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 卷七. 項羽本紀 Ⅰ
史記 卷七. 項羽本紀 Ⅰ
項籍者, 下相人也,1) 字羽.2) 初起時, 年二十四. 其季父項梁,3) 梁父卽楚將項燕,4) 爲秦將王翦所戮者也.5) 項氏世世爲楚將, 封於項,6) 故姓項氏.
항적(項籍)은 하상(下相) 사람으로 자는 우(羽)라고 하며, 처음에 군대를 일으켰을 때 나이가 24세였다. 그의 계부(季父)는 항량(項梁)이며 항량의 부친은 초(楚)의 장수 항연(項燕)으로 진(秦)의 장수 왕전(王翦)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이다. 항씨는 대대로 초의 장수로서 항(項)의 제후로 봉해졌으므로 성을 항씨로 했다.
項籍少時, 學書不成, 去學劍, 又不成. 項梁怒之. 籍曰:「書足以記名姓而已. 劍一人敵, 不足學, 學萬人敵.」於是項梁乃敎籍兵法, 籍大喜, 略知其意, 又不肯竟學. 項梁嘗有櫟陽逮,7) 乃請蘄8)獄掾曹咎書抵櫟陽獄掾司馬欣, 以故事得已.9) 項梁殺人, 與籍避仇於吳中. 吳中賢士大夫皆出項梁下. 每吳中有大繇役及喪, 項梁常爲主辦, 陰以兵法部勒賓客及子弟, 以是知其能. 秦始皇帝游會稽, 渡浙江,10) 梁與籍俱觀. 籍曰:「彼可取而代也.」梁掩其口, 曰:「毋妄言, 族矣!」梁以此奇籍. 籍長八尺餘, 力能扛鼎,11) 才氣過人, 雖吳中子弟皆已憚籍矣.
항적은 어렸을 때 글을 배웠으나 다 마치지 못한 채 포기하고는 검술을 배웠는데 이 또한 다 마치지 못했다. 항량이 노하니 항적은 말하기를 “글은 성명을 기록하는 것으로 족할 따름이며, 검은 한 사람만을 대적할 뿐으로 배울 만하지 못하니, 만인을 대적하는 일을 배우겠습니다.”라 했다. 이에 항량은 항적에게 병법을 가르치니 항적은 크게 기뻐했으되 대략 그 뜻만을 알고는 또한 끝까지 배우고자 하지는 않았다.
항량은 일찍이 역양현(櫟陽縣)에 갇힌 적이 있었는데, 기현(蘄縣)의 옥연(獄掾) 조구(曹咎)로 하여금 역양의 옥연인 사마흔(司馬欣)에게 서신을 보내도록 부탁함으로써 일을 무사히 마무리할 수가 있었다. 항량은 사람을 죽이고 항적과 더불어 원수를 피해 오중(吳中)으로 갔는데, 오중의 현명한 인재들은 모두 항량의 밑에서 나왔다. 오중에 요역(繇役)과 상사(喪事)가 있을 때마다 항량은 항상 주관해 일 처리를 했는데, 은밀히 병법을 사용해서 빈객과 젊은이들을 배치하고 지휘해 이로써 그들의 재능을 알아두었다.
진시황이 회계산(會稽山)을 유람하고 절강(浙江)을 건너는데, 항량과 항적이 함께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항적이 말하기를 “저 사람의 자리를 내가 대신할 수 있으리라”라고 하니, 항량이 그 입을 막으며 말하기를 “경망스러운 말을 하지 말라. 삼족(三族)이 멸하게 된다!”라 했다. 그러나 항량은 이 일로 해 항적을 범상치 않은 재목이라고 여겼다. 항적은 키가 8척이 넘고 힘은 커다란 정(鼎)을 들어 올릴 만했으며 재기(才氣)가 범상치 않아 오중의 자제들조차도 이미 모두 항적을 두려워했다.
秦二世元年七月, 陳涉等起大澤中.12) 其九月, 會稽守13)通謂梁曰:14)「江西皆反, 此亦天亡秦之時也. 吾聞先卽制人, 後則爲人所制.15) 吾欲發兵, 使公及桓楚將.」16)是時桓楚亡在澤中. 梁曰:「桓楚亡, 人莫知其處, 獨籍知之耳.」梁乃出, 誡籍持劍居外待. 梁復入, 與守坐, 曰:「請召籍, 使受命召桓楚.」守曰:「諾.」梁召籍入. 須臾, 梁眴籍曰:「可行矣!」於是籍遂拔劍斬守頭. 項梁持守頭, 佩其印綬. 門下大驚, 擾亂, 籍所擊殺數十百人.17) 一府中皆慴伏,18) 莫敢起. 梁乃召故所知豪吏, 諭以所爲起大事, 遂擧吳中兵. 使人收下縣, 得精兵八千人. 梁部署吳中豪傑爲校尉、候、司馬. 有一人不得用, 自言於梁. 梁曰:「前時某喪使公主某事, 不能辦, 以此不任用公.」衆乃皆伏. 於是梁爲會稽守, 籍爲裨將, 徇下縣.19)
진 2세(秦二世) 원년 7월, 진섭(陳涉) 등이 대택(大澤)에서 군대를 일으켰다. 그해 9월 회계(會稽)의 군수(郡守) 은통(殷通)이 항량에게 이르기를 “강서(江西) 지역은 모두가 반란을 꾀했으니, 이는 또한 하늘이 진(秦)을 멸망시키려는 때가 온 것이라고 할 수 있소. 내가 들으니 먼저 하면 남을 제압하고 나중에 하면 남에게 제압당한다고 하니, 나는 군대를 일으켜 그대와 환초(桓楚)를 장수로 삼고자 하노라.” 했다.
이때에 환초는 택중(澤中)에 도망해 있던 터라 항량은 말하기를 “환초는 도망해 그가 있는 곳을 아는 자가 없는데, 오직 항적만 이 그곳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하고는 즉시 밖으로 나와 항적에게 검을 가지고 처소 밖에서 기다리도록 분부했다. 그리고 항량은 다시 들어가 군수와 대좌해 말하기를 “청컨대 항적을 부르시어 환초를 부르라는 명을 받들도록 하십시오.”라 했다. 군수가 “좋소!”라고 하니 항량이 항적을 불러들였다. 잠시 후, 항량이 항적에게 눈짓을 하며 “때가 되었다!”라고 말하자, 항적은 마침내 검을 뽑아 군수의 머리를 베었다.
