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 卷七九. 范睢蔡澤列傳[蔡澤]
范睢蔡澤列傳
蔡澤者,燕人也。游學干諸侯小大甚眾,不遇。而從唐舉相,曰:「吾聞先生相李兌,曰『百日之內持國秉』,有之乎?」曰:「有之。」曰:「若臣者何如?」唐舉孰視而笑曰:「先生曷鼻,巨肩,魋顏,蹙齃,膝攣。吾聞聖人不相,殆先生乎?」蔡澤知唐舉戲之,乃曰:「富貴吾所自有,吾所不知者壽也,願聞之。」唐舉曰:「先生之壽,從今以往者四十三歲。」蔡澤笑謝而去,謂其御者曰:「吾持粱刺齒肥,躍馬疾驅,懷黃金之印,結紫綬於要,揖讓人主之前,食肉富貴,四十三年足矣。」去之趙,見逐。之韓、魏,遇奪釜鬲於涂。聞應侯任鄭安平、王稽皆負重罪於秦,應侯內慚,蔡澤乃西入秦。
將見昭王,使人宣言以感怒應侯曰:「燕客蔡澤,天下雄俊弘辯智士也。彼一見秦王,秦王必困君而奪君之位。」應侯聞,曰:「五帝三代之事,百家之說,吾既知之,眾口之辯,吾皆摧之,是惡能困我而奪我位乎?」使人召蔡澤。蔡澤入,則揖應。應侯固不快,及見之,又倨,應侯因讓之曰:「子嘗宣言欲代我相秦,寧有之乎?」對曰:「然。」應侯曰:「請聞其說。」蔡澤曰:「吁,君何見之晚也!夫四時之序,成功者去。夫人生百體堅彊,手足便利,耳目聰明而心聖智,豈非士之願與?」應侯曰:「然。」蔡澤曰:「質仁秉義,行道施德,得志於天下,天下懷樂敬愛而尊慕之,皆願以為君王,豈不辯智之期與?」應侯曰:「然。」蔡澤復曰:「富貴顯榮,成理萬物,使各得其所;性命壽長,終其天年而不夭傷;天下繼其統,守其業,傳之無窮;名實純粹,澤流千里,世世稱之而無絕,與天地終始:豈道德之符而聖人所謂吉祥善事者與?」應侯曰:「然。」
蔡澤曰:「若夫秦之商君,楚之吳起,越之大夫種,其卒然亦可願與?」應侯知蔡澤之欲困己以說,復謬曰:「何為不可?夫公孫鞅之事孝公也,極身無貳慮,盡公而不顧私;設刀鋸以禁姦邪,信賞罰以致治;披腹心,示情素,蒙怨咎,欺舊友,奪魏公子卬,安秦社稷,利百姓,卒為秦禽將破敵,攘地千里。吳起之事悼王也,使私不得害公,讒不得蔽忠,言不取茍合,行不取茍容,不為危易行,行義不辟難,然為霸主彊國,不辭禍凶。大夫種之事越王也,主雖困辱,悉忠而不解,主雖絕亡,盡能而弗離,成功而弗矜,貴富而不驕怠。若此三子者,固義之至也,忠之節也。是故君子以義死難,視死如歸;生而辱不如死而榮。士固有殺身以成名,雖義之所在,雖死無所恨。何為不可哉?」
蔡澤曰:「主聖臣賢,天下之盛福也;君明臣直,國之福也;父慈子孝,夫信妻貞,家之福也。故比干忠而不能存殷,子胥智而不能完吳,申生孝而晉國亂。是皆有忠臣孝子,而國家滅亂者,何也?無明君賢父以聽之,故天下以其君父為僇辱而憐其臣子。今商君、吳起、大夫種之為人臣,是也;其君,非也。故世稱三子致功而不見德,豈慕不遇世死乎?夫待死而後可以立忠成名,是微子不足仁,孔子不足聖,管仲不足大也。夫人之立功,豈不期於成全邪?身與名俱全者,上也。名可法而身死者,其次也。名在僇辱而身全者,下也。」於是應侯稱善。
