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 卷七一. 樗里子列傳
樗里子列傳
樗里子者, 名疾, 秦恵王之弟也, 與恵王異母. 母, 韓女也. 樗里子滑稽多智, 秦人號曰「智嚢」.
秦恵王八年, 爵樗里子右更, 使將而伐曲沃, 盡出其人, 取其城, 地入秦. 秦恵王二十五年, 使樗里子為將伐趙, 虜趙將軍荘豹, 抜藺. 明年, 助魏章攻楚, 敗楚將屈丐, 取漢中地. 秦封樗里子, 號為厳君.
秦恵王卒, 太子武王立, 逐張儀、魏章, 而以樗里子、甘茂為左右丞相. 秦使甘茂攻韓, 抜宜陽. 使樗里子以車百乗入周. 周以卒迎之, 意甚敬. 楚王怒, 譲周, 以其重秦客. 遊騰為周説楚王曰:「知伯之伐仇猶, 遺之広車, 因隨之以兵, 仇猶遂亡. 何則? 無備故也. 斉桓公伐蔡, 號曰誅楚, 其実襲蔡. 今秦, 虎狼之國, 使樗里子以車百乗入周, 周以仇猶、蔡観焉, 故使長戟居前, 彊弩在後, 名曰衛疾, 而実囚之. 且夫周豈能無憂其社稷哉? 恐一旦亡國以憂大王.」楚王乃悅.
秦武王卒, 昭王立, 樗里子又益尊重.
昭王元年, 樗里子將伐蒲. 蒲守恐, 請胡衍. 胡衍為蒲謂樗里子曰:「公之攻蒲, 為秦乎? 為魏乎? 為魏則善矣, 為秦則不為頼矣. 夫衛之所以為衛者, 以蒲也. 今伐蒲入於魏, 衛必折而従之. 魏亡西河之外而無以取者, 兵弱也. 今並衛於魏, 魏必彊. 魏彊之日, 西河之外必危矣. 且秦王將観公之事, 害秦而利魏, 王必罪公.」樗里子曰:「柰何?」胡衍曰:「公釈蒲勿攻, 臣試為公入言之, 以徳衛君.」樗里子曰:「善.」胡衍入蒲, 謂其守曰:「樗里子知蒲之病矣, 其言曰必抜蒲. 衍能令釈蒲勿攻.」蒲守恐, 因再拝曰:「願以請.」因效金三百斤, 曰:「秦兵苟退, 請必言子於衛君, 使子為南面.」故胡衍受金於蒲以自貴於衛. 於是遂解蒲而去. 還撃皮氏, 皮氏未降, 又去.
昭王七年, 樗里子卒, 葬於渭南章台之東. 曰:「後百歳, 是當有天子之宮夾我墓.」樗里子疾室在於昭王廟西渭南陰郷樗里, 故俗謂之樗里子. 至漢興, 長樂宮在其東, 未央宮在其西, 武庫正直其墓. 秦人諺曰:「力則任鄙, 智則樗里.」
저리자(樗里子)는 이름이 질(疾)이고, 진(秦) 혜왕(惠王)의 동생인데 혜왕과는 어머니가 다르다. 어머니는 한(韓)나라 여자이다. 저리자는 말이 막힘이 없고 지혜가 뛰어나 진나라 사람들은 ‘꾀주머니’란 뜻으로 ‘지낭(智囊)’이라고 불렀다.
진 혜왕 8년에 저리자는 우경(右更)에 임명되고 장수가 되어 곡옥(曲沃)을 쳐서 그 사람들을 모두 내쫓고 그 성을 취하여 땅을 진나라에 편입시켰다.
진 혜왕 25년에 저리자를 장수로 삼아 조(趙)나라를 치게 하여 조나라의 장수 장표(莊豹)를 포로로 잡고 인(藺)나라를 함락시켰다.
이듬해, 위장(魏章)을 도와 초(楚)나라를 공격하여 초나라의 장수 굴개(屈丐)를 패퇴시키고 한중(漢中)의 땅을 취했다. 진나라는 저리자를 엄군(嚴君)에 봉했다.
진 혜왕이 죽고, 태자가 무왕(武王)으로 즉위하여 장의(張儀)와 위장을 내치고, 저리자와 감무(甘茂)를 좌우 승상(丞相)으로 삼았다. 진나라는 감무에게 한나라를 치게 하여 의양(宜陽)을 함락시켰다. 저리자에게는 수레 100대를 이끌고 주(周)나라에 들어가게 하니, 주나라는 병졸들을 보내 맞이했는데 매우 공경스러웠다. 초왕이 노하여 진나라를 손님처럼 중시한다며 주나라를 나무랐다.
