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歷史와文學/史記

史記 卷八. 高祖本記 Ⅰ

柳川 2019. 5. 11. 19:18

史記 卷八.  高祖本記 

 

高祖,1) 沛豐邑中陽里人, 姓劉氏,2) 字季.3) 父曰太公,4) 母曰劉媼.5) 其先劉媼嘗息大澤之陂, 夢與神遇. 是時雷電晦冥, 太公往視, 則見蛟龍於其上.6) 已而有身, 遂産高祖.

 

 

媪 : 할머니 오(온). 할머니. 늙은 여자. 어머니. 노모. 여자. 땅귀신. 살찌다.

 

고조(高祖)는 패현(沛縣) 풍읍(豐邑) 중양리(中陽里) 사람으로 성은 유(劉), 자(字)는 계(季)이다. 아버지는 태공(太公)이라고 하며 어머니는 유오(劉媼)라고 한다. 예전에 유오가 큰 연못가 언덕에서 휴식을 취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잠깐 잠이 든 사이에 신(神)을 만나는 꿈을 꾸었다. 이때 하늘에서 천둥이 치고 번갯불이 번쩍이더니 갑자기 사방이 어두컴컴해졌다. 

태공이 달려가 보니 교룡(蛟龍)이 부인의 몸 위에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유오가 임신을 해 드디어 고조를 출산했다.

 

 

 

高祖爲人, 隆準而龍顔,7) 美須髥, 左股有七十二黑子.8) 仁而愛人, 喜施,9) 意豁如也.10) 常有大度, 不事家人生産作業. 及壯, 試爲吏,11) 爲泗水亭長,12) 廷中吏無所不狎侮. 好酒及色. 常從王媼、武負貰酒,13) 醉臥, 武負、王媼見其上常有龍, 怪之. 高祖每酤留飮, 酒讎數倍.14) 及見怪, 歲竟, 此兩家常折券棄責.15)

 

 

 

고조는 콧날이 높고 이마는 튀어나와서 얼굴 모습이 용을 닮았으며, 멋진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그리고 왼쪽 넓적다리에는 72개의 검은 점이 있었다. 사람됨이 어질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했으며, 탁 트인 마음에 언제나 넓은 도량을 가지고 있었다. 평소 원대한 포부를 품고 있었던 그는 일반 백성들의 생산 작업(生産作業)에 얽매이려 하지 않았다. 

장년이 되자 시험으로 관리에 등용되어 사수정(泗水亭)의 정장(亭長)이 되었다.

고조는 관아의 모든 관리들을 깔보고 멸시했으며, 술과 여색을 좋아해 항상 왕오(王媼)와 무부(武負)의 주점에 가서 외상으로 술을 마셨으며, 술에 취해 드러눕곤 했다. 왕오와 무부는 그럴 때마다 언제나 그의 몸 위에 용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기이하게 여겼다. 고조가 이들의 주점에 와서 술을 사마시는 날이면 술이 평소의 몇 배씩이나 팔렸는데, 그 기이한 일을 본 후로는 연말이 되면 두 주점에서는 항상 고조의 외상 장부를 찢어버리고 술값을 받지 않았다.

 

 

 

高祖常繇咸陽,16) 縱觀, 觀秦皇帝,17) 喟然太息曰:「嗟乎, 大丈夫當如此也!」

 

 

고조가 일찍이 함양(咸陽)에서 부역하고 있을 때, 한번은 황제의 행차를 구경하는 것이 허락된 적이 있었는데, 진시황제의 행차를 구경하고서는 길게 탄식하며 말하기를 “아! 대장부란 마땅히 저래야 하는데.”라 했다.

 

 

 

單父人呂公18)善沛令, 避仇從之客, 因家沛焉. 沛中豪桀吏聞令有重客, 皆往賀. 蕭何爲主吏,19) 主進,20) 令諸大夫曰:21)「進不滿千錢, 坐之堂下.」高祖爲亭長, 素易諸吏, 乃紿爲謁曰22)「賀錢萬」, 實不持一錢. 謁入, 呂公大驚, 起, 迎之門. 呂公者, 好相人, 見高祖狀貌, 因重敬之, 引入坐. 蕭何曰:「劉季固多大言, 少成事.」高祖因狎侮諸客, 遂坐上坐,23) 無所詘.24) 酒闌,25) 呂公因目固留高祖.26) 高祖竟酒, 後. 呂公曰:「臣少好相人,27) 相人多矣, 無如季相, 願季自愛. 臣有息女,28) 願爲季箕帚妾.」酒罷, 呂媼怒呂公曰:「公始常欲奇此女, 與貴人. 沛令善公, 求之不與, 何自妄許與劉季?」呂公曰:「此非兒女子所知也.」卒與劉季. 呂公女乃呂后也, 生孝惠帝、魯元公主.29)

 

固 : 굳이, 본디, 원래. 진실로. 항상.   闌 : 한창. 

詘 : 굽힐 굴/내칠 출. 굽히다. 굽음. 몸을 굽히다. 복종함. 뜻을 굽히다. 손가락따위를 굽히다. 말이 막히다. 대꾸할 말이 없음. 짧다. 덜다. 

     감함. 따르다. 따르게 함. 접다. 주름을 잡음. 꿀리다. 두려워함. 도리어. 오히려. 뚝 끊어지는 모양. 다하다. 궁지에 몰리다. 기꺼이 절

     개를 버리는 모양. 나다. [출]내치다. 물리침. 말을 더듬다.

 

 

 

선보(單父) 사람 여공(呂公)은 패현 현령과 친분이 두터웠다. 그는 원수진 사람을 피해 현령의 식객이 되어 패현에 거주하고 있었다. 패현의 호걸과 향리(鄕吏)들은 현령에게 귀빈이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방문해 인사를 드렸다. 당시 주리(主吏)였던 소하(蕭何)가 진상한 예물을 관리했는데 여러 대부(大夫)들에게 “진상한 예물이 천 냥에 이르지 않는 사람은 당하(堂下)에 앉으시오.”라고 말했다. 당시 정장(亭長)이었던 고조는 평소 뭇 관리들을 경시했기에 거짓으로 명자(名刺)를 꾸며 “하례금 만 냥”이라고 써넣었으나, 사실은 한 냥도 지참하지 않았다. 명자가 전해지자 여공은 크게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나서 고조를 문 앞에서 맞이했다.

여공은 관상보기를 좋아했는데, 고조의 생김새를 보고 매우 존경하며 자리에 앉게 했다. 그러자 소하가 말했다.

“유계(劉季)는 언제나 큰소리만 치고 실행하는 일은 드물다.” 고조는 여러 손님을 무시하고 상좌에 앉아서 조금도 사양하는 기색이 없었다. 술자리가 끝나갈 즈음, 여공은 눈짓으로 고조를 붙잡아놓았다. 연회가 끝나 모두들 가고 고조 한 사람만 남게 되자 여공은 “저는 어려서부터 관상보기를 좋아해 많은 사람의 상(相)을 보았지만, 당신만한 호상(好相)은 없었습니다. 그러오니 자중하시길 바라며, 저에게 딸이 있는데 당신의 아내로 삼아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술자리가 끝난 후에 여공의 아내는 그에게 화를 내며 “당신은 예전부터 언제나 우리 딸을 비범하다 하시면서 귀인(貴人)에게 시집보내려고 하셨지요. 그랬거늘 패현 현령이 당신과 친분이 있어 딸을 달라고 했는데도 주지 않으시더니, 어찌 함부로 유계에게 시집보내려고 하십니까?”라고 말했으나, 여공은 “이 일은 아녀자가 알 바가 아니오.”라고 하더니, 결국 유계에게 시집보냈다. 여공의 이 딸이 바로 훗날 효혜제(孝惠帝)와 노원공주(魯元公主)를 낳은 여후(呂后)였다.

 

 

 

高祖爲亭長時, 常告歸之田.30) 呂后與兩子居田中耨, 有一老父過請飮, 呂后因餔之.31) 老父相呂后曰:「夫人天下貴人.」令相兩子, 見孝惠, 曰:「夫人所以貴者, 乃此男也.」相魯元, 亦皆貴. 老父已去, 高祖適從旁舍來, 呂后具言客有過, 相我子母皆大貴. 高祖問, 曰:「未遠.」乃追及, 問老父. 老父曰:「鄕者夫人嬰兒皆似君, 君相貴不可言.」高祖乃謝曰:「誠如父言, 不敢忘德.」及高祖貴, 遂不知老父處.

 

常 : 항상. 늘, 언제나. 여느때, 평일. 일찌기, 옛날에. 대대, 대체로.      

耨 : 길맬 누(녹). 김매다. 제초함. 없애다. 나쁜일을 제거함. 호미, 괭이. 농기구. 

餔 : 새참 포. 새참. 밥. 먹다. 먹이다. 기름. 하사하다. 씹다. 음식을 먹음. 엿. 저녁무렵.       

鄕 : 접때.            誠 : 만약 ~ 라면.

