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 卷七七. 魏公子列傳
魏公子列傳
魏公子無忌者,魏昭王子少子而魏安釐王異母弟也。昭王薨,安釐王即位,封公子為信陵君。是時范睢亡魏相秦,以怨魏齊故,秦兵圍大樑,破魏華陽下軍,走芒卯。魏王及公子患之。
公子為人仁而下士,士無賢不肖皆謙而禮交之,不敢以其富貴驕士。士以此方數千里爭往歸之,致食客三千人。當是時,諸侯以公子賢,多客,不敢加兵謀魏十餘年。
公子與魏王博,而北境傳舉烽,言「趙寇至,且入界」。魏王釋博,欲召大臣謀。公子止王曰:「趙王田獵耳,非為寇也。」複博如故。王恐,心不在博。居頃,複從北方來傳言曰:「趙王獵耳,非為寇也。」魏王大驚,曰:「公子何以知之?」公子曰:「臣之客有能深得趙王陰事者,趙王所為,客輒以報臣,臣以此知之。」是後魏王畏公子之賢能,不敢任公子以國政。
(吾 : 자신의 능력을 함부로 드러내 보이는 게 아니다.)
魏有隱士曰侯嬴,年七十,家貧,為大樑夷門監者。公子聞之,往請,欲厚遺之。不肯受,曰:「臣脩身絜行數十年,終不以監門困故而受公子財。」公子於是乃置酒大會賓客。坐定,公子從車騎,虛左,自迎夷門侯生。侯生攝敝衣冠,直上載公子上坐,不讓,欲以觀公子。公子執轡愈恭。侯生又謂公子曰:「臣有客在市屠中,原枉車騎過之。」公子引車入巿,侯生下見其客硃亥,俾倪故久立,與其客語,微察公子。公子顏色愈和。當是時,魏將相宗室賓客滿堂,待公子舉酒。巿人皆觀公子執轡。從騎皆竊罵侯生。侯生視公子色終不變,乃謝客就車。至家,公子引侯生坐上坐,遍贊賓客,賓客皆驚。酒酣,公子起,為壽侯生前。侯生因謂公子曰:「今日嬴之為公子亦足矣。嬴乃夷門抱關者也,而公子親枉車騎,自迎嬴於眾人廣坐之中,不宜有所過,今公子故過之。然嬴欲就公子之名,故久立公子車騎巿中,過客以觀公子,公子愈恭。巿人皆以嬴為小人,而以公子為長者能下士也。」於是罷酒,侯生遂為上客。
侯生謂公子曰:「臣所過屠者硃亥,此子賢者,世莫能知,故隱屠間耳。」公子往數請之,硃亥故不復謝,公子怪之。
魏安釐王二十年,秦昭王已破趙長平軍,又進兵圍邯鄲。公子姊為趙惠文王弟平原君夫人,數遺魏王及公子書,請救於魏。魏王使將軍晉鄙將十萬眾救趙。秦王使使者告魏王曰:「吾攻趙旦暮且下,而諸侯敢救者,已拔趙,必移兵先擊之。」魏王恐,使人止晉鄙,留軍壁鄴,名為救趙,實持兩端以觀望。平原君使者冠蓋相屬於魏,讓魏公子曰:「勝所以自附為婚姻者,以公子之高義,為能急人之困。今邯鄲旦暮降秦而魏救不至,安在公子能急人之困也!且公子縱輕勝,棄之降秦,獨不憐公子姊邪?」公子患之,數請魏王,及賓客辯士說王萬端。魏王畏秦,終不聽公子。公子自度終不能得之於王,計不獨生而令趙亡,乃請賓客,約車騎百餘乘,欲以客往赴秦軍,與趙俱死。
