋)를 곡식으로 채웠다. 여기저기서 개와 말, 기이한 애완물을 수집해 궁실을 가득 메웠다. 사구(沙丘)의 원대(苑臺)를 크게 확장해 야수와 새들을 잔뜩 잡아다가 이곳에 풀어놓았다. 귀신도 우습게 알았다. 사구에 악공들과 광대들을 잔뜩 불러들이고, 술로 연못을 만들고, 숲처럼 고기를 매달아놓고서 벌거벗은 남녀들이 그 사이를 서로 쫓아다니게 하면서 밤이 새도록 마시며 놀았다.

 

 

 

 

 

百姓怨望而諸侯有畔者, 於是紂乃重刑辟, 有炮烙之法.97) 以西伯昌、九侯、98)鄂侯99)爲三公. 九侯有好女, 入之紂. 九侯女不憙淫,100) 紂怒, 殺之, 而醢九侯. 鄂侯爭之彊, 辨之疾, 幷脯鄂侯. 西伯昌聞之, 竊嘆. 崇侯虎知之, 以告紂, 紂囚西伯羑里.101) 西伯之臣閎夭之徒, 求美女奇物善馬以獻紂, 紂乃赦西伯. 西伯出而獻洛西之地,102) 以請除炮烙之刑. 紂乃許之, 賜弓矢斧鉞, 使得征伐, 爲西伯. 而用費中爲政.103) 費中善諛, 好利, 殷人弗親. 紂又用惡來.104) 惡來善毁讒, 諸侯以此益疏.

 

 

백성들이 원망하고 배신하는 제후들이 생기자 주는 형벌을 무겁게 해 포락(炮烙)이라는 형벌까지 만들어냈다. 서백창(西伯昌), 구후(九侯), 악후(鄂侯)를 삼공으로 삼았다. 구후는 자신의 아름다운 딸을 주에게 바쳤다. 구후의 딸이 음탕한 짓을 싫어하자 주는 노하여 그녀를 죽이고, 구후는 죽여서 포를 떠서 소금에 절였다. 악후가 이를 만류하며 격렬한 어조로 따지자 악후도 포를 떠서 죽였다.

 

 

서백창이 이를 듣고는 가만히 탄식했는데, 숭후호(崇侯虎)가 이 사실을 알고는 주에게 고자질하자 주는 서백을 유리(羑里)에 가두어버렸다. 서백의 신하인 굉요(閎夭) 등이 미녀와 진기한 보물, 준마 등을 구해 주에게 바치자 주는 곧 서백을 사면해주었다. 서백은 출옥하자 낙수 서쪽의 땅을 바치며 포락형을 없애주기를 청원했다. 주가 이를 허락하고는 활과 화살 그리고 큰도끼를 하사해 주변 제후국을 정벌할 수 있게 하고 서백으로 삼았다. 비중(費中)을 등용해 국정을 담당하게 했는데, 비중은 아첨을 잘하고 사리사욕만 채웠기 때문에 은 사람들이 그를 멀리했다. 주는 또 오래(惡來)를 등용했는데, 오래는 다른 사람을 비방하기 좋아했기에 제후들은 이 때문에 은과 더욱 사이가 멀어졌다.

 

 

 

西伯歸, 乃陰修德行善, 諸侯多叛紂而往歸西伯. 西伯滋大, 紂由是稍失權重. 王子比干諫, 弗聽. 商容賢者, 百姓愛之, 紂廢之. 及西伯伐飢國, 滅之,105) 紂之臣祖伊106)聞之而咎周,107) 恐, 奔告紂曰:「天旣訖我殷命, 仮人元龜,108) 無敢知吉,109) 非先王不相我後人,110) 維王淫虐用自絶, 故天棄我, 不有安食, 不虞知天性, 不迪率典.111) 今我民罔不欲喪, 曰『天曷不降威, 大命胡不至』? 今王其柰何?」紂曰:「我生不有命在天乎!」祖伊反, 曰:「紂不可諫矣.」西伯旣卒, 周武王之東伐, 至盟津, 諸侯叛殷會周者八百. 諸侯皆曰:「紂可伐矣.」武王曰:「爾未知天命.」乃復歸.

