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歷史와文學/史記列傳

史記 卷九O. 魏豹彭越列傳

柳川 2019. 6. 2. 22:39

魏豹彭越列傳


魏豹

魏豹者,故魏諸公子也。其兄魏咎,故魏時封為寧陵君。秦滅魏,遷咎為家人。陳勝之起王也,咎往從之。陳王使魏人周市徇魏地,魏地已下,欲相與立周市為魏王。周市曰:「天下昏亂,忠臣乃見。今天下共畔秦,其義必立魏王後乃可。」齊、趙使車各五十乘,立周市為魏王。市辭不受,迎魏咎於陳。五反,陳王乃遣立咎為魏王。

章邯已破陳王,乃進兵擊魏王於臨濟。魏王乃使周市出請救於齊、楚。齊、楚遣項它、田巴將兵隨市救魏。章邯遂擊破殺周市等軍,圍臨濟。咎為其民約降。約定,咎自燒殺。

魏豹亡走楚。楚懷王予魏豹數千人,復徇魏地。項羽已破秦,降章邯。豹下魏二十餘城,立豹為魏王。豹引精兵從項羽入關。漢元年,項羽封諸侯,欲有梁地,乃徙魏王豹於河東,都平陽,為西魏王。

漢王還定三秦,渡臨晉,魏王豹以國屬焉,遂從擊楚於彭城。漢敗,還至滎陽,豹請歸視親病,至國,即絕河津畔漢。漢王聞魏豹反,方東憂楚,未及擊,謂酈生曰:「緩頰往說魏豹,能下之,吾以萬戶封若。」酈生說豹。豹謝曰:「人生一世閒,如白駒過隙耳。今漢王慢而侮人,罵詈諸侯群臣如罵奴耳,非有上下禮節也,吾不忍復見也。」於是漢王遣韓信擊虜豹於河東,傳詣滎陽,以豹國為郡。漢王令豹守滎陽。楚圍之急,周苛遂殺魏豹。


彭越

彭越者,昌邑人也,字仲。常漁鉅野澤中,為群盜。陳勝、項梁之起,少年或謂越曰:「諸豪桀相立畔秦,仲可以來,亦效之。」彭越曰:「兩龍方鬬,且待之。」

居歲餘,澤閒少年相聚百餘人,往從彭越,曰:「請仲為長。」越謝曰:「臣不願與諸君。」少年彊請,乃許。與期旦日日出會,後期者斬。旦日日出,十餘人后,後者至日中。於是越謝曰:「臣老,諸君彊以為長。今期而多後,不可盡誅,誅最後者一人。」令校長斬之。皆笑曰:「何至是?請後不敢。」於是越乃引一人斬之,設壇祭,乃令徒屬。徒屬皆大驚,畏越,莫敢仰視。乃行略地,收諸侯散卒,得千餘人。

沛公之從碭北擊昌邑,彭越助之。昌邑未下,沛公引兵西。彭越亦將其眾居鉅野中,收魏散卒。項籍入關,王諸侯,還歸,彭越眾萬餘人毋所屬。漢元年秋,齊王田榮畔項王,乃使人賜彭越將軍印,使下濟陰以擊楚。楚命蕭公角將兵擊越,越大破楚軍。漢王二年春,與魏王豹及諸侯東擊楚,彭越將其兵三萬餘人歸漢於外黃。漢王曰:「彭將軍收魏地得十餘城,欲急立魏後。今西魏王豹亦魏王咎從弟也,真魏後。」乃拜彭越為魏相國,擅將其兵,略定梁地。

漢王之敗彭城解而西也,彭越皆復亡其所下城,獨將其兵北居河上。漢王三年,彭越常往來為漢游兵,擊楚,絕其後糧於梁地。漢四年冬,項王與漢王相距滎陽,彭越攻下睢陽、外黃十七城。項王聞之,乃使曹咎守成皋,自東收彭越所下城邑,皆復為楚。越將其兵北走穀城。漢五年秋,項王之南走陽夏,彭越復下昌邑旁二十餘城,得穀十餘萬斛,以給漢王食。

漢王敗,使使召彭越并力擊楚。越曰:「魏地初定,尚畏楚,未可去。」漢王追楚,為項籍所敗碧陵。乃謂留侯曰:「諸侯兵不從,為之柰何?」留侯曰:「齊王信之立,非君王之意,信亦不自堅。彭越本定梁地,功多,始君王以魏豹故,拜彭越為魏相國。今豹死毋後,且越亦欲王,而君王不蚤定。與此兩國約:即勝楚,睢陽以北至穀城,皆以王彭相國;從陳以東傅海,與齊王信。齊王信家在楚,此其意欲復得故邑。君王能出捐此地許二人,二人今可致;即不能,事未可知也。」於是漢王乃發使使彭越,如留侯策。使者至,彭越乃悉引兵會垓下,遂破楚。(五年)項籍已死。春,立彭越為梁王,都定陶。

