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 卷一OO. 季布欒布列傳
季布欒布列傳
季布
季布者,楚人也。為氣任俠,有名於楚。項籍使將兵,數窘漢王。及項羽滅,高祖購求布千金,敢有舍匿,罪及三族。季布匿濮陽周氏。周氏曰:「漢購將軍急,跡且至臣家,將軍能聽臣,臣敢獻計;即不能,願先自剄。」季布許之。乃髡鉗季布,衣褐衣,置廣柳車中,并與其家僮數十人,之魯朱家所賣之。朱家心知是季布,乃買而置之田。誡其子曰:「田事聽此奴,必與同食。」朱家乃乘軺車之洛陽,見汝陰侯滕公。滕公留朱家飲數日。因謂滕公曰:「季布何大罪,而上求之急也?」滕公曰:「布數為項羽窘上,上怨之,故必欲得之。」朱家曰:「君視季布何如人也?」曰:「賢者也。」朱家曰:「臣各為其主用,季布為項籍用,職耳。項氏臣可盡誅邪?今上始得天下,獨以己之私怨求一人,何示天下之不廣也!且以季布之賢而漢求之急如此,此不北走胡即南走越耳。夫忌壯士以資敵國,此伍子胥所以鞭荊平王之墓也。君何不從容為上言邪?」汝陰侯滕公心知朱家大俠,意季布匿其所,乃許曰:「諾。」待閒,果言如朱家指。上乃赦季布。當是時,諸公皆多季布能摧剛為柔,朱家亦以此名聞當世。季布召見,謝,上拜為郎中。
孝惠時,為中郎將。單于嘗為書嫚呂后,不遜,呂后大怒,召諸將議之。上將軍樊噲曰:「臣願得十萬眾,橫行匈奴中。」諸將皆阿呂后意,曰「然」。季布曰:「樊噲可斬也!夫高帝將兵四十餘萬眾,困於平城,今噲柰何以十萬眾橫行匈奴中,面欺!且秦以事於胡,陳勝等起。于今創痍未瘳,噲又面諛,欲搖動天下。」是時殿上皆恐,太后罷朝,遂不復議擊匈奴事。
季布為河東守,孝文時,人有言其賢者,孝文召,欲以為御史大夫。復有言其勇,使酒難近。至,留邸一月,見罷。季布因進曰:「臣無功竊寵,待罪河東。陛下無故召臣,此人必有以臣欺陛下者;今臣至,無所受事,罷去,此人必有以毀臣者。夫陛下以一人之譽而召臣,一人之毀而去臣,臣恐天下有識聞之有以闚陛下也。」上默然慚,良久曰:「河東吾股肱郡,故特召君耳。」布辭之官。
楚人曹丘生,辯士,數招權顧金錢。事貴人趙同等,與竇長君善。季布聞之,寄書諫竇長君曰:「吾聞曹丘生非長者,勿與通。」及曹丘生歸,欲得書請季布。竇長君曰:「季將軍不說足下,足下無往。」固請書,遂行。使人先發書,季布果大怒,待曹丘。曹丘至,即揖季布曰:「楚人諺曰『得黃金百(斤),不如得季布一諾』,足下何以得此聲於梁楚閒哉?且仆楚人,足下亦楚人也。仆游揚足下之名於天下,顧不重邪?何足下距仆之深也!」季布乃大說,引入,留數月,為上客,厚送之。季布名所以益聞者,曹丘揚之也。
季布弟季心,氣蓋關中,遇人恭謹,為任俠,方數千里,士皆爭為之死。嘗殺人,亡之吳,從袁絲匿。長事袁絲,弟畜灌夫、籍福之屬。嘗為中司馬,中尉郅都不敢不加禮。少年多時時竊籍其名以行。當是時,季心以勇,布以諾,著聞關中。
季布母弟丁公,為楚將。丁公為項羽逐窘高祖彭城西,短兵接,高祖急,顧丁公曰:「兩賢豈相戹哉!」於是丁公引兵而還,漢王遂解去。及項王滅,丁公謁見高祖。高祖以丁公徇軍中,曰:「丁公為項王臣不忠,使項王失天下者,乃丁公也。」遂斬丁公,曰:「使後世為人臣者無效丁公!」
계포(季布)는 초(楚)나라 사람이다. 협객을 자처하는 기개로 초에서 이름을 떨쳤다. 항적(항우)이 병사를 이끌게 하니 여러 차례 한왕을 궁지에 몰았다. 항우가 멸망하자 고조(高祖)는 천금을 내걸고 그를 수배하고 집에다 숨겨주는 자는 그 죄가 삼족에 미칠 것이라고 했다.
