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歷史와文學/史記列傳

史記 卷九八. 傅靳蒯成列傳

柳川 2019. 6. 3. 03:18

                                   傅靳蒯成列傳


傅寬

陽陵侯傅寬,以魏五大夫騎將從,為舍人,起横陽。從攻安陽、杠里,擊趙賁軍於開封,及擊楊熊曲遇、陽武,斬首十二級,賜爵卿。從至霸上。沛公立為漢王,漢王賜寬封號共德君。從入漢中,遷為右騎將。從定三秦,賜食邑雕陰。從擊項籍,待懷,賜爵通德侯。從擊項冠、周蘭、龍且,所將卒斬騎將一人敖下,益食邑。

屬淮陰,擊破齊歷下軍,擊田解。屬相國參,殘博,益食邑。因定齊地,剖符世世勿絕,封為陽陵侯,二千六百户,除前所食。為齊右丞相,備齊。五歲為齊相國。

四月,擊陳豨,屬太尉勃,以相國代丞相哙擊豨。一月,徙為代相國,將屯。二歲,為代丞相,將屯。

孝惠五年卒,謚為景侯。子頃侯精立,二十四年卒。子共侯則立,十二年卒。子侯偃立,三十一年[1][2],坐與淮南王謀反,死,國除。




양릉후() 부관()은 위()나라 오대부()의 기장()으로 패공()을 따르며 가신이 되었다. 횡양()에서 일어나 패공을 따라 안양()과 강리()를 공격했으며, 개봉()에서 조분()의 군대를 격파했다. 그리고 곡우(), 양무() 일대에서 양웅()을 공격해 적의 목 12개를 베어오자 패공은 그에게 경()의 작위를 하사했다.

그는 또 패공을 따라 패상()에 이르렀다. 패공이 한왕()이 되자 부관에게 공덕군()이라는 봉호를 하사했다. 그는 패공을 따라 한중()에 들어가 우기장()이 되었다. 그가 다시 한왕을 따라 삼진()을 평정하자 한왕은 그에게 조음()을 식읍으로 내렸다. 또 패공을 따라 항우를 공격하고, 회()에서 패공을 기다리니 패공은 부관에게 통덕후()의 작위를 내렸다. 또 패공을 따라서 항관(), 주란(), 용저()를 공격했는데 그가 거느린 병사가 오창()에서 적의 기장 한 사람을 죽이니 그의 식읍은 더 많아졌다.

그가 회음후() 밑에 있을 때는 역하()에 주둔하고 있는 제()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전해()를 사로잡았다. 그가 상국() 조삼() 밑에 있을 때에는 박()을 격파하니 그 식읍이 더 많아졌다. 제나라 평정에 공을 세웠기 때문에 한왕은 부절()을 나누어서는 반을 주어 자손 대대로 계승하게 했으며, 양릉후()에 봉해 식읍 2,600호를 하사하고 이전에 준 식읍을 회수했다. 그는 제나라의 우승상()이 되어 항복하지 않은 제나라의 전횡()에 대비했다. 5년 뒤에 그는 제나라의 상국이 되었다.

4월, 진희()를 공격할 때 그는 태위() 주발()에게 속해 있었는데, 제나라의 상국으로 승상 번쾌()를 대신해 진희를 정벌했다.

1월, 그는 대()의 상국으로 전임되어 변방을 수비했다. 2년 뒤에는 대의 승상이 되어 변방을 수비했다.

효혜제() 5년, 부관이 죽자 경후()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의 아들 경후() 정()이 뒤를 이었다가는 24년 뒤에 죽었다. 경후의 아들 공후() 측()이 뒤를 이어 12년 뒤에 죽었다. 그의 아들 후언()이 뒤를 이었으나 31년 뒤 회남왕()과 반란을 꾀했다가 죽고 봉국은 해체되었다.



靳歙

信武侯靳歙,以中涓從,起宛朐。攻濟陽。破李由軍。擊秦軍亳南、開封東北,斬騎千人將一人,首五十七級,捕虜七十三人,賜爵封號臨平君。又戰藍田北,斬車司馬二人,騎長一人,首二十八級,捕虜五十七人。至霸上。沛公立為漢王,賜歙爵建武侯,遷為騎都尉。

從定三秦。别西擊章平軍於隴西,破之,定隴西六縣,所將卒斬車司馬、候各四人,騎長十二人。從東擊楚,至彭城。漢軍敗還,保雍丘,去擊反者王武等。略梁地,别將擊邢說軍菑南,破之,身得說都尉二人,司馬、候十二人,降吏卒四千一百八十人。破楚軍荥陽東。三年,賜食邑四千二百户。

