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 卷九. 呂太后本記 Ⅰ
史記 卷九. 呂太后本記 Ⅰ
呂太后者,1) 高祖微時妃也,2) 生孝惠帝、3)女魯元太后. 及高祖爲漢王, 得定陶戚姬,4) 愛幸, 生趙隱王如意. 孝惠爲人仁弱, 高祖以爲不類我, 常欲廢太子, 立戚姬子如意, 如意類我. 戚姬幸, 常從上之關東, 日夜啼泣, 欲立其子代太子. 呂后年長, 常留守, 希見上, 益疏. 如意立爲趙王後, 幾代5)太子者數矣, 賴大臣6)爭之, 及留侯策,7) 太子得毋廢.
여태후(呂太后)는 고조(高祖)가 미천할 때의 부인으로 효혜제(孝惠帝)와 딸 노원태후(魯元太后)를 낳았다. 고조가 한(漢)의 왕이 된 뒤 정도(定陶)의 척부인(戚夫人)을 또 아내로 맞이해 총애했고, 조 은왕(趙隱王) 여의(如意)를 낳았다. 효혜제는 사람됨이 인자하나 유약해, 고조는 자기를 닮지 않았다고 여겼다. 그래서 항상 태자를 폐위시키고 척부인의 아들 여의를 태자로 세우고자 했으니, 이는 여의가 자기를 닮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척부인은 총애를 받아서 항상 고조의 출정을 따라 관동(關東)으로 갔으며, 밤낮으로 고조 앞에서 소리 내어 울며 자신의 아들을 태자로 세워주기를 바랐다. 여후는 나이가 많아서 항상 집안에 있었으므로, 고조를 만날 기회가 거의 없자 점점 더 소원해졌다. 여의가 조왕으로 봉해진 뒤, 거의 태자가 될 뻔한 적이 여러 차례 있었지만, 대신들의 간쟁(諫諍)과 유후(留侯)의 계책에 힘입어 태자는 폐출되지 않았다.
呂后爲人剛毅, 佐高祖定天下, 所誅大臣多呂后力. 呂后兄二人, 皆爲將. 長兄周呂侯9)死事, 封其子呂台10)爲酈侯,11)子産爲交侯;12)次兄呂釋之爲建成侯.12)
여후는 사람됨이 강직하고 굳세어 일찍이 고조를 도와서 천하를 평정했으며, 대신들을 주살할 때도 여후의 힘이 컸다. 여후에게는 오빠가 두 사람 있었는데, 모두 고조의 부장(部將)이었다. 큰 오빠 주여후(周呂侯)는 전사했으며, 그의 아들 중 여태(呂台)는 역후(酈侯)에 봉해졌고, 여산(呂産)은 교후(交侯)에 봉해졌다. 작은오빠 여석지(呂釋之)는 건성후(建成侯)에 봉해졌다.
高祖十二年四月甲辰, 崩長樂宮, 太子襲號爲帝. 是時高祖八子:長男肥, 孝惠兄也, 異母,13) 肥爲齊王;餘皆孝惠弟, 戚姬子如意爲趙王, 薄夫人子恆爲代王, 諸姬子子恢爲梁王, 子友爲淮陽王, 子長爲淮南王, 子建爲燕王. 高祖弟交爲楚王, 兄子濞爲吳王. 非劉氏功臣番君吳芮子臣爲長沙王.
고조 12년 4월 갑진일(甲辰日), 고조가 장락궁(長樂宮)에서 서거하니 태자는 제위를 계승해 황제가 되었다. 이 당시 고조에게는 여덟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맏아들 유비(劉肥)는 혜제의 이복형으로서 제왕(齊王)에 봉해졌다. 그 나머지는 모두 혜제의 동생인데, 척부인의 아들 유여의는 조왕(趙王)에 봉해졌고, 박부인(薄夫人)의 아들 유항(劉恒)은 대왕(代王)에 봉해졌다. 그밖에 비빈(妃嬪)이 낳은 아들 중 유회(劉恢)는 양왕(梁王)에 봉해졌고, 유우(劉友)는 회양왕(淮陽王)에 봉해졌으며, 유장(劉長)은 회남왕(淮南王)에 봉해졌고, 유건(劉建)은 연왕(燕王)에 봉해졌다. 고조의 동생 유교(劉交)는 초왕(楚王)에 봉해졌고, 고조의 형의 아들인 유비(劉濞)는 오왕(吳王)에 봉해겼다. 유씨(劉氏)가 아니면서 공신(功臣)이었던 파군(番君) 오예(吳芮)의 아들 오신(吳臣)은 장사왕(長沙王)이 되었다.
