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 卷四一. 越王句踐世家[范蠡]
卷四一. 越王句踐世家[范蠡]
范蠡1)事越王句践, 既苦身戮力, 與句践深謀二十余年, 竟滅呉, 報会稽之恥, 北渡兵於淮以臨斉、晉, 号令中国, 以尊周室, 句践以霸, 而范蠡称上将軍. 還反国, 范蠡以為大名之下, 難以久居, 且句践為人可與同患, 難與処安, 為書辞句践曰:「臣聞主憂臣勞, 主辱臣死. 昔者君王辱於会稽, 所以不死, 為此事也. 今既以雪恥, 臣請従会稽之誅.」句践曰:「孤将與子分国而有之. 不然, 将加誅于子.」范蠡曰:「君行令, 臣行意.」乃装其軽宝珠玉, 自與其私徒属乗舟浮海以行, 終不反. 於是句践表会稽山以為范蠡奉邑.2)
범려는 월왕 구천을 보필하는 데에 고생을 겪으며 힘써 노력하고, 20여 년간 계획을 세워 마침내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회계산에서의 치욕을 갚게 되었다. 이후 북쪽으로 출병해 회하를 건너, 제나라와 진(晉)나라를 압박해 중원(中原) 여러 나라에 명령을 발하게 되었으며, 주나라 왕실을 잘 받들었다. 구천은 패왕이 되었으며, 범려는 상장군이 되었다. 월나라로 돌아와서, 범려는 너무 커진 자신의 명성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여겼다. 게다가 구천의 사람됨이 어려울 때는 같이할 수 있어도, 편안할 때는 함께 하기 어렵다고 여겨, 사직서를 써서 구천에게 말하기를 “신이 듣건대, 국왕이 심려하시면 신하는 고생을 아끼지 말아야 하고, 국왕이 모욕을 당하시면 신하는 죽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전에 왕께서 회계에서 모욕을 당하셨는데, 제가 죽지 않았던 것은 복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제 그 치욕도 설욕했으니, 저는 회계의 모욕에 대한 죄를 받겠습니다.”라 했다.
구천은 말하기를 “나는 월나라를 둘로 나누어 그대에게 주려 하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그대를 벌하겠소.”라 했다. 범려는 말하기를 “군주는 자신의 명령을 집행하고, 신하는 자기의 희망을 실행할 뿐입니다.”라고 하고, 가벼운 보물을 간단히 챙겨 집안 식솔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가서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이에 구천은 회계산에 표시를 해 범려의 봉읍지로 삼았다.
范蠡浮海出斉, 変姓名, 自謂鴟夷子皮,3) 耕于海畔, 苦身戮力, 父子治産. 居無幾何, 致産數十萬. 斉人聞其賢, 以為相. 范蠡喟然嘆曰:「居家則致千金, 居官則至卿相, 此布衣之極也. 久受尊名, 不祥.」乃帰相印, 尽散其財, 以分與知友郷党, 而懐其重宝, 閒行以去, 止于陶,4) 以為此天下之中, 交易有無之路通, 為生可以致富矣. 於是自謂陶朱公. 复約要父子耕畜, 廃居, 候時転物, 逐什一之利. 居無何, 則致貲累巨萬.5) 天下称陶朱公.
범려는 배를 타고 나아가 제나라에 도착해 성과 이름을 바꾸고 스스로 ‘치이자피(鴟夷子皮)’라고 칭했다. 그는 해변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고생을 하며 온 힘을 다해, 아들과 함께 생산에 노력했다. 오래되지 않아서 곧 재산이 수십만 금(金)에 달하게 되었다. 제나라 사람들이 그가 현명하다는 것을 듣고서 그를 상국(相國)으로 삼았다. 범려는 탄식하며 말하기를 “집에서는 천금의 재산을 이루고, 벼슬살이로는 상국에까지 이르렀으니, 보통 사람으로서는 정점까지 간 것이다. 존귀한 이름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는 것은 불길한 것이다.”라 했다. 곧 그는 상국의 인장을 돌려주고, 재산을 갈라 친구와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귀중한 보물만 챙겨서 몰래 빠져나갔다.
