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歷史와文學/史記列傳

史記 卷一一四. 東越列傳

柳川 2019. 6. 3. 07:31

                                     東越列傳




閩越王無諸及越東海王搖者,其先皆越王句踐之後也,姓騶氏。秦已并天下,皆廢為君長,以其地為閩中郡。及諸侯畔秦,無諸、搖率越歸鄱陽令吳芮,所謂鄱君者也,從諸侯滅秦。當是之時,項籍主命,弗王,以故不附楚。漢擊項籍,無諸、搖率越人佐漢。漢五年,復立無諸為閩越王,王閩中故地,都東冶。孝惠三年,舉高帝時越功,曰閩君搖功多,其民便附,乃立搖為東海王,都東甌,世俗號為東甌王。

後數世,至孝景三年,吳王濞反,欲從閩越,閩越未肯行,獨東甌從吳。及吳破,東甌受漢購,殺吳王丹徒,以故皆得不誅,歸國。

吳王子子駒亡走閩越,怨東甌殺其父,常勸閩越擊東甌。至建元三年,閩越發兵圍東甌。東甌食盡,困,且降,乃使人告急天子。天子問太尉田蚡,蚡對曰:「越人相攻擊,固其常,又數反覆,不足以煩中國往救也。自秦時棄弗屬。」於是中大夫莊助詰蚡曰:「特患力弗能救,德弗能覆;誠能,何故棄之?且秦舉咸陽而棄之,何乃越也!今小國以窮困來告急天子,天子弗振,彼當安所告愬?又何以子萬國乎?」上曰:「太尉未足與計。吾初即位,不欲出虎符發兵郡國。」乃遣莊助以節發兵會稽。會稽太守欲距不為發兵,助乃斬一司馬,諭意指,遂發兵浮海救東甌。未至,閩越引兵而去。東甌請舉國徙中國,乃悉舉眾來,處江淮之閒。

至建元六年,閩越擊南越。南越守天子約,不敢擅發兵擊而以聞。上遣大行王恢出豫章,大農韓安國出會稽,皆為將軍。兵未踰嶺,閩越王郢發兵距險。其弟餘善乃與相、宗族謀曰:「王以擅發兵擊南越,不請,故天子兵來誅。今漢兵眾彊,今即幸勝之,后來益多,終滅國而止。今殺王以謝天子。天子聽,罷兵,固一國完;不聽,乃力戰;不勝,即亡入海。」皆曰「善」。即鏦殺王,使使奉其頭致大行。大行曰:「所為來者誅王。今王頭至,謝罪,不戰而耘,利莫大焉。」乃以便宜案兵告大農軍,而使使奉王頭馳報天子。詔罷兩將兵,曰:「郢等首惡,獨無諸孫繇君丑不與謀焉。」乃使郎中將立丑為越繇王,奉閩越先祭祀。

餘善已殺郢,威行於國,國民多屬,竊自立為王。繇王不能矯其眾持正。天子聞之,為餘善不足復興師,曰:「餘善數與郢謀亂,而後首誅郢,師得不勞。」因立餘善為東越王,與繇王并處。

至元鼎五年,南越反,東越王餘善上書,請以卒八千人從樓船將軍擊呂嘉等。兵至揭揚,以海風波為解,不行,持兩端,陰使南越。及漢破番禺,不至。是時樓船將軍楊仆使使上書,願便引兵擊東越。上曰士卒勞倦,不許,罷兵,令諸校屯豫章梅領待命。

元鼎六年秋,餘善聞樓船請誅之,漢兵臨境,且往,乃遂反,發兵距漢道。號將軍騶力等為「吞漢將軍」,入白沙、武林、梅嶺,殺漢三校尉。是時漢使大農張成、故山州侯齒將屯,弗敢擊,卻就便處,皆坐畏懦誅。

