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歷史와文學/史記列傳

史記 卷九三. 韓信盧綰列傳

柳川 2019. 6. 2. 22:42

韓信盧綰列傳



韓王信

韓王信者,故韓襄王孽孫也,長八尺五寸。及項梁之立楚後懷王也,燕、齊、趙、魏皆已前王,唯韓無有後,故立韓諸公子橫陽君成為韓王,欲以撫定韓故地。項梁敗死定陶,成奔懷王。沛公引兵擊陽城,使張良以韓司徒降下韓故地,得信,以為韓將,將其兵從沛公入武關。

沛公立為漢王,韓信從入漢中,乃說漢王曰:「項王王諸將近地,而王獨遠居此,此左遷也。士卒皆山東人,跂而望歸,及其鋒東鄉,可以爭天下。」漢王還定三秦,乃許信為韓王,先拜信為韓太尉,將兵略韓地。

項籍之封諸王皆就國,韓王成以不從無功,不遣就國,更以為列侯。及聞漢遣韓信略韓地,乃令故項籍游吳時吳令鄭昌為韓王以距漢。漢二年,韓信略定韓十餘城。漢王至河南,韓信急擊韓王昌陽城。昌降,漢王乃立韓信為韓王,常將韓兵從。三年,漢王出滎陽,韓王信、周苛等守滎陽。及楚敗滎陽,信降楚,已而得亡,復歸漢,漢復立以為韓王,竟從擊破項籍,天下定。五年春,遂與剖符為韓王,王潁川。

明年春,上以韓信材武,所王北近鞏、洛,南迫宛、葉,東有淮陽,皆天下勁兵處,乃詔徙韓王信王太原以北,備御胡,都晉陽。信上書曰:「國被邊,匈奴數入,晉陽去塞遠,請治馬邑。」上許之,信乃徙治馬邑。秋,匈奴冒頓大圍信,信數使使胡求和解。漢發兵救之,疑信數閒使,有二心,使人責讓信。信恐誅,因與匈奴約共攻漢,反,以馬邑降胡,擊太原。

七年冬,上自往擊,破信軍銅鞮,斬其將王喜。信亡走匈奴。(與)其與白土人曼丘臣、王黃等立趙苗裔趙利為王,復收信敗散兵,而與信及冒頓謀攻漢。匈奴仗左右賢王將萬餘騎與王黃等屯廣武以南,至晉陽,與漢兵戰,漢大破之,追至于離石,復破之。匈奴復聚兵樓煩西北,漢令車騎擊破匈奴。匈奴常敗走,漢乘勝追北,聞冒頓居代(上)谷,高皇帝居晉陽,使人視冒頓,還報曰「可擊」。上遂至平城。上出白登,匈奴騎圍上,上乃使人厚遺閼氏。閼氏乃說冒頓曰:「今得漢地,猶不能居;且兩主不相緱」居七日,胡騎稍引去。時天大霧,漢使人往來,胡不覺。護軍中尉陳平言上曰:「胡者全兵,請令彊弩傅兩矢外向,徐行出圍。」入平城,漢救兵亦到,胡騎遂解去。漢亦罷兵歸。韓信為匈奴將兵往來擊邊。

漢十年,信令王黃等說誤陳豨。十一年春,故韓王信復與胡騎入居參合,距漢。漢使柴將軍擊之,遺信書曰:「陛下寬仁,諸侯雖有畔亡,而復歸,輒復故位號,不誅也。大王所知。今王以敗亡走胡,非有大罪,急自歸!」韓王信報曰:「陛下擢仆起閭巷,南面稱孤,此仆之幸也。滎陽之事,仆不能死,囚於項籍,此一罪也。及寇攻馬邑,仆不能堅守,以城降之,此二罪也。今反為寇將兵,與將軍爭一旦之命,此三罪也。夫種、蠡無一罪,身死亡;今仆有三罪於陛下,而欲求活於世,此伍子胥所以僨於吳也。今仆亡匿山谷閒,旦暮乞貸蠻夷,仆之思歸,如痿人不忘起,盲者不忘視也,勢不可耳。」遂戰。柴將軍屠參合,斬韓王信。

