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歷史와文學/史記列傳

史記 卷一一三. 南越列傳

柳川 2019. 6. 3. 07:27

                                     南越列傳




南越王尉佗者,真定人也,姓趙氏。秦時已并天下,略定楊越,置桂林、南海、象郡,以謫徙民,與越雜處十三歲。佗,秦時用為南海龍川令。至二世時,南海尉任囂病且死,召龍川令趙佗語曰:「聞陳勝等作亂,秦為無道,天下苦之,項羽、劉季、陳勝、吳廣等州郡各共興軍聚眾,虎爭天下,中國擾亂,未知所安,豪傑畔秦相立。南海僻遠,吾恐盜兵侵地至此,吾欲興兵絕新道,自備,待諸侯變,會病甚。且番禺負山險,阻南海,東西數千里,頗有中國人相輔,此亦一州之主也,可以立國。郡中長吏無足與言者,故召公告之。」即被佗書,行南海尉事。囂死,佗即移檄告橫浦、陽山、湟谿關曰:「盜兵且至,急絕道聚兵自守!」因稍以法誅秦所置長吏,以其黨為假守。秦已破滅,佗即擊并桂林、象郡,自立為南越武王。高帝已定天下,為中國勞苦,故釋佗弗誅。漢十一年,遣陸賈因立佗為南越王,與剖符通使,和集百越,毋為南邊患害,與長沙接境。

高后時,有司請禁南越關市鐵器。佗曰:「高帝立我,通使物,今高後聽讒臣,別異蠻夷,隔絕器物,此必長沙王計也,欲倚中國,擊滅南越而并王之,自為功也。」於是佗乃自尊號為南越武帝,發兵攻長沙邊邑,敗數縣而去焉。高後遣將軍隆慮侯灶往擊之。會暑溼,士卒大疫,兵不能踰嶺。歲餘,高后崩,即罷兵。佗因此以兵威邊,財物賂遺閩越、西甌、駱,役屬焉,東西萬餘里。乃乘黃屋左纛,稱制,與中國侔。

及孝文帝元年,初鎮撫天下,使告諸侯四夷從代來即位意,喻盛德焉。乃為佗親冢在真定,置守邑,歲時奉祀。召其從昆弟,尊官厚賜寵之。詔丞相陳平等舉可使南越者,平言好畤陸賈,先帝時習使南越。乃召賈以為太中大夫,往使。因讓佗自立為帝,曾無一介之使報者。陸賈至南越,王甚恐,為書謝,稱曰:「蠻夷大長老夫臣佗,前日高后隔異南越,竊疑長沙王讒臣,又遙聞高后盡誅佗宗族,掘燒先人冢,以故自棄,犯長沙邊境。且南方卑溼,蠻夷中閒,其東閩越千人眾號稱王,其西甌駱裸國亦稱王。老臣妄竊帝號,聊以自娛,豈敢以聞天王哉!」乃頓首謝,願長為藩臣,奉貢職。於是乃下令國中曰:「吾聞兩雄不俱立,兩賢不并世。皇帝,賢天子也。自今以後,去帝制黃屋左纛。」陸賈還報,孝文帝大說。遂至孝景時,稱臣,使人朝請。然南越其居國竊如故號名,其使天子,稱王朝命如諸侯。至建元四年卒。


남월왕() 위타()는 상산() 진정(: 지금의 하북성 정정()) 사람으로, 성은 조씨()이다. 진()나라가 천하를 병탄하고 양월(: 즉 양월()으로 지금의 광서성, 광동성 일대의 영남() 지역)을 공략하여 평정시킨 뒤에 그곳에 계림군(), 남해군(), 상군()을 설치했다. 그리고 죄를 지은 사람들을 그곳으로 이주시켜 월()나라 사람들과 뒤섞여 살게 한 지 13년이 되었다. 조타(: 위타)는 진()나라 때 남해군의 용천현령()으로 임명되었다. 진나라의 2세 황제 때에 남해군위() 임효()가 병이 들어 임종 직전에 용천현령 조타를 불러 이렇게 당부했다.