蔡澤少得閒,因曰:「夫商君、吳起、大夫種,其為人臣盡忠致功則可願矣,閎夭事文王,周公輔成王也,豈不亦忠聖乎?以君臣論之,商君、吳起、大夫種其可願孰與閎夭、周公哉?」應侯曰:「商君、吳起、大夫種弗若也。」蔡澤曰:「然則君之主慈仁任忠,惇厚舊故,其賢智與有道之士為膠漆,義不倍功臣,孰與秦孝公、楚悼王、越王乎?」應侯曰:「未知何如也。」蔡澤曰:「今主親忠臣,不過秦孝公、楚悼王、越王,君之設智,能為主安危修政,治亂彊兵,批患折難,廣地殖穀,富國足家,彊主,尊社稷,顯宗廟,天下莫敢欺犯其主,主之威蓋震海內,功彰萬里之外,聲名光輝傳於千世,君孰與商君、吳起、大夫種?」應侯曰:「不若。」蔡澤曰:「今主之親忠臣不忘舊故不若孝公、悼王、句踐,而君之功績愛信親幸又不若商君、吳起、大夫種,然而君之祿位貴盛,私家之富過於三子,而身不退者,恐患之甚於三子,竊為君危之。語曰『日中則移,月滿則虧』。物盛則衰,天地之常數也。進退盈縮,與時變化,聖人之常道也。故『國有道則仕,國無道則隱』。聖人曰『飛龍在天,利見大人』。『不義而富且貴,於我如浮雲』。今君之怨已讎而德已報,意欲至矣,而無變計,竊為君不取也。且夫翠、鵠、犀、象,其處勢非不遠死也,而所以死者,惑於餌也。蘇秦、智伯之智,非不足以辟辱遠死也,而所以死者,惑於貪利不止也。是以聖人制禮節欲,取於民有度,使之以時,用之有止,故志不溢,行不驕,常與道俱而不失,故天下承而不絕。昔者齊桓公九合諸侯,一匡天下,至於葵丘之會,有驕矜之志,畔者九國。吳王夫差兵無敵於天下,勇彊以輕諸侯,陵齊晉,故遂以殺身亡國。夏育、太史噭叱呼駭三軍,然而身死於庸夫。此皆乘至盛而不返道理,不居卑退處儉約之患也。夫商君為秦孝公明法令,禁姦本,尊爵必賞,有罪必罰,平權衡,正度量,調輕重,決裂阡陌,以靜生民之業而一其俗,勸民耕農利土,一室無二事,力田稸積,習戰陳之事,是以兵動而地廣,兵休而國富,故秦無敵於天下,立威諸侯,成秦國之業。功已成矣,而遂以車裂。楚地方數千里,持戟百萬,白起率數萬之師以與楚戰,一戰舉鄢郢以燒夷陵,再戰南并蜀漢。又越韓、魏而攻彊趙,北阬馬服,誅屠四十餘萬之眾,盡之于長平之下,流血成川,沸聲若雷,遂入圍邯鄲,使秦有帝業。楚、趙天下之彊國而秦之仇敵也,自是之後,楚、趙皆懾伏不敢攻秦者,白起之勢也。身所服者七十餘城,功已成矣,而遂賜劍死於杜郵。吳起為楚悼王立法,卑減大臣之威重,罷無能,廢無用,損不急之官,塞私門之請,一楚國之俗,禁游客之民,精耕戰之士,南收楊越,北并陳、蔡,破橫散從,使馳說之士無所開其口,禁朋黨以勵百姓,定楚國之政,兵震天下,威服諸侯。功已成矣,而卒枝解。大夫種為越王深謀遠計,免會稽之危,以亡為存,因辱為榮,墾草入邑,辟地殖穀,率四方之士,專上下之力,輔句踐之賢,報夫差之讎,卒擒勁吳。令越成霸。功已彰而信矣,句踐終負而殺之。此四子者,功成不去,禍至於此。此所謂信而不能詘,往而不能返者也。范蠡知之,超然辟世,長為陶朱公。君獨不觀夫博者乎?或欲大投,或欲分功,此皆君之所明知也。今君相秦,計不下席,謀不出廊廟,坐制諸侯,利施三川,以實宜陽,決羊腸之險,塞太行之道,又斬范、中行之涂,六國不得合從,棧道千里,通於蜀漢,使天下皆畏秦,秦之欲得矣,君之功極矣,此亦秦之分功之時也。如是而不退,則商君、白公、吳起、大夫種是也。吾聞之,『鑒於水者見面之容,鑒於人者知吉與凶』。書曰『成功之下,不可久處』。四子之禍,君何居焉?君何不以此時歸相印,讓賢者而授之,退而巖居川觀,必有伯夷之廉,長為應侯。世世稱孤,而有許由、延陵季子之讓,喬松之壽,孰與以禍終哉?即君何居焉?忍不能自離,疑不能自決,必有四子之禍矣。《易》曰『亢龍有悔』,此言上而不能下,信而不能詘,往而不能自返者也。願君孰計之!」應侯曰:「善。吾聞『欲而不知(止)[足],失其所以欲;有而不知(足)[止],失其所以有』。先生幸教,睢敬受命。』於是乃延入坐,為上客。
