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歷史와文學/史記列傳

史記 卷八一. 廉頗藺相與列傳

柳川 2019. 6. 2. 21:25

                                      廉頗藺相與列傳



廉頗者,趙之良將也。趙惠文王十六年,廉頗為趙將伐齊,大破之,取陽晉,拜為上卿,以勇氣聞於諸侯。藺相如者,趙人也,為趙宦者令繆賢舍人。

趙惠文王時,得楚和氏璧。秦昭王聞之,使人遺趙王書,願以十五城請易璧。趙王與大將軍廉頗諸大臣謀:欲予秦,秦城恐不可得,徒見欺;欲勿予,即患秦兵之來。計未定,求人可使報秦者,未得。宦者令繆賢曰:“臣舍人藺相如可使。”王問:“何以知之?”對曰:“臣嘗有罪,竊計欲亡走燕,臣舍人相如止臣,曰:‘君何以知燕王?’臣語曰:‘臣嘗從大王與燕王會境上,燕王私握臣手,曰“願結友”。以此知之,故欲往。’相如謂臣曰:‘夫趙彊而燕弱,而君幸於趙王,故燕王欲結於君。今君乃亡趙走燕,燕畏趙,其勢必不敢留君,而束君歸趙矣。君不如肉袒伏斧質請罪,則幸得脫矣。’臣從其計,大王亦幸赦臣。臣竊以為其人勇士,有智謀,宜可使。”於是王召見,問藺相如曰:“秦王以十五城請易寡人之璧,可予不?”相如曰:“秦彊而趙弱,不可不許。”王曰:“取吾璧,不予我城,柰何?”相如曰:“秦以城求璧而趙不許,曲在趙。趙予璧而秦不予趙城,曲在秦。均之二策,寧許以負秦曲。”王曰:“誰可使者?”相如曰:“王必無人,臣願奉璧往使。城入趙而璧留秦;城不入,臣請完璧歸趙。”趙王於是遂遣相如奉璧西入秦。

秦王坐章臺見相如,相如奉璧奏秦王。秦王大喜,傳以示美人及左右,左右皆呼萬歲。相如視秦王無意償趙城,乃前曰:“璧有瑕,請指示王。”王授璧,相如因持璧卻立,倚柱,怒髪上沖冠,謂秦王曰:“大王欲得璧,使人發書至趙王,趙王悉召群臣議,皆曰‘秦貪,負其彊,以空言求璧,償城恐不可得’。議不欲予秦璧。臣以為布衣之交尚不相欺,況大國乎!且以一璧之故逆彊秦之驩,不可。於是趙王乃齋戒五日,使臣奉璧,拜送書於庭。何者?嚴大國之威以修敬也。今臣至,大王見臣列觀,禮節甚倨;得璧,傳之美人,以戲弄臣。臣觀大王無意償趙王城邑,故臣復取璧。大王必欲急臣,臣頭今與璧俱碎於柱矣!”相如持其璧睨柱,欲以擊柱。秦王恐其破璧,乃辭謝固請,召有司案圖,指從此以往十五都予趙。相如度秦王特以詐詳為予趙城,實不可得,乃謂秦王曰:“和氏璧,天下所共傳寶也,趙王恐,不敢不獻。趙王送璧時,齋戒五日,今大王亦宜齋戒五日,設九賓於廷,臣乃敢上璧。”秦王度之,終不可彊奪,遂許齋五日,舍相如廣成傳。相如度秦王雖齋,決負約不償城,乃使其從者衣褐,懷其璧,從徑道亡,歸璧于趙

秦王齋五日后,乃設九賓禮於廷,引趙使者藺相如。相如至,謂秦王曰:“秦自繆公以來二十餘君,未嘗有堅明約束者也。臣誠恐見欺於王而負趙,故令人持璧歸,閒至趙矣。且秦彊而趙弱,大王遣一介之使至趙,趙立奉璧來。今以秦之彊而先割十五都予趙,趙豈敢留璧而得罪於大王乎?臣知欺大王之罪當誅,臣請就湯鑊,唯大王與群臣孰計議之。”秦王與群臣相視而嘻。左右或欲引相如去,秦王因曰:“今殺相如,終不能得璧也,而絕秦趙之驩,不如因而厚遇之,使歸趙,趙王豈以一璧之故欺秦邪!”卒廷見相如,畢禮而歸之。

相如既歸,趙王以為賢大夫使不辱於諸侯,拜相如為上大夫。秦亦不以城予趙,趙亦終不予秦璧。

其后秦伐趙,拔石城。明年,復攻趙,殺二萬人。

秦王使使者告趙王,欲與王為好會於西河外澠池。趙王畏秦,欲毋行。廉頗、藺相如計曰:“王不行,示趙弱且怯也。”趙王遂行,相如從。廉頗送至境,與王訣曰:“王行,度道里會遇之禮畢,還,不過三十日。三十日不還,則請立太子為王。以絕秦望。”王許之,遂與秦王會澠池。秦王飲酒酣,曰:“寡人竊聞趙王好音,請奏瑟。”趙王鼓瑟。秦御史前書曰“某年月日,秦王與趙王會飲,令趙王鼓瑟”。藺相如前曰:“趙王竊聞秦王善為秦聲,請奏盆缻秦王,以相娛樂。”秦王怒,不許。於是相如前進缻,因跪請秦王。秦王不肯擊缻。相如曰:“五步之內,相如請得以頸血濺大王矣!”左右欲刃相如,相如張目叱之,左右皆靡。於是秦王不懌,為一擊缻。相如顧召趙御史書曰“某年月日,秦王為趙王擊缻”。秦之群臣曰:“請以趙十五城為秦王壽”。藺相如亦曰:“請以秦之咸陽為趙王壽。”秦王竟酒,終不能加勝於趙。趙亦盛設兵以待秦,秦不敢動。

