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 卷三二. 齊太公世家
卷三二. 齊太公世家
太公望呂尚者, 東海上人.1) 其先祖嘗為四嶽, 佐禹平水土甚有功. 虞夏之際封於呂,2) 或封於申,3) 姓姜氏. 夏商之時, 申、呂或封枝庶子孫, 或為庶人, 尚其後苗裔也. 本姓姜氏, 従其封姓, 故曰呂尚.
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尙)은 동해(東海) 근처 사람으로, 그의 선조는 일찍이 4악(四嶽)이 되어 우(禹)임금이 물과 땅을 정리하는 것을 도와 크게 공을 세웠다. 그들은 우(虞)와 하(夏) 시대에 여(呂) 또는 신(申) 땅에 봉해졌으며 성(姓)은 강씨(姜氏)였다. 하(夏)와 상(商) 왕조 때에는 그 방계의 자손이 신과 여 땅에 봉해지기도 했고, 또 평민이 되기도 했다. 상(尙)은 그 후예로서 본래의 성은 강씨였으나 그 봉지(封地)를 성으로 해 여상(呂尙)이라고 부른 것이다.
呂尚蓋嘗窮困, 年老矣,4) 以漁釣奸周西伯.5) 西伯将出猟, 卜之, 曰「所獲非龍非彲,6) 非虎非羆;所獲霸王之輔」. 於是周西伯猟, 果遇太公於渭之陽, 與語大説, 曰:「自吾先君太公曰『當有聖人適周, 周以興』. 子真是邪? 吾太公望子久矣.」故号之曰「太公望」, 載與倶帰, 立為師.
여상은 곤궁하고 연로했던 듯한데, 낚시질로 주 서백(周西伯)에게 접근하려고 했다. 서백(西伯)이 사냥을 나가려고 하다가 점을 쳤는데, 점괘가 나오기를 “잡을 것은 용도 이무기[彲]도 아니고, 호랑이도 곰[羆]도 아니다. 잡을 것은 패왕의 보필이다.”라 했다. 이리하여 주서백이 사냥을 나갔다가 과연 위수(渭水) 북쪽에서 여상을 만났는데,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는 크게 기뻐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선대(先代)의 태공(太公) 때부터 이르기를 ‘장차 성인(聖人)이 주(周)나라에 올 것이며, 주나라는 그로 해 일어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선생이 진정 그분이 아닙니까? 우리 태공께서 선생을 기다린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이리하여 그를 ‘태공망(太公望)’이라고 부르며 수레에 함께 타고 돌아와서 스승(師)이 되게 했다.
或曰, 太公博聞, 嘗事紂. 紂無道, 去之. 游説諸侯, 無所遇, 而卒西帰周西伯. 或曰, 呂尚処士, 隠海浜. 周西伯拘羑里, 散宜生、閎夭素知而招呂尚. 呂尚亦曰「吾聞西伯賢, 又善養老, 盍往焉」. 三人者為西伯求美女奇物, 献之於紂, 以贖西伯. 西伯得以出, 反国. 言呂尚所以事周雖異, 然要之為文武師.
어떤 이의 말로는 ‘태공은 박학다식해 상의 주왕(商紂王)을 섬겼으나 주왕이 포악무도하자 떠나버렸으며, 제후들에게 유세했지만 알아주는 이를 만나지 못했다가 마침내 서쪽으로 가서 주 서백에게 의지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어떤 이의 말은 또 이러하다. 여상은 처사(處士)로서 바닷가에 숨어 살았는데, 주 서백이 유리(羑里)에 구금되자 평소에 여상을 알고 있던 산의생(散宜生)과 굉요(閎夭)가 그를 불러냈다. 여상도 “내가 듣기에 서백은 현명하고 또 어른을 잘 모신다고 하니, 어찌 그에게 가지 않겠는가?”라 했다고 한다. 이들 세 사람은 서백을 위해 미녀와 보물을 구해서 주왕에게 서백의 죗값으로 바쳤다. 이리하여 서백은 구금에서 풀려나 주나라로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전설에 따라 여상이 주나라를 섬기게 된 경위를 달리 말하지만, 그 요점은 다 같이 그가 주나라의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사(師)가 되었다는 것이다.
周西伯昌之脱羑里帰, 與呂尚陰謀修徳以傾商政, 其事多兵権與奇計,7) 故後世之言兵及周之陰権皆宗太公為本謀. 周西伯政平, 及断虞芮之訟, 而詩人称西伯受命曰文王. 伐崇、密須、8)犬夷, 大作豊邑. 天下三分, 其二帰周者, 太公之謀計居多.
주 서백 희창(姬昌)은 유리에서 벗어나 돌아오자 여상과 은밀히 계획을 세우고 덕행을 닦아 상(商)나라의 정권을 넘어뜨렸는데, 그 일들은 주로 용병술과 기묘한 계책을 펴는 것들이었다. 따라서 후세에 용병술과 주나라의 권모(權謀)를 말하는 이들은 모두 태공(太公)을 그 주모자로 존숭했다.
주 서백이 공평한 정치를 하며, 우(虞)나라와 예(芮)나라의 분쟁을 해결하자 시인들이 서백을 ‘천명을 받은 문왕(文王)’이라고 칭송했다. 문왕이 숭(崇), 밀수(密須), 견이(犬夷) 등의 나라들을 정벌하고, 풍읍(豐邑)을 크게 건설하고, 천하의 3분의 2를 주나라에 귀순하게 한 것들은 대부분이 태공의 계책에 의한 것이었다.
文王崩, 武王即位. 九年, 欲修文王業, 東伐以観諸侯集否. 師行, 師尚父9)左杖黄鉞, 右把白旄以誓, 曰:「蒼兕蒼兕,10) 総爾衆庶, 與爾舟楫, 後至者斬!」遂至盟津. 諸侯不期而会者八百諸侯. 諸侯皆曰:「紂可伐也.」武王曰:「未可.」還師, 與太公作此太誓.
문왕이 죽고 나자 무왕이 즉위했다. 그 후 9년에 무왕은 문왕의 유업을 잇고자 해 동쪽으로 정벌을 나가서 제후들이 자신에게 모이는가의 여부를 시험해보았다. 군대가 출동하기에 앞서 스승 상보(師尙父)가 왼손에는 황금 장식의 도끼를, 오른손에는 모우(旄牛) 꼬리 장식을 한 흰색의 군기를 들고 출정선서를 했다.
외뿔소여, 외뿔소여.
너희 무리를 모두 모으라!
너희에게 배의 노를 맡기건대
늦게 닿은 자는 벨 것이다!
이리하여 정벌군이 맹진(盟津)에 닿았을 때, 미리 기약하지 않고도 모여든 제후가 8백이나 되었다. 모든 제후들은 말했다. “주왕(紂王)을 칠 수 있습니다.” 무왕은 “아직 안 된다”라고 말하고 군대를 돌려 돌아와서, 태공과 함께 이것을 「태서(太誓)」로 썼다.
居二年, 紂殺王子比干, 囚箕子. 武王将伐紂, 卜亀兆, 不吉, 風雨暴至. 群公尽懼, 唯太公彊之勧武王, 武王於是遂行. 十一年11)正月甲子, 誓於牧野, 伐商紂. 紂師敗績. 紂反走, 登鹿台, 遂追斬紂. 明日, 武王立于社, 群公奉明水,12) 衛康叔封布采席,13) 師尚父牽牲, 史佚策祝, 以告神討紂之罪. 散鹿台之銭, 発鉅橋之粟, 以振貧民. 封比干墓, 釈箕子囚. 遷九鼎, 脩周政, 與天下更始. 師尚父謀居多.
2년 뒤에 주왕(紂王)이 왕자 비간(比干)을 죽이고 기자(箕子)를 구금했다. 무왕이 주왕을 치기에 앞서 거북점을 쳤는데 점괘가 불길했고 폭풍우가 내렸다. 여러 대신들이 모두 두려워했으나 태공만은 강력히 권해 무왕은 마침내 출정했다.
무왕 11년 정월 갑자일에 목야(牧野)에서 출정선서를 하고 상(商)의 주왕을 치니, 주왕의 군대가 무너졌다. 주왕이 도망쳐 녹대(鹿臺)로 올라가자, 무왕은 끝내 추격해 주왕을 베었다. 다음날, 무왕은 토지신의 제단 앞에 서고, 여러 대신들은 맑은 물을 받들고, 위 강숙(衛康叔) 희봉(姬封)은 채색의 자리를 펴고, 스승 상보는 제물의 짐승을 끌고, 사관(史官) 일(佚)은 죽간(竹簡)에 쓴 축문을 읽음으로써 신(神)에게 주왕의 죄를 징벌한 것을 아뢰었다. 그리고 녹대의 돈과 거교(鉅橋)의 식량을 풀어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했고, 비간의 묘를 높이 쌓고 기자의 구금을 풀었다. 또한 구정(九鼎)을 주나라의 도읍으로 옮겼고, 주나라의 정치를 정비해 온 천하를 일신시켰다. 이러한 여러 일들이 대부분 스승 상보의 계책에 의한 것이었다.
於是武王已平商而王天下, 封師尚父於斉営丘.14) 東就国, 道宿行遅. 逆旅之人曰:「吾聞時難得而易失. 客寝甚安, 殆非就国者也.」太公聞之, 夜衣而行, 犂明至国.15) 莱侯來伐, 與之争営丘. 営丘邊莱. 莱人, 夷也, 会紂之亂而周初定, 未能集遠方, 是以與太公争国.
이리하여 무왕은 상나라를 평정하고 천하의 왕이 되었으며 스승 상보를 제(齊)의 영구(營丘)에 봉했다. 스승 상보가 봉국(封國)에 부임할 때에 도중에 묵으면서 가는 것이 매우 느렸다. 여관의 주인이 이것을 보고 말했다. “내가 듣기에 시기를 얻기는 어려워도 잃기는 쉽다고 했습니다. 손님은 잠자는 것이 매우 편안하니 마치 봉국에 부임하는 이가 아닌 것 같군요.”
태공은 이 말을 듣고서 야밤에 입는 옷을 입은 채로 행진해 여명에 봉국에 닿았다. 이때 내후(萊侯)가 침공해 와서 태공과 영구(營丘)를 놓고 다투었다. 영구는 내(萊)나라 가까이에 있었고, 내(萊)나라 사람들은 이족(夷族)이었는데, 상나라의 주왕(紂王)의 정치가 혼란스러웠던 데다 주(周) 왕조가 이제 막 성립해 먼 나라들까지는 안정시키지 못하는 것을 틈타서 태공과 영토를 다툰 것이었다.
太公至国, 脩政, 因其俗, 簡其礼, 通商工之業, 便魚塩之利, 而人民多帰斉, 斉為大国. 及周成王少時, 管蔡作亂, 淮夷16)畔周, 乃使召康公17)命太公曰:「東至海, 西至河, 南至穆陵, 北至無棣,18) 五侯九伯, 実得征之.」19)斉由此得征伐, 為大国. 都営丘.
태공은 봉국에 도착하자 정치를 가다듬었고, 그곳의 풍속을 따랐으며, 의례를 간소하게 했으며, 상공업(商工業)을 장려했고, 어업생산을 편리하게 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제(齊)나라에 귀순해 제나라는 큰 나라가 되었다. 주 성왕(周成王)이 아직 어렸던 때에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이 난을 일으키고 회이(淮夷)가 주 왕실에 반역하자, 주 왕실은 소강공(召康公)을 파견해 태공에게 이렇게 명령했다.
“동쪽으로는 바다에, 서쪽으로는 황하에, 남쪽으로는 목릉(穆陵)에, 북쪽으로는 무체(無棣)에 이르는 땅에서, 다섯 등급의 제후와 9주(九州)의 백(伯) 등의 잘못을 너희 제나라가 모두 징벌해도 좋다.”
제나라는 이리하여 징벌의 권한을 가지게 되어 큰 나라가 되었고 영구에 도읍을 두었다.
蓋太公之卒百有余年,20) 子丁公呂伋21)立. 丁公卒, 子乙公得立. 乙公卒, 子癸公慈母22)立. 癸公卒, 子哀公不辰23)立.
태공이 대략 1백여 세에 죽자, 아들 정공(丁公) 여급(呂伋)이 즉위했고, 정공이 죽자 그 아들 을공(乙公) 득(得)이 즉위했고, 을공이 죽자 그 아들 계공(癸公) 자모(慈母)가 즉위했으며, 계공이 죽자 그 아들 애공(哀公) 불신(不辰)이 즉위했다.
哀公時, 紀侯譖之周, 周烹哀公24)而立其弟静, 是為胡公.25) 胡公徙都薄姑,26) 而當周夷王之時.
애공 때에 기후(紀侯)가 주(周)의 왕에게 애공을 참소했다. 왕은 애공에게 팽(烹)의 형벌을 내리고 그 동생 정(靜)을 세웠는데, 그가 호공(胡公)이다. 호공은 도읍을 박고(薄姑)로 옮겼는데, 이때는 주 이왕(周夷王)의 시기였다.
哀公之同母少弟山怨胡公, 乃與其党率営丘人襲攻殺胡公而自立,27) 是為献公. 献公元年, 尽逐胡公子, 因徙薄姑都, 治臨菑.
애공과 같은 어머니 소생의 막내 동생인 강산(姜山)이 호공을 원망해, 그 무리와 함께 영구의 사람들을 이끌고 호공을 습격해 죽이고 스스로 즉위했는데 그가 헌공(獻公)이다. 헌공은 즉위한 그해에 호공의 아들들을 모두 쫓아냈고 뒤이어 수도를 박고에서 임치(臨菑)로 옮겼다.
九年, 献公卒, 子武公寿立. 武公九年, 周厲王出奔, 居彘.28) 十年, 王室亂, 大臣行政, 号曰「共和」. 二十四年, 周宣王初立.
9년에 헌공이 죽고 아들 무공(武公) 수(壽)가 즉위했다. 무공 9년에 주 여왕(周厲王)이 도망쳐 나와 체(彘) 땅에 머물렀다. 10년에는 주 왕실이 혼란해져서 대신들이 정권을 행사하면서 ‘공화(共和)’라고 이름했다. 20년에 비로소 주 선왕(周宣王)이 즉위했다.
二十六年, 武公卒, 子厲公無忌立. 厲公暴虐, 故胡公子复入斉, 斉人欲立之, 乃與攻殺厲公. 胡公子亦戦死. 斉人乃立厲公子赤為君, 是為文公, 而誅殺厲公者七十人.
무공이 즉위한 지 26년 만에 죽고 아들 여공(厲公) 무기(無忌)가 즉위했는데, 여공은 포악한 정치를 했다. 죽은 호공의 아들이 다시 제나라의 수도에 들어오자 제나라 사람들은 그를 옹립하고 그와 함께 여공을 쳐서 죽였는데, 호공의 아들도 이 싸움에서 죽었다. 그러자 제나라 사람들은 여공의 아들 적(赤)을 임금으로 세웠는데 그가 문공(文公)이다. 문공은 여공을 죽인 사람 70명을 사형에 처했다.
文公十二年卒, 子成公脱29)立. 成公九年卒, 子荘公購立.
문공이 즉위한 지 20년 만에 죽자 아들 성공(成公) 탈(脫)이 즉위했다. 성공이 즉위한 지 9년 만에 죽자 그 아들 장공(莊公) 구(購)가 즉위했다.
荘公二十四年, 犬戎殺幽王, 周東徙雒. 秦始列為諸侯. 五十六年, 晉弑其君昭侯.
장공 24년, 견융(犬戎)이 주 유왕(周幽王)을 죽이자 주 왕실은 동쪽으로 낙읍(雒邑)에 천도했으며, 진(秦)이 이때 처음으로 제후의 열에 끼었다. 56년에 진(晉)나라 사람들이 임금 소후(昭侯)를 시해했다.
六十四年, 荘公卒, 子釐公祿甫立.
64년에 장공이 죽자 아들 희공(釐公) 녹보(祿甫)가 즉위했다.
釐公九年, 魯隠公初立. 十九年, 魯桓公弑其兄隠公而自立為君.
희공 9년에 비로소 노 은공(魯隱公)이 즉위했다. 19년에 노 환공(魯桓公)이 형 은공을 시해하고 스스로 즉위해 임금이 되었다.
二十五年, 北戎伐斉. 鄭使太子忽來救斉, 斉欲妻之. 忽曰:「鄭小斉大, 非我敵.」遂辞之.