後數日,入朝,言於秦昭王曰:「客新有從山東來者曰蔡澤,其人辯士,明於三王之事,五伯之業,世俗之變,足以寄秦國之政。臣之見人甚眾,莫及,臣不如也。臣敢以聞。」秦昭王召見,與語,大說之,拜為客卿。應侯因謝病請歸相印。昭王彊起應侯,應侯遂稱病甐。范睢免相,昭王新說蔡澤計畫,遂拜為秦相,東收周室。
蔡澤相秦數月,人或惡之,懼誅,乃謝病歸相印,號為綱成君。居秦十餘年,事昭王、孝文王、莊襄王。卒事始皇帝,為秦使於燕,三年而燕使太子丹入質於秦。
評論[编辑]
太史公曰:韓子稱「長袖善舞,多錢善賈」,信哉是言也!范睢、蔡澤世所謂一切辯士,然游說諸侯至白首無所遇者,非計策之拙,所為說力少也。及二人羈旅入秦,繼踵取卿相,垂功於天下者,固彊弱之勢異也。然士亦有偶合,賢者多如此二子,不得盡意,豈可勝道哉!然二子不困緦惡能激乎?
【索隱述贊】應侯始困,讬載而西,說行計立,貴平寵稽。倚秦市趙,卒報魏齊。綱成辯智,范睢招攜。勢利傾奪,一言成蹊。
채택은 연(燕)나라 사람이다. 사방에서 유학했고, 크고 작은 여러 나라의 왕에게 유세하여 자리를 얻으려 했으나 능력을 인정받지 못했다. 이에 그는 당거(唐擧)를 찾아가서 관상을 보이면서 “제가 듣기로 선생께서 이태(李兌)의 관상을 봐주면서 그에게 ‘100일 안에 나라 정권을 잡는다.’고 했다는데 맞습니까?”라고 물었다. 당거는 “그렇습니다.”라고 답했다.
이에 채택이 “그럼 제 관상은 어떻소?”라고 묻자 당거가 그를 꼼꼼히 본 다음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선생은 매부리코에 목보다 높은 어깨, 불거져 나온 이마, 복상투처럼 새긴 얼굴, 쭈그러진 콧대에 다리마저 활처럼 휘어 있군요. 제가 듣기에 ‘성인의 상은 봐도 모른다.’고 하던데 아마 선생을 두고 한 말인 것 같습니다.”
채택은 당거가 자신을 비웃는 줄 알고는 “부귀는 본디 갖고 태어나는 것, 나는 수명을 모르니 그것을 듣고 싶소.”라고 했다. 당거가 “선생의 수명은 지금부터 43년을 더 살 수 있소.”라고 했다. 채택이 웃고는 감사의 뜻을 표시하고 떠나면서 자신의 마부에게 말하기를 “내가 쌀밥과 고기반찬에 좋은 말을 타면서 황금으로 된 도장을 품고, 허리에는 붉은 비단 띠를 매고 왕 앞에서 절을 올리면서 녹봉을 받아 부귀하게 살 수 있다면 43년이면 충분하지”라고 했다.
채택이 당거와 헤어져 조나라로 갔으나 쫓겨났다. 한나라와 위나라로 가다가는 도중에 강도를 만나 밥 짓는 도구까지 빼앗겼다. 그런데 응후가 추천한 정안평과 왕계가 모두 진나라에 큰 죄를 짓는 통에 응후가 속으로 죄스러워한다는 말을 들었다. 채택은 바로 서쪽 진나라로 향했다.
그는 소왕과 만나기 위해 사람을 시켜 자기 자랑으로 응후를 자극하려고 “연나라의 유세객 채택은 천하에 뛰어난 유세가이다. 그가 진왕을 만나기만 하면 진왕은 틀림없이 그를 좋아하게 되어 범수가 곤란해질 것이고, 끝내는 범수의 자리를 빼앗을 것이다.”라는 말을 퍼뜨리게 했다.
