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 卷七六. 平原君虞卿列傳
平原君虞卿列傳
平原君趙勝者,趙之諸公子也。諸子中勝最賢,喜賓客,賓客蓋至者數千人。平原君相趙惠文王及孝成王,三去相,
三復位,封於東武城。
平原君家樓臨民家。民家有躄者,槃散行汲。平原君美人居樓上,臨見,大笑之。明日,躄者至
平原君門,請曰:“臣聞君之喜士,士不遠千里而至者,以君能貴士而賤妾也。臣不幸有罷癃之病,而君之后宮臨
而笑臣,臣願得笑臣者頭。”平原君笑應曰:“諾。”躄者去,平原君笑曰:“觀此豎子,乃欲以一笑之故殺吾美人,
不亦甚乎!”終不殺。居歲餘,賓客門下舍人稍稍引去者過半。平原君怪之,曰:“勝所以待諸君者未嘗敢失禮,而
去者何多也?”門下一人前對曰:“以君之不殺笑躄者,以君為愛色而賤士,士即去耳。”於是平原君乃斬笑躄者美
人頭,自造門進躄者,因謝焉。其后門下乃復稍稍來。是時齊有孟嘗,魏有信陵,楚有春申,故爭相傾以待士。
秦之圍邯鄲,趙使平原君求救,合從於楚,約與食客門下有勇力文武備具者二十人偕。平原君曰:“使文能取勝,則善矣。文不能取勝,則歃血於華屋之下,必得定從而還。士不外索,取於食客門下足矣。”得十九人,餘無可取者,無以滿二十人。門下有毛遂者,前,自贊於平原君曰:“遂聞君將合從於楚,約與食客門下二十人偕,不外索。今少一人,願君即以遂備員而行矣。”平原君曰:“先生處勝之門下幾年於此矣?”毛遂曰:“三年於此矣。”平原君曰:“夫賢士之處世也,譬若錐之處囊中,其末立見。今先生處勝之門下三年於此矣,左右未有所稱誦,勝未有所聞,是先生無所有也。先生不能,先生留。”毛遂曰:“臣乃今日請處囊中耳。使遂蚤得處囊中,乃穎脫而出,非特其末見而已。”平原君竟與毛遂偕。十九人相與目笑之而未廢也。
毛遂比至楚,與十九人論議,十九人皆服。平原君與楚合從,言其利害,日出而言之,日中不決。十九人謂毛遂曰:“先生上。”毛遂按劍歷階而上,謂平原君曰:“從之利害,兩言而決耳。今日出而言從,日中不決,何也?”楚王謂平原君曰:“客何為者也?”平原君曰:“是勝之舍人也。”楚王叱曰:“胡不下!吾乃與而君言,汝何為者也!”毛遂按劍而前曰:“王之所以叱遂者,以楚國之眾也。今十步之內,王不得恃楚國之眾也,王之命縣於遂手。吾君在前,叱者何也?且遂聞湯以七十里之地王天下,文王以百里之壤而臣諸侯,豈其士卒眾多哉,誠能據其勢而奮其威。今楚地方五千里,持戟百萬,此霸王之資也。以楚之彊,天下弗能當。白起,小豎子耳,率數萬之眾,興師以與楚戰,一戰而舉鄢郢,再戰而燒夷陵,三戰而辱王之先人。此百世之怨而趙之所羞,而王弗知惡焉。合從者為楚,非為趙也。吾君在前,叱者何也?”楚王曰:“唯唯,誠若先生之言,謹奉社稷而以從。”毛遂曰:“從定乎?”楚王曰:“定矣。”毛遂謂楚王之左右曰:“取雞狗馬之血來。”毛遂奉銅槃而跪進之楚王曰:“王當歃血而定從,次者吾君,次者遂。”遂定從於殿上。毛遂左手持槃血而右手招十九人曰:“公相與歃此血於堂下。公等錄錄,所謂因人成事者也。”
平原君已定從而歸,歸至於趙,曰:“勝不敢復相士。勝相士多者千人,寡者百數,自以為不失天下之士,今乃於毛先生而失之也。毛先生一至楚,而使趙重於九鼎大呂。毛先生以三寸之舌,彊於百萬之師。勝不敢復相士。”遂以為上客。
平原君既返趙,楚使春申君將兵赴救趙,魏信陵君亦矯奪晉鄙軍往救趙,皆未至。秦急圍邯鄲,邯鄲急,且降,平原君甚患之。邯鄲傳舍吏子李同說平原君曰:“君不憂趙亡邪?”平原君曰:“趙亡則勝為虜,何為不憂乎?”李同曰:“邯鄲之民,炊骨易子而食,可謂急矣,而君之后宮以百數,婢妾被綺縠,餘粱肉,而民褐衣不完,糟糠不厭。民困兵盡,或剡木為矛矢,而君器物鐘磬自若。使秦破趙,君安得有此?使趙得全,君何患無有?今君誠能令夫人以下編於士卒之閒,分功而作,家之所有盡散以饗士,士方其危苦之時,易德耳。”於是平原君從之,得敢死之士三千人。李同遂與三千人赴秦軍,秦軍為之卻三十里。亦會楚、魏救至,秦兵遂罷,邯鄲復存。李同戰死,封其父為李侯。