信之入匈奴,與太子俱;及至穨當城,生子,因名曰穨當。韓太子亦生子,命曰嬰。至孝文十四年,穨當及嬰率其眾降漢。漢封穨當為弓高侯,嬰為襄城侯。吳楚軍時,弓高侯功冠諸將。傳子至孫,孫無子,失侯。嬰孫以不敬失侯。穨當孽孫韓嫣,貴幸,名富顯於當世。其弟說,再封,數稱將軍,卒為案道侯。子代,歲餘坐法死。後歲餘,說孫曾拜為龍頟侯,續說後。


盧綰

盧綰者,豐人也,與高祖同里。盧綰親與高祖太上皇相愛,及生男,高祖、盧綰同日生,里中持羊酒賀兩家。及高祖、盧綰壯,俱學書,又相愛也。里中嘉兩家親相愛,生子同日,壯又相愛,復賀兩家羊酒。高祖為布衣時,有吏事辟匿,盧綰常隨出入上下。及高祖初起沛,盧綰以客從,入漢中為將軍,常侍中。從東擊項籍,以太尉常從,出入臥內,衣被飲食賞賜,群臣莫敢望,雖蕭曹等,特以事見禮,至其親幸,莫及盧綰。綰封為長安侯。長安,故咸陽也。

漢五年冬,以破項籍,乃使盧綰別將,與劉賈擊臨江王共尉,破之。七月還,從擊燕王臧荼,臧荼降。高祖已定天下,諸侯非劉氏而王者七人。欲王盧綰,為群臣觖望。及虜臧荼,乃下詔諸將相列侯,擇群臣有功者以為燕王。群臣知上欲王盧綰,皆言曰:「太尉長安侯盧綰常從平定天下,功最多,可王燕。」詔許之。漢五年八月,乃立虜綰為燕王。諸侯王得幸莫如燕王。

漢十一年秋,陳豨反代地,高祖如邯鄲擊豨兵,燕王綰亦擊其東北。當是時,陳豨使王黃求救匈奴。燕王綰亦使其臣張勝於匈奴,言豨等軍破。張勝至胡,故燕王臧茶子衍出亡在胡,見張勝曰:「公所以重於燕者,以習胡事也。燕所以久存者,以諸侯數反,兵連不決也。今公為燕欲急滅豨等,豨等已盡,次亦至燕,公等亦且為虜矣。公何不令燕且緩陳豨而與胡和?事寬,得長王燕;即有漢急,可以安國。」張勝以為然,豨私令匈奴助豨等擊燕。燕王綰疑張勝與胡反,上書請族張勝。勝還,具道所以為者。燕王寤,乃詐論它人,脫勝家屬,使得為匈奴閒,而陰使范齊之陳豨所,欲令久亡,連兵勿決。

漢十二年,東擊黥布,豨常將兵居代,漢使樊噲擊斬豨。其裨將降,言燕王綰使范齊通計謀於豨所。高祖使使召盧綰,綰稱病。上又使辟陽侯審食其、御史大夫趙堯往迎燕王,因驗問左右。綰愈恐,閉匿,謂其幸臣曰:「非劉氏而王,獨我與長沙耳。往年春,漢族淮陰,夏,誅彭越,皆呂后計。今上病,屬任呂后。呂后婦人,專欲以事誅異姓王者及大功臣。」乃遂稱病不行。其左右皆亡匿。語頗泄,辟陽侯聞之,歸具報上,上益怒。又得匈奴降者,降者言張勝亡在匈奴,為燕使。於是上曰:「盧綰果反矣!」使樊噲擊燕。燕王綰悉將其宮人家屬騎數千居長城下,侯伺,幸上病愈,自入謝。四月,高祖崩,盧綰遂將其眾亡入匈奴,匈奴以為東胡盧王。綰為蠻夷所侵奪,常思復歸。居歲餘,死胡中。

高后時,盧綰妻子亡降漢,會高后病,不能見,舍燕邸,為欲置酒見之。高祖竟崩,不得見。盧綰妻亦病死。

孝景中六年,盧綰孫他之,以東胡王降,封為亞谷侯。

陳豨

陳豨者,宛朐人也,不知始所以得從。及高祖七年冬,韓王信反,入匈奴,上至平城還,乃封豨為列侯,以趙相國將監趙、代邊兵,邊兵皆屬焉。

豨常告歸過趙,趙相周昌見豨賓客隨之者千餘乘,邯鄲官舍皆滿。豨所以待賓客布衣交,皆出客下。豨還之代,周昌乃求入見。見上,具言豨賓客盛甚,擅兵於外數歲,恐有變。上乃令人覆案豨客居代者財物諸不法事,多連引豨。豨恐,陰令客通使王黃、曼丘臣所。及高祖十年七月,太上皇崩,使人召豨,豨稱病甚。九月,遂與王黃等反,自立為代王,劫略趙、代。