응후가 이 소문을 듣고 “오제와 삼왕의 사적, 백가의 학설이라면 내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다. 또 유세가들의 교묘한 말들을 내가 다 물리쳤다. 그런데 그가 어찌 나를 곤란하게 만들고 내 자리를 빼앗을 수 있단 말인가.”라 하고는 사람을 보내 채택을 불렀다. 채택이 와서 응후를 만났는데 가볍게만 인사했다.
응후는 당초 기분이 나쁜 상태에서 채택을 만났는데, 채택이 또 매우 오만한 태도를 보였다. 이에 응후는 “그대가 자신을 자랑하며 나를 대신하여 재상이 된다고 큰소리를 치고 다닌다는데 그게 사실이오?”라며 채택을 꾸짖었다. 채택은 “네, 그렇습니다.”라고 했다. 응후는 이에 “그럼 당신 말을 한번 들어봅시다.”라고 하자 채택은 이렇게 말했다.
“어찌 그것을 아직 모르고 계신단 말입니까? 사계절은 서로 돌고 돌아 각자의 일을 마치고 물러갑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몸과 팔다리 성하고, 귀와 눈 밝고, 마음은 지혜로워지는 것, 이것이 뜻을 가진 사람의 바라는 바 아니겠습니까?”
응후가 “그렇소.”라고 하자 채택은 이렇게 말했다.
“어짊을 근본으로 삼고 정의를 가지고 원칙대로 법을 집행하고 덕을 베푼다면 천하에 자기 뜻을 펼치는 것이 되고, 천하 백성들이 기꺼이 그를 존경하고 흠모하여 모두 그 사람이 자신들의 군주가 되길 바란다면 이야말로 지혜와 모략을 가진 유세가가 바라는 바 아니겠습니까?”
응후가 “그렇지”라고 하자 채택은 또 이렇게 말했다.
“부귀영달하고 모든 사물을 조절하여 그것들을 각자 자리에 맞게 잘 안배하고, 요절하지 않고 장수하여 천수를 누리면서 천하가 그 전통을 잇고 그 사업을 지켜 영원히 전해지게 하고, 명성과 실제가 하나가 되어 그 은덕이 멀리 퍼져 대대손손 끊이질 않고 천지와 함께 영원할 수만 있다면 이것이 바로 도를 실천하고 덕을 베푼 결과가 아니고 무엇이며, 성인께서 말하는 상서로운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응후가 “맞는 말이오.”라고 하자 채택은 이렇게 말했다.
“저 진나라의 상군(商君, 상앙), 초나라의 오기(吳起), 월나라의 대 종(種, 문종)과 같은 사람들이라면 뜻있는 사람이 바라고 원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응후는 채택이 자신을 궁지로 몰아 설득할 속셈임을 알아채고는 마음과는 다른 반대의 말을 내세워 이렇게 말했다.
“바라서 안 될 것이 무엇이겠소? 공손앙(상앙)은 진 효공(孝公)을 섬기면서 끝까지 한마음으로 나라에 충정을 다하면서 자신을 뒤돌아보지 않았소. 그는 법령을 만들어 간사함을 근절하고, 상벌을 제대로 실시하여 세상을 바로잡았소. 진정한 마음과 충심을 펼침에 있어서 남의 원한을 사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옛 친구를 속여 위 공자 앙을 사로잡았소. 진나라의 사직을 안정시키고 백성에게 이익을 주는 등 끝까지 진나라를 위해 적의 장수를 잡고 적을 물리치고 땅을 넓혔소.
오기는 초 도왕(悼王)을 섬기면서 사사로운 이익이 공익을 해치지 못하게 하고, 모함하는 자들이 충직한 말을 막지 못하게 했으며, 억지로 말을 꾸미지도 도리에 맞지 않는 행동을 구차히 하지도 않았으며, 위기를 당해서도 원칙을 바꾸지 않고 의를 행함에 어려움을 마다하지 않았소. 군주를 패주로 만들고 나라를 강하게 하는 일이라면 화와 재앙조차 두려워하지 않았소.