“진승()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들었소. 진나라가 포학무도한 정책을 추진하여 천하의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니 항우(), 유방(), 진승, 오광() 등이 각자의 주군()에서 민중을 모아서 군대를 만들어서 사나운 호랑이처럼 천하의 패권을 다투는 중이오. 중원 지구가 동란으로 저리 소란스러운데 언제 안정될지 알 수 없소. 호걸들은 진나라를 배반하고 서로 대립하고 있소. 남해군은 중원과 동떨어진 곳으로 멀리 있지만, 나는 도적의 군대가 이 땅을 침범하여 이를까 두렵소. 그래서 내가 군사를 동원하여 중원과 새로 만든 길을 끊고 스스로 방비태세를 갖추어 제후들의 변란에 대비했는데, 공교롭게도 병이 심해졌다네. 또한 이곳 반우() 지역은 험준한 산세를 등지고 남쪽으로 바다를 끼고 있으며 동서의 길이가 수천 리에 달합니다. 그리고 일부 중국 사람들도 우리를 도움을 주는 자들이 있으니, 이곳 또한 한 지방의 중심지로 삼아서 나라를 세울 만하오. 군() 안의 장리() 중에 더불어 이 일을 도모할 자가 없기 때문에 공을 불러서 부탁하는 것이오.”

그런 후에 임효는 조타에게 임명 조서를 주어 남해군위의 직무를 대행하게 했다. 임효가 죽자, 위타는 곧바로 횡포(), 양산(), 황계관(谿)에 격문()을 돌려 이렇게 고했다. “장차 강도의 군대가 침입하려고 한다. 신속하게 도로를 차단하고 병력을 모아 스스로 방어하도록 하라.” 위타는 이를 기회로 삼아 진나라에서 임명한 관리들을 법을 내세워 점차적으로 처단하고, 자기 당파의 사람을 대리 관리로 삼았다. 진나라가 멸망하자 위타는 바로 계림군과 상군()을 공격하여 합병하고, 자립하여 남월의 무왕()이 되었다. 한나라 고조()가 중국천하를 평정한 후, 중원의 백성들이 수고로웠기 때문에 조타를 그대로 나두고 죽이지 않았다.

한나라 고조 11년(서기전 196년), 육고()를 남월로 파견하여 위타를 그대로 남월왕으로 삼았다. 더불어 부절()을 나누어 주고 상호 간에 사신을 통하게 하고, 그로 하여금 백월의 백성들을 화목하게 다스려서 한나라의 남쪽 변경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말도록 당부했다. 그리고 장사()를 접경지로 삼았다.

고후() 시대에 물자교역을 담당하던 관리가 남월의 변경 시장에서 철기()를 구매하는 것을 금지시키자고 청하자, 조타가 이렇게 말했다.

“고조 황제가 저를 남월왕으로 삼고 쌍방이 사신을 통하고 물자를 교역하도록 하였습니다. 지금 고후께서 참소하는 신하의 의견만 듣고 저희를 만이()로 분류하여 물자교역을 끊으려고 하니, 이는 반드시 장사왕()의 계책일 것입니다. 그는 중국에 의지해 남월을 격멸시키고, 더불어 남월왕까지 겸하여 자기 공로로 삼으려는 것입니다.”

이에 조타는 마침내 제멋대로 자신의 존호()를 올려서 남월의 무제()라고 칭하고 출병하여 장사국 변경의 성읍을 공격하여 몇 개의 현()을 치고 물러갔다. 고후는 장군 융려후() 주조()을 파견하여 조타를 토벌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때마침 무더위와 습한 기후 때문에 병졸 사이에 돌림병이 번져서 한나라 군대는 양산령()을 넘지도 못했다. 1년쯤 지난 뒤에 고후가 죽자, 한나라 군대는 곧 진군을 멈추었다.

조타는 이를 계기로 군대를 변경으로 보내 위협하고, 뇌물을 써서 민월(), 서구(西), 낙월()을 남월로 복속시키니, 그 영역이 동서의 길이로 만여 리에 달했다. 이에 조타는 황옥좌독(: 천자가 타는 수레와 깃발. 황옥은 수레의 지붕을 겉은 파랗게 안은 누렇게 비단으로 장식한 것이고, 좌둑은 쇠꼬리로 장식한 큰 기())을 타고 마치 황제와 같이 명령을 내리고, 그 지위를 한나라와 대등하게 했다.