六年,朝陳。九年,十年,皆來朝長安。

十年秋,陳豨反代地,高帝自往擊,至邯鄲,徵兵梁王。梁王稱病,使將將兵詣邯鄲。高帝怒,使人讓梁王。梁王恐,欲自往謝。其將扈輒曰:「王始不往,見讓而往,往則為禽矣。不如遂發兵反。」梁王不聽,稱病。梁王怒其太仆,欲斬之。太仆亡走漢,告梁王與扈輒謀反。於是上使使掩梁王,梁王不覺,捕梁王,囚之雒陽。有司治反形己具,請論如法。上赦以為庶人,傳處蜀青衣。西至鄭,逢呂后從長安來,欲之雒陽,道見彭王。彭王為呂后泣涕,自言無罪,願處故昌邑。呂后許諾,與俱東至雒陽。呂后白上曰:「彭王壯士,今徙之蜀,此自遺患,不如遂誅之。妾謹與俱來。」於是呂后乃令其舍人告彭越復謀反。廷尉王恬開奏請族之。上乃可,遂夷越宗族,國除。

評論

太史公曰:魏豹、彭越雖故賤,然已席卷千里,南面稱孤,喋血乘勝日有聞矣。懷畔逆之意,及敗,不死而虜囚,身被刑戮,何哉?中材已上且羞其行,況王者乎!彼無異故,智略絕人,獨患無身耳。得攝尺寸之柄,其雲蒸龍變,欲有所會其度,以故幽囚而不辭云。

【索隱述贊】魏咎兄弟,因時而王。豹後屬楚,其國遂亡。仲起昌邑,歸漢外黃。往來聲援,再續軍糧。徵兵不往,菹醢何傷。




위표()는 옛날 위() 공자였다. 그 형 위구()는 옛날 위 시절에 영릉군()에 봉해졌다. 진()이 위를 멸망시키자 위구는 평민으로 떨어졌다.

진승()이 일어나 왕이 되자 위구가 가서 그를 따랐다. 진왕()은 위 사람 주불()에게 위 땅을 공략하게 하여 위의 땅을 함락시켰다. 이에 서로 주불을 위왕으로 옹립하고자 했다. 주불은 “천하가 혼란하면 충신이 나타납니다. 지금 천하가 함께 진에 반대하고 나섰으니 의리상 위왕의 후손을 옹립하는 것이 옳습니다.”라고 했다.

제, 조가 각각 수레 50승을 갖추어 주불을 위왕으로 옹립했다. 주불은 사양하며 받지 않아서 위구를 진()에서 맞아 들였다. 다섯 번 오가고서야 진왕은 사람을 보내 위구를 위왕으로 세웠다.

장한()은 진왕을 격파한 뒤 바로 군대를 진격시켜 임제()에서 위왕을 공격했다. 위왕은 주불에게 제, 초에 구원을 청하게 했다. 제, 초는 항타()와 전파()에게 군대를 거느리고 주불을 따라 위를 구하게 했다. 장한은 끝내 주불 등의 군대를 공격하여 주불을 죽이고 임제를 포위했다. 위구는 백성들을 위해 항복하기로 약속했다. 약속이 이루어지자 위구는 분신자살했다.

위표는 초로 도망쳤다. 초 회왕()은 위표에게 수천 명을 주고 다시 위 지역을 공략하게 했다. 항우()는 이미 진()을 격파하고 장한을 항복시켰다. 위표는 위의 20여 개 성을 함락시켰다. (항우가) 위표를 위왕으로 세웠다. 위표는 정예 병사를 이끌고 항우를 따라 함곡관()에 들어갔다.

한() 원년, 항우는 제후들을 봉하고 양()의 땅을 갖고 싶어 위왕 표를 하동()으로 옮기고는 평양()에 도읍하게 하여 서위왕(西)이 되게 했다.

한왕()이 삼진()을 평정하고 돌아오면서 임진()을 건너자 위왕 표는 나라를 들어 귀순하고 그를 따라 팽성()에서 초를 공격했다. 한이 패하여 형양()으로 물러나자, 위표는 부모의 병을 돌본다는 구실로 귀국을 청하여 나라에 이르자 황하의 나루를 끊고 한에 등을 돌렸다.

한왕이 위표의 반란 소식을 들었으나 마침 동쪽의 초를 걱정하던 차라 공격하지 못하고 역생()에게 “당신이 가서 위표를 설득해서 투항시키면 내가 1만 호로 당신을 봉하리라.”라고 했다. 역생이 위표를 설득했으나 위표는 거절하며 “인간의 세상사란 것이 백마가 좁은 틈을 지나가는 것과 같다. 지금 한왕은 거만하고 사람에게 모욕을 주며, 제후와 신하들 욕하기를 마치 노예에게 욕하는 것 같아 위아래의 예절이 없다. 내가 차마 더는 못 보겠다”라고 했다.

