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 卷一一六. 西南夷列傳
西南夷列傳
西南夷君長以什數,夜郎最大;其西靡莫之屬以什數,滇最大;自滇以北君長以什數,邛都最大:此皆魋結,耕田,有邑聚。其外西自同師以東,北至楪榆,名為巂、昆明,皆編發,隨畜遷徙,毋常處,毋君長,地方可數千里。自冄以東北,君長以什數,徙、筰都最大;自筰以東北,君長以什數,冄駹最大。其俗或士箸,或移徙,在蜀之西。自冄駹以東北,君長以什數,白馬最大,皆氐類也。此皆巴蜀西南外蠻夷也。
始楚威王時,使將軍莊蹻將兵循江上,略巴、黔中以西。莊蹻者,故楚莊王苗裔也。蹻至滇池,地方三百里,旁平地,肥饒數千里,以兵威定屬楚。欲歸報,會秦擊奪楚巴、黔中郡,道塞不通,因還,以其眾王滇,變服,從其俗,以長之。秦時常頞略通五尺道,諸此國頗置吏焉。十餘歲,秦滅。及漢興,皆棄此國而開蜀故徼。巴蜀民或竊出商賈,取其筰馬、僰僮、髦牛,以此巴蜀殷富。
建元六年,大行王恢擊東越,東越殺王郢以報。恢因兵威使番陽令唐蒙風指曉南越。南越食蒙蜀枸醬,蒙問所從來,曰「道西北牂柯,牂柯江廣數里,出番禺城下」。蒙歸至長安,問蜀賈人,賈人曰:「獨蜀出枸醬,多持竊出市夜郎。夜郎者,臨牂柯江,江廣百餘步,足以行船。南越以財物役屬夜郎,西至同師,然亦不能臣使也。」蒙乃上書說上曰:「南越王黃屋左纛,地東西萬餘里,名為外臣,實一州主也。今以長沙、豫章往,水道多絕,難行。竊聞夜郎所有精兵,可得十餘萬,浮船牂柯江,出其不意,此制越一奇也。誠以漢之彊,巴蜀之饒,通夜郎道,為置吏,易甚。」上許之。乃拜蒙為郎中將,將千人,食重萬餘人,從巴蜀筰關入,遂見夜郎侯多同。蒙厚賜,喻以威德,約為置吏,使其子為令。夜郎旁小邑皆貪漢繒帛,以為漢道險,終不能有也,乃且聽蒙約。還報,乃以為犍為郡。發巴蜀卒治道,自僰道指牂柯江。蜀人司馬相如亦言西夷邛、筰可置郡。使相如以郎中將往喻,皆如南夷,為置一都尉,十餘縣,屬蜀。
當是時,巴蜀四郡通西南夷道,戍轉相馕。數歲,道不通,士罷餓離溼死者甚眾;西南夷又數反,發兵興擊,秏費無功。上患之,使公孫弘往視問焉。還對,言其不便。及弘為御史大夫,是時方筑朔方以據河逐胡,弘因數言西南夷害,可且罷,專力事匈奴。上罷西夷,獨置南夷夜郎兩縣一都尉,稍令犍為自葆就。
及元狩元年,博望侯張騫使大夏來,言居大夏時見蜀布、邛竹、杖,使問所從來,曰「從東南身毒國,可數千里,得蜀賈人市」。或聞邛西可二千里有身毒國。騫因盛言大夏在漢西南,慕中國,患匈奴隔其道,誠通蜀,身毒國道便近,有利無害。於是天子乃令王然于、柏始昌、呂越人等,使閒出西夷西,指求身毒國。至滇,滇王嘗羌乃留,為求道西十餘輩。歲餘,皆閉昆明,莫能通身毒國。
滇王與漢使者言曰:「漢孰與我大?」及夜郎侯亦然。以道不通故,各自以為一州主,不知漢廣大。使者還,因盛言滇大國,足事親附。天子注意焉。
及至南越反,上使馳義侯因犍為發南夷兵。且蘭君恐遠行,旁國虜其老弱,乃與其眾反,殺使者及犍為太守。漢乃發巴蜀罪人嘗擊南越者八校尉擊破之。會越已破,漢八校尉不下,即引兵還,行誅頭蘭。頭蘭,常隔滇道者也。已平頭蘭,遂平南夷為牂柯郡。夜郎侯始倚南越,南越已滅,會還誅反者,夜郎遂入朝。上以為夜郎王。
南越破後,及漢誅且蘭、邛君,并殺筰侯,冄駹皆振恐,請臣置吏。乃以邛都為越巂郡,筰都為沈犁郡,冄駹為汶山郡,廣漢西白馬為武都郡。
