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 卷 一二. 孝武本紀 Ⅲ
史記 卷 一二. 孝武本紀 Ⅲ
入海求蓬萊者,1) 言蓬萊不遠, 而不能至者, 殆不見其氣. 上乃遣望氣佐侯其氣云.
바다로 가서 봉래선도(蓬萊仙島)를 찾던 사람들이 돌아와서 봉래선경은 결코 멀리 있지 않지만 그곳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그 상서로운 기운을 보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하자, 황제는 곧 상서로운 기운을 잘 보는 관리를 파견해 그 기운을 관찰하게 했다.
其秋, 上幸雍,2) 且郊. 或曰「五帝, 泰一之佐也. 宜立泰一而上親郊之」. 上疑未定. 齊人公孫卿曰:「今年得寶鼎, 其冬辛巳朔旦冬至, 與黃帝時等.」卿有札書曰:「黃帝得寶鼎宛(侯)[朐], 問於鬼臾區.3) 區對曰:『(黃)帝得寶鼎神筴, 是歲己酉朔旦冬至, 得天之紀, 終而復始.』於是黃帝迎日推筴, 後率二十歲4)得朔旦冬至, 凡二十推, 三百八十年. 黃帝僊登于天.」卿因所忠欲奏之. 所忠視其書不經, 疑其妄書, 謝曰:「寶鼎事已決矣, 尙何以爲!」卿因嬖人奏之. 上大說, 召問卿. 對曰:「受此書申功,5) 申功已死.」上曰:「申功何人也?」卿曰:「申功, 齊人也. 與安期生通, 受黃帝言, 無書, 獨有此鼎書. 曰『漢興復當黃帝之時. 漢之聖者在高祖之孫且曾孫也. 寶鼎出而與神通, 封禪. 封禪七十二王,6) 唯黃帝得上泰山封』. 申功曰:『漢主亦當上封, 上封則能僊登天矣. 黃帝時萬諸侯, 而神靈之封居七千.7) 天下名山八, 而三在蠻夷, 五在中國. 中國華山、首山、太室、泰山、東萊, 此五山黃帝之所常遊, 與神會. 黃帝且戰且學僊. 患百姓非其道, 乃斷斬非鬼神者. 百餘歲然後得與神通. 黃帝郊雍上帝, 宿三月. 鬼臾區號大鴻, 死葬雍, 故鴻冢是也.8) 其後於黃帝接萬靈明廷. 明廷者, 甘泉也. 所謂寒9)門者, 谷口也.10) 黃帝釆首山銅, 鑄鼎荊山下.11) 鼎旣成, 有龍垂胡髥12)下迎黃帝. 黃帝上騎, 群臣後宮從上龍七十餘人, 乃上去. 餘小臣不得上, 乃悉持龍髥, 龍髥拔, 墮13)黃帝之弓. 百姓仰望黃帝旣上天, 乃抱其弓與龍胡髥號.14) 故後世因名其處曰鼎湖,15) 其弓曰烏號.』」於是天子曰:「嗟乎! 吾誠得如黃帝, 吾視去妻子如脫躧耳.」乃拜卿爲郎, 東使候神於太室.
그해 가을, 천자는 옹현에 가서 교사를 거행하려고 했다. 그때 어떤 사람이 “5제(五帝)는 태일신의 보좌이므로 따로 태일신위(泰一神位)를 세워서 천자께서 친히 교사를 거행하셔야 합니다.”라 했다. 그러나 천자는 주저하며 결정하지 못했다.
제나라 사람 공손경(公孫卿)이 말하기를 “올해 보정을 얻었는데, 올해 중동(仲冬) 신사삭일(辛巳朔日) 아침은 동지가 되는 날이며, 이는 황제(黃帝)가 보정을 제작한 절기와 같습니다.”라 했다. 그런데 공손경이 가지고 있던 목간(木簡)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황제가 완구(宛胊)에서 보정을 얻은 후에 귀유구(鬼臾區)에게 이 일을 물었더니, 귀유구는 ‘황제께서 보정과 신책을 얻으셨을 때, 이해 기유삭일(己酉朔日) 아침이 동지에 해당되는 때이며, 이는 천도(天道)의 계통과 부합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계속 순환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황제는 일월(日月)에 근거해 역법(曆法)을 추산했다. 이후 매 20년마다 삭일(朔日) 아침이 동지에 해당되었으며, 역법을 20여 차례나 추산하기를 380년 동안 시행했고, 황제는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공손경이 소충(所忠)을 통해서 이 일을 황제에게 아뢰려고 했다. 그러나 소충은 목간에 적힌 말이 불합리하고 터무니없는 말이라고 생각해 “보정의 일은 이미 결정된 것인데 그 말을 아뢰어 어쩌겠단 말이오?”라고 거절하자, 공손경은 천자가 총애하는 사람을 통해서 이 일을 보고했다. 그러자 천자는 매우 기뻐하며 즉시 공손경을 불러 이에 대해서 물었다.
공손경이 “신은 신공(申功)에게 이 목간을 받았는데, 신공은 이미 죽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천자가 “신공은 어떤 사람이오?”라고 묻자 공손경은 이렇게 대답했다.
“신공은 제나라 사람입니다. 그는 신선 안기생과 왕래했고 황제의 말을 이어받았는데, 다른 글은 남기지 않았고 다만 다음과 같은 정서(鼎書)만 남겨놓았습니다. 거기에는 ‘한나라가 흥성할 시기는 황제가 정을 얻은 때와 같을 것이며, 한나라의 성인은 고조(高祖)의 손자이거나 증손자일 것이다. 보정이 출현한 것은 신의 바람과 같은 것이니 봉선을 거행해야 한다. 자고로 72명의 왕이 봉선을 거행했는데, 그중에 오직 황제만이 태산에 올라가서 하늘에 제사 지냈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또 신공은 ‘한(漢)의 군주 또한 태산에 올라 상제께 제사를 지내야 한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신선이 되어 하늘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또 ‘황제 시대에는 제후국이 만 개나 되었는데, 그 가운데 산천에 제사 지내는 나라는 7천 개였다. 천하에 명산이 여덟 개인데, 셋은 만이(蠻夷)의 땅에 있으며, 다섯은 중원(中原) 지구에 있다. 중원 지구에 있는 것으로 화산(華山), 수산(首山), 태실산(太室山), 태산(泰山), 동래산(東萊山)이 있는데, 이 다섯 개의 명산은 모두 황제가 자주 유람하며 신선과 만나던 곳이다. 황제는 한편으로는 전쟁을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선도(仙道)를 배웠는데, 백성들이 자신이 배우는 선도를 반대하는 것을 싫어해 귀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살해했다. 이렇게 1백여 년이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신선과 상통할 수 있었다. 황제는 옹(雍)에서 상제께 제사 지내느라 3개월간 머물렀다. 귀유구는 별호가 대홍(大鴻)이며, 죽은 후에 옹 땅에 장사 지냈으니 홍총(鴻冢)이 곧 그의 묘이다.
이후 황제는 또 명정(明廷)에서 수많은 신선들을 만났는데, 명정이라는 곳은 지금의 감천궁이며, 이른바 한문(寒門)이라는 곳은 지금의 곡구(谷口)이다. 황제는 수산에서 동(銅)을 채취해 형산(荊山) 아래에서 정을 주조했다. 정을 완성하자 하늘에서 긴 수염이 달린 용 한 마리가 내려와서 황제를 영접했고, 황제가 용의 등에 올라타자 여러 신하와 후궁 70여 명도 따라서 용의 등에 탔고, 그러자 용은 하늘로 올라갔다. 그러나 나머지 신하들은 올라가지 못하게 되자 용의 수염을 잡아당겨서 용의 수염은 뽑혀 떨어졌으며, 황제의 활도 떨어졌다. 백성들은 황제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그의 활과 용의 수염을 끌어안고 대성통곡했다. 그러므로 후세에 이 사실에 근거해 이 지방을 정호(鼎湖)라고 칭했고, 그 활을 오호(烏號)라 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천자는 “아! 내가 만약 황제처럼 된다면 나는 해진 짚신 버리듯 처자와 헤어지리라!”라고 말하고는 공손경을 낭관(郎官)에 임명하고 그를 동쪽 태실산에 보내어 신선을 맞이하게 했다.
上遂郊雍, 至隴西, 西登空桐,16) 幸甘泉. 令祠官寬舒等具泰一祠壇, 壇放薄忌泰一壇, 壇三垓.17) 五帝壇環居其下, 各如其方, 黃帝西南, 除八通鬼道.18) 泰一所用, 如雍一畤物, 而加醴棗脯之屬, 殺一犛牛以爲俎豆牢具. 而五帝獨有俎豆19)醴進.20) 其下四方地, 爲餟食21)群神從者及北斗云. 已祠, 胙餘皆燎之. 其牛色白, 鹿居其中, 彘在鹿中, 水而洎之.22) 祭日以牛, 祭月以羊彘特.23) 泰一祝宰則衣紫及繡. 五帝各如其色, 日赤, 月白.