 

 

고조가 정장으로 있을 때 언젠가 휴가를 내고 귀향해 시골집에 돌아온 적이 있었다. 그때 여후는 두 아이를 데리고 밭에서 김을 매고 있었는데, 지나가던 한 노인이 마실 물을 청했다. 여후가 먹을 것을 주니 그 노인은 여후의 관상을 보고 “부인은 천하의 귀인이 되실 상을 가지고 계십니다.”라고 말했다. 여후는 두 아이의 관상을 보게 했다. 노인은 효혜제를 보고 “부인이 귀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남자 아이 때문입니다.”라고 말하더니, 노원공주의 상을 보고는 역시 모두 귀상(貴相)이라 했다. 노인이 이미 떠나가고 나자, 마침 고조가 방사(旁舍)에서 나왔다.

 

여후는 지나가던 길손이 자기와 아이들의 관상을 보고 모두 귀상이라고 했던 일을 고조에게 소상히 이야기했다. 고조는 그 노인이 어디로 갔느냐고 물었다. 여후는 아직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고조는 노인의 뒤를 쫓아가서 (자기의 관상은 어떤가를) 물었다. 노인은 “조금 전에 부인과 아이들의 관상을 보았는데 모두 당신의 상을 닮았습니다. 당신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하신 상입니다.”라 했다. 이에 고조는 감사하며 “정말 어르신의 말씀대로라면 그 은덕은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후 고조가 천자가 되어 (노인을 찾았으나) 결국 노인의 행방을 알 길이 없었다.

 

 

 

高祖爲亭長, 乃以竹皮爲冠, 令求盜之薛治之,32) 時時冠之,33) 及貴常冠, 所謂「劉氏冠」34)乃是也.

 

 

고조가 정장으로 지낼 때였다. 고조는 죽피(竹皮)로 관(冠)을 만들기 위해서 구도(求盜)를 설현(薛縣)으로 보내어 죽피관(竹皮冠)을 만들게 했다. 고조는 항상 죽피관을 머리에 썼으며, 천자가 되어서도 늘 그 모자를 썼다. 소위 ‘유씨관(劉氏冠)’이란 바로 이 죽피관을 두고 하는 말이다.

 

 

 

高祖以亭長爲縣送徒酈山, 徒多道亡. 自度比至皆亡之,35) 到豐西澤中, 止飮, 夜乃解縱所送徒. 曰:「公等皆去, 吾亦從此逝矣!」徒中壯士願從者十餘人. 高祖被酒,36) 夜徑37)澤中, 令一人行前.38) 行前者還報曰:「前有大蛇當徑,39) 願還.」高祖醉, 曰:「壯士行, 何畏!」乃前, 拔劍擊斬蛇.40) 蛇遂分爲兩,41) 徑開. 行數里, 醉, 因臥. 後人來至蛇所, 有一老嫗夜哭. 人問何哭, 嫗曰:「人殺吾子, 故哭之.」人曰:「嫗子何爲見殺?」嫗曰:「吾, 白帝子也, 化爲蛇, 當道, 今爲赤帝子斬之,42) 故哭.」人乃以嫗爲不誠, 欲告之,43) 嫗因忽不見. 後人至, 高祖覺.44) 後人告高祖, 高祖乃心獨喜, 自負.45) 諸從者日益畏之.

 

 

고조는 정장의 직무로 인해 현을 위해 역도(役徒)들을 여산(酈山)으로 인솔한 적이 있었다. 가는 길에 많은 역도들이 도주해버리자, 고조는 여산에 도착할 때가 되면 다 도망쳐서 한사람도 남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조는 풍읍(豐邑) 서쪽 늪지에 이르러 가던 길을 멈추고 술을 마셨다. 밤이 되자 인솔해 가던 역도들을 풀어주며 “그대들은 모두 도망치시오. 나도 이제 도망칠 것이오.”라고 하니, 역도들 중에 고조를 따르고자 하는 장사(壯士)가 10여 명이 되었다.

고조는 술을 더 마신 후, 한밤중에 늪지의 작은 길을 지나면서 한 사람을 시켜서 앞길을 살펴보게 했다. 앞서 가던 이가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앞에 큰 뱀이 길을 막고 있으니 되돌아가십시오.”라 했다. 

그러자 술에 취한 고조는“장사가 가는 길에 무엇이 두렵겠느냐?”라며 앞으로 가더니 검을 뽑아 뱀을 쳐서 죽였다. 뱀은 두 동강이 되었고 길은 뚫렸다. 다시 몇 리 길을 걸은 고조는 술에 취해서 더 이상 걷지 못하고 길에 누웠다.

뒤처져서 오던 사람이 뱀이 죽은 곳에 이르렀을 때, 한 노파가 한밤중에 통곡하는 것을 보고 왜 통곡하느냐고 물었다. 

“어떤 사람이 내 아들을 죽였기에 이렇게 통곡하는 것이오.”라고 노파는 대답했다. 

“당신 아들은 무엇 때문에 살해되었나요?”하고 물으니, 

노파는 “내 아들은 백제(白帝)의 아들입니다. 뱀으로 변신해 길을 막고 있었는데 지금 적제(赤帝)의 아들에게 참살당했으니 그래서 통곡하는 것입니다.”라 했다. 

그는 노파가 허황된 말을 하고 있다고 여기어 혼내주려고 하자 노파는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뒤처져 오던 사람이 고조가 누웠던 곳에 도착하니, 고조는 술에서 깨어나 서 있었다. 그가 고조에게 방금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자 고조는 내심 기뻐하며 (뱀을 죽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수행하던 모든 사람들은 더더욱 고조를 경외하게 되었다.

 

 

 

 

秦始皇帝常曰「東南有天子氣」, 於是因東游以厭之.46) 高祖卽自疑, 亡匿, 隱於芒、碭山澤巖石之閒.47) 呂后與人俱求, 常得之. 高祖怪問之. 呂后曰:「季所居上常有雲氣,48) 故從往常得季.」高祖心喜. 沛中子弟或聞之, 多欲附者矣.

 

 

厭 : 누를 엽/싫을 염/젖을 읍/빠질 암. 누르다. 진압하다. 억압하다. 들이닥치다. 숨기다. 가위눌리다. 

碭 : 무늬있는 돌 탕. 무늬있는 돌. 지나치다. 크다. 찌르다. 넘치다. 맑은 대기. 

 

 

진시황제는 일찍이 “동남쪽에 천자의 기(氣)가 있다.”라고 하면서, 동쪽으로 순행해 그 기를 진압하고자 했다. 고조는 자기가 화를 당하지나 않을까 우려해 망산(芒山)과 탕산(碭山) 사이의 깊은 산골짜기로 도망쳐서 숨었다.

여후가 사람들과 함께 고조를 찾을 때마다 그가 숨어있는 곳을 찾아내니, 고조는 기이하게 생각해 어떻게 찾아내었느냐고 물었다.

여후는 “당신이 있는 곳은 그 위에 언제나 운기(雲氣)가 있으므로 그것을 따라가면 항상 당신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라고 말하니, 고조는 매우 기뻐했다. 패현의 젊은이 중에는 이 소식을 듣고 고조를 따르고자 하는 자가 많았다.

 

 

 

秦二世元年49)秋, 陳勝等起蘄,50) 至陳而王, 號爲「張楚」. 諸郡縣皆多殺其長吏以應陳涉. 沛令恐, 欲以沛應涉. 掾、主吏蕭何、曹參51)乃曰:「君爲秦吏, 今欲背之, 率沛子弟, 恐不聽. 願君召諸亡在外者, 可得數百人, 因劫衆,52) 衆不敢不聽.」乃令樊噲召劉季. 劉季之衆已數十百人矣.53)

 

蘄 : 풀이름 기. 풀이름. 미나리. 芹菜. 승검초(미나리과의 여러해살이 약초. 뿌리는 당귀). 재갈. 馬銜. 구하다. 기원함. 나무이름. 부지런

     하다. 고을이름. 승검초.

掾 : 아전 연. 아전. 하급관리. 돕다. 전. 테두리. 옷깃. 소맷부리.                           十 : 전부. 일체. 

 

진(秦)나라 2세 황제(二世皇帝) 원년(기원전 209년) 가을, 진승(陳勝) 등이 기현(蘄縣)에서 봉기하더니, 진현(陳縣)에 이르러 왕위에 올라서 국호를 ‘장초(張楚)’라 했다. 여러 군현에서는 모두 그 지방 장관을 죽이고 진승에게 호응했다. 패현 현령은 두려운 마음에 패현 백성들을 동원해서 진승에게 호응하고자 했다. 그러나 주리(主吏)인 소하와 옥리(獄吏)인 조참(曹參)은 현령에게 이렇게 말했다.