虞卿欲以信陵君之存邯鄲為平原君請封。公孫龍聞之,夜駕見平原君曰:“龍聞虞卿欲以信陵君之存邯鄲為君請封,有之乎?”平原君曰:“然。”龍曰:“此甚不可。且王舉君而相趙者,非以君之智能為趙國無有也。割東武城而封君者,非以君為有功也,而以國人無勳,乃以君為親戚故也。君受相印不辭無能,割地不言無功者,亦自以為親戚故也。今信陵君存邯鄲而請封,是親戚受城而國人計功也。此甚不可。且虞卿操其兩權,事成,操右券以責;事不成,以虛名德君。君必勿聽也。”平原君遂不聽虞卿。
平原君以趙孝成王十五年卒。子孫代,后竟與趙俱亡。
平原君厚待公孫龍。公孫龍善為堅白之辯,及鄒衍過趙言至道,乃絀公孫龍。
虞卿者,游說之士也。躡蹻檐簦說趙孝成王。一見,賜黃金百鎰,白璧一雙;再見,為趙上卿,故號為虞卿。
秦趙戰於長平,趙不勝,亡一都尉。趙王召樓昌與虞卿曰:“軍戰不勝,尉復死,寡人使束甲而趨之,何如?”樓昌曰:“無益也,不如發重使為媾。”虞卿曰:“昌言媾者,以為不媾軍必破也。而制媾者在秦。且王之論秦也,欲破趙之軍乎,不邪?”王曰:“秦不遺餘力矣,必且欲破趙軍。”虞卿曰:“王聽臣,發使出重寶以附楚、魏,楚、魏欲得王之重寶,必內吾使。趙使入楚、魏,秦必疑天下之合從,且必恐。如此,則媾乃可為也。”趙王不聽,與平陽君為媾,發鄭朱入秦。秦內之。趙王召虞卿曰:“寡人使平陽君為媾於秦,秦已內鄭朱矣,卿之為奚如?”虞卿對曰:“王不得媾,軍必破矣。天下賀戰者皆在秦矣。鄭朱,貴人也,入秦,秦王與應侯必顯重以示天下。楚、魏以趙為媾,必不救王。秦知天下不救王,則媾不可得成也。”應侯果顯鄭朱以示天下賀戰勝者,終不肯媾。長平大敗,遂圍邯鄲,為天下笑。
秦既解邯鄲圍,而趙王入朝,使趙郝約事於秦,割六縣而媾。虞卿謂趙王曰:“秦之攻王也,倦而歸乎?王以其力尚能進,愛王而弗攻乎?”王曰:“秦之攻我也,不遺餘力矣,必以倦而歸也。”虞卿曰:“秦以其力攻其所不能取,倦而歸,王又以其力之所不能取以送之,是助秦自攻也。來年秦復攻王,王無救矣。”王以虞卿之言趙郝。趙郝曰:“虞卿誠能盡秦力之所至乎?誠知秦力之所不能進,此彈丸之地弗予,令秦來年復攻王,王得無割其內而媾乎?”王曰:“請聽子割,子能必使來年秦之不復攻我乎?”趙郝對曰:“此非臣之所敢任也。他日三晉之交於秦,相善也。今秦善韓、魏而攻王,王之所以事秦必不如韓、魏也。今臣為足下解負親之攻,開關通幣,齊交韓、魏,至來年而王獨取饱於秦,此王之所以事秦必在韓、魏之后也。此非臣之所敢任也。”
王以告虞卿。虞卿對曰:“郝言‘不媾,來年秦復攻王,王得無割其內而媾乎’。今媾,郝又以不能必秦之不復攻也。今雖割六城,何益!來年復攻,又割其力之所不能取而媾,此自盡之術也,不如無媾。秦雖善攻,不能取六縣;趙雖不能守,終不失六城。秦倦而歸,兵必罷。我以六城收天下以攻罷秦,是我失之於天下而取償於秦也。吾國尚利,孰與坐而割地,自弱以彊秦哉?今郝曰‘秦善韓、魏而攻趙者,必(以為韓魏不救趙也而王之軍必孤有以)王之事秦不如韓、魏也’,是使王歲以六城事秦也,即坐而城盡。來年秦復求割地,王將與之乎?弗與,是棄前功而挑秦禍也;與之,則無地而給之。語曰‘彊者善攻,弱者不能守’。今坐而聽秦,秦兵不獘而多得地,是彊秦而弱趙也。以益彊之秦而割愈弱之趙,其計故不止矣。且王之地有盡而秦之求無已,以有盡之地而給無已之求,其勢必無趙矣。”
趙王計未定,樓緩從秦來,趙王與樓緩計之,曰:“予秦地(何)如毋予,孰吉?”緩辭讓曰:“此非臣之所能知也。”王曰:“雖然,試言公之私。”樓緩對曰:“王亦聞夫公甫文伯母乎?公甫文伯仕於魯,病死,女子為自殺於房中者二人。其母聞之,弗哭也。其相室曰:‘焉有子死而弗哭者乎?’其母曰:‘孔子,賢人也,逐於魯,而是人不隨也。今死而婦人為之自殺者二人,若是者必其於長者薄而於婦人厚也。’故從母言之,是為賢母;從妻言之,是必不免為妒妻。故其言一也,言者異則人心變矣。今臣新從秦來而言勿予,則非計也;言予之,恐王以臣為為秦也:故不敢對。使臣得為大王計,不如予之。”王曰:“諾。”