효문제() 원년(서기전 179년), 황제가 즉위하고 처음으로 중국천하를 안정시키고 민심을 달랬다. 제후들과 사방 오랑캐의 군장()에게 사신을 파견하여 효문제가 대국()에서 경성으로 들어와 즉위한 뜻을 고하고, 천자의 크고 훌륭한 덕()을 알리도록 했다. 그리고 위타 부모의 무덤이 진정()에 있는 것을 알고, 그곳에 묘지를 지키는 민가를 두어 매년 때에 맞추어 제사를 받들도록 하고, 또 위타의 종형제()를 불러 존귀한 관직을 주고 후한 상을 하사하여 그들을 총애하고 있다는 것을 표시했다.

황제는 승상() 진평() 등에게 남월에 사자로 보낼만한 자를 천거하라고 명하니, 진평은 호치() 사람 육고가 일찍이 고조 때에 여러 차례 남월에 사자로 간 적이 있어서 그곳 사정에 익숙하다고 아뢰었다.

이에 천자가 육고를 불러 태중대부()로 삼아 사신으로 보내며, 겸하여 조타가 자립하여 멋대로 황제라고 칭하고, 또 한 번도 사신을 보내 천자에게 보고하지 않음을 꾸짖게 했다. 육고가 남월에 도착하자, 남월왕은 매우 두려워해 천자에게 상서를 올려서 이렇게 사죄했다.

“만이의 대군장()인 늙은 신하 조타는 종전에 고후께서 남월을 격리하여 차별 대우하기에 장사왕이 신을 참소한 것이라고 의심했습니다. 또 이 먼 곳에서 소문을 들으니, 고후께서 신의 친족을 모두 죽이고 조상의 무덤을 파서 불태웠다고 했습니다. 이 때문에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장사의 변경 지역을 침범했습니다. 또한 남방은 지대가 낮고 습한 땅으로 만이가 중간에 처해 있습니다. 동쪽의 변경의 민월은 백성이 겨우 1천명에 지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왕()’이라고 칭하고, 서쪽의 구락(: 낙월()로 백월의 한 일족)과 나국() 역시 ‘왕’이라고 칭합니다. 그래서 노신이 망령되게 황제의 존호를 몰래 써서 무료할 때에 스스로 안위를 삼았던 것인데, 어찌 이 일을 감히 이를 천자께 보고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곧바로 조타는 천자가 있는 방향을 향하여 깊게 머리를 조아려 사죄를 청하고, 앞으로 장구하게 한나라의 번신()이 되어 천자에게 조공의 직책을 준수할 것을 다짐했다. 또 즉시 나라 안에 다음과 같은 명령을 선포했다. “나는 두 영웅호걸이 병존할 수 없고, 두 현인()이 한세상에 살 수 없다고 들었다. 한나라의 황제는 어진 천자이시다. 지금부터 나는 황제처럼 처신하지 않을 것이고, 다시는 황옥좌독의 타지 않겠노라.”

육고가 경성으로 돌아와서 이 사건을 보고하니, 효문제는 크게 기뻐했다.

효경제() 시대에 이르러 위타는 한나라에게 스스로 신()이라고 일컫고 봄과 가을 두 차례 사자를 장안으로 보내어 천자를 알현토록 하였다. 그러나 남월에서는 조타는 몰래 황제의 칭호를 썼고, 단지 천자에게 사자를 보내 알현할 때에만 ‘왕’이라고 칭하며 다른 제후들과 마찬가지로 황제의 명을 받도록 하였다. 건원() 4년(서기전 137년)에 조타가 사망했다.



佗孫胡為南越王。此時閩越王郢興兵擊南越邊邑,胡使人上書曰:「兩越俱為藩臣,毋得擅興兵相攻擊。今閩越興兵侵臣,臣不敢興兵,唯天子詔之。」於是天子多南越義,守職約,為興師,遣兩將軍往討閩越。兵未踰嶺,閩越王弟餘善殺郢以降,於是罷兵。

天子使莊助往諭意南越王,胡頓首曰:「天子乃為臣興兵討閩越,死無以報德!」遣太子嬰齊入宿衛。謂助曰:「國新被寇,使者行矣。胡方日夜裝入見天子。」助去後,其大臣諫胡曰:「漢興兵誅郢,亦行以驚動南越。且先王昔言,事天子期無失禮,要之不可以說好語入見。入見則不得復歸,亡國之勢也。」於是胡稱病,竟不入見。後十餘歲,胡實病甚,太子嬰齊請歸。胡薨,謚為文王。