上聞,乃赦趙、代吏人為豨所詿誤劫略者,皆赦之。上自往,至邯鄲,喜曰:「豨不南據漳水,北守邯鄲,知其無能為也。」趙相奏斬常山守、尉,曰:「常山二十五城,豨反,亡其二十城。」上問曰:「守、尉反乎?」對曰:「不反。」上曰:「是力不足也。」赦之,復以為常山守、尉。上問周昌曰:「趙亦有壯士可令將者乎?」對曰:「有四人。」四人謁,上謾罵曰:「豎子能為將乎?」四人慚伏。上封之各千戶,以為將。左右諫曰:「從入蜀、漢,伐楚,功未遍行,今此何功而封?」上曰:「非若所知!陳豨反,邯鄲以北皆豨有,吾以羽檄徵天下兵,未有至者,今唯獨邯鄲中兵耳。吾胡愛四千戶封四人,不以慰趙子弟!」皆曰:「善。」於是上曰:「陳豨將誰?」曰:「王黃、曼丘臣,皆故賈人。」上曰:「吾知之矣。」乃各以千金購黃、臣等。

十一年冬,漢兵擊斬陳豨將侯敞、王黃於曲逆下,破豨將張春於聊城,斬首萬餘。太尉勃入定太原、代地。十二月,上自擊東垣,東垣不下,卒罵上;東垣降,卒罵者斬之,不罵者黥之。更命東垣為真定。王黃、曼丘臣其麾下受購賞之,皆生得,以故陳豨軍遂敗。

上還至洛陽。上曰:「代居常山北,趙乃從山南有之,遠。」乃立子恒為代王,都中都,代、鴈門皆屬代。

高祖十二年冬,樊噲軍卒追斬豨於靈丘。

評論

太史公曰:韓信、盧綰非素積德累善之世,徼一時權變,以詐力成功,遭漢初定,故得列地,南面稱孤。內見疑彊大,外倚蠻貊以為援,是以日疏自危,事窮智困,卒赴匈奴,豈不哀哉!陳豨,梁人,其少時數稱慕魏公子;及將軍守邊,招致賓客而下士,名聲過實。周昌疑之,疵瑕頗起,懼禍及身,邪人進說,遂陷無道。於戲悲夫!夫計之生孰成敗於人也深矣!

【索隱述贊】韓襄遺孽,始從漢中。剖符南面,徙邑北通。穨當歸國,龍雒有功。盧綰親愛,群臣莫同。舊燕是王,東胡計窮。




<한신>
한왕() 신()은 본래 한 양왕()의 얼손()인데, 키가 여덟 자 다섯 치나 되었다. 항량()이 초()의 후예를 회왕()으로 세우게 되자, 연()·조()·위()도 모두 이전의 왕의 후예가 다시 왕이 되었다. 오직 한()만이 후사가 없었다. 그래서 한의 여러 공자()들 가운데 횡양군() 성()을 세워 한왕()으로 삼아, 한의 옛 땅을 회복하려고 했다. 항량이 정도()에서 패해 죽으니, 성이 회왕에게 달아났다.

패공()이 군대를 거느리고 양성()을 치고, 장량()을 한의 사도()로 삼아 한()의 옛 땅을 평정하게 했다. 이때 한신을 만나 한의 장수로 삼자 병사를 거느리고 패공을 따라 무관()으로 들어갔다.

패공이 즉위해 한왕()이 되자, 한신()이 한왕을 따라 한중()으로 들어가서 한왕에게 “항우는 여러 장수들을 가까운 땅의 왕으로 봉했습니다. 그런데 왕께서만 홀로 멀리 이곳에 있으니, 이는 좌천입니다. 사졸들은 모두 산동() 사람으로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발돋움하며 바라고 있습니다. 칼날을 동쪽으로 향하신다면 천하를 다툴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설득했다.

한왕()이 군사를 돌려 삼진()을 평정하고, 신()에게 한왕()이 되는 것을 허락했다. 그에 앞서 신()을 한()나라의 태위()에 제수해 군대를 이끌고 한()의 땅을 공략하게 했다.