呂后最怨戚夫人及其子趙王, 迺令永巷14)囚戚夫人, 而召趙王. 使者三反, 趙相建平侯周昌謂使者曰:「高帝屬臣趙王, 趙王年少. 竊聞太后怨戚夫人, 欲召趙王幷誅之, 臣不敢遣王. 王且亦病, 不能奉詔.」呂后大怒, 迺使人召趙相. 趙相徵至長安, 迺使人復召趙王. 王來, 未到. 孝惠帝慈仁, 知太后怒, 自迎趙王霸上, 與入宮, 自挾與趙王起居飮食. 太后欲殺之, 不得閒. 孝惠元年十二月, 帝晨出射. 趙王少, 不能蚤起. 太后聞其獨居, 使人持酖飮之.15) 犂明, 孝惠還,16) 趙王已死. 於是迺徙淮陽王友爲趙王. 夏, 詔賜酈侯父追謚爲令武侯.17) 太后遂斷戚夫人手足, 去眼, 煇耳, 飮瘖藥, 使居廁中, 命曰「人彘」. 居數日, 迺召孝惠帝觀人彘. 孝惠見, 問, 迺知其戚夫人, 迺大哭, 因病, 歲餘不能起. 使人請太后曰:「此非人所爲. 臣爲太后子, 終不能治天下.」孝惠以此日飮爲淫樂, 不聽政, 故有病也.
여태후는 척부인과 그녀의 아들 조왕을 가장 미워해, 척부인을 영항(永巷)에 감금하고 조왕을 불러오도록 명령했다. 사자가 세 번이나 갔으나 그를 불러오지 못하고 돌아왔다. 조왕의 승상 건평후(建平侯) 주창(周昌)이 사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고황제(高皇帝)가 나에게 조왕을 맡겼는데, 조왕은 나이가 어리오. 내가 듣건대 태후가 척부인을 매우 미워해 조왕을 불러서 모두 주살하려고 한다니 나는 감히 조왕을 보낼 수 없소. 게다가 조왕 또한 병이 있어 조칙을 받들어서 갈 수가 없소.”
여후가 크게 노하여 사람을 파견해 주창을 불러오게 했다. 주창이 장안으로 불려 들어간 이후, 여후는 다시 사람을 보내 조왕을 불러오게 했다. 당시 조왕은 이미 길을 떠났으나 도성(都城)에 도착하지는 못했다. 효혜제는 인자하고 태후의 분노를 알고 있은 터라, 스스로 패상(覇上)에 가서 조왕을 맞이해 함께 궁궐로 들어와서 조왕과 기거하며 음식을 먹었다.
여태후는 조왕을 죽이려고 했으나 기회를 얻지 못했다. 효혜제 원년 12월, 효혜제는 새벽에 활을 쏘러 나갔으나 조왕은 나이가 어려서 일찍 일어날 수 없었다. 여태후는 그가 혼자 있다는 말을 듣고 사람을 시켜서 독주를 가져오게 해 그에게 먹였다. 해가 뜰 무렵, 효혜제가 돌아와 보니 조왕은 이미 죽어 있었다. 그래서 회양왕 유우를 다시 조왕에 임명했다. 이해 여름에 조서를 내려서 역후의 부친(呂澤을 가리킴)에게 영무후(令武侯)라는 시호를 추증(追贈)했다. 태후는 마침내 척부인의 손과 발을 자르고 눈을 뽑고 귀를 태우고 벙어리가 되는 약을 먹여서 돼지우리에 기거하게 하고 그녀를 “사람돼지”라고 불렀다. 며칠이 지난 후 태후는 효혜제를 불러서 ‘사람돼지’를 보도록 했다. 그것을 본 효혜제는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나서야 그녀가 척부인이라는 것을 알고는 큰 소리를 내어 울었다.