虞卿聞之,入見王曰:“此飾說也,王慎勿予!”樓緩聞之,往見王。王又以虞卿之言告樓緩。樓緩對曰:“不然。虞卿得其一,不得其二。夫秦趙構難而天下皆說,何也?曰‘吾且因彊而乘弱矣’。今趙兵困於秦,天下之賀戰勝者則必盡在於秦矣。故不如亟割地為和,以疑天下而慰秦之心。不然,天下將因秦之(彊)怒,乘趙之獘,瓜分之。趙且亡,何秦之圖乎?故曰虞卿得其一,不得其二。願王以此決之,勿復計也。”
虞卿聞之,往見王曰:“危哉樓子之所以為秦者,是愈疑天下,而何慰秦之心哉?獨不言其示天下弱乎?且臣言勿予者,非固勿予而已也。秦索六城於王,而王以六城賂齊。齊,秦之深讎也,得王之六城,并力西擊秦,齊之聽王,不待辭之畢也。則是王失之於齊而取償於秦也。而齊、趙之深讎可以報矣,而示天下有能為也。王以此發聲,兵未窺於境,臣見秦之重賂至趙而反媾於王也。從秦為媾,韓、魏聞之,必盡重王;重王,必出重寶以先於王。則是王一舉而結三國之親,而與秦易道也。”趙王曰:“善。”則使虞卿東見齊王,與之謀秦。虞卿未返,秦使者已在趙矣。樓緩聞之,亡去。趙於是封虞卿以一城。
居頃之,而魏請為從。趙孝成王召虞卿謀。過平原君,平原君曰:“願卿之論從也。”虞卿入見王。王曰:“魏請為從。”對曰:“魏過。”王曰:“寡人固未之許。”對曰:“王過。”王曰:“魏請從,卿曰魏過,寡人未之許,又曰寡人過,然則從終不可乎?”對曰:“臣聞小國之與大國從事也,有利則大國受其福,有敗則小國受其禍。今魏以小國請其禍,而王以大國辭其福,臣故曰王過,魏亦過。竊以為從便。”王曰:“善。”乃合魏為從。
虞卿既以魏齊之故,不重萬戶侯卿相之印,與魏齊閒行,卒去趙,困於梁。魏齊已死,不得意,乃著書,上採春秋,下觀近世,曰節義、稱號、揣摩、政謀,凡八篇。以刺譏國家得失,世傳之曰虞氏春秋。
太史公曰:平原君,翩翩濁世之佳公子也,然未睹大體。鄙語曰“利令智昏”,平原君貪馮亭邪說,使趙陷長平兵四十餘萬眾,邯鄲幾亡。虞卿料事揣情,為趙畫策,何其工也!及不忍魏齊,卒困於大梁,庸夫且知其不可,況賢人乎?然虞卿非窮愁,亦不能著書以自見於後世云。
평원군(平原君) 조승(趙勝)은 조(趙)의 공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여러 아들들 중에서 조승이 가장 뛰어나고 빈객을 좋아하니 빈객으로 그에게 온 자들이 수천에 이르렀다. 평원군은 조 혜문왕(惠文王)과 효성왕(孝成王) 때 재상을 지냈는데, 세 번 재상 자리를 떠났다가 세 번 복위되었고 동무성(東武城)이 봉지였다.
평원군의 집 누각은 민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민가에 절름발이가 있었는데 절룩거리면서 물을 길었다. 평원군의 미인이 누각 위에 있다가 내려다보며 크게 웃었다. 다음날 절름발이가 평원군의 집 문 앞에 와서 뵙기를 청해 “신은 군께서 선비를 좋아하셔서 선비들이 천 리를 멀다 않고 몰려오는 것은 군께서 선비는 귀하게 첩은 천하게 여기기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선이 운이 없어 허리가 굽은 병이 있는데 군의 후궁이 신을 내려다보며 비웃었습니다. 신은 신을 비웃은 자의 머리를 원합니다.”라고 했다. 평원군이 웃으며 “알았다.”라고 응답했다. 절름발이가 돌아가자 평원군은 웃으며 “저 자를 보니 한 번 비웃음을 당했다고 내 미인을 죽이라고 하니 너무 심하지 않은가?”라 하고는 끝내 죽이지 않았다.
1년 남짓 지나자 빈객과 문하 사인(舍人)들이 조금씩 떠나더니 떠난 자가 절반이 넘었다. 평원군이 이를 이상하게 여겨 “이 조승이 여러분들을 대하면서 감히 실례한 적이 없는데 떠나는 사람이 어째서 이렇게 많소?”라고 했다.