25년, 북융(北戎)이 제나라를 침공하자, 정(鄭)나라가 태자 홀(忽)을 보내와서 제나라를 도와주었다. 제나라 왕이 그에게 딸을 시집보내려고 했으나, 홀은 “정나라는 작고 제나라는 크니, 내게 알맞은 짝이 아닙니다.”라고 하며 사양했다.
三十二年, 釐公同母弟夷仲年死. 其子曰公孫無知, 釐公愛之, 令其秩服奉養比太子.
32년, 희공의 같은 어머니 소생의 동생인 이중년(夷仲年)이 죽었다. 희공이 이중년의 아들 공손무지(公孫無知)를 사랑해 그 녹봉과 의복 등의 봉양을 태자와 동등하게 하게 명령했다.
三十三年, 釐公卒, 太子諸児立, 是為襄公.
33년에 희공이 죽자 태자 제아(諸兒)가 즉위했는데, 그가 양공(襄公)이다.
襄公元年, 始為太子時, 嘗與無知鬥, 及立, 絀無知秩服, 無知怨.
양공(襄公) 원년, 양공은 일찍이 태자였을 때 무지(無知)와 싸운 적이 있었는데, 즉위하자 곧 무지의 녹봉과 의복 등의 봉양을 없애버렸다. 무지는 이에 원한을 품었다.
四年, 魯桓公與夫人如斉. 斉襄公故嘗私通魯夫人. 魯夫人者, 襄公女弟也, 自釐公時嫁為魯桓公婦, 及桓公來而襄公复通焉. 魯桓公知之, 怒夫人, 夫人以告斉襄公. 斉襄公與魯君飲, 酔之, 使力士彭生抱上魯君車, 因拉殺魯桓公,30) 桓公下車則死矣. 魯人以為譲,31) 而斉襄公殺彭生以謝魯.
4년, 노 환공(魯桓公)이 그 부인과 함께 제나라에 왔다. 제 양공은 전에 노부인(魯夫人)과 사통한 적이 있었다. 노부인은 양공의 여동생으로, 희공 때에 노 환공에게 시집가서 그의 부인이 되었는데, 환공과 함께 제나라에 오자 양공이 다시 그녀와 사통했다. 노 환공이 그것을 알고 부인에게 화를 냈고 부인은 그것을 제 양공에게 알렸다. 제 양공은 노 환공과 함께 술을 마시며 그를 몹시 취하게 만든 다음 역사(力士) 팽생(彭生)을 시켜 환공을 안아 수레에 실으면서 갈비뼈를 부러뜨려 죽이도록 했다. 노 환공은 수레에서 내려졌을 때 이미 죽어 있었다.
노나라에서 이 일을 비난하자 제 양공은 팽생을 죽여 노나라에 사과했다.
八年, 伐紀, 紀遷去其邑.32)
8년에 기(紀)나라를 치자 기 나라가 도읍을 옮겼다.
十二年, 初, 襄公使連称、管至父戍葵丘,33) 瓜時而往, 及瓜而代.34) 往戍一歳, 卒瓜時而公弗為発代. 或為請代, 公弗許. 故此二人怒, 因公孫無知謀作亂. 連称有従妹在公宮, 無寵,35) 使之閒襄公,36) 曰「事成以女為無知夫人」. 冬十二月, 襄公游姑棼,37) 遂猟沛丘.38) 見彘, 従者曰「彭生」.39) 公怒, 射之, 彘人立而啼. 公懼, 墜車傷足, 失屨. 反而鞭主屨者茀40)三百. 茀出宮. 而無知、連称、管至父等聞公傷, 乃遂率其衆襲宮. 逢主屨茀, 茀曰:「且無入驚宮, 驚宮未易入也.」無知弗信, 茀示之創,41) 乃信之. 待宮外, 令茀先入. 茀先入, 即匿襄公戸閒. 良久, 無知等恐, 遂入宮. 茀反與宮中及公之幸臣攻無知等, 不勝, 皆死. 無知入宮, 求公不得. 或見人足於戸閒, 発視, 乃襄公, 遂弑之, 而無知自立為斉君.
12년, 당초에 양공은 대부(大夫) 연칭(連稱), 관지보(管至父)를 규구(葵丘)에 파견해 국경 수비를 하게 했다. 그 기간은 오이가 날 때에 갔다가 오이가 날 때에 교대하는 것이었었다. 그들이 수비를 간지 1년이 되어 오이가 날 때가 지났는데도 양공은 교대 군사를 보내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그들을 위해서 교대시켜줄 것을 청했으나 양공은 허락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이에 분노하여 무지를 통해 반란을 도모했다. 연칭에게는 궁녀로 있으면서 총애를 받지 못한 사촌 누이동생이 있었는데, 연칭은 그녀를 시켜 양공의 약점을 살피게 하며 말했다. “일이 성공하면 너는 무지의 부인이 된다.”
겨울이 되어 12월에 양공은 고분(姑棼)에 놀러 나갔다가 내쳐 패구(沛丘)에까지 사냥을 나갔다. 양공이 멧돼지를 발견했는데 종자(從者)가 “팽생입니다.”라고 말했다. 양공이 노하여 멧돼지를 쏘아 맞추니, 멧돼지가 사람처럼 서서 울부짖었다. 양공이 이에 놀라 수레에서 떨어져 발을 다치고 신발을 잃어버렸다. 양공은 궁으로 돌아온 뒤 신발을 책임지는 역인(役人) 불(茀)에게 3백대의 채찍질을 했다. 양공이 다쳤다는 소식을 들은 무지, 연칭, 관지보 등이 그들의 무리를 이끌고 궁을 습격하려는 중에 왕궁에서 나오던 불과 마주쳤다. 불이 말했다. “궁을 들이쳐 놀라게 하는 것을 잠시 멈추시지요. 궁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가는 들어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무지가 믿지 않자 불이 양공에게 맞은 상처를 보여주었다.
그제에서야 그 말을 믿은 그들은 궁 밖에서 기다리고 불을 먼저 들여보냈다. 불은 먼저 들어가 즉시 양공을 문 틈에 숨겼다. 한참이 지나자 무지 등은 두려워 견디지 못하고 궁 안으로 들이쳤다. 불은 궁중의 호위병 및 양공의 총신(寵臣)들과 함께 무지 등에게 반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모두 죽었다. 무지가 궁에 들어가 양공을 찾으려고 했으나 찾아내지 못하던 중, 누군가가 문틈에 발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문을 젖혀보니 바로 양공이었다. 무지는 곧 그를 죽이고 스스로 즉위해 제의 임금이 되었다.
桓公元年春, 斉君無知游於雍林.42) 雍林人嘗有怨無知, 及其往游, 雍林人襲殺無知, 告斉大夫曰:「無知弑襄公自立, 臣謹行誅. 唯大夫更立公子之當立者, 唯命是聴.」
환공(桓公) 원년 봄, 제의 임금 무지가 옹림(雍林)에 놀러 갔다. 옹림의 사람 중에 일찍이 무지에게 원한을 품었던 이들이 있었는데 그가 놀러 온 것을 틈타 습격해 죽인 다음 제의 대부에게 말했다. “무지가 양공을 시해하고 스스로 즉위했기에 저희가 삼가 처단했습니다. 대부께서 새로이 공자(公子)들 가운데서 합당한 이를 세우시면, 저희는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初, 襄公之酔殺魯桓公, 通其夫人, 殺誅數不當, 淫於婦人, 數欺大臣, 群弟恐禍及, 故次弟糾奔魯. 其母魯女也. 管仲、召忽傅之. 次弟小白奔莒, 鮑叔傅之. 小白母, 衛女也, 有寵於釐公. 小白自少好善大夫高傒.43) 及雍林人殺無知, 議立君, 高、国先陰召小白於莒. 魯聞無知死, 亦発兵送公子糾, 而使管仲別将兵遮莒道, 射中小白帯鈎. 小白詳死, 管仲使人馳報魯. 魯送糾者行益遅, 六日至斉, 則小白已入, 高傒立之, 是為桓公.
당초에 양공이 노 환공을 술에 취하게 해 죽이고 그 부인과 사통했으며, 부당한 처벌로 죽이는 일이 잦았고, 여색에 빠졌으며, 여러 차례 대신들을 속이는 등의 행위를 하자, 여러 동생들은 그 재앙이 자신들에게 미칠까 두려워했다. 이 때문에 둘째 왕자인 규(糾)는 노(魯)나라로 도망쳤는데, 그 어머니는 노후(魯侯)의 딸이었고, 관중(管仲)과 소홀(召忽)이 그를 보좌하고 있었다. 그 다음 동생 소백(小白)은 거(莒)나라로 도망쳤는데, 포숙(鮑叔)이 그를 보좌하고 있었다. 소백의 어머니는 위공(衛公)의 딸로서 희공(釐公)의 총애를 받았다.
소백은 어려서부터 대부 고혜(高傒)를 좋아했는데, 옹림의 사람들이 무지를 죽이고 임금 세우는 일을 의논하게 되자 고혜와 국의중(國懿仲)은 먼저 거나라에 있는 소백을 몰래 불러들였다. 노나라도 무지가 죽었다는 것을 듣고 군사를 풀어 공자 규를 보내는 한편 관중에게 따로 병사를 이끌고 가서 거나라로 통하는 길을 막게 했다. 관중이 화살로 소백을 쏘아 맞추었다. 소백이 허리띠의 쇠 부분을 맞고서 죽은 시늉을 했는데, 관중은 사람을 시켜 말을 달려가 노나라에 보고하게 했다. 노나라는 공자 규를 호송하는 행군을 좀 늦추어 6일 만에 제나라에 닿았다. 그런데 이때는 공자 소백이 이미 들어와 고혜가 그를 임금으로 세운 뒤였으니, 그가 바로 환공(桓公)이다.
桓公之中鈎, 詳死以誤管仲, 已而載温車中馳行, 亦有高、国内應, 故得先入立, 発兵距魯. 秋, 與魯戦于乾時,44) 魯兵敗走, 斉兵掩絶魯帰道. 斉遺魯書曰:「子糾兄弟, 弗忍誅, 請魯自殺之. 召忽、管仲讎也, 請得而甘心醢之. 不然, 将囲魯.」魯人患之, 遂殺子糾于笙涜.45) 召忽自殺, 管仲請囚. 桓公之立, 発兵攻魯, 心欲殺管仲. 鮑叔牙曰:「臣幸得従君, 君竟以立. 君之尊, 臣無以増君. 君将治斉, 即高傒與叔牙足也. 君且欲霸王, 非管夷吾不可. 夷吾所居国国重, 不可失也.」於是桓公従之. 乃詳為召管仲欲甘心, 実欲用之. 管仲知之, 故請往. 鮑叔牙迎受管仲, 及堂阜而脱桎梏,46) 斎祓而見桓公. 桓公厚礼以為大夫, 任政.
환공은 허리띠쇠를 맞고서 죽은 시늉을 해 관중이 오판하게 한 다음 장막을 친 마차를 타고 내달려 갔으며, 또 안에서는 고혜와 국의중의 호응이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먼저 들어가 즉위할 수 있었고 또 군대를 풀어 노나라의 군대를 막을 수 있었다. 그해 가을, 노나라와 간시(乾時)에서 싸웠는데, 노나라의 군대가 패주하자 제나라는 노나라 군대의 귀로를 차단했다. 제 환공은 노나라에 글을 보내어 이렇게 말했다.
“공자 규는 형제라 차마 죽이지 못하겠으니 노후(魯侯) 스스로 그를 죽이기 바란다. 소홀과 관중은 나와는 원수지간이니 내 직접 그들을 잡아 죽여 젓갈을 담아 기분을 풀려고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곧 노나라 수도를 포위하겠다.”
노나라 사람들은 이를 걱정해 곧 공자 규를 생독(笙瀆)에서 죽였다. 소홀은 자살했고 관중은 구금되기를 청했다. 환공이 즉위해 곧 군대를 보내 노나라를 칠 때에는 관중을 죽이려는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포숙아가 이렇게 말했다.
“저는 다행히도 임금을 섬기게 되었는데 임금께서 마침내 즉위하셨습니다. 임금께서는 이미 높이 되시어 저로서는 더 높여드릴 수가 없습니다. 임금께서 장차 제나라를 다스리시려고 한다면야 고혜와 저 포숙아로 충분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임금께서 이제 패왕(覇王)이 되려고 하신다면 관이오(管夷吾) 없이는 안 됩니다. 관이오가 사는 나라는 그 위세가 커지게 될 것이니, 그를 놓치면 안 됩니다.”
이리하여 환공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그래서 관중을 잡아 죽여 기분을 풀려는 것으로 가장했으나, 실제로는 그를 등용하려는 것이었다. 관중도 그것을 알고 일부러 구금되어 돌아가기를 청했던 것이다. 포숙아는 관중을 영접해 당부(堂阜)에 이른 다음에 관중의 족쇄와 수갑을 풀어주고, 목욕재계해 복을 빈 다음 환공을 뵙게 했다. 환공은 관중을 두터이 예우하며 대부(大夫)로 삼아 정치를 맡겼다.
桓公既得管仲, 與鮑叔、隰朋、47)高傒修斉国政, 連五家之兵,48) 設軽重魚塩之利,49)以贍貧窮, 祿賢能, 斉人皆説.
환공은 관중을 얻고 나서 포숙, 습붕(隰朋), 고혜 등과 함께 제나라의 정치를 가다듬었다. 다섯 가구를 기초로 하는 군대조직을 시행하고, 화폐 주조와 어로(漁撈), 제염(製鹽) 등의 이용후생의 조치를 하며, 빈궁한 자들을 구제하고 능력 있는 현사(賢士)들을 등용하고 우대하니, 제나라의 사람들은 모두 기뻐했다.
二年, 伐滅郯,50) 郯子奔莒. 初, 桓公亡時, 過郯, 郯無礼, 故伐之.
환공 2년에 담(郯)나라를 쳐서 멸망시키니 담의 임금은 거(莒)나라로 도망쳤다. 전날 환공이 도망치던 때에 담나라를 지나갔는데 담나라가 무례히 굴었기 때문에 그들을 친 것이었다.
五年, 伐魯, 魯将師敗. 魯荘公請献遂邑以平,51) 桓公許, 與魯会柯而盟.52) 魯将盟, 曹沬以匕首劫桓公於壇上,53) 曰:「反魯之侵地!」桓公許之. 已而曹沬去匕首, 北面就臣位. 桓公後悔, 欲無與魯地而殺曹沬. 管仲曰:「夫劫許之而倍信殺之,54) 愈一小快耳, 而棄信於諸侯, 失天下之援, 不可.」於是遂與曹沬三敗所亡地於魯. 諸侯聞之, 皆信斉而欲附焉. 七年, 諸侯会桓公於甄,55) 而桓公於是始霸焉.
5년, 노(魯)나라를 쳐서 노나라 장수의 군대를 깨뜨렸다. 노 장공(魯莊公)이 수(遂)를 바쳐 화평을 청하자 환공이 이를 허락해 가(柯)에서 노후(魯侯)와 회맹(會盟)하게 되었다. 노후가 맹세하려고 할 때 조말(曹沬)이 단(壇) 위에서 비수로 환공을 위협하며 말했다. “빼앗은 노나라 땅을 반환하시오!” 환공은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야 조말은 비수를 치우고 북쪽을 바라보며 신하의 자리에 섰다. 환공은 후회가 되어 노나라의 땅을 반환하지 않고 조말을 죽이려고 했다.
그러자 관중이 말했다. “협박당해 승낙했다가 약속을 저버리고 그를 죽인다면, 작은 기분풀이가 될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제후들에게 신의를 저버렸음을 보이게 되고 그러면 천하의 지지를 잃게 될 것이니, 그럴 수 없는 일입니다.” 이리하여 제나라는 곧 조말이 세 번의 싸움에서 잃은 땅을 노나라에 돌려주었다. 제후들이 이 소식을 듣고 모두 제나라를 믿고 의지하려고 했다. 7년, 제후들이 견(甄)에서 환공을 회견했고 이리하여 환공이 처음으로 패권을 잡았다.
十四年, 陳厲公子完,56) 号敬仲, 來奔斉. 斉桓公欲以為卿, 譲;於是以為工正.57) 田成子常之祖也.
14년, 진 여공(陳厲公)의 아들로 시호가 경중(敬仲)인 진완(陳完)이 제나라로 도망쳐왔다. 제 환공은 그를 경(卿)으로 등용하려고 했으나 그가 사양하므로 공정(工正)으로 삼았다. 그가 바로 전성자 상(田成子常)의 선조이다.