行過夷門,見侯生,具告所以欲死秦軍狀。辭決而行,侯生曰:「公子勉之矣,老臣不能從。」公子行數裏,心不快,曰:「吾所以待侯生者備矣,天下莫不聞,今吾且死而侯生曾無一言半辭送我,我豈有所失哉?」複引車還,問侯生。侯生笑曰:「臣固知公子之還也。」曰:「公子喜士,名聞天下。今有難,無他端而欲赴秦軍,譬若以肉投餒虎,何功之有哉?尚安事客?然公子遇臣厚,公子往而臣不送,以是知公子恨之複返也。」公子再拜,因問。侯生乃屏人間語,曰:「嬴聞晉鄙之兵符常在王臥內,而如姬最幸,出入王臥內,力能竊之。嬴聞如姬父為人所殺,如姬資之三年,自王以下欲求報其父仇,莫能得。如姬為公子泣,公子使客斬其仇頭,敬進如姬。如姬之欲為公子死,無所辭,顧未有路耳。公子誠一開口請如姬,如姬必許諾,則得虎符奪晉鄙軍,北救趙而西卻秦,此五霸之伐也。」公子從其計,請如姬。如姬果盜晉鄙兵符與公子。
公子行,侯生曰:「將在外,主令有所不受,以便國家。公子即合符,而晉鄙不授公子兵而複請之,事必危矣。臣客屠者硃亥可與俱,此人力士。晉鄙聽,大善;不聽,可使擊之。」於是公子泣。侯生曰:「公子畏死邪?何泣也?」公子曰:「晉鄙嚄唶宿將,往恐不聽,必當殺之,是以泣耳,豈畏死哉?」於是公子請硃亥。硃亥笑曰:「臣乃市井鼓刀屠者,而公子親數存之,所以不報謝者,以為小禮無所用。今公子有急,此乃臣效命之秋也。」遂與公子俱。公子過謝侯生。侯生曰:「臣宜從,老不能。請數公子行日,以至晉鄙軍之日,北鄉自剄,以送公子。」公子遂行。
至鄴,矯魏王令代晉鄙。晉鄙合符,疑之,舉手視公子曰:「今吾擁十萬之眾,屯於境上,國之重任,今單車來代之,何如哉?」欲無聽。硃亥袖四十斤鐵椎,椎殺晉鄙,公子遂將晉鄙軍。勒兵下令軍中曰:「父子俱在軍中,父歸;兄弟俱在軍中,兄歸;獨子無兄弟,歸養。」得選兵八萬人,進兵擊秦軍。秦軍解去,遂救邯鄲,存趙。/6/趙王及平原君自迎公子於界,平原君負籣矢為公子先引。趙王再拜曰:「自古賢人未有及公子者也。」當此之時,平原君不敢自比於人。公子與侯生決,至軍,侯生果北鄉自剄。
魏王怒公子之盜其兵符,矯殺晉鄙,公子亦自知也。已卻秦存趙,使將將其軍歸魏,而公子獨與客留趙。趙孝成王德公子之矯奪晉鄙兵而存趙,乃與平原君計,以五城封公子。公子聞之,意驕矜而有自功之色。客有說公子曰:「物有不可忘,或有不可不忘。夫人有德於公子,公子不可忘也;公子有德於人,原公子忘之也。且矯魏王令,奪晉鄙兵以救趙,於趙則有功矣,於魏則未為忠臣也。公子乃自驕而功之,竊為公子不取也。」於是公子立自責,似若無所容者。趙王埽除自迎,執主人之禮,引公子就西階。公子側行辭讓,從東階上。自言罪過,以負於魏,無功於趙。趙王侍酒至暮,口不忍獻五城,以公子退讓也。公子竟留趙。趙王以鄗為公子湯沐邑,魏亦複以信陵奉公子。公子留趙。
公子聞趙有處士毛公藏於博徒,薛公藏於賣漿家,公子欲見兩人,兩人自匿不肯見公子。公子聞所在,乃間步往從此兩人遊,甚歡。平原君聞之,謂其夫人曰:「始吾聞夫人弟公子天下無雙,今吾聞之,乃妄從博徒賣漿者游,公子妄人耳。」夫人以告公子。公子乃謝夫人去,曰:「始吾聞平原君賢,故負魏王而救趙,以稱平原君。平原君之遊,徒豪舉耳,不求士也。無忌自在大樑時,常聞此兩人賢,至趙,恐不得見。以無忌從之游,尚恐其不我欲也,今平原君乃以為羞,其不足從遊。」乃裝為去。夫人具以語平原君。平原君乃免冠謝,固留公子。平原君門下聞之,半去平原君歸公子,天下士複往歸公子,公子傾平原君客。
