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歷史와文學/史記列傳

史記 卷七一. 樗里子列傳

柳川 2019. 6. 2. 19:12

                                    子列傳


, , , . , . , 」.

, , 使, , , . , 使, , . , , , . , .

, , , . 使, . 使. , . , , . :「, , , .  . , , . , , 使, , 使, , , .  .」.

, , .

, . , . :「,   , . , . , . 西, . , . , 西. , , .」:「?」:「, , .」:「.」, :「, . .」, :「.」, :「退, , 使.」. . , , .

, , . :「, .」西, . , , 西, . :「, .」


저리자()는 이름이 질()이고, 진() 혜왕()의 동생인데 혜왕과는 어머니가 다르다. 어머니는 한()나라 여자이다. 저리자는 말이 막힘이 없고 지혜가 뛰어나 진나라 사람들은 ‘꾀주머니’란 뜻으로 ‘지낭()’이라고 불렀다.

진 혜왕 8년에 저리자는 우경()에 임명되고 장수가 되어 곡옥()을 쳐서 그 사람들을 모두 내쫓고 그 성을 취하여 땅을 진나라에 편입시켰다.

진 혜왕 25년에 저리자를 장수로 삼아 조()나라를 치게 하여 조나라의 장수 장표()를 포로로 잡고 인()나라를 함락시켰다.

이듬해, 위장()을 도와 초()나라를 공격하여 초나라의 장수 굴개()를 패퇴시키고 한중()의 땅을 취했다. 진나라는 저리자를 엄군()에 봉했다.

진 혜왕이 죽고, 태자가 무왕()으로 즉위하여 장의()와 위장을 내치고, 저리자와 감무()를 좌우 승상()으로 삼았다. 진나라는 감무에게 한나라를 치게 하여 의양()을 함락시켰다. 저리자에게는 수레 100대를 이끌고 주()나라에 들어가게 하니, 주나라는 병졸들을 보내 맞이했는데 매우 공경스러웠다. 초왕이 노하여 진나라를 손님처럼 중시한다며 주나라를 나무랐다.

유등()이 주나라를 위해서 초왕에게 “지백()이 구유()를 칠 때 큰 수레를 보내면서 병사들을 뒤따르게 하여 구유가 결국 망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겠습니까? 대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 환공()이 채()나라를 토벌하려고 하면서 초나라를 벌준다고 했지만 실은 채나라를 기습했습니다. 지금 진나라는 호랑이와 이리 같은 나라로 저리자에게 수레 100대로 주나라에 들어가게 했습니다. 주나라는 구유와 채나라의 경우를 보았기 때문에 긴 창을 든 군사를 앞세우고 강한 쇠뇌를 멘 군사들을 뒤에 배치하고는 저리자를 경호한다고 했지만 실은 그를 가둔 것입니다. 그리고 저 주나라가 어찌 그 사직을 걱정하지 않겠습니까? 하루아침에 나라를 잃어 대왕을 걱정하게 만들까봐 두려워하고 있습니다.”라고 유세했고, 초왕은 바로 기뻐했다.

진 무왕이 죽고, 소왕()이 즉위하자 저리자는 더욱 존중받았다.

소왕 원년에 저리자가 포()나라를 치려고 했다. 포나라의 수장은 두려워하며 호연()에게 도움을 청했다. 호연은 포나라를 위해 저리자에게 “공이 포나라를 공격하려는 것이 진나라를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위()나라를 위한 것입니까? 위나라를 위한 것이라면 좋습니다만 진나라를 위한 것이라면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 저 위()나라가 위()나라인 것은 포나라 때문입니다. 지금 포나라를 쳐서 진나라에 편입되면 위()나라는 분명 위()나라를 따를 것입니다.

위()나라가 서하(西) 밖의 땅을 잃고 다시 취하지 못한 것은 군대가 약해서였습니다. 지금 위()나라가 위()나라에 병합되면 위()나라가 강해질 수밖에 없고, 위()나라가 강해지는 날에는 서하 밖이 위태로워질 것이 뻔합니다. 진왕이 공이 한일이 진나라에게 손해를 끼치고 위()나라를 이롭게 하는 것임을 알게 되면 왕은 틀림없이 공에게 죄를 물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저리자가 “어떻게 하면 되오?”라고 하자 호연은 “공은 포나라를 놔주고 공격하지 마십시오. 신이 공을 위해 들어가서 위()나라의 국군에게 공의 덕을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저리자는 “좋습니다.”라고 했다.

호연이 포나라에 들어가 수장에게 “저리자는 포나라의 약점을 잘 알고 있어 포나라를 반드시 함락시키겠다고 말합니다. 이 호연이 포나라를 놔주고 공격하지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포나라의 수장이 겁을 먹고는 두 번 세 번 절을 하며 “바라건대 그렇게 해주십시오.”라고 했다. 그러면서 금 300근을 내놓고는 “진나라의 군대가 정말 물러간다면 반드시 위()나라의 국군께 당신 이야기를 해서 당신을 높은 자리에 모시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호연은 포나라에서 금을 받고 그 자신 위()나라에서는 귀하신 몸이 되었다. 이에 저리자는 마침내 포나라에 대한 포위를 풀고 떠나면서 군대를 돌려 피지()를 공격했지만 피지가 항복하지 않자 다시 철수했다.

소왕 7년에 저리자가 죽자, 위수 남쪽 장대()의 동쪽에 장사지냈다. 저리자는 “100년 뒤에 천자의 궁궐이 내 무덤을 끼고 들어설 것이다.”고 말한 바 있다. 저리자 질의 집은 소왕의 사당 서쪽, 위수 남쪽 음향() 저리()에 있었다. 그래서 속칭 그를 저리자라고 한 것이다. 한나라가 일어나서 장락궁()이 무덤 동쪽에, 미앙궁()이 무덤 서쪽에, 무기 창고가 그 무덤 중앙에 들어섰다. 진나라 사람들의 속담에 “힘은 임비()요, 지혜는 저리()다.”는 것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