항적(, 항우)이 여러 왕을 봉해주자, 모두 봉해진 나라로 갔다. 그러나 한왕() 성()은 따르지 않아 공을 세우지 못해서 봉국을 받지 못하고 다시 열후()가 되었다. 한()이 한신()을 시켜 한()의 옛 땅을 공략하게 한다는 말을 들은 항우는 옛날 오()에 머물 때의 오의 영()인 정창()을 한왕()으로 삼아 한을 막게 했다.

한 2년에 한신()이 한()의 10여 성을 공략해 평정했다. 한왕()이 하남()에 이르자, 한신()이 급히 한왕() 창()을 양성()에서 공격했다. 창이 항복하자, 한왕()이 한신()을 한왕()에 봉했다. 한신은 언제나 한()나라 군대를 거느리고 수행했다.

한 3년에 한왕()이 형양()을 나가자, 한왕() 신()과 주가() 등이 형양을 지켰다. 초가 형양을 깨뜨리자 한신은 초에 항복했다. 그러나 얼마 뒤에 도망해 다시 한()으로 돌아갔다. 한에서는 다시 그를 한왕()에 봉했다. 그는 마침내 한왕()을 따라서 항우를 격파하고 천하를 평정했다. 한 5년 봄에 드디어 부절을 쪼개어 그를 한왕()에 봉하고, 영천()을 다스리게 했다.

그 이듬해 봄에 고조()는 한신()처럼 재능과 무예가 있는 사람이 북쪽으로는 공()과 낙()에 가깝고, 남쪽으로는 완()과 섭()에 가까우며, 동쪽으로는 회양()이 있어서 모두 천하의 사나운 군대만 있는 곳에서 왕 노릇을 해야 한다고 해 조서를 내려 한왕() 신을 옮겨서 태원() 북쪽을 소유하게 해 오랑캐를 막고, 진양()에 도읍하게 했다.

그러자 한왕() 신이 글을 올려 “나라가 변경으로 둘러싸여 있어 흉노()가 자주 침입하고, 진양은 변방의 요새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니 마읍()으로 도읍하게 해주십시오.”라고 했다. 고조가 허락하자, 한신은 곧 마읍으로 도읍을 옮겼다.

가을에 흉노의 묵돌()이 크게 한신을 포위하자, 한신은 여러 차례 오랑캐에게 사자를 보내 화친을 청했다. 한()이 군대를 보내어 구원했지만 한신이 자주 흉노에게 사자를 보낸 것은 두 마음을 품고 있다고 의심해 사람을 보내 한신을 꾸짖었다.

한신은 피살될까 두려워 흉노와 함께 한을 공격하기로 약속했다. 드디어 한을 배반하고 마읍을 오랑캐에 바치고 항복하여 태원을 공격했다.

한 7년 겨울에 고조가 직접 출정해 한왕 신의 군대를 동제()에서 격파하고, 그 장수 왕희()의 목을 베자 한신은 흉노로 도망쳤다. 한신이 거느렸던 장수인 백토()사람 만구신()과 왕황() 등이 조의 후예인 조리()를 세워서 조왕으로 다시 삼고, 한신의 패잔병을 수습해서 한신 및 묵돌과 모의해 한을 공격했다.

흉노는 좌현왕()과 우현왕()에게 만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왕황 등과 함께 광무()에 진을 치고, 남쪽 진양으로 내려와 한의 군사와 싸우게 했다. 한의 군사가 그들을 대파하고, 이석()까지 추격해 다시 격파했다.

흉노가 누번() 서북쪽에 군대를 다시 모으자, 한에서는 전차와 기병으로 하여금 흉노를 격파하게 했다. 흉노가 번번이 패해 달아나자, 한의 군대는 승세를 타고 북쪽으로 추격했다. 묵돌이 대곡()에 있다는 말을 듣고, 진양에 있던 고조가 사람을 시켜 묵돌의 실정을 살피게 했다.

그 사람이 돌아와서 “쳐도 되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고조가 드디어 평성()에 도착했다. 고조가 백등산()으로 나가자 흉노 기병들이 고조를 포위했다. 고조가 사람을 시켜 연지()에게 후한 선물을 보내자, 연지가 묵돌에게 “지금 한의 땅을 얻더라도, 아직은 살 수 없습니다. 게다가 두 임금이 서로 화를 초래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했다. 7일이 지나자 오랑캐의 기병이 살며시 물러났다. 그때 하늘에 짙은 안개가 깔려 있어 한에서는 사람을 오고 가게 했지만 오랑캐들은 알아채지 못했다.