上使王然于以越破及誅南夷兵威風喻滇王入朝。滇王者,其眾數萬人,其旁東北有勞寖、靡莫,皆同姓相扶,未肯聽。勞寖、靡莫數侵犯使者吏卒。元封二年,天子發巴蜀兵擊滅勞寖、靡莫,以兵臨滇。滇王始首善,以故弗誅。滇王離難西南夷,舉國降,請置吏入朝。於是以為益州郡,賜滇王王印,復長其民。
西南夷君長以百數,獨夜郎、滇受王印。滇小邑,最寵焉。
서남이(西南夷)의 군장(君長)은 대략 열 명을 헤아렸는데, 그중 야랑국(夜郎國: 지금의 귀주贵州 서부 일대)의 세력이 가장 컸다. 야랑국의 서쪽에는 미모(靡莫: 소수민족명) 부족이 열을 헤아렸는데, 그중 전(滇: 지금의 운남성 동부 전지滇池 부근)의 세력이 가장 컸다. 전으로부터 그 이북에도 군장이 열 명을 헤아렸는데 그중 공도(邛都: 지금의 사천성 서창시西昌市 동남 일대)의 세력이 가장 컸다.
이들은 모두 추결(魋結: 고대 성인 남자의 머리털을 끌어올려 정수리 위에 삐쭉하게 틀어 감아 맨 것을 이르던 말)하고 밭을 경작하면서 작은 성(城)과 촌락을 이루었다. 그들의 서쪽 변두리에는 동사(同師: 고대 나라명으로 지금의 운남성 노강怒江과 난창강澜沧江 사이)로부터 동쪽으로 향하고, 북쪽 변두리는 엽유(楪楡: 지명. 지금의 운남 대리현大理县 동북)에까지 이르는데, 그 명칭은 시(嶲), 곤명(昆明)라고도 한다. 이 일대 사는 사람들은 머리를 길게 땋고 가축을 방목하면서 옮겨 다녔는데, 일정한 거주지도 우두머리도 없었다.
그들 활동한 지방은 사방 수천 리나 되었다. 시(嶲)에서부터 동북쪽에도 군장이 열 명을 헤아렸는데 그중 사(徙), 작도(筰都)의 세력이 가장 컸다. 작도에서부터 동북쪽에도 군장이 열 명을 헤아렸는데, 그중 염방(冉駹)의 세력이 가장 컸다.
그들의 풍습은 어떤 때는 토착해 살며, 어떤 때는 이주해서 다니는데, 모두 촉군(蜀郡)의 서쪽변두리에 있었다. 염방으로부터 동북쪽에도 군장이 열 명을 헤아렸는데 그중 백마(白馬:인명)의 세력이 가장 컸으며, 모두 다 저족(氐族)과 같은 무리였다. 이들은 모두 파군(巴郡), 촉군의 서남쪽 바깥에 있는 만이(蠻夷)들이다.
당초 초(楚) 위왕(威王) 때에 장군 장교(莊蹻)를 시켜 군사를 이끌고 장강을 따라 올라가 파군, 촉군과 검중(黔中)의 서쪽 지방을 공격하게 했다. 장교는 원래 초 장왕(莊王)의 자손이다. 장교가 전지(滇池)에 도달하니 그 지방은 사방 3백리로서 주변은 모두 평지로 비옥하고 풍요로운 곳이 모두 수천 리에 달했다.
이에 장교는 자신의 군사의 위세로 이 지방을 평정시켜 초나라에 귀속시켰다. 그리고 초나라로 돌아가 이 정황을 보고하려고 했으나, 때마침 진(秦)나라가 공격해 와서 초나라의 파군, 검중을 탈취하여 길이 봉쇄되어 지나 갈 수 없었다. 그 때문에 다시 전지(滇池)로 돌아와 자신의 군대로 위세로 전왕(滇王)이 되어 복식을 바꾸고 현지의 습속을 따라서 현지의 통치자가 되었다.
진(秦)나라 때 상안(常頞)이 이 지방을 공략해 오척도(五尺道)를 개통시키고, 더불어 이 지방의 여러 나라에 관리를 두었다. 그러나 10여 년 지난 뒤에 진나라가 멸망했다. 얼마 후 한(漢)나라가 건립되자 이 지방의 나라들을 버리고 촉군의 원래 변경지를 경계로 요새로 삼았다.