이 일로 인해 병이 난 효혜제는 1년이 다 되도록 일어날 수 없었다. 효혜제는 사람을 보내어 태후에게 말하기를 “이것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닙니다. 나는 태후의 아들로서 다시는 천하를 다스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라 했다. 이로부터 효혜제는 하루 종일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으니, 이 때문에 병이 생기게 되었다.
二年, 楚元王、齊悼惠王皆來朝. 十月, 孝惠與齊王燕飮太后前, 孝惠以爲齊王兄, 置上坐, 如家人之禮. 太后怒, 迺令酌兩卮酖, 置前, 令齊王起爲壽. 齊王起, 孝惠亦起, 取卮欲俱爲壽. 太后迺恐, 自起泛18)孝惠卮. 齊王怪之, 因不敢飮, 詳醉去. 問, 知其酖, 齊王恐, 自以爲不得脫長安, 憂. 齊內史士19)說王曰:「太后獨有孝惠與魯元公主.20) 今王有七十餘城, 而公主迺食數城. 王誠以一郡上太后, 爲公主湯沐邑, 太后必喜, 王必無憂.」於是齊王迺上城陽之郡, 尊公主爲王太后.21) 呂后喜, 許之. 迺置酒齊邸,22) 樂飮, 罷, 歸齊王. 三年, 方築長安城, 四年就半, 五年六年城就.23) 諸侯來會. 十月朝賀.
2년, 초 원왕(楚元王) 유교와 제 도혜왕(齊 悼惠王) 유비는 모두 도성에 입조(入朝)했다. 10월, 혜제와 제왕(齊王)은 여태후 임어한 연회에서 술을 마셨는데, 혜제는 제왕이 형이기 때문에 일반 평민 집안의 예절에 따라서 그에게 윗자리에 앉기를 청했다.
여후는 매우 화가 나 독주 두 잔을 따른 다음 제왕 앞에 놓게 했다. 그리고는 제왕으로 하여금 자리에서 일어나서 자기에게 축수(祝壽)를 올리게 했다. 제왕이 일어나자 혜제도 일어서서 제왕과 함께 여후에게 축수를 올리려고 했다. 그러자 태후는 겁이 나서 얼른 일어나 효혜제의 술잔을 엎어버렸다. 제왕은 괴이하게 여기고 감히 그 술을 마시지 못하다가 거짓으로 술에 취한 척하며 자리를 떴다. 나중에 물어보고서야 그것이 독주인 줄 알았다. 제왕은 두려웠고 장안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기며 걱정스러워했다. 제나라의 내사(內史) 사(士)가 제왕에게 권해 이렇게 말했다.
“태후에게는 오직 효혜제와 노원공주만이 있습니다. 현재 대왕께서는 70여 성(城)을 가지고 있으나, 노원공주는 몇 개의 성을 식읍지로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만일 대왕이 군(郡) 하나를 태후에게 바치어 공주의 탕목읍(湯沐邑)으로 삼게 하시면 태후는 반드시 기뻐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대왕께서는 틀림없이 우환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자 제왕은 태후에게 성양군(城陽郡)을 바치고 공주를 높여서 왕태후(王太后)로 존칭하니, 여후는 기뻐하며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제왕의 관저에서 주연을 베풀고 즐겁게 마신 다음 연회가 끝나자 제왕을 돌려보냈다.
3년, 비로소 장안성(長安城)을 건축하기 시작했는데, 4년이 되자 절반이 완공되었고, 5년과 6년에 걸쳐 성이 완성되었다. 제후들이 도성에 모였고, 10월에 입조(入朝)해 황제에게 하례를 올렸다.