천자는 옹현에서 교사를 거행하고, 농서(隴西)에 이르자 서쪽의 공동산(空桐山)에 오른 뒤 감천궁으로 돌아왔다. 그는 사관 관서 등에게 태일신의 제단을 지으라고 명령했는데, 제단은 박유기가 말한 태일단의 양식에 따라서 짓고 단의 계단은 3층으로 하게 했다. 5제의 제단은 태일단 아래에 빙 둘러서 각기 5제에 해당하는 방위에 두었고, 황제의 제단은 서남쪽에 두었고, 귀신이 왕래할 수 있는 길을 여덟 갈래 만들었다. 태일신에게 제사 지낼 때 사용하는 제물은 옹현의 한 치(畤)에 올리는 것과 같게 하고 그 외에 감주, 대추와 마른 고기 등의 제수용품과 검정소〔犛〕 한 마리를 잡아서 제물로 쓰게 했다. 그러나 5제의 제사에는 단지 희생과 감주만 바치게 했다.
제단 아래 사방의 땅에는 신좌를 설치해 수행한 여러 신들과 북두칠성에도 각각 제사 지내게 했으며, 제사가 끝난 후 남은 음식들은 모두 태워버리도록 했다. 5제와 수행신들의 제사에 쓰이는 소는 흰색을 바쳤는데, 사슴을 소의 뱃속에 넣고 사슴의 뱃속에는 돼지를 넣은 후에 물에 담가서 물이 스며들게 했다. 또한 일신(日神)에 제사 지낼 때는 소를 사용했고, 월신(月神)에게 제사 지낼 때는 양이나 돼지 한 마리를 사용했다. 태일신에게 제사 지내는 사제(祠祭)는 수놓은 자색(紫色) 옷을 입었고, 5제는 각기 해당하는 색에 따라서 사제들에게도 그 색의 옷을 입게 해, 일신에게 제사 지낼 때는 붉은 옷을 입게 했고, 월신에게 제사 지낼 때에는 흰 옷을 입게 했다.
十一月辛已朔旦冬至, 昧爽, 天子始郊拜泰一. 朝朝日, 夕夕月,24) 則揖;而見泰一如雍禮. 其贊饗曰:「天始以寶鼎神筴授皇帝, 朔而又朔, 終而復始, 皇帝敬拜見焉.」而衣上黃. 其祠列火滿壇, 壇旁烹炊具. 有司云「祠上有光焉」. 公卿言「皇帝始郊見泰一云陽,25) 有司奉瑄玉26)嘉牲薦饗.27) 是夜有美光, 及晝, 黃氣上屬天.」太史公、祠官寬舒等曰:「神靈之休, 祐福兆祥, 宜因此地光域28)立泰畤壇以明應. 令太祝領, (祀)[秋]及臘閒祠. 三歲天子一郊見.」
11월 신사삭일(辛巳朔日) 아침이 동지였는데, 날이 아직 완전히 밝지 않았을 때 천자는 교외에서 태일신에게 제사 지내기 시작했다. 그날 아침에는 태양을 향해, 저녁에는 달을 향해 읍례(揖禮)를 행했으며, 태일신에게 제사 지낼 때는 옹현에서 지내는 교사의 예의를 갖추었다. 축문은 “하늘이 처음으로 보정과 신책을 천자에게 내리시고, 그로 하여금 조대(朝代)를 바꾸고 바꾸어서 다시 시작되게 하시니, 천자는 공손하게 제사 드리옵니다.”라 했다. 제사 때의 복색은 전부 황색을 입었으며, 제단에는 횃불을 가득 켜놓고 제단 옆에는 음식을 장만하는 기구들을 늘어놓았다. 이때 한 관리가 “제단 위에서 눈부신 광채가 나옵니다.”라고 하자 공경대신은 “천자께서 예전 운양궁(雲陽宮)에서 태일신에게 제사를 드릴 때, 사제가 커다란 옥과 크고 잘생긴 제물을 공손하게 바쳤습니다. 그러자 그날 밤 하늘에는 아름다운 광채가 나타나서 다음날 낮까지 계속되었는데, 그 황색의 구름은 하늘의 꼭대기까지 이어 올라갔습니다.”라고 말했다.
태사공과 사관 관서 등은 “이러한 신령스러운 기상은 신이 보우하는 복록이며 상서로운 징조이므로 광채가 난 곳에 태일신단을 건립해 하늘의 감응에 보답해야 합니다. 폐하께서는 태축에게 가을과 겨울에 제사를 거행하라고 명하시고, 3년마다 폐하께서 직접 교사를 거행하십시오.”라고 건의했다.
其秋, 爲伐南越, 告禱泰一, 以牡29)荊畫幡30)日月北斗登龍, 以象天一三星, 爲泰一鋒,31) 名曰「靈旗」.32) 爲兵禱,33) 則太史奉以指所伐國.34) 而五利將軍使不敢入海, 之泰山祠. 上使人微隨驗, 實無所見. 五利妄言見其師, 其方盡, 多不讎. 上乃誅五利.35)
이해 가을, 남월(南越)을 토벌하기 위해서 태일신에게 제사 지내어 고유(告由)했다. 그 제사에서는 모형(牡荊)으로 깃대를 만들고 깃발에는 해, 달, 북두칠성과 비룡(飛龍)을 그려서 천일삼성(天一三星)을 상징했으며, 태일신에게 제사 지낼 때에는 이것을 제일 앞에 두는 깃발로 사용해 “영기(靈旗)”라고 불렀다. 군사상의 문제로 기도 드릴 때에는 태사(太史)가 이것을 잡고서 정벌하고자 하는 나라의 방향을 가리켰다.
이때 신선을 영접하기 위해서 파견된 5리 장군은 바다로 들어가지 못해 태산에 가서 제사만 지냈다. 천자가 몰래 사람을 보내어 그를 조사해 보니, 사실 그는 아무 신선도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5리 장군은 자신의 선사(仙師)를 만났다고 거짓말을 했고, 그의 방술 또한 쇠락해 영험을 나타내지 못했기에 천자는 5리 장군을 살해했다.
其冬, 公孫卿候神河南, 見僊人跡緱氏城上, 有物若雉, 往來城上. 天子親幸緱氏城視跡. 問卿:「得毋效文成、五利乎?」卿曰:「僊者非有求人主, 人主求之. 其道非少寬仮, 神不來. 言神事, 事如迂誕,1) 積以歲乃可致.」於是郡國各除道, 繕治宮觀名山神祠所, 以望幸矣.
이해 겨울, 공손경은 하남(河南)에서 신선을 기다리다가 구지성(緱氏城) 위에서 신선의 자취를 보았는데, 그것은 성 위를 왕래한 흔적으로 마치 꿩 발자국 같았다. 이에 천자는 친히 구지성으로 와서 그 자취를 관찰하고 “문성장군과 오리장군처럼 되지 않으려고 이러는 것은 아니겠지?”라고 말하자 공손경은 “신선은 사람을 찾아오지 않으므로 사람이 신선을 찾아야 합니다. 시간을 넉넉히 두고 참고 기다리지 않는다면 신선은 오지 않을 것입니다. 신선을 찾는 일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그것은 실용에 적합하지 않는 허황된 일 같으며, 오랜 세월이 흘러야만 신선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리하여 각 군(郡), 국(國)은 모두 도로를 만들거나 보수하고 궁전 누대와 명산의 신묘를 말끔히 단장하고 천자가 왕림하기를 기다렸다.
其年, 旣滅南越, 上有嬖臣李延年以好音見. 上善之, 下公卿議, 曰:「民閒祠尙有鼓舞之樂, 今郊祠而無樂, 豈稱乎?」公卿曰:「古者祀天地皆有樂, 而神祇可得而禮.」或曰:「泰帝使素女2)鼓五十弦瑟, 悲, 帝禁不止, 故破其瑟爲二十五弦.」於是塞南越, 禱祠泰一、后土, 始用樂舞, 益召歌兒, 作二十五弦3)及箜篌瑟4)自此起.
그해에 남월을 멸망시킨 후, 천자가 총애하는 신하인 이연년(李延年)은 아름다운 음악을 진헌해 천자를 배알했다. 천자는 그의 음악을 칭찬하고, 공경들에게 제사의 음악에 대해서 의논하라고 명하며 “비록 민간의 제사에도 고무(鼓舞)의 음악이 사용되는데, 지금 조정의 교사에는 오히려 아무런 음악도 사용하지 않으니, 이 어찌 맞는 말이라고 하겠소?”라고 말했다. 그러자 공경대신들은 “고대에 천지(天地)에 지내는 제사에는 모두 음악을 사용했으며, 그래야만 천지신령이 제사를 흠향할 수 있습니다”라고 아뢰었다. 또 어떤 사람은 “태제(泰帝)가 소녀(素女)에게 50현의 거문고를 연주하게 했는데, 그 음조가 너무나 슬퍼서 연주를 그만두게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거문고를 25현으로 고치게 했던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남월을 평정하고 태일신, 후토신에게 제사 지낼 때 처음으로 악무를 사용했고 가수를 불러서 노래하게 했다. 이때부터 25현의 거문고와 공후(箜篌)를 제작하는 것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其來年冬, 上議曰:「古者先振兵澤旅,5) 然後封禪.」乃遂北巡朔方, 勒兵十餘萬, 還祭黃帝冢橋山, 澤兵須如.6) 上曰:「吾聞黃帝不死, 今有冢, 何也?」或對曰:「黃帝已僊上天, 群臣葬其衣冠.」卽至甘泉, 爲且7)用事泰山,8) 先類祠泰一.