 

 

서백이 돌아와 은밀히 덕을 베풀고 선정을 행하니 많은 제후들이 주를 등지고 서백을 따랐다. 서백의 점점 커지자 주는 점점 권력을 잃어갔다. 왕자 비간(比干)이 간언을 했지만, 주는 듣지 않았다. 상용(商容)은 현자로서 백성이 그를 아꼈으나 주는 그를 버렸다.

 

 

서백이 기국(饑國)을 정벌해 멸망시키자, 주의 신하인 조이(祖伊)가 이 소식을 듣고 주(周)를 원망하는 한편 두려워 주(紂)에게 달려가 “하늘이 이미 우리 은의 명을 단절시켰기 때문에 지혜로운 눈을 가진 사람이 미래를 내다보고 거북점을 쳐봐도 앞날이 길하다는 것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이는 선왕들께서 우리 후손을 돕지 않는 것이 아니라, 왕의 포악과 음란으로 스스로 하늘과의 관계를 끊어버리신 것이고, 때문에 하늘이 우리를 버리신 것입니다. 편히 먹지도 못하고, 하늘의 뜻을 헤아리거나 이해하지도 못했으며 법도를 따르지도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 백성들 가운데 왕이 망하길 원치 않는 사람이 없으니, 모두들 ‘하늘은 어찌해 재앙을 내리지 않으며, 큰 천명은 어이해 아직도 나타나지 않는가’라고 말합니다. 이제 왕께서는 어찌하시겠습니까”라고 고했다. 주는 “내가 태어난 것 자체가 천명이 있었기 때문 아닌가”라 했다. 조이가 돌아와서는 “주는 충고할 수 없다”고 했다.

 

 

서백이 세상을 떠나고 주(周) 무왕(武王)이 동쪽 지방을 정벌해 맹진(盟津)에 이르자, 은을 배반하고 주로 모여든 제후가 800이나 되었다. 제후들이 모두 “주를 정벌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으나, 무왕은 “그대들은 천명을 모르고 있소”라고 말하고는 다시 돌아갔다.

 

 

 

紂愈淫亂不止. 微子數諫不聽, 乃與大師、少師謀, 遂去. 比干曰:「爲人臣者, 不得不以死爭.」迺强諫紂. 紂怒曰:「吾聞聖人心有七竅.」剖比干, 觀其心.112) 箕子懼, 乃詳狂爲奴, 紂又囚之. 殷之大師、少師乃持其祭樂器奔周. 周武王於是遂率諸侯伐紂. 紂亦發兵距之牧野.113) 甲子日, 紂兵敗. 紂走入, 登鹿臺,114) 衣其寶玉衣, 赴火而死.115) 周武王遂斬紂頭, 縣之[大]白旗. 殺妲己. 釋箕子之囚, 封比干之墓, 表商容之閭.116) 封紂子武庚、祿父, 以續殷祀,117) 令修行盤庚之政. 殷民大說. 於是周武王爲天子. 其後世貶帝號, 號爲王.118) 而封殷後爲諸侯, 屬周.119)

 

 

주왕은 갈수록 음란해졌다. 미자(微子)가 몇 번이나 충고했지만 주왕이 들으려 하지 않자, 그는 태사(太師), 소사(少師)와 상의하고는 마침내 은을 떠났다. 비간은 “신하는 죽음으로 충고하지 않을 수 없다”며 계속 주왕에게 간언했다. 주가 성이 나서 “성인의 심장에는 구멍이 일곱 개나 있다고 들었다”라면서 비간을 해부해 그 심장을 꺼내보았다. 기자(箕子)는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미친 척해 남의 노비가 되고자 했지만 주가 그를 잡아 가두었다. 은의 태사와 소사는 제기와 악기를 가지고 주(周)로 달아났다. 마침내 주 무왕이 제후들을 거느리고 주(紂)를 정벌했다. 주도 군대를 일으켜 목야(牧野)에서 대항했으나, 갑자일에 그의 군대가 패했다.