이에 항량이 군수의 머리를 들고 그 인수(印綬)를 차니, 군수의 문하(門下)들은 크게 놀라 어지러이 우왕좌왕하는데, 항적이 쳐 죽인 사람만 해도 거의 1백 명에 가까웠다. 이리하여 온 부중(府中)이 온통 놀라 땅에 엎드리고는 감히 일어나지를 못했다. 항량은 이에 이전에 알던 세력 있는 관리들을 불러서 대사를 일으킨 바를 설명하고는 마침내 오중에서 군대를 일으켰다. 그리고는 수하(手下)를 보내 관할 현을 거두고 정예군 8천 명을 얻었다.
항량은 오중의 호걸들을 각각 교위(校尉), 후(侯), 사마(司馬) 등의 직위에 임명했는데, 그때 등용되지 못한 사람 하나가 그 이유를 항량에게 물었다. 항량은 말하기를 “이전에 그대에게 어떤 사람의 상사(喪事)에 일을 맡겨보았는데, 그때 일을 잘 처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대를 임용하지 않았노라.”라고 하니 모든 사람들이 이에 탄복했다. 이때 항량은 회계군의 군수가 되고 항적은 부장(副將)이 되어 관할 현들을 다스렸다.
廣陵人召平於是爲陳王徇廣陵,20) 未能下.21) 聞陳王敗走, 秦兵又且至, 乃渡江矯陳王命,22) 拜梁爲楚王上柱國.23) 曰:「江東已定, 急引兵西擊秦.」項梁乃以八千人渡江而西. 聞陳嬰已下東陽,24) 使使欲與連和俱西. 陳嬰者, 故東陽令史,25) 居縣中, 素信謹, 稱爲長者. 東陽少年殺其令, 相聚數千人, 欲置長, 無適用, 乃請陳嬰. 嬰謝不能, 遂彊立嬰爲長, 縣中從者得二萬人. 少年欲立嬰便爲王, 異軍蒼頭特起.26) 陳嬰母謂嬰曰:「自我爲汝家婦, 未嘗聞汝先古之有貴者. 今暴得大名, 不祥. 不如有所屬, 事成猶得封侯, 事敗易以亡, 非世所指名也.」27)嬰乃不敢爲王. 謂其軍吏曰:「項氏世世將家, 有名於楚. 今欲擧大事, 將非其人, 不可. 我倚名族, 亡秦必矣.」於是衆從其言, 以兵屬項梁. 項梁渡淮, 黥布、蒲將軍28)亦以兵屬焉. 凡六七萬人, 軍不邳.29)
이때에 광릉(廣陵) 사람 소평(召平)이 진왕(陳王) 진섭을 위해 광릉을 빼앗으려고 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다가 진왕이 이미 패주하고 또한 진군(秦軍)이 장차 자기를 공격해올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이에 강을 건너 진왕의 명(命)을 사칭해 항량을 초왕(楚王) 상주국(上柱國)으로 봉했다. 그리고는 말하기를 “강동(江東)은 이미 평정되었으니 급히 군대를 이끌고 강서(江西)로 가서 진(秦)나라를 쳐라.”라 했다. 항량은 이에 8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강을 건너 서쪽으로 갔다. 그런데 진영(陳嬰)이 이미 동양(東陽)을 함락시켰다는 소식을 듣고는 사신을 보내, 연합하여 함께 서쪽으로 진격하려 했다.
진영은 본래 동양의 영사(令史)로 현(縣)에 살았는데, 평소에 신의 있고 신중해 장자(長者)로 칭해졌다. 동양현의 젊은이들이 그 현령을 죽이고 수천 명이 모여서 우두머리를 모시고자 했으나 마땅한 사람이 없자 이에 진영에게 청했다. 진영은 사양했으나 사람들은 결국 억지로 진영을 우두머리로 삼으니, 현에서 그를 따르는 자가 2만 명이 되었다. 그런데 젊은이들은 진영을 왕으로 세우고자 해 따로 푸른 천의 모자를 써서 창두군(蒼頭軍)이라고 명명해 다른 군대와 구별하고 특별히 궐기한 뜻을 나타내었다.
진영의 모친이 진영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희 가문으로 시집 온 이래 이제껏 너의 조상 중에 귀하게 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네가 왕명(王名)을 얻는다는 것은 상서로운 일이 못 된다. 차라리 남의 밑에 있는 것이 낫다. 그러다가 거사가 성공하면 후(侯)에 봉해질 수 있고, 또 거사가 실패했을 경우라도 쉽게 화를 면할 수 있으니, 이는 네가 세상 사람들이 지목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영은 이에 감히 왕이 되지 못하고 그 군관(軍官)에게 말하기를 “항씨는 대대로 장수의 집안이며 초 나라에서도 이름이 높소. 그러니 지금 대사를 일으키고자 함에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될 것이오. 우리들이 명문대족에 의탁하면 진(秦)의 멸망은 틀림없을 것이오.”라 했다.
이리하여 여러 군사들이 그의 말을 따라서 자신의 병졸들을 데리고 항량의 휘하에 들어갔다. 항량이 회수(淮水)를 건너자 경포(黥布), 포장군(蒲將軍) 또한 군대를 이끌고 휘하에 드니, 무릇 6만-7만의 군대가 하비(下邳)에 진을 쳤다.
當是時, 秦嘉30)已立景駒爲楚王,31) 軍彭城東,32) 欲距項梁. 項梁謂軍吏曰:「陳王先首事, 戰不利, 未聞所在. 今秦嘉倍陳王而立景駒, 逆無道.」乃進兵擊秦嘉. 秦嘉軍敗走, 追之至胡陵.33) 嘉還戰一日, 嘉死, 軍降. 景駒走死梁地. 項梁已幷秦嘉軍, 軍胡陵, 將引軍而西. 章邯軍至栗,34) 項梁使別將朱雞石、餘樊君與戰. 餘樊君死. 朱雞石軍敗, 亡走胡陵. 項梁乃引兵入薛,35) 誅雞石. 項梁前使項羽別攻襄城,36) 襄城堅守不下. 已拔, 皆阬之. 還報項梁. 項梁聞陳王定死, 召諸別將會薛計事. 此時沛公亦起沛, 往焉.