유등(游騰)이 주나라를 위해서 초왕에게 “지백(知伯)이 구유(仇猶)를 칠 때 큰 수레를 보내면서 병사들을 뒤따르게 하여 구유가 결국 망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겠습니까? 대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 환공(桓公)이 채(蔡)나라를 토벌하려고 하면서 초나라를 벌준다고 했지만 실은 채나라를 기습했습니다. 지금 진나라는 호랑이와 이리 같은 나라로 저리자에게 수레 100대로 주나라에 들어가게 했습니다. 주나라는 구유와 채나라의 경우를 보았기 때문에 긴 창을 든 군사를 앞세우고 강한 쇠뇌를 멘 군사들을 뒤에 배치하고는 저리자를 경호한다고 했지만 실은 그를 가둔 것입니다. 그리고 저 주나라가 어찌 그 사직을 걱정하지 않겠습니까? 하루아침에 나라를 잃어 대왕을 걱정하게 만들까봐 두려워하고 있습니다.”라고 유세했고, 초왕은 바로 기뻐했다.
진 무왕이 죽고, 소왕(昭王)이 즉위하자 저리자는 더욱 존중받았다.
소왕 원년에 저리자가 포(蒲)나라를 치려고 했다. 포나라의 수장은 두려워하며 호연(胡衍)에게 도움을 청했다. 호연은 포나라를 위해 저리자에게 “공이 포나라를 공격하려는 것이 진나라를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위(魏)나라를 위한 것입니까? 위나라를 위한 것이라면 좋습니다만 진나라를 위한 것이라면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 저 위(衛)나라가 위(衛)나라인 것은 포나라 때문입니다. 지금 포나라를 쳐서 진나라에 편입되면 위(衛)나라는 분명 위(魏)나라를 따를 것입니다.
위(魏)나라가 서하(西河) 밖의 땅을 잃고 다시 취하지 못한 것은 군대가 약해서였습니다. 지금 위(衛)나라가 위(魏)나라에 병합되면 위(魏)나라가 강해질 수밖에 없고, 위(魏)나라가 강해지는 날에는 서하 밖이 위태로워질 것이 뻔합니다. 진왕이 공이 한일이 진나라에게 손해를 끼치고 위(魏)나라를 이롭게 하는 것임을 알게 되면 왕은 틀림없이 공에게 죄를 물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저리자가 “어떻게 하면 되오?”라고 하자 호연은 “공은 포나라를 놔주고 공격하지 마십시오. 신이 공을 위해 들어가서 위(衛)나라의 국군에게 공의 덕을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저리자는 “좋습니다.”라고 했다.
호연이 포나라에 들어가 수장에게 “저리자는 포나라의 약점을 잘 알고 있어 포나라를 반드시 함락시키겠다고 말합니다. 이 호연이 포나라를 놔주고 공격하지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포나라의 수장이 겁을 먹고는 두 번 세 번 절을 하며 “바라건대 그렇게 해주십시오.”라고 했다. 그러면서 금 300근을 내놓고는 “진나라의 군대가 정말 물러간다면 반드시 위(衛)나라의 국군께 당신 이야기를 해서 당신을 높은 자리에 모시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호연은 포나라에서 금을 받고 그 자신 위(衛)나라에서는 귀하신 몸이 되었다. 이에 저리자는 마침내 포나라에 대한 포위를 풀고 떠나면서 군대를 돌려 피지(皮氏)를 공격했지만 피지가 항복하지 않자 다시 철수했다.
소왕 7년에 저리자가 죽자, 위수 남쪽 장대(章臺)의 동쪽에 장사지냈다. 저리자는 “100년 뒤에 천자의 궁궐이 내 무덤을 끼고 들어설 것이다.”고 말한 바 있다. 저리자 질의 집은 소왕의 사당 서쪽, 위수 남쪽 음향(陰鄕) 저리(樗里)에 있었다. 그래서 속칭 그를 저리자라고 한 것이다. 한나라가 일어나서 장락궁(長樂宮)이 무덤 동쪽에, 미앙궁(未央宮)이 무덤 서쪽에, 무기 창고가 그 무덤 중앙에 들어섰다. 진나라 사람들의 속담에 “힘은 임비(任鄙)요, 지혜는 저리(樗里)다.”는 것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