二十三年, 山戎伐燕,58) 燕告急於斉. 斉桓公救燕, 遂伐山戎, 至于孤竹而還. 燕荘公遂送桓公入斉境. 桓公曰:「非天子, 諸侯相送不出境, 吾不可以無礼於燕.」於是分溝割燕君所至與燕, 命燕君复修召公之政, 納貢于周, 如成康之時. 諸侯聞之, 皆従斉.
23년, 산융(山戎)이 연(燕)나라를 치자 연나라가 제나라에 위급함을 알렸다. 제 환공은 연나라를 구원해 산융을 쳐서 고죽(孤竹)에까지 이른 다음에 돌아왔다. 연 장공(燕莊公)이 환공을 전송하다가 제나라의 경내에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이에 환공이 말했다. “천자가 아니면 제후가 영토 밖에까지 나가 전송하지 아니한다. 나는 연나라에 대해서 예의를 갖추지 않을 수 없다.” 이리하여 도랑을 파서 경계로 하고 장공이 온 곳까지의 땅을 연나라에 주었다. 그리고 장공에게 옛 소공(召公)의 덕정(德政)을 다시 펼 것과, 옛 주나라 성왕(成王)과 강왕(康王) 때와 같이 주 왕실에 공물을 바칠 것을 명령했다. 제후들이 이것을 듣고 모두 제나라를 따랐다.
二十七年, 魯湣公母曰哀姜, 桓公女弟也. 哀姜淫於魯公子慶父, 慶父弑湣公, 哀姜欲立慶父, 魯人更立釐公.59) 桓公召哀姜, 殺之.
27년의 일이다. 노 민공(魯湣公)의 어머니 애강(哀姜)은 환공의 여동생이었는데, 노나라의 공자 경보(慶父)와 간음했다. 경보가 민공을 시해하자 애강은 경보를 옹립하려고 했는데 노나라 사람들은 따로 희공(釐公)을 옹립했다. 제 환공은 애강을 소환해 죽였다.
二十八年, 衛文公有狄亂, 告急於斉. 斉率諸侯城楚丘60)而立衛君.
28년, 위 문공(衛文公)이 적(狄)나라 사람들의 침략을 당해 제나라에 위급함을 알렸다. 제나라는 제후들을 이끌고 초구(楚丘)에 성을 쌓고 위(衛)의 임금을 옹립했다.
二十九年, 桓公與夫人蔡姫戯船中. 蔡姫習水, 蕩公,61) 公懼, 止之, 不止, 出船, 怒, 帰蔡姫, 弗絶. 蔡亦怒, 嫁其女. 桓公聞而怒, 興師往伐.
29년, 환공이 부인 채희(蔡姬)와 배 위에서 장난을 쳤다. 물에 익숙한 채희가 배를 흔드니 환공이 두려워하며 제지했지만, 채희는 그치지 않았다. 환공은 배에서 내린 다음 화를 내며 채희를 친정으로 돌려보냈는데 관계를 끊지는 않았다. 채후(蔡侯) 역시 화가 나서 채희를 재가(再嫁)시켰다. 환공은 그것을 분노하여 군대를 일으켜 채나라로 쳐들어갔다.
三十年春, 斉桓公率諸侯伐蔡, 蔡潰.62) 遂伐楚. 楚成王興師問曰:「何故渉吾地?」管仲対曰:「昔召康公命我先君太公曰:『五侯九伯, 若実征之, 以夾輔周室.』63)賜我先君履,64) 東至海, 西至河, 南至穆陵, 北至無棣. 楚貢包茅不入, 王祭不具,65) 是以來責. 昭王南征不复, 是以來問.」66)楚王曰:「貢之不入, 有之, 寡人罪也, 敢不共乎! 昭王之出不复, 君其問之水浜.」67)斉師進次于陘.68) 夏, 楚王使屈完将兵扞斉, 斉師退次召陵.69) 桓公矜屈完以其衆. 屈完曰:「君以道則可;若不, 則楚方城以為城,70) 江、漢以為溝, 君安能進乎?」乃與屈完盟而去. 過陳, 陳袁涛塗詐斉, 令出東方, 覚. 秋, 斉伐陳.71) 是歳, 晉殺太子申生.
30년 봄, 제 환공이 제후들을 이끌고 채나라를 치니, 채나라가 무너졌다. 그리고 초 나라를 쳤다. 초 성왕(楚成王)이 군대를 일으켜 와서 물었다. “무슨 연고로 내 땅을 밟았소?” 관중이 (환공을 대신해) 이렇게 대답했다.
“전에 소강공(召康公)이 우리의 선대 임금인 태공(太公)에게 ‘다섯 등급의 제후와 구주(九州)의 백(伯) 등의 잘못을 너희 제나라가 징벌해 주 왕실을 보좌하라.’라고 하셨소. 그리고 우리 선대 임금에게 동쪽으로는 바다에, 서쪽으로는 황하에, 남쪽으로는 목릉(穆陵)에, 북쪽으로는 무체(無棣)에 이르는 땅을 밟게 하셨소.
초 나라의 공물인 포모(包茅)가 들어오지 않아 왕의 제사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으므로 질책하러 온 것이오. 또 소왕(昭王)이 남쪽으로 순수(巡狩)하러 갔다가 돌아오지 아니하셨기에 그것을 문책하러 왔소.”
초왕이 이렇게 말했다.
“공물이 들어가지 않은 일은 있으니 그것은 과인의 잘못이오. 이후 어찌 감히 바치지 않을 수 있겠소? 소왕이 순수하러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것은 한수(漢水)가에 가서 물어보시오.”
제나라의 군대가 형(陘) 땅에 진주(進駐)했다. 여름이 되어 초왕이 굴완(屈完)을 시켜 군대를 이끌고 제나라에 대항하게 하자, 제나라의 군대는 소릉(召陵)으로 물러났다. 환공이 굴완에게 제나라 군대의 수가 많음을 뽐내자, 굴완은 이렇게 말했다.
“임금께서 도의를 따져서 행동하신다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러지 않으신다면 초 나라는 방성(方城)의 이어진 봉우리를 성으로 하고 양자강(揚子江)과 한수(漢水)를 해자(垓子)로 삼아 대항할 터이니, 임금께서 어떻게 전진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이리하여 환공은 굴완과 맹약을 맺고 물러갔다. 환공이 진(陳)나라를 경유했는데 진나라의 원도도(袁濤涂)가 제나라의 군대를 속여서 동쪽으로 에돌아가도록 했다가 발각되었다. 가을이 되어 제나라는 진(陳)나라를 쳤다. 이해에 진(晉)나라에서 태자 신생(申生)이 피살되었다.
三十五年夏, 会諸侯于葵丘.72) 周襄王使宰孔賜桓公文武胙、彤弓矢、大路,73) 命無拝. 桓公欲許之, 管仲曰「不可」, 乃下拝受賜.74) 秋, 复会諸侯於葵丘, 益有驕色. 周使宰孔会. 諸侯頗有叛者.75) 晉侯病, 後, 遇宰孔. 宰孔曰:「斉侯驕矣, 弟無行.」従之. 是歳, 晉献公卒, 里克殺奚斉、卓子,76) 秦穆公以夫人入公子夷吾為晉君. 桓公於是討晉亂, 至高梁,77) 使隰朋立晉君, 還.
35년 여름, 제후들을 규구(葵丘)에서 회맹하게 했다. 주 양왕(周襄王)이 재공을 보내 환공에게 문왕과 무왕께 제사지낸 고기와 주홍색의 화살 및 큰 수레를 하사하면서 엎드려 절하지 말도록 명했다. 환공은 이에 응낙하려다가 관중이 안 된다고 말하자 내려가서 엎드려 절하고 하사품을 받았다.
가을, 다시 제후들을 규구에 회맹하게 했는데, 환공은 더욱 교만한 기색을 띠었다. 주 왕실은 재공을 회맹에 보냈다. 제후들 속에는 이반하는 자들이 꽤 있었다. 진 헌공(晉獻公)은 병이 나서 늦게 오다가 재공과 마주쳤는데 재공이 “제후(齊侯)는 교만해졌소, 가지 마시오.”라고 하자 이에 따랐다. 이해에 진 헌공이 죽고 대부 이극(里克)이 공자 해제(奚齊)와 탁자(卓子)를 죽였다. 진 목공(秦穆公)이 부인과의 관계로 인해 공자 이오(夷吾)를 진(晉)에 들여보내 임금이 되게 하려고 했다. 이때 제 환공도 진(晉)의 변란을 토벌하기 위해서 고량(高梁)에 이른 다음 습붕(隰朋)을 보내 새 임금을 옹립한 뒤에 돌아갔다.
是時周室微, 唯斉、楚、秦、晉為彊. 晉初與会,78) 献公死, 国内亂. 秦穆公辟遠, 不與中国会盟. 楚成王初収荊蛮有之, 夷狄自置. 唯独斉為中国会盟, 而桓公能宣其徳, 故諸侯賓会. 於是桓公称曰:「寡人南伐至召陵, 望熊山;北伐山戎、離枝、孤竹;79)西伐大夏, 渉流沙;80)束馬懸車登太行, 至卑耳山81)而還. 諸侯莫違寡人. 寡人兵車之会三,82) 乗車之会六,83) 九合諸侯, 一匡天下.84) 昔三代受命, 有何以異於此乎? 吾欲封泰山, 禅梁父.」管仲固諫, 不聴;乃説桓公以遠方珍怪物至乃得封, 桓公乃止.
이때에는 주 왕실은 쇠약해지고, 제(齊), 초(楚), 진(晉)의 나라들만이 강성했다. 진(晉)나라는 처음으로 회맹에 참여했던 데다가 헌공이 죽고 나서는 국내가 혼란해졌다. 진 목공은 나라가 멀고 외져서 중원(中原) 국가들의 회맹에 참여하지 않았다. 초 성왕은 이제 막 형만(荊蠻)의 땅을 복속해 이적(夷狄)의 나라라고 자처했다. 오직 제(齊)나라만이 중원 각국의 회맹을 주재했고 환공이 자신의 덕(德)을 잘 선양했기 때문에 제후들이 복종하며 회맹했다. 이에 환공은 이렇게 공언했다.
“과인은 남쪽을 정벌해 소릉(召陵)에까지 이르러 웅산(熊山)을 바라보았고, 북쪽으로 산융(山戎), 이지(離枝), 고죽(孤竹)을 정벌했으며, 서쪽으로 대하(大夏)를 정벌해 유사(流沙)를 경유했고, 말발굽을 싸고 수레를 매달면서 태행산(太行山)에 올라 비이산(卑耳山)에 이른 다음에 돌아왔소. 제후들 가운데 아무도 과인의 명령을 거스르지 못했으니, 과인은 전쟁을 위한 회맹 셋과, 평화를 위한 회맹 여섯으로 제후들을 아홉 번 규합했고 천하의 주 왕실의 일을 한 번 바로잡았소. 옛날 하, 상, 주 삼대(三代)의 왕들이 천명(天命)을 받든 것과 이 일들이 무엇이 다르오? 과인도 옛날의 제왕들처럼 태산(泰山)에서 하늘에 제사를 받들고, 양보산(梁父山)에서 땅에 제사를 받들려고 하오.”
관중이 이를 굳이 만류했으나 듣지 않다가, 먼 지방에서 진기한 보물들이 이르고 나서야 봉선(封禪)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설득하니 환공은 그제에서야 중지했다.
三十八年, 周襄王弟帯與戎、翟合謀伐周, 斉使管仲平戎於周. 周欲以上卿礼管仲, 管仲頓首曰:「臣陪臣, 安敢!」三譲, 乃受下卿礼以見. 三十九年, 周襄王弟帯來奔斉. 斉使仲孫請王, 為帯謝. 襄王怒, 弗聴.
38년, 주 양왕(周襄王)의 동생 희대(姬帶)가 융(戎), 적(翟)의 사람들과 공모해 주나라를 쳤다. 제(齊)나라는 관중을 보내 융과 주 왕실을 화해시키도록 했다. 주 양왕이 관중을 상경(上卿)의 예로 접견하려고 하자 관중은 엎드려 절하며 “저는 신하의 신하인데 어찌 감히 그러겠습니까!”라 했다. 이와 같이 세 번을 사양한 다음에야 하경(下卿)의 예를 받아들여 주 양왕을 알현했다. 39년, 주 양왕의 동생 희대가 제나라로 도망쳐 왔다. 제나라는 중손(仲孫)을 보내어 왕에게 희대 대신 사죄를 청했다. 주 양왕은 화를 내며 듣지 않았다.
四十一年, 秦穆公虜晉恵公, 复帰之. 是歳, 管仲、隰朋皆卒.85) 管仲病, 桓公問曰:「群臣誰可相者?」管仲曰:「知臣莫如君.」公曰:「易牙如何?」86)対曰:「殺子以適君, 非人情, 不可.」公曰:「開方如何?」対曰:「倍親以適君, 非人情, 難近.」87)公曰:「豎刀如何?」88)対曰:「自宮以適君, 非人情, 難親.」管仲死, 而桓公不用管仲言, 卒近用三子, 三子専権.
41년, 진 목공(秦穆公)이 진 혜공(晉惠公)을 사로잡았다가 다시 돌려 보내주었다. 이해에 관중과 습붕이 모두 죽었다. 관중이 병이 나자 환공이 물었다. “뭇 신하들 가운데 재상을 시킬 만한 이는 누구인가?” 관중이 말했다. “임금보다 더 신하를 잘 알 사람은 없지요.” 환공이 물었다. “역아(易牙)는 어떤가?” “제 자식을 죽여 임금에 영합했으니 인정에 어긋납니다. 안 됩니다.” 환공이 다시 물었다. “개방(開方)은 어떤가?” “부모를 배반하고 임금에게 영합했으니 인정에 어긋납니다. 가까이 두기 어렵습니다.” 환공이 다시 물었다. “수도(豎刀)는 어떤가?” “제 생식기를 갈라 임금에게 영합했으니 인정에 어긋납니다. 친애하기 어렵습니다.”
관중이 죽고 나자 환공은 관중의 말을 따르지 않고 이 세 사람을 가까이 두어 중용했고, 이리하여 이들 세 사람이 정권을 전횡하게 되었다.
四十二年, 戎伐周, 周告急於斉, 斉令諸侯各発卒戍周. 是歳, 晉公子重耳來, 桓公妻之.
42년, 융(戎)이 주나라를 치자 주나라는 제나라에 위급함을 알렸다. 제나라는 제후들에게 명해 각기 군사를 보내 주 왕실을 수비하게 했다. 이해에 진(晉)나라의 공자 중이(重耳)가 제나라에 오자 환공이 그에게 딸을 시집보냈다.
四十三年. 初, 斉桓公之夫人三:曰王姫、徐姫、89)蔡姫, 皆無子. 桓公好内,90) 多内寵, 如夫人者六人, 長衛姫, 生無詭;91)少衛姫, 生恵公元;鄭姫, 生孝公昭;葛嬴, 生昭公潘;密姫, 生懿公商人;宋華子,92) 生公子雍. 桓公與管仲属孝公於宋襄公, 以為太子. 雍巫93)有寵於衛共姫, 因宦者豎刀以厚献於桓公, 亦有寵, 桓公許之立無詭.94) 管仲卒, 五公子皆求立. 冬十月乙亥, 斉桓公卒. 易牙入, 與豎刀因内寵殺群吏,95) 而立公子無詭為君. 太子昭奔宋.
43년의 일이다. 원래 제 환공에게는 부인이 왕희(王姬), 서희(徐姬), 채희(蔡姬) 이렇게 셋이 있었는데, 모두 아들이 없었다. 환공은 여색을 좋아해서 총애한 희첩(姬妾)이 많았다. 부인과 같은 예우를 받는 자가 여섯 명이 있었는데, 큰 위희[長衛姬]는 공자 무궤(無詭)를 낳았고, 작은 위희[少衛姬]는 혜공 원(惠公元)을 낳았고, 정희(鄭姬)는 효공 소(孝公昭)를 낳았고, 갈영(葛嬴)은 소공 반(昭公潘)을 낳았고, 밀희(蜜姬)는 의공 상인(懿公商人)을 낳았고, 송화자(宋華子)는 공자 옹(公子雍)을 낳았다. 환공과 관중은 효공(孝公)을 송 양공(宋襄公)에게 위탁하며 태자로 세웠다. 옹무(雍巫)는 위공희(衛共姬)의 총애를 받았는데, 내관인 수도를 통해 환공에게 많은 예물을 바쳐 환공에게도 총애를 받았다.
