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歷史와文學/史記

史記 卷八. 高祖本記 Ⅲ

柳川 2019. 5. 11. 19:25

                                    史記 卷八. 高祖本記 Ⅲ

 

 

高祖欲長都雒陽, 齊人劉敬說, 乃留侯勸上入都關中, 高祖是日駕, 入都關中. 六月, 大赦天下.

十月, 燕王臧荼反, 攻下代地. 高祖自將擊之, 得燕王臧荼. 卽立太尉盧綰爲燕王. 使丞相噲將兵攻代.

 

 

고조는 장기간 낙양에 도읍하려고 했으나, 제(齊)나라 사람 유경(劉敬)과 유후(留侯, 장량을 가리킴)가 관중에 들어가서 그 곳에 도읍하기를 권하니, 고조는 그날 즉시 어가를 몰아서 관중에 진입해 도읍했다. 6월, 천하에 대 사면령을 내렸다.

 

10월, 연왕(燕王) 장도가 모반하자 대(代) 땅을 공략해 함락시켰다. 고조는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공격해 연왕 장도를 사로잡았으며, 태위(太尉) 노관(盧綰)을 세워서 연왕으로 삼고 승상 번쾌(樊噲)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려서 대 땅을 공략하게 했다.

 

 

 

 

其秋, 利幾反,260) 高祖自將兵擊之, 利幾走. 利幾者, 項氏之將. 項氏敗, 利幾爲陳公, 不隨項羽, 亡降高祖, 高祖侯之潁川. 高祖至雒陽, 擧通侯籍召之,261) 而利幾恐, 故反.

 

 

이해 가을, 이기(利幾)가 모반하자 고조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그를 토벌하니 이기는 도주했다. 이기는 원래 항우의 부장이었으나, 항우가 패할 당시 진현(陳縣) 현령이던 그는 항우를 따르지 않고 도주해 고조에게 투항했다. 고조는 그를 영천후(潁川侯)에 봉했으나, 고조가 낙양에 도착한 후 명부에 실린 열후들을 모두 소집하니, 이기는 두려워 모반했던 것이다.

 

 

 

 

六年, 高祖五日一朝太公, 如家人父子禮. 太公家令說太公曰:「天無二日, 土無二王. 今高祖雖子, 人主也;太公雖父, 人臣也. 柰何令人主拜人臣!  如此, 則威重不行.」後高祖朝, 太公擁篲,262) 迎門卻行. 高祖大驚, 下扶太公. 太公曰:「帝, 人主也, 柰何以我亂天下法!」於是高祖乃尊太公爲太上皇.263) 心善家令言,264) 賜金五百斤.

 

篲 : 대비 수/살별 세. 대비. 대로 만든 비. [세]살별. 혜성.

 

 

 

6년(기원전 201년), 고조는 5일에 한 번씩 태공(太公, 고조의 부친을 가리킴)을 배알했는데, 그들은 일반 서민의 부자지간의 예절을 따랐다. 태공의 가신(家臣)이 태공에게 말하기를, “하늘에는 태양이 오직 하나뿐이며 땅에는 두 명의 군주가 있을 수 없습니다. 지금 고조께서 비록 집에서는 자식이지만 천하 백성들의 군주이시며, 태공께서는 비록 고조의 아버지가 되시지만 또 그의 신하이기도 한데, 어찌 군주로 하여금 신하를 배알하게 하실 수 있습니까? 이렇게 하면 황제의 위엄이 서지 않습니다.”라 했다.

그 후 고조가 배알하러 왔을 때 태공은 빗자루를 들고 문전에서 맞이해 뒤로 물러서니 고조가 크게 라며 어가에서 내려서 태공을 부축했다. 그러자 태공은 “황제는 천하 백성들의 군주이시니 어찌 나로 인해 천하의 법도를 어지럽힐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이에 고조는 태공을 추존해 태상황(太上皇)이라고 하고, 내심으로 가신의 말을 가상히 여겨 그에게 금 5백 근을 하사했다.

 

 

 

 

十二月, 人有上變事告楚王信謀反, 上問左右, 左右爭欲擊之. 用陳平計, 乃僞遊雲夢,265) 會諸侯於陳, 楚王信迎, 卽因執之. 是日, 大赦天下. 田肯266)賀, 因說高祖曰:「陛下得韓信, 又治秦中.267) 秦, 形勝之國,268) 帶河山之險, 縣隔千里, 持戟百萬, 秦得百二焉.269) 地埶便利, 其以下兵於諸侯, 譬猶居高屋之上建瓴水也.270) 夫齊, 東有琅邪、卽墨之饒, 南有泰山之固, 西有濁河之限,271) 北有勃海之利.272) 地方二千里, 持戟百萬, 縣隔千里之外,273) 齊得十二焉.274) 故此東西秦也. 非親子弟, 莫可使王齊矣.」高祖曰:「善.」賜黃金五百斤.

 

百二 : 방어() 튼튼하여 적의 지세보다  배나 유리한 지세 나타내는 . 이때 ()’ 곱절 뜻.

瓴 : 동이 령. 동이. 양옆에 쥘 귀가 달린 동이. 암기와. 벽돌. 바닥에 까는 벽돌.

 

 

12월, 어떤 사람이 변란사건을 상서하면서 초왕(楚王) 한신(韓信)이 반란을 꾀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에 고조가 좌우 대의 의견을 물으니 대신들은 다투어 그를 토벌하고자 했다. 고조는 진평의 계책을 채택해 거짓으로 운몽택(雲夢澤)에 행유(行遊)해 진현에서 제후들을 회견했다. 초왕 한신이 나와 영접하자 즉시 그를 체포했다. 그날 고조는 천하에 대 사면령을 내렸다. 전긍(田肯)이 하례를 올리며 고조에게 진언하였다.

