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歷史와文學/史記世家

史記 卷四二. 鄭世家[武公 · 莊公]

柳川 2019. 6. 23. 00:27

                                         卷四二. 鄭世家[武公]



武公十年, 娶申侯女1)為夫人, 曰武姜. 生太子寤生, 生之難, 及生, 夫人弗愛. 後生少子叔段, 段生易, 夫人愛之.2) 二十七年, 武公疾. 夫人請公, 欲立段為太子, 公弗聴. 是歳, 武公卒, 寤生立, 是為荘公.


정 무공 10년, 신후(申侯)의 딸을 맞아들여 부인으로 삼으니, 그녀가 곧 무강(武姜)이다. 무강은 태자 오생(寤生)을 낳을 때 난산이었기 때문에, 낳고 나서 그녀는 아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 후 무강은 숙단(叔段)을 낳았다. 숙단을 낳을 때에는 순산이었기 때문에, 낳은 후에 그 아기를 좋아했다.


27년, 무공이 병이 나자 부인은 무공에게 숙단을 태자로 옹립하자고 요구했으나 무공은 듣지 않았다. 이해에 무공이 세상을 떠나자 오생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곧 장공(莊公)이다.




각주
1 正義括地志云:「故申城在鄧州南陽県北三十里.」左傳云「鄭武公取於申也.」
2 集解徐広曰:「年表云十四年生寤生, 十七年生太叔段.」

 

 

 

 

荘公元年, 封弟段於京,1) 号太叔. 祭仲曰:「京大於国, 非所以封庶也.」荘公曰:「武姜欲之, 我弗敢奪也.」段至京, 繕治甲兵, 與其母武姜謀襲鄭. 二十二年, 段果襲鄭, 武姜為内應. 荘公発兵伐段, 段走. 伐京, 京人畔段, 段出走鄢.2) 鄢潰, 段出奔共.3) 於是荘公遷其母武姜於城潁,4) 誓言曰:「不至黄泉,5) 毋相見也.」居歳余, 已悔思母. 潁谷之考叔6)有献於公, 公賜食. 考叔曰:「臣有母, 請君食賜臣母.」荘公曰:「我甚思母, 悪負盟, 柰何?」考叔曰:「穿地至黄泉, 則相見矣.」於是遂従之, 見母.


장공 원년, 동생 단에게 경읍(京邑)을 봉지로 주고 태숙(太叔)이라고 칭했다. 제중(祭仲)이 “경읍은 수도보다 큽니다. 그러니 서출의 형제에게 주기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라고 아뢰자, 장공이 “무강께서 이렇게 하라고 하셨으니, 내가 감히 거역할 수가 없소.”라고 대답했다. 단은 경읍에 가서 무기를 정비하고 병사를 훈련시켜, 그의 어머니 무강과 정나라 수도를 습격하기로 비밀리에 계획했다.


22년, 과연 단이 수도를 습격하자, 무강이 성내에서 그를 맞이했다. 장공이 파병해 단을 토벌하자, 단은 도주했다. 장공이 또 경읍을 토벌하자, 경읍의 백성들은 단을 배반했다. 단은 또 언읍(鄢邑)으로 도주했다. 언읍의 백성들이 흩어지자, 단은 또 공(共)나라로 도망갔다. 그리하여 장공은 그의 어머니 무강을 성영(城穎)으로 내쫓으면서 맹서해 이르기를 “황천(黃泉)에 가기 전에는 다시 만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다. 1년여의 시간이 지나자 장공은 후회했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졌다. 영곡(穎谷)의 고숙(考叔)이 장공에게 예물을 바치자, 장공은 그에게 식사를 대접했다. 이에 고숙이 “저에게는 어머니가 계십니다. 대왕의 음식물을 저의 어머니께 상으로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간청하자, 장공이 “나도 어머니가 매우 보고 싶은데, 맹서를 지키지 못할까 두렵소. 그러니 어떻게 하면 좋겠소?”라고 물으니, 고숙이 “황천(黃泉)까지 땅을 파서, 그곳에서 만나면 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리하여 장공은 그와 같은 방법에 의해서 어머니를 만났다.