公子留趙十年不歸。秦聞公子在趙,日夜出兵東伐魏。魏王患之,使使往請公子。公子恐其怒之,乃誡門下:「有敢為魏王使通者,死。」賓客皆背魏之趙,莫敢勸公子歸。/8/毛公、薛公兩人往見公子曰:「公子所以重於趙,名聞諸侯者,徒以有魏也。今秦攻魏,魏急而公子不恤,使秦破大樑而夷先王之宗廟,公子當何面目立天下乎?」語未及卒,公子立變色,告車趣駕歸救魏。
魏王見公子,相與泣,而以上將軍印授公子,公子遂將。魏安釐王三十年,公子使使遍告諸侯。諸侯聞公子將,各遣將將兵救魏。公子率五國之兵破秦軍於河外,走蒙驁。遂乘勝逐秦軍至函谷關,抑秦兵,秦兵不敢出。當是時,公子威振天下,諸侯之客進兵法,公子皆名之,故世俗稱魏公子兵法。
秦王患之,乃行金萬斤於魏,求晉鄙客,令毀公子於魏王曰:「公子亡在外十年矣,今為魏將,諸侯將皆屬,諸侯徒聞魏公子,不聞魏王。公子亦欲因此時定南面而王,諸侯畏公子之威,方欲共立之。」秦數使反間,偽賀公子得立為魏王未也。魏王日聞其毀,不能不信,後果使人代公子將。/9/公子自知再以毀廢,乃謝病不朝,與賓客為長夜飲,飲醇酒,多近婦女。日夜為樂飲者四歲,竟病酒而卒。其歲,魏安釐王亦薨。
秦聞公子死,使蒙驁攻魏,拔二十城,初置東郡。其後秦稍蠶食魏,十八歲而虜魏王,屠大樑。
高祖始微少時,數聞公子賢。及即天子位,每過大樑,常祠公子。高祖十二年,從擊黥布還,為公子置守塚五家,世世歲以四時奉祠公子。
太史公曰:吾過大樑之墟,求問其所謂夷門。夷門者,城之東門也。天下諸公子亦有喜士者矣,然信陵君之接岩穴隱者,不恥下交,有以也。名冠諸侯,不虛耳。高祖每過之而令民奉祠不絕也。
信陵下士,鄰國相傾。以公子故,不敢加兵。頗知硃亥,盡禮侯嬴。遂卻晉鄙,終辭趙城。毛、薛見重,萬古希聲。
위(魏)나라의 공자(公子) 무기(無忌)는 위 소왕(昭王)의 막내아들이자 위 안희왕(安釐王)의 배다른 동생이다. 소왕이 죽고, 안희왕이 즉위하여 공자를 신릉군(信陵君)에 봉했다.
이때 범수(范睢)가 위나라에서 도망쳐서 진(秦)나라의 재상이 되어, 위제(魏齊)와 원한이 있던 관계로 진나라의 군대가 대량을 포위하고 화양(華陽)에 주둔하고 있던 위나라의 군대를 물리쳐 망묘(芒卯)를 달아나게 했다. 위왕과 공자가 이를 걱정했다.
공자는 사람이 어질어 인재를 존중했는데, 인재가 어질거나 불초하거나 모두 겸손하게 예로 사귀면서 감히 부귀하다고 인재를 교만하게 대하지 않았다. 인재들이 이 때문에 사방 수 천리에서 다투어 달려오니 식객이 3천에 이르렀다.
당시 제후들은 공자가 유능한데다 식객이 많았기 때문에 감히 군대로 위나라를 꾀하지 못한 것이 10년이 넘었다.