别之河内,擊趙將賁郝軍朝歌,破之,所將卒得騎將二人,車馬二百五十匹。從攻安陽以東,至棘蒲,下七縣。别攻破趙軍,得其將司馬二人,候四人,降吏卒二千四百人。從攻下邯郸。别下平陽,身斬守相,所將卒斬兵守、郡守各一人,降鄴。從攻朝歌、邯郸,及别擊破趙軍,降邯郸郡六縣。還軍敖仓,破項籍軍成皋南,擊絕楚饟道,起荥陽至襄邑。破項冠軍鲁下。略地東至缯、郯、下邳,南至蕲、竹邑。擊項悍濟陽下。還擊項籍陳下,破之。别定江陵,降江陵柱國、大司馬以下八人,身得江陵王,生致之雒陽,因定南郡。從至陳,取楚王信,剖符世世勿絕,定食四千六百户,號信武侯。

以騎都尉從擊代,攻韩信平城下,還軍東垣。有功,遷為車騎將軍,并將梁、趙、齊、燕、楚車騎,别擊陳豨丞相敞,破之,因降曲逆。從擊黥布有功,益封定食五千三百户。凡斬首九十級,虜百三十二人;别破軍十四,降城五十九,定郡、國各一,縣二十三;得王、柱國各一人,二千石以下至五百石三十九人。

高后五年,歙卒,謚為肃侯。子亭代侯。二十一年,坐事國人過律,孝文後三年,夺侯,國除。


신무후() 근흡()은 중연()의 신분으로 패공을 따라 원구()에서 일어났다. 제양()을 공격하여 이유(, 이사의 아들)의 군대를 격파했다. 그는 박()의 남쪽과 개봉의 동북쪽 일대에서 진()나라 군대를 공격하여 기병 1천 명과 장수 한 사람을 죽이고, 수급 57개를 얻고, 포로 73명을 사로잡았다. 패공은 그에게 임평군()이란 작위를 내렸다.

또 남전() 북쪽에서 전투를 벌여 거사마() 두 사람과 기장 한 사람을 죽였으며, 수급 28개를 얻고 포로 57명을 사로잡았다. 그가 패상()에 돌아왔을 때 패공은 한왕이 되어 근흡에게 건무후()의 작위를 내리고 기도위()로 승진시켰다.

그는 한왕을 따라 삼진()을 평정했다. 그리고 그는 따로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농서(西)에서 장평()의 군대를 격파하고 농서의 여섯 개의 현을 평정했다. 그가 거느린 병사들은 거사마와 군후() 각각 네 사람과 기장 12명을 죽였다. 그는 또 패공을 따라 동쪽으로 진격하여 초()나라를 공격해 팽성()에 이르렀다. 그러나 한나라 군대는 패하여 옹구()로 물러나 수비에 들어갔다가 그곳을 떠나 배반한 장군 왕무()를 치고 양()나라 땅을 공략했다. 그는 따로 정예 부대를 이끌고 치()의 남쪽에서 형열()의 군대를 공격하여 격파했는데, 몸소 형열의 도위() 두 사람과 사마와 군후 12명을 사로잡고, 관리와 병사 4,180명을 항복시켰다.

그는 또 형양()의 동쪽에서 초나라 군대를 격파했다.

한() 3년, 그에게 식읍 4,200호가 내려졌다.

그는 따로 하내()로 진격하여 조가()에서 조()나라 장수 비학()의 군대를 격파했다. 그가 거느린 병사들은 기장 두 사람과 수레와 말 250필을 획득했다. 그는 또 패공을 따라서 안양() 동쪽을 공격해 극포()에 이르러 일곱 개의 현을 함락시켰다. 그는 따로 조나라 군대를 공격해 조나라 장수와 사마 두 사람 및 군후 네 사람을 사로잡고, 관리와 병사 2,400명을 항복시켰다.

그는 패공을 따라서 한단()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그는 또 따로 평양()을 공격하여 몸소 수상()을 베었다. 그가 거느린 병사가 군위()와 군수() 한 사람씩 베고, 업()을 항복시켰다.

그는 또 패공을 따라서 조가와 한단을 공격했고, 따로 조나라 군대를 격파하여 한단의 여섯 현을 항복시켰다. 그는 오창()으로 회군하여 성고()의 남쪽에서 항적()의 군대를 격파함으로써 초나라의 식량 보급로를 차단했다. 그는 형양()에서 군을 이끌고 양읍()까지 진군하여 노() 부근에서 항관()의 군대를 격파했다. 그는 각지를 공격했는데, 동쪽으로는 증(), 담(), 하비()에, 남쪽으로는 기(), 죽읍()에까지 이르렀다.

제양() 부근에서 항한()을 공격했다. 회군하여 진()의 성 아래에서 항적을 공격해 격파했다. 또 따로 강릉()을 평정하여 강릉의 주국(), 대사마() 이하 관리 여덟 명의 항복을 받았고, 몸소 강릉왕()을 사로잡아 낙양()으로 압송했다. 이렇게 해서 남군()을 평정했다. 그는 또 패공을 따라서 진()에 이르러 초왕() 한신()을 사로잡으니 한왕은 그에게 부절을 나누어주어 자손 대대로 계승하게 하는 한편 식읍 4,600호를 내리고, 신무후에 봉했다.