“진나라의 관리이신 나리께서 지금 마을의 젊은이들을 거느리고 진나라를 배반하려 하시는데, 젊은이들이 나리의 뜻에 복종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원컨대 차라리 나리께서는 예전에 다른 곳으로 도망친 패현 사람들을 모두 부르십시오. 수백 명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니, 그들을 이용해 마을 젊은이들을 위협하면 모두들 복종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자 현령은 번쾌(樊噲)에게 유계(劉季)를 불러오도록 했다. 그때 유계는 이미 1백 명에 가까운 무리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於是樊噲從劉季來. 沛令後悔, 恐其有變, 乃閉城城守, 欲誅蕭、曹. 蕭、曹恐, 踰城保劉季.54) 劉季乃書帛射城上, 謂沛父老曰:「天下苦秦久矣. 今父老雖爲沛令守, 諸侯並起, 今沛.55) 沛今共誅令, 擇子弟可立者立之, 以應諸侯, 則家室完. 不然, 父子俱屠, 無爲也.」父老乃率子弟共殺沛令, 開城門迎劉季, 欲以爲沛令. 劉季曰:「天下方擾, 諸侯並起, 今置將不善, 壹敗塗地.56) 吾非敢自愛, 恐能薄,57) 不能完父兄子弟. 此大事, 願更相推擇可者.」蕭、曹等皆文吏, 自愛, 恐事不就, 後秦種族其家盡, 讓劉季. 諸父老皆曰:「平生所聞劉季諸珍怪, 當貴, 且卜筮之, 莫如劉季最吉.」於是劉季數讓. 衆莫敢爲, 乃立季爲沛公.58) 祠黃帝, 祭蚩尤於沛庭,59) 而釁鼓60)旗, 幟皆.61) 由所殺蛇白帝子, 殺者赤帝子, 故上赤. 於是少年豪吏如蕭、曹、樊噲等皆爲收沛子弟二三千人, 攻胡陵、62)方與,63) 還守豐.

 

 

번쾌가 유계를 데려왔으나, 현령은 이를 후회하며 그들이 모반할까 두려워했다. 그래서 성문을 걸어 잠그고 성을 수비하면서 소하와 조참을 죽이려고 했다. 겁이 난 소하와 조참은 성벽을 넘어서 유계에게로 투항했다. 유계는 비단에 글을 써서 화살에 꽂아 성 안으로 쏘았다. 그는 마을의 부로(父老)들에게 다음과 같은 서신을 썼다.

“천하 백성들이 오랫동안 진나라로 인해서 고통을 받아왔습니다. 지금 부로들께서는 현령을 위하여 성을 수비하고 있으나, 전국의 제후들이 모두 봉기했으니 이제 곧 패현을 공략해 올 것입니다. 그러니 마을 사람들이 함께 현령을 처형하고 우두머리로 세울 만한 젊은이를 골라서 우두머리로 세우고 제후들과 호응한다면 가족과 재산을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자(父子)가 함께 아무 의미 없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자 부로들은 젊은이들을 거느리고 가서 현령을 죽이고는 성문을 열고 유계를 맞이해 패현 현령으로 삼으려고 했다. 그러자 유계는 이렇게 말했다.

“천하가 혼란스러워 제후들이 궐기하고 있는 지금, 무능한 장수를 두면 싸움에서 무참히 대패할 것이오. 내가 감히 내 목숨을 중히 여겨서가 아니라 내 능력이 부족해 여러 부형과 젊은이들의 목숨을 보전할 수 없음을 두려워해서입니다. 이는 중대한 일이오니 이 일을 맡을 적임자를 신중히 선택하시길 바랍니다.”

소하와 조참 등은 모두 문관(文官)으로 자신의 목숨을 중히 여겼다. 그들은 이 일이 실패하면 후에 진나라에게 멸족의 화를 당할까 두려워서 모두 유계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부로들이 모두 “평소 우리가 들은 바로는 당신에게는 여러 가지 기이하고 불가사의한 일들이 있었다고 하니, 당신은 틀림없이 귀인이 되실 것입니다. 또 이 일에 대해서 점을 쳐보니 당신만큼 길조인 사람은 없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래도 유계는 누차 사양했으나, 어느 누구도 감히 우두머리가 되고자 하는 이가 없어 결국 유계를 패공(沛公)으로 삼았다.

 

유계는 패현의 관청에서 황제(黃帝)와 치우(蚩尤)에게 제사 지내고, 짐승을 잡아서 그 피를 북에 바르는 의식을 행했다. 군대의 깃발은 모두 붉은 색으로 했다. 이는 예전에 죽인 뱀이 백제(白帝)의 아들이고 그 뱀을 죽인 것은 바로 적제(赤帝)의 아들이었으므로, 붉은 색을 숭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소하, 조참, 번쾌 등과 같은 젊고 걸출한 현리(縣吏)들이 패현의 젊은이들을 2천~3천 명을 모아서 호릉(胡陵)과 방여(方與)를 공략한 후, 다시 돌아와서 풍읍(豐邑)을 수비했다.

 

 

 

秦二世二年, 陳涉之將周章64)軍西至戱65)而還.66) 燕、趙、齊、魏皆自立爲王.67) 項氏起吳. 秦泗川監平68)將兵圍豐, 二日, 出與戰, 破之. 命雍齒守豐, 引兵之薛. 泗州守壯69)敗於薛, 走至戚,70) 沛公左司馬得泗川守壯, 殺之.71) 沛公還軍亢父,72) 至方與, (周市來攻方與)未戰. 陳王使魏人周市略地. 周市使人謂雍齒曰:「豐, 故梁徙也.73) 今魏地已定者數十城. 齒今下魏, 魏以齒爲侯守豐. 不下, 且屠豐.」

 

市 : 슬갑 불.

 

 

진 2세(秦二世) 2년(기원전 208년), 진승의 부장(副將)인 주장(周章)이 거느린 군사가 서쪽으로 희수(戲水)에까지 진격했다가 패배하고 돌아왔다. 이때 연(燕), 조(趙), 제(齊), 위(魏) 나라가 모두 자립해 왕위에 오르고, 항량(項梁), 항우(項羽)는 오(吳)에서 봉기했다. 진(秦)나라 사천군감(泗川郡監) 평(平)이 군사를 거느리고 풍읍을 포위했는데, 이틀 후 패공이 출전해 진나라 군사를 크게 무찔렀다.

패공은 옹치(雍齒)에게 풍읍을 수비하게 명령을 내리고 자신은 군사를 거느리고 설현(薛縣)으로 진격했다. 사천군수(四川郡守) 장(壯)은 설현에서 패해 척현(戚縣)으로 도주했으나, 패공의 좌사마(左司馬) 조무상(曹無傷)이 사천군수 장을 붙잡아 죽였다. 패공은 항보(亢父)로 회군해 방여(方與)에 이르기까지 한 번의 교전도 없었다. 이때 진왕(陳王, 진승을 가리킴)은 위(魏)나라 사람 주불(周市)로 하여금 풍읍을 공략하게 했다. 주불은 옹치에게 사람을 보내어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하게 했다.

“풍읍은 예전에 위왕(魏王)께서 도읍지로 삼으셨던 곳이오. 이제 위나라에서 평정한 땅이 수십 성에 이르니, 지금 위나라에 항복하면 위나라에서 그대를 후(侯)로 삼아 풍읍을 지키게 할 것이나, 만약 투항하지 않으면 풍읍을 함락시킬 것이오.”

 

 

 

雍齒雅不欲屬沛公,74) 及魏招之, 卽反爲魏守豐. 沛公引兵攻豐, 不能取. 沛公病, 還之沛. 沛公怨雍齒與豐子弟叛之, 聞東陽甯君、秦嘉75)立景駒爲仮王, 在留,76) 乃往從之, 欲請兵以攻豐. 是時秦將章邯從陳, 別將司馬夷77)將兵北定楚地, 屠相, 至碭.78) 東陽甯君、沛公引兵西, 與戰蕭西,79) 不利. 還收兵聚留, 引兵攻碭, 三日乃取碭. 因收碭兵, 得五六千人. 攻下邑,80) 拔之.81) 還軍豐. 聞項梁在薛,82) 從騎百餘往見之.83) 項梁益沛公卒五千人, 五大夫將十人.84) 沛公還, 引兵攻豐.85)

 

雅 : 본디, 본래. 늘, 항상.             甯 : 寧과 同字.

 

 

옹치는 평소 패공에게 귀속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던 터라, 위나라의 회유를 받자 패공을 배반하고 위나라를 위해서 풍읍을 수비했다. 그러자 패공은 병사를 이끌고 풍읍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병이 들어 패현으로 퇴각했다. 옹치와 풍읍 젊은이들의 배반에 매우 화가 난 패공은, 동양현(東陽縣)의 영군(寧君)과 진가(秦嘉)가 경구(景駒)를 가왕(假王)으로 삼아 유현(留縣)에 머무르고 있음을 듣고, 경구에게 달려가 군사를 빌려 다시 풍읍을 공략하고자 했다.

이때 진(秦)나라 장수 장한(章邯)은 진승의 패잔군을 추격했으며 그의 부장(副將) 사마니(司馬尼)는 병사를 이끌고 북진해 초(楚) 땅을 평정하고 상현(相縣)을 함락시킨 후, 탕현(碭縣)에 이르렀다. 동양(東陽) 사람 영군과 패공은 병사를 거느리고 서쪽으로 진격해 소현(蕭縣) 서쪽에서 사마니와 교전했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그러자 유현으로 퇴각한 그들은 병사들을 모아 다시 탕현을 공략하여 3일 만에 이곳을 함락시켰다. 그리고는 탕현의 투항 병사들을 모아서 5천~6천 명의 군사를 얻게 되자, 다시 하읍(下邑)을 공격해 함락시킨 후에 풍읍으로 군사를 회군시켰다. 항량이 설현에 있다는 소식을 들은 패공이 1백여 명의 기병을 대동해 그를 만나러 가니, 항량은 병사 5천 명과 오대부(五大夫) 작위를 가진 장수 10명을 증원해주었다. 패공은 돌아와 병사를 이끌고 풍읍을 공격했다.