대부 종은 월왕을 섬기면서 군주가 곤경에 처하고 치욕을 당하더라도 충성을 다하고 태만하지 않았소. 그는 또 군주의 대가 끊기고 나라가 망하려 할 때도 자기 힘을 다 바치면서 떠나지 않았소. 공업을 이룬 뒤에도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재물과 자리를 욕심내지 않았으며, 교만해하거나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소. 이 세 사람의 행동은 절개의 기준이고, 정절의 모범이 아니겠소?
그러니 군자는 절개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렵더라도 몸을 맡기고, 정의를 위해서는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오. 살아서 욕을 보느니 죽어서 영광을 얻고자 하는 것이오. 뜻있는 사람은 본디 몸을 죽여 이름을 남기고, 정의를 위해 죽음조차 사양하지 않소. 그러니 어찌 이 세 사람이 내가 바라는 사람이 될 수 없겠소?”
이에 채택은 이렇게 말했다.
“군주는 어질고 덕이 있고, 신하는 충성스럽고 현명하면 천하 백성들에게 가장 큰 행복입니다. 군주는 밝고 뛰어나며, 신하는 정직하면 나라의 행복입니다. 부모는 자상하고 자신은 효성스러우며, 남편은 성실하고 믿음이 있고, 아내는 정숙하고 음란하지 않으면 한 집안의 행복입니다.
비간(比干)은 충성스러웠지만 은나라를 보존하지 못했고, 자서(子胥)는 지혜로웠지만 오나라를 보전하지 못했고, 신생(申生)은 효성스러웠지만 진나라가 크게 어지러웠습니다. 이들 모두 충신이자 효자였습니다만 나라와 집안이 어지러워지고 망한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영명한 군주, 현덕한 아비가 없어서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하 사람들은 이런 군주와 아비를 천하다 여기고, 이런 신하와 아들을 가엾게 여긴 것입니다. 상군, 오기, 대부 종은 신하로서 훌륭했지만 그들의 군주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세 사람이 공을 세우고도 자랑하지 않은 것을 칭찬하지만 세상을 만나지 못하고 죽은 것을 부러워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죽은 뒤에 입신공명하는 것이라면 미자(微子)도 어진 사람으로 불리지 못했을 것이고, 공자도 성인이 될 수 없었을 것이며, 관중 역시 위대한 사람이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공을 세움에 있어서 완전함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목숨과 공명을 다 이루는 것이 가장 좋고, 공명은 후대에 모범이 될 만 했으나 목숨을 보전하지 못한 것이 그다음이고, 공명은 치욕스러운데 목숨을 보전한 것이 맨 아래입니다.”
이 말을 들은 응후는 채택의 생각을 칭찬했다. 채택은 비로소 인정을 받고는 그 틈에 “상군, 오기, 대부 종이 신하 된 자로서 충성을 다해 공업을 세운 점은 부러워할 만합니다. 굉요(閎夭)가 주 문왕을 섬기고, 주공이 주 성왕을 보좌한 것 또한 충성스럽고 성스러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원만한 군주와 신하의 사이라는 점에서 볼 때, 상군, 오기, 대부 종 세 사람을 굉요, 주공과 비교하자면 뜻있는 사람이라면 어느 쪽을 바라겠습니까?”라고 묻자 응후는 “상군, 오기, 대부 종은 비교할 바가 못 되오지요.”라고 대답했다.
채택이 “그렇다면 선생의 주상이라면 인자하고 충신들을 믿으며, 옛 친지들을 후하게 대접하고, 어질고 지혜로워서 선비와 굳게 사귀며 의리를 지켜 공신을 배반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진 효공, 초 도왕, 월왕 구천과 비교할 때 어느 쪽이 낫습니까?”라고 물었다. 응후가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소.”라고 했다. 이에 채택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 주상께서 충성스러운 신하를 가까이하심이 진 효공, 초 도왕, 월왕 구천을 넘지는 못하십니다. 군께서 총명한 재능을 펼쳐 주상을 위해 정국을 안정시켜 정치를 바로잡고, 군사를 훈련시켜 난리를 평정하고, 재앙을 물리쳐 어려움을 이겨내고, 땅을 넓혀 농사를 발전시켜 나라 창고를 채우고 백성을 부유하게 만들었습니다. 더욱이 주상의 권력을 강하게 만들어 나라의 위엄을 높이고 왕실을 빛나게 했으니 누가 감히 군의 주상을 업신여기거나 범할 수 있겠습니까? 주상의 명성은 전 중국을 울리고 공업은 만 리 밖에서도 빛이 납니다. 또 그 빛나는 이름은 만대에 전해질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당신을 상군, 오기, 대부 종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응후가 “나는 비교도 안되지요.”라 하자 채택이 다시 이렇게 말했다.
