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歷史와文學/史記世家

史記 卷四O. 楚世家[靈王]

柳川 2019. 6. 22. 23:58

                                   卷四O. 楚世家[靈]

 

 

霊王三年六月, 楚使使告晉, 欲会諸侯. 諸侯皆会楚于申. 伍挙曰:「昔夏啓有鈞台之饗,1) 商湯有景亳之命, 周武王有盟津之誓, 成王有岐陽之蒐,2) 康王有豊宮之朝,3) 穆王有塗山之会, 斉桓有召陵之師, 晉文有践土之盟, 君其何用?」霊王曰:「用桓公.」4)時鄭子産在焉. 於是晉、宋、魯、衛不往. 霊王已盟, 有驕色. 伍挙曰:「桀為有仍之会, 有緡叛之.5) 紂為黎山之会, 東夷叛之.6) 幽王為太室之盟, 戎、翟叛之.7) 君其慎終!」

 

 

영왕 3년 6월, 초 나라는 사신을 진(晉)나라에 파견해 제후와 회합을 가질 것이라고 통보했다. 제후들이 모두 신(申) 지역에 와서 초 나라 왕과 회합을 가졌다. 오거가 말했다. “옛날 하계(夏啓)가 균대(鈞臺)에서 연회를 베풀었고, 상(商)나라 탕왕(湯王)은 경박(景亳)에서 명령을 내렸으며, 주나라 무왕은 맹진(盟津)에서 군사들에게 맹세했으며, 성왕은 기양(岐陽)에서 모여 사냥을 했으며, 강왕(康王)은 풍궁(豐宮)에서 만조백관을 접견했으며, 목왕(穆王)은 도산(塗山)에서 회합을 가졌으며, 제 환공은 소릉(召陵)에서 (초 나라와) 맹약을 맺었으며, 진 문공(晉文公)은 천토(踐土)에서 맹세했는데, 대왕께서는 어떤 예의를 갖추시겠습니까?” 영왕이 말했다. “제 환공의 방법을 택하겠소.” 그 당시, 정나라 자산(子産)이 그 자리에 있었지만, 진(晉)나라, 송나라, 노나라, 위(衛)나라는 참가하지 않았다. 영왕은 제후들과 맹약을 맺은 후, 교만한 기색을 드러냈다.

 

 

오거가 말했다. “하나라의 걸왕은 유잉(有仍)에서 회맹을 거행했는데, 유민(有緡)이 그에게 반기를 들었습니다. 상나라 주왕(紂王)은 여산(黎山)에서 회맹을 하자 동이(東夷)가 그에게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주 유왕(周幽王)이 태실(太室)에서 맹약의 모임을 가졌는데, 융족(戎族)과 적족(翟族)이 그에게 반기를 들었습니다. 대왕께서는 반드시 신중하게 뒷일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七月, 楚以諸侯兵伐呉, 囲朱方. 八月, 克之, 囚慶封, 滅其族. 以封徇, 曰:「無效斉慶封弑其君而弱其孤, 以盟諸大夫!」8)封反曰:「莫如楚共王庶子囲弑其君兄之子員而代之立!」9)於是霊王使(棄)疾殺之.

 

 

7월, 초 나라 왕은 제후의 군대를 이끌고 오나라를 정벌하러 가서 주방(朱方)을 포위했다. 주방을 점령해 경봉(慶封)을 가두고 그의 일족을 멸했다. 경봉을 본보기로 군중들에게 보이면서 선포했다. “여러분, 제나라 경봉을 본받지 마시오. 자기의 국왕을 죽이고, 어린 군주를 속이고, 대부들을 위협해 자신을 지지하게 했습니다.” 경봉이 반박하며 말했다. “초 나라 공왕의 서자 위(圍)를 본받지 마시오. 자신의 국왕인 형의 아들 원(員)을 시해하고 왕위에 등극했습니다!” 이때, 영왕은 즉시 사람을 보내어 그를 죽였다.

 

 

七年, 就章華台,10) 下令内亡人実之.