계포는 복양(濮陽)의 주씨(周氏) 집에 숨었다. 주씨가 “한이 장군에게 현상금을 걸어 장군을 급히 찾고 있으니 행방을 추적해 곧 저희 집에 들이닥칠 것입니다. 장군께서 제 말을 들으신다면 제가 감히 계책을 말씀드리겠지만 들을 수 없으시다면 먼저 스스로 목숨을 끊어주십시오”라고 했다. 계포가 동의했다. 이에 주씨는 계포의 머리를 깎고 칼을 채우고 허름한 베옷을 입힌 뒤 광류거(廣柳車)에 넣어 그의 집 하인 수십 명과 함께 노(魯)의 주가(朱家)에게 팔았다. 주가는 그가 계포인 것을 알면서도 사들여 전원에 기거하게 하고 자기 아들에게 “밭일은 이 하인의 말을 따르고, 반드시 그와 같이 식사하라고 해라”고 단단히 일러두고는 주가는 가벼운 수레를 타고 낙양(洛陽)으로 가서 여음후(汝陰侯) 등공(滕公)을 만났다.
등공은 주가를 집에 머물게 하고 여러 날 함께 술을 마셨다. 주가는 기회를 보아서 등공에게 “계포가 무슨 큰 죄를 지었길래 주상께서 그렇게 급하게 찾고 계십니까”라고 물었다. 등공은 “계포는 여러 차례 항우를 위해 주상을 곤경에 빠뜨렸기에 주상께서 그 일에 원한을 품고 계시오. 그래서 반드시 그를 잡으려 하시는 것이오”라고 했다. 주가가 “공은 계포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묻자 등공은 “유능한 사람이오”라고 했다. 주가는 이렇게 말했다.
“신하된 사람은 각자 자기 주군을 위해 충성을 다합니다. 계포가 항우를 위해 충성한 것은 그의 직분을 다한 것일 뿐인데 그렇다고 항우의 신하를 모두 다 죽여야 한다는 말입니까? 지금 황상께서는 천하를 얻으신 지 얼마 되지 않으셨는데 사사로운 원한으로 사람을 찾고 계시니 어째서 황상의 도량이 좁다는 것을 천하에 보이려 하십니까? 게다가 계포와 같은 현명한 사람을 한나라가 현상금을 걸어 이렇게 급하게 찾고 있으니, 그렇게 하다가는 계포를 북쪽의 흉노(匈奴)로 도주하게 하지 않으면 남월(南越)로 도망치게 할 것입니다. 무릇 장사가 미워서 적국을 이롭게 하는 것은 바로 오자서(伍子胥)가 초 평왕(平王)의 묘를 파내어 그 시신에 채찍질을 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공께서는 왜 솔직히 황상께 말씀드리지 않으십니까?”
여음후 등공은 주가가 대협(大俠)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계포가 그의 집에 숨어 있을 것으로 짐작했다. 이에 등공은 그러겠노라 대답했다. 등공은 기회를 보아서 주가가 일러준 대로 황상에게 말을 올렸다. 황상은 마침내 계포를 용서했다.
그 무렵 여러 공경들은 모두 계포가 정세에 적응해 자신의 강직한 성격을 억누르고 유순해진 것을 칭찬했고, 주가 또한 이로 인해 당시에 이름을 날렸다. 후에 계포는 황상을 알현하여 사죄하자 황상은 그를 낭중(郎中)에 임명했다.
효혜제(孝惠帝) 때 계포는 중랑장(中郎將)이 되었다. 일찍이 선우(單于)가 편지를 보내 여태후(呂太后)를 모욕했는데 그 태도가 매우 불손했다. 이에 여태후는 크게 노하여 여러 장수들을 불러 대책을 상의했다. 상장군(上將軍) 번쾌(樊噲)는 “신에게 10만 군대를 이끌게 하여 흉노를 마음껏 짓밟게 해주십시오”라고 했다. 여러 장수들도 모두 여태후의 비위를 맞추며 뜻에 좋다고 말했다. 그때 계포는 이렇게 말했다.