공자가 위왕과 바둑을 두는데 북쪽 변경에서 봉화가 오르면서 “조나라가 쳐들어오는데 국경에 진입했습니다.”라는 전갈이 왔다. 위왕이 바둑판을 밀쳐놓고 대신들을 불러 논의하려 했다. 공자가 왕을 말리며 “조왕이 사냥 나온 것이지 쳐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했다. 그리고는 다시 바둑을 두었다. 왕은 두려워 마음이 바둑에 가질 못했다. 이윽고 다시 북방에서 전갈이 오길 “조왕이 사냥 나온 것이지 쳐들어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라고 했다. 위왕이 크게 놀라며 “공자는 어찌 아셨소?”라고 하자 공자는 “신의 식객 중에 조왕의 은밀한 일까지 정탐하는 자가 있어 조왕의 행동을 식객이 신에게 바로 보고하기 때문에 신이 알게 된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후로 위왕은 공자의 능력을 두려워한 나머지 공자에게 국정을 맡기려 하지 않았다.
위나라에 후영(侯嬴)이라는 이름이 은자가 있었다. 나이는 70에 집은 가난했고, 대량의 이문(夷門)을 지키는 문지기였다. 공자가 그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가 후한 예물을 주려고 했다. 후영은 받길 거절하면서 “신이 몸과 행동을 깨끗하게 닦아온 지 수십 년, 성문을 지키며 곤란하게 산다고 해서 공자의 재물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결코!”라고 했다. 이에 공자는 술자리를 베풀어 빈객들을 대거 초청했다. 모두 자리에 앉자 공자는 왼쪽 자리를 비워둔 채 수레를 타고 직접 이문으로 후생(후영)을 맞이하러 갔다. 후생은 헤어진 의관을 가다듬은 후 바로 사양도 않고 공자보다 상석에 앉아 공자를 살피고자 했다. 공자는 말고삐를 쥔 채 더욱 공손했다.
후생이 또 공자에게 “신의 친구가 시장에서 도살업을 하고 있는데 수레가 가는 김에 그곳을 들렀으면 합니다.”라고 했다. 공자가 수레를 끌고 시장으로 들어서자 후생은 수레에서 내려 친구 주해(朱亥)를 만나 일부러 오랫동안 서서 그와 이야기하면서 곁눈질로 가만히 공자를 살피는데 공자의 안색은 더욱 온화했다.
이때 (공자의 집에서는) 위나라의 장상, 종친, 빈객들이 가득 모여 공자가 술자리를 시작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시장 사람들이 모두 말고삐를 쥐고 있는 공자를 보았고, 마차를 따르는 시종들은 모두 가만히 후생을 욕하고 있었다. 후생은 공자의 안색이 끝까지 변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친구와 이별하고 수레에 올랐다. 집에 도착하자 공자는 후생을 이끌어 윗자리에 앉게 하고 빈객들에게 두루두루 소개하자 빈객들은 모두 놀랐다. 술자리가 무르익자 공자가 일어나 후생의 앞에서 축수를 올렸다.
후생이 이어 공자에게 “오늘 이 후영이 공자를 위해 충분히 할 일을 했습니다. 후영은 이문의 문지기에 지나지 않는데 공자께서 몸소 마차를 몰고 오셔서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저를 맞이하셨습니다. 지나다 들르지 않아야 되는데도 공자께서는 일부러 들러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후영은 공자의 이름을 알리고자 일부러 오랫동안 공자의 마차를 시장 한 가운데 세워놓고 친구를 만나 공자를 살폈더니 공자께서는 더욱 공손스러웠습니다. 시장 사람들은 모두 이 후영을 소인이라 여긴 반면 공자는 장자로서 선비에게 몸을 낮춘다고 여겼습니다.”라고 했다. 술자리가 끝나자 후생은 마침내 상객이 되었다.
후생이 공자에게 “신이 들렀던 푸줏간 주해는 현인이지만 세상은 모릅니다. 그래서 푸줏간 사이에 숨어 있을 뿐입니다”라고 했다. 공자가 가서 몇 차례 주해를 청했지만 주해는 일부러 답례하지 않자 공자를 이를 의아하게 생각했다.