既罷歸國,以相如功大,拜為上卿,位在廉頗之右。廉頗曰:“我為趙將,有攻城野戰之大功,而藺相如徒以口舌為勞,而位居我上,且相如素賤人,吾羞,不忍為之下。”宣言曰:“我見相如,必辱之。”相如聞,不肯與會。相如每朝時,常稱病,不欲與廉頗爭列。已而相如出,望見廉頗,相如引車避匿。於是舍人相與諫曰:“臣所以去親戚而事君者,徒慕君之高義也。今君與廉頗同列,廉君宣惡言而君畏匿之,恐懼殊甚,且庸人尚羞之,況於將相乎!臣等不肖,請辭去。”藺相如固止之,曰:“公之視廉將軍孰與秦王?”曰:“不若也。”相如曰:“夫以秦王之威,而相如廷叱之,辱其群臣,相如雖駑,獨畏廉將軍哉?顧吾念之,彊秦之所以不敢加兵於趙者,徒以吾兩人在也。今兩虎共鬬,其勢不俱生。吾所以為此者,以先國家之急而後私讎也。”廉頗聞之,肉袒負荊,因賓客至藺相如門謝罪。曰:“鄙賤之人,不知將軍寬之至此也。”卒相與驩,為刎頸之交。

是歲,廉頗東攻齊,破其一軍。居二年,廉頗復伐齊幾,拔之。后三年,廉頗攻魏之防陵、安陽,拔之。后四年,藺相如將而攻齊,至平邑而罷。其明年,趙奢破秦軍閼與下。

趙奢者,趙之田部吏也。收租稅而平原君家不肯出租,奢以法治之,殺平原君用事者九人。平原君怒,將殺奢。奢因說曰:“君於趙為貴公子,今縱君家而不奉公則法削,法削則國弱,國弱則諸侯加兵,諸侯加兵是無趙也,君安得有此富乎?以君之貴,奉公如法則上下平,上下平則國彊,國彊則趙固,而君為貴戚,豈輕於天下邪?”平原君以為賢,言之於王。王用之治國賦,國賦大平,民富而府庫實。

秦伐韓,軍於閼與。王召廉頗而問曰:“可救不?”對曰:“道遠險狹,難救。”又召樂乘而問焉,樂乘對如廉頗言。又召問趙奢,奢對曰:“其道遠險狹,譬之猶兩鼠鬬於穴中,將勇者勝。”王乃令趙奢將,救之。

兵去邯鄲三十里,而令軍中曰:“有以軍事諫者死。”秦軍軍武安西,秦軍鼓譟勒兵,武安屋瓦盡振。軍中候有一人言急救武安,趙奢立斬之。堅壁,留二十八日不行,復益增壘。秦閒來入,趙奢善食而遣之。閒以報秦將,秦將大喜曰:“夫去國三十里而軍不行,乃增壘,閼與非趙地也。”趙奢既已遣秦閒,卷甲而趨之,二日一夜至,今善射者去閼與五十里而軍。軍壘成,秦人聞之,悉甲而至。軍士許歷請以軍事諫,趙奢曰:“內之。”許歷曰:“秦人不意趙師至此,其來氣盛,將軍必厚集其陣以待之。不然,必敗。”趙奢曰:“請受令。”許歷曰:“請就鈇質之誅。”趙奢曰:“胥后令邯鄲。”許歷復請諫,曰:“先據北山上者勝,后至者敗。”趙奢許諾,即發萬人趨之。秦兵后至,爭山不得上,趙奢縱兵擊之,大破秦軍。秦軍解而走,遂解閼與之圍而歸。

趙惠文王賜奢號為馬服君,以許歷為國尉。趙奢於是與廉頗、藺相如同位。

后四年,趙惠文王卒,子孝成王立。七年,秦與趙兵相距長平,時趙奢已死,而藺相如病甐,趙使廉頗將攻秦,秦數敗趙軍,趙軍固壁不戰。秦數挑戰,廉頗不肯。趙王信秦之閒。秦之閒言曰:“秦之所惡,獨畏馬服君趙奢之子趙括為將耳。”趙王因以括為將,代廉頗。藺相如曰:“王以名使括,若膠柱而鼓瑟耳。括徒能讀其父書傳,不知合變也。”趙王不聽,遂將之。

趙括自少時學兵法,言兵事,以天下莫能當。嘗與其父奢言兵事,奢不能難,然不謂善。括母問奢其故,奢曰:“兵,死地也,而括易言之。使趙不將括即已,若必將之,破趙軍者必括也。”及括將行,其母上書言於王曰:“括不可使將。”王曰:“何以?”對曰:“始妾事其父,時為將,身所奉飯飲而進食者以十數,所友者以百數,大王及宗室所賞賜者盡以予軍吏士大夫,受命之日,不問家事。今括一旦為將,東向而朝,軍吏無敢仰視之者,王所賜金帛,歸藏於家,而日視便利田宅可買者買之。王以為何如其父?父子異心,願王勿遣。”王曰:“母置之,吾已決矣。”括母因曰:“王終遣之,即有如不稱,妾得無隨坐乎?”王許諾。

趙括既代廉頗,悉更約束,易置軍吏。秦將白起聞之,縱奇兵,詳敗走,而絕其糧道,分斷其軍為二,士卒離心。四十餘日,軍餓,趙括出銳卒自博戰,秦軍射殺趙括。括軍敗,數十萬之眾遂降秦,秦悉阬之。趙前后所亡凡四十五萬。明年,秦兵遂圍邯鄲,歲餘,幾不得脫。賴楚、魏諸侯來救,乃得解邯鄲之圍。趙王亦以括母先言,竟不誅也。

自邯鄲圍解五年,而燕用栗腹之謀,曰“趙壯者盡於長平,其孤未壯”,舉兵擊趙。趙使廉頗將,擊,大破燕軍於鄗,殺栗腹,遂圍燕。燕割五城請和,乃聽之。趙以尉文封廉頗為信平君,為假相國。

廉頗之免長平歸也,失勢之時,故客盡去。及復用為將,客又復至。廉頗曰:“客退矣!”客曰:“吁!君何見之晚也?夫天下以市道交,君有勢,我則從君,君無勢則去,此固其理也,有何怨乎?”居六年,趙使廉頗伐魏之繁陽,拔之。