嬰齊代立,即藏其先武帝璽。嬰齊其入宿衛在長安時,取邯鄲樛氏女,生子興。及即位,上書請立樛氏女為后,興為嗣。漢數使使者風諭嬰齊,嬰齊尚樂擅殺生自恣,懼入見要用漢法,比內諸侯,固稱病,遂不入見。遣子次公入宿衛。嬰齊薨,謚為明王。

太子興代立,其母為太后。太后自未為嬰齊姬時,嘗與霸陵人安國少季通。及嬰齊薨後,元鼎四年,漢使安國少季往諭王、王太后以入朝,比內諸侯;令辯士諫大夫終軍等宣其辭,勇士魏臣等輔其缺,衛尉路博德將兵屯桂陽,待使者。王年少,太後中國人也,嘗與安國少季通,其使復私焉。國人頗知之,多不附太后。太后恐亂起,亦欲倚漢威,數勸王及群臣求內屬。即因使者上書,請比內諸侯,三歲一朝,除邊關。於是天子許之,賜其丞相呂嘉銀印,及內史、中尉、太傅印,餘得自置。除其故黥劓刑,用漢法,比內諸侯。使者皆留填撫之。王、王太后飭治行裝重齎,為入朝具。


영제는 남월왕의 자리를 계승한 뒤에 곧바로 그의 선조였던 무제의 옥새를 감추어두었다. 영제가 한나라 장안()에 들어가 숙위를 설 때에 한단()의 규씨() 딸을 아내로 취하여 아들 흥()을 낳았다. 영제는 왕으로 즉위한 뒤에 천자에게 상서를 올려서 규씨의 딸을 왕후로 삼고, 흥을 태자로 세우겠다고 청했다.

한나라에서는 자주 사자를 파견하여 영제로 하여금 입조하여 천자에게 배알을 드리라고 은근하게 권고했다. 그런데 영제는 언제나 살생을 자행하는 것을 즐겼다. 그래서 한나라에 입조하여 천자를 배알하면, 반드시 내지의 다른 제후들처럼 한나라 법령에 속박을 받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 때문에 병을 핑계 삼아 끝내 입조하여 천자를 배알하지 않고, 대신 아들 차공()을 장안으로 보내 숙위하도록 했다. 영제가 죽자 그에게 명왕()이란 시호를 하사했다.

태자 조흥이 남월왕으로 즉위하자, 그의 모친은 자연히 태후()로 승격되었다. 태후가 영제의 처가 되기 전에 일찍이 패릉() 사람인 안국소계()와 사통한 적이 있었다.

영제가 죽은 뒤인 원정() 4년(서기 전 113년)에 한나라 조정에는 안국소계를 보내 남월왕과 왕태후에게 다른 내지의 제후들처럼 입조하여 천자를 배알하기를 권하게 했다. 이때에 입담이 좋은 간대부() 종군() 등을 동행시켜 그 뜻을 선전하게 하였고, 용사() 위신() 등으로 하여금 모자란 점을 도와주게 하였으며, 위위() 노박덕()에게는 군대를 이끌고 계양()에 주둔해 사신 일행을 기다리도록 하였다. 남월왕은 어렸고, 왕태후는 중원 출신으로 일찍이 안국소계와 사통한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사신으로 오자 왕태후는 다시 사통하였다. 남월국의 사람들이 이 일이 알고, 대부분 왕태후를 따르지 않게 되었다.

이에 태후는 분란이 발생할 것을 두려웠고, 한나라의 위세에 의지할 생각으로 자주 남월왕과 군신들에게 한나라 조정으로 귀속하기를 권유했다. 그리고 곧바로 사신을 통하여 천자에게 상서를 올려, 내지의 제후들과 마찬가지로 3년에 한 번씩 입조하여 천자를 배알하고 변경의 관문을 철폐할 것을 청하게 했다.

이에 천자는 그들의 청을 윤허하고, 남월의 승상인 여가()에게는 은인()을, 내사(), 중위(), 태부()에게는 각기 인장을 하사하고, 그 나머지 관직에 대해서는 남월에서 스스로 알아서 두도록 했다. 그동안 남월에서 시행했던 경형(: 묵형, 이마나 팔뚝 등에 먹물로 죄명을 써놓는 형벌)과 의형(: 코를 베는 형벌)을 폐지하고, 내지의 제후들과 마찬가지로 한나라의 법률을 적용하도록 했다.

