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漢詩/其他

渭川田家 - 王維

柳川 2019. 5. 13. 15:07

                                     渭川田家       

 

 

                                                                                王維 (699-761)

 

 

 

斜光照墟落、                      지는 해 가난한 촌락 비추고

窮巷牛羊歸。                      좁은 마을길로 소와 양떼들 돌아온다.

野老念牧童、                      촌로는 목동을 걱정하여

倚杖候荊扉。                      지팡이 집고 사립문에 나와 기다린다.

雉雊麥苗秀、                      꿩 울음소리에 보리 이삭 패고

蠶眠桑葉稀。                      누에잠에 뽕나무 잎이 줄어든다.

田夫荷鋤立、                      농부는 괭이 메고 서서

相見語依依。                      서로  만나 즐겁게 이야기 한다.

卽此羨閑逸、                      이 한가한 정경이 부러워

悵然吟式微。                      무심히 시경의 “식미”편을 읊어본다.

 

 

式微 : 詩經. 國風/邶風/式微

 

式微式微, 胡不歸?                      나라가 기울여져 가는데 기울어져 가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는가?

微君之故, 胡爲乎中露?                군후때문이 아니면   어찌 이슬을 맞으며 있겠는가.

 

 

式微式微,  胡不歸?                      나라가 기울여져 가는데 기울어져 가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는가?

微君之躬,  胡爲乎泥中?                군후 자신이 아니면   어찌 진흙속에 있겠는가?

 

 

王維 (699-761)

 

字는 마힐(摩詰), 왕유는 당대(唐代 : 618~907)에 태어나서 자랐다. 당시 당의 수도 장안(長安)은 부와 안정을 동시에 누린 국제적 도시였다. 왕유는 21세 때 진사(進士)시험에 급제했다. 9세 때부터 이미 문학적 재능을 보였다고 하지만, 진사 급제는 특히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는 고위 관직에 올랐지만, 이내 강등되어 산둥 성[山東省]의 하찮은 직책에 임용되었다가, 734년에 수도로 소환되어 상서우승(尙書右丞)의 자리에 올랐다.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켜 756년에 수도 장안을 점령했을 때, 반란군에 사로잡혀 반란군의 수도인 뤄양[洛陽]으로 끌려갔다. 이곳에서 왕유는 억지 벼슬을 받았다. 758년 관군이 장안과 뤄양을 탈환했을 때, 왕유는 반란군에게 사로잡혀 있을 때 황제에 대한 충성을 표현한 시를 썼고, 또 고위 관리인 형이 힘을 써준 덕분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말년에 그는 속세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아내와 어머니의 죽음으로 더욱 슬픔에 빠진 그는 장안 종남산[終南山]의 망천(輞川) 옆에 있는 시골 집에 틀어박혀 불교 연구에 몰두했다. 왕유가 지은 시 가운데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꼽히는 것들은 대부분 시골 풍경에서 영감을 받은 것들이다.

 

 

왕유는 시, 음악, 그림에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 남종화의 시조로 알려져있다. 남종화는 문인화가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화풍으로 개인적인 감정 표현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여러 가지 주제로 그림을 그리고 다양한 표현양식을 채택하였으나, 산수화를 발달시킨 최초의 사람 중의 하나로 특히 유명하다. 그는 생존 시에 설경산수화로 유명했으며, 가장 유명한 작품은 <망천도>라는 화권이다. 이 그림은 전해지지 않으나, 후에 제작된 많은 모사품으로 대강의 구도는 보존되었다.

그는 자연의 정치와 한가로운 전원생활을 노래한 시인으로 이백(701~762), 두보(712~770) 등의 유명한 당대 시인들과 함께 서정시 형식을 완성한 시인으로 손꼽힌다. [다음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