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 卷四O. 楚世家[平王]
卷四O. 楚世家[平王]
平王以詐弑両王而自立, 恐国人及諸侯叛之, 乃施恵百姓. 复陳蔡之地而立其後如故, 帰鄭之侵地. 存恤国中, 修政教. 呉以楚亂故, 獲五率以帰.1) 平王謂観従:「恣爾所欲.」欲為卜尹, 王許之.2)
평왕은 속임수로 두 왕을 죽이고 등극해, 백성들과 제후들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진(陳)나라와 채(蔡)나라의 땅을 되돌려주고, 두 나라의 후예를 그곳의 제후로 삼았으며, 빼앗았던 정(鄭)나라 땅을 되돌려주었다.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 정령(政令)을 내려 교화에 힘썼다. 오나라는 초 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서 초 나라 장군 5명을 사로잡아 회군했다. 평왕은 관종에게 말했다. “그대는 어떤 관직을 원하오?” 관종이 복윤(卜尹)을 원해 평왕은 그것을 그에게 허락했다.
初, 共王有寵子五人, 無適立, 乃望祭群神, 請神決之, 使主社稷, 而陰與巴姫3)埋璧於室内,4) 召五公子斎而入. 康王跨之,5) 霊王肘加之, 子比、子晳皆遠之. 平王幼, 抱其上而拝, 圧紐. 故康王以長立, 至其子失之;囲為霊王, 及身而弑;子比為王十余日, 子晳不得立, 又倶誅. 四子皆絶無後. 唯独棄疾後立, 為平王, 竟続楚祀, 如其神符.
원래, 공왕(共王)에게 총애하는 아들 5명이 있었지만, 적자(嫡子)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지 않고, 산천 군신들에게 제사 지내어 신령이 그중에서 한 사람을 점지하면 그에게 나라를 맡기고자 했다. 그래서 공왕과 파희(巴姬)는 사당에 몰래 옥벽(玉璧)을 묻어두고, 다섯 아들에게 목욕재계하고 사당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강왕(康王)은 옥벽을 뛰어넘었고, 영왕(靈王)은 팔꿈치를 옥벽 위에 올려놓았고, 자비(子比)와 자석(子晳)은 옥벽에서 멀리 떨어졌다. 평왕(平王)은 나이가 어려 그 위에 무릎을 꿇고 절하는데, 그것이 옥벽의 중심을 내리누르게 되었다.
그래서 강왕은 나이가 들어 등극했으나 그의 아들 손에 왕위를 빼앗겼고, 공자 위(圍)는 영왕이 되어 살해되었고, 공자 비(比)는 10여 일 동안 왕이 되었으며, 공자 석은 등극하지도 못하고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이 네 아들은 후손이 끊어져 멸문했다. 오직 공자 기질만이 후에 등극해 평왕이 되어 초 나라 종묘사직에 계속 제사 지낼 수 있게 되었으니, 이것은 모두 신령의 계시 때문인 것 같다.
初, 子比自晉帰, 韓宣子問叔向曰:「子比其済乎?」対曰:「不就.」宣子曰:「同悪相求, 如市賈焉,6) 何為不就?」対曰:「無與同好, 誰與同悪?7) 取国有五難:有寵無人, 一也8);有人無主, 二也;9)有主無謀, 三也;10)有謀而無民, 四也;11)有民而無徳, 五也.12) 子比在晉十三年矣, 晉、楚之従不聞通者, 可謂無人矣;13)族尽親叛, 可謂無主矣;14)無釁而動, 可謂無謀矣;15)為羈終世, 可謂無民矣;16)亡無愛徴, 可謂無徳矣.17) 王虐而不忌,18) 子比渉五難以弑君, 誰能済之! 有楚国者, 其棄疾乎? 君陳、蔡, 方城外属焉.19) 苛慝不作, 盗賊伏隠, 私欲不違,20) 民無怨心. 先神命之, 国民信之. 羋姓有亂, 必季実立, 楚之常也. 子比之官, 則右尹也;數其貴寵, 則庶子也;以神所命, 則又遠之;民無懐焉, 将何以立?」宣子曰:「斉桓、晉文不亦是乎?」21)対曰:「斉桓, 衛姫之子也, 有寵於釐公. 有鮑叔牙、賓須無、隰朋以為輔, 有莒、衛以為外主,22) 有高、国以為内主.23) 従善如流,24) 施恵不倦. 有国, 不亦宜乎? 昔我文公, 狐季姫之子也, 有寵於献公. 好学不倦. 生十七年, 有士五人, 有先大夫子余、子犯以為腹心,25) 有魏犨、賈佗以為股肱, 有斉、宋、秦、楚以為外主,26) 有欒、郤、狐、先以為内主.27) 亡十九年, 守志弥篤. 恵、懐棄民,28) 民従而與之.29) 故文公有国, 不亦宜乎? 子比無施於民, 無援於外, 去晉, 晉不送;帰楚, 楚不迎. 何以有国!」子比果不終焉, 卒立者棄疾,30) 如叔向言也.