趙孝成王卒,子悼襄王立,使樂乘代廉頗。廉頗怒,攻樂乘,樂乘走。廉頗遂奔魏之大梁。其明年,趙乃以李牧為將而攻燕,拔武遂、方城。

廉頗居梁久之,魏不能信用。趙以數困於秦兵,趙王思復得廉頗,廉頗亦思復用於趙。趙王使使者視廉頗尚可用否。廉頗之仇郭開多與使者金,令毀之。趙使者既見廉頗,廉頗為之一飯斗米,肉十斤,被甲上馬,以示尚可用。趙使還報王曰:“廉將軍雖老,尚善飯,然與臣坐,頃之三遺矢矣。”趙王以為老,遂不召。

楚聞廉頗在魏,陰使人迎之。廉頗一為楚將,無功,曰:“我思用趙人。”廉頗卒死于壽春。

李牧者,趙之北邊良將也。常居代鴈門,備匈奴。以便宜置吏,市租皆輸入莫府,為士卒費。日擊數牛饗士,習射騎,謹烽火,多閒諜,厚遇戰士。為約曰:“匈奴即入盜,急入收保,有敢捕虜者斬。”匈奴每入,烽火謹,輒入收保,不敢戰。如是數歲,亦不亡失。然匈奴以李牧為怯,雖趙邊兵亦以為吾將怯。趙王讓李牧,李牧如故。趙王怒,召之,使他人代將。

歲餘,匈奴每來,出戰。出戰,數不利,失亡多,邊不得田畜。復請李牧。牧杜門不出,固稱疾。趙王乃復彊起使將兵。牧曰:“王必用臣,臣如前,乃敢奉令。”王許之。

李牧至,如故約。匈奴數歲無所得。終以為怯。邊士日得賞賜而不用,皆願一戰。於是乃具選車得千三百乘,選騎得萬三千匹,百金之士五萬人,彀者十萬人,悉勒習戰。大縱畜牧,人民滿野。匈奴小入,詳北不勝,以數千人委之。單于聞之,大率眾來入。李牧多為奇陳,張左右翼擊之,大破殺匈奴十餘萬騎。滅襜襤,破東胡,降林胡,單于奔走。其后十餘歲,匈奴不敢近趙邊城。

趙悼襄王元年,廉頗既亡入魏,趙使李牧攻燕,拔武遂、方城。居二年,龐煖破燕軍,殺劇辛。后七年,秦破殺趙將扈輒於武遂,斬首十萬。趙乃以李牧為大將軍,擊秦軍於宜安,大破秦軍,走秦將桓齮。封李牧為武安君。居三年,秦攻番吾,李牧擊破秦軍,南距韓、魏。

趙王遷七年,秦使王翦攻趙,趙使李牧、司馬尚御之。秦多與趙王寵臣郭開金,為反閒,言李牧、司馬尚欲反。趙王乃使趙蔥及齊將顏聚代李牧。李牧不受命,趙使人微捕得李牧,斬之。廢司馬尚。后三月,王翦因急擊趙,大破殺趙蔥,虜趙王遷及其將顏聚,遂滅趙。

太史公曰:知死必勇,非死者難也,處死者難。方藺相如引璧睨柱,及叱秦王左右,勢不過誅,然士或怯懦而不敢發。相如一奮其氣,威信敵國,退而讓頗,名重太山,其處智勇,可謂兼之矣!


염파()는 조()나라의 훌륭한 장수이다. 조() 혜문왕() 16년, 염파는 조나라의 장수가 되어 제()나라를 공격하여 대파하고 양진()을 취함으로써 상경()이 되니 그 용기가 제후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다.

인상여()도 조나라 사람으로 조나라의 환자령() 무현()의 사인()이었다.

조 혜문왕 때 초나라의 화씨벽을 얻었다. 진 소왕이 그 소식을 듣고는 사람을 시켜 조왕에게 편지를 보내 15개의 성으로 벽과 바꾸길 원한다고 했다. 조왕은 대장군 염파와 여러 대신들과 상의했다. 진나라에 주자니 진나라의 성은 얻지 못하고 그냥 속을 것 같고, 주지 않자니 진나라의 군대가 쳐들어 올 것이 걱정이 되어 대책을 결정하지 못했다. 사람을 찾아 진나라로 보내려고 했으나 사람을 찾지 못했다. 환자령 무현이 “신의 사인인 인상여라면 보낼 만합니다.”라고 했다. 왕이 “그것을 어찌 아는가?”라고 물었다. 무현은 이렇게 대답했다.

“신이 일찍이 (왕께) 죄를 지어 몰래 연()나라로 도망갈 계획을 세운 적이 있습니다. 신의 사인 인상여가 신을 말리며 ‘군께서 어떻게 연왕을 알게 되었습니까?’라고 묻기에 신은 ‘전에 대왕을 수행하여 연왕과의 변경 회의에 갔는데 연왕이 조용히 내 손을 쥐면서 친구가 되고 싶다고 한 적이 있어 알게 되어서 가려고 한다.’라고 했습니다. 인상여는 신에게 ‘대저 조나라는 강하고 연나라는 약합니다. 그리고 군께서는 조왕의 총애를 받고 계시기에 연왕이 군과 사귀려고 한 것입니다. 지금 군께서 조나라에서 도망쳐 연나라로 간다면 형세상 군을 감히 머물러 있게 하지 못하고 군을 묶어 조나라로 돌려보낼 것이 분명합니다. 군께서는 웃통을 벗고 형틀을 짊어진 채 (왕께) 죄를 청하느니만 못합니다. 그러면 요행히 죄를 면할지도 모르지요.’라고 했습니다. 신이 그 생각을 따랐고 대왕께도 신을 용서해주셨습니다. 신이 가만히 생각해보건대 그 사람이 용기가 있고 지혜도 있어 보낼 만합니다.”