餘善刻「武帝」璽自立,詐其民,為妄言。天子遣橫海將軍韓說出句章,浮海從東方往;樓船將軍楊仆出武林;中尉王溫舒出梅嶺;越侯為戈船、下瀨將軍,出若邪、白沙。元封元年冬,咸入東越。東越素發兵距險,使徇北將軍守武林,敗樓船軍數校尉,殺長吏。樓船將軍率錢唐轅終古斬徇北將軍,為御兒侯。自兵未往。

故越衍侯吳陽前在漢,漢使歸諭餘善,餘善弗聽。及橫海將軍先至,越衍侯吳陽以其邑七百人反,攻越軍於漢陽。從建成侯敖,與其率,從繇王居股謀曰:「餘善首惡,劫守吾屬。今漢兵至,眾彊,計殺餘善,自歸諸將,儻幸得脫。」乃遂俱殺餘善,以其眾降橫海將軍,故封繇王居股為東成侯,萬戶;封建成侯敖為開陵侯;封越衍侯吳陽為北石侯;封橫海將軍說為案道侯;封橫海校尉福為繚嫈侯。福者,成陽共王子,故為海常侯,坐法失侯。舊從軍無功,以宗室故侯。諸將皆無成功,莫封。東越將多軍,漢兵至,棄其軍降,封為無錫侯。

於是天子曰東越狹多阻,閩越悍,數反覆,詔軍吏皆將其民徙處江淮閒。東越地遂虛。


민월왕() 무제()와 월()나라의 동해왕() 요()는 모두 월왕() 구천()의 후손으로 성은 추씨()이다. 진()나라가 천하를 합병한 뒤에 모두 왕에서 폐위되어 군장()으로 삼았으며 그들이 다스린 지역은 민중군()이 되었다.

제후들이 진나라에 반기를 들자, 무제와 요는 월나라 백성들이 거느리고 파양현령() 오예(: ?~서기전 202. 장사왕)에게 귀순했다. 오예는 파군()으로 불렸던 자로 제후들을 따라 진나라를 멸망시키는데 참여했다. 당시 항적(: 항우)이 서초패왕이 되어 제후들을 호령했는데, 무제와 요를 왕으로 삼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도 초()나라에 귀순하지 않았다.

한왕(: 유방, 한고조)가 항적을 공격할 때 무제와 요는 월나라 사람들을 거느리고 한왕을 도왔다. 한나라 5년(서기전 202년), 무제를 다시 민월왕으로 삼고, 민중()의 옛 땅을 다스리게 하였으며 왕도를 동야(: 지금의 복주시)에 두게 했다.

효혜제() 3년(서기전 193년), 고조 때에 월나라 사람들이 도움을 주었던 공을 거론하여 민군() 요가 공로가 많고, 월나라 백성들이 요를 잘 따른다고 하여 요를 동해왕으로 삼고, 동구()에 왕도로 정하게 했다. 세속에서는 그를 '동구왕()'이라고 일컬었다.

그 뒤 몇 세대가 지난 효경제() 3년 때에 오왕() 유비(: 고조의 조카이며 문제의 종형)가 반란을 일으키고, 민월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반란에 동참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민월은 동조하지 않았고, 단지 동구만이 오왕 유비의 반란에 참여했다. 그러나 오나라의 반란이 평정될 무렵에 동구는 한나라에게 금전을 받고 매수되어 단도()에서 오왕 유비를 살해했다. 이 때문에 동구는 반란에 참여한 죄에서 벗어나 자기 나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오왕의 아들 자구()가 민월로 도망가서 동구가 자기 부친을 죽인 것에 원한을 품고 자주 민월에게 동구를 치라고 종용했다.