처음, 공자 비가 진(晉)나라에서 돌아오자, 한선자(韓宣子)가 숙향(叔向)에게 물었다. “공자 비가 성공하겠습니까?” 숙향이 대답했다.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선자가 말했다. “초 나라 백성들이 모두 초왕을 싫어해, 장사꾼이 이익만을 취하는 것과 같이 새 임금을 세우려고 하는데 왜 성공할 수 없습니까?” 숙향이 대답했다. “그와 친밀한 사람도 없으며, 그와 원망을 함께 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나라를 취하는 데는 다섯 가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총애하는 사람은 있지만 현인이 없는 것이 그 하나요, 현인이 있기는 하지만 중요한 지지기반이 없는 것이 그 두 번째요, 중요한 지지기반이 있기는 하지만 전반적인 계략이 없는 것이 그 세 번째요, 전반적인 계략은 있지만 백성들의 호응이 없는 것이 그 네 번째요, 백성들의 호응은 있지만 자신에게 덕행이 없는 것이 그 다섯 번째입니다.
자비는 진(晉)나라에서 13년 동안 있었는데, 진나라와 초 나라에서 그를 따르는 사람 중에 학식이 박학한 사람이 있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으니 현인이 없는 것이고, 가족이 없고 친척과 친구들이 그를 배반했으니 중요한 지지기반이 없다고 말할 수 있으며, 때가 되지도 않았는데 정변을 일으키고자 하니 전반적인 계략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평생 동안 국외에서 살았으니 백성이 없다고 할 수 있고, 국외를 떠돌아다녔는데도 어느 누구도 그의 행적을 기록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없으니 덕행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초왕이 포학해 거리끼는 바가 없기는 하지만(자멸했지만), 자비가 이 다섯 가지 어려움에 직면해 임금을 죽이려 하는데 누가 그를 도와 성공시키겠습니까? 초 나라를 얻는 사람은 아마 기질이 아니겠습니까?
기질은 진(陳)나라와 채나라 땅을 통치하고 있고, 방성(方城) 이외의 지역도 모두 그에게 귀속되었습니다. 혼란스럽고 사악한 일이 일어나지 않고 도적들이 숨을 죽이고 숨어있고, 사리사욕으로 백성들의 이익을 거스르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들도 원망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조상들이 그를 점지해 주셨으니 초 나라 백성들이 그를 신임합니다. 미성(羋姓)은 난이 일어나면 반드시 막내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초 나라의 관례입니다. 자비의 관직은 우윤(右尹)일 뿐이고, 그의 귀천을 논하자면 서자에 불과할 뿐입니다. 신령의 뜻에 의하면 아주 요원하고 백성들이 그를 생각하지 않으니, 어떻게 왕위에 오를 수 있겠습니까!”
선자가 말했다. “제 환공(齊桓公), 진 문공(晉文公)도 그렇지 않았습니까?” 숙향이 대답했다. “제 환공은 위희(衛姬)의 아들로 희공(釐公)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포숙아(鮑叔牙), 빈수무(賓須無), 습붕(隰朋)이 보좌했고, 거(莒)와 위(衛) 나라가 밖에서 지원했으며, 고씨(高氏)와 국씨(國氏)가 안에서 도왔습니다. 그는 즐거운 마음으로 정확한 의견을 듣고, 끊임없이 은혜를 베풀었으니, 제나라를 향유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옛날 우리나라 진 문공(晉文公)은 호계희(狐季姬)의 아들로, 헌공(獻公)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학문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17세에 5명의 현사(賢士)가 있었고, 대부 자여(子餘)와 자범(子犯)이 심복이 되었으며, 위주와 가타(賈佗)가 힘을 다해 보좌했고, 제나라, 송나라, 진(秦)나라, 초 나라가 밖에서 지지했고, 난(欒), 극(郤), 호(狐), 선(先) 네 집안이 안에서 도왔습니다. 19년 동안 떠돌아다녔지만 부국강병에 대한 의지가 더욱더 강해졌습니다. 혜공(惠公)과 회공(懷公)이 백성을 배신해, 백성들이 서로를 이끌며 문공에게 왔습니다. 그래서 문공이 진(晉)나라를 향유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았습니까?