“폐하께서는 한신을 사로잡고 또 관중에 도읍하셨습니다. 진(秦)은 형승지국(形勝之國)으로서 험난한 산하에 둘러싸여 있으며 제후국들과 천리나 멀리 떨어져 있으니, 제후의 군사들이 1백만이라면 진(秦) 땅은 2만의 군사만 있으면 막아낼 수 있습니다. 지세가 이렇게 유리하므로 제후들에 대한 용병(用兵)은 마치 높은 지붕 위에서 기와고랑에 물을 쏟는 것과 같이 저지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제(齊) 땅은 동쪽으로 산물이 풍부한 낭야(琅邪)와 즉묵(卽墨)이 있고 남쪽으로 험준한 태산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황하의 가로막음이 있고 북쪽으로는 발해(渤海)의 이익이 있습니다. 땅은 사방으로 2천 리나 되고 제후국은 천리 밖에 떨어져 있으니 제후국의 군사가 1백만이라면 제(齊) 땅은 20만의 군사만으로도 막아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두 곳은 동진(東秦)과 서진(西秦)이라고 칭할 수 있으니, 폐하의 친자제가 아니면 제왕(齊王)에 봉하지 마십시오.” 

고조는 “좋소.”라고 말하며 황금 5백 근을 하사했다.

 

 

 

 

後十餘日, 封韓信爲淮陰侯, 分其地爲二國. 高祖曰將軍劉賈數有功, 以爲荊王,275) 王淮東. 弟交爲楚王, 王淮西. 子肥爲齊王, 王七十餘城, 民能齊言者皆屬齊.276) 乃論功, 與諸列侯剖符行封. 徙韓王信太原.277)

 

 

10여 일이 지난 후, 한신을 회음후(淮陰侯)에 봉하고 그의 봉지를 두 나라로 나누었다. 고조는 장군 유고(劉賈)가 여러 차례 공로를 세웠다고 하며 그를 형왕(荊王)으로 삼아 회하(淮河) 동쪽 지역을 다스리게 했다. 또 아우 유교(劉交)를 초왕(楚王)으로 삼아 회하 서쪽 지역을 다스리게 했으며, 아들 유비(劉肥)를 제왕(齊王)으로 삼아 70여 성을 다스리게 하고 제나라 말을 할 수 있는 부근 백성들을 모두 제나라에 귀속시켰다. 그리고 고조는 논공행상해 여러 열후들에게 부절(符節)을 쪼개어 봉후(封侯)의 증표로서 나누어주고, 한왕 한신을 태원(太原)으로 옮기게 했다.

 

 

 

 

七年, 匈奴攻韓王信馬邑,278) 信因與謀反太原. 白土279)曼丘臣、王黃立故趙將趙利爲王以反, 高祖自往擊之. 會天寒, 士卒墮指者什二三, 遂至平城.280) 匈奴圍我平城, 七日而後罷去. 令樊噲止定代地. 立兄劉仲爲代王.

 

 

7년(기원전 200년), 흉노가 마읍(馬邑)에서 한왕 한신을 공격하자, 한신은 이를 기회로 흉노와 태원에서 모반했다. 그러자 백토(白土)의 만구신(曼丘臣)과 왕황(王黃)도 예전 조(趙)나라 장수였던 조리(趙利)를 왕으로 옹립해 모반하니, 고조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토벌에 나섰다. 그러나 마침 날씨가 추워서 손가락이 얼어 떨어진 병사가 10명 중 2-3명이나 되었으므로 결국 평성(平城)으로 향했다. 이때 흉노는 고조를 평성에서 포위했다가 7일 후에야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고조는 번쾌로 하여금 대(代) 땅에 남아서 평정하게 하고, 형 유중(劉仲)을 세워 대왕(代王)으로 삼았다.

 

 

 

 

二月, 高祖自平城過趙、雒陽, 至長安. 長樂宮成, 丞相已下徙治長安.281)

八年, 高祖東擊韓王信餘反寇於東垣.282)

 

 

2월, 고조는 평성에서부터 조나라와 낙양을 경유해 장안(長安)에 도착했다. 장락궁(長樂宮)이 완성되자, 승상(丞相) 이하 모든 관료들이 장안으로 옮겨와서 정무를 수행했다.

 

8년(기원전 199년), 고조는 또 동쪽으로 진군해 한왕 한신의 잔여반군을 동원(東垣)에서 공격했다.

 

 

 

 

蕭丞相營作未央宮,283) 立東闕、北闕、284)前殿、武庫、太倉. 高祖還, 見宮闕壯甚, 怒, 謂蕭何曰:「天下匈匈苦戰數歲, 成敗未可知, 是何治宮室過度也?」蕭何曰:「天下方未定, 故可因遂就宮室. 且夫天子四海爲家, 非壯麗無以重威, 且無令後世有以加也.」高祖乃說.

 

 

소승상(蕭丞相, 소하를 가리킴)이 미앙궁(未央宮)을 축조해 동궐(東闕), 북궐(北闕), 전전(前殿), 무고(武庫), 태창(太倉)을 지었다.

고조가 돌아와서 궁궐이 매우 웅장한을 보고 노하여 소하에게 이르기를 “천하가 혼란스러워 수년간 고전하면서도 아직 그 성패를 알 수 없건만, 어찌해 지나치게 화려한 궁실을 지었는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소하가 “바로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기회를 이용해서 궁실을 축조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천자는 천하를 집으로 삼으니, 궁전이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으면 위엄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하오니 또한 후세에는 이보다 더욱 장려(壯麗)한 궁전을 지을 

수 없게 하십시오.”라고 하니, 고조는 기뻐했다.

 

 

 

 

高祖之東垣, 過柏人,285) 趙相貫高等謀弑高祖, 高祖心動, 因不留. 代王劉仲棄國亡, 自歸雒陽, 廢以爲合陽侯.286)九年, 趙相貫高等事發覺, 夷三族. 廢趙王敖爲宣平侯. 是歲, 徙貴族楚昭、屈、景、懷、齊田氏關中. 未央宮成. 高祖大朝諸侯群臣, 置酒未央前殿. 高祖奉玉卮,287) 起爲太上皇壽, 曰:「始大人常以臣無賴,288) 不能治産業, 不如仲力. 今某之業所就孰與仲多?」殿上群臣皆呼萬歲, 大笑爲樂. 

 

 

고조가 동원으로 행차하는 길에 백인(柏人)을 경유했는데, 조나라의 승상 관고(貫高) 등이 음모해 고조를 시해하려고 했다. 고조는(원래 백인에서 유숙하려고 했으나) 마음이 불안해 백인에서 유숙하지 않았다. 대왕(代王) 유중이 봉국을 버리고 도망쳐 스스로 낙양으로 돌아오니, 고조는 그의 왕위를 취소하고 다시 합양후(合陽侯)에 봉했다.