 

 

 

從項梁月餘, 項羽已拔襄城86)還. 項梁盡召別將居薛. 聞陳王定死, 因立楚後懷王孫心爲楚王, 治盱台.87) 項梁號武信君. 居數月, 北攻亢父, 救東阿,88) 破秦軍. 齊軍歸, 楚獨追北,89) 使沛公、項羽別攻城陽,90) 屠之. 軍濮陽之東,91) 與秦軍戰, 破之.

 

台 : 나 이. 나. 일인칭대명사.

 

 

패공이 항량을 추종한 지 한 달 남짓한 사이에 항우는 이미 양성(襄城)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돌아왔다. 항량은 각지의 별장(別將)들을 모두 설현으로 소집시켰다. 진승이 정말로 죽었다는 말을 들은 항량은 초 나라의 후손인 회왕(懷王)의 손자 心을 초왕(楚王)으로 삼아 우이(盱台)에 도읍했으며, 항량은 무신군(武信君)으로 불렸다. 몇 달 후, 그는 북쪽으로 항보를 공략하고 동아(東阿)를 구원해 진군(秦軍)을 무찔렀다. 제군(齊軍)이 돌아가자 초군(楚軍)은 단독으로 진나라의 패군을 추격했고, 패공과 항우로 하여금 따로 성양(城陽)을 공략하게 해 함락시켰다. 그리고 복양(濮陽) 동쪽으로 나아가  진군(秦軍)과 싸워 무찔렀다.

 

 

 

秦軍復振,92) 守濮陽, 環水.93) 楚軍去而攻定陶,94) 定陶未下. 沛公與項羽西略地至雍丘之下,95) 與秦軍戰, 大破之, 斬李由. 還攻外黃,96) 外黃未下.

 

 

그 후 진군이 다시 병력을 재정비해 복양을 굳게 수비하고 물을 끌어들여서 해자(垓字)를 만드니, 초군은 이곳에서 철수해 

정도(定陶)를 공격했으나 정도는 함락시키지 못했다. 서쪽으로 토벌을 나선 패공과 항우는 옹구(雍丘)에 이르러 진군과 접

전해 대패시키고 이유(李由)를 참살한 후, 회군해 외황(外黃)을 또 공략했지만 외황은 함락되지 않았다.

 

 

 

項梁再破秦軍, 有驕色. 宋義97)諫, 不聽. 秦益章邯兵, 夜銜枚擊項梁,98) 大破之定陶, 項梁死. 沛公與項羽方攻陳留, 聞項梁死, 引兵與呂將軍俱東. 呂臣軍彭城東, 項羽軍彭城西, 沛公軍碭.

 

 

연이어 진군을 격파한 항량은 교만해지기 시작했다. 송의(宋義)가 이를 간했으나 항량은 듣지 않았다. 진(秦)나라 조정에서는 장한에게 구원군을 파병했다. 이에 장한은 한밤중 병사들에게 하무를 물린 채 항량을 습격해 정도에서 초군을 대파하니 항량은 여기에서 전사했다. 이때 패공과 항우는 진류(陳留)를 공략하고 있었는데 항량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자 병사를 거느리고 여신(呂臣) 장군과 함께 동쪽으로 진군했다. 여신의 군사는 팽성(彭城) 동쪽, 항우 군사는 팽성 서쪽, 패공의 군대는 탕현에 진을 쳤다.

 

 

 

章邯已破項梁軍, 則以爲楚地兵不足憂, 乃渡河, 北擊趙, 大破之. 當是之時, 趙歇99)爲王, 秦將王離圍之鉅鹿城, 此所謂河北之軍也.

 

 

이미 항량의 군사를 무찌른 장한은 초군을 두려워할 것 없다고 생각해 황하를 건너 북으로 조(趙)나라를 공략해 크게 무찔렀다. 당시 조나라 왕은 조헐(趙歇)이었다. 진나라 장수 왕리(王離)가 그를 거록성(巨鹿城)에서 포위하니 이를 ‘하북군(河北軍)’이라 했다.

 

 

 

秦二世三年, 楚懷王見項梁軍破, 恐, 徙盱台都彭城, 幷呂臣、項羽軍自將之. 以沛公爲碭郡長,100) 封爲武安侯, 將碭郡兵. 封項羽爲長安侯, 號爲魯公. 呂臣爲司徒, 其父呂靑爲令尹.101)

 

 

진 2세 황제 3년(기원전 207년), 항량의 군사가 패한 것을 보고 겁이 난 초 회왕은 우이에서 팽성으로 천도하고, 여신과 항우의 군사를 병합해 스스로 통솔했다. 그리고 패공을 탕군의 군장(郡長)으로 삼고 무안후(武安侯)에 봉해 탕군의 군사를 통솔하게 했다. 항우를 장안후(長安侯)에 봉하고 노공(魯公)으로 칭했으며, 여신은 사도(司徒)에, 그의 부친 여청(呂靑)은 영윤(令尹)에 임명했다.

 

 

 

趙數請救, 懷王乃以宋義爲上將軍, 項羽爲次將, 范增爲末將, 北救趙. 令沛公西略地入關. 與諸將約, 先入定關中者王之.102)

 

 

조나라에서 누차 구원을 요청하니, 회왕은 송의를 상장군으로 삼고 항우를 부장(副將)으로, 범증(范增)을 말장(末將)으로 삼아 북진해 조나라를 구원하게 했다. 또 패공에게는 서쪽을 공략해 함곡관(函谷關)에 진입하게 했다. 초 회왕은 제일 먼저 함곡관에 진입해 관중(關中)을 평정하는 자를 관중왕(關中王)으로 삼겠다고 여러 장수들과 약속했다.

 

 

 

當是時, 秦兵彊, 常乘勝逐北, 諸將莫利先入關. 獨項羽怨秦破項梁軍, 奮,103) 願與沛公西入關. 懷王諸老將皆曰:「項羽爲人僄悍猾賊.104) 項羽嘗攻襄城, 襄城無遺類,105) 皆阬之, 諸所過無不殘滅. 且楚數進取,106) 前陳王、107)項梁皆敗. 不如更遣長者扶義而西,108) 告諭秦父兄. 秦父兄苦其主久矣, 今誠得長者往, 毋侵暴, 宜可下. 今項羽僄悍, 今109)不可遣. 獨沛公素寬大長者, 可遣.」卒不許項羽, 而遣沛公西略地, 收陳王、項梁散卒. 乃道碭110)至成陽, 與杠里111)秦軍夾壁, 破(魏)[秦]二軍. 楚軍出兵擊王離, 大破之.112)

 

僄 : 가벼울 표. 가볍다. 민첩하다. 얕보다. 경솔하고 사납다.

猾 : 교활할 활. 교활하다. 교활한 사람. 어지럽다. 어지럽힘. 희롱하다. 가지고 놈.

阬 : 구덩이 갱. 구덩이. 갱도. 뒷간. 묻다. 생매장하다. 산골짜기. 도랑, 개천. 못. 연못. 높은 언덕. 큰 언덕. 문. 출입문. 겨루다. 대항함.

杠 : 깃대 강. 깃대. 다리. 수레덮개밑 테두리. 상여를 메는 인부. 들다. 마주 들어올림.

 

 

바로 이때 진나라 병력은 강대했기에 항상 승리의 여세를 몰아서 패주하는 적군을 추격하곤 했다. 따라서 초 나라의 여러 장수들 중에서는 먼저 함곡관에 진입하는 것을 이롭게 여기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진나라가 항량의 군대를 무찌른 것을 원통해한 항우만이 격분하며 패공과 함께 서쪽 함곡관으로 진격하기를 원했다.

회왕의 여러 원로 장수들이 모두 말하길, “항우는 사람됨이 성급하고 사나우며 교활해 남을 잘 해칩니다. 항우가 일찍이 양성(襄城)을 공략했을 때, 양성에 살아남은 이가 하나도 없었던 것은 모두 다 생매장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지나가는 곳은 어디나 모두 무참히 섬멸 당하곤 합니다. 게다가 초군(楚軍)이 여러 번 공략했으나 이전의 진왕(陳王, 진승을 가리킴)과 항량이 모두 패했습니다. 차라리 덕망 있고 관대한 자를 보내 인의를 베풀며 서쪽으로 진격하게 해 진나라의 부형(父兄)들을 이해시키는 것이 좋겠습니다. 진나라의 부형들은 이미 오랫동안 그들의 군주로부터 고통을 받았으니, 지금 만약 덕망 있고 관대한 자가 가서 포학(暴虐)을 행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관중을 함락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재로서는 성급하고 사나운 항우를 보내는 안 되며, 단지 평소에 관대하고 덕망 있는 패공만을 보낼 수 있습니다.”라 했다.