무제 건원() 3년(서기전 138년), 마침내 민월은 군대를 출동시켜 동구를 포위하고 공격했다. 동구는 양식이 바닥나는 곤경에 처하고 장차 투항하지 않을 수 없는 절박할 상태에서 바로 한나라 무제에게 사람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무제는 당시 태위()였던 전분()에게 이 사건에 대한 의견을 물으니, 전분이 대답했다. “월나라 사람끼리 서로 공격하는 것은 본디 항상 있던 일이고, 또 자주 반복됩니다. 그러니 중국을 번거롭게 하면서까지 구원할 가치가 없습니다. 진()나라 때부터 그들을 내버려두고 예속시키지 않았습니다.”

이에 중대부() 장조(: 엄조)가 전분을 이렇게 힐책했다. “단지 힘이 부족하여 그들을 구제할 수 없고, 은덕이 깊지 않아서 그들의 허물을 덮어주지 못하는 것을 걱정해야 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참으로 능력이 있다면 무엇 때문에 그들을 내버려둡니까? 또한 진나라는 다급해지자 자신들의 수도였던 함양()까지도 포기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월나라만을 내버려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지금 소국이 곤경에 처해 황제에게 다급한 사정을 호소하는데도 구원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장차 어디에서 구원을 요청할 것이며, 또 황제께서는 어떻게 만국의 백성들을 자식처럼 보살필 수 있습니까?"

황제가 말했다. “태위의 주장은 더불어 토론하기에 부족하오. 짐은 금방 즉위했기 때문에 호부(: 병부)를 내어 군국()에서 군대를 동원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소.” 그리하여 바로 장조를 파견하여 부절을 가지고 회계()에서 군대를 출정토록 했다.

그러나 회계 태수는 항명하고 장조에게 군대를 주어 출정시키지 않았다. 그래서 장조는 결국 사마() 한 사람을 베고 황제의 결연한 뜻을 밝히자 회계태수는 비로소 군대를 출정시켜 바다를 건너가 동구를 구원하러 떠났다.

한나라 군대가 미처 동구에 도착하기도 전에, 민월은 군대를 이끌고 철수했다. 동구는 나라 안의 백성을 거느리고 중국으로 이주하기를 청구했고, 이에 모든 백성들이 중국으로 이주하였데, 강회() 일대에서 거주했다.

무제 건원() 6년(서기전 135년), 민월이 남월()을 공격했다. 남월은 황제와의 약속을 준수하여 함부로 군대를 동원하지 않고, 이 사건을 황제에게 보고했다. 황제는 대행() 왕회()를 파견하여 예장()으로 진격하게 하고, 대농() 한안국()으로 하여금 회계에서 출격하게 하였는데, 이들을 모두 장군으로 삼았다. 그들의 군대가 양산령()을 넘기도 전에 민월왕 영()은 군대를 보내 요새지를 지키며 한나라 군대에 대항하려 했다.

이에 영의 아우 여선()이 동월의 재상, 종족()들과 의논하면서 이렇게 제의했다. “왕이 함부로 군사를 일으켜 남월을 공격하면서 황제에게 주청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황제의 군대가 와서 주벌하려고 한다. 지금 한나라의 군대는 많고도 막강하다. 만약에 우리가 현재 잠시 한나라 군대에게 승리하더라도 후일에 반드시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할 것이니, 이러다가 마침내 우리나라는 소멸하여 없어지고 말 것이다. 만약에 지금이라도 우리들이 왕을 죽여서 황제에게 사죄하고 우리들의 요구를 받아들여서 전쟁을 멈추면 다행히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황제가 우리들의 요구를 무시한다면 그때 가서는 전력을 다해 싸우다가 승리하지 못할 경우에는 바다로 도피하자!”