9년(기원전 198년), 조나라 승상 관고 등의 음모사건이 발각되자 그들의 삼족(三族)을 멸하고, 조왕(趙王) 장오(張敖)를 폐위해 선평후(宣平侯)에 봉했다. 이해 고조는 초 나라의 귀족 소씨(昭氏), 굴씨(屈氏), 경씨(景氏), 회씨(懷氏)와 제나라의 귀족 전씨(田氏)를 관중으로 옮겨오게 했다.   

 

미앙궁이 완성되자 고조는 제후들과 군신들을 소집해 미앙궁 전전(前殿)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고조는 옥 술잔을 받쳐 들고 일어나서 태상황에게 축수하며 말하기를 “당초에 대인(大人, 태상황을 가리킴)께서는 항상 내가 재주가 없어서 생업을 꾸려나가지 못할 것이며 둘째 형 유중처럼 노력하지도 않는다고 여기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내가 이룬 업적을 유중과 비교하면 누구 것이 더 많습니까?”라고 하니, 전상(殿上)의 대신들이 만세를 외치고 큰소리로 웃으며 즐거워했다.

 

 

 

 

十年十月, 淮南王黥布、梁王彭越、燕王盧綰、荊王劉賈、楚王劉交、齊王劉肥、長沙王吳芮皆來朝長樂宮.289) 春夏無事. 七月, 太上皇崩櫟陽宮. 楚王、梁王皆來送葬.290) 赦櫟陽囚. 更命酈邑曰新豐.291)

 

 

10년(기원전 197년) 10월, 회남왕(淮南王) 경포, 양왕(梁王) 팽월, 연왕(燕王) 노관, 형왕(荊王) 유고, 초왕(楚王) 유교, 제왕(齊王) 유비, 장사왕(長沙王) 오예가 모두 장락궁에 와서 고조를 조현(朝見)했다. 봄과 여름 동안에는 국가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7월, 태상황이 역양궁(櫟陽宮)에서 서거하니, 초왕 유교와 양왕 팽월이 와서 영구(靈柩)를 전송했다. 고조는 역양의 죄수들을 사면하고 여읍(酈邑)을 신풍(新豐)으로 개명했다.

 

 

 

 

八月, 趙相國陳豨292)反代地. 上曰:「豨嘗爲吾使, 甚有信. 代地吾所急也, 故封豨爲列侯,293) 以相國守代, 今乃與王黃等劫掠代地! 代地吏民非有罪也. 其赦代吏民.」九月, 上自東往擊之. 至邯鄲, 上喜曰:「豨不南據邯鄲而阻漳水, 吾知其無能爲也.」聞豨將皆故賈人也, 上曰:「吾知所以與之.」 乃多以金啗豨將, 豨將多降者.

 

 

8월, 조나라의 상국(相國) 진희(陳豨)가 대(代) 땅에서 모반했다. 그러자 황상(皇上)은 이렇게 말했다.

“진희는 예전에 나의 부하로 있었는데 매우 신용이 있었소. 당초 나는 대 땅이 중요한 곳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진희를 열후로 봉해 상국의 신분으로 대를 지키게 했건만, 지금 뜻밖에도 왕황(王黃) 등과 함께 대를 강탈하려고 하고 있소. 그러나 대 땅의 관리와 백성들은 죄가 없으니 그들을 사면해주도록 하오.”

 

9월, 황상은 친히 동진해 진희를 공격했다. 한단(邯鄲)에 도착하자 황상은 기뻐하며 말하기를 “진희가 남쪽으로 한단을 근거지로 삼지 않고 장수(漳水)에 의지해서 저지하려고 하니, 그가 별 능력이 없음을 알겠노라.”라 했다. 그리고 진희의 부장들이 이전에 모두 장사꾼이었다는 말을 듣자 황상은 “나는 그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알고 있소.”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진희의 부장들을 황금으로 유혹하니 투항하는 자가 많았다.

 

 

 

 

十一年, 高祖在邯鄲誅豨等未畢, 豨將侯敞將萬餘人游行, 王黃軍曲逆,294) 張春渡河295)擊聊城.296) 漢使將軍郭蒙與齊將擊, 大破之. 太尉周勃297)道太原入,298) 定代地. 至馬邑, 馬邑不下, 卽攻殘之. 豨將趙利守東垣, 高祖攻之, 不下. 月餘, 卒罵高祖, 高祖怒. 城降, 令出罵者斬之, 不罵者原之. 於是乃分趙山北, 立子恆以爲代王, 都晉陽.299)

 

 

11년(기원전 196년), 고조가 한단에서 진희 등을 미처 완전히 토벌하기도 전에 진희의 부장 후창(侯敞)이 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유격(遊擊)했으며, 왕황은 곡역(曲逆)에 주둔했고, 장춘(張春)은 황하를 건너 요성(聊城)을 공격했다. 한(漢)의 조정에서는 장군 곽몽(郭蒙)으로 하여금 제(齊)의 장수와 함께 공격하게 해 크게 무찔렀다. 또 태위 주발(周勃)은 태원에서 진공해 대(代) 땅을 평정하고, 마읍(馬邑)에 이르렀으나 마읍이 항복하지 않자 그곳을 공략해 살육했다.

진희의 부장 조리(趙利)가 동원(東垣)을 수비하고 있었는데, 고조가 이곳을 공략하려 했으나 한 달여 동안 함락되지 않았다. 게다가 조리의 병사들이 고조에게 욕을 하니, 화가 난 고조는 성이 함락되자 자기에게 욕한 자를 찾아내어 목을 베고 욕하지 않은 자는 사면해주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조나라의 상산(常山) 이북지역을 대나라에 할양해주고, 아들 항(恒)을 대왕(代王)에 봉해 진양(晉陽)에 도읍하게 했다.

 

 

 

 

春, 淮陰侯韓信謀反關中, 夷三族. 夏, 梁王彭越謀反, 廢遷蜀;復欲反, 遂夷三族. 立子恢爲梁王, 子友爲淮陽王.