이때 진가(秦嘉)가 이미 경구(景駒)를 초왕으로 세우고, 팽성(彭城) 동쪽에 진을 치고는 항량의 군대를 막으려고 했다. 항량이 군관에게 말하기를 “진왕(陳王)이 제일 먼저 봉기했으나 전세는 불리하게 되고 지금은 행방조차 알 길이 없다. 그런데 지금 진가가 진왕을 배반하고 경구를 왕으로 세웠으니 이는 대역무도한 일이다.”라고 하고는 즉시 진군해 진가를 공격했다. 이에 진가의 군대가 패주하자 항량은 그들을 호릉(胡陵)까지 추격했다. 반격하던 진가가 하루 만에 전사하자 그의 군대는 투항했고, 경구는 양(梁) 지역으로 달아나서 그곳에서 죽었다.
항량은 진가의 군대를 병합하고 나서 호릉에 진을 치고는 장차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진격하려고 했다. 장한(章邯)의 군대가 율현(栗縣)에 이르니 항량은 별장(別將) 주계석(朱鷄石)과 여번군(餘樊君)으로 하여금 맞서 싸우도록 했으나 여번군은 전사하고 주계석의 군대는 패해 호릉으로 도주했다. 이에 항량은 군사를 이끌고 설현(薛縣)에 진입해 주계석을 죽였다. 그보다 먼저 항량은 항우에게 별도로 양성(襄城)을 공격하게 했는데, 양성은 수비가 굳건해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그러나 항우는 결국 성을 함락시키고 나서, 모두 산 채로 땅에 묻어버리고 돌아와서 항량에게 보고했다. 항량은 진왕(陳王)이 확실히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여러 별장들을 설현에 불러 모아 대사를 의논했다. 이때 패(沛)에서 군사를 일으킨 패공(沛公) 역시 참석했다.
居鄛人范增,37) 年七十, 素居家, 好奇計, 往說項梁曰:「陳勝敗固當.38) 夫秦滅六國, 楚最無罪. 自懷王入秦不反, 楚人憐之至今, 故楚南公曰39)『楚雖三戶, 亡秦必楚』也.40) 今陳勝首事, 不立楚後而自立, 其勢不長. 今君起江東, 楚蜂午之將41)皆爭附君者, 以君世世楚將, 爲能復立楚之後也.」42)於是項梁然其言, 乃求楚懷王孫心民閒, 爲人牧羊, 立以爲楚懷王,43) 從民所望也.44) 陳嬰爲楚上柱國, 封五縣, 與懷王都盱台.45) 項梁自號爲武信君.
거소(居鄛) 사람 범증(范增)은 나이 70으로, 평소 출사(出仕)하지 않고 자신의 집에서 지내며 기묘한 계책을 생각하기를 좋아했는데, 그가 항량을 찾아가서 유세(遊說)하기를, “진승(陳勝)의 패배는 본래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진나라가 육국(六國)을 멸했는데, 그중 초 나라가 가장 무고하게 당했습니다. 회왕(懷王)이 진나라에 들어가서 돌아오지 못하신 이후 초 나라 사람들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회왕을 가련히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초 남공(楚南公)이 말하기를 ‘초 나라에 설사 세 집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할지라도 진을 멸망시킬 나라는 반드시 초 나라이리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진승이 제일 먼저 봉기해 초 나라의 후예를 세우지 아니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으니 그 세력이 오래가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지금 그대께서 강동(江東)에서 군사를 일으키시니 벌떼같이 일어난 초의 장수들이 모두 다투어 그대에게 귀의하는 것은 그대가 대대로 초 나라의 장수로서, 다시 초 나라의 후손을 왕으로 세울 수 있으리라 여겼기 때문입니다.”라 했다.
그러자 항량은 그 말을 그럴 듯하다고 여기고는 민간(民間)에서 남의 양치기 노릇을 하던 회왕의 손자 웅심(熊心)을 찾아서, 왕으로 세우고 초 회왕(楚懷王)이라고 하니, 이는 백성들이 바라던 바를 따른 것이었다. 진영(陳嬰)은 초 나라의 상주국(上柱國)이 되어 5 현을 식읍으로 받고 회왕과 더불어 우이(盱台)에 도읍했으며, 항량은 스스로 무신군(武信君)이라 했다.
居數月, 引兵攻亢父,46) 與齊田榮、司馬龍且47)軍救東阿,48) 大破秦軍於東阿. 田榮卽引兵歸, 逐其王仮. 仮亡走楚. 仮相田角亡走趙. 角弟田閒故齊將, 居趙不敢歸. 田榮立田儋子市爲齊王. 項梁已破東阿下軍, 遂追秦軍. 數使使趣49)齊兵, 欲與俱西. 田榮曰:「楚殺田仮, 趙殺田角、田閒, 乃發兵.」項梁曰:「田仮爲與國之王,50) 窮來從我, 不忍殺之.」趙亦不殺田角、田閒以市於齊.51) 齊遂不肯發兵助楚. 項梁使沛公及項羽別攻城陽,52) 屠之. 西破秦軍濮陽東,53) 秦兵收入濮陽. 沛公、項羽乃攻定陶.54) 定陶未下, 去, 西略地至雝丘,55) 大破秦軍, 斬李由.56) 還攻外黃,57) 外黃未下.
몇 달 후, 항량은 군사를 이끌고 항보(亢父)를 공격하고 제(齊)나라의 전영(田榮), 사마용저(司馬龍且)의 군대와 함께 동아(東阿)를 구원해, 동아에서 진군(秦軍)을 대파했다. 전영은 즉시 군대를 이끌고 돌아가서 제나라 왕인 전가(田假)를 쫓아내니, 전가는 초 나라로 달아났고 전가의 상국(相國)인 전각(田角)은 조(趙)나라로 도망했으며, 전각의 동생 전간(田閒)은 원래 제나라의 장수였으되 조나라에 머물며 감히 돌아가지 못했다. 전영은 전담(田儋)의 아들 전불(田市)을 제나라 왕으로 세웠다.
항량이 동아 일대에 진을 치고 있던 진군(秦軍)을 무찌르고 나서, 퇴주하는 진군을 추격하며 제군(齊軍)에 수차례 사자를 보내 함께 서쪽으로 진격할 것을 재촉했다. 이에 전영이 “초 나라가 전가를 죽이고, 조나라가 전각과 전간을 죽인다면 군대를 보내겠다.”라고 했다. 항량은 “전가는 동맹국의 왕이었다. 이제 신세가 곤궁하게 되어 내게 몸을 의탁했으니, 차마 죽이지 못하겠다.”라고 했고, 조나라 역시 전각과 전간을 죽이는 것으로써 제나라와 흥정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러자 제나라는 끝내 군사를 보내 초 나라를 도우려 하지 않았다.