환공은 그들에게 무궤를 태자로 세울 것을 응낙했다. 관중이 죽고 나자 다섯 공자가 모두 태자가 되려고 했다. 그해 겨울 10월 을해일(乙亥日)에 환공이 죽었다. 역아는 궁중에 들어가서 수도와 함께 궁중의 총신(寵臣)들에 의지해 여러 대부들을 죽이고 공자 무궤를 임금으로 옹립했다. 태자인 소(昭)는 송나라로 도망쳤다.
桓公病, 五公子各樹党争立. 及桓公卒, 遂相攻, 以故宮中空, 莫敢棺.96) 桓公尸在床上六十七日, 尸虫出于戸. 十二月乙亥, 無詭立, 乃棺赴. 辛巳夜, 斂殯.97)
환공이 병이 났을 때 다섯 공자는 각자 당파를 이루어 계위(繼位)를 다투다가, 환공이 숨을 거두자 마침내는 서로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궁중이 비어 감히 나서서 시신을 입관시킬 사람이 없었다. 환공의 시신이 침상에서 67일이나 있게 되자 시체의 구더기가 문 밖에까지 기어 나왔다. 12월 을해일에 무궤가 즉위하고 나서야 입관과 부고(訃告)를 했고, 신사일(辛巳日) 밤에 대렴(大殮)을 하고 빈소에 안치했다.
桓公十有余子, 要其後立者五人:無詭立三月死, 無謚;次孝公;次昭公;次懿公;次恵公. 孝公元年三月, 宋襄公率諸侯兵送斉太子昭而伐斉. 斉人恐, 殺其君無詭. 斉人将立太子昭, 四公子之徒攻太子, 太子走宋, 宋遂與斉人四公子戦. 五月, 宋敗斉四公子師而立太子昭, 是為斉孝公. 宋以桓公與管仲属之太子, 故來征之. 以亂故, 八月乃葬斉桓公.98)
환공에게는 10여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나중에 왕위에 오른 자가 모두 다섯 명이었다. 무궤는 즉위 30개월 만에 죽어 시호가 없었고, 그 다음에 차례로 효공(孝公), 소공(昭公), 의공(懿公), 혜공(惠公)이 즉위했다.
효공 원년 3월, 송 양공이 제후의 군대를 이끌고 제나라의 태자 소(昭)를 돌려보내면서 제를 공격했다. 제나라 사람들은 이를 두려워해 임금 무궤를 살해했다. 제나라 사람들이 태자 소를 옹립하려고 하자 네 공자의 무리가 태자를 공격했다. 태자는 송나라로 도망쳐 송나라가 제나라 네 공자의 사람들과 싸웠다. 5월, 송나라가 제 나라 네 공자의 군대를 쳐부수고 태자 소를 옹립했으니, 그가 바로 효공(孝公)이다. 송나라는 환공와 관중이 그들에게 태자를 맡겼기 때문에 제나라에 와서 네 공자를 토벌한 것이었다. 이러한 변란 때문에 8월에야 제 환공을 안장하게 되었다.
六年春, 斉伐宋, 以其不同盟于斉也.99) 夏, 宋襄公卒. 七年, 晉文公立.
6년 봄, 제나라가 송나라를 쳤는데, 이는 그들이 제나라에서의 동맹에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름, 송 양공이 죽었다. 7년, 진 문공(晉文公)이 즉위했다.
十年, 孝公卒, 孝公弟潘因衛公子開方殺孝公子而立潘, 是為昭公. 昭公, 桓公子也, 其母曰葛嬴.
10년, 효공이 죽었다. 효공의 동생 반(潘)이 위(衛)의 공자 개방(開方)을 통해 효공의 아들을 죽이고 스스로 즉위하니, 그가 소공(昭公)이다. 소공은 환공의 아들로서 그의 어머니는 갈영(葛嬴)이다.
昭公元年, 晉文公敗楚於城濮,100) 而会諸侯践土, 朝周, 天子使晉称伯.101) 六年, 翟侵斉. 晉文公卒. 秦兵敗於殽. 十二年, 秦穆公卒.
소공 원년, 진 문공(晉文公)이 초 나라를 성복(城濮)에서 쳐부수고 제후를 천토(踐土)에 모은 다음, 주 왕실에 알현했다. 천자는 진 문공에게 백(伯)이라고 칭하게 했다. 6년, 적(翟)나라 사람들이 제나라에 침입했다. 진 문공이 죽었고, 진(秦)나라의 군대가 효산(殽山)에서 진(晉)나라의 복병에게 패배했다. 12년, 진 목공(秦穆公)이 죽었다.
十九年五月, 昭公卒, 子舎立為斉君. 舎之母無寵於昭公, 国人莫畏. 昭公之弟商人以桓公死争立而不得, 陰交賢士, 附愛百姓, 百姓説. 及昭公卒, 子舎立, 孤弱, 即與衆十月即墓上弑斉君舎, 而商人自立, 是為懿公. 懿公, 桓公子也, 其母曰密姫.
19년 5월, 소공이 죽고 그 아들 사(舍)가 즉위했다. 사의 어머니는 소공에게 총애받지 못했기에 제나라 사람들이 사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소공의 동생 상인(商人)이 환공이 죽고 왕위를 다투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이래로 은밀히 현사(賢士)들과 사귀며 백성들을 사랑하자 백성들이 그를 좋아했다. 소공이 죽어 아들 사가 즉위했으나 외롭고 미약한 것을 보고, 상인은 곧 10월에 무리와 함께 소공의 묘에 가서 임금 사를 죽였다. 이리하여 상인이 스스로 즉위하니 그가 의공(懿公)이다. 의공은 환공의 아들로 그의 어머니는 밀희(蜜姬)이다.
懿公四年春, 初, 懿公為公子時, 與丙戎102)之父猟, 争獲不勝, 及即位, 断丙戎父足,103) 而使丙戎僕.104) 庸職之妻好,105) 公内之宮, 使庸職驂乗. 五月, 懿公游於申池,106) 二人浴, 戯. 職曰:「断足子!」戎曰:「奪妻者!」二人倶病此言, 乃怨. 謀與公游竹中, 二人弑懿公車上, 棄竹中而亡去.
의공 4년 봄, 옛날 의공이 공자였던 때에 병융(丙戎)의 아버지와 사냥을 갔다가 포획물을 두고 다투다가 진 일이 있었는데, 의공은 임금이 되자 그의 발을 자르고 아들 병융에게는 마부 노릇을 하게 했다. 또 용직(庸職)이라는 사람의 부인이 미인이었는데, 의공은 그녀를 궁중에 들여오고 용직에게는 참승(驂乘)을 하게 했다. 5월, 의공이 신지(申池)에 놀러 나갔는데, 그를 모시던 두 사람이 목욕하면서 서로 장난을 쳤다. 용직이 병융에게 “발 잘린 자의 아들!”이라고 하자, 병융이 용직에게 “아내를 빼앗긴 자!”라 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말에 매우 마음이 상해 이내 의공을 원망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모의를 하고 의공과 함께 대나무 숲으로 놀러 가서, 마차 위에서 의공을 죽인 다음 대밭에 버려두고 도망쳤다.
懿公之立, 驕, 民不附. 斉人廃其子而迎公子元於衛, 立之, 是為恵公. 恵公, 桓公子也. 其母衛女, 曰少衛姫, 避斉亂, 故在衛.
의공은 즉위한 뒤로 교만해져 백성들이 따르지 않았다. 그래서 제나라 사람들은 그의 아들을 버리고 위(衛)나라에서 공자 원(元)을 맞이해 옹립했는데, 그가 혜공(惠公)이다. 혜공은 환공의 아들이었으며, 그의 어머니는 위공(衛公)의 딸로 작은 위희[少衛姬]라고 불렸으며, 제나라의 내란을 피해 위나라에 있었던 것이다.
恵公二年, 長翟來,107) 王子城父攻殺之,108) 埋之於北門. 晉趙穿弑其君霊公.
혜공 2년, 장적(長翟) 사람들이 내침했는데, 왕자 성보(城父)가 그들을 쳐서 수령을 죽이고 그 수급(首級)을 북문(北門)에 묻었다. 진(晉)나라의 조천(趙穿)이 임금 영공(靈公)을 시해했다.
十年, 恵公卒, 子頃公無野立.109) 初, 崔杼有寵於恵公, 恵公卒, 高、国畏其偪也, 逐之, 崔杼奔衛.
10년, 혜공이 죽고 아들인 경공(頃公) 무야(無野)가 즉위했다. 이에 앞서 최저(崔杼)는 혜공의 총애를 받았는데, 혜공이 죽고 나자 고씨(高氏), 국씨(國氏)의 두 일족이 그들의 핍박을 두려워해 그들을 내쫓았다. 최저는 위(衛)나라로 도망쳤다.
頃公元年, 楚荘王彊, 伐陳;二年, 囲鄭, 鄭伯降, 已复国鄭伯.
경공 원년, 초 장왕(楚莊王)이 강대해져 진(陳)나라를 정벌했다. 2년, 초 장왕이 정(鄭)나라를 포위 공격해 정백(鄭伯)이 투항하자 얼마 후 다시 정백의 나라를 복원시켜 주었다.
六年春, 晉使郤克於斉, 斉使夫人帷中而観之. 郤克上, 夫人笑之. 郤克曰:「不是報, 不复渉河!」帰, 請伐斉, 晉侯弗許. 斉使至晉, 郤克執斉使者四人河内, 殺之. 八年. 晉伐斉, 斉以公子彊質晉, 晉兵去. 十年春, 斉伐魯、衛. 魯、衛大夫如晉請師, 皆因郤克.110) 晉使郤克以車八百乗111)為中軍将, 士燮将上軍, 欒書将下軍, 以救魯、衛, 伐斉. 六月壬申, 與斉侯兵合靡笄下.112) 癸酉, 陳于鞍.113) 逄丑父114)為斉頃公右. 頃公曰:「馳之, 破晉軍会食.」射傷郤克, 流血至履. 克欲還入壁, 其御曰:「我始入, 再傷, 不敢言疾, 恐懼士卒, 願子忍之.」遂复戦. 戦, 斉急, 丑父恐斉侯得, 乃易処, 頃公為右, 車絓於木而止.115) 晉小将韓厥伏斉侯車前, 曰「寡君使臣救魯、衛」, 戯之. 丑父使頃公下取飲,116) 因得亡, 脱去, 入其軍. 晉郤克欲殺丑父. 丑父曰:「代君死而見僇, 後人臣無忠其君者矣.」克舎之, 丑父遂得亡帰斉. 於是晉軍追斉至馬陵.117) 斉侯請以宝器謝,118) 不聴;必得笑克者蕭桐叔子,119) 令斉東畝.120) 対曰:「叔子, 斉君母. 斉君母亦猶晉君母, 子安置之? 且子以義伐而以暴為後, 其可乎?」於是乃許, 令反魯、衛之侵地.121)
6년 봄, 진(晉)나라가 각극(卻克)을 제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는데 경공이 어머니 태부인(太夫人)으로 하여금 장막 안에서 곱추인 그를 구경하게 했다. 각극이 올라오자 태부인은 그를 보고 소리 내어 웃었다. 각극은 “이 치욕을 갚지 않고는 다시 황하를 건너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각극은 귀국해 제나라를 치겠다고 청했으나 진후(晉侯)가 허락하지 않았다. 제나라의 사자(使者)가 진(晉)나라에 왔는데, 각극은 제나라의 사자 네 명을 하내(河內)에서 붙잡아 죽였다.
8년, 진(晉)나라가 제나라를 쳐서, 제나라가 공자 강(强)을 진나라에 인질로 보내고 나서 진나라가 군대를 철수시켰다. 10년 봄, 제나라가 노(魯)나라와 위(衛)나라를 정벌했다. 노, 위 두 나라의 대부들이 진(晉)나라에 가서 군대를 요청했는데, 모두 각극을 통해서 했다. 진(晉)나라는 각극에게 병거(兵車) 8백량으로 중군(中軍)을 지휘하게 하고, 사섭(士燮)이 상군(上軍)을, 난서(欒書)가 하군(下軍)을 이끌게 해, 노, 위 두 나라를 구원하기 위해서 제나라를 공격했다.
6월 임신일(壬申日)에 제후(齊侯)의 군대와 미계산(靡笄山) 아래서 마주쳐서, 계유일(癸酉日)에 안(鞍) 땅에 진(陣)을 쳤다. 제나라의 대부 방추보(逄丑父)가 제 경공(齊頃公)의 병거(兵車) 오른쪽에 서서 호위했다. 경공이 “돌격해 들어가자, 진(晉)나라 군대를 쳐부수고 회식을 하자.”라 했다. 각극이 제(齊)나라 군대의 화살에 맞아 피가 신발에까지 흘렀다. 각극이 군진(軍陣)의 영채(營寨)로 돌아가려고 하자 어자(御者)가 말했다.
“저는 처음 쳐들어가던 때에 두 번을 다쳤으나 감히 아프다는 말을 못 했습니다. 사졸(士卒)들을 놀라게 할까 두려우니 장군께서 좀 참으시지요.”
이리하여 다시 싸움에 들어갔다. 싸우는 중에 제나라 군대가 위급해지자, 방추보는 경공이 사로잡힐까 걱정되어 서로 자리를 바꾸어 섰다. 경공이 오른쪽의 호위무사 자리에 서 있다가 병거(兵車)가 나무에 걸려 멈추어 섰다. 진(晉)의 부장(部將) 한궐(韓厥)이 경공의 병거 앞에 엎드려 “저희 임금께서 소신(小臣)을 시켜 노나라와 위나라를 구원하라고 하셨습니다.”라고 하면서 조롱했다.
미리 자리를 바꾸었던 방추보가 제나라 군주인 체하며 경공에게 내려가서 마실 물을 가져오라고 해 경공을 도망칠 수 있게 했다. 이에 경공은 도망쳐 나와 제나라 군대로 돌아갔다. 진나라의 각극이 방추보를 죽이려고 하자 방추보가 말했다. “임금의 죽음을 대신하려고 한 이가 살육을 당하고 만다면, 이 뒤의 신하된 자들은 제나라 임금에게 충성하는 이가 없을 것입니다.” 각극은 그를 풀어주었고, 방추보는 결국 제나라로 도망쳐오게 되었다. 이리하여 진나라 군대는 제나라 군대를 추격해 마릉(馬陵)에까지 이르렀다. 제 경공이 보물을 바쳐 사죄하기를 요청했으나 들어주지 않고, 기어이 ‘각극을 비웃은 소동숙(蕭桐叔)의 딸’을 내놓으라고 했으며, “제나라의 논밭의 큰길을 동서로 향하게 하라.”라 했다. 제나라 사람들이 이렇게 대답했다.
“동숙의 딸은 제나라 임금의 어머니이다. 제나라 임금의 어머니는 다시 그대 진(晉)나라 임금의 어머니와도 같은데, 그대들은 그분을 어떻게 처치할 것인가? 게다가 그대들은 정의의 이름을 들고 정벌을 나왔으면서 포악한 행위로 끝을 맺으려고 하니 그래도 되는 것인가?”
진나라 군대는 이에 제나라의 요청을 받아들였고, 제나라로 하여금 노와 위 두 나라에게서 빼앗은 땅을 돌려주게 했다.
十一年, 晉初置六卿, 賞鞍之功. 斉頃公朝晉, 欲尊王晉景公,122) 晉景公不敢受, 乃帰. 帰而頃公弛苑囿, 薄賦斂, 振孤問疾, 虚積聚以救民, 民亦大説. 厚礼諸侯. 竟頃公卒, 百姓附, 諸侯不犯.
11년, 진(晉)나라가 처음으로 육경(六卿)을 두었고, 안(鞍) 땅에서의 전공(戰功)에 포상을 했다. 제 경공은 진(晉)나라에 가서 진 경공(晉景公)을 왕(王)으로 높여 배알하려고 했으나 진 경공이 감히 받아들이지 아니하여 그냥 돌아왔다.
제나라로 돌아온 경공(頃公)은 원유(苑囿)에 대한 금제(禁制)를 풀고, 조세를 경감하고, 외롭고 병든 이들을 돕고, 창고를 비워 백성들을 구제해, 백성들이 크게 기뻐했다. 그는 또 제후들에게도 두터운 예로 대했다. 경공이 죽을 때까지 백성들이 좋아하며 따랐고 제후들도 침범하지 않았다.
十七年, 頃公卒,123) 子霊公環立.
17년, 경공이 죽고 그 아들 영공(靈公) 환(環)이 즉위했다.
霊公九年, 晉欒書弑其君厲公. 十年, 晉悼公伐斉, 斉令公子光質晉. 十九年, 立子光為太子, 高厚傅之, 令会諸侯盟於鍾離.124) 二十七年, 晉使中行献子伐斉.125) 斉師敗, 霊公走入臨菑. 晏嬰止霊公, 霊公弗従. 曰:「君亦無勇矣!」晉兵遂囲臨菑, 臨菑城守不敢出, 晉焚郭中而去.