이듬해 겨울, 천자는 “고대의 제왕들은 먼저 병기를 거두어들이고 군대를 해산시킨 후에 봉선을 거행했소.”라 했다. 그래서 병력 10만여 명을 이끌고 북쪽으로 가서 삭방(朔方)을 순시했다. 돌아오는 길에 교산(橋山)에 있는 황제의 능묘에 제사 지내고 수여(須如)에서 군대를 해산했다. 천자가 “듣자니 황제는 죽지 않았다는데 여기에 무덤이 있으니 이게 어찌 된 일이오?”라고 물으니, 어떤 사람이 “황제가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 후에 여러 신하들이 그의 의관을 여기에 묻은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천자는 감천궁으로 돌아온 후에 태산에서 봉선을 거행하기 위해서 먼저 태일신에게 유사(類祀)를 지냈다.
自得寶鼎, 上與公卿諸生議封禪.1) 封禪用希曠絶, 莫知其儀禮, 而群儒采封禪尙書、周官、王制之望祀射牛2)事. 齊人丁公年九十餘, 曰:「封者, 合不死之名也. 秦皇帝不得上封. 陛下必欲上, 稍上卽無風雨, 遂上封矣.」上於是乃令諸儒習射牛, 草封禪儀.3) 數年, 至且行. 天子旣聞公孫卿及方士之言, 黃帝以上封禪, 皆致怪物與神通, 欲放黃帝以嘗接神僊人蓬萊士, 高世比德於九皇,4) 而頗采儒術以文之. 群儒旣以不能辯明封禪事, 又牽拘於詩書古文而不敢騁. 上爲封祠器示群儒, 群儒或曰「不與古同」, 徐偃又曰「太常諸生行禮不如魯善」, 周霸屬圖封事,5) 於是上絀偃、霸, 盡罷諸儒弗用.
보정을 얻은 후부터 천자는 공경대부들 및 유생들과 봉선을 거행하는 일에 대해서 상의했다. 봉선은 자주 거행되지 못했고, 그 제사가 끊긴 지 오래되어 그 의식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자 유생들은 『상서(尙書)』, 『주관(周官)』 그리고 「왕제(王制)」에 나오는 ‘망사(望祀)’와 ‘사우(射牛)’ 등을 봉선에 채용하자고 건의했다.
제나라 사람 정공(丁公)은 나이가 90여 세였는데, 그는 “봉선이란 것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성명(盛名)입니다. 진시황은 산에 오르던 도중에 비를 만나 하늘에 봉선을 지내지 못했습니다. 폐하께서 반드시 산 위에 오르시겠다면 힘들어도 참으시며 조금씩 조금씩 올라가셔야 합니다. 그러면 비바람은 곧 멈출 것이고 산 위에서 제사 지낼 수 있습니다.”라 했다. 그리하여 천자는 유생들에게 ‘사우’를 연습하게 명령하고 봉선의식의 초고를 작성하게 했다. 몇 년 후 봉선을 치를 때가 임박했을 때 천자는 황제가 봉선을 거행할 때에는 언제나 신물을 불러오고 신선들과 만났다는 말을 공손경과 방사들에게 듣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황제를 본받고 싶어서 신선, 봉래방사를 응대하고자 했고, 세속을 초탈해 9황(九皇)에 견줄 만한 덕을 쌓고자 했다.
그리고 무제는 유술(儒術)을 광범위하게 채용해 봉선에 대한 글을 짓게 했다. 그러나 유생들은 봉선에 대한 일을 분명히 밝히지 못했고, 『시경(詩經)』, 『서경(書經)』 등의 옛 글에 구속되어 자기의 의견을 자유롭게 나타내지도 못했다. 이에 천자가 봉선 때 사용하는 제기들을 유생들에게 보여주자 유생 중 어떤 이가 “옛날의 것과는 다릅니다.”라고 했고, 또한 서언(徐偃)은 “태상(太常)이 집행하는 예의는 옛날 노(魯)나라의 것보다 못합니다.”라 했다. 이에 주패(周覇)가 유생들을 불러 모아서 봉선에 대한 일을 논의하자, 천자는 서언, 주패를 내쫓고 유생들을 배척하고 임용하지 않았다.
三月, 遂東幸緱氏, 禮登中嶽6)太室.7) 從官在山下聞若有言「萬歲」云.8) 問上, 上不言;問下, 下不言. 於是以三百戶封太室奉祠, 命曰崇高邑.9) 東上泰山, 山之草木葉未生, 乃令人上石立之泰山顚.
3월, 천자는 동쪽으로 구지성에 왕림해 중악(中嶽) 태실산에 올라서 제사를 지냈다. 이때 천자의 시종관이 마치 “만세!”라고 고함치는 것 같은 소리를 듣고서 산 위에 올라가서 물었더니 산 위에 있던 사람들은 그런 소리를 내지 않았다고 했다. 이에 산 아래에 내려가서 물으니 산 아래의 사람들도 소리치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천자는 이 말을 듣고서 3백 호의 봉읍을 태실산에 바치고 이로써 제사 지내게 하고, 이 봉읍을 “숭고읍(崇高邑)”이라고 명명했다. 이어서 동쪽의 태산에 올랐는데, 산 위에는 아직 초목이 무성하지 않아 태산의 꼭대기에 비석을 세우라고 명했다.
上遂東巡海上, 行禮祠八神.10) 齊人之上疏言神怪奇方者以萬數, 然無驗者. 乃益發船, 令言海中神山者數千人求蓬萊神人. 公孫卿持節常先行候名山, 至東萊, 言夜見一人, 長數丈, 就之則不見, 見其跡甚大, 類禽獸云. 群臣有言見一老父牽狗, 言「吾欲見巨公」,11) 已忽不見. 上旣見大跡, 未信, 及群臣有言老父, 則大以爲僊人也. 宿留12)海上, 與方士傳車及閒使求僊人以千數.
이어 천자는 동쪽으로 순수해 바닷가에 이르러 8신(八神)에 제사 지냈다. 제나라 사람이 “기괴한 방술을 이야기하는 자가 거의 만 명에 이르지만 영험한 자는 한 명도 없다.”고 글을 올려 아뢰었다. 그러자 천자는 “배를 더욱 많이 내보내 바다에 신선이 있다고 말하는 수천 명에게 봉래선인을 찾으라.”고 명령했다. 이에 공손경은 부절을 지니고 먼저 가서 명산의 신선을 기다렸다. 동래(東萊)에 이르렀을 때 공손경은 “밤에 어떤 사람을 보았는데 그는 키가 수십 척이나 되었고, 다가가도 보이지 않았고, 단지 그가 남긴 발자국만 볼 수 있었는데 매우 컸으며 마치 짐승의 발자국과 같았다.”고 말했다.
그러자 신하 중에 어떤 이가 “개를 끌고 가는 한 노인을 보았는데, 그는 ‘천자를 만나고 싶다’라고 말하고는 갑자기 사라져 보이지 않았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천자는 그 커다란 발자국을 보고서도 믿지 못했으나, 그 신하가 노옹(老翁)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서야 그 노옹이 바로 신선임을 깊이 믿게 되었다. 그래서 해상에서 머물며 방사들에게 전거(傳車)를 내어주었고, 신선을 찾으라고 간사(間使) 수천 명을 파견했다.
四月, 還至奉高. 上念諸儒及方士言封禪人人殊, 不經, 難施行. 天子至梁父, 禮祠地主. 乙卯, 令侍中儒者皮弁薦紳, 射牛行事. 封泰山下東方, 如郊祠泰一之禮. 封廣丈二尺, 高九尺, 其下則有玉牒書, 書袐. 禮畢, 天子獨與侍中奉車子侯13)上泰山, 亦有封. 其事皆禁. 明日, 下陰道. 丙辰, 禪泰山下阯東北肅然山,14) 如祭后土禮. 天子皆親拜見, 衣上黃而盡用樂焉. 江淮閒一茅三脊15)爲神藉. 五色土益雜封. 縱遠方奇獸蜚禽及白雉諸物, 頗以加祠. 兕旄牛犀象之屬弗用. 皆至泰山然后去. 封禪祠, 其夜若有光, 晝有白雲起封中.
4월에 봉고현(奉高縣)으로 돌아왔다. 천자는 유생들과 방사들이 말하는 봉선의식이 사람마다 각기 다르고, 근거도 부족해 시행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천자는 양보산(梁父山)에 돌아와서 지신(地神)에게 제사 지냈다.