문하의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와 “군께서 절름발이를 비웃은 자를 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선비들은 군께서는 여색을 밝히는 반면 선비를 천시한다고 여겨서 선비들이 떠나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평원군은 바로 절름발이를 비웃은 미인의 머리를 베어 직접 절름발이의 집 문 앞까지 가서 사과했다. 그 뒤 문하에 곧 다시 선비들이 점차 다시 왔다.
이 무렵 제(齊)에는 맹상군(孟嘗君), 위(魏)에는 신릉군(信陵君), 초(楚)에는 춘신군(春申君)이 있어서 서로 경쟁적으로 인재들을 모셨다.
진(秦)이 한단(邯鄲)을 포위하자 조는 평원군에게 초에 가서 구원을 청하고 초와 합종하게 하여 문하의 식객들 중 용기와 문무를 겸비한 20명을 동행시키고자 했다. 평원군은 “문(평화로운 방법)으로 승리를 취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문으로 승리를 취하지 못하면 조정 아래에서 피를 마시고라도 반드시 합종을 결정하고 돌아오겠습니다. 선비들은 밖에서 구할 것 없이 문하 식객들로 뽑아도 충분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19명은 뽑았으나 나머지를 뽑지 못해 20명을 채우지 못했다.
문하에 있던 모수(毛遂)라는 자가 나와 평원에게 스스로를 추천하며 “듣자하니 군께서 초와 합종하려고 식객 문하 20명을 수행시키기로 하고 밖에서 사람을 구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지금 한 사람이 부족하니 군께 바라옵건대 저를 수행원으로 채워서 가십시오.”라고 했다. 평원군이 “선생께서 이 조승의 문하에 이곳에 몇 년이나 계셨습니까”라고 했다. 모수는 “이곳에 3년 있었습니다.”라고 했다.
평원군은 “무릇 뛰어난 인재의 처세는 비유컨대 자루 속의 송곳과 같아서 그 끝이 삐져나오기 마련입니다. 지금 선생께서는 이 조승의 문하에 3년이나 계셨지만 좌우에서 칭찬하는 말이 없고 조승 역시 들은 바가 없으니 이는 선생이 능력이 없다는 것 아닙니까. 선생은 가실 수 없으니 선생께서는 여기 계십시오.”라고 했다.
모수는 “신은 오늘 자루 안에 들어가길 청합니다. 이 모수를 자루 안에 넣어주시면 바로 뚫고 나올 것이니 어디 송곳 끝 뿐이겠습니까.”라고 했다. 평원군은 결국 모수를 데리고 갔다. 19명은 서로 눈으로 모수를 비웃었는데 소리를 내지 않았다.
모수가 초에 도착할 때까지 19명과 논의했는데 19명 모두가 모수에게 탄복했다. 평원군이 초와 합종을 위해 그 이해관계를 논의하는데 해가 뜰 때 논의가 시작되어 한낮이 될 때까지 타결되지 못하고 있었다. 19명이 모수에게 “선생이 올라가시오.”라고 했다.
모수가 칼 손잡이를 꽉 쥔 채 빠른 걸음으로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 평원군에게 “합종에 따른 이해관계는 두 마디면 결정할 수 있거늘 지금 해가 뜨면서 합종을 논의하여 해가 중천에 오도록 결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왜 그렇습니까”라고 했다. 초왕이 평원군에게 “저 객은 뭣 하는 자요”라고 했다. 평원군은 “이 조승의 사인입니다”라고 했다. 초왕은 “꺼지지 못할까! 내가 지금 너의 주군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네가 뭣 하자는 것이냐”라고 꾸짖었다. 모수는 검의 손잡이를 꽉 누르면서 앞으로 나아가 이렇게 말했다.
“왕께서 꾸짖는 것은 초나라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지금 10보 안이라면 왕께서는 초나라 사람의 숫자에 기댈 수 없습니다. 왕의 목숨은 이 모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저의 주군께서 앞에 계신데 어찌 꾸짖는단 말입니까?
또 이 모수가 들으니 탕왕(湯王)은 사방 70리 땅으로 천하의 왕이 되었고, 문왕(文王)은 사방 100리의 땅으로 제후들을 신하로 삼았는데 그것이 군사의 수가 많았기 때문이겠습니까? 그 대세를 잘 파악해서 그 위세를 발휘했기 때문이지요. 지금 초의 땅은 사방 5천 리에 무기를 지닌 병사가 100만이니 이는 패왕의 밑천입니다. 초의 강력함은 천하도 당해낼 수 없습니다.
백기(白起)는 보잘 것 없는 사람으로 수만 명을 거느리고 군대를 일으켜 초와 싸웠는데, 한 번 싸워 언영(鄢郢)을 빼앗고, 두 번 싸워 이릉(夷陵)을 불사르고, 세 번 싸워서 왕의 선조를 욕보였습니다. 이는 백세의 원한이자 조의 수치이기도 한데 왕께서는 그 원한을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합종은 초를 위한 것이지 조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저의 주군께서 앞에 계시는데 어찌 꾸짖는다 말입니까?”