“번쾌의 목을 베는 것이 마땅할 줄 압니다. 옛날 고조께서는 40여 만의 군사를 거느리고도 평성(平城)에서 곤경을 당하셨는데, 지금 번쾌가 어떻게 10만의 군사로 흉노의 한가운데를 마음껏 짓밟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는 태후를 면전에서 기만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진(秦)나라는 흉노를 정벌하는 일에 군사를 부렸다가 진승(陳勝)에게 봉기할 틈을 주었습니다. 지금까지 그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는데 번쾌가 또 면전에서 아부하는 말로 천하를 동요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이때 어전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었다. 태후는 조회를 파했고, 다시는 흉노 정벌의 일을 논의하지 않았다.
계포는 하동(河東) 군수가 되었다. 효문제(孝文帝) 때 어떤 사람이 계포가 현명하다고 말하자 효문제는 계포를 불러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삼으려 했다. 그런데 또 어떤 사람이 계포가 용맹하기는 하지만 술주정이 심해 가까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계포는 부름을 받고 장안(長安)에 도착해 숙소에서 한 달이나 머물렀지만 알현도 못하고 돌아가게 되었다. 이에 계포는 다음과 같이 진언했다.
“신은 공도 없으면서 총애를 받아 하동에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 아무 까닭 없이 신을 부르시니, 이는 필시 어떤 사람이 신을 터무니없이 칭찬하여 폐하를 속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 신이 도착했지만 폐하로부터 어떠한 임무도 받지 못하고 그냥 돌아가라 하시니, 이는 필시 어떤 사람이 신을 헐뜯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릇 폐하께서는 한 사람의 칭찬 때문에 신하를 부르시고, 또 한 사람의 헐뜯음 때문에 신을 돌려보내시니, 천하에 지혜를 가진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듣고 폐하의 식견을 들여다보지 않을까 신은 두렵습니다.”
황제는 이 말을 듣고 부끄러워 한참을 말이 없다가 “하동은 나의 수족처럼 여기는 군(郡)이어서 특별히 그대를 부른 것이오”라고 했다. 계포는 이 말을 듣고 황제에게 작별 인사를 드리고 하동 군수의 원래 관직으로 돌아갔다.
초나라 사람 조구생(曹丘生)은 언변에 능한 선비였는데, 여러 차례 권세에 아부하여 돈을 얻었다. 그는 조동(趙同) 등과 같은 귀인을 섬기었고, 특히 두장군(竇長君)과 사이가 좋았다. 계포는 이러한 소문을 듣고 두장군에게 편지를 올려 “저는 조구생이라는 자가 정직한 사람이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그와 왕래하지 마십시오”라고 간언했다.
조구생이 초나라로 돌아가면서 두장군의 소개장을 얻어서 계포를 만나고자 했다. 이에 두장군은 “계장군은 그대를 좋아하지 않으니, 그대는 가지 마오”라고 했다. 그러나 조구생은 기어이 소개장을 얻어 떠났다. 조구생은 먼저 사람을 시켜 계포에게 소개장을 보냈다. 아니나 다를까, 계포는 크게 노하여 조구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구생이 이르러 계포에게 절을 하며 “초나라 사람들 사이에 ‘황금 1백근을 얻느니보다 계포의 허락을 한 번 받는 것이 낫다’라는 말이 있더군요. 그대는 어떻게 양(梁, 위)나라와 초나라 지방에서 이러한 명성을 얻으셨는지요? 저 또한 초나라 사람이고 장군 또한 초나라 사람입니다. 제가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장군의 이름을 천하에 널리 알린다면 귀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어찌 저를 그다지도 단호하게 거절하시는지요?”
계포는 이에 크게 기뻐하며 그를 안으로 들여 여러 달 동안 머물게 하면서 상객으로 대접하고 후한 선물을 주었다. 계포의 명성이 더욱 높아진 것은 조구생이 그의 이름을 널리 알렸기 때문이다.