그는 기도위()의 신분으로 고조를 따라 대()를 공격했다. 그는 평성() 부근에서 한신()을 공격한 뒤 동원()으로 회군했다. 그는 한신의 반란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거기장군()으로 승진되었고, 아울러 양, 조, 제, 연, 초나라의 거기()를 통솔했다.

따로 진희의 승상 후창()을 공격해, 곡역()을 항복시켰다. 그는 또 고조를 따라 경포()를 공격하여 공을 세웠는데, 규정된 식읍보다 많은 5천 3백 호를 하사받았다. 그는 적의 수급 90개를 베었고, 132명을 포로로 사로잡았으며, 따로 14차례나 군대를 격파했고, 59개의 성, 군과 나라를 각각 하나씩, 그리고 23개의 현을 항복시켰다. 그리고 왕과 주국을 각각 한 사람씩 사로잡고 이어 봉록 2,000석 이하에서 500석까지의 관리 39명을 사로잡았다.

여태후() 5년에 근흡이 세상을 떠나니 숙후()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의 아들 정()이 후의 작위를 계승했다. 21년 뒤 정은 백성들에게 법에 정한 것보다 지나치게 부역을 시킨 죄로 효문제() 후원() 3년에 후의 작위를 박탈당했고 봉국은 없어졌다.


周緤

蒯成侯緤者,沛人也,姓周氏。常為高祖參乘,以舍人從起沛。至霸上,西入蜀、漢,還定三秦,食邑池陽。東絕甬道,從出度平陰,遇淮陰侯兵襄國,軍乍利乍不利,終無離上心。以緤為信武侯,食邑三千三百户。高祖十二年,以緤為蒯成侯,除前所食邑。

上欲自擊陳豨,蒯成侯泣曰:“始秦攻破天下,未嘗自行。今上常自行,是為無人可使者乎?”上以為“愛我”,賜入殿門不趨,殺人不死。

至孝文五年,緤以壽終,謚為贞侯。子昌代侯,有罪,國除。至孝景中二年,封緤子居代侯。至元鼎三年,居為太常,有罪,國除。


太史公曰:陽陵侯傅寬、信武侯靳歙皆高爵,從高祖起山東,攻項籍,誅殺名將,破軍降城以十數,未嘗困辱,此亦天授也。蒯成侯周緤操心堅正,身不見疑,上欲有所之,未嘗不垂涕,此有伤心者然,可谓笃厚君子矣。


괴성후() 주설()은 패() 사람으로 성은 주씨()이다. 그는 일찍이 고조의 참승()을 지냈고, 가신이 되어 패공을 따라 패에서 일어났다.

그는 패공을 따라 패상에 갔고, 서쪽으로 촉()과 한중()에도 들어갔으며, 회군하여 삼진을 평정함으로써 지양()을 식읍으로 받았다. 다시 동쪽으로 초나라 군의 식량 보급로를 차단했다. 고조를 따라 출병해 평음()에서 황하를 건너, 양국()에서 회음후의 군대와 만났다. 전세가 유리할 때도 불리할 때도 있었지만 그는 끝까지 고조를 배반할 마음을 먹지 않았다. 고조는 주설을 신무후()에 봉하고 식읍 3,300호를 하사했다.

한 12년, 고조는 주설을 괴성후로 삼고 이전에 하사했던 식읍을 모두 없앴다.

고조가 몸소 진희를 정벌하려고 하자 괴성후가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전에 진()나라가 천하를 정벌할 때도 황제가 몸소 군대를 인솔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폐하께서 몸소 나가려 하시니 이는 보낼 만한 사람이 없어서 그러시는 것입니까?”

고조는 이 말을 듣고 주설이 자기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에게 궁궐 문을 들어와서 빠른 걸음으로 걷지 않아도 되고, 사람을 죽여도 사형에 처하지 않는다는 특전이 내려졌다.

효문제 5년, 주설은 천수를 누리고 죽었다. 시호는 정후()라 했다.

그의 아들 창()이 후()의 작위를 계승했으나 죄를 지어 봉국은 없어졌다.

효경제() 중원() 2년, 주설의 아들인 거()가 후의 작위를 계승했다.

원정() 3년, 거는 태상()이 되었으나 죄를 지어 봉국은 없어졌다.



<사마천의 논평>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양릉후 부관과 신무후 근흡은 모두 높은 자리에 올랐던 사람으로, 고제를 따라 산동에서 일어나 항우를 공격했으며, 적의 장수를 죽였다. 수십 차례 적군을 격파하고 성을 함락시켰으나 곤욕을 치른 적이 없었으니 이는 하늘이 도와준 것이리라.

괴성후() 주설()은 마음이 곧고 정직해 의심을 받은 적이 없었다. 고제가 출정하려 할 때마다 그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 때가 없었는데, 마치 상심한 사람인 듯했다고 하니 돈독하고 후덕한 군자라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