항량은 패공과 항우로 하여금 별도로 성양(城陽)을 공격해 전멸시키고, 서쪽으로 진격해 복양(濮陽)의 동쪽에서 진군을 격파하니 진군은 복양으로 철수했다. 이에 패공과 항우가 정도(定陶)를 공격했으나 정도가 함락되지 않자 그곳을 버리고 서쪽을 공격해 옹구(雍丘)에 이르러 진군을 대파하고 이유(李由)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는 회군(回軍)해 외황(外黃)을 공격했으나 외황은 함락되지 않았다.
項梁起東阿, 西, (北)[比]至定陶, 再破秦軍, 項羽等又斬李由, 益輕秦, 有驕色. 宋義乃諫項梁曰:「戰勝而將驕卒惰者敗. 今卒少惰矣, 秦兵日益, 臣爲君畏之.」項梁弗聽. 乃使宋義使於齊. 道遇齊使者高陵君顯,58) 曰:「公將見武信君乎?」曰:「然.」曰:「臣論武信君軍必敗. 公徐行卽免死, 疾行則及禍.」秦果悉起兵益章邯, 擊楚軍, 大破之定陶, 項梁死. 沛公、項羽去外黃攻陳留, 陳留堅守不能下. 沛公、項羽相與謀曰:「今項梁軍破, 士卒恐.」乃與呂臣軍俱引兵而東. 呂臣軍彭城東, 項羽軍彭城西, 沛公軍碭.59)
항량은 동아에서 출발해 서쪽으로 정도에 이를 때까지 두 차례나 진군을 무찌른 데다 항우 등이 이유의 목을 베자, 더욱 진나라를 경시하며 교만한 기색을 드러내었다. 이에 송의(宋義)가 항량에게 간(諫)하기를, “싸움에서 이겼다고 장수가 교만해지고 병졸들이 나태해진다면 패하고 말 것입니다. 지금 병졸들이 다소 나태해지고 있는데 진군은 날로 증가하고 있으니 신은 그것이 두렵습니다.” 라고 했으나 항량은 듣지 않았다.
그리고는 송의를 제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는데, 도중에 제나라의 사신인 고릉군(高陵君) 현(顯)을 만났다. 송의가 “공께서는 무신군을 만나시려는 것입니까?”라고 물으니 그는 “그렇소이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송의가 “신이 생각하건대 무신군의 군사는 반드시 패할 것이니, 공께서 천천히 가신다면 죽음을 면할 수 있을 것이나 급히 가신다면 화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과연 진나라는 모든 군사를 일으켜서 장한을 지원해 초군을 공격, 정도에서 크게 무찌르니 항량은 전사했고 패공과 항우는 외황을 버리고, 진류(陳留)를 공격했으나 진류의 수비가 견고해 함락시킬 수 없었다.패공과 항우가 서로 모의하기를 “지금 항량의 군대가 대파되어 병사들이 두려워하고 있다.”라고 하고는, 여신(呂臣)의 군대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진격해, 여신은 팽성 동쪽에 진을 치고, 항우는 팽성 서쪽, 패공은 탕(碭)에 진을 쳤다.
章邯已破項梁軍, 則以爲楚地兵不足憂, 乃渡河擊趙, 大破之. 當此時, 趙歇爲王, 陳餘爲將, 張耳爲相, 皆走入鉅鹿城. 章邯令王離、涉閒圍鉅鹿,60) 章邯軍其南, 築甬道而輸之粟.61) 陳餘爲將, 將卒數萬人而軍鉅鹿之北, 此所謂河北之軍也.
장한이 항량의 군사를 무찌른 후, 초 나라의 군대는 근심할 것이 없다고 여기고는 황하를 건너서 조나라를 공격해 크게 무찔렀다. 이때, 조나라는 조헐(趙歇)이 왕이었고, 진여(陳餘)가 장수, 장이(張耳)가 재상으로 있었는데, 모두 거록(巨鹿)으로 도망쳐버렸다. 장한은 왕리(王離)와 섭간(涉閒)으로 하여금 거록을 포위하게 하고 자신은 그 남쪽에 진을 치고는 용도(甬道)를 만들어 군량을 조달했다. 진여는 조나라의 장수로서 군사 수만 명을 거느리고 거록 북쪽에 진을 치고 있었으니, 이것이 소위 ‘하북군(河北軍)’이었다.
楚兵已破於定陶, 懷王恐, 從盱台之彭城, 幷項羽、呂臣軍自將之. 以呂臣爲司徒, 以其父呂靑爲令尹.62) 以沛公爲碭郡長,63) 封爲武安侯, 將碭郡兵.
초군이 정도에서 크게 패한 후, 회왕은 두려워해 우이를 떠나 팽성으로 가서는 항우와 여신의 군대를 병합해 친히 통솔했다. 그리고 여신을 사도(司徒)로 삼고, 그의 부친 여청(呂靑)을 영윤(令尹)으로 삼았으며, 패공을 탕군의 군장(郡長)으로 삼고 무안후(武安侯)에 봉해 탕군의 군대를 거느리게 했다.