자비는 백성들에게 이익을 준 적이 없고, 밖에서도 지원하지 않고, 진나라를 떠나는데도 진나라에서 호위하지 않았으며, 초 나라에 돌아왔는데도 초 나라가 환대하며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초 나라를 향유할 수 있겠습니까!” 자비는 과연 나쁜 종말을 맞았고, 결과적으로 왕위에 오른 사람은 기질이었다. 숙향이 말한 그대로였다.
平王二年, 使費無忌31)如秦為太子建取婦.32) 婦好, 來, 未至, 無忌先帰, 説平王曰:「秦女好, 可自娶, 為太子更求.」平王聴之, 卒自娶秦女, 生熊珍. 更為太子娶. 是時伍奢為太子太傅, 無忌為少傅. 無忌無寵於太子, 常讒悪太子建. 建時年十五矣, 其母蔡女也, 無寵於王, 王稍益疏外建也.
평왕 2년, 비무기(費無忌)를 진(秦)나라에 보내 태자 건(建)을 위해서 태자비를 맞아들이려고 했다. 태자비는 대단히 아름다웠다. 비무기는 태자비를 영접해 오는 도중에 먼저 성으로 돌아와서 평왕을 부추기며 말했다. “진나라 여자가 아름다우니 대왕께서 직접 그녀를 취하시고, 태자에게는 다른 사람을 구해 주시지요.”
평왕은 그의 말에 따라 자신이 진나라 여자를 취해 웅진(熊珍)을 낳았다. 태자에게는 따로 신부를 구해 결혼시켰다. 이때 오사(伍奢)가 태자의 태부(太傅)가 되고 비무기는 소부(少傅)가 되었다. 비무기는 태자의 총애를 얻지 못하자 자주 태자 건을 모함했다. 태자 건은 이 당시 15세였고, 그의 모친은 채나라 사람으로 평왕의 총애를 얻지 못해, 평왕은 점점 태자 건을 소원하게 대했다.
六年, 使太子建居城父, 守邊.33) 無忌又日夜讒太子建於王曰:「自無忌入秦女, 太子怨, 亦不能無望於王, 王少自備焉. 且太子居城父, 擅兵, 外交諸侯, 且欲入矣.」平王召其傅伍奢責之. 伍奢知無忌讒, 乃曰:「王柰何以小臣疏骨肉?」無忌曰:;「今不制, 後悔也.」於是王遂囚伍奢. (而召其二子而告以免父死)乃令司馬奮揚召太子建, 欲誅之. 太子聞之, 亡奔宋.
6년, 태자 건을 성보(城父)에 머물게 하고 변방을 지키게 했다. 비무기는 다시 밤낮으로 평왕 면전에서 태자 건을 모함했다. “제가 진나라 여자를 대왕의 후궁으로 모셔온 그날부터 태자 건은 저를 미워하고 있으니, 대왕에 대한 원망이 없을 수 없습니다. 대왕께서 좀 더 경계하셔야 합니다. 더구나 태자는 성보에서 병권을 쥐고 대외적으로 제후와 결탁해 쳐들어올 것입니다.” 평왕은 태자의 태부 오사를 불러 이 사건을 철저히 규명하라고 명했다. 오사는 비무기가 태자를 모함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말했다. “대왕께서는 어찌해 하찮은 소인의 말을 듣고 혈육을 멀리하십니까?” 비무기가 말했다. “지금 그를 제압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평왕은 오사를 옥에 가두고, 사마 분양(奮揚)을 보내어 태자 건을 불러오게 해 태자 건을 죽이려고 했다. 태자는 이 소식을 듣고 송나라로 도망쳤다.
無忌曰:「伍奢有二子, 不殺者為楚国患. 盍以免其父召之, 必至.」於是王使使謂奢:「能致二子則生, 不能将死.」奢曰:「尚至, 胥不至.」王曰:「何也?」奢曰:「尚之為人, 廉, 死節, 慈孝而仁, 聞召而免父, 必至, 不顧其死. 胥之為人, 智而好謀, 勇而矜功, 知來必死, 必不來. 然為楚国憂者必此子.」於是王使人召之, 曰:「來, 吾免爾父.」伍尚謂伍胥曰:「聞父免而莫奔, 不孝也;父戮莫報, 無謀也;度能任事, 知也. 子其行矣, 我其帰死.」伍尚遂帰. 伍胥彎弓属矢, 出見使者, 曰:「父有罪, 何以召其子為?」将射, 使者還走, 遂出奔呉. 伍奢聞之, 曰:「胥亡, 楚国危哉.」楚人遂殺伍奢及尚.