호군중위() 진평()이 고조에게 “오랑캐는 병사를 온전하게 하려고 합니다. 강한 쇠뇌에 화살을 두 개씩 매긴 후에 밖으로 향하게 하고, 천천히 걸어서 포위를 벗어나십시오.”라고 아뢰었다.

고조가 평성에 돌아오자 한의 구원병도 도착했고, 오랑캐 기병도 드디어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한 역시 싸움을 끝내고 돌아갔다. 한신이 흉노를 위해 군대를 거느리고 왕래하면서 변경을 공격했다.

한 10년에 한신이 왕황 등에게 진희()를 설득해 그 자신을 그르치게 했다. 11년 봄에 예전의 한왕() 신이 다시 흉노 기병과 함께 삼합()에 들어와서 한에 대항했다.

한()이 시장군()에게 그들을 치게 하자 한신에게 글을 보내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폐하께서는 너그럽고 어진 분이십니다. 제후 가운데 비록 배반하는 자가 있더라도, 다시 돌아오면 번번이 예전의 지위와 칭호를 돌려주고 목을 베지 않으셨습니다. 대왕께서도 이를 두루 알고 계실 것입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싸움에 패해 흉노로 달아났을 뿐 큰 죄가 있는 것이 아니니 빨리 스스로 돌아오십시오.”

한왕 신이 답장을 보냈다. “폐하께서는 저를 여항()에서 뽑으시고 남면해 왕이라 칭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저의 형양의 싸움에서 저는 죽지 못하고 항우에게 사로잡혔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죄입니다. 흉노가 마읍을 공격했을 때 저는 굳게 지키지 못하고 성을 들어 항복했습니다. 이것이 두 번째 죄입니다. 지금은 도리어 오랑캐를 위해 군대를 거느리고 장군과 하루아침의 목숨을 다투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세 번째 죄입니다.

무릇 종()과 범려()는 한 가지 죄도 없는데 죽임을 당했는데, 지금 저는 폐하께 세 가지 죄가 있으나 세상에서 살기를 바랍니다. 이는 오자서()가 오나라에서 쓰러져 죽으려고 했던 것과 같습니다. 지금 저는 달아나 산골짜기에 숨어서 오랑캐들에게 구걸하며 지냅니다. 제가 돌아가기를 바라는 것은 마치 앉은뱅이가 일어서기를 잊지 못하고, 장님이 보기를 잊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정세로 보아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서 드디어 싸웠다. 시장군이 삼합을 정벌하고, 한왕 신의 목을 베었다.

한신이 흉노에 들어갈 때 태자와 함께 갔다. 퇴당성()에 이르렀을 때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이름을 퇴당이라고 했다. 태자도 아들을 낳고 영()이라고 이름 지었다.

효문제(효문제) 14년에 퇴당과 영이 그 무리를 이끌고 한에 항복했다. 한에서 퇴당을 봉해 궁고후()로 삼고, 영을 양성후()로 삼았다. 오와 초 등 일곱 나라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여러 장군들 가운데 궁고후의 공이 으뜸이었다. 그 지위를 아들에게 전해 손자에 이르렀지만, 손자는 아들이 없어 제후의 지위를 잃었다. 영의 손자는 불경죄로 제후의 지위를 잃었다. 퇴당의 얼손 한언()은 총애를 받아 명성과 부귀를 당세에 떨쳤다. 그의 아우 열()은 다시 봉작되었으며, 여러 차례 장군으로 일컬어지다가 마침내 안도후()가 되었다.

그 아들이 대를 잇더니, 한 해 남짓 지나 법에 연루되어 죽었다. 한 해 남짓 뒤에 열의 손자 증()이 용액후()에 제수되어 열의 뒤를 이었다.