秋七月, 淮南王黥布反, 東幷荊王劉賈地, 北渡淮, 楚王交走入薛. 高祖自往擊之. 立子長爲淮南王.

十二年, 十月, 高祖已擊布軍會甀,300) 布走, 令別將追之.

 

 

봄, 회음후 한신이 관중에서 모반하자 그의 삼족을 멸했다. 여름, 양왕 팽월이 모반하자 그를 왕위에서 폐해 촉(蜀) 땅으로 쫓아냈는데, 그가 다시 모반하려 하니 마침내 그의 삼족을 멸했다. 고조는 아들 회(恢)를 세워서 양왕(梁王)으로 삼고, 아들 우(友)를 회양왕(淮陽王)으로 삼았다.

가을 7월, 회남왕 경포가 모반해 동쪽으로 형왕 유가의 봉지를 병탄(倂呑)하고 북쪽으로 회하(淮河)를 건너자, 초왕 유교가 설현(薛縣)으로 도망쳐왔다. 고조가 친히 나아가 공격하고 아들 장(長)을 세워서 회남왕으로 삼았다.

12년(기원전 195년) 10월, 고조는 이미 경포의 군대를 회추(會甀)에서 격퇴시켰다. 경포가 도망치자 별장(別將)으로 하여금 

그를 추격하게 했다.

 

 

 

高祖還歸, 過沛, 留. 置酒沛宮,301) 悉召故人父老子弟縱酒, 發沛中兒得百二十人, 敎之歌. 酒酣,302) 高祖擊筑,303) 自爲歌詩曰:「大風起兮雲飛揚, 威加海內兮歸故鄕, 安得猛士兮守四方!」令兒皆和習之. 高祖乃起舞, 慷慨傷懷, 泣數行下. 

 

 

고조는 도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패현을 지나다가 그곳에 머무르며 패궁(沛宮)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옛 친구들과 마을의 부로, 자제를 모두 초청해 마음껏 술을 마시며, 패현의 아이 120명을 선발해 그들에게 노래를 가르쳤다. 술이 거나해지자 고조는 축(筑)을 타며 직접 노래를 지어서 불렀다.

“큰 바람 몰아치니 구름이 날아오르고,

위엄을 천하에 떨치며 고향에 돌아왔도다.

어떡하면 용사를 얻어서 천하를 지킬 수 있을까?”

고조는 아이들에게도 모두 따라 부르게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며 강개한 마음과 감상에 젖어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謂沛父兄曰:「游子悲故鄕. 吾雖都關中, 萬歲後吾魂魄猶樂思沛. 且朕自沛公以誅暴逆, 遂有天下, 其以沛304)爲朕湯沐邑, 復其民, 世世無有所與.」沛父兄諸母故人日樂飮極驩, 道舊故爲笑樂. 十餘日, 高祖欲去, 沛父兄固請留高祖. 高祖曰:「吾人衆多, 父兄不能給.」乃去. 沛中空縣皆之邑西獻.305) 高祖復留止, 張306)飮三日. 沛父兄皆頓首曰:「沛幸得復, 豐未復, 唯陛下哀憐之.」高祖曰:「豐吾所生長, 極不忘耳, 吾特爲其以雍齒故反我爲魏.」沛父兄固請, 乃幷復豐, 比沛. 於是拜沛侯劉濞307)爲吳王.

 

驩 : 기뻐할 환. 기뻐하다. 기쁨. 말이 평화롭게 즐기는 모양.

 

 

 

패현의 부형(父兄)들에게 말했다.

“나그네는 고향을 그리워하기 마련이니, 내가 비록 관중에 도읍하고 있으나, 만년 후에도 내 혼백은 고향 패현을 좋아하고 그리워할 것이오. 또한 나는 패공의 신분일 때부터 포학무도한 자들을 토벌해 마침내 천하를 소유했으니, 나는 패현을 나의 탕목읍(湯沐邑)으로 삼을 것이며 이곳의 백성들에게 부역을 면제해주어 대대로 납세와 복역을 할 필요가 없게 할 것이오.”

패현의 부형들과 여러 모친들 및 옛 친구들은 날마다 유쾌하게 술을 마시고 지난 일을 담소하며 즐거워했다. 10여 일이 지나서 고조가 돌아가려고 하자 패현의 부형들이 한사코 고조에게 머물기를 청했다. 고조가 “나의 수행원들이 너무 많아서 (오래 머물면) 부형들께서 그 비용을 감당할 수가 없소.”라고 말하고는 떠났다. 패현 사람들은 마을을 텅 비워둔 채 모두 마을 서쪽으로 나가서 고조 일행을 배웅하며 예물을 바쳤다.

그러자 고조는 다시 머물러 천막을 치고 3일간 술을 마시니, 패현의 부형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리고 말하기를 “패현은 다행히 부역이 면제되었으나 풍읍(豐邑)은 부역 면제를 받지 못했으니, 폐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간청합니다.”라 했다.

그러자 고조는 “풍읍은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곳이므로 가장 잊을 수 없는 곳이오. 다만 예전에 풍읍 사람들이 옹치(雍齒)를 따르고 나를 배반해 위(魏)를 도왔기 때문에 그런 것이오.”라고 말했다. 그러나 패현의 부형들이 한사코 간청하니 고조는 풍읍에도 부역을 면제해주어 패현과 같게 했다. 그리고 패후(沛侯) 유비(劉濞)를 오왕(吳王)에 봉했다.

 

 

 

漢將別擊布軍洮水南北,308) 皆大破之, 追得斬布鄱陽. 樊噲別將兵定代, 斬陳豨當城.309)

 

 

한(漢)나라 장수들은 따로 경포의 군사를 도수(洮水)의 남·북쪽에서 공격해 모두 크게 무찌르고 경포를 추격해 파양(鄱陽)에서 참살했다. 번쾌는 따로 병사를 거느리고 대(代)를 평정했으며, 진희를 당성(當城)에서 참살했다.