을묘일에 시중(侍中)의 벼슬을 맡은 유생에게 피변(皮弁)을 쓰고, 홀을 꽂은 관복을 입게 하고 천자가 직접 ‘사우’의식을 거행했다. 천자는 또 태산 아래의 동쪽에 단을 설치해 태일신에게 제사 지내는 예의대로 하늘에 제사 지냈다. 그 제단은 넓이가 1장(丈) 2척(尺), 높이는 9척이 되게 했으며, 제단 아래에 옥첩서(玉牒書)를 놓아두었는데 그 내용은 비밀로 했다. 제사를 끝낸 다음에 천자는 시중 봉거(奉車)인 자후(子侯)만을 데리고 태산에 올라가서 하늘에 제사 지냈는데, 이 일은 밖으로 전해지지 않도록 비밀로 했다. 다음날 천자는 산 북쪽의 길로 하산했다. 병진일에 태산 기슭 동북방의 숙연산(肅然山)에서 지신에 제사 지냈는데, 후토신에게 제사 지내는 의식과 똑같이 거행했다.
이렇듯 제사를 지내는 동안 항상 천자가 직접 공손히 제사 지냈으며, 황색의 옷을 입었고, 언제나 음악으로 반주를 했다. 또한 양자강과, 회수 일대에서 생산되는 영모(靈茅)를 엮어서 신의 자리를 만들었고, 5색의 진흙으로 제단을 단단하게 메웠다. 또 아주 먼 지방에서 사는 진귀한 들짐승, 날짐승과 흰색 꿩 등의 동물들을 놓아주었는데 이것은 매우 성대하고 엄중하게 거행되었다. 그러나 시우(兕牛), 모우(牦牛), 서우(犀牛), 대상(大象) 등의 동물들은 사용하지 않았다. 천자 일행은 모두 태산으로 돌아온 후에 헤어졌다. 봉선을 거행할 때 밤에는 하늘에 불빛 같은 것이 번쩍거렸고, 낮에는 흰 구름이 제단 위에서 솟아올랐다.
天子從封禪還, 坐明堂,16) 群臣更上壽. 於是制詔御史:「朕以眇眇之身承至尊, 兢兢焉懼弗任. 維德菲薄, 不明于禮樂. 脩祀泰一, 若有象景光, 屑如有望,17) 依依震於怪物, 欲止不敢, 遂登封泰山, 至於梁父, 而后禪肅然. 自新, 嘉與士大夫更始, 賜民百戶牛一酒十石, 加年八十孤寡布帛二匹. 復博、奉高、蛇丘、18) 歷城, 毋出今年租稅. 其赦天下, 如乙卯赦令. 行所過毋有復作. 事在二年前, 皆勿聽治.」又下詔曰:「古者天子五載一巡狩, 用事泰山, 諸侯有朝宿地. 其令諸侯各治邸泰山下.」19)
천자가 봉선을 지내고 돌아와서 명당(明堂)에 앉자 여러 신하들이 천자께 일일이 만수무강을 빌었다. 그때 천자는 어사(御史)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짐은 미천한 몸으로 지존한 권위를 이어받아서 항상 언행에 조심하고 오직 그 임무를 수행하지 못할까 두려워했소. 짐은 덕이 부족하고 예악제도에 밝지 못하오. 태일신에 제사 지낼 때 하늘에는 상서로운 광채가 오랫동안 비쳤는데 짐은 그 기이한 광경에 몹시 놀라서 중도에 제사를 그만두려고 하면서도 차마 그럴 수가 없었소. 마침내 태산에 올라서 천신에 제사 지냈으며, 양보(梁父)에 도착한 후에 숙연산에서 지신에 제사 지냈소. 짐은 스스로 덕을 닦고 새사람이 되며 모든 관리들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자 하오. 백성들에게는 1백호당 소 한 마리와 술 10석(石)을 내리고, 나이 80세 된 노인과 고아, 과부들에게는 직물 2필씩을 하사하시오.
또 특별히 박(博), 봉고(奉高), 사구(蛇丘)와 역성(歷城)에는 요역과 함께 금년의 조세를 면제하시오. 을묘년에 했던 것처럼 천하에 대사면령을 실시하고, 짐이 순수한 지역은 복작(復作)을 금하고, 2년 전에 지은 죄에 대해서는 다시 그 죄를 묻지 말도록 하시오. 또한 옛날 천자는 5년에 한 번씩 순수하고 태산에서 제사를 지냈으며, 제후들은 조회할 때 묵을 곳의 건축에 참가했다고 하니, 지금 제후들도 태산 아래에 각자가 머물 부제(府第)를 짓도록 하오.”
天子旣已封禪泰山, 無風雨菑, 而方士更言蓬萊諸神山若將可得, 於是上欣然庶幾遇之, 乃復東至海上望, 冀遇蓬萊焉. 奉車子侯暴病, 一日死. 上乃遂去, 並海上, 北至碣石, 巡自遼西, 歷北邊至九原. 五月, 返至甘泉.20) 有司言寶鼎出爲元鼎, 以今年爲元封元年.
천자가 태산에서 봉선의 제사를 마칠 때까지 비와 바람의 재앙이 없었다. 방사들이 봉래산 등의 신산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또 아뢰자 천자는 기뻐하며 어쩌면 신선산을 볼 수 있을 것으로 믿고 다시 동쪽으로 가서 해변에 이르러 조망하면서 봉래선도를 볼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런데 봉거도위 곽자후(霍子侯)가 갑자기 병이 나서 죽었으므로, 천자는 그곳을 떠나서 해변을 따라서 북상해 갈석(碣石)에 도착했다. 다시 요서(遼西)에서 순수를 시작해 북방 변경을 거쳐서 구원(九原)까지 이르렀고, 5월에는 다시 감천궁으로 돌아왔다. 관원들은 보정이 출토된 해의 연호는 원정(元鼎)이라고 하고, 올해에는 봉선을 거행했기에 원봉(元封) 원년으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
其秋, 有星茀于東井.21) 後十餘日, 有星茀于三能.22) 望氣王朔言:「候獨見其星出如瓠,23) 食頃復入焉.」有司言曰:「陛下建漢家封禪, 天其報德星云.」
이해 가을, 어떤 별이 동정성(東井星)에서 반짝거리더니, 10여 일 후에 또 다른 별이 다시 삼능성(三能星)에서 빛났다. 기상을 관찰하는 왕삭(王朔)이 말하기를 “신(臣)이 혼자 하늘을 관찰하고 있었는데, 그 별이 처음 나타났을 때의 형상은 호리병박 같더니, 얼마 후에는 자취를 감추어버렸습니다.”라 했다. 그러자 담당 관리는 “폐하께서 한(漢) 왕조에서는 처음으로 봉선의식을 시작하시니, 하늘이 덕성(德星)을 나타내시어 폐하께 보답하는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
其來年冬, 郊雍五帝, 還, 拜祝祠泰一. 贊饗曰:「德星昭衍, 厥維休祥. 壽星仍出,24) 淵耀光明. 信星昭見,25) 皇帝敬拜泰26)祝之饗.」
이듬해 겨울, 천자는 옹현에서 5제에게 교사를 거행하고 돌아와서는 태일신에게 제사 지냈다. 축문은 “덕성이 찬란하게 빛난 것은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수성(壽星)도 함께 나타나서 밝게 빛났으며, 신성(信星)도 밝게 나타났습니다. 천자는 이에 태축(泰祝)이 제사 지내는 모든 신령들에게 삼가 배례하옵니다.”라 했다.
其春, 公孫卿言見神人東萊山, 若云「見天子」. 天子於是幸緱氏城, 拜卿爲中大夫. 遂至東萊, 宿留之數日, 毋所見, 見大人跡. 復遣方士求神怪采芝藥以千數. 是歲旱. 於是天子旣出毋名, 乃禱萬里沙,27) 過祠泰山.28) 還至瓠子,29) 自臨塞決河,30) 留二日, 沈祠而去.31) 使二卿將卒塞決河, 河徙二渠, 復禹之故跡焉.
그해 봄, 공손경이 동래산에서 신선을 보았는데 신선이 마치 “천자를 만나고 싶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 이에 천자는 구지성으로 행차해 공손경을 중대부(中大夫)에 임명했다. 그런 후에 동래에 도착해 며칠 머물렀는데,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단지 거인의 발자국만 보았다. 그러자 천자는 다시 방사 수천 명을 파견해 신기한 물건을 찾고 영지(靈芝)를 캐오도록 했다.
그러나 이해에는 가뭄이 들었으므로 이번에는 순수를 떠날 만한 명분이 없어서 천자는 만리사(萬里沙)로 가서 비가 오도록 빌었고, 태산에서 다시 제사 지냈다. 천자는 되돌아올 때 호자(瓠子)에 도착해 몸소 황하의 터진 둑을 막는 일을 했고, 이틀을 머물면서 백마(白馬)와 옥벽(玉璧)의 제물을 빠뜨려서 하신(河神)에 제사 지낸 후에 그곳을 떠났다. 급인(汲仁)과 곽창(郭昌) 두 장군에게 병사들을 거느리고 가서 황하의 터진 둑을 막게 했고, 황하를 대하(大河)와 탑수(漯水)의 두 줄기로 만들어서 바다로 흐르게 했다. 이리하여 하우가 치수하던 때와 같은 원래의 모습을 회복했다.
是時旣滅南越, 越人勇之32)乃言「越人俗信鬼, 而其祠皆見鬼, 數有效. 昔東甌王敬鬼, 壽至百六十歲. 後世謾怠, 故衰秏」. 乃令越巫立越祝祠, 安臺無壇, 亦祠天神上帝百鬼, 而以雞卜.33) 上信之, 越祠雞卜始用焉.