七年秋八月戊寅, 孝惠帝崩.24) 發喪, 太后哭, 泣不下. 留侯子張辟彊爲侍中,25) 年十五, 謂丞相曰:「太后獨有孝惠, 今崩, 哭不悲, 君知其解乎?」26)丞相曰:「何解?」辟彊曰:「帝毋壯子,27) 太后畏君等. 君今請拜呂台、呂産、呂祿爲將, 將兵居南北軍, 及諸呂皆入宮, 居中用事, 如此則太后心安, 君等幸得脫禍矣.」丞相迺如辟彊計. 太后說, 其哭迺哀. 呂氏權由此起. 迺大赦天下. 九月辛丑, 葬.28) 太子卽位爲帝, 謁高廟. 元年, 號令一出太后.
7년 가을 8월 무인일(戊寅日)에 효혜제가 세상을 떠났다. 발상(發喪) 기간에도 태후는 곡만 할 뿐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유후의 아들 장벽강(張辟彊)은 그 당시 시중(侍中)이었는데, 나이가 열다섯 살이었다. 그가 승상(丞相)에게 말하기를 “태후에게는 오직 효혜제만 있었는데, 이제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곡만 할 뿐 슬퍼하지 않으니, 그대는 그 연고를 아십니까?”라 했다. 승상이 “무슨 연고입니까?”라고 물었다. 장벽강이 이렇게 말했다.
“이는 황제에게 장성한 아들이 없으니 태후가 그대들과 같은 대신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대가 지금 여태(呂台), 여산(呂産), 여록(呂祿)을 장군으로 제수해 남북군(南北軍)을 통솔하게 하고, 아울러 여씨 일족을 모두 입궁시켜서 조정의 일을 보게 하게 청한다면, 태후가 안심해 그대들은 다행히 화를 면할 것입니다.”
승상이 장벽강의 계책대로 하자 태후는 기뻐하며 비로소 애통하게 울기 시작했다. 여씨(呂氏)가 정권을 장악한 것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천하에 대사면령이 내려졌다. 9월 신축일(辛丑日)에 혜제를 안장했다. 태자(太子)가 즉위해 황제가 되고, 고조묘(高祖廟)를 참배했다. 원년(元年), 조정의 호령(號令)은 모두 여태후에게서 나왔다.
太后稱制, 議欲立諸呂爲王, 問右丞相王陵. 王陵曰:「高帝刑白馬盟曰『非劉氏而王, 天下共擊之』. 今王呂氏, 非約也.」太后不說. 問左丞相陳平、絳侯周勃. 勃等對曰:「高帝定天下, 王子弟, 今太后稱制, 王昆弟諸呂, 無所不可.」太后喜, 罷朝. 王陵讓陳平、絳侯曰:「始與高帝啑血盟,29) 諸君不在邪? 今高帝崩, 太后女主, 欲王呂氏, 諸君從欲阿意背約, 何面目見高帝地下?」陳平、絳侯曰:「於今面折廷爭, 臣不如君;夫全社稷, 定劉氏之後, 君亦不如臣.」王陵無以應之. 十一月, 太后欲廢王陵, 乃拜爲帝太傅,30) 奪之相權. 王陵遂病免歸. 迺以左丞相平爲右丞相, 以辟陽侯31)審食其爲左丞相. 左丞相不治事, 令監宮中, 如郎中令. 食其故得幸太后, 常用事, 公卿皆因而決事. 迺追尊酈侯父爲悼武王, 欲以王諸呂爲漸.
여태후는 황제의 권한을 행사하고, 대신들과 상의해 여씨 일족을 왕으로 삼고자 했다. 우승상 왕릉(王陵)에게 물으니 왕릉이 말하기를
“고제(高帝)는 일찍이 백마(白馬)를 죽여서 대신들에게 맹세하기를, ‘이후로 유씨(劉氏)가 아니면서 왕이 되면 천하가 함께 그를 죽일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지금 여씨를 왕으로 세우는 것은 약속을 어기는 것입니다.”