 

 

 

十一月, 高祖自布軍至長安. 十二月, 高祖曰:「秦始皇帝、楚隱王310)陳涉、魏安釐王、311)齊緡王、312)趙悼襄王313)皆絶無後, 予守冢各十家, 秦皇帝二十家, 魏公子無忌五家.」赦代地吏民爲陳豨、趙利所劫掠者, 皆赦之. 陳豨降將言豨反時, 燕王盧綰使人之豨所, 與陰謀. 上使辟陽侯迎綰,314) 綰稱病. 辟陽侯歸, 具言綰反有端矣. 二月, 使樊噲、周勃將兵擊燕王綰, 赦燕吏民與反者. 立皇子建爲燕王.

 

 

11월, 고조는 경포의 군사를 토벌한 후 장안으로 돌아왔다. 12월, 고조는 “진시황제, 초 은왕(楚隱王) 진섭(陳涉), 위 안희왕(魏安釐王), 제 민왕(齊緡王), 조 도양왕(趙悼襄王)은 모두가 후손이 없으니, 각각 묘지기로 10호(戶)를 주고 진시황제에게는 20호, 위 공자(魏公子) 무기(無忌)에게는 5호를 주도록 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진희와 조리에게 위협당한 대(代) 땅의 관리, 백성들을 모두 사면해주었다. 투항한 진희의 부장이, 진희가 모반할 때 연왕(燕王) 노관이 진희의 거처에 사람을 보내 함께 음모했다고 말했다. 고조는 벽양후(辟陽侯)로 하여금 노관을 불러오게 했으나 노관은 병을 핑계 삼아 오지 않았다.

벽양후가 돌아와서 노관에게 모반의 징조가 있음을 상세히 보고했다. 2월, 고조는 번쾌와 주발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연왕 노관을 공격하게 하고, 반란에 참여한 연(燕) 땅의 관리와 백성들을 사면했다. 그리고 아들 건(建)을 세워서 연왕으로 삼았다.

 

 

 

高祖擊布時, 爲流矢所中, 行道病. 病甚, 呂后迎良醫, 醫入見, 高祖問醫, 醫曰:「病可治.」於是高祖嫚罵之曰:「吾以布衣提三尺劍取天下, 此非天命乎? 命乃在天, 雖扁鵲何益!」遂不使治病, 賜金五十斤罷之. 已而呂后問:「陛下百歲後, 蕭相國卽死, 令誰代之?」上曰:「曹參可.」問其次, 上曰:「王陵可. 然陵少, 陳平可以助之. 陳平智有餘, 然難以獨任. 周勃重厚少文, 然安劉氏者必勃也, 可令爲太尉.」呂后復問其次, 上曰:「此後亦非而所知也.」盧綰與數千騎居塞下候伺, 幸上病愈自入謝.

 

嫚 : 업신여길 만. 업신여기다. 깔봄. 교만하다. 문란하게 하다.    已而 : 그 후, 뒤이어. ~일 뿐이다. 

戇 ; 어리석을 당. 어리석다. 우직함. 고지식하다. 외고집. 

伺 : 엿볼 사. 엿보다. 몰래 기회를 노리다. 방문하다. 듣다. 맡다. 

 

 

고조는 경포를 공격할 때에 화살에 맞아서 상처를 입었는데, 돌아오는 도중에 병이 났다. 병세가 심해지자 여후가 명의를 불러왔다. 의원이 들어가서 고조를 배알하자 고조는 의원에게 병세를 물어보았다. 의원이 “폐하의 병은 치료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자, 고조는 그를 나무라며 말하기를 “나는 평민의 신분으로 세 자 길이의 검을 들고 천하를 얻었으니, 이는 천명이 아니겠는가? 사람의 명은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이니, 설사 편작(扁鵲)이라고 한들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라 했다. 

고조는 결국 의원에게 치료시키지 않고 황금 50근을 하사하며 물러가게 했다. 

잠시 후에 여후가 고조에게 “폐하의 임종 후 만일 소상국(蕭相國, 蕭何를 가리킴)이 죽으면 누구로 하여금 그를 대신하게 하지요?”라고 물으니, 고조는 “조참(曹參)이 대신할 수 있을 것이오.”라고 대답했다. 그 다음 사람을 물으니 고조는 “왕릉(王陵)이 할 수 있을 것이오. 그러나 왕릉은 다소 고지식하므로 진평(陳平)이 그를 돕도록 하는 것이 좋소. 진평은 충분한 지혜를 가지고 있지만 단독으로 대사를 맡는 것은 어렵소. 주발(周勃)은 중후하나 문재(文才)가 모자라오. 그러나 유씨(劉氏)의 한 왕조를 안정시킬 자는 틀림없이 주발이니 그를 태위(太尉)로 삼을 만하오.”라고 대답했다. 

여후가 다시 그 다음은 누구인가를 물으니 고조는 “그 다음의 일은 당신이 알 바가 아니오.”라고 말했다. 노관이 수천의 기병과 함께 변경에서 기회를 기다리며, 고조가 쾌유하면 친히 들어가서 사죄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했다.

 

 

 

四月甲辰, 高祖崩長樂宮.315) 四日不發喪. 呂后與審食其謀曰:「諸將與帝爲編戶民, 今北面爲臣, 此常怏怏, 今乃事少主, 非盡族是, 天下不安.」人或聞之, 語酈將軍.316) 酈將軍往見審食其, 曰:「吾聞帝已崩, 四日不發喪, 欲誅諸將. 誠如此, 天下危矣. 陳平、灌嬰將十萬守滎陽, 樊噲、周勃將二十萬定燕、代, 此聞帝崩, 諸將皆誅, 必連兵還鄕以攻關中. 大臣內叛, 諸侯外反, 亡可翹足而待也.」審食其入言之, 乃以丁未發喪, 大赦天下. 盧綰聞高祖崩, 遂亡入匈奴.

 

翹 : 꼬리긴 깃털 교. 꼬리의 긴 깃털. 꼬리. 날개. 들다. 들림. 발돋움하다. 걸다. 달림. 재능이 뛰어나다. 머리꾸미개. 부인의 머리깃털장식.