영공 9년, 진(晉)나라 난서(欒書)가 임금 여공(厲公)을 죽였다. 10년, 진 도공(晉悼公)이 제나라를 쳐서, 영공이 공자 광(光)을 진나라의 인질로 보냈다. 19년, 공자 광을 태자로 세워 고후(高厚)에게 그를 보좌하게 했고, 제후와 종리(鍾離)에서 회맹하게 했다. 27년, 진(晉)나라가 중항헌자(中行獻子)를 시켜서 제나라를 쳤다. 제나라 군대가 무너지자 영공은 임치(臨菑)로 도망쳐 들어갔다. 안영(晏嬰)이 도망치는 영공을 제지했으나 영공이 듣지 않았다.
안영이 말했다. “임금께서는 너무 용기가 없군요!” 이리하여 진(晉)나라 군대가 임치를 포위하니, 제나라 군대는 임치성을 지킬 뿐 감히 나와 싸우지 못했다. 진나라 군대는 임치성의 외성(外城)을 불태우고 철수했다.
二十八年, 初, 霊公取魯女, 生子光, 以為太子. 仲姫, 戎姫. 戎姫嬖, 仲姫生子牙, 属之戎姫. 戎姫請以為太子, 公許之. 仲姫曰:「不可. 光之立, 列於諸侯矣,126) 今無故廃之, 君必悔之.」公曰:「在我耳.」遂東太子光,127) 使高厚傅牙為太子. 霊公疾, 崔杼迎故太子光而立之, 是為荘公. 荘公殺戎姫. 五月壬辰, 霊公卒, 荘公即位, 執太子牙於句竇之丘, 殺之. 八月, 崔杼殺高厚. 晉聞斉亂, 伐斉, 至高唐.128)
28년의 일이다. 원래 영공은 노나라의 공녀(公女)를 아내로 맞아 낳은 아들 광(光)을 태자로 삼았다. 그 후 영공은 다시 중희(仲姬)와 융희(戎姬)를 두었다. 특히 융희가 영공의 총애를 받았는데, 중희는 공자 아(牙)를 낳자 그를 융희에게 맡겼다. 융희가 아를 태자로 삼기를 청하니 영공이 이를 허락했다.
중희가 말했다. “안 됩니다. 광이 태자가 되어 이미 제후의 열에 들었습니다. 이제 아무 연고 없이 그를 폐하면, 임금께서는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영공이 말했다. “내가 결정하면 그만이야.” 이리하여 태자 광을 동쪽 변방으로 보내버리고 고후로 하여금 아를 태자로 보좌하게 했다.
영공의 병이 중해지자 최저가 원래의 태자 광을 맞이해 임금으로 옹립하니, 이가 장공(莊公)이다. 장공은 융희를 죽였다. 5월 임진일(壬辰日)에 영공이 죽자 장공이 즉위해, 태자 아를 구두(句竇)의 언덕에서 붙잡아 살해했다. 8월, 최저가 고후를 죽였다. 진(晉)나라가 제나라의 내란 소식을 듣고 제나라를 정벌해 고당(高唐)에까지 이르렀다.
荘公三年, 晉大夫欒盈129)奔斉, 荘公厚客待之. 晏嬰、田文子諫, 公弗聴. 四年, 斉荘公使欒盈閒入晉曲沃130)為内應, 以兵随之, 上太行, 入孟門.131) 欒盈敗, 斉兵還, 取朝歌.132)
장공 3년, 진(晉)나라의 대부 난영(欒盈)이 제나라로 도망쳐 오자 장공이 그를 융숭히 대접했다. 안영과 전문자(田文子)가 간언하며 제지했으나 장공은 듣지 않았다. 4년, 제 장공이 난영을 시켜 몰래 진(晉)나라의 곡옥(曲沃)에 들어가 안에서 호응하게 하고, 군대를 딸려 보내 태행산(太行山)을 올라 맹문산(孟門山)으로 들어가게 했다. 난영은 패배했고, 제나라 군대는 귀환하면서 조가(朝歌)를 빼앗았다.
六年, 初, 棠公妻好,133) 棠公死, 崔杼取之. 莊公通之, 數如崔氏, 以崔杼之冠賜人. 待者曰:「不可.」崔杼怒, 因其伐晉, 欲與晉合謀襲斉而不得閒. 莊公嘗笞宦者賈擧, 賈擧复侍, 為崔杼閒公134)以報怨. 五月, 莒子朝斉, 斉以甲戌饗之. 崔杼称病不視事. 乙亥, 公問崔杼病, 遂従崔杼妻. 崔杼妻入室, 與崔杼自閉戸不出, 公擁柱而歌.135) 宦者賈擧遮公従官而入, 閉門, 崔杼之徒持兵従中起. 公登台而請解, 不許;請盟, 不許;請自殺於廟, 不許. 皆曰:「君之臣杼疾病, 不能聴命.136) 近於公宮.137) 陪臣争趣有淫者,138) 不知二命.」139)公踰牆, 射中公股, 公反墜, 遂弑之. 晏嬰立崔杼門外,140) 曰:「君為社稷死則死之, 為社稷亡則亡之.141) 若為己死己亡, 非其私暱, 誰敢任之!」142)門開而入, 枕公尸而哭, 三踊而出. 人謂崔杼:「必殺之.」崔杼曰:「民之望也, 舎之得民.」143)
6년의 일이다. 원래 대부 당공(棠公)의 처(妻)가 미모였는데 당공이 죽자 최저가 그녀를 맞아들였다. 장공은 그녀와 사통해 자주 최저의 집에 갔으며, 최저의 관(冠)을 가져다가 다른 사람에게 주기까지 했다. 그의 시종까지도 “안 됩니다”라고 말했다.
분노한 최저는 장공이 진(晉)나라를 칠 때 진나라와 공모해 장공을 습격하려고 했으나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또 장공은 환관 가거(賈擧)를 채찍질해 벌준 적이 있었는데, 가거는 여전히 장공의 시종을 하게 되어 그 역시 최저를 위해서 장공을 해칠 기회를 엿보며 원한을 갚으려고 했다.
5월, 거자(莒子)가 제후(齊侯)를 만나러 왔는데, 제후가 갑술일(甲戌日)에 연회를 열어 그를 접대했다. 최저가 병을 핑계 삼아 일을 돌보지 않았다. 을해일(乙亥日)에 장공이 최저에게 가서 문병하고는 최저의 처를 찾았다. 최저의 처는 내실로 들어가 최저와 함께 안에서 문을 잠그고 나오지 않았다. 장공은 기둥을 안고 노래를 했다. 환관 가거가 장공을 수행하는 관원들을 대문 밖에 막아두고 들어와 대문을 잠그자 최저의 부하들이 무기를 들고 안에서 나왔다. 장공이 대(臺) 위로 올라가서 화해를 청했으나 그들은 들어주지 않았다. 천지신명에 맹세할 것을 청했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다시 종묘에서 자살하겠다고 청했으나 그것 역시 들어주지 않았다.
모두들 “임금의 신하 최저는 병이 위독해 친히 명령을 들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여기는 임금의 궁전과 가까워서, 최저의 신하인 저희들은 앞다투어 음란한 자를 붙잡을 뿐이고 다른 명령은 모릅니다.”라 했다. 장공이 담을 넘으려고 하자 화살이 허벅지에 꽂혔다. 장공이 거꾸로 떨어져 내리자 곧 시해했다. 안영이 최저의 집 문 밖에서 말했다. “임금이 사직을 위해서 죽으면 신하도 그를 따라 죽고, 임금이 사직을 위해서 도망치면 신하도 그를 따라 도망친다. 만약 임금이 사적인 일로 죽거나 도망친 것이라면 그의 총신(寵臣)이 아닌 바에야 누가 그런 책임을 지겠는가!” 문이 열리자 안영은 안으로 들어가서 장공의 시신에 머리를 얹고 곡(哭)을 한 다음 예법에 따라 세 번 뛰고 나서 밖으로 나왔다. 사람들이 최저에게 “그를 죽여야 한다.”라고 말했지만, 최저는 말했다. “백성들이 우러러보는 사람이니, 그를 놓아주면 민심을 얻을 수가 있다.”
丁丑, 崔杼立荘公異母弟杵臼,144) 是為景公. 景公母, 魯叔孫宣伯女也. 景公立, 以崔杼為右相, 慶封為左相. 二相恐亂起, 乃與国人盟曰:「不與崔慶者死!」晏子仰天曰:「嬰所不(獲)唯忠於君利社稷者是従!」不肯盟. 慶封欲殺晏子, 崔杼曰:「忠臣也, 舎之.」斉太史書曰「崔杼弑荘公」, 崔杼殺之. 其弟复書, 崔杼复殺之. 少弟复書, 崔杼乃舎之.
정축일(丁丑日)에 최저가 장공의 이복동생 저구(杵臼)를 옹립하니, 그가 경공(景公)이다. 경공의 어머니는 노(魯)나라 숙손선백(叔孫宣伯)의 딸이다. 경공은 즉위하자 최저를 우상(右相)으로, 경봉(慶封)을 좌상(左相)으로 삼았다. 두 재상은 변란이 일어날 것을 염려해 도성의 인사들에게 “최씨(崔氏)와 경씨(慶氏)를 돕지 않는 자는 죽는다!”라는 맹세를 하게 했다.
안영은 하늘을 우러러 “안영이 무엇을 쟁취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다만 임금께 충성하고 사직에 이익이 되는 사람만을 따르려고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며, 맹세를 하려고 들지 않았다. 경봉이 안영을 죽이려고 했지만, 최저는 “충신입니다, 풀어줍시다”라 했다. 제나라의 태사(太史)가 “최저가 장공을 시해했다.”라고 기록하자, 최저가 그를 죽였다. 그 동생이 다시 똑같이 쓰자 최저가 또 그를 죽였다. 그 막내 동생이 다시 똑같이 쓰자 최저는 어쩔 수 없이 놓아주고 말았다.
景公元年, 初, 崔杼生子成及彊, 其母死, 取東郭女, 生明. 東郭女使其前夫子無咎與其弟偃145)相崔氏. 成有罪,146) 二相急治之, 立明為太子. 成請老於崔(杼), 崔杼許之, 二相弗聴, 曰:「崔, 宗邑, 不可.」147)成、彊怒, 告慶封.148) 慶封與崔杼有郤, 欲其敗也. 成、彊殺無咎、偃於崔杼家, 家皆奔亡. 崔杼怒, 無人, 使一宦者御, 見慶封. 慶封曰:「請為子誅之.」使崔杼仇盧蒲嫳149)攻崔氏, 殺成、彊, 尽滅崔氏, 崔杼婦自殺. 崔杼毋帰,150) 亦自殺. 慶封為相国, 専権.
경공 원년, 당초에 최저는 아들 최성(崔成)과 최강(崔彊)을 두었다가 그들의 어머니가 죽자 당공의 처였던 동곽녀(東郭女)를 아내로 맞아 다시 아들 최명(崔明)을 낳았다. 동곽녀는 전남편의 아들 당무구(棠無咎)와 그녀의 동생 동곽언(東郭偃)을 시켜 최저의 가신(家臣)이 되게 했다.
최성이 죄를 범하자 두 가신은 당장 그 죄를 묻고, 최명을 사자(嗣子)로 세웠다. 최성이 최읍(崔邑)으로 물러가 여생을 보내기를 청해 최저가 그것을 허락했는데, 두 가신이 그에 따르지 않으며 말했다. “최읍은 최씨의 종묘가 있는 읍이니, 그럴 수 없습니다.” 최성과 최강은 화가 나서 경봉에게 이것을 하소연했다. 경봉은 최저와 사이가 벌어져 있어서 최씨들이 망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최성과 최강이 당무구와 동곽언을 최저의 집에서 살해하자 집안사람들이 모두 도망쳤다. 최저는 화가 났으나 곁에 사람이 없어 한 환관에게 수레를 몰게 하고 직접 경봉을 만나러 갔다. 경봉은 최저에게 “그대를 위해서 그들을 벌주겠습니다.”라고 하고는, 최저를 미워하던 노포별(盧蒲嫳)로 하여금 최씨 집을 치게 해 최성과 최강을 죽이고 최씨 집 사람들을 모두 죽였다. 최저의 부인은 자살했다. 최저도 돌아갈 데가 없어 역시 자살하고 말았다. 경봉은 상국(相國)이 되어 대권을 전횡했다.
三年十月, 慶封出猟. 初, 慶封已殺崔杼, 益驕, 嗜酒好猟, 不聴政令. 慶舎用政,151) 已有内郤. 田文子謂桓子曰:「亂将作.」田、鮑、高、欒氏相與謀慶氏. 慶舎発甲囲慶封宮, 四家徒共撃破之. 慶封還, 不得入, 奔魯. 斉人譲魯, 封奔呉. 呉與之朱方, 聚其族而居之, 富於在斉. 其秋, 斉人徙葬荘公, 僇崔杼尸於市以説衆.
3년 10월, 경봉이 사냥을 나갔다. 그즈음 경봉은 최저를 죽여 없애고 나서 더욱 교만해져서 술과 사냥을 즐기며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아들 경사(慶舍)가 정사를 관장했는데 그들 사이도 이미 틈이 벌어져 있었다. 전문자(田文子)가 아들 전환자(田桓子)에게 “곧 내란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말했다. 전씨(田氏), 포씨(鮑氏), 고씨(高氏), 난씨(欒氏)의 네 호족들이 함께 경씨(慶氏)의 타도를 모의했다.
경사가 갑병(甲兵)을 풀어 경봉의 궁전을 포위하자 네 호족의 부하들이 함께 공격해 깨뜨렸다. 경봉은 사냥에서 돌아오다가 자기 궁전에 들어가지 못하고 노나라로 도망쳤다. 제나라 사람들이 이에 노나라를 견책하자 경봉은 다시 오(吳)나라로 도망쳤다. 오나라가 주방(朱方)의 땅을 그에게 주어, 그는 그의 일족을 모아 그곳에서 살았는데, 제나라에 있을 때보다 더 부유한 생활을 했다. 그해 가을, 제나라 사람들은 장공의 유해를 이장(移葬)하고 최저의 시체를 시내 거리에 진열해 사람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풀어 주었다.
九年, 景公使晏嬰之晉, 與叔向私語曰:「斉政卒帰田氏. 田氏雖無大徳, 以公権私, 有徳於民, 民愛之.」十二年, 景公如晉, 見平公, 欲與伐 燕. 十八年, 公复如晉, 見昭公. 二十六年, 猟魯郊, 因入魯, 與晏嬰倶問魯礼. 三十一年, 魯昭公辟季氏難, 奔斉. 斉欲以千社封之,152) 子家止昭公, 昭公乃請斉伐魯, 取鄆153)以居昭公.
9년, 안영이 경공의 사신으로 진(晉)나라에 갔는데, 숙향(叔向)에게 은밀히 이렇게 말했다.
“제나라의 정권은 결국 전씨(田氏)에게 돌아갈 것이다. 전씨는 비록 천하에 큰 덕을 행하지는 못했지만, 공공의 권력을 사사로이 행사하며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백성들이 그들을 좋아한다.”
12년, 경공이 진(晉)나라에 가서 평공(平公)을 만났는데, 이것은 그들과 함께 연(燕)나라를 정벌하기를 바라서였다. 18년, 경공이 다시 진(晉)나라에 가서 소공(昭公)을 만났다. 26년, 경공은 노나라의 도성(都城) 교외로 사냥을 갔다가 간 김에 도성에까지 방문해 안영과 함께 노나라의 예법을 물었다. 31년, 노 소공(魯昭公)이 계씨(季氏)의 반란을 피해 제나라로 도망쳐 왔다. 제후(齊侯)가 그에게 2만 5천호(戶)의 봉토를 주려고 했는데, 자가(子家)가 소공에게 받지 말도록 제지해 소공은 제나라에게 노나라를 정벌해주기를 청했다. 제나라는 노나라의 운읍(鄆邑)을 빼앗아 소공에게 주어 살게 했다.
三十二年, 彗星見. 景公坐柏寝, 嘆曰:「堂堂! 誰有此乎?」154)群臣皆泣, 晏子笑, 公怒. 晏子曰:「臣笑群臣諛甚.」景公曰:「彗星出東北, 當斉分野, 寡人以為憂.」晏子曰:「君高台深池, 賦斂如弗得, 刑罰恐弗勝, 茀星155)将出, 彗星156)何懼乎?」公曰:「可禳否?」晏子曰:「使神可祝而來,157) 亦可禳而去也. 百姓苦怨以萬數, 而君令一人禳之, 安能勝衆口乎?」是時景公好治宮室, 聚狗馬, 奢侈, 厚賦重刑, 故晏子以此諫之.