그리고 한나라의 사자에게 남월에서 머물면서 그들을 위로하게 했다. 남월왕과 왕태후에게 행장을 꾸리고 후한 예물을 갖추어 입조하여 천자에게 배알 드리는 것을 준비하도록 했다.



其相呂嘉年長矣,相三王,宗族官仕為長吏者七十餘人,男盡尚王女,女盡嫁王子兄弟宗室,及蒼梧秦王有連。其居國中甚重,越人信之,多為耳目者,得眾心愈於王。王之上書,數諫止王,王弗聽。有畔心,數稱病不見漢使者。使者皆注意嘉,勢未能誅。王、王太后亦恐嘉等先事發,乃置酒,介漢使者權,謀誅嘉等。使者皆東鄉,太后南鄉,王北鄉,相嘉、大臣皆西鄉,侍坐飲。嘉弟為將,將卒居宮外。酒行,太后謂嘉曰:「南越內屬,國之利也,而相君苦不便者,何也?」以激怒使者。使者狐疑相杖,遂莫敢發。嘉見耳目非是,即起而出。太后怒,欲鏦嘉以矛,王止太後。嘉遂出,分其弟兵就舍,稱病,不肯見王及使者。乃陰與大臣作亂。王素無意誅嘉,嘉知之,以故數月不發。太后有淫行,國人不附,欲獨誅嘉等,力又不能。

天子聞嘉不聽王,王、王太后弱孤不能制,使者怯無決。又以為王、王太后已附漢,獨呂嘉為亂,不足以興兵,欲使莊參以二千人往使。參曰:「以好往,數人足矣;以武往,二千人無足以為也。」辭不可,天子罷參也。郟壯士故濟北相韓千秋奮曰:「以區區之越,又有王、太后應,獨相呂嘉為害,願得勇士二百人,必斬嘉以報。」於是天子遣千秋與王太后弟樛樂將二千人往,入越境。呂嘉等乃遂反,下令國中曰:「王年少。太後,中國人也,又與使者亂,專欲內屬,盡持先王寶器入獻天子以自媚,多從人,行至長安,虜賣以為僮仆。取自脫一時之利,無顧趙氏社稷,為萬世慮計之意。」乃與其弟將卒攻殺王、太后及漢使者。遣人告蒼梧秦王及其諸郡縣,立明王長男越妻子術陽侯建德為王。而韓千秋兵入,破數小邑。其後越直開道給食,未至番禺四十里,越以兵擊千秋等,遂滅之。使人函封漢使者節置塞上,好為謾辭謝罪,發兵守要害處。於是天子曰:「韓千秋雖無成功,亦軍鋒之冠。」封其子延年為成安侯。樛樂,其姊為王太后,首願屬漢,封其子廣德為龍亢侯。乃下赦曰:「天子微,諸侯力政,譏臣不討賊。今呂嘉、建德等反,自立晏如,令罪人及江淮以南樓船十萬師往討之。」


남월의 승상 여가()는 연로하고, 세 명의 왕을 섬긴 자였다. 그의 종족 중에 고위 관리가 된 자가 70여 명이 되었고, 그 가문의 남자들은 대부분 왕녀()에게 장가들고, 여자들은 왕자 및 왕의 형제나 종실 사람에게 시집을 갔다. 또 창오()의 진왕()과는 통혼한 관계였다. 그는 나라 안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여 월나라 사람들은 그를 믿고 심지어 측근이 되려는 자가 많았다. 그는 왕보다 민심을 더 얻고 있었다. 남월왕이 천자에게 한나라에 귀속하려는 상서를 올리려고 할 때에 여가는 거듭 만류했으나 왕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여가는 모반할 것을 염두에 두고 자주 병을 핑계 삼아 한나라의 사신을 만나지 않았다. 한나라의 사신들은 모두 여가의 언행에 대해 각별하게 주의했으나, 형세가 마땅하지 않아서 그를 죽이지 못했다. 남월왕과 왕태후 또한 여가가 먼저 난을 일으킬까 두려워했다.

그래서 주연을 베풀어 한나라 사신의 권세에 도움을 받아서 여가의 일당들을 죽이려고 도모했다. 주연 석상에서 한나라의 사신들은 모두 동향()으로, 왕태후는 남향()으로, 남월왕은 북향()으로, 승상 여가와 대신들은 모두 서향(西)하여 앉도록 배치하고 술을 마셨다.