“지금 주상께서 충신을 가까이하고 옛정을 잊지 못하는 것은 진 효공, 초도왕, 월왕 구천에 미치지 못하고, 군의 공적, 총애, 신임 또한 상군, 오기, 대부 종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런데 군의 녹봉은 많고 지위는 높고 가산은 부유하기가 이들 세 사람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군께서 물러나지 않고 그대로 계신다면 아마 군께서 받을 화와 근심은 그 세 사람보다 더 심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이것이 저는 두렵습니다.
속담에 ‘태양이 높이 솟았다가 서쪽으로 지고, 달도 차면 곧 기운다.’라고 했습니다. 사물이 활짝 피어 끝에 이르면 바로 시듭니다. 이는 천지만물의 보편적 법칙입니다. 나아감과 물러남을 때에 적절하게 맞추는 것이 성인의 당당한 도리입니다. 그래서 ‘나라의 정치가 바르면 나아가 벼슬하고, 나라에 도가 행해지지 않으면 물러나 숨는 것이 이치다.’라고 한 것입니다. 성인이 이르시길 ‘현명한 군주가 자리에 있으면 이익은 벼슬하는 사람에게 보인다.’라거나 ‘원칙에서 벗어난 부귀는 내게 뜬구름과 같다.’라 하셨던 것입니다. 지금 군께서는 원한도 은혜도 다 갚았습니다. 마음을 먹은 바도 다 이루셨습니다. 그런데도 시세의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대책을 세우지 않고 계십니다. 공을 위해 도저히 그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물총새, 따오기, 코뿔소, 코끼리 등은 살고 있는 곳이 그렇게 안전하지 않지만 그런대로 천수를 누립니다. 그런데도 잡혀 죽는 것은 먹이에 욕심을 내기 때문입니다. 소진(蘇秦)과 지백(智伯)은 그 재능이 치욕을 피하고 죽음을 멀리하기에 넉넉했음에도 죽은 까닭은 욕심에 홀려 그만 둘 때에 그만두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까닭에 성인은 예법을 정해 욕심을 절제했으며, 백성에게 세금을 거둘 때도 한도가 있었고, 백성을 부릴 때도 한가한 때를 고르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은 지나치지 않고 행동은 교만하지 않아 늘 이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천하는 끊이지 않고 그 전통을 잇고 있습니다.
옛날 제 환공(桓公)은 아홉 번이 제후들을 모아 처음으로 천하를 평정했지만 규구(葵丘)의 회맹에서 자만과 교만으로 자신에게 속해 있던 여러 나라를 배반했습니다. 오왕 부차(夫差)의 군대는 천하무적이었지만 강함을 자랑하고 다른 나라들을 가볍게 보아 제나라와 진(晉)나라를 속였습니다. 그래서 끝내 자신은 죽임을 당하고 나라는 패망했던 것입니다.
하육(夏育)이나 태사교(太史噭)는 성이 나서 한 번 고함을 지르면 삼군이 놀랄 정도의 용사였지만 보잘 것 없는 자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들 모두 공명이 극에 달했음에도 자신을 돌아보아 처세의 이치에 맞는지를 따지지 않았고, 겸손과 검약을 지키지 않다가 화를 초래한 것입니다.
상군은 진 효공을 위해 법령을 다듬어 사악의 뿌리를 막고, 공적의 많고 적음에 따라 상을 내리고, 죄의 크고 작음에 근거하여 벌을 주고, 도량형을 통일하고 시장을 조절했으며, 논밭 사이의 이랑을 정돈하여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풍속을 바로잡았습니다. 백성들에게 농사를 장려하고 토지를 충분히 이용하여 집집마다 농사에 있는 힘을 다하게 하되 다른 쓸데없는 일이 농사에 방해가 되지 않게 했습니다. 이렇게 농사에 힘을 쏟아 식량을 비축하고 병사들을 훈련시키니 전쟁 때마다 땅을 넓혔고, 전쟁이 없을 때는 나라가 부강해졌습니다. 이렇게 진나라는 천하무적이 되어 밖으로 위신을 세우고 진나라의 공업을 이룩했습니다. 그러나 공업을 다 세우자 결국 상군은 사지가 찢기는 형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초나라의 땅은 사방 수천 리에 무장한 병사가 100만에 이르는 큰 나라였으나 백기가 수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초나라와 싸워서 첫 번째에 언(鄢), 영(郢)을 함락시키고 이릉(夷陵)을 불살랐고, 두 번째에는 촉(蜀)나라와 한중(漢中)을 합병했습니다. 또 한나라와 위나라를 넘어 강한 조나라를 쳐서 북방에서 마복군(馬服君)의 아들을 생매장시키고 40만이 넘는 병사들을 모조리 장평성(長平城) 아래에서 죽이니 흐르는 피가 강을 이루고 울부짖는 소리는 하늘을 울렸습니다. 그리고 한단(邯鄲)을 포위, 공격하여 진나라의 제업(帝業)을 위한 기초를 세웠습니다.