도(陶)에 이르러 생각하니 그곳은 천하의 중심이므로 교역을 하면 각지와 통해서 재산을 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스스로 ‘도주공(陶朱公)’이라고 칭하고, 아들과 함께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며, 물건을 사서 쌓아놓았다가 시기를 기다려 되팔아 1할의 이윤을 남겼다. 그는 오래되지 않아 엄청난 재산을 모았고, 세상 사람들은 도주공을 찬양했다.
朱公居陶, 生少子. 少子及壮, 而朱公中男殺人, 囚於楚. 朱公曰:「殺人而死, 職也. 然吾聞千金之子不死於市.」告其少子往視之. 乃装黄金千溢, 置褐器中, 載以一牛車. 且遣其少子, 朱公長男固請欲行, 朱公不聴. 長男曰:「家有長子曰家督, 今弟有罪, 大人不遣, 乃遺少弟, 是吾不肖.」欲自殺. 其母為言曰:「今遣少子, 未必能生中子也, 而先空亡長男, 柰何?」朱公不得已而遣長子, 為一封書遺故所善荘生.6) 曰:「至則進千金于荘生所, 聴其所為, 慎無與争事.」長男既行, 亦自私齎數百金.
주공(朱公), 즉 범려는 도 땅에 살면서, 막내아들을 낳았다. 이 막내가 청년이 될 무렵, 둘째 아들이 사람을 죽여 초 나라에 갇혔다. 주공은 말하기를 “살인했으면, 죽어 마땅하다. 그러나 듣자하니, 재력가의 아들은 처형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한다.”라고 하고, 막내아들을 시켜 살피게 했다. 그리고 황금 1천일(鎰)을 가져가게 했는데, 그것은 헝겊 자루에 넣어 한 대의 마차에 실었다. 막내아들을 막 보내려고 하는데, 큰아들이 자신이 가겠다고 하자 주공은 이를 승낙하지 않았다.
큰아들은 말하기를 “집안에 장남이 있어 집안일을 살피므로 그를 ‘가독(家督)’이라 부릅니다. 지금, 동생이 죄를 지었는데, 아버님께서 저를 보내지 않고 막내를 보내는 것은 제가 현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하고 자결하려 했다. 그의 어머니도 말하기를 “지금 막내를 보내 둘째 애를 반드시 살려낼지 알 수 없는 일인데, 그보다 먼저 큰애를 잃게 생겼으니 어떻게 하면 좋지요?”라 했다. 주공은 할 수 없이 장남을 보냈는데, 편지 한 통을 써서 오랜 친구인 장선생(莊先生)에게 건네주게 하면서 말하기를 “그곳에 도착하면, 장선생 댁에 이 황금 천 일을 갖다드려라. 그가 하는 대로 따르되, 절대 논쟁하지 말아라.”라 했다. 장남은 떠날 때, 자신도 수백 금의 황금을 따로 챙겼다.
至楚, 荘生家負郭, 披藜藋到門, 居甚貧. 然長男発書進千金, 如其父言. 荘生曰:「可疾去矣, 慎毋留! 即弟出, 勿問所以然.」長男既去, 不過荘生而私留, 以其私齎献遺楚国貴人用事者.
초 나라에 도착하니, 장선생 집은 외성 벽에 붙어 있었는데, 명아주풀숲을 헤치고서 겨우 문 앞에 당도해 보니, 거처가 매우 빈한했다. 장남은 아버지의 말씀대로 편지와 황금 천 일을 건네주었다. 장선생이 말하기를 “어서 빨리 떠나거라. 절대 머물러 있지 마라. 동생이 나오거든, 절대 그 까닭을 묻지 마라.”라고 하니, 장남은 떠나, 이후로 장선생을 방문하지 않고 몰래 머물렀다. 그는 자신이 따로 가져간 황금을 초 나라의 실력자에게 바쳤다.