위 안희왕 20년에 진 소왕은 장평에서 조나라의 군대를 격파하고 군대를 진격시켜 한단을 포위했다. 공자의 손위 누이는 조 혜문왕(惠文王)의 동생 평원군(平原君)의 부인이었는데, 여러 차례 위왕과 공자에게 편지를 보내 위나라에 구원을 청했다. 위왕은 장군 진비(晉鄙)에게 10만을 이끌고 조나라를 구원하게 했다.
진왕은 사자를 보내 위왕에게 “내가 조나라를 공격하여 하루 이틀이면 함락시킬 것이다. 제후들 중 감히 구하려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병력을 옮겨 먼저 공격할 것이다”라고 알렸다.
위왕이 겁이 나서 사람을 시켜 진비에게 군대를 업(鄴)에서 멈추어 주둔하게 했다. 겉으로는 조나라를 구한다고 하면서 실은 양다리를 걸친 채 관망했다.
평원군의 사신이 계속 위로 와서 위공자를 나무라길 “이 조승이 스스로 혼인관계를 맺은 것은 공자의 높은 의리가 다른 사람의 곤경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었소. 지금 한단이 조만간 진나라에 항복할 것 같은데 위나라가 구원하러 오지 않는다면 공자가 어찌 다른 사람의 곤경을 구한다고 할 수 있겠소! 또한 공자가 이 승을 가벼이 여겨 진나라에 항복하도록 내버린다면 공자의 누이가 가엾지 않겠소.”라고 했다.
공자가 이를 걱정하여 여러 차례 위왕에게 조나라를 구원해달라고 청했고, 빈객과 변사들도 백방으로 왕에게 유세했다. 위왕은 진나라가 두려워 끝내 공자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공자는 왕의 승낙을 끝내 얻어낼 수 없다고 스스로 판단하여 바로 빈객들을 불러 마차 백여 대를 준비하고 객들을 진나라의 군으로 보내 조나라와 함께 죽고자 했다.
일행이 이문을 지나가다 후생을 만나 왜 진나라의 군대로 가서 죽고자 하는지를 다 말해주었다. 작별하고 떠나려는데 후생은 “공자께서는 잘 처리하십시오. 이 늙은 신은 따를 수가 없습니다.”라고 했다. 공자가 몇 리를 가다가 마음에 영 편하지 않아 “내가 후생을 대접함에 소홀함이 없었다는 것은 천하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지금 내가 죽는다는데도 후생은 일언반구의 말도 없이 나를 보내니 내게 대체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인가”라고 했다. 그리고는 다시 마차를 돌려 후생에게 와서 그 까닭을 물었다. 후생이 웃으며 “신은 정말이지 공자께서 돌아오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한 다음 “공자께서 인재를 좋아하신다는 명성은 천하가 다 알고 있습니다. 지금 어려움에 처하시어 별 다른 방법도 없이 진나라의 군대로 가고자 하시니 이는 굶주린 호랑이에게 고기를 던지는 것과 같으니 무슨 효과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식객들은 무엇 때문에 길렀습니까? 공자께서는 신을 잘 대접해 주셨지만 공자께서 떠나시는데 신은 송별조차 하지 않았으니 이 때문에 공자께서 원망스러워 다시 돌아오실 줄 알았습니다.”라고 했다.
공자가 두 번 절을 하고 이어 가르침을 청했다. 이에 후생은 사람들을 물리고 조용히 “이 후영이 들으니 진비(晉鄙)의 병부(兵符)를 늘 왕의 침실 안에 둔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희(如姬)는 가장 총애를 받아 왕의 침실 안까지 드나들 수 있으니 그것을 훔쳐낼 수 있습니다. 신은 여희의 부친이 누군가에게 피살되어 여희가 3년 동안 원한을 품고 왕부터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 줄 사람을 찾아다녔으나 찾지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여희가 공자께 울면서 부탁하자 공자께서 식객을 시켜 그 원수의 머리를 베어 여희에게 갖다 바쳤지요. 여희는 공자를 위해 죽음도 불사하고자 했지만 기회가 없었습니다. 공자께서 한 마디만 여희에게 하시면 여희는 틀림없이 응낙할 것인즉, 호부를 얻어 진비의 군대를 빼앗아 북으로 조나라를 구하고 서쪽으로 진나라를 물리치면 이야말로 5패의 공업입니다”라고 했다.