初, 宋義所遇齊使者高陵君顯在楚軍, 見楚王曰:「宋義論武信君之軍必敗, 居數日, 軍果敗. 兵未戰而先見敗徵, 此可謂知兵矣.」王召宋義與計事而大說之, 因置以爲上將軍, 項羽爲魯公, 爲次將, 范增爲末將, 救趙. 諸別將皆屬宋義, 號爲卿64)子冠軍.65) 行至安陽, 留四十六日不進.66) 項羽曰:「吾聞秦軍圍趙王鉅鹿, 疾引兵渡河, 楚擊其外, 趙應其內, 破秦軍必矣.」宋義曰:「不然. 夫搏牛之虻不可以破蟣蝨.67) 今秦攻趙, 戰勝則兵罷, 我承其敝;不勝, 則我引兵鼓行而西, 必擧秦矣. 故不如先鬥秦趙. 夫被堅執銳, 義不如公;坐而運策, 公不如義.」因下令軍中曰:「猛如虎, 很如羊,68) 貪如狼, 彊不可使者, 皆斬之.」乃遣其子宋襄相齊, 身送之至無鹽,69) 飮酒高會.70) 天寒大雨, 士卒凍飢. 項羽曰:「將戮力而攻秦, 久留不行. 今歲饑民貧, 士卒食芋菽,71) 軍無見糧,72) 乃飮酒高會, 不引兵渡河因趙食, 與趙幷力攻秦, 乃曰『承其敝』. 夫以秦之彊, 攻新造之趙, 其勢必擧趙. 趙擧而秦彊, 何敝之承! 且國兵新破, 王坐不安席, 埽境內而專屬於將軍, 國家安危, 在此一擧. 今不恤士卒而徇其私,73) 非社稷之臣.」項羽晨朝上將軍宋義, 卽其帳中斬宋義頭, 出令軍中曰:「宋義與齊謀反楚, 楚王陰令羽誅之.」當是時, 諸將皆慴服, 莫敢枝梧.74) 皆曰:「首立楚者, 將軍家也. 今將軍誅亂.」乃相與共立羽爲仮上將軍.75) 使人追宋義子, 及之齊, 殺之. 使桓楚報命於懷王. 懷王因使項羽爲上將軍,76) 當陽君、蒲將軍皆屬項羽.
일찍이 송의가 만난 제나라의 사신 고릉군 현이, 마침 초 나라 군중에 있었는데, 초왕을 만나서 이렇게 말했다. “송의는 무신군의 군사가 반드시 패할 것이라고 말했는데, 며칠 후 무신군의 군대가 과연 패했습니다. 군대가 아직 싸우기도 전에 미리 그 패배의 조짐을 알았으니 이는 병법을 안다고 말할 만합니다.”
왕이 송의를 불러 더불어 대사를 의논하고는 크게 기뻐하며 그를 상장군(上將軍)으로 삼았다. 그리고 항우는 노공(魯公)에 봉해져서 차장(次將)이 되었고 범증은 말장(末將)이 되어서 조나라를 구원하기로 했다. 여러 별장들이 모두 송의의 휘하에 속하게 되니, 송의는 경자관군(卿子冠軍)이라고 불렸다. 그런데 군대가 안양(安陽)에 이르러 46일 동안을 머물며 진격하지 않으니, 항우가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진군이 조왕(趙王)을 거록에서 포위하고 있다고 하니, 급히 군사를 이끌고 강을 건너서 초 나라는 그 바깥을 치고 조나라는 안에서 호응한다면 진군을 반드시 무찌를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자 송의가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 않소. 대저 소를 물어뜯는 등에가 이(蝨)를 죽일 수는 없는 것이오. 지금 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하는데, 전쟁에서 승리를 한다 해도 병졸들은 피로해질 것이니 우리는 그 피곤한 틈을 이용할 것이오. 진이 승리하지 못할 경우 우리가 군사를 이끌고 북을 치며 전진해 서쪽을 친다면, 반드시 진나라를 함락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진나라와 초 나라로 하여금 싸우도록 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갑옷과 무기로 무장하고 실전을 하는 일에서는 내가 그대보다는 못하지만, 앉아서 책략을 부리는 일에서는 그대가 나보다 못할 것입니다.”
이어 군중에 영을 내리기를 “사납기가 호랑이 같거나 제멋대로 하기가 양(羊) 같으며, 탐욕스럽기가 승냥이 같거나 고집이 세어 부릴 수 없는 자는 모두 목을 벨 것이다.”라 했다. 그리고는 그의 아들 송양(宋襄)을 제나라에 보내어 제왕을 돕게 했다. 친히 무염(無鹽)까지 전송하고는 성대한 주연을 베풀었다. 날은 춥고 비가 거세어 사졸들은 추위와 허기에 지치게 되었다.
그러자 항우가 이렇게 말했다. “장차 죽을힘을 다해 진나라를 공격해야 하거늘 오랫동안 머물며 진격하지 아니하더니, 지금에는 흉년이 들어서 백성들은 궁핍하고 사졸들은 토란과 콩으로 연명하며, 군영(軍營)에는 저장된 군량이 없는데도 성대한 연회를 벌여서 술이나 마시기만 할 뿐, 군사를 이끌고 강을 건너 조나라의 군량을 먹으며 조나라와 함께 힘을 합쳐서 진나라를 공격하지 아니하면서, 그저 말하기를 ‘그들이 지친 틈을 이용하리라’라고만 말한다. 대저 진나라의 강대함으로 지금 막 일어난 조나라를 공격하게 된다면, 그 형세는 조나라를 함락시킬 것이 당연한데, 조나라가 함락되고 진나라가 강해진 뒤에 무슨 지친 틈을 이용하겠다는 것인가? 또 우리 군사가 지금 막 패전한 터이라 왕께서 좌불안석하시어 온 나라의 병사를 통틀어 오로지 장군의 휘하에 속하게 하셨으니 국가의 안위는 오직 이 거사(擧事)에 달려 있다. 그런데도 지금 사졸을 돌보지 아니하고 그 사사로운 정만을 따르니 사직을 보존하려는 신하가 아니로다.”
그리하여 항우는 아침에 상장군 송의의 막사를 찾아가서 그 자리에서 송의의 머리를 베고 군중(軍中)에 영을 내리기를 “송의는 제나라와 더불어 초나라를 배반할 모의를 꾸미고 있었으므로, 초왕께서 은밀히 나에게 그를 주살하게 하셨다.”라 했다. 그러자 당시 여러 장수들은 모두 두려워서 복종하고 감히 저항하지 못하며 말하기를 “처음 초나라를 세운 것은 장군의 집안이시더니 지금 장군께서 난신을 주살하셨습니다.”라 했다. 이에 서로들 모두 항우를 임시 상장군으로 세우고, 사람을 보내 송의의 아들을 제나라까지 추격하게 해 그를 죽였다. 그리고는 환초(桓楚)를 보내어 회왕께 보고하게 하자, 회왕은 항우를 상장군으로 삼고 당양군(當陽君), 포장군(蒲將軍) 등을 모두 항우의 휘하에 소속시켰다.