<노관>
노관()은 풍() 땅 사람으로 고조와 같은 마을에 살았다. 노관의 아버지는 고조의 태상황()과 서로 친했다. 아들을 낳았는데 고조와 노관이 같은 날에 태어났다. 마을에서 양고기와 술을 가지고 두 집을 축하했다. 고조와 노관은 장성한 뒤에는 함께 글을 배워 서로 친했다. 마을에서 두 집안의 아버지가 서로 친하고 아들을 같은 날에 낳은 데다 그들이 자라서도 친하게 지내는 것을 아름답게 여겨, 다시 양고기와 술을 가지고 두 집을 축하했다. 고조가 평민이었을 때 죄를 짓고 피해 숨은 적이 있었는데 노관은 늘 따르며 드나들었다.

고조가 처음 패() 땅에서 일어나자 노관은 빈객으로서 한중까지 들어가 장군이 되어 늘 안에서 모셨다. 고조를 따라 동쪽으로 가서 항우를 칠 때는 태위()로서 늘 따랐는데 침실까지도 드나들었다. 옷이나 음식을 상으로 내릴 때에도 여러 신하들은 그만한 총애를 감히 바라지 못했다. 비록 소하()와 조삼() 등이 남다른 예우를 받았다고 하지만, 총애를 받는 것에 있어서는 노관을 따를 수 없었다. 노관은 봉작되어 장안후()가 되었는데, 장안은 옛 함양()이다.

한 5년 겨울에 고조가 항우를 깨뜨리자 이에 노관을 별장()으로 삼아 유고()와 함께 임강왕() 공위()를 공격해서 깨뜨렸다. 7월에 돌아와 고조를 따라 연왕() 장도()를 치자 장도가 항복했다.

고조가 천하를 평정했을 때 제후 가운데 유씨()가 아니면서 왕이 된 사람은 일곱이었다. 노관도 왕으로 삼고 싶었지만, 여러 신하들 때문에 그만두었다. 연왕 장도를 사로잡게 되자, 여러 장군들과 재상과 열후들에게 조서를 내려 신하들 가운데 공 있는 자를 골라 연왕으로 삼겠다고 했다.

여러 신하들은 고조가 노관을 왕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알고, 모두 말하기를 “태위 장안후 노관이 늘 따르며 천하를 평정해 공이 가장 많으니 연왕으로 삼을 만합니다.”라고 했다. 이에 조서를 내려 허락했다.

8월에 노관을 세워 연왕으로 삼았다. 제후나 왕들 가운데 총애를 받는 것이 누구도 연왕만 같지 못했다.

한 11년 가을에 진희()가 대() 땅에서 반역하자 고조가 한단()으로 가서 진희의 군사를 쳤다. 연왕 노관 또한 그 동북쪽을 쳤다. 이때 진희는 왕황을 시켜 흉노에게 구원을 청하게 했다. 연왕 노관 또한 자기 신하 장승()을 흉노에 사신으로 보내 “진희 등의 군대가 이미 격파되었다.”고 말하게 했다.

장승이 오랑캐 땅에 도착하니 옛 연왕 장도의 아들인 장연()이 도망해 오랑캐 땅에 있었다. 그가 장승을 보고 “공이 연에 중용된 이유는 오랑의 사정에 밝기 때문입니다. 연이 오래도록 존속하는 까닭은 제후들이 자주 배반하고 군대를 연합해 승패를 결정짓지 못해서입니다. 지금 공은 연을 위해 빨리 진희 등을 없애려고 합니다. 진희 등이 없어지면 다음에는 역시 화가 연에 미칠 것이며 공들 또한 포로가 될 것입니다. 공은 어찌하여 진희를 공격하는 일을 잠시 늦추고 오랑캐와 화친하지 않습니까? 일이 느슨해지면 길게 연에서 왕 노릇을 할 수 있습니다. 만일 한에 급한 일이 생기면 나라가 편안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장승도 그렇다고 여시고 이에 남몰래 흉노에게 진희를 도와서 연을 치게 했다. 연왕 노관은 장승이 오랑캐와 함께 배반했다고 의심하고, 글을 올려 장승의 일족을 없앨 것을 요청했다. 장승이 돌아와서 그렇게 행동한 이유를 자세히 말했다. 연왕이 깨닫고 이에 거짓으로 다른 사람을 논죄하고, 장승과 그 가족을 탈출시켜 흉노의 간첩이 되게 했다. 그러고는 몰래 범제()를 진희에게 보내 오랫동안 달아나 있으면서 군사를 연합해 승패가 결정되지 못하게 했다.