주는 도망쳐 들어와 녹대로 올라가서 보물과 옥 따위로 장식한 옷을 뒤집어쓰고 불 속으로 뛰어들어 죽었다. 무왕은 주의 목을 베어 크고 힌 깃발에 매달았고, 달기도 처형했다. 기자를 풀어주고, 비간의 무덤에 봉분을 씌워주고, 상용이 살던 마을에 상을 내렸다. 주의 아들 녹보(祿父) 무경(武庚)에게 봉토를 나누어주어 은의 제사를 잇도록 하고, 반경의 정령을 집행하게 하자 은의 인민들이 크게 기뻐했다. 이렇게 해서 주 무왕이 천자가 되었다. 그 후 세들은 임금을 제(帝)라고 부르지 않고 왕(王)으로 낮추어 불렀으며, 은의 후예를 제후로 삼아 주에 속하게 했다.

 

 

周武王崩, 武庚與管叔、蔡叔作亂, 成王命周公誅之, 而立微子於宋, 以續殷後焉.

 

 

주 무왕이 세상을 뜨자 무경(武庚), 관숙(管叔), 채숙(蔡叔)이 난을 일으켰다. 성왕(成王)은 주공(周公)으로 하여금 그들을 토벌하고 미자를 송(宋)에 봉해 은의 후대를 잇도록 했다.

 

 

 

太史公曰:余以頌次契之事, 自成湯以來, 采於書詩. 契爲子姓, 其後分封, 以國爲姓, 有殷氏、來氏、宋氏、空桐氏、稚氏、120) 北殷氏、121) 目夷氏. 孔子曰, 殷路車爲善, 而色尙白.122)

 

“나는 「송(頌)」에 의거해 설의 사적을 순서대로 정리했고, 성탕 이후의 일은 『서(書)』와 『시(詩)』에서 취했다. 설의 성은 자씨였으나, 그 후 손이 봉토를 받았으므로 나라를 성으로 삼게 되어 은씨(殷氏), 내씨(來氏), 송씨(宋氏), 공동씨(空桐氏), 치씨(稚氏), 북은씨(北殷氏), 목이씨(目夷氏)가 있게 되었다. 공자(孔子)는 ‘은의 노(路)라는 수레가 좋다’라고 말했다. 색은 흰색을 숭상했다.”

 

 

 

 

 

 

 

각주

 

1 索隱契始封商, 其後裔盤庚遷殷, 殷在鄴南, 遂爲天下號. 契是殷家始祖, 故言殷契. 正義括地志云:「相州安陽本盤庚所都, 卽北蒙, 殷墟南去朝歌城百四十六里. 竹書紀年云『盤庚自奄遷于北蒙, 曰殷墟, 南去鄴四十里』, 是舊鄴城西南三十里有洹水, 南岸三里有安陽城, 西有城名殷墟, 所謂北蒙者也.」今按:洹水在相州北四里, 安陽城卽相州外城也.

2 索隱舊本作「易」, 易狄音同. 又作「■」, 吐歷反.

3 集解淮南子曰:「有娀在不周之北.」正義按:記云「桀敗於有娀之墟」, 有娀當在蒲州也.

4 索隱譙周云:「契生堯代, 舜始擧之, 必非嚳子. 以其父微, 故不著名. 其母娀氏女, 與宗婦三人浴于川, 玄鳥遺卵, 簡狄呑之, 則簡狄非帝嚳次妃明也.」

5 集解鄭玄曰:「商國在太華之陽.」皇甫謐曰:「今上洛商是也.」索隱堯封契於商, 卽詩商頌云「有娀方將, 帝立子生商」是也. 正義括地志云:「商州東八十里商洛縣, 本商邑, 古之商國, 帝嚳之子■所封也.」

6 集解禮緯曰:「祖以玄鳥生子也.」正義括地志云:「故子城在渭州華城縣東北八十里, 蓋子姓之別邑.」

7 集解宋忠曰:「相土就契封於商. 春秋左氏傳曰『閼伯居商丘, 相土因之』.」索隱相土佐夏, 功著於商, 詩頌曰「相土烈烈, 海外有截」是也. 左傳曰「昔陶唐氏火正閼伯居商丘, 相土因之」, 是始封商也. 正義括地志云:「宋州宋城縣古閼伯之墟, 卽商丘也, 又云羿所封之地.」

8 索隱系本作「糧圉」也.