項羽已殺卿子冠軍, 威震楚國, 名聞諸侯. 乃遣當陽君、蒲將軍將卒二萬渡河,77) 救鉅鹿. 戰少利, 陳餘復請兵. 項羽乃悉引兵渡河, 皆沈船, 破釜甑, 燒廬舍, 持三日糧, 以示士卒必死, 無一還心. 於是至則圍王離, 與秦軍遇, 九戰, 絶其甬道, 大破之, 殺蘇角,78) 虜王離. 涉閒不降楚, 自燒殺. 當是時, 楚兵冠諸侯. 諸侯軍救鉅鹿下者十餘壁, 莫敢縱兵. 及楚擊秦, 諸將皆從壁上觀. 楚戰士無不一以當十, 楚兵呼聲動天, 諸侯軍無不人人惴恐.79) 於是已破秦軍, 項羽召見諸侯將, 入轅門,80) 無不膝行而前, 莫敢仰視. 項羽由是始爲諸侯上將軍, 諸侯皆屬焉.
항우가 경자관군 송의를 죽인 후, 그의 위엄이 온 초 나라를 진동시키고 명성은 제후들에게까지 전해졌다. 이에 당양군과 포장군으로 하여금 병사 2만을 이끌고 장하(漳河)를 건너서 거록을 구원하게 했으나 싸움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는데, 진여가 또 구원병을 요청했다. 이에 항우가 군사를 이끌고 장하를 건너 배를 모두 가라앉히고, 솥과 시루 등의 취사도구를 깨뜨리고 막사를 불사른 뒤 3일분의 군량만을 휴대함으로써 사졸들에게 필사적으로 싸울 것이며 추호도 살아 돌아올 마음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었다.
이리하여 거록에 도착하자마자 왕리(王離)를 포위하고 진의 군사와 수차례 접전해 그들의 용도(甬道)를 끊어서 크게 무찔렀으며, 소각(蘇角)을 죽이고 왕리를 포로로 했다. 섭간은 초나라에 투항하지 않고 분신자살했다. 이때 초군은 제후군(諸侯軍) 가운데 으뜸이었으니, 거록을 구하고자 달려온 제후군이 10여 진영이었으나 감히 함부로 군대를 움직이지 못하고, 초군이 진군을 공격할 때에도 여러 장수들은 모두 자신의 진영에서 관전만하고 있을 뿐이었다. 초 나라 군사는 전원이 다 한 명이 열 명을 대적할 정도로 용맹스러웠으며, 초군의 고함소리가 하늘을 진동시키니 제후군들은 모두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진군을 무찌르고 난 후, 항우가 제후군의 장수들을 불러 원문(轅門)에 들게 하자 모두 다 무릎걸음으로 나오며 감히 고개를 들어 쳐다보지 못했다. 이때부터 항우는 비로소 제후군의 상장군이 되니 제후들이 모두 그의 휘하에 소속되었다.
章邯軍棘原,81) 項羽軍漳南,82) 相持未戰. 秦軍數卻, 二世使人讓章邯. 章邯恐, 使長史欣請事. 至咸陽, 留司馬門83)三日, 趙高不見, 有不信之心. 長史欣恐, 還走其軍,84) 不敢出故道, 趙高果使人追之, 不及. 欣至軍, 報曰:「趙高用事於中, 下無可爲者. 今戰能勝, 高必疾妒吾功;戰不能勝, 不免於死. 願將軍孰計之.」陳餘亦遺章邯書曰:「白起爲秦將, 南征鄢郢, 北阬馬服,85) 攻城略地, 不可勝計, 而竟賜死. 蒙恬爲秦將, 北逐戎人, 開楡中地數千里,86) 竟斬陽周.87) 何者? 功多, 秦不能盡封, 因以法誅之. 今將軍爲秦將三歲矣, 所亡失以十萬數, 而諸侯並起滋益多. 彼趙高素諛日久, 今事急, 亦恐二世誅之, 故欲以法誅將軍以塞責, 使人更代將軍以脫其禍. 夫將軍居外久, 多內卻, 有功亦誅, 無功亦誅. 且天之亡秦, 無愚智皆知之. 今將軍內不能直諫, 外爲亡國將, 孤特獨立而欲常存, 豈不哀哉! 將軍何不還兵與諸侯爲從,88) 約共攻秦, 分王其地, 南面稱孤;此孰與身伏鈇質,89) 妻子爲僇乎?」章邯狐疑, 陰使候始成90)使項羽, 欲約. 約未成, 項羽使蒲將軍日夜引兵度三戶,91) 軍漳南, 與秦戰, 再破之. 項羽悉引兵擊秦軍汙水上,92) 大破之.
장한은 극원(棘原)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항우는 장하 남쪽에 주둔시켜 서로 대치한 채로 싸우지 않았다. 그런데 진군이 여러 차례 퇴각하자, 2세 황제는 사람을 보내어 장한을 꾸짖었다. 장한은 두려워서 장사(長史) 사마흔(司馬欣)을 보내 알현을 청하게 했다. 그가 함양(咸陽)에 이르러 사마문(司馬門)에 3일을 머물렀는데도 조고(趙高)는 만나주지 않으며 불신하는 마음을 품었다. 장사 사마흔은 두려워 자신의 부대로 돌아가면서도 감히 왔던 길로 가지 못했다. 과연 조고가 사람을 보내 그를 추격하게 했으나 미처 따라잡지는 못했다. 사마흔은 자신의 부대로 돌아와서 이렇게 보고했다.
“조고가 궁중 안에서 정권을 마음대로 하고 있었고 그 아래에는 제대로 일을 할 만한 자가 없습니다. 만일 지금 전쟁에서 이기면 조고는 반드시 우리의 공로를 시기할 것이며, 전쟁에 져도 죽음을 면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원하건대 장군께서는 심사숙고하시기 바랍니다.”
진여도 장한에게 서신을 보내어 이렇게 말했다. “백기(白起)는 진나라의 장수가 되어 남으로 언영(鄢郢)을 정벌하고, 북으로 마복(馬服)을 땅에 묻었으며, 성을 공격하고 땅을 빼앗은 것이 이루 다 셀 수 없이 많은데도 마침내는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또 몽염(蒙恬)은 진나라의 장수로서 북쪽으로 융인(戎人)을 쫓아내고, 유중(楡中) 지역 수천 리를 개척했으나 마침내는 양주(陽周)에서 참살당했으니, 이것은 어찌 된 까닭입니까? 공이 너무 많아서 진나라가 모두 봉록을 줄 수 없기 때문에 법을 구실로 그들을 죽인 것입니다.