이에 왕이 불러 인상여에게 “진왕이 15개의 성으로 과인의 벽옥과 바꾸길 원하니 주어야 하오 아니오?”라고 물었다. 인상여는 “진나라는 강하고 조나라는 약하므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왕이 “내 벽옥만 갖고 성은 주지 않으면 어찌 하오?”라고 했다. 상여는 “진나라가 성을 가지고 벽옥을 얻으려는데 조나라가 주지 않으면 잘못은 조나라에 있습니다. 조나라가 벽옥을 주었는데 진나라가 조나라에게 성을 주지 않으면 잘못은 진나라에게 있습니다. 두 대책을 비교해보면 받아들여서 잘못의 책임을 진이 지도록 하는 것이 차라리 낫습니다.”라고 했다.

왕이 “누구를 사신으로 보낼 수 있겠소?”라고 하자 상여는 “왕께 사람이 없다면 신이 벽옥을 가지고 사신으로 가겠습니다. 성이 조나라로 들어오면 벽옥을 진나라에 두고, 성이 들어오지 않으면 신이 벽옥을 온전하게 조나라로 되가지고 오겠습니다.”라고 했다. 조왕이 이에 상여에게 벽옥을 들고 서쪽 진나라로 들어가게 했다.

진왕은 장대()에 앉아 상여를 만났다. 상여가 벽옥을 받들어 진왕에게 올렸다. 진왕은 몹시 기뻐하며 미인과 좌우 신하들에게 돌려 보게 했고, 모두가 만세를 외쳤다. 상여가 보니 진왕은 성을 조나라에 줄 생각이 없었다. 이에 앞으로 나아가 “벽옥에 하자()가 있어 왕께 보여드리고자 합니다.”라고 했다.

진왕이 벽옥을 주자 상여는 벽옥을 쥔 채 물러나 기둥에 기대어 섰는데 화가 나서 머리카락이 관을 들썩거리게 할 정도였다. 그리고는 진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대왕께서 벽옥을 얻고자 하시어 사신을 통해 조왕께 서신을 보내셨고, 조왕께서는 신하들을 모두 모아 상의하니 모두들 ‘진나라는 욕심이 많고 그 힘만 믿고 빈말로 벽옥을 구한다는 것이니 보상으로 주겠다는 성은 얻을 수 없다.’라며 진나라에게 벽옥을 주지 말자고 했습니다. 신은 ‘보통 사람들의 사귐에서도 서로를 속이지 않거늘 하물며 큰 나라가?’라며 ‘벽옥 하나 때문에 강한 진나라의 기쁨을 거스를 수 없다.’며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에 조왕께서는 닷새 동안 목욕재계하시고 신에게 벽옥을 받들게 하고 삼가 국서를 진나라의 조정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큰 나라의 위엄을 생각하여 경의를 나타낸 것입니다. 지금 신이 이르자 대왕께서는 신을 궁전 한편에서 접견하시면서 예절이 아주 형편없었습니다. 벽옥을 받자 미인들에게 돌려보게 하며 신을 희롱하셨습니다. 신이 보니 대왕께서는 조왕께 성읍으로 보상할 뜻이 없기에 신이 다시 벽옥을 돌려받은 것입니다. 대왕께서 기어코 신을 핍박하시겠다면 신은 벽옥과 함께 머리를 기둥에 박아 박살을 낼 것입니다!”

상여가 벽옥을 쥐고 기둥을 노려보더니 기둥에 부딪치려 했다. 진왕은 벽옥이 깨어질까 겁이 나서 거듭 사과하는 한편 담당 관리를 불러 지도를 가지고 오게 해서는 지도를 가리키면서 여기부터 저기까지 15개 성을 조나라에게 주겠다고 했다. 상여는 진왕이 그저 거짓으로 조나라에게 성을 주려고 하는 것이 실제로는 얻을 수 없다는 것을 헤아리고는 진왕에게 “화씨벽옥은 천하가 공인하는 보물입니다만 조왕께서 겁이 나서 감히 드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조왕께서 벽옥을 보내시면서 닷새 동안 목욕재계하셨습니다. 지금 대왕께서도 당연히 닷새 동안 목욕재계한 뒤 조정에 구빈()의 예를 세워 놓으셔야만 신이 벽옥을 바칠 것입니다.”

진왕이 생각해보니 강제로는 빼앗을 수 없어서 마침내 닷새 동안의 목욕재계를 받아들이고 인상여를 광성전()에 묵게 했다. 상여는 진왕이 재계를 하더라도 성을 주겠다는 약속은 저버릴 것이라고 판단하여 바로 수행원에게 거친 옷을 입혀 벽옥을 품고 샛길로 도망쳐 벽옥을 조나라로 도로 가져가게 했다.



진왕은 닷새 동안 재계한 다음 구빈의 조정에 구빈의 예를 갖추어 조나라의 사신 인상여를 안내했다. 상여가 와서는 진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진나라는 목공() 이래 20여 군주들 모두 약속을 분명하게 지킨 적이 없습니다. 신이 왕에게 속아 조나라를 저버릴 것이 정말 두려워 사람을 시켜 벽옥을 돌려보냈습니다. 아마 지금쯤 조나라에 도착했을 겁니다. 그리고 진나라는 강하고 조나라는 약하니 대왕께서 보잘 것 없는 사신 한 사람만 조나라로 보내도 조나라는 즉각 벽옥을 받들고 나올 것입니다. 지금 강한 진나라가 먼저 성 15개를 떼어 조나라에 준다면 조나라가 어찌 감히 벽옥을 내놓지 않으면서 대왕께 죄를 짓겠습니까? 신이 대왕을 속인 죄 죽어 마땅한 줄 알고 있으니 끓는 솥에라도 들어갈 것입니다. 다만 대왕께서 신하들과 심사숙고 상의하시길 바랄 뿐입니다.”

진왕과 신하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놀랐다. 좌우들 중 누구는 상여를 끌어내고자 했지만 진왕은 “지금 상여를 죽여도 벽옥은 끝내 얻지 못할 것이고 조나라와 진나라의 좋은 관계만 끊어질 뿐이오. 이참에 잘 대접해서 조나라로 돌려보내느니만 못할 것이오. 조왕이 벽옥 하나 때문에 진나라를 속이기야 하겠소.”라고 했다.