비무기가 말했다. “오사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함께 죽이지 않으면 초 나라의 화근이 될 것입니다. 부친의 죄를 사해준다는 명분을 내세워 그들을 불러들인다면 틀림없이 올 것입니다.” 그래서 평왕은 사신을 보내어 오사에게 보내어 말을 전하게 했다. “너의 두 아들을 불러오면 살려줄 것이고, 불러오지 못하면 죽음뿐이다.” 오사가 말했다. “상(尙)은 오겠지만 서(胥)는 오지 않을 것입니다.” 평왕이 말했다. “왜?” 오사가 말했다. “상의 사람됨은 품행이 단정하고 절개를 위해서 죽을 수 있고, 효가 지극하고 어질어서, 왕명을 받고 부친의 죄를 면할 수 있다면 틀림없이 와서, 자신의 생사를 돌보지 않을 것입니다. 서의 사람됨은 기지가 있고 계략을 꾸미기를 좋아하고, 용감하면서 공명을 바라고, 오면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틀림없이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장차 초 나라는 이 아이 때문에 우환이 있을 것입니다.”
평왕은 그들을 소환하기 위해서 사람을 파견했다. “자, 내가 너희 부친의 죄를 사해주겠노라.” 오상(伍尙)이 오서(伍胥)에게 말했다. “아버지의 죄를 사해준다는 말을 듣고 가지 않는 것은 불효이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복수할 사람이 없다면 지모가 없는 것이다. 일을 처리하는 능력을 헤아리는 것도 지혜로운 것이다. 너는 도망치고 나는 돌아가서 죽겠다.” 오상은 영도(郢都)로 갔다. 오서는 활에 화살을 메겨 사신에게 말했다. “부친에게 죄가 있는데 어찌해 아들을 불러들인단 말입니까?” 활을 쏘려고 하자 사신은 도망치고, 오서는 오나라에 망명했다. 오사는 이 소식을 듣고 “서가 도망쳤으니, 초 나라가 위험하겠군!”이라고 말했다. 초 나라 왕은 오사와 오상을 죽였다.
十年, 楚太子建母在居巣,34) 開呉. 呉使公子光伐楚, 遂敗陳、蔡, 取太子建母而去. 楚恐, 城郢.35) 初, 呉之邊邑卑梁36)與楚邊邑鍾離小童争桑, 両家交怒相攻, 滅卑梁人. 卑梁大夫怒, 発邑兵攻鍾離. 楚王聞之怒, 発国兵滅卑梁. 呉王聞之大怒, 亦発兵, 使公子光因建母家攻楚, 遂滅鍾離、居巣. 楚乃恐而城郢.37)
10년, 초 나라 태자 건의 모친은 거소(居巢)에서 몰래 오나라 군사와 내통했다. 오나라는 공자 광(光)을 파견해 초 나라를 정벌하기 위해서, 진(陳)나라와 채나라를 격퇴하고 태자 건의 모친을 오나라로 데려갔다. 초 나라는 겁을 먹고 영성(郢城)을 옮기고 다시 성을 쌓았다. 처음에, 오나라의 변경 마을 비량(卑梁)과 초 나라 변경 마을 종리(鍾離)의 아이들이 뽕나무 잎을 서로 빼앗으려고 싸움이 나서, 두 집안이 발끈해 싸우다가 비량 일가가 죽임을 당했다. 이에 비량의 대부(大夫)가 발끈해 병사를 보내어 종리를 공격했다.
초 나라 왕이 이 사건을 듣고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비량을 초토화했다. 오나라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대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태자 건의 모친이 거소에 사는 것을 이유로 공자 광으로 하여금 종리와 거소를 공격하게 했다. 초 나라는 두려워해 다시 영성을 보수했다.
十三年, 平王卒. 将軍子常曰:「太子珍少, 且其母乃前太子建所當娶也.」欲立令尹子西. 子西, 平王之庶弟也, 有義. 子西曰:「国有常法, 更立則亂, 言之則致誅.」乃立太子珍, 是為昭王.