 

회왕은 마침내 항우가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패공을 보내어 서쪽을 공략하게 했다. 패공은 진승과 항량의 흩어진 병사들을 모아며 탕현을 지나 성양(成陽)에 이르러 강리(杠里)의 진군(秦軍)과 대치했다. 진나라의 두 부대를 격파한 후, 다시 출병한 초군은 왕리를 공격해 크게 무찔렀다.

 

 

 

沛公引兵西, 遇彭越昌邑,113) 因與俱攻秦軍, 戰不利. 還至栗,114) 遇剛武侯,115) 奪其軍, 可四千餘人, 幷之. 與魏將皇欣、魏申徒武蒲之軍116)幷攻昌邑, 昌邑未拔. 西過高陽.117) 酈食其118)(謂)[爲]監門, 曰:「諸將過此者多, 吾視沛公大人長者.」乃求見說沛公. 沛公方踞床, 使兩女子洗足. 酈生不拜, 長揖, 曰:「足下必欲誅無道秦, 不宜踞見長者.」於是沛公起, 攝衣謝之, 延上坐. 食其說沛公襲陳留,119) 得秦積粟. 乃以酈食其爲廣野君,120) 酈商爲將, 將陳留兵, 與偕攻開封,121) 開封未拔. 西與秦將楊熊戰白馬,122) 又戰曲遇123)東, 大破之. 楊熊走之滎陽,124) 二世使使者斬以徇.125) 南攻潁陽, 屠之. 因張良遂略韓地轘轅.126)

 

徇 : 호령하다. 군령을 내림. 고시하다. 널리 알림. 

 

패공은 병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진격해 창읍(昌邑)에서 팽월(彭越)과 만나 그와 함께 진군을 공략했다. 전세가 불리하자 율현(栗縣)으로 철수해 강무후(剛武侯)를 만나서 그의 군사 약 4천여 명을 빼앗아서 병합시키고, 위나라의 장수 황흔(皇欣), 사도(司徒) 무포(武蒲)의 군사와 창읍을 합공(合攻)했으나 창읍은 함락되지 않았다. 그러자 패공은 서쪽으로 진격하면서 고(高陽)을 경유했다.

(고양 사람) 역이기(酈食其)가 감문(監門)에게 “이곳을 지나간 장수가 많았지만, 내가 패공을 보니 그분은 과연 도량이 크고 관대한 분이시오.”라고 말하며 패공을 만나 유세(遊說)하기를 요청했다.

그때 패공은 마침 침상에 걸터앉아 두 여자에게 발을 씻게 하고 있었다. 역생(酈生)은 절을 올리지 않고 장읍(長揖)하며 말하기를 “족하(足下)께서 반드시 포학무도한 진나라를 토벌하시고자 한다면, 걸터앉은 채로 장자(長者)를 접견하셔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자, 패공이 일어나서 옷을 여미며 사죄하고 상좌에 앉게 했다.

역이기가 패공에게 진류를 습격하길 권해 진나라의 비축 양식을 얻게 되자, 패공은 역이기를 광야군(廣野君)으로 삼고 역상(酈商)을 장수로 삼아 진류의 군사를 거느리고 함께 개봉(開封)을 공략했다. 그러나 개봉이 함락되지 않자, 패공은 서쪽으로 진격해 백마(白馬)에서 진나라 장수 양웅(楊熊)과 교전하고 또 곡우(曲遇) 동쪽에서 접전해 크게 무찔렀다. 양웅이 형양(滎陽)으로 도망치니 진 2세(秦二世)는 사자(使者)를 보내어 그를 참수함으로써 호령하였다. 패공은 남쪽으로 영양(潁陽)을 공략해 함락시켰으며, 장량(張良)의 도움으로 한(韓)나라의 환원(轘轅)을 공략했다.

 

 

 

當是時, 趙別將司馬卬方欲渡河入關, 沛公乃北攻平陰,127) 絶河津. 南, 戰雒陽東, 軍不利, 還至陽城,128) 收軍中馬騎, 與南陽守齮129)戰犨東,130) 破之. 略南陽郡, 南陽守齮走, 保城守宛.131) 沛公引兵過而西. 張良諫曰:「沛公雖欲急入關, 秦兵尙衆, 距險. 今不下宛, 宛從後擊, 彊秦在前, 此危道也.」

 

齮 : 깨물 의.    犨 : 흰 소 주. 흰 소. 소 숨쉬는 소리. 소 헐떡이는 소리. 소가 울다.

 

 

이때 조(趙)의 별장(別將) 사마앙(司馬卬)이 마침 황하를 건너 함곡관에 진입하려고 했다. 이에 패공은 북쪽으로 평음(平陰)을 공략하고, 황하 나루를 가로질러 남하해 낙양(雒陽) 동쪽에서 진군과 교전했다. 전세가 불리하자 양성(陽城)으로 퇴각한 패공은 군중의 기병(騎兵)을 소집해 주현(犨縣) 동쪽에서 남양(南陽) 태수 여의(呂齮)와 접전해서 무찌르고 남양을 점령했다. 

남양태수 여의는 도망쳐서 완성(宛城)을 굳게 지켰다. 패공이 병사를 이끌고 완성을 지나서 서진(西進)하니, 장량이 간했다.  “패공께선 비록 급히 함곡관에 진입하려고 하시지만 진나라 병사가 아직 많은 데다 험준한 요지를 근거로 버티고 있습니다. 만약 지금 완성을 함락시키지 않으신다면 뒤에서는 완성의 적군이 공격하고 앞에는 강한 진군이 있게 되리니 이것은 위험한 일이 될 것입니다.”

 

 

 

於是沛公乃夜引兵從他道還, 更旗幟, 黎明,132) 圍宛城三匝.133) 南陽守欲自剄. 其舍人陳恢曰:「死未晩也.」乃踰城見沛公, 曰:「臣聞足下約, 先入咸陽者王之. 今足下留守宛. 宛, 大郡之都也, 連城數十, 人民衆, 積蓄多, 吏人自以爲降必死, 故皆堅守乘城.134) 今足下盡日止攻, 士死傷者必多;引兵去宛, 宛必隨足下後:足下前則失咸陽之約, 後又有彊宛之患. 爲足下計, 莫若約降, 封其守, 因使止守, 引其甲卒與之西. 諸城未下者, 聞聲爭開門而待, 足下通行無所累.」

 

 

이에 패공은 밤에 군사를 거느리고 다른 길로 돌아와 깃발을 바꾸고 동이 틀 무렵 완성을 세 겹으로 포위했다. 남양태수가 자결하려고 하자, 그의 문객(門客)인 진회(陳恢)가 “죽기에는 아직 이릅니다.”라고 말하더니, 성을 넘어가서 패공을 만났다. 

진회는 패공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이 듣건대 족하(足下)께서는 먼저 함양에 진입하는 사람이 그곳의 왕이 되기로 약속하셨다고 하는데, 지금 족하께서는 이곳에 머물러서 완성을 포위하고 계십니다. 완성은 대군(大郡)의 도성으로서 수십 성이 연이어져 있고 백성은 많고 비축양식도 충분합니다. 또한 관민 모두가 항복하면 반드시 죽게 될 것이라 여기고 있으므로, 그들은 모두 성 위에 올라가 목숨을 걸고 지킬 것입니다. 지금 족하께서 하루 종일 이곳에 멈추어서 공략하신다면 죽거나 부상당하는 병사가 틀림없이 많을 것이며, 병사를 이끌고 완성을 떠나시면 완성의 군사가 반드시 족하의 뒤를 추격하리니, 전자의 경우엔 함양에 먼저 진입해 왕이 되실 기회를 잃게 되며, 후자의 경우엔 또 완성의 강한 군사가 추격해올 우환이 있게 됩니다. 족하께 계책을 올리나니, 차라리 투항을 약조하시어 완성의 태수를 후(侯)에 봉하시고 그로 하여금 이곳에 머물러 지키게 하십시오. 그리고 족하께서는 그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함께 서쪽으로 진격하시면, 아직 항복하지 않은 모든 성읍에서 이 소식을 듣고 다투어 성문을 열고 기다릴 것이니 족하께서는 통행에 막힘이 없을 것입니다.”

 

 

 

沛公曰:「善.」135)乃以宛守爲殷侯,136) 封陳恢千戶. 引兵西, 無不下者. 至丹水,137) 高武侯鰓、138)襄侯王陵降西陵.139) 還攻胡陽,140) 遇番君別將梅鋗, 與皆, 降析、酈.141) 遣魏人甯昌使秦, 使者未來. 是時章邯已以軍降項羽於趙矣.

 

鰓 : 아가미 새. 두려워할 시.   番 : 갈마들 번/ 날랠 파/땅이름 반.  鋗 : 노구솥 현/쓸 견. 노구솥, 냄비, 쟁개비. 작은 동이, 소분. 옥소리.

 

 

패공은 “좋다.”라고 하며 완성의 태수를 은후(殷侯)로 삼고 진회를 천호후(千戶侯)에 봉했다. 그런 후에 병사를 이끌고 서진하니 항복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단수(丹水)에 이르니 고무후(高武侯) 새(鰓)와 양후(襄侯) 왕릉(王陵)이 서릉(西陵)에서 투항했다. 패공은 다시 돌아와 호양(胡陽)을 공략하고 파군(番君)의 별장(別將) 매현(梅鋗)을 만나서 그와 함께 석현(析縣)과 여현(酈縣)을 함락시켰다. 위(魏)나라 사람 영창(寧昌)을 진나라에 밀사로 파견했으나, 영창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이때 장한은 이미 조(趙)나라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항우에게 투항했다.

