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歷史와文學/史記世家

史記 卷三一. 吳太伯世家[伍子西]

柳川 2019. 6. 22. 23:04

                              卷三一. 吳太伯世家[伍子西]

 

五年, 楚之亡臣伍子胥來奔, 公子光客之.1) 公子光者, 王諸樊之子也.2) 常以為吾父兄弟四人, 當傳至季子. 季子即不受国, 光父先立. 即不傳季子, 光當立. 陰納賢士, 欲以襲王僚.

 

 

5년에 초 나라로부터 오자서(伍子胥)가 도망와서 투신하니 공자 광은 손님의 예로써 그를 맞이했다. 공자 광은 오왕 제번의 아들로, 항상 “선친의 형제가 4명인데 왕위는 마땅히 계찰에게까지 전해져야 한다. 계찰이 만약에 왕위를 계승하지 않겠다면 선친께서 제일 먼저 왕위에 올랐으니, 마땅히 내가 왕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래서 그는 암암리에 현명하고 재능 있는 사람들을 초빙해서 그들을 왕 요를 습격하는 데 이용하려고 했다.

 

 

 

八年, 呉使公子光伐楚, 敗楚師, 迎楚故太子建母於居巣以帰. 因北伐, 敗陳、蔡之師. 九年, 公子光伐楚, 抜居巣、鍾離.3) 初, 楚邊邑卑梁氏之処女與呉邊邑之女争桑,4) 二女家怒相滅, 両国邊邑長聞之, 怒而相攻, 滅呉之邊邑. 呉王怒, 故遂伐楚, 取両都而去.5)

 

 

8년에 오나라는 공자 광을 파견해서 초 나라를 공격해 초 나라 군대를 무찌르고 이전의 초 나라 태자 건(建)의 어머니를 거소(居巢)에서 모셔 왔다. 돌아오는 길에 북쪽으로 쳐들어가 진(陳), 채(蔡) 두 나라의 군대를 물리쳤다. 9년에 공자 광은 초 나라로 쳐들어가서 거소(居巢), 종리(鍾離) 두 곳을 함락시켰다. 당초 초 나라 변경(邊境) 마을 비량(卑梁)의 소녀와 오나라 변경 마을의 여자들은 뽕잎을 따는 일로 다투었는데, 이 때문에 두 집안이 모두 분노해서 서로를 공격했다. 두 나라의 변경을 다스리던 장관들도 이 일을 듣고 역시 분노하여 서로 공격했는데 오나라의 변경 지방이 멸망하게 되었다. 이에 오왕이 분노해서 곧 군대를 파견해 초 나라로 쳐들어가 이 두 마을을 점령하고 돌아왔다.

 

 

伍子胥之初奔呉, 説呉王僚以伐楚之利. 公子光曰:「胥之父兄為僇於楚, 欲自報其仇耳. 未見其利.」於是伍員知光有他志,6) 乃求勇士専諸,7) 見之光. 光喜, 乃客伍子胥. 子胥退而耕於野, 以待専諸之事.8)

 

 

오자서가 처음 오나라에 투신했을 때 초 나라를 공격하는 것의 이로운 점을 오왕 요에게 간(諫)하자, 공자 광은 “오자서의 부친과 형이 초 나라 왕에게 살해당해서 그는 자신의 복수를 하려는 것일 뿐이지, 오나라에 좋은 점이 있다고는 볼 수 없다”라고 말했다. 이때에 오자서는 비로소 공자 광이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곧 전제(專諸)라고 하는 용사(勇士)를 광에게 추천했다. 광은 매우 기뻐해 손님의 예로써 오자서를 접대했다. 오자서는 교외에 은거해 밭을 갈며 전제의 거사(擧事)를 기다렸다.

 

 

十二年冬, 楚平王卒.9) 十三年春, 呉欲因楚喪而伐之,10) 使公子蓋余、燭庸11)以兵囲楚之六、灊.12) 使季札於晉, 以観諸侯之変.13) 楚発兵絶呉兵後, 呉兵不得還. 於是呉公子光曰:「此時不可失也.」14)告専諸曰:「不索何獲!15)我真王嗣, 當立, 吾欲求之. 季子雖至, 不吾廃也.」16)専諸曰:「王僚可殺也. 母老子弱,17) 而両公子将兵攻楚, 楚絶其路. 方今呉外困於楚, 而内空無骨鯁之臣, 是無柰我何.」光曰:「我身, 子之身也.」18)四月丙子,19) 光伏甲士於窟室,20) 而謁王僚飲.21) 王僚使兵陳於道, 自王宮至光之家, 門階戸席, 皆王僚之親也, 人夾持鈹.22) 公子光詳為23)足疾, 入于窟室,24) 使専諸置匕首25)於炙魚之中以進食.26) 手匕首刺王僚, 鈹交於匈,27) 遂弑王僚. 公子光竟代立為王, 是為呉王闔廬. 闔廬乃以専諸子為卿.