이에 한왕은 한신()을 보내어 하동()에서 위표를 사로잡아 역마로 형양에 보내는 한편 위표의 나라는 군으로 삼았다. 한왕은 위표에게 형양을 지키게 했다. 초가 형양을 포위하여 위급해지자 주가()가 마침내 위표를 죽였다.


팽월[ ]    


팽월()은 창읍() 사람으로 자()를 중()이라 했다. 늘 거야택()에서 물고기를 잡으면서 도둑떼가 되었다. 진승(), 항량()의 기의 때 소년들 중 누군가 팽월에게 “여러 호걸들이 서로 일어나 진()에 반항하는데 팽월 당신도 그들을 따라 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팽월은 “두 마리 용이 바야흐로 싸우고 있으니 잠시 기다립시다.”라고 했다.

1년 남짓 지나자 거야택 지역의 소년들 100여 명이 모여 팽월을 찾아가서 “당신이 우두머리가 되어 주십시오.”라고 했다. 팽월은 “나는 너희들과 함께 하길 원치 않는다.”라고 했다. 소년들이 강권하자 그제야 받아들였다. 이튿날 해가 뜰 때 만나되 늦게 오는 자는 목을 베기로 했다. 이튿날 해가 뜨고 10여 명이 늦게 왔는데, 가장 늦은 자는 해가 중천에 떴을 때였다. 이에 팽월은 “내가 늙었는데도 여러분들이 강제로 우두머리를 시켰다. 지금 시간을 약속하고도 많은 사람이 늦었다. 다 죽일 수는 없으니 가장 늦은 한 사람의 목을 베겠다.”라고 하고는 대장에게 목을 베게 했다. 모두들 웃으면서 “그렇게 할 필요가 있습니까? 앞으로는 감히 그러질 못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팽월은 한 사람을 끌어내어 목을 베고는 단을 만들어 제사를 지낸 다음 따르는 무리들에게 명령했다. 무리들은 모두 크게 놀랐고, 팽월이 두려워 감히 올려다 보질 못했다. 가는 곳마다 땅을 공략하고 제후들에게서 흩어진 병졸을 수습하여 천여 명을 얻었다.

패공()이 탕현()에서 북으로 창읍을 공격하자 팽월이 이를 도왔다. 창읍이 함락되지 않자 패공은 병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갔다. 팽월도 그의 무리를 거느리고 거야()를 거점으로 위()의 흩어진 병사들을 수습했다. 항적(, 항우)이 함곡관에 들어가서 제후들을 왕으로 봉하니 제후들은 (자신들의 나라로) 되돌아갔다. 팽월의 무리 만 여 명은 갈 곳이 없었다.

한() 원년 가을, 제왕() 전영()이 항왕에게 반기를 들자 사람을 보내어 팽월에게 장군의 도장을 주고 남쪽으로 제음()을 내려와 초를 공격하게 했다. 초는 소공() 각()에게 병사를 거느리고 팽월을 공격하라 명령했으나 팽월은 초의 군대를 대파했다.

한왕 2년 봄, 위왕 위표 및 제후들이 동쪽으로 초를 치자 팽월은 그의 병사 3만여 명을 거느리고 외황()에서 한에 투항했다. 한왕은 “팽장군이 위의 지역을 수습하여 10여 개의 성을 얻었다. 지금 서위왕(西) 위표 또한 위왕 위구의 종제이니 진짜 위의 후손이다”라 하고는 팽월을 위의 상국()에 임명하고 그 군대를 독자적으로 거느리고 양() 지역을 공략하여 평정하게 했다.

한왕이 팽성()에서 패해 흩어져 서쪽으로 도주하고 팽월이 차지했던 성들도 모두 다시 잃자 (유방은) 홀로 그 군대를 거느리고 북쪽 황하 연안에 주둔했다.

한왕 3년, 팽월은 늘 한의 유격병이 되어 여기저기를 오가며 초를 공격하여 후방 양 지역의 식량 보급로를 끊었다.

한 4년 겨울, 항왕과 한왕이 형양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을 때 팽월은 수양(), 외황 등 17개의 성을 함락시켰다. 항왕이 이를 듣고는 조구()에게 성고()를 지키게 하고, 동쪽에서 팽월이 함락한 성읍들을 수습하여 초로 복구시켰다. 팽월은 그 군대를 거느리고 북쪽 곡성()으로 달아났다.

한 5년 가을, 항왕이 남쪽 양하()로 물러나자 팽월은 다시 창읍 부근 20여 개의 성을 함락시키고 10여 만 곡()의 곡식을 얻어서 한왕의 군량으로 공급했다.