 

 

 

[각주]

 

1 集解漢書音義曰:「諱邦.」張晏曰:「禮謚法無『高』, 以爲功最高而爲漢帝之太祖, 故特起名焉.」

2 集解李斐曰:「沛, 小沛也. 劉氏隨魏徙大梁, 移在豐, 居中陽里.」孟康曰:「後沛爲郡, 豐爲縣.」索隱按:高祖, 劉累之後, 

  別食邑於范, 士會之裔, 留秦不反, 更爲劉氏. 劉氏隨魏徙大梁, 後居豐, 今言「姓劉氏」者是. 左傳「天子建德, 因生以賜姓, 

  胙之土, 命之氏. 諸侯以字爲謚, 因以爲族」. 說者以爲天子賜姓命氏, 諸侯命族, 族者氏之別名也. 然則因生賜姓, 若舜生姚

  墟, 以爲姚姓, 封之於虞, 卽號有虞氏是也. 若其後子孫更不得賜姓, 卽遂以虞爲姓, 云「姓虞氏」. 今此云「姓劉氏」, 亦其

  義也. 故姓者, 所以統繫百代, 使不別也. 氏者, 所以別子孫之所出. 又系本篇言姓則在上, 言氏則在下, 故五帝本紀云「禹姓

  姒氏, 契姓子氏, 棄姓姬氏」是也. 按:漢改泗水爲沛郡, 治相城, 故注以沛爲小沛也.

3 索隱按:漢書「名邦, 字季」, 此單云字, 亦又可疑. 按:漢高祖長兄名伯, 次名仲, 不見別名, 則季亦是名也. 故項岱云「高祖小字季, 卽位易名邦, 後因諱邦不諱季, 所以季布猶稱姓也」.

4 索隱皇甫謐云:「名執嘉.」王符云:「太上皇名煓.」與湍同音. 正義春秋握成圖云:「劉媼夢赤鳥如龍, 戱己, 生執嘉.」

5 集解文穎曰:「幽州及漢中皆謂老嫗爲媼.」孟康曰:「長老尊稱也. 左師謂太后曰『媼愛燕后賢長安君』. 禮樂志『地神曰媼』. 媼, 母別名也, 音烏老反.」索隱韋昭云:「媼, 婦人長老之稱.」皇甫謐云:「媼蓋姓王氏.」又據春秋握成圖以爲執嘉妻含始, 遊洛池, 生劉季. 詩含神霧亦云. 姓字皆非正史所出, 蓋無可取. 今近有人云「母溫氏」. 貞時打得班固泗水亭長古石碑文, 其字分明作「溫」字, 云「母溫氏」. 貞與賈膺復、徐彦伯、魏奉古等執對反覆, 沈歎古人未聞, 聊記異見, 於何取實也? 孟康注「地神曰媼」者, 禮樂志云「后土富媼」, 張晏曰「坤爲母, 故稱媼」是也. 正義帝王世紀云:「漢昭靈后含始游洛池, 有寶雞銜赤珠出炫日, 后呑之, 生高祖.」詩含神霧亦云. 含始卽昭靈后也. 陳留風俗傳云:「沛公起兵野戰, 喪皇妣於黃鄕, 天下平定, 使使者以梓宮招幽魂, 於是丹蛇在水自灑, 躍入梓宮, 其浴處有遺髮, 謚曰昭靈夫人.」漢儀注云:「高帝母起兵時死小黃城, 後於小黃立陵廟.」括地志云:「小黃故城在汴州陳留縣東北三十三里.」顔師古云:「皇甫謐等妄引讖記, 好奇騁博, 强爲高祖父母名字, 皆非正史所說, 蓋無取焉. 寧有劉媼本姓實存, 史遷肯不詳載? 卽理而言, 斷可知矣.」

6 索隱按:詩含神霧云「赤龍感女媼, 劉季興」. 又廣雅云「有鱗曰蛟龍」.

7 集解服虔曰:「準音拙.」應劭曰:「隆, 高也. 準, 頰權準也. 顔, 額顙也, 齊人謂之顙, 汝南、淮、泗之閒曰顔.」文穎曰:「準, 鼻也.」索隱李斐云:「準, 鼻也. 始皇蜂目長準, 蓋鼻高起.」爾雅:「顔, 額也.」文穎曰:「高祖感龍而生, 故其顔貌似龍, 長頸而高鼻.」

8 正義河圖云:「帝劉季口角戴勝, 斗胸, 龜背, 龍股, 長七尺八寸.」合誠圖云:「赤帝體爲朱鳥, 其表龍顔, 多黑子.」按:左, 陽也. 七十二黑子者, 赤帝七十二日之數也. 木火土金水各居一方, 一歲三百六十日, 四方分之, 各得九十日, 土居中央, 並索四季, 各十八日, 俱成七十二日, 故高祖七十二黑子者, 應火德七十二日之徵也. 有一本「七十日」者, 非也. 許北人呼爲「黶子」, 吳楚謂之「誌」. 誌, 記也.

9 正義喜, 許記反. 施, 尸豉反.

10 集解服虔曰:「豁, 達也.」

11 集解應劭曰:「試補吏.」

12 正義秦法, 十里一亭, 十亭一鄕. 亭長, 主亭之吏. 高祖爲泗水亭長也. 國語有「寓室」, 卽今之亭也. 亭長, 蓋今里長也. 民有訟諍, 吏留平辨, 得成其政. 括地志云:「泗水亭在徐州沛縣東一百步, 有高祖廟也.」

13 集解韋昭曰:「貰, 賖也.」索隱鄒誕生貰音世, 與字林聲韻並同. 又音時夜反. 廣雅云:「貰, 賖也.」說文云:「貰, 貸也.」臨淮有貰陽縣. 漢書功臣表「貰陽侯劉纏」, 而此紀作「射陽」, 則「貰」亦「射」也.

14 集解如淳曰:「讎亦售.」索隱樂彦云借「讎」爲「售」, 蓋古字少, 仮借耳. 今亦依字讀. 蓋高祖大度, 旣貰飮, 且讎其數倍價也.

15 索隱周禮小司寇云:「聽稱責以傅別.」鄭司農云:「傅別, 券書也.」康成云:「傅別, 謂大手書於札中而別之也.」然則古用簡札書, 故可折. 至歲終總棄不責也.

16 集解應劭曰:「徭役也.」索隱韋昭云:「秦所都, 武帝更名渭城.」應劭云:「今長安也.」按:關中記云「孝公都咸陽, 今渭城是, 在渭北. 始皇都咸陽, 今城南大城是也」. 名咸陽者, 山南曰陽, 水北亦曰陽, 其地在渭水之北, 又在九嵕諸山之南, 故曰咸陽.

17 正義包愷云:「上音館, 下音官. 恣意, 故縱觀也.」

18 集解漢書音義曰:「單音善. 父音斧.」索隱韋昭云:「單父, 縣名, 屬山陽.」崔浩云:「史失其名, 但擧姓而言公.」又按:漢書舊儀云「呂公, 汝南新蔡人」. 又相經云「魏人呂公, 名文, 字叔平」也.

19 集解孟康曰:「主吏, 功曹也.」

20 集解文穎曰:「主賦斂禮進, 爲之帥.」索隱鄭氏云:「主賦斂禮錢也.」顔師古曰:「進者, 會禮之財. 字本作『賮』, 聲轉爲『進』. 『宣帝數負進』, 義與此同.」

21 正義大夫, 客之貴者總稱之.

22 集解應劭曰:「紿, 欺也. 音殆.」索隱韋昭云:「紿, 詐也.」劉氏云:「紿, 欺負也.」何休云:「紿, 疑也.」謂高祖素狎易諸吏, 乃詐爲謁. 謁謂以札書姓名, 若今之通刺, 而兼載錢谷也.

23 正義上在果反. 下在臥反.

24 正義音丘忽反.

25 集解文穎曰:「闌言希也. 謂飮酒者半罷半在, 謂之闌.」

26 正義不敢對衆顯言, 故目動而留之.

27 集解張晏曰:「古人相與語多自稱臣, 自卑下之道, 若今人相與語皆自稱僕.」

28 正義息, 生也. 謂所生之女也.

29 集解服虔曰:「元, 長也. 食邑於魯.」韋昭曰:「元, 謚也.」正義漢制, 帝女曰「公主」, 儀比諸侯;姊妹曰「長公主」, 儀比諸侯王;姑曰「大長公主」, 儀比諸侯王.