한 12년에 고조가 동쪽으로 가서 경포()를 쳤는데, 진희는 늘 군대를 거느리고 대() 땅에 있었다. 한에서 번쾌()를 시켜 진희를 쳐서 베어 죽였다.

그의 비장()이 항복하면서 “연왕 노관이 범제를 시켜 진희와 내통하고 계책을 꾸몄습니다.”라고 했다. 고조가 사자를 보내 노관을 불렀지만, 노관은 병을 핑계 대고 가지 않았다.

고조가 다시 벽양후() 심이기()와 어사대부() 조요()를 보내 연왕을 데려오게 하고 연왕 좌우의 사람들을 심문하게 했다. 노관이 두려워하며 문을 닫고 숨으면서, 자기의 총신에게 “유씨가 아니면서 왕이 된 자는 나와 장사왕()뿐이다. 지난해 봄에 한은 회음후()를 멸족시키고, 여름에는 팽월()을 베어 죽였는데 모두 여후()의 계략이다. 지금 황상은 병들어 모든 국사를 여후에게 맡기고 있다. 여후는 여인이라 성이 다른 왕과 제후를 죽이는 것을 일삼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병을 핑계대고 가지 않았다. 그의 좌우에 있던 신하들도 모두 도망해 숨었다.

말이 누설되어 벽양후가 듣게 되었다. 고조에게 자세히 아뢰자 고조가 더욱 노했다. 또 흉노에서 항복해온 자가 있었는데 그가 “장승이 도망해 흉노에 있는데 연의 사신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고조가 “노관이 과연 배반했구나!”라고 말했다.

번쾌를 시켜서 연을 치게 했다. 연왕 노관이 궁인과 가속()과 기병 수천 명을 거느리고 장성 아래에 머물면서 상황을 살폈다. 고조의 병이 나으면 스스로 들어가서 사죄하려고 했다. 4월에 고조가 세상을 떠났다. 노관은 드디어 무리들을 거느리고 도망쳐 흉노 땅으로 갔다. 흉노는 그를 동호()의 노왕()으로 삼았다. 노관은 다른 오랑캐들에게 침략과 약탈을 당하자 다시 돌아갈 생각을 했다. 한 해 남짓 지내다가 오랑캐 땅에서 죽었다.

고후(, 여후) 때에 노관의 아내와 자식이 도망하여 한에 항복했다. 때마침 고후가 병이 나 만날 수가 없었다. 노관의 아내도 병들어 죽었다.

효경제() 6년에 노관의 손자 동호왕() 타지()가 항복했다. 한에서 그를 봉해 아곡후()로 삼았다.



<진희>
진희()는 원구() 사람이다. 처음에 어떤 까닭으로 고조를 따르게 되었는지 모른다. 고조 7년 겨울에 한왕() 신()이 배반해 흉노로 들어가니 고조가 평성까지 갔다가 돌아와서 진희를 봉해 열후()로 삼았다. 대의 상국 자격으로 장수가 되어 조와 대()의 변경에 있는 군사를 감독하게 했다. 변경의 군사들이 모두 진희에게 소속되었다.

진희가 일찍이 돌아오는 길에 조에 들렀다. 조의 재상 주창()이 진희를 따르는 빈객을 보니 그 수레가 천여 승이나 되어 한단()의 관사가 모두 가득 찼다. 진희가 빈객을 대하는 태도는 포의()의 사귐과 같아서 자기 몸을 낮추고 빈객을 높였다.

진희가 대로 돌아가자 주창이 곧 들어가 뵙기를 청했다. 고조를 보자 “진희의 빈객이 매우 성대합니다. 밖에서 몇 년 동안 마음대로 군대를 지휘하니 변이라도 일어날까 두렵습니다.”라고 자세히 아뢰었다.

고조는 이에 사람을 시켜 대에 사는 진희의 빈객들의 재물과 온갖 불법적인 일을 조사하게 했더니 진희와 관련된 일이 많았다. 진희가 두려워 몰래 빈객을 시켜 왕황과 만구신의 처소에 보내 내통했다.

고조 10년 7월에 태상황이 죽자 고조가 사람을 보내 진희를 불렀지만, 진희는 병이 심하다고 핑계를 댔다. 9월에 드디어 왕황 등과 함께 반역하고 스스로 대왕()이라고 하며 조와 대의 땅을 위협하고 빼앗았다.