13년, 평왕이 서거했다. 장군 자상(子常)이 말했다. “태자 진(珍)이 나이가 어리고, 그의 모친은 전 태자 건에게 시집갔어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해서 영윤(令尹) 자서(子西)를 옹립하려고 했다. 자서는 평왕의 배다른 동생으로 절의가 있는 사람이었다. 자서가 말했다. “나라에는 정상적으로 시행해야 할 법도가 있는데, 계승질서를 바꾸면 나라가 어지러워집니다. 그리고 자상과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은 죽어 마땅합니다.” 이리하여 태자 진을 옹립하니, 이 사람이 소왕(昭王)이다.
각주
1 集解服虔曰:「五率, 蕩侯、潘子、司馬督、囂尹午、陵尹喜.」
2 集解賈逵曰:「卜尹, 卜師, 大夫官.」
3 集解賈逵曰:「共王妾.」
4 正義左傳云:「埋璧於太室之庭.」杜預曰:「太室, 祖廟也.」
5 集解服虔曰:「両足各跨璧一邊.」杜預曰:「過其上.」
6 集解服虔曰:「謂国人共悪霊王者, 如市賈之人求利也.」
7 集解服虔曰:「言無党於内, 當與誰共同好悪.」
8 集解杜預曰:「寵須賢人而固.」
9 集解杜預曰:「雖有賢人, 當須内主為應.」
10 集解杜預曰:「謀, 策謀也.」
11 集解杜預曰:「民, 衆也.」
12 集解杜預曰:「四者既備, 當以徳成之.」
13 集解杜預曰:「晉、楚之士従子比游, 皆非達人.」
14 集解杜預曰:「無親族在楚.」
15 集解服虔曰:「言霊王尚在, 而妄動取国, 故謂無謀.」
16 集解杜預曰:「終身羈客在於晉, 是無民.」
17 集解杜預曰:「楚人無愛念者.」
18 集解杜預曰:「霊王暴虐, 無所畏忌, 将自亡.」
19 正義方城山在許州葉県西十八里也.
20 集解服虔曰:「不以私欲違民心.」
21 集解服虔曰:「皆庶子而出奔.」
22 集解賈逵曰:「斉桓出奔莒, 自莒先入, 衛人助之.」
23 集解服虔曰:「国子, 高子, 皆斉之正卿.」
24 集解服虔曰:「言其疾.」
25 集解賈逵曰:「子余, 趙衰.」
26 集解賈逵曰:「斉以女妻之, 宋贈之馬, 楚享以九献, 秦送内之.」
27 集解賈逵曰:「四姓, 晉大夫.」 正義杜預云:「謂欒枝、郤縠、狐突、先軫也.」
28 集解服虔曰:「皆棄民不恤.」
29 正義以恵、懐棄民, 故民相従而帰心於文公.
30 正義左傳云:「獲神, 一也;有民, 二也;令徳, 三也;寵貴, 四也;居常, 五也. 有五利以去五難, 誰能害之!」杜預云:「獲神, 當璧拝也;有民, 民信也;令徳, 無苛慝也;寵貴, 妃子也;居常, 棄疾季也.」
31 集解服虔曰:「楚大夫.」 索隠左傳作「無極」, 極忌声相近.
32 正義左傳云:「楚子之在蔡也, ■陽之女奔之, 生太子建.」杜預云:「■, 蔡邑也.」■, 古覓反.
33 集解服虔曰:「城父, 楚北境邑.」杜預曰:「襄城城父県.」 正義父音甫. 括地志云:「城父故城在許州葉県東北四十五里, 即杜預云襄城城父県也. 又許州襄城県東四十里亦有父城故城一所, 服虔云『城父, 楚北境』, 乃是父城之名, 非建所守. 杜預云(言)成父, 又誤也. 傳及酈元水経注云『楚大城城父, 使太子建居之』, 即十三州志云太子建所居城父, 謂今亳州城父県也.」按:今亳州見有城父県, 是建所守者也. 地理志云潁川有父城県, 沛郡有城父県, 此二名別耳.
34 正義廬州巣県是也.
35 正義在江陵県東北六里, 已解於前. 按:傳城郢在昭公二十三年, 下重言城郢. 杜預云「楚用子嚢遺言以築郢城矣, 今畏呉, 复修以自固也.」
36 正義卑梁邑近鍾離也.
37 索隠去年已城郢, 今又重言. 拠左氏昭二十三年城郢, 二十四年無重城郢之文, 是史記誤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