모두가 ‘좋다!’라고 찬성했다. 이에 바로 철창으로 왕을 찔려죽이고 사자로 하여금 그의 머리를 가지고 가서 대행 왕회에게 보냈다. 그러자 왕회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 군대가 이곳까지 온 것은 동월왕을 주살하기 위함이었다. 지금 왕의 머리를 보내고 사죄하니, 전쟁하지 않아도 화근은 제거되었다. 이보다 더 큰 성과는 없다.” 그리고 곧 신속하게 군사행동을 멈추게 하고, 더불어 이 사정을 대농군()에게 통보했다. 또한 사자에게 민월왕의 머리를 가지고 장안으로 달려가 황제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황제는 조서를 내려 두 장군에게 군사행동을 중지시키고, 이렇게 말했다. “동월왕 영 등이 으뜸가는 죄인이다. 단지 무제()의 손자 요군() 축()만은 이 사건의 음모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낭중장()으로 하여금 축을 월나라의 요왕()으로 책립하여 민월 선조들의 제사를 받들도록 했다.

여선이 영을 죽인 후, 그의 위엄은 나라 안에 널리 알려져서 많은 백성들이 그에게 귀속되었다. 여선은 암중으로 자립하여 왕이 되려고 했다. 요왕은 여선의 무리들을 바로 잡아 이끌고 나갈 수가 없었다. 황제는 이 사실을 들은 후에 여선 때문에 다시 군사를 동원할 가치가 없다고 여겨서 이렇게 말했다. “여선은 누차 영과 더불어 반란을 도모했다. 그러나 뒤에 가장 먼저 영을 죽였기 때문에 한나라 군대의 수고스러움을 덜어주었다.” 그리하여 여선을 동월왕()으로 책립하여 요왕과 더불어 군림하게 했다.

무제 원정() 5년(서기전 112년), 남월의 승상인 여가()가 반란을 일으켜 남월왕 조흥()과 왕 태후()와 한()나라 사신을 죽였다. 이에 동월왕 여선은 황제에게 상서를 올리고 병졸 8천명을 이끌고 누선장군()을 따라 여가를 공격하겠다고 청했다. 그러나 막상 누선장군의 군대가 게양()에 도착하자 , 여선은 바다에 풍랑이 심하다는 핑계를 대고 가지 않았다. 여선은 양측을 관망하는 태도를 취하고서 또 암중으로 남월로 사신을 보냈다. 그리고 한나라 군대가 반우성()를 공격하여 함락시킬 때까지 기다리고 가지 않았다.

이때 누선장군 양복()은 황제에게 상서를 올려 곧바로 군대를 이끌고 동월을 공격할 수 있도록 청했다. 그러나 황제는 군졸들이 지쳐 있다면서 이를 허락하지 않고 일체의 군사행동을 그만두고 여러 교위()들에게 예장()의 매령()에 주둔하면서 명령을 기다리도록 했다.

무제 원정 6년(서기전 111년) 가을, 여선은 누선장군이 자신을 토벌할 것을 청하고, 또 한나라의 군대가 이미 동월의 변경까지 진입하여 장차 공격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에 여선은 반란을 일으키고 자신의 군대를 보내 한나라 군대가 반드시 거쳐야하는 길을 차단하도록 했다. 그는 장군 추력() 등을 ‘탄한장군()’이란 봉호를 내리고, 대군을 이끌고 백사(), 무림()과 매령으로 진격하도록 하여 한나라의 교위 세 사람을 죽였다.

이때 한나라 조정에서는 대농령() 장성()과 원래 산주후()였던 유치()를 주둔하는 곳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그들은 감히 동월의 군대를 공격하지 못하고 도리어 안전한 곳으로 퇴각했다. 뒤에 이들은 모두 적이 두려워 피했다는 죄명으로 죽임을 당했다.

여선이 ‘무제()’라고 새긴 옥새를 만들어서 자립하고, 자신의 백성들을 속이고 망언을 했다. 이에 황제는 횡해장군() 한열()을 파견하여 구장()으로 출발하여 바다를 거쳐 동쪽으로 출격하도록 하고, 누선장군 양복에게 무림에서 출격하게 했다. 또 중위() 왕온서()을 매령에서 출격하도록 하고, 한나라 조정에 투항한 월후() 두 사람을 각기 과선장군()과 하뢰장군()으로 임명하여 약야()와 백사()에서 출격하게 하였다.