32년, 혜성이 나타났다. 경공이 백침대(柏寢臺)에 앉아 탄식했다. “얼마나 훌륭하고 당당한 모습인가! 누가 이 나라를 가지게 될 것인가?”
이에 여러 신하들이 모두 흐느껴 우는데 안영은 웃었다. 경공이 화를 내자 안영이 말했다. “저는 신하들의 너무나도 심한 아첨을 비웃은 것입니다.” 경공이 말했다. “혜성이 동북방에 출현했으니 바로 제나라의 분야(分野)에 해당해, 과인은 이것을 우려하는 것이오.” 안영이 말했다. “임금께서는 누대를 높이 쌓고 못을 깊이 파고서, 세금을 못 걷을까봐, 형벌이 무섭지 않을까봐 걱정하시니, 이제 장차 불성(茀星)이 출현할 것인데 저런 혜성 따위야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기도해 재앙을 없앨 수 있겠소?” “가령 신을 축원으로 불러올 수 있다면, 기도로 물리치는 것 역시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고통과 원망은 수천수만을 헤아리는데, 임금께서 한 사람의 기도로 그것을 소멸시키려고 한들, 수많은 입들의 저주를 어찌 이겨낼 수 있겠습니까?” 이 시절 경공은 궁전의 수축을 즐겼고, 사냥개와 말을 모아 길렀으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고, 조세와 형벌을 무겁게 했기 때문에 안영이 이런 말들로 충간한 것이었다.
四十二年, 呉王闔閭伐楚, 入郢.
42년, 오왕(吳王) 합려(闔廬)가 초(楚)나라를 쳐서 수도인 영(郢)에까지 들어갔다.
四十七年, 魯陽虎攻其君, 不勝, 奔斉, 請斉伐魯. 鮑子諫景公, 乃囚陽虎. 陽虎得亡, 奔晉.
47년, 노나라의 양호(陽虎)가 임금을 공격했다가 이기지 못하자 제나라로 도망쳐 와서 제나라에게 노나라를 쳐 달라고 청했다. 경공이 포자(鮑子)의 간언을 듣고 양호를 구금했는데, 양호가 빈틈을 타 빠져 나와서 진(晉)나라로 도망쳤다.
四十八年, 與魯定公好会夾谷.158) 犂鉏159)曰:「孔丘知礼而怯, 請令莱人為樂,160) 因執魯君, 可得志.」景公害孔丘相魯, 懼其霸, 故従犂鉏之計. 方会, 進莱樂, 孔子歴階上, 使有司執莱人斬之, 以礼譲景公. 景公慚, 乃帰魯侵地以謝, 而罷去. 是歳, 晏嬰卒.
48년, 노나라의 정공(定公)과 협곡(夾谷)에서 우호를 위한 회담을 했다. 이서(犁鉏)가 말했다. “공구(孔丘)는 예의는 알지만 겁쟁이입니다. 내인(萊人)에게 음악을 연주하게 하고 기회를 보아 노나라의 임금을 붙잡는다면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경공은 공자(孔子)가 노나라의 재상이 될까 우려되고 노나라가 패자(覇者)가 될까 두려워서 이서의 계책을 따랐다. 회담이 한창 진행 중일 때 내(萊)나라 사람이 들어와 가무를 시작했다. 공자는 한 걸음씩 계단을 올라가 관리를 시켜 내(萊)나라 사람을 붙잡아 베어 죽인 다음, 예의에 근거해 경공을 질책했다. 경공은 부끄러워하며 빼앗은 노나라의 땅을 돌려주어 사과한 다음 회담을 마치고 돌아갔다. 이해에 안영이 죽었다.
五十五年, 范、中行反其君於晉, 晉攻之急, 來請粟. 田乞欲為亂, 樹党於逆臣, 説景公曰:「范、中行數有徳於斉, 不可不救.」及使乞救而輸之粟.
55년, 진(晉)나라의 범씨(范氏)와 중항씨(中行氏)가 임금 정공(定公)에 반역했다가 진나라가 그들을 급박하게 공격하자 제나라에 와서 식량지원을 요청했다. 제나라의 전기(田乞)가 모반을 마음먹고 이들 역신(逆臣)과 사당(私黨)을 맺은 다음 경공을 설득했다. “범씨와 중항씨는 제나라에 여러 차례 은덕을 베풀었으니 구해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리하여 경공은 전기를 시켜 그들을 도와주고 식량을 보내주게 했다.
五十八年夏, 景公夫人燕姫適子死. 景公寵妾芮姫生子荼,161) 荼少, 其母賎, 無行, 諸大夫恐其為嗣, 乃言願択諸子長賢者為太子. 景公老, 悪言嗣事, 又愛荼母, 欲立之, 憚発之口, 乃謂諸大夫曰:「為樂耳, 国何患無君乎?」秋, 景公病, 命国恵子、高昭子162)立少子荼為太子, 逐群公子, 遷之莱.163) 景公卒,164)太子荼立, 是為晏孺子. 冬, 未葬, 而群公子畏誅, 皆出亡. 荼諸異母兄公子寿、165)駒、黔166)奔衛,167) 公子駔、168)陽生奔魯.169) 莱人歌之曰:「景公死乎弗與埋, 三軍事乎弗與謀,170) 師乎師乎, 胡党之乎?」171)
58년 여름, 경공의 부인 연희(燕姬) 소생의 적자(嫡子)가 죽었다. 경공의 애첩 예희(芮姬) 소생의 아들 도(荼)가 있었는데, 도는 나이가 어렸으며 그 어머니는 신분이 비천하고 품행도 좋지 않았다. 여러 대부들은 도가 후사(後嗣)가 될까 걱정되어, 여러 아들 가운데서 나이가 많고 현명한 이를 가려 태자로 세우기를 원한다고 건의했다.
경공은 연로해 후계자에 관한 이야기가 싫었고, 또 도의 어머니 예희를 사랑해 도를 태자로 세우고 싶었지만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대부들에게 말했다. “우선 즐기기나 합시다. 나라에 어찌 임금이 없을까 걱정이겠소?”
가을, 경공이 병이 났는데, 국혜자(國惠子)와 고소자(高昭子)에게 명령해 막내아들 도를 태자로 세우게 하고 여러 공자들을 내(萊) 땅으로 쫓아 보냈다. 경공이 죽고 태자 도가 즉위했는데, 그가 안유자(晏孺子)이다. 겨울, 경공을 아직 안장하지 않았는데 여러 공자들이 주살(誅殺) 당할까 두려워서 모두 다른 나라로 도망쳤다. 도의 여러 이복형들 가운데에서 공자 수(壽), 공자 구(駒), 공자 검(黔) 등은 위(衛)나라로, 공자 서(駔)와 공자 양생(陽生)은 노(魯)나라로 도망쳤다. 내(萊)나라 사람들이 이것을 노래로 불렀다.
경공의 시신도 함께 묻지 아니하고
삼군(三軍)의 큰일도 함께 도모하지 아니하고
공자들아, 부하들아,
어느 곳으로 갔느냐?
晏孺子元年春, 田乞偽事高、国者, 毎朝, 乞驂乗, 言曰:「子得君, 大夫皆自危, 欲謀作亂.」又謂諸大夫曰:「高昭子可畏, 及未発, 先之.」大夫従之. 六月, 田乞、鮑牧乃與大夫以兵入公宮, 攻高昭子. 昭子聞之, 與国恵子救公. 公師敗, 田乞之徒追之, 国恵子奔莒, 遂反殺高昭子. 晏圉奔魯.172) 八月, 斉秉意茲.173) 田乞敗二相, 乃使人之魯召公子陽生. 陽生至斉, 私匿田乞家. 十月戊子, 田乞請諸大夫曰:「常之母有魚菽之祭,174) 幸來会飲.」会飲, 田乞盛陽生橐中, 置坐中央, 発橐出陽生, 曰:「此乃斉君矣!」大夫皆伏謁. 将與大夫盟而立之, 鮑牧酔, 乞誣大夫曰:「吾與鮑牧謀共立陽生.」鮑牧怒曰:「子忘景公之命乎?」諸大夫相視欲悔, 陽生前, 頓首曰:「可則立之, 否則已.」鮑牧恐禍起, 乃复曰:「皆景公子也, 何為不可!」乃與盟, 立陽生, 是為悼公. 悼公入宮, 使人遷晏孺子於駘,175) 殺之幕下, 而逐孺子母芮子. 芮子故賎而孺子少, 故無権, 国人軽之.
안유자 원년 봄, 전기가 고씨(高氏)와 국씨(國氏)를 거짓으로 섬기면서 조회에 갈 때마다 참승(驂乘)이 되어 곁에 붙어다니면서 말했다. “어르신께서 임금의 신임을 얻으시니 대부들이 모두 스스로의 자리를 불안하게 여겨 반란을 기도하려고 합니다.” 그러고는 다시 대부들에게 말했다. “고소자는 무서운 사람이니 그가 일어나기 전에 먼저 손을 씁시다.”대부들은 그의 말에 동조했다. 원년 6월, 전기와 포목(鮑牧)은 대부들과 함께 병사들을 이끌고 궁정으로 들어가서 고소자를 쳤다. 고소자는 소식을 듣고 국혜자와 함께 안유자를 구원하러 갔다. 안유자의 군대가 패배해 전기의 무리가 그를 추격하자 국혜자는 거(莒)나라로 도망쳤다. 전기의 무리는 곧 되돌아와서 고소자를 살해했다.
안영의 아들 안어(晏圉)가 노나라로 도망쳤다. 8월, 병의자(秉意玆)가 노나라로 도망쳤다. 전기는 국씨와 고씨 두 재상을 쳐부순 다음 사람을 노나라에 보내 공자 양생을 불러왔다. 양생은 제나라로 와서 전기의 집에 몰래 숨어 있었다.
10월 무자일(戊子日), 전기가 대부들을 초청하면서 말했다. “제 아들 상(常)의 어미가 제사의 남은 음식을 소략하나마 준비했으니 부디 오시어 함께 한잔하시기 바랍니다.”
이리하여 주연을 하게 되었는데, 전기는 양생에게 자루를 씌워 좌석의 중앙에 앉혀두었다가 자루를 벗겨 양생을 드러내 보이며 말했다. “이분이 바로 제나라의 임금이십니다!” 그러자 대부들이 모두 엎드려 배알했다. 전기가 여러 대부들과 맹약하고 양생을 옹립하려고 준비하는데, 대부 포목이 술에 취하자 전기가 다른 대부들에게 거짓말을 했다. “저는 포목과 상의해 함께 양생을 옹립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자 포목이 화내며 말했다. “그대는 경공의 명령을 잊었는가?” 여러 대부들이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후회의 기색을 보이는 듯하자 양생이 앞으로 나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될 만하면 세워주시고, 아니라면 그것으로 그만입니다.” 포목은 자신에게 화가 미칠까 두려워져 다시 말했다. “모두가 경공의 공자들인데 안 될 게 무엇이겠습니까?” 이리하여 함께 맹약해 양생을 옹립하니, 그가 도공(悼公)이다.
도공은 궁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을 시켜 안유자를 태(駘)로 옮겨가도록 한 다음 도중에 야영하는 장막 안에서 죽였다. 그리고 안유자의 어머니 예희(芮姬)도 추방했다. 예희는 원래 신분이 비천했고, 안유자는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권력을 장악하지 못했기에 제나라 사람들이 그들을 경시했던 것이다.
悼公元年, 斉伐魯, 取讙、闡.176) 初, 陽生亡在魯, 季康子以其妹妻之. 及帰即位, 使迎之. 季姫與季魴侯通,177) 言其情, 魯弗敢與, 故斉伐魯, 竟迎季姫. 季姫嬖, 斉复帰魯侵地.
도공 원년, 제나라가 노나라를 쳐서 환읍(讙邑)과 천읍(闡邑)을 빼앗았다. 옛날, 도공이 공자 양생으로서 노나라에 망명해 있을 때 계강자(季康子)가 여동생 계희(季姬)를 그에게 시집보냈었다. 그가 귀국해 즉위하자 사람을 보내 그녀를 맞아오게 했다. 계희가 숙부 계방후(季魴侯)와 사통하고 있은 터라 그 사정을 고백하니 노나라는 감히 그녀를 제나라에 보내지 못했고, 이 때문에 제나라는 노나라를 공격해 끝내 계희를 데려간 것이었다. 계희가 총애를 받게 되자 제나라는 빼앗은 노나라의 땅을 돌려주었다.
鮑子與悼公有郤, 不善. 四年, 呉、魯伐斉南方. 鮑子弑悼公, 赴于呉. 呉王夫差哭於軍門外三日, 将従海入討斉. 斉人敗之, 呉師乃去. 晉趙鞅伐斉, 至頼而去.178) 斉人共立悼公子壬, 是為簡公.179)
포목은 도공과 틈이 벌어져 관계가 좋지 못했다. 4년, 오나라와 노나라가 제나라의 남방을 공격했다. 포목이 도공을 시해하고 오나라에 부고(訃告)를 했다. 오왕(吳王) 부차(夫差)는 사흘 동안 군문(軍門) 밖에서 곡(哭)을 하면서 제나라를 향해 바다로 쳐들어가려고 했다. 제나라 사람들이 그들을 쳐부수자 오나라의 군대가 돌아갔다. 진(晉)나라의 조앙(趙鞅)이 제나라를 쳐서 뇌읍(賴邑)에까지 들어온 다음 물러갔다. 제나라 사람들이 도공의 아들 임(壬)을 옹립하니, 그가 간공(簡公)이다.
簡公四年春, 初, 簡公與父陽生倶在魯也, 監止有寵焉.180) 及即位, 使為政. 田成子憚之, 驟顧於朝.181) 御鞅182)言簡公曰:「田、監不可並也, 君其択焉.」183)弗聴. 子我夕,184) 田逆殺人, 逢之,185) 遂捕以入.186) 田氏方睦,187) 使囚病而遺守囚者酒,188) 酔而殺守者, 得亡. 子我盟諸田於陳宗.189) 初, 田豹欲為子我臣,190) 使公孫言豹,191) 豹有喪而止. 後卒以為臣,192) 幸於子我. 子我謂曰:「吾尽逐田氏而立女, 可乎?」対曰:「我遠田氏矣.193) 且其違者不過數人,194) 何尽逐焉!」遂告田氏. 子行曰:「彼得君, 弗先, 必禍子.」195)子行舎於公宮.196)
간공 4년 봄, 간공이 그 아버지 양생과 함께 노나라에 있을 때 자아(子我)를 총애했기에 그가 즉위하자 자아에게 국정을 맡겼다. 전상(田常)이 자아를 두려워해 조회 때에는 몇 번씩 사방을 둘러보곤 했다.
어자(御者)인 전앙(田鞅)이 간공에게 “전상과 자아 두 사람을 함께 임용하실 수는 없을 것이니, 임금께서는 선택을 하시지요.”라고 말했으나 간공은 듣지 않았다. 자아가 저녁에 입조하던 중 전역(田逆)이 살인을 저지르는 것과 마주치게 되어 그를 붙잡아 궁 안으로 들어갔다. 서로 화목하던 전씨들은 전역으로 하여금 병을 가장하게 하고 또 간수에게 술을 선물해 취하게 한 다음 간수를 죽였다. 이리하여 전역이 도망치고 나자 자아는 진씨(陳氏)의 본가에서 여러 전씨들과 맹약을 맺었다.
예전에, 전표(田豹)가 자아의 가신이 되려고 대부 공손(公孫)더러 자신을 추천해달라고 하던 중, 전표가 상복(喪服)을 입게 되어 중지되었던 일이 있었다. 전표는 나중에 결국 자아의 가신이 되어 총애를 받고 있었다. 자아가 전표에게 말했다. “내가 권세를 잡은 전씨들을 모두 몰아내버리고 그대를 가장(家長)으로 세운다면 괜찮겠는가?” 전표는 “저는 전씨의 먼 방계입니다. 게다가 주인님께 거스르는 자들도 불과 몇 사람에 불과한데, 어찌 꼭 모두 쫓아내야만 하겠습니까!”라고 대답하고, 이 사실을 전씨들에게 알렸다.