9 正義圉音語, 出系本.

10 集解宋忠曰:「冥爲司空, 勤其官事, 死於水中, 殷人郊之.」索隱禮記曰「冥勤其官而水死」, 殷人祖契而郊冥也.

11 索隱系本作「核」.

12 索隱皇甫謐云:「微字上甲, 其母以甲日生故也.」商家生子, 以日爲名, 蓋自微始. 譙周以爲死稱廟主曰「甲」也.

13 集解張晏曰:「禹, 湯, 皆字也. 二王去唐、虞之文, 從高陽之質, 故夏、殷之王皆以名爲號.」謚法曰:「除虐去殘曰湯.」索隱湯名履, 書曰「予小子履」是也. 又稱天乙者, 譙周云「夏、殷之禮, 生稱王, 死稱廟主, 皆以帝名配之. 天亦帝也, 殷人尊湯, 故曰天乙」. 從契至湯凡十四代, 故國語曰「玄王勤商, 十四代興」. 玄王, 契也.

14 集解孔安國曰:「十四世凡八徙國都.」

15 集解皇甫謐曰:「梁國谷熟爲南亳, 卽湯都也.」正義括地志云:「宋州谷熟縣西南三十五里南亳故城, 卽南亳, 湯都也. 宋州北五十里大蒙城爲景亳, 湯所盟地, 因景山爲名. 河南偃師爲西亳, 帝嚳及湯所都, 盤庚亦徙都之.」

16 集解孔安國曰:「契父帝嚳都亳, 湯自商丘遷焉, 故曰『從先王居』.」正義按:亳, 偃師城也. 商丘, 宋州也. 湯卽位, 都南亳, 後徙西亳也. 括地志云:「亳邑故城在洛州偃師縣西十四里, 本帝嚳之墟, 商湯之都也.」

17 索隱一作「■」. 上云「從先王居」, 故作帝■. 孔安國以爲作誥告先王, 言己來居亳也.

18 集解孔安國曰:「爲夏方伯, 得專征伐.」

19 集解孟子曰:「湯居亳, 與葛伯爲鄰.」地理志曰葛今梁國寧陵之葛鄕.

20 索隱孫子兵書:「伊尹名摯.」孔安國亦曰「伊摯」. 然解者以阿衡爲官名. 按:阿, 倚也, 衡, 平也. 言依倚而取平. 書曰「惟嗣王弗惠于阿衡」, 亦曰保衡, 皆伊尹之官號, 非名也. 皇甫謐曰:「伊尹, 力牧之後, 生於空桑.」又呂氏春秋云:「有侁氏女採桑, 得嬰兒于空桑, 母居伊水, 命曰伊尹.」尹, 正也, 謂湯使之正天下.

21 集解列女傳曰:「湯妃有莘氏之女.」正義括地志云:「古莘國在汴州陳留縣東五里, 故莘城是也. 陳留風俗傳云陳留外黃有莘昌亭, 本宋地, 莘氏邑也.」媵, 翊剩反. 爾雅云:「媵, 將, 送也.」