季布弟季心,氣蓋關中,遇人恭謹,為任俠,方數千里,士皆爭為之死。嘗殺人,亡之吳,從袁絲匿。長事袁絲,弟畜灌夫、籍福之屬。嘗為中司馬,中尉郅都不敢不加禮。少年多時時竊籍其名以行。當是時,季心以勇,布以諾,著聞關中。
季布母弟丁公,為楚將。丁公為項羽逐窘高祖彭城西,短兵接,高祖急,顧丁公曰:「兩賢豈相戹哉!」於是丁公引兵而還,漢王遂解去。及項王滅,丁公謁見高祖。高祖以丁公徇軍中,曰:「丁公為項王臣不忠,使項王失天下者,乃丁公也。」遂斬丁公,曰:「使後世為人臣者無效丁公!」
계포의 아우 계심(季心)은 의리와 호기가 관중(關中)을 뒤덮을 정도로 뛰어났다. 그는 사람들에게 공손하고 착실했으며 의협심이 강해 사방 수천 리에서 선비들이 앞을 다투어 그를 위해 죽음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일찍이 사람을 죽이고서 오(吳)나라로 도망가서 원사(袁絲)라는 사람의 집에 숨어 지냈다. 그는 원사를 형님으로 섬기고, 관부(灌夫), 적복(籍福) 등을 아우처럼 돌봐주었다. 그는 일찍이 중사마(中司馬)가 된 적이 있었는데 중위(中尉) 질도(郅都)조차 그에게 예로써 대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젊은 사람들은 자주 은밀히 계심의 이름을 빙자해 행세했다. 그 당시 계심은 용맹함으로, 계포는 일단 부탁을 받으면 거절하지 못하는 것으로 각각 관중에 명성이 높았다.
계포의 외삼촌 정공(丁公)은 초나라 장수였다. 정공은 항우를 위해 팽성(彭城) 서쪽에서 고조를 추적하여 짧은 병기로 접전을 벌였다. 고조는 다급해져 정공을 보고는 “우리 둘 다 좋은 사람들인데 어찌 서로 해치려 하는가”라고 했고, 정공은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니 고조는 몸을 피해 도망쳤다. 항우가 멸망한 뒤에 정공이 고조에게 인사를 드렸다.
고조는 정공을 붙잡아 군중에 돌려 보이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정공은 항왕의 신하가 되어서 충성을 다하지 않았다. 항왕으로 하여금 천하를 잃게 만든 자는 바로 정공이다”라 하고는 마침내 정공의 목을 벤 다음 “후세에 신하된 자들에게 정공을 본받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라고 했다.
계포의 아우 계심(季心)은 의리와 호기가 관중(關中)을 뒤덮을 정도로 뛰어났다. 그는 사람들에게 공손하고 착실했으며 의협심이 강해 사방 수천 리에서 선비들이 앞을 다투어 그를 위해 죽음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일찍이 사람을 죽이고서 오(吳)나라로 도망가서 원사(袁絲)라는 사람의 집에 숨어 지냈다. 그는 원사를 형님으로 섬기고, 관부(灌夫), 적복(籍福) 등을 아우처럼 돌봐주었다. 그는 일찍이 중사마(中司馬)가 된 적이 있었는데 중위(中尉) 질도(郅都)조차 그에게 예로써 대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젊은 사람들은 자주 은밀히 계심의 이름을 빙자해 행세했다. 그 당시 계심은 용맹함으로, 계포는 일단 부탁을 받으면 거절하지 못하는 것으로 각각 관중에 명성이 높았다.
계포의 외삼촌 정공(丁公)은 초나라 장수였다. 정공은 항우를 위해 팽성(彭城) 서쪽에서 고조를 추적하여 짧은 병기로 접전을 벌였다. 고조는 다급해져 정공을 보고는 “우리 둘 다 좋은 사람들인데 어찌 서로 해치려 하는가”라고 했고, 정공은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니 고조는 몸을 피해 도망쳤다. 항우가 멸망한 뒤에 정공이 고조에게 인사를 드렸다.