고조가 듣고는 조와 대의 관리들 가운데 진희에게 속아 넘어갔거나 협박당해 넘어간 자들을 모두 용서했다. 고조가 몸소 한단까지 기뻐하며 “진희가 남쪽으로 장수()에 의지하지 않고 북쪽으로 한단을 지키지도 않으니, 그가 어떤 일도 할 수 없음을 알겠다.”라고 물었다.

조의 재상이 상산()의 수()와 위()를 죽이려고, 고조에게 “상산의 25성 가운데 진희가 모반해 20성을 잃었습니다.”라고 아뢰었다. 고조가 “수와 위가 배반했는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배반하지는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고조가 “그렇다면 힘이 모자랐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그들을 용서해 다시 상산의 수와 위로 삼았다.

고조가 주창에게 “조에도 장수로 삼을만한 장사가 있는가?”라고 물었다. “네 사람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네 사람이 고조를 알현하자 고조가 그들을 욕하며 “너희 같은 놈들이 장수가 될 수 있겠느냐?” 라고 말했다. 네 사람이 부끄러워하며 땅에 엎드렸다.

고조가 그들을 각각 1천 호()에 봉하고 장군으로 삼았다. 좌우의 신하들이 간해 “황상을 따라 촉과 한까지 들어가고 초를 치고도 공이 두루 행해지지 못했습니다. 지금 이들이 무슨 공이 있다고 1천 호에 봉하십니까?”라고 했다.

고조가 “그대들이 알 바가 아니오. 진희가 배반해 한단 이북의 땅은 모두 진희의 소유가 되었소. 짐이 격문을 띄워 천하의 군사를 불렀지만 오는 사람이 없었소. 지금은 오직 한단 안의 군사만 있을 뿐이오. 짐이 어찌 4천 호를 4사람에게 봉하는 것을 아까워하여 조의 자제들을 위로하지 않겠소!”라고 말했다. 모두들 “좋습니다.”라고 했다. 고조가 “진희의 장수가 누구냐?”라고 물었다. 모두 “왕황과 만구신인데 모두 옛날에 장사꾼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고조가 “짐도 그들을 알고 있소.”라고 말하고, 이에 왕황과 만구신에게 각각 천금의 상을 걸었다.

11년 겨울에 한의 군대가 공격해 곡역() 아래에서 진희의 장수 후창()·왕황을 베고, 진희의 장수 장춘()을 요성()에서 격파하고, 만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태위 주발()이 쳐들어가서 태원()과 대() 땅을 평정했다.

12월에 고조가 직접 동원()을 쳤지만, 동원은 항복하지 않았고 병졸들이 고조를 욕했다. 동원이 항복하자 병졸 가운데 욕한 자들의 목을 베었고, 욕하지 않은 자들은 경형()에 처했다. 다시 명령을 내려 동원을 진정()이라 했다. 왕황과 만구신의 휘하에 있던 자가 상금을 받으려고 그들을 모두 산 채로 잡아왔다. 이렇게 해서 진희의 군대는 마침내 패했다.

고조는 낙양으로 돌아왔다. 고조가 “대는 상산() 북쪽에 있고 조가 상산 남쪽에 있어 거리가 멀다.”라고 했다. 이에 아들 항()을 세워서 대왕()으로 삼고 중도()에 도읍하게 하니 대와 안문()이 모두 대에 속하게 되었다.

고조 12년 겨울에 번쾌의 군대를 이끌고 추격하여 영구()에서 진희를 베어 죽였다.


<사마천의 논평>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한신()과 노관()은 본래 조상 대대로 덕을 쌓고 선을 행한 사람이 아니다. 한때의 권력 변화를 틈타 사기와 무력으로 공을 이루고 한이 천하를 막 평정했을 때를 만났기 때문에 땅을 분할 받고 남면해 임금이라고 칭했다.

안으로는 강대하다는 의심을 받았으며, 밖으로는 흉노를 원조자로 여기고 의지했다. 이 때문에 날마다 조정과 멀어지고 스스로 위태롭게 되었다. 일이 막다른 데 이르고, 지혜가 다하자 마침내 흉노 땅으로 달아났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주창이 의심하고 조사해 잘못이 많이 드러나자 화가 몸에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간사한 말을 듣고 드디어 무도해졌다. 아! 슬프다. 계책의 설익음과 무르익음 및 성패가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이 깊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