22 集解劉向別錄曰:「九主者, 有法君、專君、授君、勞君、等君、寄君、破君、國君、三歲社君, 凡九品, 圖畫其形.」索隱按:素王者太素上皇, 其道質素, 故稱素王. 九主者, 三皇、五帝及夏禹也. 或曰, 九主謂九皇也. 然按注劉向所稱九主, 載之七錄, 名稱甚奇, 不知所憑據耳. 法君, 謂用法嚴急之君, 若秦孝公及始皇等也. 勞君, 謂勤勞天下, 若禹、稷等也. 等君, 等者平也, 謂定等威, 均祿賞, 若高祖封功臣, 侯雍齒也. 授君, 謂人君不能自理, 而政歸其臣, 若燕王噲授子之, 禹授益之比也. 專君, 謂專己獨斷, 不任賢臣, 若漢宣之比也. 破君, 謂輕敵致寇, 國滅君死, 若楚戊、吳濞等是也. 寄君, 謂人困於下, 主驕於上, 離析可待, 故孟軻謂之「寄君」也. 國君, 國當爲「固」, 字之訛耳. 固, 謂完城郭, 利甲兵, 而不修德, 若三苗、智伯之類也. 三歲社君, 謂在襁褓而主社稷, 若周成王、漢昭、平等是也. 又注本九主, 謂法君、勞君、等君、專君、授君、破君、國君, 以三歲社君爲二, 恐非.

23 集解孔安國曰:「鳩房二人, 湯之賢臣也. 二篇言所以醜夏而還之意也.」

24 正義帝嚳時陸終之長子, 昆吾氏之後也. 世本云「昆吾者, 衛氏」是.

25 集解馬融曰:「台, 我也.」

26 集解孔安國曰:「不敢不正桀之罪而誅之.」

27 集解孔安國曰:「奪民農功, 而爲割剝之政.」

28 集解孔安國曰:「桀之君臣相率遏止衆力, 使不得事農, 相率割剝夏之邑居.」

29 集解馬融曰:「衆民相率怠惰, 不和同.」

30 集解尙書大傳曰:「桀云『天之有日, 猶吾之有民, 日有亡哉, 日亡吾亦亡矣』.」

31 集解尙書「理」字作「賚」. 鄭玄曰:「賚, 賜也.」

32 索隱左傳云:「食言多矣, 能無肥乎?」是謂妄言爲食言.

33 集解詩云:「武王載旆, 有虔秉鉞.」毛傳曰:「武王, 湯也.」

34 正義括地志云:「高涯原在蒲州安邑縣北三十里南阪口, 卽古鳴條陌也. 鳴條戰地, 在安邑西.」

35 集解孔安國曰:「三■, 國名, 桀走保之, 今定陶也. 俘, 取也.」正義括地志云:「曹州濟陰縣卽古定陶也, 東有三鬷亭是也.」

36 集解孔安國曰:「二臣作典寶一篇, 言國之常寶也.」

37 集解孔安國曰:「欲變置社稷, 而後世無及句龍者, 故不可而止.」

38 集解孔安國曰:「言夏社不可遷之義.」

39 集解徐廣曰:「一云『伊尹報政』.」

40 集解徐廣曰:「一無此『陶』字.」孔安國曰:「地名. 湯自三■而還.」索隱鄒誕生「卷」作「坰」, 又作「泂」, 則卷當爲「坰」, 與尙書同, 非衍字也. 其下「陶」字是衍耳. 何以知然? 解尙書者以大坰今定陶是也, 舊本或傍記其地名, 後人轉寫遂衍斯字也. 正義坰, 古銘反.

41 集解孔安國曰:「仲虺, 湯左相奚仲之後.」索隱仲虺二音. 壘作 壘, 音如字, 尙書又作「虺」也.

42 集解孔安國曰:「絀其王命.」

43 集解徐廣曰:「一作『土』.」索隱謂禹、皐陶有功於人, 建立其後, 故云有立.

44 集解音與.

45 索隱帝, 天也. 謂蚩尤作亂, 上天乃不佑之, 是爲弗與. 有狀, 言其罪大而有形狀, 故黃帝滅之.

46 索隱先王指黃帝、帝堯、帝舜等言. 禹、咎繇以久勞于外, 故後有立. 及蚩尤作亂, 天不佑之, 乃致黃帝滅之. 皆是先王賞有功, 誅有罪, 言今汝不可不勉. 此湯誡其臣.