荘生雖居窮閻, 然以廉直聞於国, 自楚王以下皆師尊之. 及朱公進金, 非有意受也, 欲以成事後复帰之以為信耳. 故金至, 謂其婦曰:「此朱公之金. 有如病不宿誡, 後复帰, 勿動.」而朱公長男不知其意, 以為殊無短長也.
장선생은 비록 빈민촌에서 살고 있을망정, 그의 청렴결백이 온 나라에 알려져, 왕 이하 모든 사람들이 그를 스승처럼 존경했다. 그는 주공이 보내온 황금을 가지고 싶어서 받은 것이 아니라, 일이 성사된 후에 돌려주고 신용을 나타내고 싶었다. 그래서 황금이 도착하자, 부인에게 말하기를 “이것은 주공의 것이오. 내가 병들어 죽어 미리 주공에게 건네주지 못하더라도, 당신은 잊지 말고 돌려주도록 하시오. 절대 손대지 마시오.”라 했다. 주공의 장남은 그의 속마음을 몰랐기에, 황금이 별다른 작용을 못한 것으로 짐작했다.
荘生閒時入見楚王, 言「某星宿某, 此則害於楚」. 楚王素信荘生, 曰:「今為柰何?」荘生曰:「独以徳為可以除之.」楚王曰:「生休矣, 寡人将行之.」王乃使使者封三銭之府.7) 楚貴人驚告朱公長男曰:「王且赦.」曰:「何以也?」曰:「毎王且赦, 常封三銭之府. 昨暮王使使封之.」8)朱公長男以為赦, 弟固當出也, 重千金虚棄荘生, 無所為也, 乃复見荘生. 荘生驚曰:「若不去邪?」長男曰:「固未也. 初為事弟, 弟今議自赦, 故辞生去.」荘生知其意欲复得其金, 曰:「若自入室取金.」長男即自入室取金持去, 独自歓幸.
장선생은 적당한 때 입궐해 왕을 알현하고 말하기를 “어떤 별이 모처로 움직였는데, 이는 나라에 불길한 것입니다.”라 했다. 왕은 평소 그를 신임했기에, “그럼 어찌하면 좋겠소?” 하고 물었다. 장선생은 대답하기를 “덕을 베푸셔야만 이를 없앨 수 있습니다.”라 했다. 왕이 말하기를 “그대는 조금 더 있어주오. 나는 그대가 시키는 대로 하리다.”라 했다. 이에 왕은 사자를 시켜 금, 은, 동의 세 창고를 봉쇄시켰다. 뇌물을 받은 그 실력자는 깜짝 놀라 주공의 장남에게 말하기를 “왕께서 대사면을 하실 것이오.”라고 하니, 장남은 “어떻게 그걸 아실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왕께서 매번 대사면을 할 때는 항상 그 세 창고를 봉쇄시켰소. 어제 밤에 왕께서 사자를 보내 봉쇄시키셨다고 하오.”라고 대답했다.
장남은 대사면이 있다면 동생은 당연히 나올 텐데, 장선생에게 보낸 황금은 별 의미도 없게 되어 아깝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장선생을 다시 찾아가니, 그는 깜짝 놀라며 말하기를 “아니, 자네는 아직도 안 떠났단 말인가?”라 했다. 장남이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저번에는 동생 일로 찾아뵈었는데, 지금 대사면이 의논되고 있다 하니 동생은 당연히 풀릴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직인사나 드리러 왔습니다.”라 했다. 장선생은 그가 황금을 다시 가져가고 싶어함을 알고 말하기를 “자네는 방으로 들어가 황금을 가져가게.”라고 하니, 장남은 곧장 들어가서 황금을 가지고 떠나면서 매우 기뻐했다.