원래 초나라와 조나라는 천하의 강국으로 진나라의 원수였지만 이로부터 초나라와 조나라는 모두 굴복하고 감히 진나라를 공격하지 못하니 이는 백기의 위세 때문이었습니다. 백기는 몸소 70여 개의 성을 정복하는 공업을 이루었으나 끝내 왕의 명을 받고 두우(杜郵)에서 자살했습니다.
오기는 초 도왕(悼王)을 위해서 법령을 제정하고 대신의 힘을 약화시켰으며, 무능하고 쓸모없는 신하를 내치고 중요하지 않은 자리를 줄였으며, 사적인 청탁을 물리치고 초나라의 풍속을 하나로 만들어 백성들이 놀고 즐기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농업을 장려하고 군대를 훈련시켜 남으로 양월(楊越)을 되찾고 북으로 진(陳)나라와 채(蔡)나라를 아우르고 연횡이나 합종의 정책을 포기하여 유세를 일삼고 다니는 책사들의 입을 막았으며, 당파 짓는 일을 금하고 백성들을 격려하여 초나라의 정국을 안정시키니 군대는 천하에 용맹함을 떨치고 제후들을 굴복시켜 공업을 이룩했습니다. 그러나 끝내는 능지처참의 형벌을 받았습니다.
대부 종은 월왕을 위해 깊고도 심오한 계책을 세워 회계에서 나라가 망하는 위험을 모면하게 했으며, 멸망할 나라를 되살림으로써 치욕을 영예로 바꾸었습니다. 황무지를 개간하고 마을을 다시 세웠습니다. 땅을 개간하여 곡식을 심고, 사방 인재들을 이끌고 상하의 힘을 모아 현명한 구천을 도와 부차에게 당한 원수를 갚고 강대한 오를 멸망시킴으로써 월나라를 패주로 만들었습니다. 그 공훈은 너무 두드러졌고, 사람들도 다 그를 믿었습니다. 그러나 구천은 끝내 은혜를 저버리고 그를 죽였습니다.
이 네 사람은 공업을 완성하고 물러날 때에 물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화를 당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곧 사람들이 말하는 ‘펴고 굽힐 줄 모르고, 가서 돌아올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범려(範蠡)는 이런 이치를 알았습니다. 초연히 세속을 떠나 오랫동안 스스로를 도주공(陶朱公)이라 불렀습니다.
군께서는 도박하는 사람들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크게 승부를 단번에 내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끈기 있게 조금씩 승부를 내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는 군께서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지금 군은 진나라의 재상을 맡아 앉은 자리에서 계획을 꾸미되 조정을 떠날 필요도 없이 앉은 그곳에서 계책으로 각국을 장악할 수 있습니다. 삼천(三川) 지역을 개척하고, 의양(宜陽)을 충실하게 하고, 구절양장 같은 험한 요새를 돌파해 태항산(太行山)의 길을 막으며, 또 범(范)과 중항(中行)으로 통하는 길을 절단해 여섯 나라로 하여금 연합하지 못하게 하고, 천리나 되는 잔교(棧橋)를 이용해 촉나라와 한중을 연결하니 천하 각국이 모두 진나라를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진나라가 바라던 일은 이루어졌고, 군의 공은 이미 극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진나라는 도박할 때처럼 돈을 나누어 걸어서 이익을 조금씩 취하듯이 해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물러나지 못하면 바로 상군, 백기, 오기, 대부 종과 같은 처지가 됩니다.