이에 인상여를 조정에서 접견하여 예를 잘 차려서 돌려보냈다.

상여가 돌아오자 조왕은 (상여가) 현명하게 제후들 사이에서 모욕을 당하지 않게 했다고 여겨서 상여를 상대부에 임명했다. 진나라는 성을 조나라에 주지 않았고, 조나라 역시 끝내 벽옥을 진나라에 주지 않았다.

그 뒤 진나라는 조나라를 정벌하여 석성()을 빼앗았다.

이듬해, 다시 조나라를 공격하여 2만 명을 죽였다.

진왕은 사신을 조왕에게 보내 조왕과 서하(西) 바깥 민지()에서 평화 회담을 하고 싶다고 알렸다. 조왕은 진나라가 겁이 나서 가지 않으려 했다. 염파와 인상여가 상의하여 “왕께서 가지 않으시면 조나라가 약하고 겁이 많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조왕은 결국 떠났고 상여가 수행했다. 염파는 국경까지 전송하여 왕과 헤어지면서 이렇게 말했다.

“왕의 이번 행차는 거리와 회담을 끝내시고 돌아오기까지를 따져보면 30일을 넘지 않을 것입니다. 30일이 지나도록 안 돌아오시면 태자를 왕으로 옹립하여 진나라의 기대를 끊도록 해주십시오.”

왕은 이를 허락하고 드디어 민지에서 진왕과 만났다. 진왕은 술자리가 무르익자 “과인이 가만히 듣자 하니 조왕께서 음악을 좋아한다 하니 거문고를 연주를 청하고자 합니다.”라고 했다.

조왕이 거문고를 연주했다. 진나라의 어사()가 앞으로 나오다니 “모년 모월 모일, 진왕께서 조왕과 함께 술을 마시면서 조왕에게 거문고를 연주하도록 명했다.”라고 적었다.

인상여가 앞으로 나서더니 “조왕께서는 진왕께서 진나라의 음악에 조예가 깊다는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진왕에게 분부(, 장구)를 드려 함께 즐기십사 청하셨습니다.”라고 했다.

진왕이 성을 내며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인상여는 앞으로 나가 분부를 바치며 무릎을 꿇고 진왕에게 요청했다. 진왕은 분부를 두드리려 하지 않았다. 상여는 “다섯 걸음 안이라면 이 상여가 목의 피로 대왕을 적실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라고 했다. 좌우에서 나서 상여를 죽이려 했으나 상여가 눈을 부릅뜨고 고함을 지르자 모두가 뒤로 물러났다.

이에 진왕은 마지못해 분부를 한 번 두드렸다. 상여는 고개를 돌려 조나라의 어사를 불러 “모년 모월 모일, 진왕이 조왕을 위하여 분부를 두드렸다.”라 쓰게 했다.

진나라의 신하들이 “조나라의 성 열다섯 개로 진왕의 장수를 빌었으면 합니다.”라고 하자 인상여 역시 “진나라의 함양으로 조왕의 장수를 빌었으면 합니다.”라고 했다.

진왕이 술자리를 마치도록 끝내 조나라를 제압할 수가 없었다. 조나라 역시 병사를 제대로 배치하여 진나라에 대비함으로써 진나라가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일을 마치고 돌아와서 상여의 공이 컸으므로 상경에 임명하니 자리가 염파보다 위였다. 염파는 “내가 조나라의 장수로서 성을 공격하고 들판에서 싸워 큰 공을 세웠다. 그런데 인상여는 그저 혀를 놀리는 일로 자리가 나보다 높다. 그리고 상여는 본디 천한 사람이니 내가 부끄러워 차마 그 아래에 있을 수 없다.”라 하고는 “내가 상여를 만나면 반드시 욕을 보이리라.”라고 선언했다.

상여가 이 말을 듣고는 (염파와) 부딪치지 않으려 했다. 상여는 입조할 때마다 늘 병을 핑계 댔고, 염파와 자리를 다투려 하지 않았다. 그 뒤 상여가 외출을 하다가 멀리서 염파가 보이자 상여는 마차를 끌고 피하여 숨었다. 그러자 사인들이 모여 이렇게 간했다.

“신들이 친척을 떠나 군을 모신 것은 오로지 군의 고상한 의리를 흠모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군께서는 염파와 같은 반열인데 염파는 대놓고 나쁜 말을 하고 군께서는 그를 두려워하며 피하시니 두려워하시는 것이 너무 심합니다. 이는 보통 사람도 부끄러워하거늘 하물며 장상이야 오죽하겠습니까? 못난 신들은 떠나길 원합니다.”

인상여는 한사코 그들을 제지하며 말했다.

“공들은 염장군과 진왕 중 누가 더 대단하다고 생각하시오?”

“(염장군이) 못하지요.”

“그 진왕의 위세 앞에서 이 상여는 그 조정에서 호통을 쳤고 그 신하들을 욕보였습니다. 상여가 아무리 못났어도 염 장군을 겁내겠습니까? 내가 생각하기에 강한 진나라가 감히 조나라에 대해 군대를 움직이지 못하는 까닭은 오직 우리 두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호랑이 두 마리가 한데 어울려 싸우면 그 기세상 모두 살아남지 못합니다. 내가 그렇게 한 것은 나라의 급한 일이 먼저이고 사사로운 원한은 나중이기 때문입니다.”

염파가 이를 듣고는 웃통을 벗고 가시나무를 등에 진 채 빈객을 통해 인상여의 집 문에 이르러 사죄하며 “이 비천한 자가 장군께서 이토록 너그러우신 줄 몰랐소이다.”라고 했다. 마침내 두 사람은 서로를 좋아하게 되어 목을 내놓아도 아깝지 않을 우정을 나누었다.


이 해, 염파는 동쪽으로 제나라를 공격하여 그 군대 하나를 격파했다.

2년 뒤, 염파는 다시 제나라의 기읍()을 정벌해 함락시켰다.

3년 뒤, 위()나라의 방릉(), 안양()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그 뒤 4년, 인상여가 군대를 이끌고 제나라를 공격하여 평읍()에 이르렀다가 철수했다.