초왕이 “맞소, 맞소! 정말 선생의 말이 그렇소. 삼가 사직으로 합종을 받들겠소이다.”라고 했다. 모수가 “합종이 결정된 것입니까?”라 하자 초왕은 “결정했소.”라고 했다.
이에 모수는 초왕의 좌우에게 “닭과 개와 말의 피를 가지고 오시오”라고 했다. 모수는 동쟁반을 받쳐 들고 무릎을 꿇은 채 초왕에게 그것을 올리며 “왕께서는 피를 발라 합종을 결정하십시오. 다음은 저의 주군이고 그 다음은 이 모수입니다.”라고 했다. 마침내 합종이 어전 위에서 결정되었다. 모수는 왼손으로 쟁반의 피를 들고 오른손으로 19명을 불러서 “공들은 당 아래에서 서로 이 피를 바르시오. 공들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남의 힘을 빌려 일을 성사시키는 자들이라 하는 것이오.”라고 했다.
평원군이 합종을 결정하고 돌아갔는데, 조로 돌아와서 이렇게 말했다.
“이 조승이 감히 다시는 인재를 고르지 않겠소이다. 이 조승이 인재를 고르면서 많으면 천 명, 적어도 수백으로 스스로 천하의 인재를 한 사람도 잃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모수 선생에게 실수를 했소이다. 모수 선생이 한 번 초에 가서 조나라를 구정(九鼎)과 대려(大呂)보다도 무겁게 만들었소. 모수 선생의 세 치의 혀가 100만 군사보다 강했소이다. 이 조승이 감히 다시는 인재를 고르지 않을 것이오.”
이에 모수를 상객으로 삼았다.
평원군이 조로 돌아온 뒤 초는 춘신군에게 군을 거느리고 조를 구원하게 했고, 위의 신릉군도 가짜 부절로 진비(晉鄙)의 군대를 빼앗아 조를 구하러 나섰다. 이들이 이르기 전에 진은 급히 한단을 포위했고, 한단이 위급해져 항복할 판이었다. 평원군은 몹시 걱정스러웠다.
한단의 전사(傳舍)를 관리하는 자의 아들 이동(李同)이 평원군에게 “군께서는 조가 망하는 것이 걱정되지 않습니까”라고 했다. 평원군은 “조가 망하면 이 조승도 포로가 될 터인데 어찌 걱정되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이동은 이렇게 말했다.
“한단의 백성들은 사람 뼈를 땔감으로 삼고 자식을 서로 바꾸어 먹고 있으니 정말 위급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군의 후궁은 100명이 넘고 비첩들은 비단옷에 쌀랍과 고기반찬을 남깁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거친 베옷도 갖추어 입지 못하고 술지게미와 쌀겨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백성은 곤궁하고 무기는 다 떨어져 나무를 깎아 창과 화살을 만듭니다. 그러나 군의 기물과 악기는 여전합니다.
진이 조를 격파하면 군께서는 어디서 이런 것들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조가 안전해지면 군께서는 이런 것들이 없다고 걱정할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이제 군께서는 정말이지 부인 이하 모두를 병사들 사이에 편입시켜서 일을 나누어 하게 하고, 집안의 모든 것을 다 나누어 군대에 베푸십시오. 사람들은 위기와 고난에 처해 있을 때 더 쉽게 감사하게 됩니다.”
이에 평원군은 그 말을 따르니 결사대 3천 명을 얻었다. 이동이 드디어 3천 명과 함께 진의 군대로 달려가니 진의 군대는 그 때문에 30리를 퇴각했다. 마침 초와 위의 구원병이 이르니 진의 군대는 마침내 물러가고 한단이 보전되었다. 이동이 전사해서 그 아버지를 이후(李侯)에 봉했다.
우경(虞卿)이 신릉군이 한단을 구원한 일을 가지고 평원군에게 상을 요청하려고 했다. 공손룡(公孫龍)이 이를 듣고는 밤에 수레를 몰아 평원군을 만나 “이 공손룡이 듣자하니 신릉군이 한단을 보존케 한 공로를 가지고 군에게 상을 요청한다던데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라고 했다. 평원군이 “그렇소.”라고 했다. 공손룡이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그리고 왕께서 군을 조의 재상으로 천거한 것은 군의 지혜가 조나라에서 둘도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동무성을 떼어 군께 봉해준 것도 군에게만 공이 있고 나라 사람들은 공이 없어서가 아니라 공이 왕이 친척이기 때문입니다. 군께서 재상의 도장을 받으면서 무능하다고 사양하지 않고 땅을 떼어 받으면서 공이 없다고 말하지 않은 것 역시 군 스스로 친척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신릉군이 한단을 보존한 일로 상을 청하는 것은 친척으로 성을 받고 나라 사람으로 공을 따지는 것입니다. 이는 정말 안 될 말입니다. 지금 이 우경이 신릉군의 생각을 한번 파악해보겠습니다. 그는 일이 성사되면 그것으로 보상을 요구할 것이고, 일이 성사되지 않더라도 말로라도 군에게 호의를 베푼 것이 됩니다. 군께서는 결코 그의 건의를 듣지 마십시오.”