라 했다. 그러자 태후는 불쾌해하며, 다시 좌승상 진평(陳平)과 강후(絳侯) 주발(周勃)에게 물었다. 그러자 주발 등이 대답하기를 “고제가 천하를 평정했을 때 자신의 자제(子弟)들을 왕으로 책봉했으니, 지금 태후께서 황제의 직권을 대행하면서 자신의 형제와 여씨 일족을 왕으로 책봉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라 했다. 그러자 태후는 기뻐하며 조회(朝會)를 끝냈다. 한편 왕릉은 진평과 주발을 나무라며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 고제와 피를 바쳐서 맹약할 때 여러분은 그곳에 없었소? 지금 고제가 세상을 떠나고 태후가 황후(皇后)로서 여씨의 자제를 왕으로 삼으려고 하는데 그대들은 오히려 태후의 사욕을 용인하고 그의 뜻에 영합해 맹약을 위배하려 하니,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 계신 고제를 뵐 수가 있겠소?”
진평과 강후가 말하기를 “지금 조정에서 직접 질책하고 간언함에서는 우리들이 당신만 못하오. 그러나 사직을 보전하고 유씨의 후손을 안정시키는 일에는 그대 또한 우리들만 못하오.”라고 하자, 왕릉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
11월에 여태후가 왕릉을 파면시키기 위해서 그를 황제의 태부(太傅)로 임명해 우승상의 권한을 빼앗아버렸다. 그러자 왕릉은 병을 핑계 삼아 사직하고 귀향해버렸다. 이에 여태후는 좌승상 진평을 우승상으로 임명하고, 벽양후(辟陽侯) 심이기(審食其)를 좌승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심이기는 좌승상의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단지 궁중 사무만을 감독했으니 마치 낭중령(郎中令)과 같았다. 그러므로 심이기는 태후의 총애를 받아서 항상 나라 일을 처리했고, 공경대신들이 일을 처리할 때도 그를 통해 결정을 받았다. 여태후는 역후의 부친 여택을 도무왕(悼武王)으로 추존하고, 이 일을 발단 삼아 여씨 일족을 모두 왕에 봉하려고 했다.
四月, 太后欲侯諸呂, 迺先封高祖之功臣郎中令無擇32)爲博城侯.33) 魯元公主薨, 賜謚爲魯元太后. 子偃爲魯王. 魯王父, 宣平侯張敖也. 封齊悼惠王子章爲朱虛侯,34) 以呂祿女妻之. 齊丞相壽爲平定侯.35) 少府延爲梧侯.36) 乃封呂種爲沛侯,37) 呂平爲扶柳侯,38) 張買爲南宮侯.39)
4월에 여태후는 여씨 일족을 후(侯)로 봉하기 위해서 먼저 고조의 공신 낭중령 풍무택(馮無擇)을 박성후(博城侯)로 봉했다. 노원공주가 세상을 떠나자 그녀에게 노원태후라는 시호를 주었고, 그녀의 아들 장언(張偃)을 노왕(魯王)으로 봉했다. 노왕의 부친은 바로 선평후(宣平侯) 장오(張敖)였다. 또 제 도혜왕의 아들 유장(劉章)을 주허후(朱虛侯)에 봉했으며 여록의 딸을 그의 아내로 삼게 했다. 제(齊)의 승상 제수(齊壽)를 평정후(平定侯)로 봉했으며, 소부(少府) 양성연(陽成延)을 오후(梧侯)로 삼았다. 이어서 여종(呂種)을 패후(沛侯)로 삼고, 여평(呂平)을 부류후(扶柳侯)로 삼았으며, 장매(張買)를 남궁후(南宮侯)로 삼았다.