그 이듬해, 조사()가 진나라의 군대를 연여() 부근에서 격파했다.


조사와 조괄


<조사>

조사()는 조()나라의 밭에 대한 세금을 징수하는 관리, 전부리()였다. 세금을 거두는데 평원군의 집안에서 세금을 내려 하지 않아 조사는 법대로 다스려 평원군 집에서 일하는 자 아홉을 죽였다. 평원군이 노하여 조사를 죽이려 했다.

이에 조사는 이렇게 말했다.

“군께서는 조나라의 귀한 공자이십니다. 지금 군의 집안이 공적인 일을 받들지 않으면 법이 깎이고, 법이 깎이면 나라가 약해지며, 나라가 약해지면 제후들이 군대를 일으키고, 제후들이 군대를 일으키면 조나라는 없어질 터인데 군께서는 이 부를 어떻게 누리시렵니까? 귀하신 군께서 공적인 일을 법처럼 받들면 상하가 평안해지고, 상하가 평안해지면 나라가 강해지며, 나라가 강해지면 조나라는 튼튼해질 터이니 군 같은 귀한 공실의 인척을 천하가 어찌 깔보겠습니까?”

평원군은 유능하다고 생각하여 왕에게 그에 대해 말했다. 왕은 그를 기용하여 나라의 세금을 다스리게 하니 나라의 세금이 공평해져 백성은 부유해지고 국고는 충실해졌다.

진()나라가 한()나라를 토벌하려고 연여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왕이 염파를 불러 “구할 수 있겠소? 없겠소?”라고 물었다. (염파가) “길이 멀고 험하고 좁아서 구하기 어렵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다시 악승()을 불러 물었으나 악승의 대답 역시 염파의 말과 같았다. 다시 조사를 불러 물었더니 조사는 “그곳은 길이 멀고 험하고 좁은 곳이라 비유하자면 두 마리의 쥐가 좁은 구멍 안에서 싸우는 것과 같으므로 용감한 자가 이깁니다.”라고 했다. 왕이 이에 조사를 장수로 삼아 연여를 구하게 했다.

군대가 한단()에서 30리쯤 갔을 때 군중에 “군의 일에 대해 간하는 자는 죽일 것이다.”라는 명을 내렸다. 진나라의 군대는 무안() 서쪽에 주둔하고 있었다. 진나라의 군대는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면서 병사들을 다그치는데 무안성 집들의 기와가 모두 흔들렸다. 군중의 척후병 하나가 무안을 서둘러 구하자고 말하자 조사는 바로 그의 목을 잘랐다.

보루를 단단하게 쌓고 28일 동안 나가지 않다가 다시 보루를 더 쌓았다. 진나라의 첩자가 오자 조사는 잘 먹여서 돌려보냈다. 첩자가 진나라의 장수에게 보고하자 진나라의 장수를 크게 기뻐하며 “나라를 떠난 지 30 리에 불과한데 군대를 진군시키지 않고 보루만 증강하고 있다니 인여는 이제 조나라의 땅이 아니다.”라고 했다. 조사는 진나라의 첩자를 돌려보내고는 바로 군사들에게 갑옷을 벗고 서둘러 진군하게 하니 1박 2일 만에 도착했다. 이어 활을 잘 쏘는 병사들을 연여에서 50 리 떨어진 곳에 주둔시켰다. 군의 보루가 완성되었고, 진나라는 이 소식을 듣고 중무장을 하고 진군해왔다. 군사 허력()이라는 자가 군의 일에 대해 간하길 청했다. 조사는 “들이라.”라고 했다. 허력은 이렇게 말했다.

“진나라는 설마 조나라의 군사가 왔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 기세가 사나울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힘을 집중하여 진지를 단단히 지키면서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필패입니다.”

조사가 “의견을 받아들이마.”라 하자 허력은 “부질형()을 내려주십시오.”라고 했고 조사는 “이 일은 나중에 한단에 가서 다시 논의하자.”라고 했다. 이에 허력은 다시 아뢰길 청하며 “먼저 북산()의 정상을 차지하면 이기고 늦게 도착하면 패합니다.”라고 했다. 조사가 이를 받아들이고 바로 만 명을 내어서 달려가게 했다. 진나라의 병사가 늦게 와서 산을 차지하려 했으나 오르지 못했다. 조사는 군대를 풀어 그들을 공격하여 진나라의 군대를 대파했다. 진군은 포위를 풀고 도주하니 마침내 연여의 포위를 풀고 돌아왔다.

조 혜문왕()은 조사에게 마복군()이란 호칭을 내리고, 허력을 국위()에 임명했다. 조사는 이렇게 해서 염파, 인상여와 같은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조사강직하고 지혜로웠던 조사

4년 뒤, 조 혜문왕이 죽고, 아들 효성왕()이 즉위했다.


효성왕 7년, 진과 조나라의 군대가 장평()을 두고 대치했다. 이때 조사는 이미 죽었고, 인상여는 병이 중했다. 조나라는 염파를 장수로 삼아 진나라를 치게 했다. 진나라가 몇 차례 조나라의 군대를 격파했지만 조나라 군은 보루를 단단히 쌓고 싸우지 않았다. 진나라가 계속 도전했지만 염파는 응하지 않았다. 조왕이 진나라의 첩자 말을 듣게 되었다. 진나라의 첩자는 “진나라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오로지 마복군 조사의 아들 조괄()이 장수가 되는 것뿐이다.”라는 말을 퍼뜨렸다. 이에 조왕은 조괄을 장수로 삼아 염파를 대신하게 하려고 했다. 인상여가 말했다.

“왕께서 명성만으로 조괄을 쓰려고 하시는데 이는 아교로 거문고 발을 붙이고 거문고를 연주하려는 것과 같습니다. 조괄은 그저 그 아버지가 전한 책만 읽었을 뿐 임기응변을 모릅니다.”

조왕은 듣지 않고 기어이 그를 장수로 삼았다.