전역이 전상에게 말했다. “그는 임금의 총애를 받고 있으니, 우리가 먼저 손을 쓰지 않으면 반드시 그대에게 화를 입힐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전역은 공궁(公宮) 안에 들어가 살았다.
夏五月壬申, 成子兄弟四乗如公.197) 子我在幄,198) 出迎之, 遂入, 閉門.199) 宦者禦之,200) 子行殺宦者.201) 公與婦人飲酒於檀台,202) 成子遷諸寝.203) 公執戈将撃之,204) 太史子余205)曰:「非不利也, 将除害也.」206)成子出舎于庫,207) 聞公猶怒, 将出,208) 曰:「何所無君!」子行抜剣曰:「需, 事之賊也.209) 誰非田宗?210) 所不殺子者有如田宗.」211)乃止. 子我帰, 属徒212)攻闈與大門,213) 皆弗勝, 乃出. 田氏追之. 豊丘人執子我以告,214) 殺之郭関.215) 成子将殺大陸子方,216) 田逆請而免之. 以公命取車於道,217) 出雍門.218) 田豹與之車, 弗受, 曰:「逆為余請, 豹與余車, 余有私焉. 事子我而有私於其讎, 何以見魯、衛之士?」219)
여름 5월 임신일(壬申日), 전상의 형제들이 수레 네 대를 타고 간공의 처소로 갔다. 자아가 정청(政廳)의 장막 안에 있다가 나와서 맞이했는데, 그들은 곧장 몰려 들어간 다음 문을 잠가버렸다. 환관들이 막아서자 자행(子行)이 환관들을 죽였다. 간공은 여자들과 단대(檀臺)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전상이 들어와 그에게 자리를 침전(寢殿)으로 옮기자고 했다. 간공이 창을 집어들고 그를 찌르려고 하는데, 전씨와 한패인 태사(太史) 자여(子餘)가 말했다. “임금께 해를 끼치려는 것이 아니고, 해악을 제거하려는 것입니다.” 전상이 정궁(正宮)에서 나와 무기고에 머물다가 간공이 여전히 분노하여 있다는 소식을 듣고 도망칠 준비를 하면서 말했다. “어딘들 임금이 없을까!” 전역이 칼을 빼들고 말했다. “머뭇거리는 것은 일을 망치는 적(賊)입니다. 전씨의 종족 아닌 이가 누가 있습니까? 그대를 죽여 버리지 않으면 내가 전씨가 아닙니다.” 이에 전상은 도망칠 생각을 그만두고 말았다.
한편 자아는 돌아가서 무리들을 모은 다음 궁중의 큰 문과 작은 문을 공격했지만, 한 곳에서도 이기지 못하자 도망쳐 달아났다. 전씨들이 그를 추격했는데, 풍구(豐丘) 사람들이 자아를 붙잡아 놓고 그들에게 알려와, 자아를 곽관(郭關)에서 살해했다. 전상이 대륙자방(大陸子方)을 죽이려다가 전역의 요청으로 풀어주었다. 대륙자방은 간공의 명령을 명목으로 삼아 길에서 마차 하나를 취해 타고 옹문(雍門)을 나갔다. 전표가 그에게 마차를 주려 했으나 그는 받지 않고 말했다. “전역이 나를 방면하게 청해주었는데, 다시 전표가 내게 마차를 준다면, 나는 전씨들에게 개인적인 은의를 입는 것이다. 자아를 섬겼으면서 다시 그 원수에게 은의를 입는다면 무슨 낯으로 노나라와 위나라의 인사들을 만나겠는가?”
庚辰, 田常執簡公于■州.220) 公曰:「余蚤従御鞅言, 不及此.」甲午, 田常弑簡公于■州. 田常乃立簡公弟驁,221) 是為平公. 平公即位, 田常相之, 専斉之政, 割斉安平以東為田氏封邑.222)
경진일(庚辰日), 전상이 간공을 서주(徐州)에서 붙잡으니, 간공이 말했다. “과인이 진작 전앙의 말을 따랐더라면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터이다.”
갑오일(甲午日)에 전상이 서주에서 간공을 죽인 후 간공의 동생 오(驁)를 옹립하니, 그가 평공(平公)이다. 평공이 즉위하자 전상은 그 재상이 되어 제나라의 정치를 전횡했고, 안평(安平) 이동(以東)의 제나라 땅을 전씨의 봉읍으로 갈라 가졌다.
平公八年, 越滅呉. 二十五年卒, 子宣公積立.
평공 8년에 월(越)나라가 오(吳)나라를 멸망시켰다. 평공이 재위 25년 만에 죽고, 아들 선공(宣公) 적(積)이 즉위했다.
宣公五十一年卒, 子康公貸立. 田会反廩丘.223)
51년에 선공이 죽고, 아들 강공(康公) 대(貸)가 즉위했다. 전회(田會)가 늠구(廩丘)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康公二年, 韓、魏、趙始列為諸侯. 十九年, 田常曾孫田和始為諸侯, 遷康公海浜.
강공 2년, 한(韓), 위(魏), 조(趙) 세 나라가 처음으로 제후의 열에 끼었다. 19년, 전상의 증손자 전화(田和)가 처음으로 제후가 되어 강공을 해변으로 옮겨 보냈다.
二十六年, 康公卒, 呂氏遂絶其祀. 田氏卒有斉国, 為斉威王, 彊於天下.
26년, 강공이 죽자 여씨(呂氏)의 제사가 끊어졌고, 마침내 전씨가 제나라를 가지게 되었으며, 제 위왕(齊威公)에 이르러서는 천하의 강자가 되었다.
太史公曰:吾適斉, 自泰山属之琅邪, 北被于海, 膏壌二千里, 其民闊達多匿知, 其天性也. 以太公之聖, 建国本, 桓公之盛, 修善政, 以為諸侯会盟, 称伯, 不亦宜乎? 洋洋哉, 固大国之風也!
태사공은 말한다.
“나는 제나라에 가보았는데, 서쪽의 태산(泰山)에서부터 동쪽의 낭야산(琅邪山)에까지 이어지고, 북쪽으로는 바다에 이르도록 비옥한 땅이 2천리이다. 그 백성들은 생각이 활달하고 감추어둔 지혜가 많은데, 이는 그들의 천성이다. 태공(太公)의 성덕(聖德)으로 나라의 기초를 세우고, 환공(桓公)의 강성함으로 선정(善政)을 닦아서, 제후들을 회맹하게 하고 패자(覇者)를 칭했으니, 역시 당연한 일이 아닌가? 양양하게 넓고 큰 모양이 분명 큰 나라의 풍도(風度)이다.”
각주
1 集解呂氏春秋曰:「東夷之土.」 索隠譙周曰:「姓姜, 名牙. 炎帝之裔, 伯夷之後, 掌四岳有功, 封之於呂, 子孫従其封姓, 尚其後也.」按:後文王得之渭浜, 云「吾先君太公望子久矣」, 故号太公望. 蓋牙是字, 尚是其名, 後武王号為師尚父也.
2 集解徐広曰:「呂在南陽宛県西.」
3 索隠地理志申在南陽宛県, 申伯国也. 呂亦在宛県之西也.
4 索隠譙周曰:「呂望嘗屠牛於朝歌, 売飲於孟津.」
5 正義奸音干. 括地志云:「茲泉水源出岐州岐山県西南凡谷. 呂氏春秋云『太公釣於茲泉, 遇文王』. 酈元云『磻谿中有泉, 謂之茲泉. 泉水潭積, 自成淵渚, 即太公釣処, 今人謂之凡谷. 石壁深高, 幽篁邃密, 林沢秀阻, 人跡罕及. 東南隅有石室, 蓋太公所居也. 水次有磻石可釣処, 即太公垂釣之所. 其投竿跪餌, 両膝遺跡猶存, 是有磻谿之称也. 其水清泠神異, 北流十二里注于渭』. 説苑云『呂望年七十釣于渭渚, 三日三夜魚無食者, 望即忿, 脱其衣冠. 上有農人者, 古之異人, 謂望曰:「子姑复釣, 必細其綸, 芳其餌, 徐徐而投, 無令魚駭.」望如其言, 初下得鮒, 次得鯉. 刺魚腹得書, 書文曰「呂望封於斉」. 望知其異』.」
6 集解徐広曰:「敕知反.」 索隠徐広音敕知反, 余本亦作「螭」字.
7 正義六韜云:「武王問太公曰:『律之音声, 可以知三軍之消息乎?』太公曰:『深哉王之問也! 夫律管十二, 其要有五:宮、商、角、徴、羽, 此其正声也, 萬代不易. 五行之神, 道之常也, 可以知敵. 金、木、水、火、土, 各以其勝攻之. 其法, 以天清静無陰雲風雨, 夜半遣軽騎往, 至敵人之壘九百歩, 偏持律管横耳大呼驚之, 有声應管, 其來甚微. 角管声應, 當以白虎;徴管声應, 當以玄武;商管声應, 當以句陳;五管尽不應, 無有商声, 當以青竜:此五行之府, 佐勝之徴, (陰)[成]敗之機也.』」
8 索隠按:郡国志在東郡廩丘県北, 今曰顧城. 密須, 姞姓, 在河南密県東, 故密城是也. 與安定姫姓密国別也.
9 集解劉向別錄曰:「師之, 尚之, 父之, 故曰師尚父. 父亦男子之美号也.」
10 索隠亦有本作「蒼雉」. 按:馬融曰「蒼兕, 主舟楫官名」. 又王充曰「蒼兕者, 水獣, 九頭」. 今誓衆, 令急済, 故言蒼兕以懼之. 然此文上下並今文泰誓也.
11 集解徐広曰:「一作『三年』.」
12 索隠周本紀毛叔鄭奉明水也.
13 索隠周本紀衛康叔封布茲. 茲是席, 故此亦云采席也.
14 正義括地志云:「営丘在青州臨淄北百歩外城中.」
15 索隠犂音里奚反. 犂猶比也. 一云犂猶遅也.
16 正義孔安国云:「淮浦之夷, 徐州之戎.」
17 集解服虔曰召公奭.
18 集解服虔曰:「是皆太公始受封土地疆境所至也.」 索隠旧説穆陵在会稽, 非也. 按:今淮南有故穆陵門, 是楚之境. 無棣在遼西孤竹. 服虔以為太公受封境界所至, 不然也, 蓋言其征伐所至之域也.
19 集解杜預曰:「五等諸侯, 九州之伯, 皆得征討其罪也.」
20 集解礼記曰:「太公封於営丘, 比及五世, 皆反葬於周.」鄭玄曰:「太公受封, 留為太師, 死葬於周. 五世之後乃葬斉.」皇覧曰:「呂尚冢在臨菑県城南, 去県十里.」.
21 集解徐広曰:「一作『及』.」 正義謚法述義不克曰丁.
22 索隠系本作「庮公慈母」. 譙周亦曰「祭公慈母」也.
23 索隠系本作「不臣」. 譙周亦作「不辰」. 宋忠曰:「哀公荒淫田游, 国史作還詩以刺之也.」
24 集解徐広曰周夷王.
25 正義謚法弥年寿考曰胡.
26 正義括地志云:「薄姑城在青州博昌県東北六十里.」
27 索隠宋忠曰:「其党周馬繻人将胡公於貝水殺之, 而山自立也.」
28 正義直厲反. 括地志云:「晉州霍邑県也.」鄭玄云:「霍山在彘, 本秦時霍伯国.」
29 索隠系本及譙周皆作「説」.
30 集解公羊傳曰:「搚幹而殺之.」何休曰:「搚, 折声也.」 正義拉音力合反.
31 索隠譲猶責也.
32 集解徐広曰:「年表云去其都邑.」 索隠按:春秋荘四年「紀侯大去其国」, 左傳云「違斉難」是也.
33 集解賈逵曰:「連称、管至父皆斉大夫.」杜預曰:「臨淄県西有地名葵丘.」 索隠杜預曰「臨淄西有地名葵丘」. 又桓三十五年会諸侯於葵丘, 當魯僖公九年, 杜預曰「陳留外黄県東有葵丘」. 不同者, 蓋葵丘有両処, 杜意以戍葵丘當不遠出斉境, 故引臨淄県西之葵丘. 若三十五年会諸侯於葵丘, 杜氏又以不合在本国, 故引外黄東葵丘為注, 所以不同爾.
34 集解服虔曰:「瓜時, 七月. 及瓜謂後年瓜時.」
35 集解服虔曰:「為妾在宮也.」
36 集解王粛曰:「候公之閒隙.」
37 集解賈逵曰:「斉地也.」 正義音扶云反.
38 集解杜預曰:「樂安博昌県南有地名貝丘.」 索隠左傳作「貝丘」也. 正義左傳云「斉襄公田于貝丘, 墜車傷足」, 即此也.
39 集解服虔曰:「公見彘, 従者乃見彭生, 鬼改形為豕也.」
40 正義非仏反, 下同. 茀, 主履者也.
41 正義音瘡.
42 集解賈逵曰:「渠丘大夫也.」 索隠亦有本作「雍廩」. 賈逵曰「渠丘大夫」. 左傳云「雍廩殺無知」, 杜預曰「雍廩, 斉大夫」. 此云「游雍林, 雍林人嘗有怨無知, 遂襲殺之」, 蓋以雍林為邑名, 其地有人殺無知. 賈言「渠丘大夫」者, 渠丘邑名, 雍林為渠丘大夫也.
43 集解賈逵曰:「斉正卿高敬仲也.」 正義傒音奚.
44 集解杜預曰:「乾時, 斉地也. 時水在樂安界, 岐流, 旱則涸竭, 故曰乾時.」
45 集解賈逵曰:「魯地句涜也.」 索隠賈逵云「魯地句涜」. 又按:鄒誕生本作「莘涜」, 莘笙声相近. 笙如字, 涜音豆. 論語作「溝涜」, 蓋後代声転而字異, 故諸文不同也.
46 集解賈逵曰:「堂阜, 魯北境.」杜預曰:「堂阜, 斉地. 東莞蒙陰県西北有夷吾亭, 或曰鮑叔解夷吾縛於此, 因以為名也.」
47 集解徐広曰:「或作『崩』也.」
48 集解国語曰:「管子制国五家為軌, 十軌為里, 四里為連, 十連為郷, 以為軍令.」
49 索隠按:管子有理人軽重之法七篇. 軽重謂銭也. 又有捕魚、煮塩法也.
50 集解徐広曰:「一作『譚』.」 索隠拠春秋, 魯荘十年「斉師滅譚」是也. 杜預曰「譚国在済南平陵県西南」. 然此郯乃東海郯県, 蓋亦不當作「譚」字也.
51 集解杜預曰:「遂在済北蛇丘県東北.」
52 集解杜預曰:「此柯今済北東阿, 斉之阿邑, 猶祝柯今為祝阿.」
53 集解何休曰:「土基三尺, 階三等, 曰壇. 会必有壇者, 為升降揖譲, 称先君以相接也.」
54 集解徐広曰:「一云已許之而背信殺劫也.」
55 集解杜預曰:「甄, 衛地, 今東郡甄城也.」
56 正義音桓.
57 集解賈逵曰:「掌百工.」
58 集解服虔曰:「山戎, 北狄, 蓋今鮮卑也.」何休曰:「山戎者, 戎中之別名也.」
59 集解徐広曰:「史記『僖』字皆作『釐』.」
60 集解賈逵曰:「衛地也.」 索隠杜預曰:「不言城衛, 衛未遷.」楚丘在済陰城武県南, 即今之衛南県.
61 集解賈逵曰:「蕩, 揺也.」
62 集解服虔曰:「民逃其上曰潰也.」
63 集解左傳曰:「周公、太公股肱周室, 夾輔成王也.」
64 集解杜預曰:「所践履之界.」
65 集解賈逵曰:「包茅, 菁茅包匭之也, 以供祭祀.」杜預曰:「尚書『包匭菁茅』, 茅之為異未審.」
66 集解服虔曰:「周昭王南巡狩, 渉漢未済, 船解而溺昭王, 王室諱之, 不以赴, 諸侯不知其故, 故桓公以為辞責問楚也.」 索隠宋衷云:「昭王南伐楚, 辛由靡為右, 渉漢中流而隕, 由靡逐王, 遂卒不复, 周乃侯其後于西翟.」
67 集解杜預曰:「昭王時漢非楚境, 故不受罪.」
68 集解杜預曰:「陘, 楚地, 潁川召陵県南有陘亭.」左傳曰:「凡師一宿為舎, 再宿為信, 過信為次.」
69 集解杜預曰:「召陵, 潁川県.」
70 集解服虔曰:「方城山在漢南.」韋昭曰:「方城, 楚北之阨塞.」杜預曰「方城山在南陽葉県南」是也. 索隠按:地理志葉県南有長城, 号曰方城, 則杜預、韋昭説為得, 而服氏云在漢南, 未知有何憑拠.