荘生羞為児子所売, 乃入見楚王曰:「臣前言某星事, 王言欲以修徳報之. 今臣出, 道路皆言陶之富人朱公之子殺人囚楚, 其家多持金銭賂王左右, 故王非能恤楚国而赦, 乃以朱公子故也.」楚王大怒曰:「寡人雖不徳耳, 柰何以朱公之子故而施恵乎!」令論殺朱公子, 明日遂下赦令. 朱公長男竟持其弟喪帰.
장선생은 주공의 장남에게 배신당한 것이 수치로 느껴져, 이내 입궐해 왕을 알현하고 말하기를 “신이 저번에 별의 움직임에 대해 말씀 드리자, 왕께서는 덕을 베풀어 보답하고자 하셨습니다. 이제 제가 밖에서 듣자하니 오가는 사람들이 수군거리기를 도 땅의 부자 주공의 아들이 살인을 저질러 갇혔는데, 그 집에서 황금으로 왕의 측근을 매수했고, 이번 대사면도 백성을 아껴서가 아니라 주공의 아들을 위해서라고 한답니다.”라 했다. 왕은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내가 부덕하다 하더라도, 어찌 주공의 아들을 위해서 은혜를 베푼단 말이오!”라고 하고, 판결을 내려 둘째 아들을 처형시켰다. 그리고 그 다음날에서야 대사면령을 내리니, 주공의 장남은 동생의 시신을 지니고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至, 其母及邑人尽哀之, 唯朱公独笑, 曰:「吾固知必殺其弟也! 彼非不愛其弟, 顧有所不能忍者也. 是少與我倶, 見苦, 為生難, 故重棄財. 至如少弟者, 生而見我富, 乗堅駆良逐狡免,9) 豈知財所従來, 故軽棄之, 非所惜吝. 前日吾所為欲遣少子, 固為其能棄財故也. 而長者不能, 故卒以殺其弟, 事之理也, 無足悲者. 吾日夜固以望其喪之來也.」
도착한 후에, 어머니와 마을 사람들이 모두 슬퍼하는데, 주공만은 웃으면서 말하기를 “나는 큰애가 동생을 죽음에 이르게 할 줄 원래부터 알았다. 그가 동생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단지 아까워서 돈을 쓸 줄 모르기 때문이다. 큰애는 어려서부터 나와 함께 고생을 했고, 살기 위해서 고난을 겪었으므로, 함부로 돈을 쓰지 못한다. 막내는 태어나면서부터 내가 부유한 것을 보았고, 좋은 마차와 말을 타고 다니며 사냥이나 하고 다녔으니, 돈이 어떻게 생기는 줄 알기나 하겠느냐? 따라서 쉽게 돈을 쓰고, 아까워하지 않는다. 저번에 내가 막내를 보내려 했던 것은 그가 돈을 아까워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큰애는 그렇게 하지 못해서, 동생이 죽은 것이다. 이치가 이러하거늘, 슬퍼할 것 없다. 나는 밤낮으로 둘째 애의 시신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故范蠡三徙, 成名於天下, 非苟去而已, 所止必成名. 卒老死于陶, 故世傳曰陶朱公.10)
범려는 세 번이나 옮기고도 천하에 이름을 떨쳤다. 단지 떠나가기만 한 것이 아니라, 멈추는 곳에서는 반드시 이름을 떨쳤다. 범려가 마침내 도 땅에서 늙어 죽으니, 세상에서는 그를 ‘도주공’이라 했다.
太史公曰:禹之功大矣, 漸九川,11) 定九州, 至于今諸夏艾安. 及苗裔句践, 苦身焦思, 終滅彊呉, 北観兵中国, 以尊周室, 号称霸王.12) 句践可不謂賢哉! 蓋有禹之遺烈焉. 范蠡三遷皆有栄名, 名垂後世. 臣主若此, 欲毋顕得乎!
태사공은 말한다.