 

 

4월 갑진일(甲辰日), 고조가 장락궁에서 서거했으나 4일이 지나도록 발상하지 않았다. 여후는 심이기(審食其)와 의논하기를 “여러 장수들은 이전에 황제와 함께 호적명부에 오른 평민이었다가 지금은 북면(北面)해 신하가 되었으니, 이들은 항상 불만을 품고 있소. 그런데 지금 어린 군주를 섬겨야 하니 그들을 멸족하지 않으면 천하가 어지럽게 될 것이오.”라 했다. 어떤 사람이 이 말을 듣고 역장군(酈將軍)에게 알리자, 역장군은 심이기를 만나 이렇게 말했다.

“내가 듣건대 황제께서 이미 서거해 4일이 지났는데도 발상을 하지 않고 여러 장수들을 죽이려고 하니, 만약 그렇게 되면 천하가 위태로울 것이오. 진평과 관영이 10만 군사를 거느리고 형양(滎陽)을 수비하고 있으며, 번쾌와 주발이 20만 군사를 거느리고 연(燕)과 대(代)를 평정했는데, 황제가 서거해 여러 장수들이 모두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소식을 그들이 듣는다면, 그들은 반드시 군대를 연합하고 회군해 관중을 공격할 것이오. 대신들이 안에서 모반하고 제후들이 밖에서 반란을 일으킨다면 이 나라가 망하는 것은 발꿈치를 들고서도 기다릴 수 있을 만큼 순식간의 일이 될 것이오.”

심이기가 궁에 들어가서 여후에게 이 말을 전하자, 정미일(丁未日)에 발상하고 천하에 대 사면령을 내렸다. 노관은 고조가 서거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내 흉노에게로 도망쳤다.

 

 

 

丙寅, 葬.317) 己巳, 立太子,318) 至太上皇廟.319) 群臣皆曰:「高祖起微細, 撥亂世反之正, 平定天下, 爲漢太祖, 功最高.」上尊號爲高皇帝. 太子襲號爲皇帝, 孝惠帝也. 令郡國諸侯各立高祖廟, 以歲時祠.

 

 

병인일(丙寅日)에 황제를 안장하고, 기사일(己巳日)에 태자를 황제로 옹립해 태상황묘(太上皇廟)에 이르렀다. 대신들이 모두 말하기를 “고조는 미천한 평민 출신으로 난세를 다스리시어 정도(正道)를 회복하고 천하를 평정해 한(漢)의 태조가 되셨으니 공로가 가장 높으시다.”라고 하며, 존호를 바치어 고황제(高皇帝)라 했다. 태자가 위호(位號)를 계승해 황제가 되니, 이가 바로 효혜황제(孝惠皇帝)이다. 그리고 각 군국(郡國)의 제후들에게 모두 고조묘(高祖廟)를 세워서 매년 때를 맞추어 제사 지내도록 명령을 내렸다.

 

 

 

及孝惠五年, 思高祖之悲樂沛, 以沛宮爲高祖原廟.320) 高祖所敎歌兒百二十人, 皆令爲吹樂, 後有缺, 輒補之.

 

 

효혜제 5년(기원전 190년), 황상은 예전에 고조가 패현을 좋아하고 그리워했던 일이 생각나 패궁(沛宮)을 고조의 원묘(原廟)로 삼았다. 고조가 노래를 가르쳤던 120명의 아이들에게 모두 원묘에서 연주와 노래를 하게 했으며, 이후 결원이 생기면 그때마다 인원을 보충했다.

 

 

 

 

高帝八男:長庶齊悼惠王肥;次孝惠, 呂后子;次戚夫人子趙隱王如意;次代王恆, 已立爲孝文帝, 薄太后子;次梁王恢, 呂太后時徙爲趙共王;次淮陽王友, 呂太后時徙爲趙幽王;次淮南厲王長;次燕王建.

 

 

고조에게는 여덟 명의 아들이 있었다. 서출(庶出) 장남은 제 도혜왕(齊悼惠王) 유비(劉肥)이고, 둘째 아들은 효혜황제로서 여후(呂后)의 아들이며, 셋째 아들은 척부인(戚夫人)의 아들 조 은왕(趙隱王) 유여의(劉如意)이다. 넷째 아들인 대왕(代王) 유항(劉恒)은 박태후(薄太后)의 아들로서 후일 효문황제(孝文皇帝)로 즉위했으며, 다섯째 아들은 양왕(梁王) 유회(劉恢)로서 여태후가 집정할 때에 조 공왕(趙共王)으로 옮겨갔고, 여섯 째 아들은 회양왕(淮陽王) 유우(劉友)인데 여태후가 집정할 때 조 유왕(趙幽王)으로 옮겨갔다. 일곱째 아들은 회남(淮南)의 여왕(厲王) 유장(劉長)이며, 여덟 째 아들은 연왕(燕王) 유건(劉建)이다.

 

 

 

 

太史公曰:夏之政忠. 忠之敝, 小人以野,321) 故殷人承之以敬. 敬之敝, 小人以鬼,322) 故周人承之以文. 文之敝, 小人以僿,323) 故救僿莫若以忠.324) 三王之道若循環, 終而復始. 周秦之閒, 可謂文敝矣. 秦政不改, 反酷刑法, 豈不繆乎? 故漢興, 承敝易變, 使人不倦, 得天統矣. 朝以十月. 車服黃屋左纛. 葬長陵.325)

 

僿 : 잘 새(사). 잘다. 자질구레함. 무성의하다. 막다.       纛 : 둑 독(도). 둑. 소꼬리나 꿩 꽁지로 꾸민 큰 기. 

 

태사공(太史公)은 말한다.