47 集解徐廣曰:「之, 一作『政』.」索隱不道猶無道也. 又誡諸侯云, 汝爲不道, 我則無令汝之在國.

48 集解王肅曰:「言君臣皆有一德.」索隱按:尙書伊尹作咸有一德在太甲時, 太史公記之於斯, 謂成湯之日, 其言又失次序.

49 集解馬融曰:「咎單, 湯司空也. 明居民之法也.」

50 集解皇覽曰:「湯冢在濟陰亳縣北東郭, 去縣三里. 冢四方, 方各十步, 高七尺, 上平, 處平地. 漢哀帝建平元年, 大司空(御)史[御]長卿案行水災, 因行湯冢. 劉向曰:『殷湯無葬處.』」皇甫謐曰:「卽位十七年而踐天子位, 爲天子十三年, 年百歲而崩.」索隱長卿, 諸本多作劫姓. 按:風俗通有御氏, 爲漢司空(御)史, 其名長卿, 明劫非也. 亦有劫彌, 不得爲御史. 正義括地志云:「薄城北郭東三里平地有湯冢. 按:在蒙, 卽北薄也. 又云洛州偃師縣東六里有湯冢, 近桐宮, 蓋此是也.」

51 正義仲任二音.

52 正義尙書孔子序云「成湯旣沒, 太甲元年」, 不言有外丙、仲壬, 而太史公採世本, 有外丙、仲壬, 二書不同, 當是信則傳信, 疑則傳疑.

53 集解鄭玄曰:「肆命者, 陳政敎所當爲也. 徂后者, 言湯之法度也.」

54 集解孔安國曰:「湯葬地.」鄭玄曰:「地名也, 有王離宮焉.」正義晉太康地記云:「尸鄕南有亳阪, 東有城, 太甲所放處也.」按:尸鄕在洛州偃師縣西南五里也.

55 集解皇覽曰:「伊尹冢在濟陰己氏平利鄕, 亳近己氏.」正義括地志云:「伊尹墓在洛州偃師縣西北八里. 又云宋州楚丘縣西北十五里有伊尹墓, 恐非也.」帝王世紀:「伊尹名摯, 爲湯相, 號阿衡, 年百歲卒, 大霧三日, 沃丁以天子禮葬之.」

56 集解徐廣曰:「世表云帝小甲, 太庚弟也.」

57 集解孔安國曰:「伊陟, 伊尹之子.」

58 集解孔安國曰:「祥, 妖怪也. 二木合生, 不恭之罰.」鄭玄曰:「兩手搤之曰拱.」索隱此云「一暮大拱」, 尙書大傳作「七日大拱」, 與此不同.

59 索隱劉伯莊言枯死而消去不見, 今以爲由帝修德而妖祥遂去.

60 集解孔安國曰:「贊, 告也. 巫咸, 臣名也.」正義按:巫咸及子賢冢皆在蘇州常熟縣西海虞山上, 蓋二子本吳人也.

61 集解馬融曰:「艾, 治也.」

62 集解馬融曰:「原, 臣名也. 命原以禹、湯之道我所修也.」

63 集解孔安國曰:「地名.」皇甫謐曰:「或云河南敖倉是也.」索隱隞亦作「囂」, 並音敖字. 正義括地志云:「滎陽故城在鄭州滎澤縣西南十七里, 殷時敖地也.」

64 集解孔安國曰:「地名, 在河北.」正義括地志云:「故殷城在相州內黃縣東南十三里, 卽河亶甲所築都之, 故名殷城也.」

65 索隱邢音耿. 近代本亦作「耿」. 今河東皮氏縣有耿鄕. 正義括地志云:「絳州龍門縣東南十二里耿城, 故耿國也.」

66 索隱蓋太史公知舊有仲丁書, 今已遺闕不具也.

67 索隱系本作「開甲」也.

68 集解孔安國曰:「自湯至盤庚凡五遷都.」正義自湯南亳遷西亳, 仲丁遷隞, 河亶甲居相, 祖乙居耿, 盤庚渡河, 南居西亳, 是五遷也.