八年, 使公子棄疾将兵滅陳. 十年, 召蔡侯, 酔而殺之. 使棄疾定蔡, 因為陳蔡公.

 

 

7년, 영왕은 장화대(章華臺)를 세우려고, 영을 내려 유랑민들을 마을에 머물게 하고 부역에 종사하게 했다.

 

8년, 공자 기질(棄疾)에게 군사를 주어 진(陳)나라를 멸하게 했다. 10년, 채후(蔡侯)를 불러 술에 취하게 한 다음 그를 죽였다. 공자 기질을 파견해 채나라를 평정하고 그를 진채공(陳蔡公)에 임명했다.

 

 

十一年, 伐徐以恐呉.11) 霊王次於乾谿以待之. 王曰:「斉、晉、魯、衛, 其封皆受宝器, 我独不. 今吾使使周求鼎以為分, 其予我乎?」12)析父対曰:「其予君王哉!13) 昔我先王熊繹辟在荊山, 蓽露藍蔞14)以処草莽, 跋渉山林15)以事天子, 唯是桃弧棘矢以共王事.16) 斉, 王舅也;17)晉及魯、衛, 王母弟也:楚是以無分而彼皆有. 周今與四国服事君王, 将惟命是従, 豈敢愛鼎?」霊王曰:「昔我皇祖伯父昆吾旧許是宅,18) 今鄭人貪其田, 不我予, 今我求之, 其予我乎?」対曰:「周不愛鼎, 鄭安敢愛田?」霊王曰:「昔諸侯遠我而畏晉, 今吾大城陳、蔡、不羹,19) 賦皆千乗, 諸侯畏我乎?」対曰:「畏哉!」霊王喜曰:「析父善言古事焉.」20)

 

 

11년, 서(徐)나라를 정벌하고 오(吳)나라를 위협했다. 영왕은 간계(乾谿)에 주둔해 동정을 살폈다. 영왕이 말했다. “제(齊)나라, 진(晉)나라, 노(魯)나라, 위(衛)나라는 제후에 봉해질 때 모두 주 왕실로부터 보물을 받아갔는데, 우리나라는 없었소. 지금 내가 사신을 파견해 주 왕실에 구정을 요구해 제후의 보물로 삼으려고 하는데, 과연 나에게 주겠소?”

 

 

석보(析父)가 대답해 말했다. “반드시 국왕에게 줄 것입니다! 옛날에 우리의 선조 웅역(熊繹)이 멀리 형산(荊山)에 있으면서, 낡은 수레를 타고 해어진 옷을 입고 초원지방에 살면서도 산과 물을 건너 천자를 받들고, 복숭아나무로 만든 활과 가시나무로 만든 화살을 주 왕실에 공급했습니다. 제나라 제후는 주 천자의 큰아버지이고, 진(晉)나라의 제후와 노나라의 제후 그리고 위(衛)나라의 제후는 각각 주나라 성왕 혹은 무왕과 같은 어머니의 형제들이어서, 초 나라가 받지 못한 보물을 그들은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주 왕실은 지금 쇠퇴해 네 나라와 함께 모두 국왕을 섬기고 있으니, 국왕의 명령에 복종할 것이고, 어떻게 감히 어리석게 구정을 아까워하겠습니까?”

 

 

영왕이 말했다. “옛날에 나의 먼 조상인 계련(季連)의 큰형 곤오(昆吾)가 원래 허(許)나라에 살았는데, 지금 정나라 사람들이 그곳을 탐해 점령하고 나에게 주려고 하지 않는데, 만약에 내가 그것을 달라고 하면 나에게 주겠소?” 석보가 대답해 말했다. “주나라가 구정을 아까워하지 않는데, 정나라가 어떻게 감히 허 나라 땅을 아까워하겠습니까?” 영왕이 말했다. “옛날에 제후들이 나를 멀리하고 진(晉)나라를 두려워했는데, 지금 내가 진(陳), 채(蔡), 불갱(不羹)의 성지(城池)를 크게 수리하고 이곳에 천승(千乘)의 병사를 주둔시키고 있는데, 제후들이 나를 두려워하겠소?” 대답하기를 “두려워할 것입니다!” 영왕은 기뻐서 말했다. “석보는 정말로 옛 일을 잘 아는군.”