당시에 남월은 이미 멸망했는데, 남월 사람 용지(勇之)가 진언하기를 “남월 사람들에게는 귀신을 믿는 풍습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사를 지낼 때는 언제나 귀신을 볼 수 있으며 자주 효험을 봅니다. 옛날 동구왕(東甌王)은 귀신을 숭배해 160세까지 살았습니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올수록 귀신을 경시했기 때문에 쇠퇴해진 것입니다.”라 했다. 그러자 천자는 남월의 무사에게 제대는 쌓되 제단은 쌓지 않는 남월식의 사당을 건립해 천신, 상제(上帝), 백귀(百鬼)에게 제사 지내도록 하고, 아울러 닭뼈로써 점을 치는 방법을 사용하라고 명령했다. 천자가 이를 믿고 이와 같이 했기에, 남월식의 사당과 계복(鷄卜)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公孫卿曰:「僊人可見, 而上往常遽, 以故不見. 今陛下可爲觀, 如緱氏城,34) 置脯棗, 神人宜可致. 且僊人好樓居.」於是上令長安則作蜚廉桂觀,35) 甘泉則作益延壽觀, 使卿持節設具而候神人, 乃作通天臺,36) 置祠具其下, 將招來神僊之屬. 於是甘泉更置前殿, 始廣諸宮室.37) 夏, 有芝生殿防內中.38) 天子爲塞河, 興通天臺, 若有光云,39) 乃下詔曰:「甘泉防生芝九莖,40) 赦天下, 毋有復作.」
공손경은 “선인은 볼 수 있는 것입니다만, 천자께서는 항상 조급하셨기 때문에 만나지 못하신 것입니다. 지금 폐하께서 구지성에 건립한 것과 같이 경성에 사당을 지으시고 마른 고기와 대추 등의 제물을 바치면 신선을 불러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선들은 누대에 사는 것을 좋아합니다.”라 했다.
이에 황제는 명령을 내려 장안에 비렴관(蜚廉觀)과 계관(桂觀)을 지었고, 감천에는 익연수관(益延壽觀)을 지었고, 공손경에게 부절을 지니게 하고 제구(祭具)를 설치하고서 신선을 기다리게 했으며, 통천대(通天臺)를 세우고 대 아래에 제물을 차려놓고 신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이에 감천궁에 또 전전(前殿)을 짓고, 궁실을 증축하라 했다. 여름에 궁전 방 안에서 영지가 자라났다. 천자가 황하의 터진 둑을 막고 통천대를 짓자 하늘에 번쩍거리는 듯한 상서로운 구름이 나타났다. 이에 천자는 조서를 내려서 “감천궁전 방 안에 영지 아홉 포기가 자라났으니, 특별히 천하에 대사면을 실시하고 죄수들의 감옥 밖 노역을 면제하게 하라.”라 했다.
其明年, 伐朝鮮. 夏, 旱. 公孫卿曰:「黃帝時封則天旱, 乾封41)三年.」上乃下詔曰:「天旱, 意乾封乎? 其令天下尊祠靈星焉.」42)
그 이듬해, 조선(朝鮮)을 토벌했다. 여름에 가뭄이 들자 공손경이 말하기를 “황제께서 제단을 쌓을 때마다 가뭄이 들었는데, 이렇게 3년 동안 가물었습니다.”라 했다. 그러자 천자는 조서를 내려 “하늘이 가뭄을 내린 것은 제단을 쌓은 진흙을 마르게 하려는 뜻이 아니겠는가? 이에 특별히 명하노니 천하 백성들은 영성(靈星)에 경건히 제사를 지내도록 하라.”라 했다.
其明年, 上郊雍, 通回中道, 巡之.43) 春, 至鳴澤,44) 從西河歸.
그 이듬해, 천자는 옹현에서 교사를 거행했고, 회중(回中)의 길을 거쳐서 순수했다. 봄에 명택(鳴澤)에 이르러, 서하(西河)로부터 장안으로 돌아왔다.
其明年冬, 上巡南郡,45) 至江陵而東. 登禮潛之天柱山, 號曰南嶽.46) 浮江, 自尋陽出樅陽,47) 過彭蠡, 祀其名山川. 北至琅邪, 並海上. 四月中, 至奉高脩封焉.
다음해 겨울, 천자는 남군(南郡)으로 순수했다. 강릉(江陵)에 이른 후에는 동쪽으로 행차했다. 잠현(潛縣)의 천주산(天柱山)에 올라 제사 지내고, 그 산을 ‘남악(南嶽)’이라 했다. 배를 타고 장강(長江)을 따라서 심양(尋陽)에서 종양(樅陽)으로 가는 도중에 팽려(彭蠡)를 거쳐서 명산대천에 제사 지냈다. 북쪽으로 향해 낭야군(琅邪郡)에 도착하자 다시 해안을 따라 북상했고, 4월에 봉고현에 이르러 봉선을 거행했다.
初, 天子封泰山, 泰山東北阯古時有明堂處, 處險不敞. 上欲治明堂奉高旁, 未曉其制度. 濟南人公玊帶48)上黃帝時明堂圖. 明堂圖中有一殿, 四面無壁, 以茅蓋, 通水, 圜宮垣爲複道, 上有樓, 從西南入, 命曰昆侖,49) 天子從之入, 以拜祠上帝焉. 於是上令奉高作明堂汶上,50) 如帶圖. 及五年脩封, 則祠泰一、五帝於明堂上坐, 令高皇帝祠坐對之. 祠后土於下房, 以二十太牢. 天子從昆侖道入, 始拜明堂如郊禮. 禮畢, 燎堂下. 而上又上泰山, 有袐祠其顚. 而泰山下祠五帝, 各如其方, 黃帝幷赤帝, 而有司侍祠焉. 泰山上擧火, 下悉應之.
예전에 천자가 태산에서 봉선을 거행할 때, 태산 동북쪽 산기슭에 오래 전 지은 명당이 있었는데, 지세가 험악하고 좁았으므로 천자는 봉고현 부근에 다른 명당을 또 하나 짓고 싶었으나 그 형식과 규모를 알지 못했다.
그러자 제남(濟南) 사람 공옥대(公玉帶)가 황제 때의 명당 설계도를 천자에게 바쳤다. 명당의 설계도에는 전당(殿堂)이 한 채 있었는데, 전당의 사방에는 담장이 없고 지붕은 띠〔茅〕로 덮여 있으며 사면은 물이 통하게 되어 있었다. 전체의 둘레에는 궁원(宮垣)이 둘러져 있었으며, 복도(複道)를 만들었는데, 윗길에는 서남쪽에서 전당으로 들어가는 주루(走樓)가 설치되어 이것을 ‘곤륜도(昆侖道)’라고 이름지었고, 천자는 이 길을 따라 전당에 들어가서 상제께 제사 지내게 되어 있었다. 이에 천자는 봉고현의 문수(汶水)곁에 공옥대가 바친 설계도에 따라서 명당을 짓도록 명령했다.
5년 후 봉선을 거행할 때, 명당의 상좌(上坐)에서는 태일신과 5제에게 제사 지냈고, 고황제(高皇帝)패는 반대편에 설치하게 했다. 하방(下房)에서는 소 20마리를 제물로 후토신에게 제사 지냈다. 천자는 곤륜도를 통해 들어가서 교사를 지내는 예의에 따라서 명당에서 제사 지냈다. 제사가 끝난 후 다시 당하(堂下)에서 요제(燎祭)를 지냈다. 천자는 또 태산에 올라서 산꼭대기에서 비밀리에 제사를 지냈다. 태산 아래에서 5제에게 제사 지낼 때 그들 각자에 해당하는 방위에서 제사 지냈는데, 황제와 적제(赤帝)는 은 방위에 두었으며, 이 제사에는 담당 관원들이 참석했다. 제사 지낼 때 태산 위에서 횃불을 들어서 표시하면 산 아래에서도 횃불을 들어서 서로 호응했다.
其後二歲, 十一月甲子朔旦冬至, 推曆者以本統. 天子親至泰山, 以十一月甲子朔旦冬至日祠上帝明堂,51) 每脩封禪. 其贊饗曰:「天增授皇帝泰元神筴, 周而復始.52) 皇帝敬拜泰一.」東至海上, 考入海及方士求神者, 莫驗, 然益遣, 冀遇之.
2년 후, 11월 갑자삭일 아침이 동지였는데, 역법을 계산하는 자는 이 날을 기점으로 해 역법을 추산했다. 천자는 몸소 태산으로 행차해 11월 갑자삭일 아침 동지에 명당에서 하늘에 제사 지냈는데, 봉선은 치르지 않았다. 축문에 이르기를 “하늘이 천자에게 하늘의 신책(神策)을 내려주시어 일월이 한 바퀴 돌면 역수(曆數)는 다시금 새롭게 시작합니다. 천자는 태일신께 삼가 배례하옵니다.”라 했다. 천자는 동쪽으로 가서 바다에 도착한 후, 바다에 나가 신선을 만나려는 사람들과 방사들을 조사해 보았으나 아무 효험이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신선을 찾으러 사람들을 파견했고, 신선을 만나고자 했다.