고조는 정공을 붙잡아 군중에 돌려 보이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정공은 항왕의 신하가 되어서 충성을 다하지 않았다. 항왕으로 하여금 천하를 잃게 만든 자는 바로 정공이다”라 하고는 마침내 정공의 목을 벤 다음 “후세에 신하된 자들에게 정공을 본받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라고 했다.
欒布
欒布者,梁人也。始梁王彭越為家人時,嘗與布游。窮困,賃傭於齊,為酒人保。數歲,彭越去之巨野中為盜,而布為人所略賣,為奴於燕。為其家主報仇,燕將臧荼舉以為都尉。臧荼後為燕王,以布為將。及臧荼反,漢擊燕,虜布。梁王彭越聞之,乃言上,請贖布以為梁大夫。
使於齊,未還,漢召彭越,責以謀反,夷三族。已而梟彭越頭於雒陽下,詔曰:「有敢收視者,輒捕之。」布從齊還,奏事彭越頭下,祠而哭之。吏捕布以聞。上召布,罵曰:「若與彭越反邪?吾禁人勿收,若獨祠而哭之,與越反明矣。趣亨之。」方提趣湯,布顧曰:「願一言而死。」上曰:「何言?」布曰:「方上之困於彭城,敗滎陽、成皋閒,項王所以(遂)不能[遂]西,徒以彭王居梁地,與漢合從苦楚也。當是之時,彭王一顧,與楚則漢破,與漢而楚破。且垓下之會,微彭王,項氏不亡。天下已定,彭王剖符受封,亦欲傳之萬世。今陛下一徵兵於梁,彭王病不行,而陛下疑以為反,反形未見,以苛小案誅滅之,臣恐功臣人人自危也。今彭王已死,臣生不如死,請就亨。」於是上乃釋布罪,拜為都尉。
孝文時,為燕相,至將軍。布乃稱曰:「窮困不能辱身下志,非人也;富貴不能快意,非賢也。」於是嘗有德者厚報之,有怨者必以法滅之。吳(軍)[楚]反時,以軍功封俞侯,復為燕相。燕齊之閒皆為欒布立社,號曰欒公社。
景帝中五年薨。子賁嗣,為太常,犧牲不如令,國除。
난포(欒布)는 양(梁)나라 사람이다. 처음에 양왕(梁王) 팽월(彭越)이 평민이었을 때 일찍이 난포와 사귀었다. 두 사람은 가난했기 때문에 제(齊)나라에서 고용살이를 하기도 하고, 술집의 점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몇 년 뒤 팽월은 그곳을 떠나 거야(巨野)로 가서 도적이 되었고, 난포는 어떤 사람에게 붙들려 연(燕)나라에서 노예생활을 했다. 그가 주인을 위해 원수를 갚아주었기 때문에 연나라 장수인 장도(臧荼)가 그를 추천해 도위(都尉)에 임명했다. 후에 장도는 연왕(燕王)이 되자 난포를 장군으로 삼았다.
장도가 반란을 일으키자 한나라는 연나라를 공격하고 난포를 사로잡았다. 양왕 팽월은 이 소식을 듣고 황제에게 말씀을 올려 난포를 위해 돈을 바쳐 죄를 보상하고 그를 양나라의 대부(大夫)로 삼았다.
난포가 제나라로 사신을 갔다가 돌아오지 않은 사이 한나라는 팽월을 소환해 모반죄로 처벌하고 삼족을 멸했다. 그러고는 팽월의 머리를 낙양 아래에 걸어놓고 다음과 “누구든 감히 그의 머리를 거두어 보살피는 사람이 있으면 즉시 체포할 것이다”라는 조칙을 내렸다.
난포는 제나라에서 돌아오자 팽월의 머리 아래에서 사신으로 갔던 일을 보고한 다음 제사를 지내고 통곡했다. 관리가 난포를 체포하고 그 사실을 고조에게 보고하자 “너도 팽월과 같이 모반을 했느냐? 내가 그 머리를 거두어 보살피지 말도록 금했거늘 너 혼자 그에게 제사를 지내고 통곡했으니, 팽월과 함께 모반을 했음이 분명하다. 즉시 저놈을 삶아 죽여라”라고 했다.
관리가 그를 잡아끌어 끓는 물로 데려가려는데 난포가 고개를 돌리며 “한마디 하고 죽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고조는 “무슨 말이냐”라고 했고 난포는 이렇게 말했다.