 

 

十二年春, 楚霊王樂乾谿, 不能去也. 国人苦役. 初, 霊王会兵於申, 僇越大夫常寿過,21) 殺蔡大夫観起.22) 起子従亡在呉,23) 乃勧呉王伐楚, 為閒越大夫常寿過而作亂, 為呉閒. 使矯公子棄疾命召公子比於晉, 至蔡, 與呉、越兵欲襲蔡. 令公子比見棄疾, 與盟於鄧.24) 遂入殺霊王太子祿, 立子比為王, 公子子■為令尹, 棄疾為司馬. 先除王宮, 観従従師于乾谿, 令楚衆曰:「国有王矣. 先帰, 复爵邑田室. 後者遷之.」楚衆皆潰, 去霊王而帰.

 

 

12년 봄, 초 나라 영왕은 간계를 좋아해 그곳을 떠나는 것을 아쉬워했다. 초 나라 백성들이 요역으로 고생을 했다. 먼저 영왕은 신읍(申邑)에서 제후들과 모임을 가지고, 월(越)나라 대부 상수과(常壽過)를 모욕하고, 채나라 대부 관기(觀起)를 죽였다. 관기의 아들 관종(觀從)은 오나라로 도망쳐서 오나라 왕에게 초 나라를 공격하고 월나라 대부 상수과에게 반란을 일으키라고 권하고 (자신은) 오나라 첩자가 되었다. 사람을 파견해 공자 기질의 명령을 거짓으로 유포시키고, 진(晉)나라에서 공자 비(比)를 채읍으로 불러들였으며, 관종은 오나라와 월나라의 군대와 연합해 채읍을 습격할 준비를 했다. 공자 비로 하여금 공자 기질을 만나게 하고, 등읍(鄧邑)에서 맹약을 맺었다. 그리고 영도(郢都)에 들어가 영왕의 태자 녹(祿)을 죽이고, 공자 비를 초왕에 옹립하고, 공자 석(晳)을 영윤에 임명했으며, 공자 기질을 사마(司馬)로 삼았다.

먼저 왕궁을 평정하고, 관종은 군대를 이끌고 간계에 가서 초 나라 군사들에게 선포했다. “나라에 왕이 새로 들어섰으니 먼저 돌아가는 사람은 원래 가지고 있던 관직과 봉지·전답·가옥을 회복시켜 줄 것이며, 늦게 돌아가는 사람은 귀양을 보낼 것이다.” 초 나라 병사들이 이 말을 듣고 모두 흩어져 도망치고 영왕 혼자만 남게 되었다.

 

 

霊王聞太子祿之死也, 自投車下, 而曰:「人之愛子亦如是乎?」侍者曰:「甚是.」王曰:「余殺人之子多矣, 能無及此乎?」右尹曰:25)「請待於郊以聴国人.」26)王曰:「衆怒不可犯.」曰:「且入大県而乞師於諸侯.」王曰:「皆叛矣.」又曰:「且奔諸侯以聴大国之慮.」王曰:「大福不再, 祗取辱耳.」於是王乗舟将欲入鄢.27)右尹度王不用其計, 懼倶死, 亦去王亡.

 

 

영왕은 태자 녹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마차 아래로 쓰러지면서 말했다. “사람들이 아들을 사랑하는 것이 나와 같단 말인가?” 시종이 대답했다. “이것보다 훨씬 더합니다.” 영왕이 말했다. “내가 다른 사람들의 자식을 많이 죽였으니 이런 지경에 이르지 않을 수 있겠소?”