十一月乙酉,53) 柏梁災. 十二月甲午朔, 上親禪高里,54) 祠后土. 臨渤海, 將以望祠蓬萊之屬, 冀至殊庭焉.55)
11월 을유일(乙酉日), 백량대에 화재가 발생했다. 12월 갑오삭일에 천자는 친히 고리산(高里山)에서 제례를 올리고, 후토신에게 제사 지냈다. 이어서 발해(渤海)에 도착해 봉래산의 여러 신에게 망사를 지내고, 신선이 사는 곳에 도달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上還, 以柏梁災故, 朝受計甘泉.56) 公孫卿曰:「黃帝就靑靈臺, 十二日燒,57) 黃帝乃治明庭. 明庭, 甘泉也.」 方士多言古帝王有都甘泉者. 其後天子又朝諸侯甘泉, 甘泉作諸侯邸. 勇之乃曰:「越俗有火災, 復起屋必以大, 用勝服之.」於是作建章宮,58) 度爲千門萬戶. 前殿度高未央, 其東則鳳闕, 高二十餘丈.59) 其西則唐中,60) 數十里虎圈.61) 其北治大池, 漸臺62)高二十餘丈, 名曰泰液63)池, 中有蓬萊、方丈、瀛洲、壺梁, 象海中神山龜魚之屬.64) 其南有玉堂、65) 璧門、大鳥之屬. 乃立神明臺、66) 井幹樓,67) 度五十餘丈, 輦道相屬焉.
천자는 경성으로 돌아왔다. 백량대에서 화재가 났기 때문에 감천궁에서 조회하며 연말 보고를 받았다. 공손경이 “황제께서 청령대(靑靈臺)를 지으신 지 겨우 12일 만에 화재를 당하자 다시 명정(明庭)을 지으셨는데, 명정이란 곧 감천궁입니다.”라 말했다. 방사들도 고대 제왕 가운데 감천에 도읍을 정한 사람이 있었다고 아뢰었기 때문에 천자는 감천궁에서 제후의 조회를 받고 감천에 제후의 부제를 지었다.
용지가 “월(越)의 풍속에는 화재가 발생한 후에 다시 집을 지을 때는 반드시 원래의 것보다 크게 지어서, 집의 크기로 재앙을 제압합니다.”라고 아뢰었다. 그리하여 건장궁(建章宮)을 지었는데 그 규모가 천문만호(千門萬戶)였고, 그 전전(前殿)은 미앙궁(未央宮)보다 높았다. 그 동쪽에는 봉궐(鳳闕)을 세웠는데 높이가 20여 장(丈)이었고, 서쪽에는 당중지(唐中池)를 팠는데, 둘레가 수십 리나 되는 호권(虎圈)이 있었다. 북쪽에는 커다란 못을 파서 못 가운데 점대(漸臺)를 세웠는데 그 높이가 20여 장이나 되었다. 이 못의 이름을 태액지(泰液池)라고 하고, 못 가운데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 호량(壺梁) 등 4개의 선산(仙山)을 세워서 바다 가운데에 선산과 해구(海龜), 해어(海魚) 등의 형상을 만들어서 세웠다. 남쪽에는 옥당(玉堂), 벽문(璧門), 대조(大鳥)등을 세웠으며 또 신명대(神明臺)와 정간루(井幹樓)를 세웠는데 그 높이가 50여 장에 달했으며, 연도(輦道)가 누각들 사이에 연결되어 있었다.
夏, 漢改曆, 以正月爲歲首, 而色上黃, 官名68)更印章以五字.69) 因爲太初元年. 是歲, 西伐大宛. 蝗大起. 丁夫人、70) 雒陽虞初等以方祠詛匈奴、大宛焉.
여름, 한나라는 역법을 바꾸었다. 음력 정월을 그해의 시작으로 했고, 황색을 숭상했으며, 관명의 인장을 다섯 글자로 바꾸어 이 해를 태초(太初) 원년으로 했다. 이 해에 서쪽의 대원(大宛)을 정벌했으며, 또 메뚜기 떼가 기승을 부렸다. 정부인(丁夫人)과 낙양 사람 우초(虞初) 등이 방술을 사용해 흉노(匈奴)와 대완을 저주하는 제사를 올렸다.
其明年, 有司言雍五畤無牢熟具, 芬芳不備. 乃命祠官進畤犢牢具, 五色食所勝,71) 而以木禺馬72)代駒焉. 獨五帝用駒, 行親郊用駒. 及諸名山川用駒者, 悉以木禺馬代. 行過, 乃用駒. 他禮如故.
이듬해, 사관(祠官)들은 “옹현의 5치에서 지내는 제사에는 익힌 제물과 향기 나는 제물을 올리지 않았다.”고 아뢰었다. 이에 천자는 사관에게 명령해 삶은 송아지를 각 치에 바치도록 하고, 제물로 바치는 소의 털 색깔은 각 방위의 천제가 향용할 수 있는 색의 것을 선택해 사용하게 했다. 또한 제사에 사용하는 장마(壯馬)는 나무로 만든 말로 대체하게 했다. 그러나 5제의 제사와 천자가 친히 제사 지내는 교사에는 장마를 사용하게 했고, 각 명산대천에 제사 지낼 때는 모두 나무로 만든 말로 대체시켰다. 또한 천자가 순수했던 지역에서 제사 지낼 때에도 장마를 사용했는데, 그 외의 예식은 옛 체제에 따라서 거행했다.
其明年, 東巡海上, 考神僊之屬, 未有驗者. 方士有言「黃帝時爲五城十二樓,73) 以候神人於執期,74) 命曰迎年」.75) 上許作之如方, 名曰明年. 上親禮祠上帝, 衣上黃焉.
다음해, 천자는 동쪽으로 나아가 바닷가에서 신선을 불러오는 모든 방법을 시험해 보았으나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했다. 어떤 방사가 이르기를 “황제 때 5성 12루를 건립하고 집기(執期)에서 신선을 기다렸는데, 이를 영년(迎年)이라고 했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천자는 그가 말한 대로 누대를 짓고 ‘명년(明年)’이라고 이름짓고는 황색의 옷을 입고 몸소 상제께 제사 지냈다.
公玊帶曰:「黃帝時雖封泰山, 然風后、封鉅、76) 岐伯77)令黃帝封東泰山,78) 禪凡山79)合符, 然後不死焉.」天子旣令設祠具, 至東泰山, 東泰山卑小, 不稱其聲, 乃令祠官禮之, 而不封禪焉. 其後令帶奉祠候神物. 夏, 遂還泰山, 脩五年之禮如前, 而加禪祠石閭. 石閭者, 在泰山下阯南方, 方士多言此僊人之閭也, 故上親禪焉.
그러자 공옥대가 이렇게 건의했다.
“황제 때는 단지 태산에만 제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 지냈습니다. 그러나 풍후(風后), 봉거(封鉅), 기백(岐伯) 등이 동태산(東泰山)에서 천신에게 제사 지내고 범산(凡山)에서 지신에게 제사 지낼 것을 건의했는데, 두 곳에서 얻은 부절이 서로 합치한 연후에 황제께서는 불로장생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천자는 곧 제사를 준비하라 명령하고 동태산에 도착해 보니 동태산이 너무 작아 명성에 걸맞지 않았다. 이에 사관에게 제사만 지내도록 하고 봉선은 거행하지 않았다. 이후 공옥대로 하여금 이곳에서 제사 지내며 신선을 기다리게 했다. 여름에 천자는 태산으로 돌아와서 관례대로 5년에 한 번 거행되는 봉선을 거행했고, 다시 석려산(石閭山)에서 지신에게 제사지냈다. 석려산은 태산 기슭의 남쪽에 있었는데, 방사들은 이곳이 신선이 사는 곳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천자가 이곳에 와서 몸소 지신에게 제사지낸 것이었다.
其後五年, 復至泰山脩封,80) 還過祭常山.
5년 후, 천자는 다시 태산에 와서 봉선의 대전을 거행하고 돌아가는 길에 상산(常山)에서 제사 지냈다.
今天子所興祠, 泰一、后土, 三年親郊祠, 建漢家封禪, 五年一脩封. 薄忌泰一及三一、冥羊、馬行、赤星, 五, 寬舒之祠官81)以歲時致禮. 凡六祠,82) 皆太祝領之. 至如八神諸神, 明年、凡山他名祠, 行過則祀, 去則已. 方士所興祠, 各自主, 其人終則已, 祠官弗主. 他祠皆如其故. 今上封禪, 其後十二歲而還, 遍於五嶽、四瀆矣. 而方士之候祠神人, 入海求蓬萊, 終無有驗. 而公孫卿之候神者, 猶以大人跡爲解, 無其效. 天子益怠厭方士之怪迂語矣, 然終羈縻弗絶, 冀遇其眞. 自此之後, 方士言祠神者彌衆, 然其效可睹矣.83)
지금 천자가 세운 신사(神祠)는 태일사(泰一祠)와 후토사(后土祠)인데, 3년마다 천자가 직접 교사를 지냈고, 한(漢) 왕조에서 시작한 봉선은 5년에 한 번 거행했다. 박유기의 건의에 의해서 건립된 태일(泰一), 삼일(三一), 명양(冥羊), 마행(馬行), 적성(赤星) 등의 다섯 신사에서는 사관인 관서가 매년 제사 지냈고, 이외에 앞의 다섯 신사에 후토를 합한 여섯 신사의 제사는 모두 태축이 주관했다. 팔신 중의 각 신선과 명년, 범산 등 그 밖의 유명한 신사는 천자가 순수하다가 들를 때만 제사를 지냈고, 그냥 가버리면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방사들이 건립한 신사는 그들 각자가 제사를 주관했고, 그들이 죽으면 곧 끝났고, 사관이 주재하지 않았다. 그 밖의 신사는 옛 형식에 따랐다.