조괄은 어려서부터 병법을 배워 군대의 일을 말하자면 천하에 당할 자가 없었다. 일찍이 아버지 조사와 병법을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조사도 당해내지 못했다. 하지만 잘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조괄의 어머니가 조사에게 그 까닭을 묻자 조사는 “전쟁은 사람이 죽는 곳이오. 그러나 괄은 너무 쉽게 말을 하오. 조가 괄을 장수로 삼지 않으면 그만이겠지만 만약 기어이 그를 장수로 삼겠다면 조나라의 군대를 무너지게 할 자는 틀림없이 조괄일 것이오.”라고 했다. 조괄이 장수가 되어 출정하려 하자 그 어머니는 왕에게 글을 올려 “조괄을 장수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라고 했다. 왕이 “어째서 그렇소?”라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당초 첩이 그 아비를 모실 때 그는 장군이었습니다. 그가 직접 먹이고 마시게 하며 대접하는 사람이 수십 명이었고, 친구는 수백 명이었습니다. 대왕과 종실에서 내리는 상은 모두 군리와 사대부에게 나눠주었고, 명령을 받은 날에는 집안일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괄은 하루아침에 장군이 되자 동쪽을 향해 조회를 받는데 군리들이 감히 그를 올려다보지 못합니다. 왕께서 내리신 돈이며 옷감은 집에다 쌓아 놓고, 날마다 살 만한 싸고 좋은 땅과 집이 없는지 보고는 그것들을 사들입니다. 왕께서는 그 아비에 비해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비와 아들의 마음이 이렇게 다르니 왕께서는 제발 보내지 마십시오!”

왕은 “모친은 그만두시오. 내가 이미 결정했소이다.”라고 했다. 조괄의 어머니는 이에 “왕께서 기어이 그 애를 보내시겠다면, 그 애가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더라도 첩을 연루시키지 않도록 해주십시오.”라고 했다. 왕이 허락했다.

조괄이 염파를 대신하자 규정을 모두 바꾸고 군리들까지 교체했다. 진나라의 장수 백기가 이를 듣고는 기병()을 풀어 패하여 달아나는 척하게 했다. 그러면서 조나라 군대의 식량 보급로를 차단하여 조나라 군대를 둘로 나눔으로써 군사들의 마음을 조괄로부터 떠나게 했다. 40일 넘어 지나자 조나라의 군대는 굶주리기 시작했다. 조괄은 정예 부대를 내세워 직접 전투에 나섰으나 진나라의 군사가 조괄을 쏘아 죽였다. 조괄의 군대는 패하여 수십 만이 드디어 진나라에 항복했고, 진나라는 그들을 모두 구덩이에 파묻어 죽였다.

조나라는 전후 전투에서 45만이 넘는 군사를 잃었다. 이듬해 진나라의 군대가 마침내 한단을 포위했다. 1년 남짓 거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초나라와 위나라가 구원하여 겨우 한단의 포위가 풀렸다. 조왕은 조괄의 어머니가 전에 한 말 때문에 그녀를 죽이지 않았다.

한단의 포위가 풀린 지 5년, 이번에는 연나라가 “조나라의 장정들은 장평에서 다 죽었고, 그들의 어린 자식들은 아직 자라지 않았다.”는 율복()의 건의를 받아들여 군대를 일으켜 조나라를 공격해왔다. 조나라는 염파를 장군으로 삼아 맞아 싸우게 했다. 염파는 연나라의 군대를 호()에서 대파하고 율복을 죽인 다음 마침내 연나라를 포위했다. 연나라는 성 5개를 떼어주며 화친을 청했고 조왕은 이를 받아들였다. 조왕은 위문()이라는 곳에 염파를 봉해 신평군()이라고 하고, 상국()의 대리로 삼았다.

예전에 염파가 장평에서 면직되어 고향으로 돌아옴으로써 권세를 잃자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객들이 모조리 떠났다. 그가 다시 등용되어 장군이 되자 객들이 또다시 찾아왔다. 이에 염파가 “객들은 모두 돌아가라.”라고 하자 한 객이 이렇게 말했다.

“어허! 장군께서는 어찌 그렇게 생각이 어리석으십니까? 지금 세상은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팔 듯 교제합니다. 장군께 권세가 있으면 우리는 장군을 따르고, 권세가 없으면 떠나는 것입니다. 이는 당연한 이치인데 이를 어찌 섭섭하게 여겨 원망하십니까?”

그로부터 6년, 조나라는 염파에게 위나라의 번양()을 공격하게 했고, 염파는 그곳을 함락시켰다.


염파의 만년

조 효성왕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도양왕()이 즉위하여 악승()을 염파 대신 장군에 임명했다. 염파가 노하여 악승을 공격하자 악승은 달아났고, 염파도 결국은 위나라의 대량()으로 달아나 몸을 맡겼다. 그 다음 해, 조나라는 이목()을 장군으로 삼아 연나라를 공격해 무수()와 방성()을 함락시켰다.

염파가 오래 양()나라에 머물렀으나 위나라는 그를 믿고 기용하지 않았다. 조나라는 오랫동안 진나라의 군대 때문에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조왕이 다시 염파를 쓸 생각을 했고, 염파 역시 조나라에 기용되고 싶어 했다. 이에 조왕은 사신을 보내 염파가 아직 쓸모가 있는지를 살피게 했다.

염파와 원수 사이인 곽개()는 사신에게 많은 돈을 주어 염파를 모함하게 했다. 조나라의 사신이 염파를 만났다. 염파는 밥 한 말과 고기 열 근을 먹고는 갑옷을 입고 말에 뛰어올라 아직도 자신이 쓸모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조나라의 사신은 돌아와 왕에게 “염 장군이 늙었지만 밥은 잘 먹습니다. 그러나 신과 같이 앉아 있는 동안 자주 변(오줌)을 지리더군요.”라고 했다. 조왕은 염파과 늙었다고 생각하여 결국 부르지 않았다.

초나라가 위나라에 염파가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몰래 사신을 보내 그를 맞아들였다. 염파는 초나라의 장수가 되었지만 아무 공도 세우지 못한 채 “나는 조나라의 병사들을 지휘하고 싶다.”라고 했다. 염파는 결국 (초나라의) 수춘()에서 죽었다.