지금 장군께서 진나라의 장수가 되신 지 3년이 되었는데 잃은 병력이 10만을 헤아리되 봉기하는 제후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저 조고는 평소 아첨만을 일삼은 지가 이미 오래되었는데 지금 일이 다급해지고 또 2세가 자신을 죽일까 두려워하기 때문에 법을 빌미로 장군을 주살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책망을 틀어막고, 사람을 보내어 장군을 대신하게 함으로써 그 화(禍)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입니다. 대저 장군께서 밖에서 머문 지가 오래되니 조정과의 틈이 많아져서 공이 있다고 해도 죽임을 당할 것이요, 공이 없다고 해도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또 하늘이 진나라를 멸망시키고자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자나 지혜로운 자를 막론하고 다 아는 일입니다.
지금 장군께서 안으로는 직간(直諫)할 수 없고, 또 밖으로는 망국의 장수로서 홀로 외로이 서서 오래도록 버티려고 하시니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장군께서는 어째서 병사를 돌리어 제후들과 연합하고 함께 진나라를 공격할 것을 맹약해 그 땅을 나누어가진 뒤 왕이 되려고 하지 않으십니까? 이렇게 하시는 것과, 자신의 몸이 부질(鈇質)에 엎드리게 되고 처자는 살육당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낫겠습니까?”
장한은 주저하며 항우에게 몰래 후시성(侯始成)을 보내어 협약하고자 했다. 협약이 아직 이루어지기 전, 항우가 포장군으로 하여금 밤낮으로 병사를 이끌고 삼호(三戶)를 건너서 장하 남쪽에 주둔하게 하고는 진나라와 싸움을 벌여서 다시 그들을 무찌르게 했다. 항우는 모든 병사를 이끌고 오수(汙水)에서 진군을 공격해 크게 무찔렀다.
章邯使人見項羽, 欲約. 項羽召軍吏謀曰:「糧少, 欲聽其約.」軍吏皆曰:「善.」項羽乃與期洹水南殷虛上.93) 已盟, 章邯見項羽而流涕, 爲言趙高. 項羽乃立章邯爲雍王, 置楚軍中. 使長史欣爲上將軍, 將秦軍爲前行.94)
장한이 항우에게 사람을 보내어 협약하고자 하니, 항우가 군리(軍吏)를 불러서 모의하기를 “군량이 적으니 그 협약에 응할까 한다.”라고 하자, 군리들이 모두 말하기를 “좋습니다.”라 했다. 항우는 이에 원수(洹水)의 남쪽 은허(殷虛)에서 만날 것을 약조했다. 협약하고 난 뒤 장한은 항우를 만나서 눈물을 흘리며 조고의 여러 악행을 말했다. 항우는 이에 장한을 옹왕(雍王)으로 세워서 초 나라 군중에 있게 하고, 장사 사마흔을 상장군으로 임명해 진군의 선봉으로 삼았다.
到新安.95) 諸侯吏卒異時故繇使屯戍過秦中, 秦中吏卒遇之多無狀, 及秦軍降諸侯, 諸侯吏卒乘勝多奴虜使之, 輕折辱秦吏卒. 秦吏卒多竊言曰:「章將軍等詐吾屬降諸侯, 今能入關破秦, 大善;卽不能, 諸侯虜吾屬而東, 秦必盡誅吾父母妻子.」諸侯微聞其計, 以告項羽. 項羽乃召黥布、蒲將軍計曰:「秦吏卒尙衆, 其心不服, 至關中不聽, 事必危, 不如擊殺之, 而獨與章邯、長史欣、都尉翳入秦.」於是楚軍夜擊阬秦卒二十餘萬人新安城南.96)
군대가 신안(新安)에 이르렀을 때였다. 제후군의 장병(將兵)들이 예전에 요역(徭役)과 변경수비에 동원되어 진나라를 지날 때에 진나라의 장병들이 그들을 아주 무례하게 대했었다. 한데 지금 진군이 제후군에게 항복하자, 제후군의 장병들은 승세(勝勢)를 이용해, 그들을 노예처럼 부리고 진나라의 장병들을 걸핏하면 학대하고 모욕하는 일이 많았다. 그러자 진나라의 장병들이 저희들끼리 수군거리기를, “장(章) 장군 등이 우리들을 속여 제후들에게 투항하게 했는데, 지금 만일 관내(關內)에 들어가서 진나라를 무찌른다면 아주 좋은 일이나 만일 그러지 못한다면 제후군들은 우리를 포로로 해 동쪽으로 퇴각할 것이니, 진나라는 우리의 부모와 처자를 모두 다 죽일 것은 분명한 일이다.”라 했다. 제후군의 장수가 몰래 그 말을 듣고서 항우에게 보고했다.
이에 항우는 경포와 포장군을 불러서 계책을 말하기를 “진나라의 장병들이 아직도 그 수가 많은 데다 마음으로 복종한 것이 아니니, 관중(關中)에 이르러서 우리에게 복종하지 않는다면 틀림없이 일이 위태롭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죽이고 장한, 장사 사마흔, 도위(都尉) 동예(董翳)만을 데리고 진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나으리라.”라 했다. 이리하여 초군은 밤에 진군을 습격해 진나라 병졸 20여만 명을 신안성 남쪽에 생매장했다.
行略定秦地. 函谷關97)有兵守關, 不得入. 又聞沛公已破咸陽, 項羽大怒, 使當陽君等擊關. 項羽遂入, 至于戱西. 沛公軍霸上, 未得與項羽相見. 沛公左司馬曹無傷使人言於項羽曰:「沛公欲王關中, 使子嬰爲相, 珍寶盡有之.」項羽大怒, 曰:「旦日饗士卒, 爲擊破沛公軍!」當是時, 項羽兵四十萬, 在新豐鴻門,98) 沛公兵十萬, 在霸上. 范增說項羽曰:「沛公居山東時, 貪於財貨, 好美姬. 今入關, 財物無所取, 婦女無所幸, 此其志不在小. 吾令人望其氣, 皆爲龍虎, 成五采, 此天子氣也. 急擊勿失.」
항우는 진나라의 땅을 공략해 평정시키려고 함곡관에 도착했으나 관(關)을 지키는 병사가 있어 들어갈 수 없는 데다 패공이 이미 함양을 함락시켰다는 소식을 듣자 크게 노하여 당양군 등을 보내어 함곡관을 공격하게 했다. 항우가 마침내 관내에 들어가서 희수(戱水) 서쪽에 이르렀다. 이때 패공은 패상(覇上)에 주둔하고 있어 항우와 아직 서로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패공의 좌사마(左司馬) 조무상(曹無傷)이 사람을 시켜서 항우에게 말하기를 “패공이 관중의 왕이 되고 자영을 재상으로 삼아 진귀한 보물을 모두 다 차지하려고 한다.”라 했다. 이에 항우가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내일 아침 병사들을 잘 먹이고 패공의 군대를 격파하리라.”라 했다. 이때 항우의 병사는 40만으로 신풍(新豐)의 홍문(鴻門)에 있었고, 패공의 병사는 10만으로 패상에 있었다. 범증이 항우에게 이렇게 권했다. “패공은 산동(山東)에 있을 때 재화(財貨)를 탐하고 미색(美色)을 좋아했는데, 지금 관내에 들어가서는 재물을 취하지 아니하고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으니 이는 그의 뜻이 작은 데에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합니다. 제가 사람을 시켜 그 기(氣)를 살펴보게 했더니 모두 용과 범의 기세로서 오색 찬연하니 이는 천자의 기세입니다. 급히 공격하시어 기회를 잃지 마소서.”