원봉() 원년(서기전 110년) 겨울, 이들을 일제히 동월로 진격하도록 했다. 동월은 줄곧 군대를 요새로 보내 방어시키고, 순북장군()을 파견하여 무림()을 지키게 했다. 동월의 군대는 누선장군의 교위 몇 명을 물리치고 장리()을 죽이는 전공을 올렸다. 그러나 누선장군의 부하 중에 전당() 출신의 원종고()이 마침내 순북장군을 죽이고, 그 공으로 어아후()로 봉해졌다. 이 때는 한나라의 군대가 무림에 진격하기 전이었다.

옛날 월나라의 연후()였던 오양()은 이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 한나라에 있었다. 이 때문에 한나라 조정에서는 그에게 동월로 돌아가서 여선에게 항복하도록 권유토록 했다. 그러나 여선은 그의 권고를 듣지 않았다. 오양은 횡해장군 한열이 군대를 이끌고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친히 자신의 고을 중에서 7백 명을 거느리고 동월에게 내란을 일으키고, 한양()에서 동월을 공격했다. 그는 건성후() 오()와 그 부하들과 더불어 요왕 거고()을 찾아가서 이렇게 모의했다.

“여선은 반역의 우두머리로 여태까지 우리들을 핍박했다. 지금 한나라 군대가 이미 도착했는데, 병사의 수가 많고 막강합니다. 우리들은 여선을 살해하고 각기 한나라의 장군들에게 투항한다면 혹여 요행히 죄에서 면할 것입니다.” 이에 모두 합심하여 여선을 죽이고는 자신들의 군사를 이끌고 횡해장군에게 투항했다.

이 때문에 요왕 거고는 동성후()에 봉해져 식읍 만호()를 받았고, 건성후 오는 개릉후()로, 월나라의 연후 오양은 북석후()로, 횡해장군 한열은 안도후()로, 횡해 교위 유복()은 요앵후()로 봉해졌다. 유복은 성양() 공왕() 유희()의 아들로, 원래 해상후()에 봉해졌는데, 뒤에 범법행위를 저질러서 작위를 잃어버렸다. 그는 과거에 종군하여 전공이 세우지 못했으나, 종실()의 자제였기 때문에 다시 작위를 얻었다.

그 나머지 장군들은 세운 전공이 없었기 때문에 모두 작위를 받지 못했다. 동월의 장군이었던 다군()은 한나라의 군대가 진격해오자 자기의 군대를 버리고 투항했다. 이 때문에 다군은 무석후()로 봉해졌다.

이 뒤에 황제는 말하길 ‘동월은 좁고 험지가 많고, 민월은 흉포하여 자주 반복하여 반역을 일으킨다.’고 하며, 군리()에게 조서를 내려 현지 백성들을 모두 강회() 일대로 이주시켰다. 고로 동월의 지역은 마침내 텅 비게 되었다.



太史公曰:越雖蠻夷,其先豈嘗有大功德於民哉,何其久也!歷數代常為君王,句踐一稱伯。然餘善至大逆,滅國遷眾,其先苗裔繇王居股等猶尚封為萬戶侯,由此知越世世為公侯矣。蓋禹之餘烈也。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월()나라는 비록 만이()였지만 그의 선조는 일찍이 백성들에게 커다란 공덕을 베풀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그리도 오랫동안 나라를 유지할 수 있었겠는가? 수대에 걸쳐 항상 군왕()으로 군림했고, 그 중에 구천()은 한 차례 패자()로 칭할 정도였다. 그러나 여선() 대에 이르러 대역무도한 일을 저질러 나라는 멸망하고 백성들은 이주 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들 선조의 후손인 요왕() 거고() 등은 아직도 만호후로 봉해졌다. 이를 살펴보면 월나라가 대대로 공후()가 될 수 있던 것은 아마도 우()임금이 남긴 공적 때문이란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