이에 평원군은 우경의 건의를 듣지 않았다.
평원군은 조 효성왕(孝成王) 15년에 죽었다. 자손이 뒤를 이었으나 훗날 결국은 조와 함께 망했다.
평원군은 공손룡을 후대했다. 공손룡은 ‘견백(堅白)’의 논리에 뛰어났는데 추연(鄒衍)이 조를 지나가다가 큰 도에 대해 말하자 공손룡을 멀리했다.
우경(虞卿)은 유세가이다. 그는 짚신을 신고 우산을 쓰고 와서 조 효성왕에게 유세했는데 한 번 보고 황금 100일(鎰)과 흰옥을 한 쌍 내렸고, 두 번째 보고는 조의 상경으로 삼았다. 때문에 우경(虞卿)이라고 불렀다.
진과 조가 장평(長平)에서 싸웠으나 조는 이기지 못했고 도위(都尉) 한 명을 잃었다. 조왕이 누창(樓昌)과 우경을 불러서 “군대는 싸워 이기지 못했고 도위도 죽었다. 과인이 군사들을 다시 모아서 진을 습격하려고 하는데 어떻소?”라고 했다. 누창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비중 있는 사신을 보내 화의하느니만 못합니다.”라고 했다. 우경은 “누창이 화의를 말하는 것은 화의하지 않으면 군이 패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화의를 통제하는 것은 진입니다. 또 왕께서 진을 판단하시기에 조의 군대를 격파하려 한다고 보십니까, 그렇지 않다고 보십니까?”라고 했다. 왕은 “진은 힘을 남기지 않고 반드시 조의 군대를 격파하려 할 것이오.”라고 했다. 이에 우경은 이렇게 말했다.
“왕께서 신의 말씀대로 사신에게 소중한 보물을 갖고 가서 초, 위와 좋은 관계를 맺게 하십시오. 초와 위가 왕의 소중한 보물을 얻으려면 틀림없이 우리 사신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조의 사신이 초와 위에 들어가면 진은 분명 천하가 합종한다고 생각하여 틀림없이 두려워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화의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조왕이 듣지 않고 평양군(平陽君)과 화의하기로 한 다음 바로 정주(鄭朱)를 진으로 보냈다. 진은 그를 맞아들였다. 조왕이 우경을 불러 “과인이 평양군에게 진과 화의하게 했더니 진이 이미 정주를 맞아들였소. 경이 보기에 어떻소?”라고 했다. 우경은 이렇게 대답했다.
“왕께서는 화의할 수 없으며 군대는 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천하에 전쟁 승리를 축하하는 자들은 모두 진에 있습니다. 정주는 귀한 사람으로 진에 들어갔으니 진왕과 응후는 틀림없이 그를 두드러지게 중시하여 천하에 보여 줄 것입니다. 그러면 초와 위는 조가 진과 화의했다고 여겨 분명 왕을 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진이 천하가 왕을 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 화의는 성사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응후는 정주를 천하에 드러내어 전쟁에서의 승리를 축하하는 자들에게 보이며 끝내 화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는) 장평에서 대패했고 한단이 포위당하니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진이 한단의 포위를 풀자 조왕을 (진에) 입조하려고 조학(趙郝)에게 진을 섬기겠노라 약속하게 하는 한편 여섯 개 현을 떼어 화의하려고 했다.
우경은 조왕에게 “진이 왕을 공격하다 지쳐서 돌아갔겠습니까? 왕께서는 저들이 힘은 남아 있는데 왕을 사랑해서 공격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했다.
왕은 “진이 우리를 공격하면서 힘을 남기지 않았을 것이 지쳐서 돌아간 것이 분명하겠지.”라고 했다.
우경은 “진이 있는 힘을 다해 공격하여 취하지 못하고 지쳐서 돌아갔는데 왕께서는 또 그 힘으로 취하지 못한 곳을 진에 주려고 하시니 이는 진이 우리를 공격하라고 돕는 것입니다. 내년에 진이 다시 왕을 공격해오면 왕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왕은 우경의 말을 조학에게 알렸다. 조학은 “우경이 정말 진의 힘이 다했다는 것을 알겠습니까? 정말 진의 힘이 다해서 공격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라면 탄환(彈丸)만한 땅도 줄 수가 없습니다. 만약 진이 내년에 다시 왕을 공격해온다면 대왕께서는 나라 안의 땅을 떼어 화의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왕이 “그대의 말대로 땅을 떼어준다면 그대는 내년에 진이 다시 우리를 공격하지 않게 할 수 있소?”라고 했다.
조학이 이렇게 대답했다. “그것은 신이 감히 맡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과거 삼진은 진과의 외교에서 서로 사이가 좋았습니다. 지금 진이 위, 한과 잘 지내면서 왕을 공격하는 것은 왕이 진을 섬기는 정도가 한, 위만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신은 왕을 위해서 진을 배반해서 초래한 공격을 풀고 변방의 관문을 열어 서로 통하게 하여 한, 위와 같은 관계로 만들 수 있을 뿐입니다. 내년에 왕이 혼자 진의 공격을 받는다면 그것을 왕이 진을 섬기는 정도가 분명 한, 위만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은 신이 감히 맡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왕이 우경에게 이를 알리자 우경은 이렇게 대답했다.