 

 

12년 겨울에 초 평왕(楚平王)이 세상을 떠났다. 13년 봄에 오나라 왕은 초 나라가 상(喪)을 치르는 틈을 타서, 공자 개여(蓋餘), 촉용(燭庸)에게 군사를 이끌고 초 나라의 육(六)과 첨(灊)을 포위하게 했다. 그리고 계찰을 진나라에 파견해 제후들의 동정을 살피게 했다. 초 나라는 군사를 보내어 오나라 군대의 퇴로를 차단하니 오나라 군대는 돌아올 수 없었다. 이때, 오나라 공자 광은 “이 시기를 놓칠 수 없다”라고 하고는, 전제에게 “이때를 놓치면 언제 다시 기회가 올 수 있겠는가? 나는 왕위의 진정한 계승자로 이치대로 하자면 마땅히 내가 왕위에 올라야 하는 것이니 나는 이 기회에 왕위에 오르려고 한다. 계찰이 돌아온다고 해도 나를 폐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전제는 “오나라 왕 요를 죽일 수 있습니다. 그의 모친은 이미 늙었고 아들은 아직 어리며 두 명의 공자는 병사를 이끌고 초 나라를 공격하러 갔다가 초 나라 군대에 의해 퇴로가 끊겼습니다. 지금 오나라 왕은 밖에서는 초 나라의 포위를 받고 조정 내에서는 강직하고 정직한 신하가 없으니 우리를 대항할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자, 공자 광은 “우리는 일심동체이다. 모든 것을 그대에게 부탁한다.”라 했다.

 

 

4월 병자일(丙子日)에 공자 광은 지하실에 무장한 용사들을 매복시켜 놓고 왕 요에게 술을 마시자고 청했다. 왕 요는 병사를 파견해서 왕궁에서 공자 광의 집에 이르는 길에 배치해 놓았고, 대문, 계단, 내문(內門), 좌석에까지 모두 왕 요의 친병으로 하여금 손에 짧은 칼을 들고 호위하게 했다. 공자 광은 발을 다친 것으로 가장해 지하실로 피하고 전제로 하여금 구운 생선의 뱃속에다 비수(匕首)를 숨겨서 상에 올리게 했다. 전제는 생선의 뱃속에서 비수를 꺼내 곧장 왕 요를 찔렀고, 왕 요의 친병들이 짧은 칼로 전제의 가슴을 찔렀으나 결국 왕 요는 살해되었다. 공자 광은 마침내 오나라 왕의 자리를 차지했으니 그가 바로 오왕 합려(闔廬)이다. 합려는 전제의 아들을 국경(國卿)으로 기용했다.

 

 

 

季子至, 曰:「苟先君無廃祀, 民人無廃主, 社稷有奉, 乃吾君也. 吾敢誰怨乎? 哀死事生, 以待天命.28) 非我生亂, 立者従之, 先人之道也.」29)复命, 哭僚墓,30) 复位而待.31) 呉公子燭庸、蓋余二人将兵遇囲於楚者, 聞公子光弑王僚自立, 乃以其兵降楚, 楚封之於舒.32)

 

 

계찰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만약에 선왕의 제사가 계속되고 백성의 주인이 계속 이어지며 사직에 계속 공양한다면 그가 바로 나의 왕이다. 내가 감히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죽은 사람을 애통해하고 살아 있는 사람을 섬김으로써 천명(天命)의 안배에 순응하고자 한다. 내가 일으킨 변란이 아니라면 누구를 왕으로 세우든 그에게 복종하는 것이 바로 선인들이 세운 법도이다.”라 했다. 그리고 계찰은 왕 요의 무덤 앞에 가서 자신이 진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경과를 보고하고 눈물을 흘린 후, 다시 자신의 자리에 돌아와 새 왕의 명령을 기다렸다. 오나라 공자 촉용과 개여 두 사람은 병사를 이끌고 초 나라에서 전쟁을 하다가 포위당했는데, 공자 광이 왕 요를 살해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곧 병사를 이끌고 초 나라에 투항했다. 초 나라는 그들에게 서(舒)를 내려주었다.

