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歷史와文學/史記列傳

史記 卷七一. 樗里子列傳 [甘羅]

柳川 2019. 6. 2. 19:24

                                              樗里子列傳 [甘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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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무에게는 감라()라는 손자가 있었다.

감라는 감무의 손자이다. 감무가 죽은 후 감라는 나이 12세로 진나라의 승상 문신후() 여불위()를 섬겼다.


진시황제()가 강성군() 채택()을 연나라에 사신으로 보낸 지 3년 뒤 연왕 희()가 태자 단()을 진나라에 인질로 보냈다. 진나라는 장당()을 연나라에 보내 재상이 되어 연나라와 연합하여 조나라를 쳐서 하간()의 땅을 넓히고자 했다. 장당이 문신후에게 “신이 일찍이 진 소왕()을 위해 조나라를 토벌하자, 조나라는 신을 원망하며 ‘장당을 잡는 사람에게 100리 땅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지금 연나라로 가려면 조나라를 거칠 수밖에 없으니, 신은 갈 수가 없습니다.”라고 했다.

문신후는 불쾌했지만 강요할 수 없었다. 감라가 “군후()께서는 왜 그렇게 불쾌해하십니까?”라고 물었다. 문신후는 “내가 강성군 채택으로 하여금 연나라를 3년 동안 섬기게 했고, 연 태자 단도 인질로 왔기에 내가 직접 장경에게 연나라의 재상이 될 것을 청했거늘 가려하지 않는구나.”라고 했다. 감라가 “신이 그를 가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문신후가 “관두라! 내가 직접 나서 요청했는데도 듣지 않았는데 네가 무슨 수로 가게 한단 말인가?”라고 고함을 질렀다. 감라는 “항탁()은 일곱 살 때 공자()의 스승이 되었고, 지금 신은 벌써 열두 살입니다. 군께서 신을 시험해보시면 될 일이지 어째서 큰소리로 나무라십니까?”라고 했다.

이에 감라는 장경을 만나 “경의 공은 무안군()에 비해 어떻습니까?”라고 했다. 장경은 “무안군은 남쪽으로 강력한 초나라를 꺾었고, 북쪽으로 연나라, 조나라를 눌렀지. 싸우면 이기고 공격하면 취했는데,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성과 읍을 깨고 함락시켰으니 신의 공은 그만 못하지.”라고 했다.

감라는 “그럼 응후()가 진나라에서 대접받는 것과 문신후를 비교하면 누가 더 대단합니까?”라고 했다. 장경은 “응후가 문신후만 못하지.”라고 했다. 감라는 “경은 그가 문신후만 못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요?”라고 하자 “알고 있지.”라고 했다. 감라는 “응후가 조나라를 공격하려고 하자, 무안군은 이를 어렵다고 보고 가지 않았다가 함양()에서 7리 떨어진 두우()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지금 문신후가 직접 경에게 연나라의 재상이 되길 요청했는데도 가려 하지 않으시니 신은 경께서 어디에서 죽음을 맞이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했다. 장당이 “젊은이 말에 따라 가도록 하지.”라 하고는 행장을 꾸리게 했다.

떠날 날이 다가오자 감라가 문신후에게 “신에게 수레 다섯 대만 빌려주시면 장당을 위해 먼저 조나라에 가서 알릴까 합니다.”라고 했다.

문신후가 바로 들어가 시황제에게 “감무의 손자 감라는 나이는 어리지만 명문가의 자손으로 제후들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 장당이 병을 핑계로 연나라에 가지 않으려 하자, 감라가 설득하여 가게 되었습니다. 지금 먼저 조나라에 보고하려고 하니 그를 보내도록 허락해주십시오.”라고 했다.

시황제가 감라를 불러 만나보고는 그를 조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조 양왕()은 교외에 나와 감라를 맞이했다. 감라는 조왕에게 “왕께서는 연 태자 단이 진나라에 인질로 와 있다는 걸 들으셨지요?”라고 물었다.

“들었소.”

“장당이 연나라의 재상이 된다는 말도 들으셨는지요?”

“들었소.”

“연 태자 단이 진나라에 인질로 간 것은 연나라가 진나라를 속이지 않은 것이고, 장당이 연나라의 재상이 된다는 것은 진나라가 연나라를 속이지 않은 것입니다. 연나라와 진나라가 서로 속이지 않으면서 조나라를 치면 조나라는 위험해집니다. 연나라와 진나라가 서로 속이지 않는 것은 다른 까닭이 있어서가 아니라 조나라를 공격하여 하간 땅을 넓히려는 것입니다. 왕께서는 다섯 개의 성을 신에게 주어서 하간 땅을 넓혀주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럼 신은 (진나라로 하여금) 연 태자를 돌려보내고 강한 조나라와 함께 약한 연나라를 치게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조왕은 바로 직접 다섯 개의 성을 떼어 하간 땅을 넓히게 했다. 진나라는 연 태자를 돌려보냈다. 조나라는 연나라를 공격하여 상곡()의 30개 성을 빼앗아 진나라에게 11개를 주었다.

감라가 진나라에 돌아와 보고하자, 감라를 상격으로 삼고 당초 감무의 땅과 집을 다시 그에게 내렸다.


<사마천의 논평>
태사공은 말한다.

“저리자는 (진왕의) 친척으로 중용되었는데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진나라 사람들은 그의 지혜를 칭찬했기 때문에 (그 행적을) 많이 채택한 것이다. 감무는 하채의 평민 출신으로 제후 사이에 이름을 떨치고 강력한 제나라와 초나라에서 중용되었다. 감라는 어렸지만 기이한 계책을 내어 후세에 명성을 떨쳤다. 독실한 행동의 군자는 아니었지만 전국의 책사들이었다. 당시는 진나라가 강할 때였으므로 천하는 더욱 더 음모와 술수를 뒤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