太后欲王呂氏, 先立孝惠後宮子彊爲淮陽王,40) 子不疑爲常山王,41) 子山爲襄城侯,42) 子朝爲軹侯,43) 子武爲壺關侯. 太后風大臣, 大臣請立酈侯呂台爲呂王,44) 太后許之. 建成康侯釋之卒, 嗣子有罪, 廢, 立其弟呂祿45)爲胡陵侯,46) 續康侯後. 二年, 常山王薨, 以其弟襄城侯山爲常山王, 更名義. 十一月, 呂王台薨, 謚爲肅王, 太子嘉代立爲王. 三年, 無事.47) 四年, 封呂嬃爲臨光侯, 呂他爲兪侯,48) 呂更始爲贅其侯,49) 呂忿爲呂城侯,50) 及諸侯丞相五人.51)
태후는 여씨를 왕으로 삼기 위해서 우선 효혜제의 후궁(后宮)의 아들 유강(劉彊)을 회양왕에 봉하고, 유불의(劉不疑)를 상산왕(常山王)에 봉했으며, 유산(劉山)을 양성후(襄城后)로 삼았고, 유조(劉朝)를 지후(軹侯)로 삼았으며, 유무(劉武)를 호관후(壺關侯)로 봉했다. 그리고 나서 태후가 대신들에게 암시를 보내자 대신들은 역후 여태를 여왕(呂王)으로 삼기를 청하니, 태후는 그것을 허락했다. 건성후 여석지가 죽고 후위(侯位)를 계승할 아들이 죄가 있어 폐출당하자 동생 여록을 세워서 호릉후(胡陵侯)로 삼아 강후(康侯)를 계승하게 했다.
2년, 상산왕이 서거하자 그의 동생 양성후 유산을 상산왕에 봉하고, 이름을 유의(劉義)로 바꾸었다. 11월, 여왕 여태가 죽자 시호를 숙왕(肅王)이라고 하고, 태자 여가(呂嘉)가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3년, 나라에 아무 일이 없었다.
4년, 여수(呂嬃)를 임광후(臨光侯)로 봉했으며, 여타(呂他)를 유후(兪侯)로, 여갱시(呂更始)를 췌기후(贅其侯)로, 여분(呂忿)을 여성후(呂城侯)로 봉했고, 또 제후왕의 승상 다섯 사람을 후(侯)에 봉했다.
宣平侯女爲孝惠皇后時, 無子, 詳爲有身, 取美人子名之,52) 殺其母, 立所名子爲太子. 孝惠崩, 太子立爲帝. 帝壯, 或聞其母死, 非眞皇后子, 迺出言曰:「后安能殺吾母而名我? 我未壯, 壯卽爲變.」太后聞而患之, 恐其爲亂, 迺幽之永卷中, 言帝病甚, 左右莫得見. 太后曰:「凡有天下治爲萬民命53)者, 蓋之如天, 容之如地, 上有歡心以安百姓, 百姓欣然以事其上, 歡欣交通而天下治. 今皇帝病久不已, 迺失惑惛亂, 不能繼嗣奉宗廟祭祀, 不可屬天下, 其代之.」群臣皆頓首言:「皇太后爲天下齊民計所以安宗廟社稷甚深, 群臣頓首奉詔.」帝廢位, 太后幽殺之. 五月丙辰, 立常山王義爲帝, 更名曰弘. 不稱元年者, 以太后制天下事也. 以軹侯朝爲常山王. 置太尉官, 絳侯勃爲太尉. 五年八月, 淮陽王薨, 以弟壺關侯武爲淮陽王. 六年十月, 太后曰呂王嘉居處驕恣, 廢之, 以肅王台弟呂産爲呂王. 夏, 赦天下. 封齊悼惠王子興居爲東牟侯.54)
선평후의 딸이 효혜황후(孝惠皇后)가 되었을 때, 아들이 없었으므로 거짓으로 임신한 척해 미인(美人)의 아들을 데려다가 자기가 낳은 아들이라 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어머니를 죽이고, 그 아들을 세워서 태자로 삼았다. 효혜제가 서거하자 태자가 황제에 즉위했다. 황제는 후에 우연히 그의 생모는 살해되었고 자기가 황후의 진짜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듣고 원한에 차서 말하기를 “황후는 어찌해 나의 어머니를 죽이고 나를 자신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는가? 내가 지금은 아직 어리지만, 장성하면 변란을 일으킬 것이다.”라 했다. 태후는 이 말을 듣고 걱정이 되었으며, 그가 변란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해 그를 영항에 몰래 가두고, 황제가 중병에 걸렸다고 말해 좌우의 대신들로 하여금 그를 만나지 못하게 했다. 태후는 이렇게 말했다.