이목[ ]    


    이목()은 조나라의 북쪽 국경을 지키는 훌륭한 장수였다. 그는 일찍이 대()나라와 안문()에 주둔하며 흉노()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는 형편에 맞추어 적절히 관리를 배치하고, 시내의 세금은 모두 막부()로 옮기어 병사들의 비용에 충당했다. 그는 날마다 몇 마리의 소를 잡아 병사들에게 먹이며 활쏘기와 말타기 연습을 시켰다. 또한 봉화를 신중하게 준비해두고 많은 첩자들을 풀었고, 전사들을 후하게 대접했다.

    그리고 그는 “흉노가 쳐들어와서 도둑질을 할 경우는 재빨리 들어와 수비를 해라. 만일 적을 사로잡는 자가 있다면 사형에 처할 것이다.”라는 명령을 내렸다. 흉노가 침입할 때마다 봉화를 신중하게 사용하고, 그 신호에 따라 재빨리 성 안으로 들어와 수비를 하며 싸우려고 하지 않았다. 이렇게 몇 해가 지나자 아무런 손해를 보지 않았다. 흉노는 이목을 겁쟁이라고 생각했고, 조나라 변경의 군사들 역시 자신들의 장수를 겁쟁이로 여겼다. 조왕이 이목을 나무랐지만 이목은 여전했다. 조왕이 화가 나서 그를 불러들이고 다른 사람을 대신 장군으로 삼았다.

    그로부터 1년 뒤, 흉노가 쳐들어올 때마다 조나라는 나가서 싸웠다. 출전했지만 불리해서 자주 많은 손해를 입었고 결국 변경에서 농사와 목축은 불가능해졌다. 조나라가 다시 이목을 불렀지만 이목은 문을 닫고 나오지 않으면서 병을 구실로 한사코 사양했다.

    이에 조왕은 억지로 그에게 병사들을 이끌게 했다. 이에 이목은 “왕께서 굳이 신을 기용하시겠다면 신이 예전에 했던 그대로 하게 해주시면 감히 명을 받들겠습니다.”라고 했고 왕은 이를 허락했다.

    이목은 변방에 이르자 전과 같은 군령을 내렸다. 그가 부임하자 흉노는 예전처럼 몇 년 동안 아무런 이익을 얻을 수 없었고, 전과 같이 그를 겁쟁이라고 여겼다. 변방의 장병들은 상을 받고 후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실제 전쟁에 쓰이지 못하고 있자 모두들 한번 싸워보길 바랐다. 이에 이목은 튼튼한 수레 1,300대, 말 13,000마리를 선발했다. 그리고는 전공을 세워 100금을 상으로 탄 용사 5만과 강한 활을 잘 쏘는 병사 10만을 선발하여 하나의 부대로 조직하여 많은 연습을 시켰다. 한편으로는 가축들을 많이 놓아먹이게 하고 들을 백성들로 가득 채웠다.

    흉노가 적은 수의 군대로 먼저 침입하자 이목은 일부러 이기지 못해 달아나는 척하며 병사 몇천 명을 그들에게 버려두었다. (흉노의 우두머리) 선우()가 이 소식을 듣자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이목은 적들이 예상하지 못한 진용을 대대적으로 편성하고, 부대를 좌우 양쪽으로 펼쳐 흉노를 공격함으로써 흉노족 기병 10만여 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 싸움에서 이목은 담람()이라는 부족을 없애버린 후, 동호()를 쳐부수고 임호()를 항복시켰다. 선우는 달아났고, 그 뒤로 10년 넘게 흉노는 조의 국경 근처에는 얼씬거리지 못했다.



    조 도양왕 원년, 염파는 이미 위나라로 망명해 있었다. 조나라는 이목에게 연나라를 공격하게 하여 무수와 방성을 함락시켰다. 그로부터 2년 후, 조나라의 장수 방원()이 연나라의 군대를 격파하고 극신()을 죽였다.

    그로부터 7년 뒤, 진나라는 무수를 격파하여 조나라의 장수 호첩()을 죽이고 병사 10만 명을 살해했다. 그러자 조나라는 이목을 대장군으로 삼아 의안()에서 진나라의 군대를 공격해 대파하니 진나라의 장군 환의()는 패해 달아났다. 이목은 이 공로로 무안군()에 봉해졌다.

    그로부터 3년 후, 진나라가 파오()를 공격해왔으나 이목이 출격해 진나라의 군대를 격파하고 남쪽으로 한과 위나라의 군사를 막았다.

    조왕 천() 7년, 진나라가 왕전()을 보내 조나라를 공격하자 조나라는 이목과 사마상()을 시켜 그들을 막게 했다. 진나라는 조왕이 총애하는 신하인 곽개에게 많은 돈을 주어 이간책을 써서 이목과 사마상이 반란을 꾀하고 있다는 말을 퍼뜨렸다. 이에 조왕은 조총()과 제나라의 장군 안취()를 보내 이목을 대신하게 했다. 그러나 이목이 그 명령에 따르지 않자 조나라는 사람을 보내어 몰래 이목을 정탐하게 하고는 그를 체포해 죽이고, 사마상은 해임했다. 석 달 뒤, 왕전은 신속하게 조나라를 공격해 크게 이기고 조총을 죽였으며, 조왕 천과 그의 장군 안취를 사로잡으니 조나라는 결국 망하고 말았다.


    <사마천의 논평>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 반드시 용기가 솟아나게 된다. 이는 죽는 것 자체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죽음에 대처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인상여()가 화씨벽을 받쳐 들고 기둥을 노려보며 진나라 왕의 좌우를 꾸짖었을 때, 그는 자신이 죽으면 그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선비들 중에는 두려워 감히 행동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인상여는 그 용기로 적국에 그 위신을 떨치고, 물러나 고국으로 돌아와서는 염파()에게 양보하니, 그의 이름은 태산보다 무거웠다. 그는 지혜와 용기를 모두 갖춘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