69 集解孔安國曰:「胥, 相也. 民不欲徙, 皆咨嗟憂愁, 相與怨其上也.」

70 集解鄭玄曰:「治於亳之殷地, 商家自此徙, 而改號曰殷亳.」皇甫謐曰:「今偃師是也.」

71 索隱尙書「盤庚將治亳, 殷民咨胥怨, 作盤庚」, 此以盤庚崩, 弟小辛立, 百姓思之, 乃作盤庚, 由不見古文也.

72 集解鄭玄曰:「冢宰, 天官卿貳王事者.」

73 集解徐廣曰:「尸子云傅巖在北海之洲.」索隱舊本作「險」, 亦作「巖」也. 正義[括]地(理)志云:「傅險卽傅說版築之處, 所隱之處窟名聖人窟, 在今陝州河北縣北七里, 卽虞國虢國之界. 又有傅說祠. 注水經云沙澗水北出虞山, 東南逕傅巖, 歷傅說隱室前, 俗名聖人窟.」

74 集解孔安國曰:「傅氏之巖在虞虢之界, 通道所經, 有澗水壞道, 常使胥靡刑人築護此道. 說賢而隱, 代胥靡築之, 以供食也.」

75 正義音構. 呴, 雉鳴也. 詩云:「雉之朝呴.」

76 集解孔安國曰:「賢臣名.」

77 集解孔安國曰:「言天視下民以義爲常也.」

78 集解孔安國曰:「不順德, 言無義也. 不服罪, 不改修也. 天以信命正其德, 謂其有永有不永.」索隱附, 依尙書音孚.

79 集解孔安國曰:「王者主民, 當敬民事. 民事無非天所嗣常也. 祭祀有常, 不當特豐於近也.」索隱祭祀有常, 無爲豐殺之禮於是以棄常道.

80 集解孔安國曰:「祭之明日又祭, 殷曰肜, 周曰繹.」

81 索隱國語云「帝甲亂之, 七代而隕」是也.

82 索隱漢書古今人表及帝王代紀皆作「馮辛」.

83 索隱偶音寓. 亦如字. 正義偶, 五苟反. 偶, 對也. 以土木爲人, 對象於人形也.

84 正義爲, 于僞反. 行, 胡孟反.

85 索隱微, 國號. 爵爲子. 啓, 名也. 孔子家語云「微」或作「魏」, 讀從微音. 鄒本亦然也.

86 索隱此以啓與紂異母, 而鄭玄稱爲同母, 依呂氏春秋, 言母當生啓時猶未正立, 及生紂時始正爲妃, 故啓大而庶, 紂小而嫡.

87 集解謚法曰:「殘義損善曰紂.」

88 正義帝王世紀云「紂倒曳九牛, 撫梁易柱」也.

89 集解皇甫謐曰:「有蘇氏美女.」索隱國語有蘇氏女, 妲字己姓也.

90 集解如淳曰:「新序云鹿臺, 其大三里, 高千尺.」瓚曰:「鹿臺, 臺名, 今在朝歌城中.」正義括地志云:「鹿臺在衛州縣西南三十二里.」

91 集解服虔曰:「鉅橋, 倉名. 許愼曰鉅鹿水之大橋也, 有漕粟也.」索隱鄒誕生云:「鉅, 大;橋, 器名也. 紂厚賦稅, 故因器而大其名.」

92 集解爾雅曰:「迆邐, 沙丘也.」地理志曰在鉅鹿東北七十里. 正義括地志云:「沙丘臺在邢州平鄕東北二十里. 竹書紀年自盤庚徙殷至紂之滅二百五十三年, 更不徙都, 紂時稍大其邑, 南距朝歌, 北據邯鄲及沙丘, 皆爲離宮別館.」

93 集解徐廣曰:「■, 一作『聚』.」

94 正義括地志云:「酒池在衛州衛縣西二十三里. 太公六韜云紂爲酒池, 迴船糟丘而牛飮者三千餘人爲輩.」

95 正義縣, 戶眠反.