“폐하께서 팽성에서 곤경에 처하시고, 형양(滎陽)과 성고(成皐) 사이에서 패하셨을 때 항왕이 서쪽으로 진격할 수 없었던 것은 오로지 팽왕(彭王)이 양나라 땅을 지키고 있으면서 한나라와 연합해 초나라 군대를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그때 팽왕이 한쪽으로 치우쳐져 초나라와 연합했다면 한나라가 깨졌을 것이고, 한나라와 연합했다면 초나라가 깨졌을 것입니다.
또한 해하(垓下)의 전쟁에 팽왕이 참가하지 않았다면 항우는 멸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천하가 이미 평정되어 팽왕도 부절(符節)을 나누어 받고 봉토를 받았으니 그 또한 대대손손 전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폐하께서 양나라에 군대를 징집함에 있어서 팽왕이 병으로 나가지 못하자 폐하께서는 그가 모반했다고 의심하셔서 모반의 기미가 나타나지 않았는데도 끝내 가혹하게도 사소한 일로 그의 가족을 주멸하셨습니다. 신은 공신들마다 스스로 위태롭다고 느끼지 않을까 하는 것이 걱정됩니다. 이제 팽왕이 죽었으니 신은 살아 있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나으니 어서 삶아서 죽이십시오.”
이에 고조는 난포의 죄를 용서하고 그를 도위에 임명했다.
효문제 때 그는 연나라의 재상이 되었고 장군에까지 이르렀다. 난포는 “어려울 때 자신을 욕되게 하거나 뜻을 굽히지 못한다면 사내대장부라고 할 수가 없고, 부귀를 누릴 때 만족하지 못하면 현명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큰소리를 쳤다.
그래서 그는 그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들은 후하게 보답하고, 원한을 가졌던 사람들은 반드시 법으로 파멸시켰다. 오와 초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는 군공을 세워 유후(兪侯)에 봉해졌고 연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연과 제나라에서는 모두 난포를 위해 사당을 세웠는데 이를 난공사(欒公社)라 했다.
경제(景帝) 중원(中元) 5년, 난포가 세상을 떠나니 그 아들 분(賁)이 그의 작위를 계승해 태상(太常)이 되었으나 종묘제향(宗廟祭享)의 희생물이 법령에 맞지 않는 일로 봉국이 해체되었다.
太史公曰:以項羽之氣,而季布以勇顯於楚,身屨(典)軍搴旗者數矣,可謂壯士。然至被刑戮,為人奴而不死,何其下也!彼必自負其材,故受辱而不羞,欲有所用其未足也,故終為漢名將。賢者誠重其死。夫婢妾賤人感慨而自殺者,非能勇也,其計畫無復之耳。欒布哭彭越,趣湯如歸者,彼誠知所處,不自重其死。雖往古烈士,何以加哉!
【索隱述贊】季布、季心,有聲梁、楚。百金然諾,十萬致距。出守河東,股肱是與。欒布哭越,犯禁見虜。赴鼎非冤,誠知所處。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항우의 기개로도 덮을 수 없을 만큼 계포는 용맹함으로 초나라에서 이름을 드날렸다. 그는 여러 번 직접 적군을 무찌르고 적기를 탈취했으니 장사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형벌을 받고 다른 사람의 노예가 되었음에도 쉽게 자살하지 못했으니 또한 얼마나 비겁한가! 그는 필시 자신의 재주를 믿었기 때문에 비록 욕을 당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고 아직 제대로 펼쳐보지 못한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려 했을 것이다. 그랬기에 그는 끝내 한(漢)의 명장이 되었다. 현명한 사람은 진실로 자신의 죽음을 중히 여긴다. 저 노비나 천한 자가 분개해하며 자살하는 것은 진정한 용기라고 할 수 없다. 계획을 다시 고쳐서 실현할 용기가 없을 뿐이다.
난포(欒布)는 팽월(彭越)을 위해 통곡을 하고서 끓는 물에 들어가 죽는 것을 마치 집에 돌아가듯 했다. 그는 진실로 그가 처할 곳이 어디인가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자신의 죽음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비록 옛날의 열사들이지만 무엇을 더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