二十四年, 宋繆公卒, 公子馮奔鄭. 鄭侵周地, 取禾.7) 二十五年, 衛州吁弑其君桓公自立, 與宋伐鄭, 以馮故也. 二十七年, 始朝周桓王. 桓王怒其取禾, 弗礼也.8) 二十九年, 荘公怒周弗礼, 與魯易祊、許田.9) 三十三年, 宋殺孔父. 三十七年, 荘公不朝周, 周桓王率陳、蔡、虢、衛伐鄭. 荘公與祭仲、10)高渠弥11)発兵自救, 王師大敗. 祝聸12)射中王臂. 祝聸請従之, 鄭伯止之, 曰:「犯長且難之, 況敢陵天子乎?」乃止. 夜令祭仲問王疾.



24년, 송 목공(宋繆公)이 세상을 떠나자 왕자 풍(馮)이 정나라로 도피해 왔다. 정나라는 주 왕실의 직할지를 침범해 농작물을 훔쳐갔다.


25년, 위(衛)나라의 주우(州吁)가 그의 국왕 환공(桓公)을 살해하고 스스로 왕이 되어 송나라와 연합해 정나라를 공격했는데, 그것은 공자 풍이 정나라로 도망했기 때문이었다.


27년, 정 장공이 비로소 주 환왕(周桓王)을 조회했다. 환왕은 장공이 주나라 땅의 농작물을 훔쳐갔기 때문에 화를 냈으며, 예로써 그를 대우하지 않았다.


29년, 장공은 주 환공이 예로써 그를 접대하지 않음에 원한을 품고, 노(魯)나라와 멀지 않은 팽읍(祊邑)을 정나라에 붙어 있는 허전(許田)과 바꾸어버렸다.



33년, 송나라는 공보(孔父)를 살해했다.



37년, 장공이 주나라에 조회하지 않자, 주 환공이 진(陳), 채(蔡), 괵(虢), 위(衛) 나라의 군대를 이끌고 정나라를 토벌했다. 장공은 제중(祭仲), 고거미(高渠彌)와 함께 군대를 일으켜 방어하고, 주나라 왕실의 군대를 대파했다. 축첨(祝瞻)은 화살로 환공의 팔을 맞추었다. 축첨이 추격하기를 요청하자, 장공이 저지시키면서 “윗사람을 침범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물며 천자를 욕되게 해서 되겠느냐?”라고 말하면서, 그만두었다. 밤에 장공은 제중을 보내어 환공의 상처를 위문했다.



三十八年, 北戎伐斉, 斉使求救, 鄭遣太子忽将兵救斉. 斉釐公欲妻之, 忽謝曰:「我小国, 非斉敵也.」時祭仲與倶, 勧使取之, 曰:「君多内寵,13) 太子無大援将不立, 三公子皆君也.」所謂三公子者, 太子忽, 其弟突, 次弟子亹也.14)


38년, 북융(北戎)이 제나라를 공격했다. 제나라는 사자를 보내 정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자, 정나라는 태자 홀(忽)을 파견해 제나라를 구했다. 제 희공(齊釐公), 즉 희공(僖公)은 공주를 태자 홀에게 시집보내려고 했다.


태자 홀은 사양해 말하기를 “저희 나라는 작은 나라여서 제나라와 친척이 될 수 없습니다.”라 했다.


이때 제중이 함께 있었는데, 태자에게 제 희공의 공주와 결혼할 것을 권하면서 “우리 국왕은 여러 명의 총희(寵姬)가 있습니다. 태자께서는 큰 나라의 원조가 없으면 도저히 국왕의 자리에 오르기 어렵습니다. 지금이라도 세 명의 공자가 모두 국왕이 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세 명의 공자는 태자 홀(忽), 그의 아우 돌(突), 그 다음 동생 미(亹)를 말한다.


四十三年, 鄭荘公卒. 初, 祭仲甚有寵於荘公, 荘公使為卿;公使娶鄧女, 生太子忽, 故祭仲立之, 是為昭公.