96 正義胡瓦反.

97 集解列女傳曰:「膏銅柱, 下加之炭, 令有罪者行焉, 輒墮炭中, 妲己笑, 名曰炮格之刑.」索隱鄒誕生云「格, 一音閣」. 又云「見蟻布銅斗, 足廢而死, 於是爲銅格, 炊炭其下, 使罪人步其上」, 與列女傳少異.

98 集解徐廣曰:「一作『鬼侯』. 鄴縣有九侯城.」索隱九亦依字讀, 鄒誕生音仇也. 正義括地志云「相州滏陽縣西南五十里有九侯城, 亦名鬼侯城, 蓋殷時九侯城也.」

99 集解徐廣曰:「一作『邘』, 音于. 野王縣有邘城.」

100 集解徐廣曰:「一云『無不憙淫』.」

101 集解地理志曰河內湯陰有羑里城, 西伯所拘處. 韋昭曰「音酉」. 正義牖, 一作「羑」, 音酉. 羑城在相州湯陰縣北九里, 紂囚西伯城也. 帝王世紀云. 「囚文王, 文王之長子曰伯邑考質於殷, 爲紂御, 紂烹爲羹, 賜文王, 曰『聖人當不食其子羹』. 文王食之. 紂曰『誰謂西伯聖者? 食其子羹尙不知也』.」

102 正義洛水一名漆沮水, 在同州洛西之地, 謂洛西之丹、坊等州也.

103 正義費音扶味反. 中音仲. 費, 姓;仲, 名也.

104 索隱秦之祖蜚廉子.

105 集解徐廣曰:「飢, 一作『■』, 又作『耆』.」

106 集解孔安國曰:「祖己後, 賢臣也.」

107 集解孔安國曰:「咎, 惡也.」

108 集解徐廣曰:「元, 一作『卜』.」

109 集解馬融曰:「元龜, 大龜也, 長尺二寸.」孔安國曰:「至人以人事觀殷, 大龜以神靈考之, 皆無知吉者.」

110 集解孔安國曰:「相, 助也.」

111 集解鄭玄曰:「王暴虐於民, 使不得安食, 逆亂陰陽, 不度天性, 傲很明德, 不修敎法者.」

112 正義括地志云;「比干見微子去, 箕子狂, 乃歎曰:『主過不諫, 非忠也. 畏死不言, 非勇也. 過則諫, 不用則死, 忠之至也.』進諫不去者三日. 紂問:『何以自持?』比干曰:『修善行仁, 以義自持.』紂怒, 曰:『吾聞聖人心有七竅, 信諸?』遂殺比干, 刳視其心也.」

113 集解鄭玄曰:「牧野, 紂南郊地名也.」正義括地志云:「今衛州城卽殷牧野之地, 周武王伐紂築也.」

114 集解徐廣曰:「鹿, 一作『廩』.」

115 正義周書云:「紂取天智玉琰五, 環身以自焚.」

116 索隱皇甫謐云「商容與殷人觀周軍之入」, 則以爲人名. 鄭玄云:「商家典樂之官, 知禮容, 所以禮署稱容臺.」

117 集解譙周曰:「殷凡三十一世, 六百餘年.」汲冢紀年曰:「湯滅夏以至于受二十九王, 用歲四百九十六年也.」

118 索隱按:夏、殷天子亦皆稱帝, 代以德薄不及五帝, 始貶帝號, 號之爲王, 故本紀皆帝, 而後總曰「三王」也.

119 正義卽武庚祿父也.

120 索隱按:系本子姓無稚氏.

121 索隱系本作「髦氏」, 又有時氏、蕭氏、黎氏. 然北殷氏蓋秦寧公所伐毫王, 湯之後也.

122 索隱論語孔子曰「乘殷之輅」, 禮記曰「殷人尙白」, 太史公爲贊, 不取成文, 遂作此語, 亦疏略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