이때 천자가 태산에서 지내기 시작한 봉선은 그 후 12년 동안 거행되었고, 오악(五嶽), 사독(四瀆)의 신령들에게도 제사 지내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한편 방사들이 신선을 맞이하는 제사를 지냈고 바다로 가서 봉래선도를 찾았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또 공손경은 거인의 발자국을 보았기에 신선을 만날 것이라 하며 기다렸으나 아무 효험이 없었다. 이리하여 천자는 점차 방사들의 기괴한 이야기를 싫어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그들을 구슬리며 관계를 완전히 끊지는 못했으니, 그것은 진심으로 신선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귀신에게 제사 지내는 이야기를 하는 방사들이 더욱 많아졌지만, 그 결과가 어떠했을지는 눈에 보이는 듯하다.
太史公曰:余從巡祭天地諸神名山川而封禪焉. 入壽宮侍祠神語, 究觀方士祠官之言, 於是退而論次自古以來用事於鬼神者, 具見其表裏. 後有君子, 得以覽焉. 至若俎豆珪幣之詳, 獻酬之禮, 則有司存焉.
태사공(太史公)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천자를 따라서 순수하며 천지의 여러 신과 명산대천에 제사 지냈고, 봉선의 대전에도 참가했다. 수궁(壽宮)에 들어와서는 제사에 참가해 신께 올리는 축문도 듣고 방사와 사관들의 의도를 세심하게 탐구해 보았다. 그리고 물러나 자고로 귀신에게 제사 지내는 일에 대해서 순서대로 논술해 제사에 관한 안팎의 모든 것을 다 여기에 밝혀놓았으니, 후세의 군자는 내 글을 통해서 그 정경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제사 지낼 때 사용하는 조두규폐(俎豆珪幣)에 관한 상세함이나 헌수(獻酬)에 관한 의식에 대해서는 사관(祠官)들이 보존하고 있다.”
각주
1 正義蓬萊、方丈、瀛州, 勃海中三神山也.
2 索隱上雍, 以雍地形高, 故云上.
3 集解漢書音義曰:「區, 黃帝時人.」索隱鄭氏云:「黃帝佐也.」李奇曰:「黃帝時諸侯. 本作『申區』者, 非;藝文志作『鬼容區』者也.」
4 正義率音律, 又音類, 又所律反, 三音並通. 後皆放此也.
5 集解封禪書「功」字作「公」.
6 正義河圖云:「王者封太山, 禪梁父, 易姓登崇, 有七十二君也.」
7 集解應劭曰:「黃帝時諸侯會封禪者七千人.」李奇曰:「說仙道得封者七千國.」張晏曰:「神靈之封謂山川之守.」
8 集解蘇林曰:「今雍有鴻冢.」
9 集解徐廣曰:「一作『塞』.」
10 集解漢書音義曰:「黃帝仙於塞門也.」索隱服虔云:「黃帝所仙之處也.」小顔云:「谷, 中山之谷口, 漢時爲縣, 今呼爲冶谷, 去甘泉八十里. 盛夏凜然, 故曰寒門谷口也.」
11 集解晉灼曰:「地理志首山屬河東蒲阪, 荊山在馮翊懷德縣.」
12 索隱顔師古云:「胡謂項下垂肉也;■, 其毛也. 故童謠曰『何當爲君鼓龍胡』是也.」
13 正義徒果反.
14 正義戶高反, 下同.
15 正義括地志云:「湖水原出虢州湖城縣南三十五里夸父山, 北流入河, 卽鼎湖也.」
16 正義空桐山在原州平高縣西一百里.
17 集解徐廣曰:「垓, 次也.」駰案:李奇曰「垓, 重也. 三重壇也」. 索隱垓, 重也. 言爲三重壇也. 鄒氏云一作「階」, 言壇階三重.
18 集解服虔曰:「坤位在未, 黃帝從土位.」
19 集解韋昭曰:「無犛牛醴之屬.」
20 索隱音進. 漢書作「進」. 顔師古云:「具俎豆酒醴而進之. 一曰進謂雜物之具, 所以加禮也.」
21 索隱餟音竹芮反. 謂聯續而祭之. 漢志作「腏」, 古字通. 說文云:「餟, 祭酹.」正義劉伯莊云:「謂繞壇設諸神祭座相連綴也.」
22 集解徐廣曰:「洎音居器反, 肉汁也.」駰案:晉灼曰「此說合牲物燎之也.」正義劉伯莊云:「以大羹和祭食燎之.」案:以鹿內牛中, 以彘內鹿中. 水, 玄酒也.
23 索隱特, 一牲也. 言若牛若羊若彘, 止一特也.
24 集解應劭曰:「天子春朝日, 秋夕月, 拜日東門之外, 朝日以朝, 夕月以夕.」瓚曰:「漢儀郊泰一畤, 皇帝平旦出竹宮, 東向揖日, 其夕西向揖月. 便用郊日, 不用春秋也.」
25 正義括地志云:「漢雲陽宮在雍州雲陽縣北八十一里. 有通天臺, 卽黃帝以來祭天圜丘之處. 武帝以五月避暑, 八月乃還也.」
26 集解孟康曰:「璧大六寸謂之瑄.」索隱音宣, 璧大六寸也.
27 正義漢舊儀云:「祭天養牛五歲至二千斤.」
28 集解徐廣曰:「地, 一作『夜』.」
29 集解徐廣曰:「一作『牝』.」
30 集解如淳曰:「荊之無子者, 皆以絜齊之道也.」晉灼曰:「牡荊, 節閒不相當者.」韋昭曰:「以牡荊爲柄者也.」
31 集解徐廣曰:「天官書曰天極星明者, 泰一常居也. 斗口三星曰天一.」駰案:晉灼曰「畫一星在後, 三星在前爲太一鋒也」.
32 正義李奇云:「畫旗樹泰一壇上. 名靈旗, 畫日月北斗登龍等.」
33 正義爲, 于僞反.
34 正義韋昭云:「牡, 剛也. 荊, 强.」按:用牡荊指伐國, 取其剛爲稱, 故畫此旗指之.
35 正義漢武故事云:「東方朔言欒大無狀, 上發怒, 乃斬之.」
1 正義迂音于. 誕音但. 迂, 遠也. 誕, 大也.
2 索隱亦謂太昊也. 正義泰帝謂太昊伏羲氏.
3 集解徐廣曰:「瑟也.」
4 集解徐廣曰:「應劭云武帝令樂人侯調始造箜篌.」索隱應劭云:「武帝始令樂人侯調作, 聲均均然, 命曰箜篌. 侯, 其姓也.」
5 集解徐廣曰:「古『釋』字作『澤』.」
6 集解李奇曰:「地名也.」
7 正義爲, 于僞反. 將爲封禪也.
8 正義道書福地記云:「泰山高四千九百丈二尺, 周迴二千里.」
1 正義白虎通云:「王者易姓而起, 天下太平, 功成封禪, 以告太平. 禪梁父之趾, 廣厚也. 刻石紀號, 著己之功績. 天以高爲尊, 地以厚爲德, 故增泰山之高以報天, 禪梁父之趾以報地. 封者, 附廣之;禪者, 將以功相傳授之.」
2 集解蘇林曰:「當祭廟, 射其牲以除不祥.」瓚曰:「射牛, 示親殺也.」索隱天子射牛, 示親祭也. 事見國語.
3 索隱儀見應劭漢官儀也.
4 集解張晏曰:「三皇之前有人皇, 九首.」韋昭曰:「上古人皇者九人也.」
5 集解服虔曰:「屬, 會也. 會諸儒圖封事.」
6 集解文穎曰:「崧高山也, 在潁川陽城縣.」
7 集解韋昭曰:「崧高山有太室、少室之山, 山有石室, 故以名之.」
8 正義漢儀注云:「有稱萬歲, 可十萬人聲.」
9 正義顔師古云:「以崇奉嵩高山, 故謂之崇高也.」
10 集解文穎曰:「武帝登泰山, 祭太一, 幷祭名山於泰壇, 西南開除八通鬼道, 故言八神也. 一曰八方之神.」索隱用事八神. 案:韋昭云「八神謂天、地、陰、陽、日、月、星辰主、四時主之屬」. 今案郊祀志, 一曰天主, 祠天齊;二曰地主, 祠太山、梁父;三曰兵主, 祠蚩尤;四曰陰主, 祠三山;五曰陽主, 祠之罘;六曰月主, 祠東萊山;七曰日主, 祠盛主;八曰四時主, 祠琅邪也.