공자가 그 계책을 따라서 여희에게 도움을 청했다. 여희는 과연 진비의 병부를 훔쳐 공자에게 주었다.
공자가 출발할 때 후생은 “장수가 밖에 있으면 군주의 명령이라도 받지 않을 수 있어야 나라에 이롭습니다. 공자께서 병부를 맞추었는데도 진비가 공자에게 병권을 내주지 않고 다시 지시를 요청하면 일이 분명 위태로워집니다. 신의 친구인 백정 주해를 데리고 가십시오. 이 사람이 역사(力士)입니다. 진비가 들으면 정말 좋은 일이지만 듣지 않으면 주해를 시켜 죽이십시오.”라고 했다. 이에 공자가 눈물을 흘렸다. 후생이 “공자께서 죽음이 두려우십니까? 왜 우십니까?”라고 했다. 공자는 “진비는 백전노장으로 제가 간다고 해도 말을 듣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죽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우는 것일 뿐이지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겠습니까.”라고 했다. 이에 공자는 주해를 청했다. 주해는 웃으며 “신은 시장에서 칼을 휘두르는 백정입니다. 공자께서 몸소 여러 차례 저를 찾아 주셨지만 답례하지 않은 것은 작은 예절은 쓸모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공자에게 급한 일이 생겼으니 이번이야말로 신이 목숨으로 보답해야 할 기회입니다”라 하고는 마침내 공자와 함께 갔다. 공자가 지나는 길에 후생에게 인사를 했다. 후생은 “신도 따라야 마땅하나 늙어서 갈 수가 없습니다. 공자께서 도착할 날짜를 계산하여 진비의 군영에 도착하는 날 북쪽을 향해 목을 그어 공자께 보답하겠습니다.”라고 했다. 공자가 드디어 길을 떠났다.
업(鄴)에 도착하여 위왕의 명령이라고 속이고 진비의 병권을 접수하려 했다. 진비가 병부를 맞추어보고도 의심이 나서 손을 들어 공자를 보며 “지금 제가 10만을 거느리고 국경에 주둔하고 있는데, 이는 나라를 위한 중요한 임무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단신으로 오셔서 군권을 내놓으라 하니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라고 했다. 주해가 옷소매에서 40근 짜리 철추를 꺼내 진비를 때려죽이니 공자가 마침내 진비의 병권을 빼앗았다. 이어 군대를 불러 모아 군중에게 “아비와 아들이 함께 군중에 있는 자는 아비는 돌려보내고, 형제가 함께 군중에 있는 사람은 형을 돌려보내라. 형제도 없는 외아들은 돌아가 부모를 보살펴라”고 명령했다.
이렇게 병사 8만 명을 뽑아 진나라의 군대를 공격하게 했다. 진나라의 군대가 포위를 풀고 돌아가니 마침내 한단을 구하고 조나라를 보존했다. 조왕과 평원군이 몸소 국경으로 공자를 맞이하러 나왔다. 평원군은 몸소 화살통을 지고 공자 앞에서 길을 안내했다. 조왕이 두 번 절을 하며 “예로부터 현자들이 많았지만 공자를 따를 사람은 없소”라고 했다. 이 때부터 평원군은 자신을 신릉군과 비교하지 않았다. 공자가 후생과 헤어지고 군영에 이르렀을 때 후생은 과연 북쪽을 향해 스스로 목을 베어 죽었다.
위왕은 공자가 병부를 훔치고 거짓 명령으로 진비를 속여서 죽인 것에 화를 냈고 공자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진나라를 물리치고 조나라를 보존하자 장수들은 군을 이끌고 위나라로 돌아가게 했다. 그러나 공자는 혼자 식객들과 조나라에 남았다. 조 효성왕은 공자가 거짓 명령으로 진비를 속여서 군대를 빼앗아 조나라를 보존케 한 것을 고마워하며 평원군과 상의하여 다섯 개의 성을 공자에게 주려고 했다. 공자가 이를 듣고는 교만함을 드러내며 자신의 공을 당연하다고 여기는 기색이 있었다.