30 集解服虔曰:「告音如『嗥呼』之『嗥』.」李斐曰:「休謁之名也. 吉曰告, 凶曰寧.」孟康曰:「古者名吏休仮曰告. 告又音嚳. 漢律, 吏二千石有予告、賜告. 予告者, 在官有功最, 法所當得者也. 賜告者, 病滿三月當免, 天子優賜, 復其告, 使得帶印紱, 將官屬, 歸家治疾也.」索隱韋昭云:「告, 請歸乞仮也. 音『告語』之『告』. 故戰國策曰『商君告歸』, 延篤以爲告歸, 今之歸寧也.」劉伯莊、顔師古並音古篤反, 非號嚳兩音也. 按:東觀漢記田邑傳云「邑年三十, 歷卿大夫, 號歸罷, 厭事, 少所嗜欲」. 尋號與嗥同, 古者當有此語, 故服氏云「如號呼之號」, 音豪. 今以服虔雖據田邑「號歸」, 亦恐未得. 然此「告」字當音誥, 誥號聲相近, 故後「告歸」「號歸」遂變耳.

31 正義必捕反, 以食飼人也. 父本請飮, 呂后因飼之. 國語云:「國中童子無不餔.」

32 集解應劭曰:「以竹始生皮作冠, 今鵲尾冠是也. 求盜者, 舊時亭有兩卒, 其一爲亭父, 掌開閉埽除, 一爲求盜, 掌逐捕盜賊. 薛, 魯國縣也. 有作冠師, 故往治之.」索隱應劭云:「一名『長冠』. 側竹皮裹以縱前, 高七寸, 廣三寸, 如板.」又蔡邕獨斷云:「長冠, 楚制也. 高祖以竹皮爲之, 謂之『劉氏冠』.」司馬彪輿服志亦以「劉氏冠」爲鵲尾冠也. 應劭云:「舊亭卒名『弩父』, 陳、楚謂之『亭父』, 或云『亭部』, 淮、泗謂之『求盜』也.」

33 正義音館, 下同.

34 正義音官. 顔師古云:「後號爲『劉氏冠』. 其後詔曰『爵非公乘以上下得冠劉氏冠』, 卽此也.」

35 正義度, 田洛反. 比, 必寐反.

36 正義被, 加也.

37 索隱舊音經. 按:廣雅云「徑, 斜過也」. 字林云「徑, 小道也, 音古定反」. 言酒後放徒, 夜徑行澤中, 不敢由正路, 且從而求疾也.

38 正義行音下孟反.

39 索隱音逕. 鄭玄曰:「步道曰徑也.」

40 索隱漢舊儀云「斬蛇劍長七尺」. 又高祖云「吾以布衣提三尺劍取天下」. 二文不同者, 崔豹古今注「當高祖爲亭長, 理應提三尺劍耳;及貴, 當別得七尺寶劍」, 故舊儀因言之. 正義按:其蛇大, 理須別求是劍斬之. 三尺劍者, 常佩之劍. 括地志云:「斬蛇溝源出徐州豐縣中平地, 故老云高祖斬蛇處, 至縣西十五里入泡水也.」

41 索隱謂斬蛇分爲兩段也.

42 集解應劭曰:「秦襄公自以居西戎, 主少昊之神, 作西畤, 祠白帝. 至獻公時櫟陽雨金, 以爲瑞, 又作畦畤, 祠白帝. 少昊, 金德也. 赤帝堯後, 謂漢也. 殺之者, 明漢當滅秦也. 秦自謂水, 漢初自謂土, 皆失之. 至光武乃改定.」索隱按:太康地理志云「畤在櫟陽故城內. 其畤如畦, 故曰畦畤」. 畦音戶圭反. 應注云「秦自謂水」者, 按秦文公獲黑龍, 命河爲德水是也. 又按:春秋合誠圖云「水神哭, 子褒敗」. 宋均以爲高祖斬白蛇而神母哭, 則此母水精也. 此皆謬說. 又注云「至光武乃改」者, 謂改漢爲火德, 秦爲金德, 與雨金及赤帝子之理合也.

43 集解徐廣曰:「一作『苦』.」索隱漢書作「苦」, 謂欲困苦辱之. 一本或作「笞」. 說文云:「笞, 擊也.」

44 索隱包愷、劉伯莊音古孝反.

45 集解應劭曰:「負, 恃也.」索隱晉灼云:「自恃斬蛇事.」

46 索隱厭音一涉反, 又一冉反. 廣雅云:「厭, 鎭也.」

47 集解徐廣曰:「芒, 今臨淮縣也. 碭縣在梁.」駰案:應劭曰「二縣之界有山澤之固, 故隱於其閒也」. 正義括地志云:「宋州碭山縣在州東一百五十里, 本漢碭縣也. 碭山在縣東.」

48 正義京房易(兆)[飛]候云:「何以知賢人隱? (顔)師(古)曰:『四方常有大雲, 五色具而不雨, 其下有賢人隱矣.』」故呂后望雲氣而得之.

49 集解徐廣曰:「高祖時年四十八.」索隱應劭云:「始皇欲以一至萬, 示不相襲. 始者一, 故至子稱二世.」崔浩云:「二世, 始皇子胡亥.」又按:善文稱隱士云「趙高爲二世殺十七兄而立今王」, 則二世是第十八子也.

50 索隱蘄, 縣名, 屬沛, 音機, 又音旂.

51 索隱按:漢書蕭、曹傳, 參爲獄掾, 何爲主吏也.

52 索隱說文云「以力脅之云劫」也.

53 索隱漢書作「數百人」. 劉伯莊云「言數十人或至百人」, 則是百人已下也.

54 集解韋昭曰:「以爲保障.」

55 索隱按:范曄云「剋城多所誅殺, 故云屠也」.

56 索隱言一朝破敗, 使肝腦塗地.

57 正義能, 才能也. 高祖謙言材能薄劣, 不能完全其衆. 能者, 獸, 形色似熊, 足似鹿. 爲物堅中而强力, 人之有賢才者, 皆謂之能也.

58 集解徐廣曰:「九月也.」駰案:漢書音義曰「舊楚僭稱王, 其縣宰爲公. 陳涉爲楚王, 沛公起應涉, 故從楚制稱曰公」.

59 集解應劭曰:「左傳曰黃帝戰於阪泉, 以定天下. 蚩尤好五兵, 故祠祭之求福祥也.」瓚曰:「管仲云『割盧山交而出水, 金從之出, 蚩尤受之以作劍戟』.」索隱按:管子云「葛盧之山, 發而出金」, 今注引「發」作「交」及「割」, 皆誤也.

60 集解應劭曰:「釁, 祭也. 殺牲以血塗鼓曰釁.」瓚曰:「案禮記及大戴禮有釁廟之禮, 皆無祭事.」索隱說文云:「釁, 血祭也.」司馬法曰:「血于鼙鼓者, 神戎器也.」顔師古曰:「凡殺牲以血祭者, 皆名爲釁.」臣瓚以爲「皆無祭事」, 非也. 又古人新成鐘鼎, 亦必釁之. 應劭云:「釁呼爲舋.」馬融注周禮灼龜之兆云:「謂其象似玉、瓦、原之釁■, 是用名之.」此說皆非. ■音火稼反.

61 索隱墨翟云:「幟, 帛長丈五, 廣半幅.」字詁云:「幟, 標也.」字林云:「熊旗五斿, 謂與士卒爲期於其下, 故曰旗也.」幟, 或作「識」, 或作「志」. 嵇康音試. 蕭該音熾.

62 索隱鄧展曰:「縣名, 屬山陽, 章帝改曰胡陸.」

63 集解鄭德曰:「音房豫, 屬山陽郡.」索隱鄭玄曰「屬山陽」也.

64 索隱應劭云:「章字文, 陳人.」

65 索隱文穎云:「在新豐東二十里戱亭北.」孟康云:「水名也.」又述征記云:「戱水自驪山馮公谷北流, 歷戱亭, 東入渭.」按:今其水東惟有戱驛存.

66 索隱爲章邯所破而還. 邯音酣.

67 索隱按:漢書高紀, 二世二年八月, 武臣自立爲趙王, 田儋自立爲齊王, 韓廣自立爲燕王, 魏咎自立爲魏王也.

68 集解文穎曰:「泗川, 今沛郡也, 高祖更名沛. 秦時御史監郡, 若今刺史. 平, 名也.」索隱如淳云:「秦幷天下爲三十六郡, 置守、尉、監, 故此有『監平』, 下有『守壯』, 則平、壯皆名也.」

69 集解如淳曰:「壯, 名也.」

70 集解如淳曰:「戚音將毒反.」索隱晉灼云:「東海縣也.」鄭德、包愷並如字讀. 李登音千笠反. 正義括地志云:「沂州臨沂縣有漢戚縣故城. 地理志云臨沂縣屬東海郡.」

71 索隱顔師古云「得, 司馬之名」, 非也. 按:後云「左司馬曹無傷」, 自此已下更不見替易處, 蓋是左司馬無傷得泗川守壯而殺之耳.

72 集解鄭德曰:「亢音人相亢答, 父音甫. 屬任城郡.」索隱舊音剛. 劉伯莊、包愷並同音苦浪反. 正義音剛, 又苦浪反. 括地志云:「亢父, 縣也, 沛公屯軍於此也.」

73 集解文穎曰:「梁惠王孫仮爲秦所滅, 轉東徙於豐, 故曰『豐, 梁徙』.」

74 集解服虔曰:「雅, 故也.」蘇林曰:「雅, 素也.」

75 集解文穎曰:「秦嘉, 東陽郡人也, 爲甯縣君.」瓚曰:「陳勝傳曰『廣陵人秦嘉』, 然則嘉非東陽人也. 秦嘉初起兵於郯, 號曰大司馬, 又不爲甯縣君. 東陽甯君自一人, 秦嘉又自一人.」索隱臣瓚以爲二人. 按:下文直云「東陽甯君」, 又別言「秦嘉」, 明臣瓚之說爲得. 顔師古以甯是姓, 君者, 時人號曰君耳.