저는 ‘물을 거울로 삼으면 얼굴을 볼 수 있고,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길흉을 추측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옛 책에는 ‘공을 이룬 곳에는 오래 머물지 말라.’고 했습니다. 저들 네 사람이 받은 재앙을 군께서 왜 또 이어받으려고 하십니까? 군은 어째서 이 기회에 재상에서 물러나 다른 유능한 사람에게 물려준 다음 바위 밑에서 살면서 물가의 경치를 구경하면서 살려고 하지 않으십니까? 그렇게 하신다면 백이(伯夷), 숙제(叔齊)와 같은 고결하고 아름다운 명성을 들을 것이고, 오래도록 응후라는 작위를 누리면서 대대로 깨끗했다는 칭찬을 들을 것이며, 허유(許由)와 연릉(延陵) 계자(季子)와 같이 사양하는 마음을 지녔다고 칭송받을 것이며, 왕자 교(喬)와 적송자(赤松子)와 같이 장수할 것입니다.
이것과 화를 입고 일생을 마치는 것 어느 쪽이 낫겠습니까? 군께서는 어느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만일 지금의 지위를 떠나는 것이 아까워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신다면 틀림없이 그 네 사람과 같은 화를 당할 것입니다. 『역경』에 ‘끝까지 올라간 용은 뉘우칠 날이 있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오르기만 하고 내려올 줄 모르고, 뻗을 줄만 알고 굽힐 줄을 모르며, 나아가는 것만 알고 돌아설 줄을 모르는 사람을 비유한 말입니다. 이를 숙고하시길 바라옵니다.”
응후는 “좋은 말씀이오, 나 역시 ‘욕심을 부리며 그칠 줄을 모르면 그 욕심부린 것마저 잃고, 차지하기만 하고 만족할 줄 모르면 가진 것조차 잃는다.’는 것을 알고 있소이다. 다행히 선생께서 내게 가르침을 주셨으니 삼가 그것을 따르겠소.”라 하고는 채택을 안으로 맞아들여 상등 빈객으로 우대했다.
며칠 뒤 범수가 조정에 들어가 진 소왕에게 “채택이라는 빈객이 산동에서 저를 찾아왔습니다. 이 사람은 말재주가 뛰어나고, 3왕 5제의 일에 밝고 세속의 변화에 통달하여 진나라의 정무를 맡기기에 충분합니다. 지금까지 신이 만나 본 사람이 수도 없이 많지만 그와 비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신도 그에 미치지 못합니다. 신이 무례를 무릅쓰고 말씀을 올립니다.”라고 했다.
진 소왕이 채택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다음 매우 만족하여 그를 객경에 임명했다. 응후는 이 기회에 병을 핑계로 재상의 도장을 반납했다. 소왕은 응후에게 일을 계속 맡도록 했으나 응후는 병이 심하다며 사양했다. 이렇게 해서 범수는 재상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소왕은 채택의 새로운 계책을 듣고 만족하여 그를 진나라의 재상에 임명했다. 채택은 동으로 주나라 땅을 차지했다.
채택이 진나라의 재상이 된 지 몇 달 뒤 누군가 그를 모함했다. 채택은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 병을 구실로 재상의 도장을 반납했고, 소왕은 강성군에 그를 봉했다. 그는 진나라에 10년 넘게 머무르면서 소왕, 효문왕, 장양왕을 모셨다. 마지막에 진시황을 섬기면서 연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3년 뒤 연나라는 태자 단을 인질로 진나라에 보냈다.
<사마천의 논평>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한비자가 ‘옷소매가 길어야 춤을 잘 추고, 밑천이 많아야 장사를 잘 할 수 있다.’고 했다. 믿을 만한 말이다. 범수와 채택은 사람들이 말하는 ‘일체(一體)변사’들이었다. 그럼에도 여러 나라를 돌면서 백발이 되도록 기회를 못 잡은 것은 계략과 전술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유세한 나라들이 약하고 작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두루 다닌 끝에 진나라에 머무르면서 잇따라 재상이란 높은 벼슬로 천하에 이름을 떨친 것은 그들의 능력이 남보다 강한 반면 타인의 능력이 그들보다 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선비는 우연히 때를 만나는 경우도 있다. 이들 두 사람 못지않은 잘난 사람들도 뜻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러나 이 두 사람도 곤궁한 처지에 빠지지 않았던들 어찌 분발하여 성공할 수 있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