 

 

우윤(右尹)이 말했다. “왕께서는 영도(郢都) 교외로 돌아가셔서 백성들의 처분을 기다리십시오.” 영왕이 말했다. “사람들이 모두 나를 배반했는데도···.” 우윤이 다시 말했다. “그러면 잠시 제후에게 의탁하시고 나라가 안정되기를 기다리십시오.” 영왕이 말했다. “복을 다시 누릴 수 없을 것이니 내 스스로 치욕을 당하는 수밖에 없구려.” 이때 영왕은 배를 타고 언성(鄢城)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우윤은 영왕이 그의 계책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되자, 죽는 것이 걱정되어 영왕을 떠나 도망쳤다.

 

 

霊王於是独傍偟山中, 野人莫敢入王. 王行遇其故鋗人,28) 謂曰:「為我求食, 我已不食三日矣.」鋗人曰:「新王下法, 有敢饟王従王者, 罪及三族, 且又無所得食.」王因枕其股而臥. 鋗人又以土自代, 逃去. 王覚而弗見, 遂飢弗能起. 芋尹申無宇之子申亥曰:「吾父再犯王命,29) 王弗誅, 恩孰大焉!」乃求王, 遇王飢於釐沢, 奉之以帰. 夏五月癸丑, 王死申亥家,30) 申亥以二女従死, 并葬之.

 

 

영왕이 단신으로 산속을 헤매었지만, 산야의 백성들이 모두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옛날 견인(鋗人)을 만나 그에게 말했다. “나에게 먹을 것을 좀 주시오. 나는 벌써 3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했소.” 견인이 말했다. “새 왕이 조서를 내려, 당신에게 음식을 제공하거나 당신을 따르는 사람은 삼족(三族)에게 벌을 내린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음식을 찾을 만한 곳도 없습니다.” 영왕은 그의 다리를 베개 삼아 잠이 들었다. 견인은 흙더미를 가져다가 다리를 대신하고 도망쳤다.

 

 

영왕이 깨어보니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배가 고파서 일어서지도 못했다. 우윤(芋尹)의 지방관 신무우(申無宇)의 아들 신해(申亥)가 말했다. “저의 부친께서 두 번이나 국왕의 명령을 어겼는데도 국왕은 그를 죽이지 않았으니 그 은덕이 이보다 큰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방으로 영왕을 찾아다녔다. 이택(釐澤)에서 영왕이 배가 고파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를 부축해 집으로 데리고 왔다. 여름 5월 계축일(癸丑日)에 영왕은 신해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신해는 두 딸로 하여금 순절하게 해 영왕과 함께 묻었다.

 

 

 

是時楚国雖已立比為王, 畏霊王复來, 又不聞霊王死, 故観従謂初王比曰:「不殺棄疾, 雖得国猶受禍.」王曰:「余不忍.」従曰:「人将忍王.」王不聴, 乃去. 棄疾帰. 国人毎夜驚, 曰:「霊王入矣!」乙卯夜, 棄疾使船人従江上走呼曰:「霊王至矣!」国人愈驚. 又使曼成然告初王比及令尹子■曰:「王至矣! 国人将殺君, 司馬将至矣!31) 君蚤自図, 無取辱焉. 衆怒如水火, 不可救也.」初王及子■遂自殺. 丙辰, 棄疾即位為王, 改名熊居, 是為平王.

 

 

이때, 초 나라는 공자 비(比)를 왕으로 옹립했으나 영왕이 살아 돌아올까 걱정만 할 뿐 영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이 때문에 관종은 초왕(初王) 비에게 말했다. “공자 기질을 죽이지 않으면, 왕께서 비록 나라를 얻기는 했지만 화를 당할 것입니다.” 초왕이 말했다. “나는 차마 그럴 수 없소.” 관종이 말했다. “사람들이 대왕을 해치려고 참고 있습니다.” 초왕이 말을 듣지 않자 관종은 비의 곁을 떠났다.