“우(禹)임금의 공로는 매우 크도다! 아홉 개의 하천을 소통시켜 아홉 개의 주(州)를 안정시키니, 오늘날까지 온 중국이 평안하구나.
그의 후예 구천(句踐)에 이르러 몸과 마음으로 고생하고 숙고해, 마침내 힘센 오나라를 물리치고, 북쪽으로 중원 지방까지 위세를 떨치며, 주 왕실을 받들어서 패왕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구천을 어찌 현명하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아마도 우임금이 남겨준 업적이 있었던 것 같다. 범려(范蠡)는 세 번 옮기고도, 모두 이름을 떨쳐,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임금과 신하가 이러하거늘 드러나지 않고자 해도 어찌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각주
1 集解太史公素王妙論曰:「蠡本南陽人.」列仙傳云:「蠡, 徐人.」 正義呉越春秋云:「蠡字少伯, 乃楚宛三戸人也.」越絶云:「在越為范蠡, 在斉為鴟夷子皮, 在陶為朱公.」又云:「居楚曰范伯. 謂大夫種曰:『三王則三皇之苗裔也, 五伯乃五帝之末世也. 天運暦紀, 千歳一至, 黄帝之元, 執辰破巳, 霸王之気, 見於地戸. 伍子胥以是挟弓矢干呉王.』於是要大夫種入呉. 此時馮同相與共戒之:『伍子胥在, 自余不能関其詞.』蠡曰:『呉越之邦同風共俗, 地戸之位非呉則越. 彼為彼, 我為我.』乃入越, 越王常與言, 尽日方去.」
2 索隠国語云「乃環会稽三百里以為范蠡之地」. 奉音扶用反.
3 索隠范蠡自謂也. 蓋以呉王殺子胥而盛以鴟夷, 今蠡自以有罪, 故為号也. 韋昭曰「鴟夷, 革嚢也」. 或曰生牛皮也.
4 集解徐広曰:「今之済陰定陶.」 正義括地志云:「陶山在済州平陰県東三十五里.」止此山之陽也, 今山南五里猶有朱公冢.
5 集解徐広曰:「萬萬也.」
6 索隠拠其時代, 非荘周也. 然験其行事, 非子休而誰能信任於楚王乎? 正義年表云周元王四年越滅呉范蠡遂去斉, 帰定陶, 後遺荘生金. 荘周與魏恵王、(周元王)[斉宣王]同時, 従周元王四年至斉宣王元年一百三十年, 此荘生非荘子.
7 集解国語曰:「周景王時将鋳大銭.」賈逵説云:「虞、夏、商、周金幣三等, 或赤, 或白, 或黄. 黄為上幣, 銅鉄為下幣.」韋昭曰:「銭者, 金幣之名, 所以貿買物, 通財用也.」単穆公云:「古者有母権子, 子権母而行, 然則三品之來, 古而然矣.」駰謂楚之三銭, 賈韋之説近之.
8 集解或曰:「王且赦, 常封三銭之府」者, 銭幣至重, 慮人或逆知有赦, 盗窃之, 所以封銭府, 備盗窃也. 漢霊帝時, 河内張成能候風角, 知将有赦, 教子殺人, 捕得七日赦出, 此其類也.
9 集解徐広曰:「狡, 一作『郊』.」
10 集解張華曰:「陶朱公冢在南郡華容県西, 樹碑云是越之范蠡也.」 正義盛弘之荊州記云:「荊州華容県西有陶朱公冢, 樹碑云是越范蠡. 范蠡本宛三戸人, 與文種倶入越, 呉亡後, 自適斉而終. 陶朱公登仙, 未聞葬此所由.」括地志云陶朱公冢也. 又云:「済州平陰県東三十里陶山南五里有陶公冢. 并止於陶山之陽.」按:葬処有二, 未詳其処.
11 集解徐広曰:「漸者亦引進通導之意也, 字或宜然.」
12 集解徐広曰:「一作『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