파군과 촉군의 백성들 중에 간혹 몰래 요새로 나와 매매를 했는데 작국(筰國)의 말, 북국(僰國)의 노예와 야크를 가져왔기 때문에 파군, 촉군의 생활이 특별히 부유해졌다.
한무제 건원(建元) 6년(서기전 135)에 대행(大行) 왕회(王恢)가 동월(東越)을 공격하자 동월 사람들은 자신들의 왕인 영(郢)을 죽이고 한나라로 이 사실을 알렸다. 왕회는 이 기회에 자신의 군사들의 위세를 가지고 파양령(番陽令) 당몽(唐蒙)으로 하여금 출병한 뜻을 완곡하게 남월(南越)에게 알도록 했다.
남월이 당몽에게 촉군에서 산출되는 구장(枸醬: 술의 일종)을 가져와 먹이니, 당몽이 그 구장을 어느 곳에서 가져왔는가를 물었다.
이에 남월에서 말하길 “서북쪽의 장가강(牂柯江)로부터 가져온 것입니다. 장가강은 넓이가 몇 리나 되며 반우성(番禺城)의 아래에서 흘러나옵니다.”라고 했다. 당몽이 장안(長安)으로 돌아가 촉군의 상인(商人)에게 물었다.
상인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오직 촉군에서만 구장이 생산되는데, 현지의 많은 사람들이 몰래 가지고 나와 야랑(夜郞)에서 장사를 합니다. 야랑은 장가강에 가까이 있는데, 강폭이 1백여 보(步)밖에 되지 않아 배로 건널 수가 있습니다. 남월이 재물로써 야랑을 자기편으로 귀속시키고, 그들의 세력은 직접 서쪽으로는 동사(同師)에까지 끼치고 있으나 야랑을 자신들의 신하처럼 부리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이에 당몽은 황제에게 상서를 올려 아뢰었다. “남월왕은 황옥(黃屋: 천자의 수레)을 타고 좌독(左纛: 천자의 상징하는 기)을 장식하고 있으며, 그가 다스리는 땅은 동서로 만여 리나 됩니다. 명목상으로는 한나라의 외신(外臣)이지만, 실제로는 한 주(州)의 군주입니다. 이제 장사(長沙)와 예장군(豫章郡)에서 앞으로 가서 공격하려면 물길이 두절되는 곳이 많아 가기가 어렵습니다.
제가 들으니 야랑의 정예 병사가 10여 만 명이 된다고 하는데, 배를 타고 장가강을 따라 내려가 불시에 공격하는 것이 남월을 제압하는 계책입니다. 만약 진실로 한나라의 강대함과 파, 촉의 풍유함으로 야랑으로 가는 길을 개통하여 그곳에 관리를 두는 것은 매우 쉽습니다.”
이에 한 무제가 그의 주장을 허락하고 당몽을 낭중장(郎中將)으로 삼고 1천 명의 군사와 양식, 이를 수송하는 만여 명을 거느리고 파촉작관(巴蜀筰)의 관문으로 나와 야랑에 들어가 야랑후(夜郎侯) 다동(多同)을 만났다.
당몽은 다동에게 재물을 후하게 주고, 또 한나라 무력의 위엄과 은덕을 일러주고 관리를 두기로 야랑후의 아들로 현령으로 삼는다고 약속했다. 야랑 주변의 작은 나라들이 모두 한나라의 비단과 명주를 탐내었는데, 심중으로 한나라가 야랑으로 오는 길이 험난해 결국 자신들을 점령할 수 없다고 여기고 잠깐 당몽의 약속을 따르기로 했다.
당몽이 장안으로 돌아가 황제에게 보고하니, 황제는 야랑을 건위군(犍爲郡)으로 삼았다. 그 뒤에 파, 촉의 군사를 동원해 도로를 수리했는데, 그것이 북도(僰道)에서부터 장가강까지 향하도록 했다. 촉군 사람 사마상여(司馬相如)도 황제에게 서이(西夷)의 공(邛), 작(筰)은 군(郡)을 설치할 만하다고 말했다. 이에 황제는 사마상여를 낭중장(郎中將)으로 삼아 그곳에 가서 군을 설치한다는 뜻을 말하고, 모든 것을 남이(南夷)와 같도록 해 한 명의 도위(都尉)와 10여 개의 현(縣)을 설치하고 촉군에 예속시켰다.