이 때 여가의 아우는 장군으로 부하들을 거느리고 궁 밖에 대기하고 있었다. 이윽고 술잔이 돌자, 왕태후는 여가에게 이렇게 말했다. “남월이 한나라에 귀속하는 것은 나라의 이익인데, 승상은 불편하다고 꺼리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왕태후는 이를 계기로 한나라의 사신을 격노시키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사신들은 왕태후의 의도를 알아채지 못하고 의심쩍은 눈길로 상대방에게 미룰 뿐, 끝내 누구도 감히 나서지 못했다. 여가는 주연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것을 눈치 채고 벌떡 일어나 나가려 했다. 이에 왕태후가 격노하여 창으로 여가를 찌르려고 하자, 왕이 보고 태후를 저지시켰다.

여가는 마침내 빠져나와서 자기 아우의 병사를 나누어 자신의 집을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병을 핑계로 삼고 왕과 사신들을 만나러 가지 않았다. 여가는 비밀리에 대신들과 더불어 반란을 일으킬 준비를 했다. 왕은 줄곧 여가를 죽일 뜻이 없었고, 여가 또한 그러한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여러 달이 지나는 동안에 반란은 여전히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왕태후는 자신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남월국의 사람들이 모두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독자적으로 여가를 살해하려고 했지만, 그럴 만한 능력이 없었다.

한나라 천자는 여가가 남월왕의 명령을 듣지 않고, 남월왕과 왕태후는 힘이 약하고 세력이 없어 여가를 제어하지 못하며, 사신들은 겁을 먹고 이를 처단할 능력이 없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또 남월왕과 왕태후가 이미 한나라에 귀속되었기 때문에 여가가 독단적으로 반란을 일으켜도 군대를 보낼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장삼()에게 군사 2천 명을 주어 남월의 사자로 보내려고 하니, 장삼이 이렇게 사양했다. “만약에 우호적인 담판을 위해서 간다면 몇 사람이면 충분합니다. 그러나 무력행사를 하려고 가는 것이라면 2천 명으로는 성사시키기가 어렵습니다.” 이에 천자는 장삼을 그만두게 하였다.

그러자 겹() 땅의 장사 출신으로서 원래 제북왕()의 승상이었던 한천추()가 분연하게 아뢰었다. “월나라는 작을 지역이고 또 안에서 그 왕과 태후가 호응하고 있습니다. 오직 승상 여가만이 방해가 될 뿐입니다. 원컨대 저에게 용사 2백 명을 주신다면 즉시 남월로 가서 반드시 여가를 죽이고 돌아와서 천자에게 보고하겠습니다.”

이에 천자는 한천추와 왕태후의 아우 규락()에게 병사 2천 명을 거느리고 남월의 변경으로 들어가게 했다. 그들이 남월의 경내로 진입하자 여가 등은 마침내 반란을 일으키고 더불어 남월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국왕은 나이가 어리고, 태후는 원래 중국 사람이다. 또 태후는 한나라의 사신과 음란한 관계를 맺고, 오로지 한나라에 귀속하길 바라며 선왕의 진귀한 보기(: 왕권을 상징하는 보배로운 기물)를 모두 한나라의 천자에게 바치고 비위만을 맞추려고 하고 있다. 그리고 많은 백성들을 장안으로 데리고 가서 한나라 사람들의 종으로 팔아먹으려고 한다. 그녀는 단지 남월에서 벗어나서 자신을 위한 일시적인 이익만을 취하고, 조씨()의 사직을 보살피고 후세를 위한 책략을 세울 뜻이 전혀 없다.”

그리고 여가는 자기 아우와 더불어 군사를 거느리고 남월왕, 왕태후와 한나라의 사신을 죽이고, 이 사실을 창오의 진왕과 각 군현()의 관리에게 알린 다음, 명왕(: 조영제)의 장남과 남월 출신의 아내가 낳은 아들인 술양후() 건덕()을 남월왕으로 옹립했다. 이 무렵에 한천추의 군대 남월의 경내로 진격하여 몇 개의 작은 고을들을 격파시켰다. 그러자 남월의 사람들은 곧바로 한천추에게 길을 터주고 양식까지 공급하여 내지로 순조롭게 진격하도록 했다, 한천추의 군대가 반우에서 약 40리 정도 떨어진 곳이 이르니, 남월의 군대가 한천추 등을 공격하여 마침내 궤멸시켰다.