식객 중에 누군가가 공자에게 “일에는 잊어서는 안 되는 것과 잊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무릇 남이 공자에게 베푼 덕은 공자께서 잊어서는 안 되며, 공자께서 남에게 베푼 은덕은 공자께서 잊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위왕의 명령이라고 속여 진비의 군대를 빼앗아 조나라를 구한 일은 조나라에게 공을 세운 것이지만 위나라에게는 충신이 아닌 셈입니다. 그런데도 공자께서 교만하게 공을 내세우려 하시니 가만히 생각건대 공자께서 취하실 바가 못됩니다.”라고 했다.
이에 공자는 스스로를 책망하길 마치 자신을 용서할 수 없는 것처럼 했다. 조왕이 길을 청소하고 직접 (공자를) 맞이하여 주인의 예를 차리면서 공자를 서쪽 계단으로 안내했다. 공자는 몸을 한쪽으로 돌리고 사양하면서 동쪽 계단으로 올랐다. 그리고는 스스로 죄를 말하는데 위나라를 배신했고 조나라에 공을 세운 것이 없다고 했다. 조왕이 날이 저물 때까지 술시중을 들었지만 공자의 겸양 때문에 차마 성 다섯 개를 꺼내지 못했다. 공자는 마침내 조나라에 머무르게 되었다. 조왕은 호(鄗)를 공자의 탕목읍(湯沐邑)으로 주었고, 위나라도 다시 신릉을 공자에게 주었다. 공자는 계속 조나라에 머물렀다.
공자가 조나라의 처사 모공(毛公)이 도박꾼 무리에 숨어 있고, 설공(薛公)은 술집에 숨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공자가 두 사람을 만나고자 했으나 두 사람은 몸을 숨기고 공자를 만나려 하지 않았다. 공자가 그들이 있는 곳을 듣고는 몰래 가서 이 두 사람과 사귀고는 몹시 기뻐했다. 평원군이 이를 듣고는 그 부인에게 “당초 내가 부인의 동생인 위공자가 천하에 둘도 없는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지금 내가 듣자하니 망측하게 도박꾼과 술파는 자와 사귄다고 하니 공자는 망령된 사람일 뿐이오”라고 했다. 부인이 공자에게 이를 일렀다. 공자가 부인에게 작별을 고하면서 “당초 내가 평원군이 어질다고 들어서 위왕을 어기고 조나라를 구하여 평원군을 만족시켰지요. 평원군의 교류를 보니 그저 호탕함만 있을 뿐 인재를 구하지 않는군요. 이 무기가 대량에 있을 때부터 늘 그 두 사람이 어질다고 들었기에 조나라에 와서 만나지 못하면 어쩌나 했지요. 이 무기는 사람을 사귀면서 늘 그들이 날 원치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지금 평원군은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니 그는 교류하기에는 부족한 사람 같소이다.”라 하고는 행장을 꾸려서 떠날 준비를 했다. 부인이 이를 평원군에 이야기했다. 평원군은 바로 관을 벗고 사죄하며 진실로 공자에게 머물길 청했다. 평원군 문하의 사람들이 이를 듣고는 절반 가까이가 평원군을 떠나 공자에게로 왔고, 천하의 인재들도 다시 공자에게로 돌아오니 공자의 식객이 평원군의 식객보다 많아졌다.