“조학은 ‘강화하지 않아 만약 진이 내년에 다시 왕을 공격해온다면 대왕께서는 나라 안의 땅을 떼어 화의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지금 강화한다 해도 조학은 또 반드시 진이 다시 공격하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지금 여섯 개 성을 떼어준다고 해서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내년에 다시 공격해온다면 그들의 힘으로 취할 수 없는 땅을 떼어주고 강화해야 할 것이니 이는 스스로 망하는 방법입니다. 강화하지 않느니만 못합니다.
진이 공격을 잘한다 해도 여섯 개 현을 취할 수 없으며, 조가 수비를 잘 못한다 해도 여섯 개 성을 다 잃지는 않을 것입니다. 진은 지쳐서 돌아가고 병사들은 분명 피폐해졌을 것입니다. 우리가 여섯 개의 성으로 천하를 매수하여 진을 공격하게 한다면 이는 우리의 여섯 개 성을 천하에 주고 진에서 보상을 취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나라에 유리한 지도 확실하지 않을뿐더러 누가 아무 일 없이 땅을 떼어줌으로써 자신을 약하게 만들어 진을 강하게 만든단 말입니까?
지금 조학은 ‘지금 진이 위, 한과 잘 지내면서 왕을 공격하는 것은 왕이 진을 섬기는 정도가 한, 위만 못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대왕으로 하여금 매년 여섯 개 성으로 진을 섬기게 만드는 것으로, 앉아서 성을 다 잃게 됩니다. 내년에 진이 다시 땅을 떼어달라고 하면 왕께서는 주시겠습니까? 주지 않으면 이전의 공을 포기하고 진을 상대로 화를 도발하는 꼴입니다. 주기 시작하면 줄 땅이 없어질 것입니다. 속담에 ‘강자는 공격을 잘 하고, 약자는 수비를 잘 못한다’고 했습니다. 지금 앉아서 진의 말을 듣는다면 진의 군대는 힘을 쓰지 않고도 땅을 많이 얻게 되니 이는 진을 강하게 조를 약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갈수록 더 강해지는 진이 갈수록 약해지는 조의 땅을 떼어가는 것으로 그 계책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왕의 땅은 다 바닥나는데 진의 요구는 끝이 없을 것이고, 이는 유한한 땅으로 무한한 요구를 들어주는 꼴입니다. 이렇게 되면 조는 없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조왕이 생각을 정하지 못하고 있는데 누완(樓緩)이 진에서 돌아왔다. 조왕은 누완과 “진에 땅을 주는 것과 주지 않는 것, 어느 것이 좋겠소?”라고 상의했다. 누완이 “그것은 신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라며 사양했다. 왕이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공의 사견을 한 번 말해보시오.”라고 했다. 누완은 이렇게 대답했다.
“왕께서도 공보문백(公甫文伯)의 어머니에 대해 들어보셨지요? 공보문백이 노(魯)에서 벼슬을 하다가 병으로 죽자 규방에서 자살한 여자가 2명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그 소식을 듣고 울지도 않았습니다. 그 유모가 ‘아들이 죽었는데 어째서 울지도 않으십니까’라고 하자 그 어머니는 ‘공자(孔子)는 현인으로 노에서 쫓겨났을 때 내 자식은 공자를 따르지 않았다. 지금 아들이 죽었는데 부인으로 그를 위해 죽은 자가 둘이나 되었다는 것은 틀림없이 장자에게는 박한 반면 부인에게는 후했다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어머니로서 이런 말을 하면 좋은 어머니가 되지만, 만약 아내에게서 나왔다면 분명 질투하는 아내를 면키 어렵습니다. 그러니 그 말은 같지만 말하는 사람이 다르면 사람 마음도 달라집니다. 지금 신이 진에서 돌아와 (땅을) 주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계책이 아니며, 주라고 말하면 왕께서는 신이 진을 위한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감히 대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에게 대왕을 위해 계책을 내라고 하신다면 땅을 주느니만 못하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왕이 “좋소.”라고 했다.
우경이 이 소식을 듣고 들어와 왕을 만나서는 “그것은 꾸민 말이니 왕께서는 땅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했다. 누완이 그 소식을 듣고는 가서 왕을 만났다. 왕이 또 우경의 말을 누완에게 알리자 누완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게 그렇지 않습니다. 우경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릅니다. 진과 조가 충돌했는데 천하가 모두 기뻐하는 것은 왜 그렇겠습니까? ‘우리가 강자로 약자를 수습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지금 조의 군대는 진에게 곤경을 당하고 있고, 천하의 전쟁 승리를 축하하는 자들은 모조리 진으로 달려올 것이 뻔합니다. 따라서 서둘러 땅을 떼어서 강화하여 천하를 의심케 하고 진의 마음을 달래느니만 못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천하는 진의 노여움을 이용하고 조가 장차 진나라의 노여움을 이용하고 조나라의 피폐함을 타서 조나라를 참외의 피폐함을 틈타서 조를 쪼갤 것입니다. 조가 망하고 나면 무슨 수로 진을 도모할 것입니까? 그래서 우경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고 한 것입니다. 왕께서는 이렇게 결정하시고 더는 생각하시지 않길 원합니다.”