11 索隱漢書音義曰:「巨公謂武帝.」
12 索隱音秀溜. 宿留, 遲待之意. 若依字讀, 則言宿而留, 亦是有所待, 並通也.
13 集解漢書百官表曰:「奉車都尉掌乘輿車, 武帝初置.」韋昭曰:「子侯, 霍去病之子也.」
14 集解服虔曰:「肅然, 山名, 在梁父.」
15 集解孟康曰:「所謂靈茅也.」
16 集解漢書音義曰:「天子初封泰山, 山東北阯古時有明堂處, 則此所坐者. 明年秋, 乃作明堂.」
17 集解瓚曰:「聞呼萬歲者三.」
18 集解鄭玄曰:「蛇音移.」
19 正義諸侯各於太山朝宿地起第, 准擬天子用事太山而居止.
20 集解漢書音義曰:「周萬八千里也.」
21 集解韋昭曰:「秦分野也. 後衛太子兵亂. 茀音佩.」
22 集解韋昭曰:「三能, 三公. 後連坐誅之.」
23 索隱見星出如瓠. 案:郊祀志云「塡星出如瓠」, 故顔師古以德星卽鎭星也. 今按:此紀唯言德星, 則德星, 歲星也. 歲星所在有福, 故曰德星也.
24 索隱壽星, 南極老人星也, 見則天下理安, 故言之也.
25 索隱信星, 鎭星也. 信屬土, 土曰鎭星, 則漢志爲德星也.
26 集解徐廣曰:「一無此字.」
27 集解應劭曰:「萬里沙, 神祠也, 在東萊曲城.」孟康曰:「沙徑三百餘里.」
28 集解鄧展曰:「泰山自東復有小泰山.」瓚曰:「卽今之泰山.」
29 集解服虔曰:「瓠子, 隄名.」蘇林曰:「在甄城以南, 濮陽以北, 廣百步, 深五丈所.」瓚曰:「所決河名.」索隱瓠子, 決河名. 蘇林曰:「在甄城南, 濮陽北, 廣百步, 深五丈.」
30 索隱按:河渠書武帝自臨塞決河, 將軍已下皆負薪也.
31 索隱按:沈白馬祭河決, 於是作瓠子歌, 見河渠書.
32 集解韋昭曰:「越地人名也.」
33 集解漢書音義曰:「持雞骨卜, 如鼠卜.」正義雞卜法用雞一, 狗一, 生, 祝願訖, 卽殺雞狗煮熟, 又祭, 獨取雞兩眼, 骨上自有孔裂, 似人物形則吉, 不足則凶. 今嶺南猶此法也.
34 集解韋昭曰:「如猶比也.」
35 集解應劭曰:「飛廉神禽, 能致風氣.」晉灼曰:「身如鹿, 頭如雀, 有角而蛇尾, 文如豹文也.」
36 集解徐廣曰:「在甘泉.」索隱漢書作通天臺於甘泉宮. 案:漢書舊儀臺高三十丈, 去長安二百里, 望見長安城也.
37 索隱姚氏案:「楊雄云甘泉本因秦離宮, 旣奢泰, 武帝增通天臺、迎風宮, 近則有洪崖、儲胥, 遠則石關、封巒、鳷鵲、露寒、棠梨等觀, 又有高華、溫德觀、曾成宮、白虎、走狗、天梯、瑤臺、仙人、弩法、相思觀.」
38 集解徐廣曰:「元封二年也.」索隱芝生殿房中. 案:生芝九莖, 於是作芝房歌.
39 集解李奇曰:「爲此作事而有光應.」瓚曰:「作通天臺也.」
40 集解應劭曰:「芝, 芝草也, 其葉相連.」如淳曰:「瑞應圖云王者敬事耆老, 不失舊故, 則芝草生.」
41 集解蘇林曰:「天旱欲使封土乾燥.」如淳曰:「但祭不立尸爲乾封.」正義乾音干. 蘇林云:「天旱欲使封土乾燥也.」顔師古云:「三歲不雨, 暴所封之土令乾.」鄭氏云:「但祭不立尸爲乾封.」
42 正義靈星卽龍星也. 張晏云:「龍星左角曰天田, 則農祥也, 見而祭之.」
43 集解徐廣曰:「在扶風汧縣.」
44 集解服虔曰:「鳴澤, 澤名也, 在涿郡遒縣北界.」
45 集解徐廣曰:「元封五年.」
46 集解應劭曰:「潛縣屬廬江. 南嶽, 霍山也.」文穎曰:「天柱山在潛縣南, 有祠.」
47 集解地理志廬江有樅陽縣.
48 索隱玊, 或作「肅」. 公玊, 姓;帶, 名. 姚氏按:風俗通齊湣王臣有公玊冉, 其後也, 音語錄反. 三輔決錄云杜陵有玊氏, 音肅. 說文以爲從玊, 音「畜牧」之「畜」. 今讀公玊與決錄音同. 然二姓單複有異, 單姓者肅, 後漢司徒玊況是其後也.
49 索隱玊帶明堂圖中爲複道, 有樓從西南入, 名其道曰崑崙. 言其似崑崙山之五城十二樓, 故名之也.
50 集解徐廣曰:「在元封二年秋.」
51 集解徐廣曰:「常五年一脩耳. 今適二年, 故但祀明堂.」
52 索隱案:薦饗之辭言天授皇帝泰元神筴, 周而復始. 又案:上黃帝得寶鼎神筴, 則太古上皇創曆之號, 故此云太元神筴, 周而復始也.
53 集解徐廣曰:「二十二日也.」
54 集解伏儼曰:「山名, 在泰山下.」
55 集解漢書音義曰:「蓬萊庭.」索隱冀, 漢書作「幾」. 幾, 近也;冀, 望也, 亦通. 服虔曰:「蓬萊中仙人. 殊庭者, 異也. 言入仙人異域也.」
56 正義顧胤云:「柏梁被燒, 故受記故之物於甘泉也.」顔師古曰:「受郡國計簿也.」
57 集解徐廣曰:「日, 一作『月』.」
58 正義括地志曰:「建章宮在雍州長安縣西二十里長安故城西.」
59 索隱三輔黃圖云「武帝營建章, 起鳳闕, 高三十五丈」. 關中記「一名別風, 言別四方之風」. 西京賦曰「閶闔之內, 別風嶕嶢」也. 三輔故事云「北有圜闕, 高二十丈, 上有銅鳳皇, 故曰鳳闕也」.
60 索隱如淳云:「詩云『中唐有甓』. 鄭玄曰『唐, 堂庭也』. 爾雅以廟中路謂之唐. 西京賦曰『前開唐中, 彌望廣象』是也.」
61 正義圈, 其遠反. 括地志云:「虎圈今在長安城中西偏也.」
62 正義顔師古云:「漸, 浸也. 臺在池中, 爲水所浸, 故曰漸臺.」按:王莽死此臺也.
63 正義臣瓚云:「泰液言象陰陽津液以作池也.」
64 索隱三輔故事云:「殿北海池北岸有石魚, 長二丈, 廣五尺, 西岸有石龜二枚, 各長六尺.」
65 索隱其南則玉堂. 漢武故事「玉堂基與未央前殿等, 去地十二丈」.
66 索隱漢宮闕疏云:「臺高五十丈, 上有九宮, 常置九天道士百人也.」
67 索隱關中記「宮北有井幹臺, 高五十丈, 積木爲樓」. 言築累萬木, 轉相交架, 如井幹. 司馬彪注莊子云「井幹, 井闌也」. 又崔譔云「井以四邊爲幹, 猶築牆之有楨幹」又諸本多作「幹」, 一本作「榦」, 音[韓]. 說文云「幹, 井橋」.
68 集解徐廣曰:「一無『名』字.」
69 集解張晏曰:「漢據土德, 土數五, 故用五爲印文也. 若丞相曰『丞相之印章』, 諸卿及守相印文不足五字者, 以『之』足也.」
70 集解韋昭曰:「丁, 姓;夫人, 名也.」
71 集解孟康曰:「若火勝金, 則祠赤帝以白牡.」
72 索隱木耦馬. 一音偶. 孟云「寓寄龍形于木」. 又姚氏云:「寓, 仮也. 以言仮木龍馬一駟, 非寄生龍馬形於木也」.
73 集解應劭曰:「崑崙玄圃五城十二樓, 此仙人之所常居也.」
74 集解漢書音義曰:「執期, 地名也.」
75 正義顔師古云:「迎年, 若言祈年.」
76 集解應劭曰:「封鉅, 黃帝師.」
77 正義張揖云:「岐伯, 黃帝太醫.」
78 集解徐廣曰:「在琅邪朱虛縣, 汶水所出.」
79 集解徐廣曰:「凡山亦在朱虛.」
80 集解徐廣曰:「天漢三年. 李陵以天漢二年敗也.」
81 集解李奇曰:「祀名也.」索隱赤星卽上靈星祠也. 靈星, 龍左角, 其色赤, 故曰赤星. 五者, 太一也. 三一也, 冥羊也, 馬行也, 赤星也. 凡五, 並祠官寬舒領之.
82 索隱謂五者之外有正太一后土祠, 故六也.
83 集解徐廣曰:「猶今人云『其事已可知矣』, 皆不信之耳. 又數本皆無『可』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