공자가 조나라에 10년을 머무르며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 진나라는 공자가 조나라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낮밤으로 군대를 내서 동쪽 위나라를 공격했다. 위왕이 걱정이 되어 사신을 시켜 공자에게 돌아오길 청했다. 공자는 왕이 자신에게 화가 나있다는 것에 겁을 먹고는 문하에 “누구든지 위왕의 사신을 내게 데려오는 사람은 죽일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빈객들도 위나라를 버리고 조나라에 온 자들이라 공자에게 감히 돌아가자고 권하지 못했다. 모공과 설공 두 사람이 가서 공자를 만나서는 “공자께서 조나라의 중시를 받고 그 명성이 제후에게 알려진 것은 오로지 위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진나라가 위나라를 공격하여 위나라가 위급한데도 공자께서는 걱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진나라가 대량을 깨뜨리고 선왕의 종묘를 허물게 둔다면 공자께서는 무슨 면목으로 천하를 대하시겠습니까?”라고 했다.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공자의 안색이 바뀌더니 서둘러 마차를 준비시켜 위나라를 구하기 위해 돌아갔다.
위왕은 공자를 만나서 서로 울었다. 그리고 상장군의 도장을 주니 공자가 마침내 대장군이 되었다.
위 안희왕 30년에 공자는 사신을 시켜 (이 사실을) 제후들에게 두루 알렸다. 제후들은 공자가 장군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각자 장수와 병사를 보내 위나라를 구했다. 공자는 다섯 나라의 군대를 이끌고 진나라의 군대를 황하 이남에서 격파하여 몽오(蒙驁)를 도주하게 만들었다. 승세를 타고 진나라의 군대를 뒤쫓아 함곡관(函谷關)까지 이르러 진나라의 군대를 압박하니 진나라의 군대는 감히 나오지 못했다.
당시 공자의 위세가 천하를 울렸다. 제후의 식객들이 병법을 올리자 공자가 모두 거기에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위공자병법(魏公子兵法)』이라 불렀다.
진왕은 이런 것들이 걱정이 되어서 금 만 근을 내서 위나라에다 뿌리며 진비의 식객들을 찾아서 공자를 위왕에게 이렇게 비방하게 했다.
“공자는 10년 동안 외지에서 망명 생활을 했지만 지금 위나라의 장수가 되었고 제후의 장수들도 모두 공자에게 속하게 되었으니 제후들은 그저 위공자만 알뿐 위왕은 모릅니다. 공자 또한 이 때를 이용하여 남면하여 왕이 되고자 하고, 제후들도 공자의 위세를 두려워하며 바야흐로 그를 옹립하려고 합니다.”
진나라는 계속 간첩을 시켜 거짓으로 공자가 위왕으로 옹립되지 않았냐며 축하를 올리게 했다. 위왕이 날마다 그 비방을 듣자, 믿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얼마 뒤 아니나 다를까 공자 대신 다른 사람을 장수로 대체했다. 공자는 자신이 다시 비방으로 쫓겨났다는 것을 알고는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가지 않고 빈객들과 어울려 밤새 술을 마셨는데 독한 술을 마시고 많은 여자들을 가까이 했다. 낮밤으로 쾌락과 술에 빠지길 4년 만에 끝내 술병으로 죽었다. 그해에 위 안희왕 역시 죽었다.
진나라는 공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몽오를 시켜 위나라를 공격하게 하여 20개의 성을 빼앗고 처음으로 동군(東郡)을 설치했다. 그 뒤 진나라는 조금씩 위나라를 잠식하여 18년 만에 위왕을 포로로 잡고 대량을 도륙했다.
고조(高祖)가 아직 젊었을 때 공자의 명성을 여러 차례 들었다. 천자로 즉위해서 대량을 지나갈 때면 늘 공자에게 제사를 드렸다.
고조 12년에 경포(黥布)를 치고 돌아오다가 공자를 위해 묘지기 다섯 집을 두어 대대로 사계절마다 공자의 제사를 받들게 했다.
<사마천의 논평>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대량의 옛 터를 지나면서 사람들이 말하는 이문을 물었다. 이문은 성의 동쪽 문이었다. 천하의 여러 공자들 역시 인재를 좋아했지만 신릉군은 바위나 동굴에 숨어 사는 인재들을 찾아 빈천한 사람들과 사귀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명성이 으뜸이었던 것이 헛말이 아니었고, 고조가 매번 그곳을 지날 때마다 백성들에게 제사가 끊어지지 않게 했다는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