이때 파, 촉, 광한(廣漢), 한중(漢中) 등의 사군(四郡)에서는 서남이로 가는 길을 개통하려고 변경을 지키고 있는 병졸을 동원하여 군량과 물자를 운송시켰다. 그러나 여러 해가 지나도 도로가 개통되지 않았고, 군사들은 피곤하고 기이에 시달리고 습한 풍토병을 만나 죽는 자가 매우 많았다. 또 서남이가 자주 배반하자 군대를 보내 공격했으나 재력과 인력만 소모했을 뿐 성과가 없었다.
황제가 이 사건을 우려해 공손홍(公孫弘)을 파견하여 관찰하고 물어보게 했다. 공손홍은 장안으로 돌아가 황제에게 보고하면서 상황이 불리하다고 했다. 얼마 뒤에 공손홍이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었는데, 이때가 삭방군(朔方郡)에 성벽을 수축하고 황하에 의지하여 호(胡)를 축출하려고 했다. 공손홍은 기회를 보아 여러 차례 서남이로 통하는 길을 개통함으로 인해서 생기는 폐해를 말했다. 이 때에 그 사업을 잠시 멈추고 역량을 집중하여 흉노를 대응하게 했다.
황제는 서이(西夷)에서 사업을 중지시키고, 단지 남이(南夷)의 야랑 두 현과 한 명의 도위만을 두게 하고, 건위군으로 하여금 점차 자신들의 군현체제를 완성시키게 했다.
한 무제 원수(元狩) 원년(서기전 122년)에 박망후(博望侯) 장건(張騫)이 대하(大夏: 고대 서역의 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대하에 있을 때 촉(蜀)의 베와 비단, 공(邛)의 대나무 지팡이를 보고 그곳 사람에게 이 물건들의 내력을 물으니, 대답하길 ‘동남쪽 신독국(身毒國: 고대 인도의 나라)에서 가져왔습니다. 그곳은 대략 수천 리나 되는데, 촉의 상인에게서 산 것이다.’했고, 혹자에게 들으니 공 지방의 서쪽으로 대략 2천리쯤에 신독국이 있다.”
그리고 장건은 힘주어 이렇게 말했다. “대하는 한나라의 서남쪽에 있는데, 중국을 흠모하고 있지만 흉노가 중국으로 통하는 길을 막고 있는 것을 우려하려 합니다. 만약 촉으로 가는 길을 개통할 수 있다면 신독국으로 가는 길이 편리하고 가까워 한나라에 이익이 되며 해는 없을 것입니다.”.
이에 황제는 바로 왕연우(王然于), 백시창(柏始昌), 여월인(呂越人) 등으로 하여금 첩경을 물어서 서이의 서쪽으로부터 출발해 신독국을 찾아보게 했다. 그들이 전(滇: 운남 곤명 일대)에 도달하니 전왕(滇王) 상강(嘗羌)이 그들을 남게하고, 더불어 그들이 파견하여 서쪽으로 길을 찾아 나선 10여 명을 억류시켰다. 1년 남짓 지나도록 그들은 모두 곤명(昆明)에 갇히어 결국 신독국까지 가려고 하는 자가 없게 되었다.
전왕이 한나라의 사자에게 물었다. “한나라와 우리나라 중 어느 쪽이 더 큰가?” . 한나라의 사자들이 야랑에 도착할 때에 야랑후(夜郞侯) 역시 이와 같이 물었다.
이것은 서로 길이 통하지 않는 까닭에 각기 스스로 하나의 주(州)의 군주라고 여기고, 한나라의 광대함을 알지 못했다. 한나라 사자가 장안으로 돌아와 전(滇)은 큰 나라이니 한나라와 가까이할 만한 하다고 극력으로 진술하니, 황제가 그 말에 관심을 가졌다.
남월이 반란을 일으키자 황제는 치의후(馳義侯)를 파견하여 건위군의 명의로 남이(南夷)의 군사를 동원하게 했다. 저란(且蘭)의 군주는 자신의 군대가 멀리 가면 주변의 나라들이 그 기회를 엿보어 자기 나라의 늙고 약한 사람들을 잡아갈 것을 두려워서 자신의 군대와 함께 반란을 일으켜 한나라의 사자와 건위군의 태수를 죽였다. 이에 한나라는 파, 촉의 죄인 중에 원래 남월을 공격해본 적이 있는 자와 팔교위(八校尉)를 동원시켜 저란을 공격해 평정시켰다.