楚左尹項伯者, 項羽季父也,99) 素善留侯張良. 張良是時從沛公, 項伯乃夜馳之沛公軍, 私見張良, 具告以事, 欲呼張良與俱去. 曰:「毋從俱死也.」張良曰:「臣爲韓王送沛公,100) 沛公今事有急, 亡去不義, 不可不語.」良乃入, 具告沛公. 沛公大驚, 曰:「爲之柰何?」張良曰:「誰爲大王爲此計者?」曰:「鯫生101)說我曰『距關, 毋內諸侯, 秦地可盡王也』. 故聽之.」良曰:「料大王士卒足以當項王乎?」沛公黙然, 曰:「固不如也, 且爲之柰何?」張良曰:「請往謂項伯, 言沛公不敢背項王也.」沛公曰:「君安與項伯有故?」張良曰:「秦時與臣游, 項伯殺人, 臣活之. 今事有急, 故幸來告良.」沛公曰「孰與君少長?」良曰:「長於臣.」沛公曰「君爲我呼入, 吾得兄事之.」張良出, 要項伯. 項伯卽入見沛公. 沛公奉卮酒爲壽, 約爲婚姻, 曰:「吾入關, 秋豪不敢有所近, 籍吏民, 封府庫, 而待將軍. 所以遣將守關者, 備他盜之出入與非常也. 日夜望將軍至, 豈敢反乎! 願伯具言臣之不敢倍德也.」項伯許諾. 謂沛公曰:「旦日不可不蚤自來謝項王.」沛公曰:「諾.」於是項伯復夜去, 至軍中, 具以沛公言報項王. 因言曰:「沛公不先破關中, 公豈敢入乎? 今人有大功而擊之, 不義也, 不如因善遇之.」項王許諾.
초 나라의 좌윤(左尹) 항백(項伯)은 항우의 계부(季父)였는데 평소에 유후(留侯) 장량(張良)과 친했다. 장량은 이때 패공을 따르고 있었다. 이에 항백은 밤에 패공의 군영으로 달려갔다. 그는 은밀히 장량을 만나서 모든 일을 상세히 알리고 함께 가자며 말하기를 “패공을 따라서 함께 죽지 마십시오.”라 했다. 그러자 장량이 말하기를 “신(臣)은 한왕(韓王)을 위해서 패공을 따르고 있는데 패공이 지금 위태로운 일이 있다고 해 도망하는 것은 의롭지 못한 일입니다. 이 사실을 패공께 아뢰지 않을 수 없군요.”라고 하고는 들어가서 패공에게 전부 고했다.
패공이 크게 놀라며 말하기를 “이를 어떻게 해야 좋은가?”라고 하자 장량이 말하기를 “누가 대왕께 그러한 계책을 말했나이까?”라고 하니, 패공은 “어떤 소견 좁은 서생이 나에게 ‘관(關)을 막고서 제후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진나라의 넓은 영토에서 왕 노릇을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권하기에 그 말을 따랐소.”라고 대답했다. 장량이 말하기를 “대왕의 병졸이 항왕을 당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십니까?”라고 하자 패공이 잠자코 있다가 말하기를 “물론 못 하지요. 장차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라고 하니, 장량이 말하기를 “청컨대 항백에게 패공께서는 감히 항왕을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십시오.”라 했다.
패공이 말하기를 “그대는 어떻게 항백과 친분을 가지셨소?”라고 하니, 장량이 말하기를 “신이 진(秦)에 있을 적에 그와 더불어 어울렸는데, 항백이 사람을 죽여 신이 그를 살려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위급한 일이 생기자 다행스럽게 찾아와 제게 알려 주었습니다.”라 했다. 패공이 “두 사람 중 누가 연장이오?”라고 물으니, 장량이 “항백의 나이가 신보다 많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패공이 말하기를 “그대가 항백을 불러주시오. 내가 그를 형으로 섬길 것이오.”라 했다. 이에 장량이 나가서 항백을 불러들이니, 항백은 즉시 들어와서 패공을 알현했다.
패공은 술잔을 들어 축수(祝壽)하고 혼인(婚姻) 관계를 약조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관내(關內)에 들어온 뒤, 터럭만한 작은 물건도 감히 가까이하지 아니하고, 아전과 백성들의 호적을 정리하고 부고(府庫)를 잘 관리하며 항 장군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장수를 보내어 관을 지키게 한 것은 다른 도적의 출입과 의외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밤낮으로 장군이 오시기만을 바라고 있었는데, 어찌 감히 반역을 하겠습니까? 원컨대 당신께서 신이 감히 배은망덕하지 않다는 것을 상세히 말씀해주십시오.” 그러자 항백이 허락하며 패공에게 말하기를 “내일 아침 일찌감치 오셔서 항왕께 사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라고 하니, 패공은 “좋습니다.”라 했다.
이리하여 항백은 그날 밤으로 오던 길을 되돌아가 군영에 이르러 패공의 말을 낱낱이 항왕에게 보고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패공이 먼저 관중을 쳐부수지 않았다면 공이 어찌 들어올 수 있었겠습니까? 지금 그가 큰 공이 있음에도 그를 공격하려고 하신다면 이는 의롭지 못한 일이니, 잘 대우해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라고 하자 항왕이 허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