“무릇 천하를 소유해 만민을 다스리는 자는 하늘처럼 만물을 덮고 땅처럼 만물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황제가 즐거운 마음으로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면 백성들은 기쁜 마음으로 황제를 섬기게 되니, 황제와 백성의 즐겁고 기쁜 감정이 서로 통해 천하가 다스려지는 것입니다. 지금 황제는 병이 오래되어 낫지 않아 정신이 없고 혼미하여 제위를 계승해 종묘제사를 받들 수가 없소. 그러므로 천하를 그에게 맡길 수 없으니 다른 사람으로 그를 대신하게 해야 할 것이오.”
여러 신하들이 모두 돈수(頓首)하며 말하기를 “황태후께서 백성들을 위해 종묘사직을 안정시킬 방도를 생각하심이 이처럼 깊으시니, 우리 신하들은 모두 머리를 조아려서 조칙을 받들겠습니다.”라 했다. 이에 황제는 폐위되었고, 태후는 그를 몰래 죽였다. 5월 병진일(丙辰日), 상산왕 유의를 세워서 황제로 삼고 이름을 유홍(劉弘)으로 바꾸었다. 원년이라고 칭하지 않은 것은 태후가 계속해서 황제의 직권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지후 유조를 상산왕으로 삼았으며, 태위(太尉)의 관직을 설치해 강후 주발을 태위로 삼았다. 5년 8월, 회양왕이 서거하자 동생 호관후 유무를 회양왕에 봉했다. 6년 10월, 태후는 “여왕(呂王) 여가는 평소의 생활태도가 교만하고 방자하다.”라고 하면서 그를 폐위시키고, 숙왕의 동생 여산을 여왕으로 삼았다. 여름,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렸다. 제 도혜왕의 아들 유흥거(劉興居)를 동모후(東牟侯)에 봉했다.
각주
1 集解徐廣曰:「呂后父呂公, 漢元年爲臨泗侯, 四年卒, 高后元年追謚曰呂宣王.」 2 集解漢書音義曰:「諱雉.」索隱諱雉, 字娥姁也. 3 集解漢書音義曰:「諱盈.」 4 集解如淳曰:「姬音怡, 衆妾之總稱也. 漢官儀曰『姬妾數百』.」蘇林曰:「淸河國有妃里, 而題門作『姬』.」瓚曰:「漢秩祿令及茂陵書姬, 內官也, 秩比二千石, 位次婕妤下, 在七子、八子之上.」索隱如淳音怡, 非也. 茂陵書曰「姬是內官」, 是矣, 然官號及婦人通稱姬者, 姬, 周之姓, 所以左傳稱伯姬、叔姬, 以言天子之宗女, 貴於他姓, 故遂以姬爲婦人美號. 故詩曰「雖有姬姜, 不棄憔悴」是也. 5 索隱上其紀反, 又音祈也. 6 索隱張良、叔孫通等. 7 索隱令太子卑詞安車, 以迎四皓也. 8 集解徐廣曰:「名澤, 高祖八年卒, 謚令武侯, 追謚曰悼武王.」 9 索隱鄭氏、鄒誕並音怡, 蘇林音胎. 10 集解徐廣曰:「酈, 一作『鄜』.」 11 集解徐廣曰:「台弟也.」 12 集解徐廣曰:「惠帝二年卒, 謚康王.」 13 索隱母曰曹姬也. 14 集解如淳曰:「列女傳云周宣王姜后脫簪珥待罪永巷, 後改爲掖庭.」索隱永巷, 別宮名, 有長巷, 故名之也. 後改爲掖庭. 按:韋昭云以爲在掖門內, 故謂之掖庭也. 15 集解應劭曰:「酖鳥食蝮, 以其羽畫酒中, 飮之立死.」 16 集解徐廣曰:「犂猶比也. 