우경이 그 소식을 듣고 가서 왕을 만나 이렇게 말했다.
“참 위험합니다. 누완이 진을 위해 한다는 일이 말입니다. 이것으로 천하를 더욱 의심하게 만들고 진의 마음을 어찌 위로한단 말입니까? 천하에 조의 허약함을 드러내는 것이란 말은 왜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신이 (땅을) 주지 말라고 한 것은 정말로 땅을 주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진이 왕께 여섯 개의 성을 요구하고 있지만, 왕께서는 여섯 개의 성을 제에 뇌물로 주십시오. 제와 진과 원한이 깊습니다. (제가) 왕의 성 여섯 개를 얻으면 (조와) 힘을 합쳐 서쪽으로 진을 공격할 수 있고, 제가 왕의 요구를 따르는 것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왕께서는 제에게 잃고 진에게서 보상을 받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조와 제의 깊은 원한도 갚고, 천하에 (우리의) 능력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왕께서는 이를 발표만 하시면 군대로 국경을 엿볼 필요도 없이 진의 후한 예물을 가지고 조에 와서 왕께 오히려 강화를 청할 것으로 봅니다. 진과 강화하면 이를 들은 한, 위는 틀림없이 왕을 중시하게 될 것이고, 왕을 중시하게 되면 틀림없이 후한 예물을 다투어 왕께 드릴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왕께서는 단번에 세 나라와 화친하게 되고, 진과 자리를 바꾸게 될 것입니다.”
조왕이 “좋습니다”라 하고는 바로 우경에게 동쪽으로 가서 제왕을 만나 함께 진을 도모하게 했다. 우경이 돌아오기 전에 진의 사신이 이미 조에 왔다. 누완이 이 소식을 듣고는 도망쳤다. 조는 이렇게 해서 우경에게 성 하나를 주었다.
얼마 뒤 위가 합종을 청해왔다. 조 효성왕이 우경을 불러 상의했다. (우경이) 가는 길에 평원군에게 들리자 평원군은 “경이 합종을 논의했으면 하오.”라고 했다. 우경이 들어가 왕을 만났다. 왕은 “위가 합종을 요청해왔소.”라고 했다. 우경이 “위가 잘못했습니다.”라고 답했다. 왕이 “과인이 아직 받아들이지 않았소.”라고 했다. 우경이 “왕께서도 잘못 하셨습니다”라고 답했다. 왕이 “위가 합종을 청했다고 하자 경은 위의 잘못이라고 해놓고 과인이 아직 허락하지 않았다고 하자 또 과인의 잘못이라고 하니 합종은 어쨌거나 안 된다는 말이오.”라고 했다.
우경은 이렇게 대답했다.
“신이 듣기로 작은 나라가 큰 나라와 일을 해서 일이 잘 되면 큰 나라가 복을 받고, 일이 잘 안 되면 작은 나라가 그 화를 받습니다. 지금 위가 작은 나라로 화를 요청했는데 왕께서는 큰 나라로서 그 복을 사양하신 것이라서 신이 왕의 잘못이자 위의 잘못이라고 한 것입니다. 가만히 보니 합종이 좋겠습니다.”
왕이 “좋습니다.”라 하고는 바로 위와 합종했다.
우경은 위제(魏齊)와의 관계 때문에 만호후(萬戶侯)와 재상의 인징도 중시하지 않고 위제와 함께 사잇길로 달아나 마침내 조를 떠나 양으로 갔다가 곤경을 당했다.
위제가 죽자 (우경은) 뜻을 얻지 못했고, 이에 책을 썼는데 위로는 『춘추(春秋)』에서 취하고 아래로는 근대를 고찰하여 「절의(節義)」, 「칭호(稱號)」, 「췌마(揣摩)」, 「정모(政謀)」 등 모두 8편을 지어 나라의 득실을 풍자했다. 세상에는 이를 『우씨춘추(虞氏春秋)』라 부르며 전했다.
<사마천의 논평>
태사공은 말한다.
“평원군(平原君)은 혼탁한 세상을 날아오른 공자였으나 대체를 보아내지는 못했다. 속담에 ‘이익이 지혜를 어둡게 만든다’고 했다. 평원군이 풍정(馮亭)의 사악한 주장을 욕심내서 조의 40만 병사를 장평에다 매장시켰고 한단이 거의 망할 뻔했다.
우경(虞卿)이 일을 헤아리고 정세를 분석해서 조를 위해 세운 계책이란 것이 얼마나 교묘했는가? 위제의 곤경을 차마 보지 못해 대량에서 곤욕을 치렀다. 평범한 사람도 그것이 좋게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아는데 하물며 현명한 사람이야! 그러나 우경이 궁하고 울적하지 않았더라면 책을 써서 후세에 자신을 드러내지 못했을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