그리고 여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한나라 사자의 부절()을 나무 상자에 넣고 변방의 요새에다 감추어두고 한나라 조정에 거짓으로 사죄하는 척했다. 동시에 군대를 요충지로 파견하여 지키게 했다. 이에 천자가 이렇데 말했다. “한천추는 비록 성공시키지 못했지만 최선봉에 나섰던 군인 중에 으뜸이었다.” 그리고 한천추의 아들인 한연년()을 성안후()로 봉했다.

규락의 누이가 왕태후였고, 왕태후가 남월에서 가장 먼저 한나라에 귀속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규락의 아들인 규광덕()을 용항후()로 봉했다. 그리고 천자는 바로 다음과 같은 사면령을 내렸다. “천자는 미약하고 제후가 폭정을 일삼는데도 신하가 되어서 역적을 토벌하지 않는 것을 비난하노라. 지금 여가, 조건덕 등이 반란을 일으켜 태연스럽게 자립하여 왕이라고 자처한다. 짐은 지금 죄수들을 사면하니, 그들과 더불어 강회() 이남의 10만 수군()들은 남월에서 반역한 무리를 정벌하도록 하라!”



元鼎五年秋,衛尉路博德為伏波將軍,出桂陽,下匯水;主爵都尉楊仆為樓船將軍,出豫章,下橫浦;故歸義越侯二人為戈船、下厲將軍,出零陵,或下離水,或柢蒼梧;使馳義侯因巴蜀罪人,發夜郎兵,下牂柯江:咸會番禺。

元鼎六年冬,樓船將軍將精卒先陷尋陜,破石門,得越船粟,因推而前,挫越鋒,以數萬人待伏波。伏波將軍將罪人,道遠,會期後,與樓船會乃有千餘人,遂俱進。樓船居前,至番禺。建德、嘉皆城守。樓船自擇便處,居東南面;伏波居西北面。會暮,樓船攻敗越人,縱火燒城。越素聞伏波名,日暮,不知其兵多少。伏波乃為營,遣使者招降者,賜印,復縱令相招。樓船力攻燒敵,反驅而入伏波營中。犁旦,城中皆降伏波。呂嘉、建德已夜與其屬數百人亡入海,以船西去。伏波又因問所得降者貴人,以知呂嘉所之,遣人追之。以其故校尉司馬蘇弘得建德,封為海常侯;越郎都稽得嘉,封為臨蔡侯。

蒼梧王趙光者,越王同姓,聞漢兵至,及越揭陽令定自定屬漢;越桂林監居翁諭甌駱屬漢:皆得為侯。戈船、下厲將軍兵及馳義侯所發夜郎兵未下,南越已平矣。遂為九郡。伏波將軍益封。樓船將軍兵以陷堅為將梁侯。自尉佗初王後,五世九十三歲而國亡焉。


무제 원정() 5년(서기전 112년) 가을, 위위() 노박덕()은 복파장군()으로 삼아서 계양()에서 출병하여 회수()로 내려가게 했고, 주작도위() 양복()은 누선장군()으로 임명하여 예장()을 걸쳐 횡포()로 내려가도록 했다. 예전에 월나라 출신으로 한나라로 투항하여 제후로 봉해진 두 사람은 과선장군()과 하려장군()으로 삼아 영릉()에서 출병하여 각기 이수()와 창오에 이르도록 하였다. 치의후()에게는 파촉()에서 사면된 죄수들을 거느리고 야랑()의 군대까지 출동시켜 곧바로 장가강()을 내려가게 했다. 그리하여 최후에 반우에서 총집결했다.

원정 6년(서기전 111년) 겨울, 누선장군은 정예 병사를 끌고 먼저 심협()을 함락시킨 후에 석문()을 격파하여 남월의 전함과 군량을 획득했다. 이에 승기를 타고 진격하여 남월의 선봉부대를 깨뜨리고, 수만 명의 대군을 거느리며 복파장군을 기다렸다. 복파장군은 사면시킨 죄수 부대를 이끌었는데, 행군 길이 멀어서 복파장군과 만나기로 한 일자보다 늦어졌고, 이로 인해 누선장군과 회합했을 때에는 남은 군사는 겨우 1천여 명의 군사에 불과했다. 하지만 마침내 함께 진격했는데, 누선장군의 부대가 선봉에 서서 반우에 도착했을 때에 남월의 건덕과 여가가 모두 성을 사수하고 있었다.