때마침 남월이 이미 무너졌기 때문에 한나라의 팔교위는 장가강을 따라 남하하지 않고, 바로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는 틈을 타서 두란(頭蘭)을 정벌했다. 두란은 항상 한나라가 전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던 나라였다. 두란을 평정한 뒤에 곧 남이도 평정되어 그곳에 장가군(牂柯郡)을 설치했다.
야랑후는 처음에 남월에 의지했는데, 남월이 이미 소멸되었고, 때마침 한나라의 군사들이 돌아와 반란을 일으킨 자를 죽이니, 야랑후도 마침내 입조했다. 황제는 그를 야랑왕(夜郎王)으로 봉했다.
한나라가 저란, 공(邛)의 군주를 죽였고, 더불어 또 함께 작후(筰侯)를 죽이니, 염(冉)과 방(駹)이 모두 두려워 떨며 곧바로 한나라의 신하가 되길 청했고, 자신들의 나라에 한나라의 관리를 두기를 원했다. 그래서 한나라에서 공도(邛都)를 월시군(越嶲郡), 작도(筰都)를 침리군(沈犁郡), 염과 방을 민산군(汶山郡), 광한(廣漢)의 서쪽에 있는 백마(白馬)를 무도군(武都郡)을 설치했다.
황제는 왕연우로 하여금 남월(南越)을 깨뜨리고, 남이(南夷)의 군장을 주살시킨 군대의 위세를 이용하여 완곡하게 전왕에게 입조하라고 권고토록 했다. 전왕은 그 군대가 수 만 명이고, 그 주변으로 동북쪽에 근침(勞浸), 미모(靡莫)이라는 소수민족 있는데, 모두 같은 성(姓)으로 서로 의지했기 때문에 권고를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근침과 미막이 여러 차례 한나라의 사자, 관리, 군졸을 침범했다.
한 무제 원봉(元封) 2년(서기전 109년)에 황제는 파, 촉의 군대를 동원해 근침, 미모를 공격해 멸망시키고, 대군을 전(滇) 근방에 주둔시켰다. 전왕은 처음부터 한나라에 선의를 가지고 있었던 때문에 주살 당하지 않았다.
전왕 이남(離南)은 서남이와 자신의 나라 전체를 인솔해 투항하고, 한나라의 관리를 두며 더불어 입조할 것을 청했다. 이에 한나라에서 그곳을 익주군(益州郡)으로 삼아 전왕에게 왕의 인(印)을 하사하고, 여전히 그 백성들을 통치하도록 했다.
서남이의 군장은 1백여 명을 헤아렸지만 오직 야랑(夜郎), 전(滇)의 군장만이 한나라로부터 왕의 도장을 받았다. 전은 작은 나라였지만 도리어 한나라로부터 가장 많은 총애를 받았다.
太史公曰:楚之先豈有天祿哉?在周為文王師,封楚。及周之衰,地稱五千里。秦滅諸候,唯楚苗裔尚有滇王。漢誅西南夷,國多滅矣,唯滇復為寵王。然南夷之端,見枸醬番禺,大夏杖、邛竹。西夷后揃,剽分二方,卒為七郡。
【索隱述贊】西南外徼,莊蹻首通。漢因大夏,乃命唐蒙。勞洸、靡莫,異俗殊風。夜郎最大,邛、筰稱雄。及置郡縣,萬代推功。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초(楚)나라의 선조가 어찌하여 하늘의 복록이 받았는가? 주(周)나라 때에 그들의 선조 육웅(鬻熊)은 문왕(文王)의 스승이 되어 초나라에 봉해졌다. 주나라가 쇠미했을 때에는 초나라의 땅이 오천리라고 일컬어 졌다. 진(秦)나라가 제후들을 멸망시켰지만, 오직 초나라의 후손만이 여전히 전왕(滇王)으로 남아있었다.
한(漢)나라가 서남이(西南夷)를 정벌해 많은 나라가 멸망당했는데 오직 전(滇)만이 또다시 한나라 왕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남이(南夷) 정벌의 발단이 된 것은 반우(番禺)가 구장(枸醬)을 보고, 대하(大夏)에서 공(邛) 지역의 대나무 지팡이를 보았기 때문이다. 서이(西夷)는 뒤에 분할되어 서방과 남방으로 나누어졌고, 마침내 일곱 개의 군(郡)으로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