“하(夏) 왕조의 정치는 충후(忠厚)했으나, 충후함의 병폐가 백성들을 촌스럽고 무례하게 했기에, 은(殷) 왕조는 그 대신에 공경(恭敬)함을 숭상했다. 그러나 공경함의 병폐는 백성들로 하여금 귀신을 미신(迷信)하게 했기 때문에, 주(周) 왕조는 그 대신에 예의를 숭상했다. 그런데 예의의 병폐는 백성들을 가식적이고 무성의하게 만들었으므로, 이 가식적이고 무성의한 폐단을 바로잡는 것은 충후함보다 나은 것이 없었다. 하, 은, 주 삼대의 치국원칙은 마치 반복하고 순환하는 듯이 끝났다가는 다시 시작되는 것이었다. 주 왕조에서 진(秦) 왕조에 이르는 기간의 병폐는 지나치게 예의를 강구한 데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으나, 진 왕조의 정치는 그 병폐를 고치지 않고 도리어 형법을 가혹하게 했으니 이 어찌 잘못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한(漢) 왕조가 흥기해, 비록 전대(前代)의 폐정(弊政)을 계승했으나 그 폐단을 개혁함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피곤하지 않게 했으니, 이는 자연의 법칙을 얻은 것이었다. 조정은 매년 10월 제후들이 입경(入京)해 황제를 조현(朝見)하게 했다. 또 황제가 타는 어가(御駕)는 노란 비단으로 지붕을 만들고 쇠꼬리로 만든 기(旗)를 왼쪽에 장식하게 했다. 그리고 고조를 장릉(長陵)에 안장했다.”

 

 

 

각주

 

260 正義幾音機. 姓名也. 項羽之將, 爲陳縣令, 降漢. 高帝徵諸侯, 利幾恐, 故反.

261 集解如淳曰:「得在通侯之籍.」

262 集解李奇曰:「爲恭也. 如今卒持帚者也.」

263 集解蔡邕曰:「不言帝, 非天子也.」索隱按:蔡邕云「不言帝, 非天子也」. 又按:本紀秦始皇追尊莊襄王爲太上皇, 已有故事矣. 蓋太上者, 無上也. 皇者德大於帝, 欲尊其父, 故號曰太上皇也.

264 索隱顔氏按:荀悅云「故雖天子必有尊也, 無父猶設三老, 況其存乎? 家令之言過矣」. 晉劉寶云「善其發悟己心, 因得尊崇父號也」.

265 集解韋昭曰:「在南郡華容縣.」

266 索隱漢紀及漢書作「宵」, 劉顯云相傳作「肯」也.

267 集解如淳曰:「時山東人謂關中爲秦中.」

268 集解張晏曰:「秦地帶山河, 得形勢之勝便者.」索隱韋昭云:「地形險固, 故能勝人也.」

269 集解應劭曰:「河山之險, 與諸侯相縣隔, 地絶千里, 所以能禽諸侯者, 得天下之利百二也.」李斐曰:「河山之險, 由地勢高, 順流而下易, 故天下於秦懸隔千里, 持戟百萬, 秦得百二焉.」蘇林曰:「得百中之二焉. 秦地險固, 二萬人足當諸侯百萬人也.」索隱服虔云:「謂函谷關去長安千里爲縣隔.」按:文以河山險固形勝, 其勢如隔千里也. 蘇林曰:「百二, 百中之二, 二十萬人也.」虞喜云:「百二者, 得百之二. 言諸侯持戟百萬, 秦地險固, 一倍於天下, 故云得百二焉, 言倍之也, 蓋言秦兵當二百萬也. 『齊得十二』亦如之, 故爲東西秦, 言勢相敵, 但立文相避, 故云十二. 言餘諸侯十萬, 齊地形勝亦倍於他國, 當二十萬人也.」

270 集解如淳曰:「瓴, 盛水甁也. 居高屋之上而幡瓴水, 言其向下之勢易也. 建音蹇.」晉灼曰:「許愼曰瓴, 罋似甁者.」

271 集解晉灼曰:「齊西有平原. 河水東北過高唐, 高唐卽平原也. 孟津號黃河故曰濁河.」

272 索隱崔浩云:「勃, 旁跌也. 旁跌出者, 橫在濟北, 故齊都賦云海旁出爲勃, 名曰勃海郡.」

273 索隱以言齊境闊不啻千里, 故云「之外」也.

274 集解應劭曰:「齊得十之二, 故齊湣王稱東帝. 後復歸之, 卒爲秦所滅者, 利鈍之勢異也.」李斐曰:「齊有山河之限, 地方二千里, 是與天下縣隔也. 設有持戟百萬之衆, 齊得十中之二焉. 百萬十分之二, 亦二十萬也. 但文相避耳. 故言東西秦, 其勢亦敵也.」蘇林曰:「十二, 得十中之二, 二十萬人當百萬. 言齊雖固, 不如秦二萬乃當百萬.」

275 索隱乃王吳地, 在淮東也. 姚察按:虞喜云「總言吳, 別言荊者, 以山命國也. 今西南有荊山, 在陽羨界. 賈封吳地而號荊王, 指取此義」. 太康地理志陽羨縣本名荊溪.

276 集解漢書音義曰:「此言時民流移, 故使齊言者還齊也.」正義按:言齊國形勝次於秦中, 故封子肥七十餘城, 近齊城邑, 能齊言者咸割屬齊. 親子, 故大其都也. 孟說恐非.

277 索隱信初都陽翟也.

278 正義搜神記云:「昔秦人築城於武周塞以備胡, 城將成而崩者數矣. 有馬馳走, 周旋反覆, 父老異之, 因依以築城, 乃不崩, 遂名馬邑.」括地志云:「朔州城, 漢鴈門, 卽馬邑縣城也. 攻韓信於馬邑, 卽此城.」

279 集解徐廣曰:「在上郡.」

280 正義括地志云:「朔州定襄縣, 本漢平城縣. 縣東北三十里有白登山, 山上有臺, 名曰白登臺. 漢書匈奴傳云(蹋)[冒]頓圍高帝於白登七日, 卽此也. 服虔曰『白登, 臺名, 去平城七里』. 李穆叔趙記云『平城東七里有土山, 高百餘尺, 方十餘里.』亦謂此也.」

281 索隱按:漢儀注高祖六年, 更名咸陽曰長安. 三輔舊事扶風渭城, 本咸陽地, 高帝爲新城, 七年屬長安也.

282 集解地理志:東垣, 高帝更名曰眞定.

283 正義括地志云:「未央宮在雍州長安縣西北十里長安故城中.」顔師古云:「未央殿雖南嚮, 而當上書奏事謁見之徒皆詣北闕, 公車司馬亦在北焉. 是則以北闕爲正門, 而又有東門、東闕, 至於西南兩面, 無門闕矣. 蕭何初立未央宮, 以厭勝之術理宜然乎?」按:北闕爲正者, 蓋象秦作前殿, 渡渭水屬之咸陽, 以象天極閣道絶漢抵營室.