諸言犂明者, 將明之時.」 17 索隱令音齡 18 索隱音捧泛也. 19 集解徐廣曰:「一作『出』.」 20 集解如淳曰:「公羊傳曰『天子嫁女於諸侯, 必使諸侯同姓者主之』, 故謂之公主. 百官表列侯所食曰國, 皇后、公主所食曰邑, 諸侯王女曰公主.」蘇林曰:「公, 五等尊爵也. 春秋聽臣子以稱君父, 婦人稱主, 有『主孟啗我』之比, 故云公主.」瓚曰:「天子女雖食湯沐之邑, 不君其民.」索隱啗音徒濫反. 按:主是謂里克妻, 卽優施之語, 事見國語. 孟者, 且也, 言且啗我物, 我敎汝婦事夫之道. 此卽婦人稱主之意耳. 比音必二反. 21 集解如淳曰:「張敖子偃爲魯王, 故公主得爲太后.」 22 正義漢法, 諸侯各起邸第於京師. 23 索隱按:漢宮闕疏「四年築東面, 五年築北面」. 漢舊儀「城方六十三里, 經緯各十二里」. 三輔舊事云「城形似北斗」也. 24 集解皇甫謐曰:「帝以秦始皇三十七年生, 崩時年二十三.」 25 集解應劭曰:「入侍天子, 故曰侍中.」 25 正義解, 紀賣反. 言哭解惰, 有所思也. 又音戶賣反. 解, 節解也. 又紀買反, 謂解說也. 27 正義毋音無. 28 集解漢書云:「葬安陵.」皇覽曰:「山高三十二丈, 廣袤百二十步, 居地六十畝.」皇甫謐曰:「去長陵十里, 在長安北三十五里.」 29 索隱啑, 鄒音使接反. 又云或作「喢」, 音丁牒反. 30 集解應劭曰:「古官. 傅者, 覆也.」瓚曰:「大戴禮云『傅之德義』.」 31 索隱按:韋昭云信都之縣名. 32 集解徐廣曰:「姓馮.」 33 正義括地志云:「兗州博城, 本漢博城縣城.」 34 索隱虛音墟, 琅邪縣也. 正義括地志云:「朱虛故城在靑州臨朐縣東六十里, 漢朱虛也. 十三州志云丹朱遊故虛, 故云朱虛也.」虛猶丘也. 朱猶丹也. 35 集解徐廣曰:「姓齊.」 36 集解徐廣曰:「姓陽成也. 延以軍匠起, 作宮築城也.」 37 集解徐廣曰:「釋之之子也.」正義括地志云:「徐州沛縣古城也.」 38 集解徐廣曰:「呂后姊子也. 母字長姁.」正義括地志云:「扶柳故城在冀州信都縣西三十里, 漢扶柳縣也. 有澤, 澤中多柳, 故曰扶柳.」 39 集解徐廣曰:「其父越人, 爲高祖騎將.」 40 集解韋昭曰:「今陳留郡.」 41 正義括地志云:「常山故城在恆州眞定縣南八里, 本漢東垣邑也.」 42 索隱按:下文更名義, 又改名弘農. 漢書襄城侯唯云名弘, 蓋史省文耳. 按志, 襄城屬潁川也. 43 索隱按:韋昭云河內有軹縣, 音紙也. 正義括地志云:「故軹城在懷州濟源縣東南十三里, 七國時魏邑.」 44 正義初呂台爲呂王, 後呂産王梁, 更名梁曰呂. 45 集解徐廣曰:「釋之少子.」 46 正義胡陵, 縣名, 屬山陽, 章帝改曰胡陸. 47 集解漢書云:「秋, 星晝見.」 48 索隱他音陀. 兪音輸. 正義括地志云:「故鄃城在德州平原縣西南三十里, 本漢鄃縣, 呂他邑也.」 49 集解徐廣曰:「表云呂后昆弟子淮陽丞相呂勝爲贅其侯.」索隱按表作「臨淮」也. 50 正義括地志云:「故呂城在鄧州南陽縣西三十里, 呂尙先祖封.」 51 集解徐廣曰:「中邑侯朱通、山都侯王恬開、松茲侯徐厲、滕侯呂更始、醴陵侯越.」 52 正義劉伯莊云:「諸美人元幸呂氏, 懷身而入宮生子.」 53 集解徐廣曰:「一無此字.」 54 索隱韋昭云:「東萊縣.」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