 

 

각주

1 索隠左傳昭二十年曰:「伍員如呉, 言伐楚之利於州于. 杜預曰:州于, 呉子僚也. 公子光曰:『是宗為戮, 而欲反其讎, 不可従也.』員曰:『彼将有他志, 余姑為之求士, 而鄙以待之.』乃見鱄設諸焉, 而耕於鄙.」是謂客礼以接待也.

2 索隠此文以為諸樊子, 系本以為夷眛子.

3 集解服虔曰:「鍾離, 州來西邑也.」 索隠昭二十四年経曰:「冬, 呉滅巣.」左傳曰:「楚子為舟師以略呉疆. 沈尹戌曰:『此行也, 楚必亡邑. 不撫人而勞之, 呉不動而速之.』呉人踵楚, 邊人不備, 遂滅巣及鍾離乃還也.」地理志居巣属廬江, 鍾離属九江. 應劭曰「鍾離子之国也」.

4 索隠左傳無其事.

5 正義両都即鍾離、居巣.

6 集解服虔曰:「欲取国.」

7 集解賈逵曰:「呉勇士.」 索隠専或作「剸」. 左傳作「鱄設諸」. 刺客傳曰「諸, 棠邑人也」. 正義呉越春秋云:「専諸, 豊邑人. 伍子胥初亡楚如呉時, 遇之於途, 専諸方與人鬥, 甚不可當, 其妻呼, 還. 子胥怪而問其状. 専諸曰:『夫屈一人之下, 必申萬人之上.』胥因而相之, 雄貌, 深目, 侈口, 熊背, 知其勇士.」

8 索隠依左傳即上五年「公子光客之」是也. 事合記於五年, 不應略彼而更具於此也.

9 索隠昭二十六年春秋経書「楚子居卒」是也. 按十二諸侯年表及左傳, 合在僚十一年.

10 索隠拠表及左氏傳止合有十二年, 事並見昭二十七年左傳也.

11 集解賈逵曰:「二公子皆呉王僚之弟.」 索隠春秋作「掩余」, 史記並作「蓋余」, 義同而字異. 或者謂太史公被腐刑, 不欲言「掩」也. 賈逵及杜預及刺客傳皆云「二公子, 王僚母弟」. 而昭二十三年左傳曰「光帥右, 掩余帥左」, 杜注彼則云「掩余, 呉王寿夢子」. 又系族譜亦云「二公子並寿夢子」. 若依公羊, 僚為寿夢子, 則與系族譜合也.

12 集解杜預曰:「灊在廬江六県西南.」

13 集解服虔曰:「察彊弱.」

14 集解賈逵曰:「時, 言可殺王時也.」

15 集解服虔曰:「不索當何時得也.」

16 集解王粛曰:「聘晉還至也.」

17 集解服虔曰:「母老子弱, 専諸託其母子於光也.」王粛曰:「専諸言王母老子弱也.」 索隠依王粛解, 與史記同, 於理無失. 服虔、杜預見左傳下文云「我, 爾身也, 以其子為卿」, 遂強解「是無若我何」猶言「我無若是何」, 語不近情, 過為迂回, 非也.

18 集解服虔曰:「言我身猶爾身也.」

19 索隠春秋経唯言「夏四月」, 左傳亦無「丙子」, 當別有按拠, 不知出何書也.

20 集解杜預曰:「掘地為室也.」

21 索隠謁, 請也. 本或作「請」也.

22 集解音披. 索隠音披. 劉逵注呉都賦「鈹, 両刃小刀」.

23 索隠上音陽, 下如字. 左傳曰「光偽足疾」, 詳即偽也. 或読此「為」字音「偽」, 非也. 豈詳偽重言邪?

24 集解杜預曰:「恐難作, 王党殺己, 素避之也.」

25 索隠劉氏曰:「匕首, 短剣也.」按:塩鉄論以為長尺八寸. 通俗文云「其頭類匕, 故曰匕首也」.

26 集解服虔曰:「全魚炙也.」

27 集解賈逵曰:「交専諸匈也.」

28 集解服虔曰:「待其天命之終也.」

29 集解杜預曰:「呉自諸樊以下, 兄弟相傳而不立適, 是亂由先人起也. 季子自知力不能討光, 故云.」

30 集解服虔曰:「复命於僚, 哭其墓也.」 正義复音伏, 下同.

31 集解杜預曰:「复本位, 待光命.」

32 索隠左傳昭二十七年曰「掩余奔徐, 燭庸奔鍾吾」. 三十年経曰「呉滅徐, 徐子奔楚」. 左傳曰「呉子使徐人執掩余, 使鍾吾人執燭庸. 二公子奔楚, 楚子大封而定其徙」. 無封舒之事, 當是「舒」「徐」字亂, 又且疏略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