284 集解關中記曰:「東有蒼龍闕, 北有玄武闕, 玄武所謂北闕.」索隱東闕名蒼龍, 北闕名玄武, 無西南二闕者, 蓋蕭何以厭勝之法故不立也. 說文云「闕, 門觀也」. 高三十丈. 秦家舊處皆在渭北, 而立東闕北闕, 蓋取其便也.

285 正義括地志云:「柏人故城在邢州柏人縣西北十二里. 漢柏人屬趙國.」

286 正義括地志云:「郃陽故城在同州河西縣三里. 魏文侯十七年, 攻秦至鄭而還築, 在郃水之陽也.」

287 集解應劭曰:「鄕飮酒禮器也, 受四升.」

288 集解晉灼曰:「許愼曰『賴, 利也』. 無利入於家也. 或曰江淮之閒謂小兒多狡猾爲『無賴』.」

289 正義括地志云:「秦櫟陽故宮在雍州櫟陽縣北三十五里, 秦獻公所造. 三輔黃圖云高祖都長安, 未有宮室, 居櫟陽宮也.」

290 集解漢書云:「葬萬年.」

291 正義麗邑, 麗音力知反. 括地志云:「新豐故城在雍州新豐縣西南四里, 漢新豐宮也. 太上皇時悽愴不樂, 高祖竊因左右問故, 答以平生所好皆屠販少年, 酤酒賣餅, 鬥雞蹴踘, 以此爲歡, 今皆無此, 故不樂. 高祖乃作新豐, 徙諸故人實之, 太上皇乃悅.」按:前于麗邑築城寺, 徙其民實之, 未改其名, 太上皇崩後, 命曰新豐.

292 集解鄧展曰:「東海人名豬曰豨.」

293 集解徐廣曰:「豨攻定臧荼有功, 封陽夏侯.」

294 集解文穎曰:「今中山蒲陰是.」

295 正義陳豨將也. 又劉伯莊云「彼時聊城在黃河之東, 王莽時乾, 今濁河西北也」. 今在博州西北. 深丘道里記云「王莽元城人, 居近河側, 祖父墳墓爲水所衝, 引河入深川, 此王莽河因枯也.」

296 集解徐廣曰:「在平原.」正義括地志云:「故聊城在博州聊城縣西二十里. 春秋時齊之西界. 聊, 攝也. 戰國時亦爲齊地. 秦漢皆爲東郡之聊城也.」

297 集解漢書百官表曰:「太尉, 秦官.」應劭曰:「自上安下曰尉, 武官悉以爲稱.」

298 集解韋昭曰:「道猶從.」

299 集解如淳曰:「文紀言都中都. 又文帝過太原, 復晉陽、中都二歲, 似遷都於中都也.」

300 集解徐廣曰:「在蘄縣西.」駰案:漢書音義曰「會音儈保, 邑名, 甀音直僞反」. 索隱上音鱠, 下音丈僞反, 地名也. 漢書作「缶」, 音作保, 非也.

301 正義括地志云:「沛宮故地在徐州沛縣東南二十里一步.」

302 集解應劭曰:「不醒不醉曰酣. 一曰酣, 洽也.」

303 集解韋昭曰:「筑, 古樂, 有弦, 擊之不鼓.」正義音竹. 應劭云:「狀似瑟而大, 頭安弦, 以竹擊之, 故名曰筑.」顔師古云:「今筑形似瑟而小, 細項.」

304 集解風俗通義曰:「漢書注, 沛人語初發聲皆言『其』. 其者, 楚言也. 高祖始登位, 敎令言『其』, 後以爲常耳.」

305 集解如淳曰:「獻牛酒.」

306 集解張晏曰:「張, 帷帳.」正義音張亮反.

307 集解服虔曰:「濞音帔.」

308 集解徐廣曰:「洮音道, 在江淮閒.」

309 索隱代之縣名也. 正義括地志云:「當城在朔州定襄縣界. 土地十三州記云『當城在高柳東八十里, 縣當常山, 故曰當城』.」

310 索隱系家作「幽王」, 名擇, 負芻之兄.

311 索隱史闕名. 昭王之子, 王仮之祖也.

312 索隱名地, 宣王子, 王建祖.

313 索隱名偃, 孝成王丹之子, 幽王遷之父也.

314 正義審食其也. 括地志云:「辟陽故城在冀州信都縣西三十五里, 漢舊縣.」

315 集解皇甫謐曰:「高祖以秦昭王五十一年生, 至漢十二年, 年六十二.」

316 集解漢書曰酈商.

317 集解徐廣曰五月.

318 正義丙寅葬, 後四日至己巳, 卽立太子爲帝. 有本脫「己」字者, 妄引漢書云「已下」者, 非.

319 正義三輔黃圖云:「太上皇廟在長安城香室南, 馮翊府北.」括地志云:「漢太上皇廟在雍州長安縣西北長安故城中酒池之北, 高帝廟北. 高帝廟亦在故城中也.」

320 集解徐廣曰:「光武紀云『上幸豐, 祠高祖於原廟』.」駰案:謂「原」者, 再也. 先旣已立廟, 今又再立, 故謂之原廟.

321 集解鄭玄曰:「忠, 質厚也. 野, 少禮節也.」

322 集解鄭玄曰:「多威儀, 如事鬼神.」

323 集解徐廣曰:「一作『薄』.」駰案:史記音隱曰「僿音西志反」. 鄭玄曰「文, 尊卑之差也. 薄, 苟習文法, 無悃誠也」. 索隱鄭音先代反, 鄒本作「薄」, 音扶各反, 本一作「僿」, 而徐廣云一作「薄」, 是本互不同也. 然此語本出子思子, 見今禮表記, 作「薄」, 故鄭玄注云「文, 尊卑之差也. 薄, 苟習文法, 不悃誠也」. 裴又引音隱云「僿音先志反」, 僿塞聲相近故也. 蓋僿猶薄之義也.

324 集解鄭玄曰:「復反始.」

325 集解皇甫謐曰:「長陵山東西廣百二十步, 高十三丈, 在渭水北, 去長安城三十五里.」正義括地志云:「長陵在雍州咸陽縣東三十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