76 索隱韋昭云:「今彭城留縣也.」正義括地志云:「留城在徐州沛縣東南五十里, 卽張良所封處.」

77 集解如淳曰:「從陳涉將也. 涉在陳, 其將相別在他許, 皆稱陳. ■, 章邯司馬.」索隱謂章邯從陳別將, 將兵向他處, 而遣司馬■將領兵士, 北定楚地, 故如淳云「■, 章邯司馬」也. 孔文祥亦曰「邯別遣■屠相」. 又一說云「從謂追逐之, 言章邯討逐陳別將, 而司馬■別將兵北定楚」, 亦通.

78 索隱韋昭云:「相, 沛縣.」應劭曰:「碭屬梁國.」蘇林音唐, 又音宕. 正義括地志云:「故相城在徐州符離縣西北九十里. 碭在宋州東一百五十里.」

79 索隱韋昭云:「蕭, 沛之縣名, 謂在蕭縣之西也.」

80 索隱韋昭云:「縣名, 屬梁國.」

81 索隱按:范曄云「得城爲拔」是也.

82 正義今徐州滕縣, 故薛城也.

83 集解徐廣曰:「三月.」

84 集解蘇林曰:「五大夫, 第九爵也. 以五大夫爲將, 凡十人也.」

85 集解徐廣曰:「表云『拔之, 雍齒奔魏』.」

86 索隱韋昭云:「穎川縣.」正義襄城, 許州縣.

87 索隱韋昭云:「臨淮縣. 音吁夷.」正義楚縣也.

88 索隱韋昭云:「東郡之縣名.」正義濟州縣也.

89 集解服虔曰:「師敗曰北.」

90 索隱按地理志屬濟陰.

91 索隱韋昭云:「東郡之縣名.」正義濮陽故城在濮州西八十六里, 本漢濮陽縣.

92 集解李奇曰:「振, 整也.」如淳曰:「振, 起也. 收敗卒自振迅而復起也.」

93 集解文穎曰:「決水以自環守爲固也.」張晏曰:「依河水以自環繞作壘.」正義按:二說皆通. 其濮陽縣北臨黃河, 言秦軍北阻黃河, 南鑿溝引黃河水環繞作壁壘爲固, 楚軍乃去.

94 索隱按:地理志濟陰之縣也.

95 索隱韋昭云:「故杞國, 今陳留之縣.」

96 索隱韋昭云:「上陳留縣.」正義在雍丘東.

97 索隱荀悅漢紀云「故楚令尹宋義」, 當別有所出也.

98 集解周禮有銜枚氏. 鄭玄曰「銜枚, 止言語囂讙也. 枚狀如箸, 橫銜之, 繣結於項者」. 繣音獲.

99 索隱蘇林音如字. 鄭德音「遏絶」之「遏」. 徐廣音烏轄反. 今依字讀之也.

100 正義括地志云:「宋州本秦碭郡.」蘇林云:「長如郡守.」韋昭云:「秦名曰守, 是時改曰長.」

101 索隱按表, 靑封信陽侯. 正義應劭云:「天子曰師尹, 諸侯曰令尹. 時去六國近, 故置令尹.」臣瓚曰:「諸侯之卿, 唯楚稱令尹, 其餘國不稱. 時立楚之後, 故置官司皆如楚舊也.」

102 索隱韋昭云:「函谷、武關也.」又三輔舊事云:「西以散關爲界, 東以函谷爲界, 二關之中謂之關中.」

103 索隱韋昭云:「憤激也.」

104 索隱說文云:「僄, 疾也;悍, 勇也.」方言云:「僄, 輕也.」劉音匹妙反. 猾賊, 漢書作「禍賊」也.

105 集解徐廣曰:「遺, 一作『■』. ■, 食也, 音在妙反.」駰案:如淳曰「類無復有活而■食者也. 靑州俗言無遺爲無■類」.

106 集解如淳曰:「楚謂陳涉也. 數進取, 多所攻取.」

107 集解漢書音義曰:「陳涉也.」

108 正義遣長者扶持仁義而西, 告諭秦長少, 令降下也.

109 集解徐廣曰:「一無此字.」

110 集解漢書音義曰:「道由碭也.」

111 集解漢書音義曰:「二縣名.」索隱成陽在濟陰, 韋昭云「在穎川」, 非也. 服虔云:「杠里, 縣名.」如淳云:「秦軍所別屯地名也.」

112 集解徐廣曰:「表云三年十月, 攻破東郡尉及王離軍於成武南.」

113 正義地理志云昌邑縣屬山陽. 括地志云:「在曹州成武縣東北三十二里, 有梁丘故城是也.」

114 索隱韋昭云:「縣名, 屬沛.」

115 集解應劭曰:「楚懷王將也.」漢書音義曰:「功臣表云棘蒲剛侯陳武. 武, 一姓柴. 『剛武侯』宜爲『剛侯武』, 魏將也.」瓚曰:「功臣表柴武以將軍起薛, 別救東阿, 至霸上, 入漢中, 非懷王將也, 又非魏將也, 例未稱謚.」正義顔師古云:「史失其名姓, 唯識其爵號, 不知誰也, 不當改爲『剛侯武』. 應氏以爲懷王將, 又云魏將, 無據矣.」表六年三月封. 孟、顔二人說是.

116 正義並魏將也. 欣字或作「訢」, 音許斤反. 蒲, 漢書作「滿」, 並通也.

117 集解文穎曰:「聚邑名也, 屬陳留圉縣.」瓚曰:「陳留傳曰在雍丘西南.」

118 集解鄭德曰:「音歷異基.」

119 集解漢書音義曰:「春秋傳曰輕行無鐘鼓曰襲.」

120 索隱韋昭云:「在山陽.」

121 索隱韋昭云:「河南縣.」

122 索隱韋昭云:「東郡縣.」正義括地志云:「白馬故城在滑州衛南縣西南二十四里. 戴延之西征記云白馬城, 故衛之漕邑.」

123 索隱徐廣云「在中牟」. 韋昭云「志不載」. 司馬彪郡國志中牟有曲遇聚也.

124 索隱韋昭云:「故衛地, 河南縣也.」

125 集解徐廣曰:「四月.」

126 集解文穎曰:「河南新鄭南至潁川南北, 皆韓地也. 以良累世相韓, 故因之.」瓚曰:「轘轅, 險道名, 在緱氏東南.」索隱按:十三州志云河南緱氏縣, 以山爲名. 一云轘轅凡九十二曲, 是險道也.

127 集解地理志河南有平陰縣, 今河陰是也.

128 正義今洛州, 夏禹所都.

129 索隱音檥. 許愼以爲側齧也.

130 集解地理志南陽有犨縣.

131 正義守音狩. 宛, 於元反. 括地志云:「南陽縣故城在宛大城之南隅, 其西南有二面, 皆故宛城.」

132 索隱音犂. 黎猶比也, 謂比至天明也. 漢書作「遲」, 音値. 値, 待也, 謂待天明, 皆言早意也.

133 索隱按:楚漢春秋曰「上南攻宛, 匿旌旗, 人銜枚, 馬東舌, 雞未鳴, 圍宛城三匝」也.

134 索隱李奇曰:「乘, 守也.」韋昭曰:「乘, 登也.」

135 集解徐廣曰:「七月也.」

136 索隱韋昭曰:「在河內.」

137 索隱韋昭曰:「在河內.」正義括地志云:「故丹城在鄧州內鄕縣西南百三十里, 南去丹水二百步. 汲冢紀年云后稷放帝子丹朱于丹水是也. 輿地志云秦爲丹水縣也. 地理志云丹水縣屬弘農郡. 抱朴子云『丹水出丹魚, 先夏至十日, 夜伺之, 魚浮水側, 光照如火, 網而取之, 割其血以塗足, 可以步行水上, 長居川中不溺』.」

138 集解蘇林曰:「鰓音『魚鰓』之『鰓』.」晉灼曰:「功臣表戚鰓也.」

139 集解韋昭曰:「漢封王陵爲安國侯, 初起兵時在南陽, 南陽有穰縣, 疑『襄』當爲『穰』, 而無『禾』, 字省耳. 今『邵公』或作『召』字, 此類多矣.」瓚曰:「時韓成封穰侯, 江夏有襄, 是陵所封.」索隱按:王陵封安國侯, 是定天下爲丞相時封耳. 此言襄侯, 當如臣瓚解, 蓋初封江夏之襄也.

140 集解一云「陵」. 索隱韋昭曰:「南陽縣.」

141 集解如淳曰:「持益反.」索隱鄒誕生音錫. 酈音歷, 蘇林、如淳音擲. 析屬弘農, 酈屬南陽, 出地理志. 而左傳云析一名白羽. 顔師古云「析, 今內鄕縣. 酈, 今菊潭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