 

 

공자 기질이 귀국하자, 도성(都城) 사람들이 밤마다 놀라 허둥대며 말했다. “영왕이 성으로 돌아왔다!” 을묘일(乙卯日) 저녁, 공자 기질은 사람을 보내어 강에서 배를 타고 왔다 갔다 하면서 다음과 같이 소리치게 했다. “영왕이 돌아왔다!” 도성 사람들은 더욱더 놀라고 두려워했다. 그리고 만성연(曼成然)을 파견해 초왕 비와 영윤 자석(子晳)에게 알렸다. “군왕이 돌아왔습니다! 성 안의 사람들이 대왕을 죽이려고 합니다. 사마(司馬), 즉 기질이 곧 돌아올 것입니다. 대왕께서 빨리 방책을 세워 치욕을 당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백성들이 분노해, 물이 넘치고 불이 타오르는 것같이 되면 돌이킬 수 없습니다.” 초왕과 자석은 자살했다. 병진일(丙辰日)에 기질이 왕으로 등극하고 이름을 웅거(熊居)라고 바꾸니, 이 사람이 바로 평왕(平王)이다.

 

 

각주

1 集解杜預曰:「河南陽翟県南有鈞台坡.」

2 集解賈逵曰:「岐山之陽.」

3 集解服虔曰:「豊宮, 成王廟所在也.」杜預曰:「豊在始平鄠県東, 有霊台, 康王於是朝諸侯.」

4 集解杜預曰:「用会召陵之礼也.」

5 集解賈逵曰:「仍, 緡, 国名也.」

6 集解服虔曰:「黎, 東夷国名也, 子姓.」

7 集解杜預曰:「太室, 中嶽也.」

8 集解杜預曰:「斉崔杼弑其君, 慶封其党, 故以弑君之罪責之也.」

9 集解谷梁傳曰:「軍人粲然皆笑.」

10 集解杜預曰:「南郡華容県有台, 在城内.」

11 集解左傳曰使蕩侯等囲徐.

12 集解服虔曰:「有功徳, 受分器.」

13 集解賈逵曰:「析父, 楚大夫.」 索隠拠左氏此是右尹子革之詞, 史蓋誤也.

14 集解徐広曰:「蓽, 一作『暴』.」駰案:服虔曰「蓽露, 柴車素木輅也. 藍蔞, 言衣敝壊, 其蔞藍藍然也」.

15 集解服虔曰:「草行曰跋, 水行曰渉.」

16 集解服虔曰:「桃弧棘矢所以禦其災, 言楚地山林無所出也.」

17 集解服虔曰:「斉呂伋, 成王之舅.」

18 集解服虔曰:「陸終氏六子, 長曰昆吾, 少曰季連. 季連, 楚之祖, 故謂昆吾為伯父也. 昆吾曾居許地, 故曰旧許是宅.」

19 集解韋昭曰:「二国, 楚別都也. 潁川定陵有東不羹, 襄城有西不羹.」 正義括地志云:「不羹故城在許州襄城県東三十里. 地理志云此乃西不羹者也.」

20 正義左傳昭十二年, 析父謂子革曰:「吾子楚国之望也, 今與王言如響, 国其若之何?」杜預曰:「譏其順王心如響應声也.」按:此対王言是子革之辞, 太史公云析父, 誤也. 析父時為王僕, 見子革対, 故歎也.

21 索隠僇, 辱也.

22 索隠観音官. 観, 姓;起, 名.

23 索隠従音才松反.

24 集解杜預曰:「潁川邵陵県西有鄧城.」 正義括地志云:「故鄧城在予州郾城県東三十五里.」按:在古召陵県西十里也.

25 集解左傳曰右尹子革.

26 集解服虔曰:「聴国人欲為誰.」

27 集解服虔曰:「鄢, 楚別都也.」杜預曰:「襄陽宜城県.」 正義音偃. 括地志云:「故鄢城在襄州安養県北三里, 在襄州北五里, 南去荊州二百五十里.」按:王自夏口従漢水上入鄢也. 左傳云「王沿夏将欲入鄢」是也. 括地志云:「鄢水源出襄州義清県西界託仗山. 水経云蛮水即鄢水是也.」

28 集解韋昭曰:「今之中涓也.」

29 集解服虔曰:「断王旌, 執人於章華之宮.」

30 正義左傳云「夏五月癸亥, 王縊于芋尹申亥」是也.

31 集解杜預曰:「司馬謂棄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