한왕이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팽월을 불러 함께 초를 공격하자고 했으나 팽월은 “위 지역을 막 평정한 터이고 아직 초를 두려워하고 있으니 갈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한왕이 초를 추격하다가 항적에게 고릉()에서 패했다. 이에 유후(, 장량)에게 “제후의 군대가 따르지 않으니 어찌 하면 좋소?”라고 하자 유후는 이렇게 말했다.

“제왕() 한신의 즉위는 왕의 뜻이 아니었고 한신 역시 스스로 확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팽월은 본래 양 지역을 평정하여 공이 많음에도 당초 왕께서 위표 때문에 팽월을 위의 상국으로 삼았을 뿐입니다. 지금 위표는 죽고 후사가 없는데다 팽월이 왕이 되고 싶어 하는데 왕께서는 일찍 결정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이 둘과 이렇게 약속하십시오. 만약 초에게 승리한다면 수양에서 북쪽 곡성에 이르는 곳을 모두 팽월에게 주어 왕으로 삼고, 진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는 지역은 제왕 신에게 준다고 말입니다. 제왕 신의 집이 초에 있기 때문에 그는 옛 읍을 다시 얻으려 할 것입니다. 왕께서 두 지역을 두 사람에게 줄 수 있다면 두 사람은 지금 당장 달려올 것이고, 그렇게 못하신다면 일이 어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이에 한왕은 사신을 팽월에게 보내 유후의 계책대로 했다. 사신이 오자 팽월은 바로 모든 병사를 이끌고 회하()에서 싸워 마침내 초를 격파했다. 항적은 죽었다. 봄, 팽월을 양왕()으로 세우고 정도()를 도읍으로 삼았다.

한 6년, (팽월이) 진()에 와서 (한왕을) 조회했다.

9년과 10년에는 장안()에 와서 조회했다.

한 10년 가을, 진희()가 대() 땅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고조가 몸소 가서 공격하고 한단()에 이르러 양왕에게서 병사를 징발하려 했다. 양왕은 병을 핑계 대고 자기 장수에게 병사를 이끌고 한단으로 가게 했다. 고제가 노하여 사람을 보내 양왕을 꾸짖었다. 양왕이 겁이 나서 직접 가서 사죄하려 했다. 그 장수 호첩()이 “왕께서 당초 가지 않으셨는데 꾸지람을 들었다고 가신다면 붙잡힐 것입니다. 군대를 일으켜 반란하시느니만 못합니다”라고 했다. 양왕은 듣지 않고 병을 핑계 댔다.

양왕이 그 태복()에게 화난 일이 있어 그를 죽이려 했다. 태복이 한으로 도망쳐서 양왕과 호첩이 반란을 꾀한다고 일렀다. 이에 주상은 사람을 보내 기습적으로 양왕을 체포하게 했다. 양왕이 이를 알아채지 못해 양왕를 체포하여 낙양에 가두었다. 관련 기관에서 반란을 조사하니 그 상황이 드러나서 법대로 처리하길 청했다.

주상은 그를 용서하고 서인으로 강등시켜 역참의 수레로 촉()의 청의현()으로 보냈다. 서쪽 정()에 이르렀을 때 장안에서 오던 여후()와 마주쳤다. 낙양으로 가다가 길에서 팽월을 본 것이다. 팽월은 여후에게 울면서 자신이 무죄라고 말하고는 고향 창읍에서 살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여후가 허락하고 데리고 함께 동쪽 낙양에 이르렀다. 여후가 주상에게 “팽월은 장사인데 지금 촉으로 옮겨 후환을 남기느니 죽이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첩이 그래서 데리고 왔습니다.”라고 했다. 이에 여후는 팽월의 사인에게 팽월이 다시 반란을 꾀했다고 고발하게 했다. 정위() 왕염개()가 그 일족을 모두 죽이자고 아뢰자 주상은 이를 받아들였다. 마침내 팽월의 종족을 멸하고 나라도 없앴다.


<사마천의 논평>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위표()와 팽월()이 과거에는 천했지만 천 리를 석권하고 남면하여 왕을 칭했다. 피를 밟고 승리하니 날로 명성이 높아졌다. 반역의 뜻을 품고 패하고도 죽지 않고 잡혀서 형벌을 받고 죽었으니 왜 그랬던가? 중간 정도의 자질을 가진 사람도 이런 행동을 부끄럽게 여기거늘 하물며 왕이야! 거기에 다른 까닭은 없다. 그들은 지략이 남달랐지만 그저 자신의 몸만 걱정하면서 작지만 권력을 움켜쥐고 있으면 예측하기 힘든 풍운이 몰아치는 와중에서 큰일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갇힌 죄수가 되길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