누선장군이 스스로 지형이 유리한 곳을 택하여 반우의 동남쪽에 주둔하고, 복파장군은 반우의 서북쪽에 주둔했다. 때마침 날이 저물었는데, 누선장군은 바로 남월 군대를 공격하여 반우성에 불을 질렀다. 남월 사람들은 평소부터 복파장군의 명성은 듣고, 날까지 저물어서 그의 병력이 얼마나 되는 알지 못했다.

이 때에 복파장군은 바로 병영을 만들고, 사자를 적군에게 보내어 투항자들을 불러들였다. 투항한 자에게는 인()을 주고, 또 그들에게 성으로 돌아가서 다른 투항자를 불러오도록 했다. 누선장군은 전력을 다해 공격하여 적의 진영을 불태웠다. 그리하자 도리어 적군들을 복파장군의 병영 쪽으로 모는 형국이 되어 새벽녘에는 성 안 적들이 모두 복파장군에게 항복하게 되었다. 여가와 조건덕은 이미 형세가 기운 것을 알고 야밤에 수백 명의 부하만 데리고 바닷가로 도피하여 배를 타고 서쪽으로 떠나 가버렸다.

복파장군은 또 투항한 남월의 귀족들을 심문하여 여가의 무리가 도망간 방향을 알아내어 급히 추격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원래 교위() 출신으로 복파장군의 사마()인 소홍()이 조건덕을 체포하여 그 공으로 해상후()에 봉해졌다. 또 남월 출신의 낭관() 도계()가 여가를 체포하여, 그 공으로 임채후()에 봉해졌다.

창오왕 조광()은 남월왕과 같은 성이었다. 그는 한나라의 군대가 이미 도착했다는 소문을 듣고, 남월의 게양현령() 정()을 통하여 자신은 한나라로 귀속하기로 결정했다는 뜻을 알렸다. 또 남월의 계림군감() 거옹()도 구월()과 낙월()에게 한나라로 귀속할 것을 권유하여 모두 후()에 봉해졌다. 과선장군, 하려장군의 군대와 치의후가 동원한 야랑의 군대는 아직 도달하기도 전에 남월은 이미 평정되었다.

이에 한나라는 이 지역에 9개의 군()을 설치했다. 복파장군에게는 봉읍()이 더해졌고, 누선장군은 견고한 적의 성을 함락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장량후()에 봉해졌다. 남월은 위타(조타)가 최초로 왕을 칭한 뒤부터 오세()까지 전해졌고, 모두 93년 만에 나라가 멸망되었다.



太史公曰:尉佗之王,本由任囂。遭漢初定,列為諸侯。隆慮離溼疫,佗得以益驕。甌駱相攻,南越動搖。漢兵臨境,嬰齊入朝。其後亡國,徵自樛女;呂嘉小忠,令佗無後。樓船從欲,怠傲失惑;伏波困窮,智慮愈殖,因禍為福。成敗之轉,譬若糾墨。

【索隱述贊】中原鹿走,群雄莫制。漢事西驅,越權南裔。陸賈騁說,尉他去帝。嫪後內朝,呂嘉狼戾。君臣不協,卒從剿棄。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위타(, 조타)가 남월왕이 된 것은 본래 임효()의 발탁과 권유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때 마침 한나라가 금방 중국천하를 안정시킬 무렵이었기 때문에 위타는 운 좋게 제후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융려후()가 한나라 군대를 이끌고 남월 정벌을 나섰다가 무더위와 습한 기후를 만나 전염병으로 퇴각하니, 이 덕분에 조타가 더욱 교만해졌다. 구월()과 낙월()이 서로 공격할 때에 남월()의 국세는 동요했다. 한나라의 대군이 그들의 국경을 압박하자 남월에서는 태자 영제()를 입조시켰다.

뒤에 남월이 멸망하게 된 것은 영제가 규씨()의 딸에게 장가 든 것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여가()의 작은 충성심이 조씨 왕위 계승자가 끊어지게 만들었다. 누선장군()은 욕심을 좇아 태만하고 오만하게 처신하여 미혹 속에 빠져들었고, 복파장군()은 곤궁한 속에서도 더욱 지혜롭게 처신하여 화를 복으로 만들었다. 성패의 돌고 도는 것이 마치 꼬인 오랏줄이 엎치락뒤치락 바뀌는 것과 같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