43년, 정 장공이 세상을 떠났다. 처음에 제중이 장공의 신임을 얻자, 장공은 그를 경(卿)에 임명했다. 장공은 제중을 등(鄧)나라에 보내 등 나라의 여자를 데려와 결혼했다. 그리하여 태자 홀을 낳았으므로 제중은 태자 홀을 옹립했는데, 그가 곧 소공(昭公)이다.


荘公又娶宋雍氏女,15) 生厲公突. 雍氏有寵於宋.16) 宋荘公聞祭仲之立忽, 乃使人誘召祭仲而執之, 曰:「不立突, 将死.」亦執突以求賂焉. 祭仲許宋, 與宋盟. 以突帰, 立之. 昭公忽聞祭仲以宋要立其弟突, 九月(辛)[丁]亥, 忽出奔衛. 己亥, 突至鄭, 立, 是為厲公.


장공이 또 송나라에서 옹씨(雍氏)의 여자와 결혼해, 여공(厲公) 돌(突)을 낳았다. 옹씨는 송나라 왕의 총애를 받았다. 송 장공(宋莊公)은 제중이 태자 홀을 옹립한다는 소식을 듣고, 곧 사람을 보내 제중을 속여 납치하고 그를 억압해 말하기를 “만약 왕자 돌을 옹립하지 않으면 죽이겠다.”라 했다.



동시에 왕자 돌을 체포하고 그의 재물을 취했다. 제중이 송 장공의 요구를 받아들여 송나라와 동맹을 맺었다. 그는 왕자 돌을 데리고 정나라로 돌아와 그를 왕으로 옹립했다. 소공 홀은 제중이 송 장공의 강요에 의해서 그의 동생 돌을 옹립했다는 소식을 듣고, 9월 정해일(丁亥日)에 위(衛)나라로 도망했다. 기해일(己亥日)에 왕자 돌이 정나라의 수도로 돌아와 왕의 자리에 오르니, 그가 곧 여공(厲公)이다.




각주
1 集解賈逵曰:「京, 鄭都邑.」杜預曰:「今滎陽京県.」
2 正義鄔音烏古反. 今新鄭県南鄔頭有村, 多萬家. 旧作「鄢」, 音偃. 杜預云:「鄢, 今鄢陵也.」
3 集解賈逵曰:「共, 国名也.」杜預曰:「今汲郡共県也.」 正義按:今衛州共城県是也.
4 集解賈逵曰:「鄭地.」 正義疑許州臨潁県是也.
5 集解服虔曰:「天玄地黄, 泉在地中, 故言黄泉.」
6 集解賈逵曰:「潁谷, 鄭地.」 正義括地志云:「潁水源出洛州嵩高県東南三十里陽乾山, 今俗名潁山泉. 源出山之東谷. 其側有古人居処, 俗名為潁墟, 故老云是潁考叔故居, 即酈元注水経所謂潁谷也.」
7 索隠隠二年左傳「鄭武公、荘公為平王卿士. 王弐于虢, 及王崩, 周人将畀虢公政. 夏四月, 鄭祭足帥師取温之麦, 秋又取成周之禾」是.
8 索隠杜預曰:「桓王即位, 周鄭交悪, 至是始朝, 故言始也.」左傳又曰:「周桓公言於王曰『我周之東遷, 晉鄭焉依. 善鄭以勧來者, 猶懼不蔇, 況不礼焉, 鄭不來矣』.」
9 索隠許田, 近許之田, 魯朝宿之邑. 祊者, 鄭所受助祭太山之湯沐邑. 鄭以天子不能巡守, 故以祊易許田, 各従其近.
10 索隠左傳祭仲足, 蓋祭是邑, 其人名仲字仲足, 故傳云祭封人仲足是也. 此繻葛之戦在魯桓公五年.
11 索隠一作「弥」, 一作「眯」, 並名卑反.
12 索隠左傳作「祝聃」.
13 集解服虔曰:「言庶子有寵者多.」
14 索隠此文則數太子忽及突、子亹為三, 而杜預云不數太子, 以子突、子亹、子儀為三, 蓋得之.
15 集解賈逵曰:「雍氏, 黄帝之孫, 姞姓之後, 為宋大夫.」
16 集解服虔曰:「為宋正卿, 故曰有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