71 集解左傳曰:「討不忠也.」
72 集解杜預曰:「陳留外黄県東有葵丘也.」
73 集解賈逵曰:「大路, 諸侯朝服之車, 謂之金路.」
74 集解韋昭曰:「下堂拝賜也.」
75 集解公羊傳曰:「葵丘之会, 桓公震而矜之, 叛者九国.」
76 集解徐広曰:「史記『卓』多作『悼』.」 正義卓, 丑角反.
77 集解服虔曰:「晉地也.」杜預曰:「在平陽県西南.」
78 正義與音預, 下同.
79 集解地理志曰令支県有孤竹城, 疑離枝即令支也, 令離声相近. 應劭曰:「令音鈴.」鈴離声亦相近. 管子亦作「離」字. 索隠離枝音零支, 又音令祗, 又如字. 離枝, 孤竹, 皆古国名. 秦以離枝為県, 故地理志遼西令支県有孤竹城. 爾雅曰「孤竹、北戸、西王母、日下謂之四荒」也.
80 正義大夏, 并州晉陽是也.
81 正義卑音壁. 劉伯荘及韋昭並如字.
82 正義左傳云魯荘十三年, 会北杏以平宋亂;僖四年, 侵蔡, 遂伐楚;六年, 伐鄭, 囲新城也.
83 正義左傳云魯荘十四年, 会于鄄;十五年, 又会鄄;十六年, 同盟于幽;僖五年, 会首止;八年, 盟于洮;九年, 会葵丘是也.
84 正義匡, 正也. 一匡天下, 謂定襄王為太子之位也.
85 正義括地志云:「管仲冢在青州臨淄県南二十一里牛山上, 與桓公冢連. 隰朋墓在青州臨淄県東北七里也.」
86 正義即雍巫也. 賈逵云:「雍巫, 雍人名巫, 易牙也.」
87 集解管仲曰:「衛公子開方去其千乗之太子而臣事君也.」
88 正義刀, 鳥条反. 顔師古云:「豎刀、易牙皆斉桓公臣. 管仲有病, 桓公往問之, 曰:『将何以教寡人?』管仲曰:『願君遠易牙、豎刀.』公曰:『易牙烹其子以快寡人, 尚可疑邪?』対曰:『人之情非不愛其子也, 其子之忍, 又将何愛於君!』公曰:『豎刀自宮以近寡人, 猶尚疑邪?』対曰:『人之情非不愛其身也, 其身之忍, 又将何有於君!』公曰:『諾.』管仲遂尽逐之, 而公食不甘心不怡者三年. 公曰:『仲父不已過乎?』於是皆即召反. 明年, 公有病, 易牙、豎刀相與作亂, 塞宮門, 築高牆, 不通人. 有一婦人踰垣入至公所. 公曰:『我欲食.』婦人曰:『吾無所得.』公曰:『我欲飲.』婦人曰:『吾無所得.』公曰:『何故?』曰:『易牙、豎刀相與作亂;塞宮門, 築高牆, 不通人, 故無所得.』公慨然歎, 涕出, 曰:『嗟乎, 聖人所見豈不遠哉! 若死者有知, 我将何面目見仲父乎?』蒙衣袂而死乎寿宮. 虫流於戸, 蓋以楊門之扇, 二月不葬也.」
89 索隠按:系本徐, 嬴姓. 礼, 婦人称国及姓, 今此言「徐姫」者, 然姫是衆妾之総称, 故漢祿秩令云「姫妾數百」. 婦人亦総称姫, 姫亦未必尽是姓也.
90 集解服虔曰:「内, 婦官也.」
91 索隠左傳作「無虧」也.
92 集解賈逵曰:「宋華氏之女, 子姓.」
93 集解賈逵曰:「雍巫, 雍人, 名巫, 易牙字.」 索隠賈逵以雍巫為易牙, 未知何拠. 按:管子有棠巫, 恐與雍巫是一人也.
94 集解杜預曰:「易牙既有寵於公, 為長衛姫請立.」
95 集解服虔曰:「内寵如夫人者六人. 群吏, 諸大夫也.」杜預曰:「内寵, 内官之有権寵者.」
96 正義音古患反.
97 集解徐広曰:「斂, 一作『臨』也.」
98 集解皇覧曰:「桓公冢在臨菑城南七里所菑水南.」 正義括地志云:「斉桓公墓在臨菑県南二十一里牛山上, 亦名鼎足山, 一名牛首堈, 一所二墳. 晉永嘉末, 人発之, 初得版, 次得水銀池, 有気不得入, 経數日, 乃牽犬入中, 得金蚕數十薄, 珠襦、玉匣、繒綵、軍器不可勝數. 又以人殉葬, 骸骨狼藉也.」
99 集解服虔曰:「魯僖公十九年, 諸侯盟于斉, 以無忘桓公之徳. 宋襄公欲行霸道, 不與盟, 故伐之.」
100 正義賈逵云:「衛地也.」
101 正義音霸.
102 索隠左傳「丙」作「邴」, 邴歜也.
103 正義左傳云「乃掘而別之」, 杜預云「断其尸足也」.
104 集解賈逵曰:「僕, 御也.」
105 索隠左傳作「閻職」, 此言「庸職」. 不同者, 傳所云「閻」, 姓;「職」, 名也. 此言「庸職」, 庸非姓, 蓋謂受顧織之妻, 史意不同, 字則異耳. 正義国語及左傳作「閻職」.
106 集解杜預曰:「斉南城西門名申門. 斉城無池, 唯此門左右有池, 疑此是也.」左思斉都賦注曰:「申池, 海浜斉薮也.」
107 集解谷梁傳曰:「身横九畝, 断其首而載之, 眉見於軾.」
108 集解賈逵曰:「王子城父, 斉大夫.」
109 正義頃音傾.
110 索隠成二年左傳魯臧宜叔、衛孫桓子如晉, 皆主於郤克是.
111 集解賈逵曰:「八百乗, 六萬人.」
112 集解徐広曰:「靡, 一作『摩』.」賈逵曰:「靡笄, 山名也.」 索隠靡, 如字. 靡笄, 山名, 在済南, 與代地磨笄山不同.
113 集解服虔曰:「鞍, 斉地名也.」
114 集解賈逵曰:「斉大夫.」
115 正義絓, 胡卦反. 止也. 有所碍也.
116 正義左傳云「及華泉, 驂絓於木而止. 丑父使公下, 如華泉取飲. 鄭周父御佐車, 苑茷為右, 載斉侯獲免」也.
117 集解徐広曰:「一作『陘』.」駰案:賈逵曰「馬陘, 斉地也」.
118 集解左傳曰:「賂以紀甗、玉磬也.」
119 集解杜預曰:「桐叔, 蕭君之字, 斉侯外祖父. 子, 女也. 難斥言其母, 故遠言之.」賈逵曰:「蕭, 附庸, 子姓.」
120 集解服虔曰:「欲令斉隴畝東行.」 索隠壟畝東行, 則晉車馬東向斉行易也.
121 正義左傳云晉師及斉国, 使斉人帰我汶陽之田也.
122 索隠王劭按:張衡曰「礼, 諸侯朝天子執玉, 既授而反之. 若諸侯自相朝, 則不授玉」. 斉頃公戦敗朝晉而授玉, 是欲尊晉侯為王, 太史公探其旨而言. 今按:此文不云「授玉」, 王氏之説复何所依, 聊記異耳.
123 集解皇覧曰:「頃公冢近呂尚冢.」
124 正義括地志云:「鍾離故城在沂州承県界.」
125 索隠荀偃祖林父代為中行, 後改姓為中行氏. 献子名偃.
126 集解服虔曰:「數従諸侯征伐盟会.」
127 集解賈逵曰:「徙之東垂也.」
128 集解杜預曰:「高唐在祝阿県西北.」
129 集解徐広曰:「史記多作『逞』.」
130 集解賈逵曰:「欒盈之邑.」
131 集解賈逵曰:「孟門、太行皆晉山隘也.」 索隠孟門山在朝歌東北. 太行山在河内温県西.
132 集解賈逵曰:「晉邑.」
133 集解賈逵曰:「棠公, 斉棠邑大夫.」
134 集解服虔曰:「伺公閒隙.」 正義閒音閑, 又如字.
135 集解服虔曰:「公以為姜氏不知己在外, 故歌以命之也. 一曰公自知見欺, 恐不得出, 故歌以自悔.」
136 集解服虔曰:「言不能親聴公命.」
137 集解服虔曰:「崔杼之宮近公宮, 淫者或詐称公.」
138 集解徐広曰:「争, 一作『扞』.」 索隠左傳作「扞趣」. 此為「争趣」者, 是太史公変左氏之文. 言陪臣但争趣投有淫者耳, 更不知他命也.
139 集解杜預曰:「言得淫人, 受崔子命討之, 不知他命也.」
140 集解賈逵曰:「聞難而來.」
141 集解服虔曰:「謂以公義為社稷死亡也. 如是者, 臣亦随之死亡.」
142 集解服虔曰:「言君自以己之私欲取死亡之禍, 則私近之臣所當任也.」杜預曰:「私暱, 所親愛也. 非所親愛, 無為當其禍也.」
143 集解服虔曰:「置之, 所以得人心.」
144 集解徐広曰:「史記多作『箸臼』.」
145 正義杜預云:「東郭偃, 東郭姜之弟也.」
146 正義左傳云成有疾而廃之. 杜預云有悪疾也.
147 集解杜預曰:「済南東朝陽県西北有崔氏城也.」
148 正義左傳云成彊告慶封曰:「夫子身亦子所知也, 唯無咎與偃是従, 父兄莫能進矣. 恐害夫子, 敢以告.」慶封曰:「苟利夫子, 必去之, 難吾助汝.」乃殺東郭偃、棠無咎於崔氏朝也. 其妻及崔杼皆縊死, 崔明奔魯.
149 集解賈逵曰:「嫳, 斉大夫慶封之属.」
150 索隠毋音無也.
151 集解服虔曰:「舎, 慶封之子也. 生傳其職政與子.」
152 集解賈逵曰:「二十五家為一社. 千社, 二萬五千家也.」
153 正義鄆, 鄆城也.
154 集解服虔曰:「景公自恐徳薄不能久享斉国, 故曰『誰有此』也.」
155 正義茀音佩. 謂客星侵近邊側欲相害.
156 正義彗, 息歳反. 若帚形, 見, 其境有亂也.
157 正義祝音章受反.
158 集解服虔曰:「東海祝其県是也.」
159 索隠且, 即余反. 即犂弥也.
160 集解杜預曰:「莱人, 斉所滅莱夷.」
161 索隠左傳曰「鬻姒之子荼嬖」, 則荼母姓姒. 此作「芮姫」, 不同也. 譙周依左氏作「鬻姒」, 鄒誕生本作「芮姁」. 姁音五句反.
162 集解杜預曰:「恵子, 国夏也. 昭子, 高張也.」
163 集解服虔曰:「莱, 斉東鄙邑.」
164 集解皇覧曰:「景公冢與桓公冢同処.」
165 索隠一作「嘉」.
166 正義三公子.
167 集解徐広曰:「一云『寿、黔奔衛』.」 索隠三人奔衛.
168 索隠左傳作「鉏」.
169 索隠二人奔魯, 凡五公子也.
170 集解服虔曰:「莱人見五公子遠遷鄙邑, 不得與景公葬埋之事及国三軍之謀, 故愍而歌.」杜預曰:「称謚, 蓋葬後而為此歌, 哀群公子失所也.」
171 集解服虔曰:「師, 衆也. 党, 所也. 言公子徒衆何所適也.」
172 集解賈逵曰:「圉, 晏嬰之子.」
173 集解徐広曰:「左傳八月, 斉邴意茲奔魯.」
174 集解何休曰:「斉俗, 婦人首祭事. 言魚豆者, 示薄陋無所有也.」
175 集解賈逵曰:「斉邑.」
176 集解杜預曰:「闡在東平剛県北.」 索隠二邑名. 讙在今博城県西南. 杜預曰:「闡在東平剛県北.」
177 集解杜預曰:「魴侯, 康子叔父也.」
178 集解服虔曰:「頼, 斉邑.」
179 集解徐広曰:「年表云簡公壬者, 景公之子也.」
180 集解賈逵曰:「闞止, 子我也.」 索隠監, 左傳作「闞」, 音苦濫反. 闞在東平須昌県東南也.
181 集解杜預曰:「心不安, 故數顧也.」
182 集解賈逵曰:「鞅, 斉大夫也.」 索隠鞅, 名也, 為僕御之官, 故曰御鞅, 亦田氏之族. 按:系本陳桓子無宇産子亹, 亹産子献, 献産鞅也.
183 集解杜預曰:「択用一人也.」
184 集解服虔曰:「夕省事.」
185 集解服虔曰:「子我将往夕省事於君, 而逢逆之殺人也.」杜預曰:「逆, 子行. 陳氏宗.」
186 集解杜預曰:「執逆入至於朝也.」
187 集解服虔曰:「陳常方欲謀有斉国, 故和其宗族.」
188 集解服虔曰;「使陳逆詐病而遺也.」
189 集解服虔曰:「子我見陳逆得生出, 而恐為陳氏所怨, 故與盟而請和也. 陳宗, 宗長之家.」
190 集解賈逵曰:「豹, 陳氏族也.」
191 集解賈逵曰:「公孫, 斉大夫也.」杜預曰:「言, 介達之意.」
192 集解杜預曰:「終喪也.」
193 集解服虔曰:「言我與陳氏宗疏遠也.」
194 集解服虔曰:「違者, 不従子我者.」
195 集解服虔曰:「彼謂闞止也. 子謂陳常也.」
196 集解服虔曰:「止於公宮, 為陳氏作内閒也.」
197 集解服虔曰:「成子兄弟八人, 二人共一乗, 故曰四乗.」 索隠服虔曰:「成子兄弟八人, 二人共乗一車, 故四乗.」按系本, 陳僖子乞産成子常、簡子歯、宣子其夷、穆子安、廩丘子(尚)毉茲、芒子盈、恵子得, 凡七人. 杜預又取昭子荘以充八人之數. 按系本, 昭子是桓子之子, 成子之叔父, 又不名荘, 彊相証会, 言四乗有八人耳. 今按:田完系家云田常兄弟四人如公宮, 與此事同. 今此唯称四乗, 不云人數, 知四乗謂兄弟四人乗車而入, 非二人共車也. 然其昆弟三人不見者, 蓋時或不在, 不同入公宮, 不可彊以四乗為八人, 添叔父為兄弟之數. 服、杜殊失也.
198 集解杜預曰:「幄, 帳也, 聴政之処也.」
199 集解服虔曰:「成子兄弟見子我出, 遂突入, 反閉門, 子我不得复入.」
200 集解服虔曰:「閹豎以兵禦陳氏.」
201 集解服虔曰:「舎於公宮, 故得殺之.」
202 集解服虔曰:「當陳氏入時, 飲酒於此台.」
203 集解服虔曰:「欲徙公令居寝也.」
204 集解杜預曰:「疑其作亂也.」
205 集解服虔曰:「斉大夫.」
206 集解杜預曰:「言将為公除害也.」
207 集解杜預曰:「以公怒故也.」
208 集解服虔曰:「出奔也.」
209 集解杜預曰:「言需疑則害事.」
210 集解杜預曰:「言陳氏宗族衆多.」
211 集解杜預曰:「言子若欲出, 我必殺子, 明如陳宗.」
212 集解服虔曰:「会徒衆.」
213 集解宮中之門曰闈. 大門, 公門也.
214 集解賈逵曰:「豊丘, 陳氏邑也.」
215 集解服虔曰:「斉関名.」
216 集解服虔曰:「子方, 子我党, 大夫東郭賈也.」
217 集解杜預曰:「子方取道中行人車.」
218 集解杜預曰:「斉城門.」
219 集解服虔曰:「子方将欲奔魯、衛也.」左傳曰:「東郭賈奔衛.」
220 集解春秋作「舒州」. 賈逵曰:「陳氏邑也.」 索隠■音舒, 其字従人. 左氏作「舒」, 舒, 陳氏邑. 説文作「■」, ■在薛県.
221 索隠系本及譙周皆作「敬」, 蓋誤也.
222 集解徐広曰:「年表云平公之時, 斉自是称田氏.」 索隠安平, 斉邑. 按:地理志涿郡有安平県也.
223 索隠田会, 斉大夫. 廩, 邑名, 東郡有廩丘県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