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歷史와文學/史記世家

史記 卷四二. 鄭世家[聲公 ~]

柳川 2019. 6. 23. 00:47

                                        卷四二. 鄭世家[聲公 ~]

 

 

 

声公五年, 鄭相子産卒,1) 鄭人皆哭泣, 悲之如亡親戚. 子産者, 鄭成公少子也. 為人仁愛人, 事君忠厚. 孔子嘗過鄭, 與子産如兄弟云. 及聞子産死, 孔子為泣曰:「古之遺愛也!」2)

 

 

성공 5년, 정나라의 재상 자산이 세상을 떠나자, 정나라 백성들은 모두 통곡했고, 마치 친척이 죽은 것처럼 비통해 했다. 자산은 정 성공(鄭成公)의 작은아들이었다. 그는 인자했고 백성을 사랑했다. 또 충성심과 진실로 국왕을 모셨다. 공자(孔子)가 일찍이 정나라를 지난 적이 있었는데, 자산과 형제처럼 친하게 지냈다. 공자는 자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그는 고인(古人)의 유풍(遺風)을 이어 내려와 백성을 사랑했던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八年, 晉范、中行氏反晉, 告急於鄭, 鄭救之. 晉伐鄭, 敗鄭軍於鉄.3)

 

 

8년, 진(晉)나라의 범씨(范氏)와 중항씨(中行氏)가 진나라 왕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정나라에 위급함을 알리자, 정나라는 그들을 구원했다. 진(晉)나라가 정나라를 공격해 철구(鐵丘)에서 정나라 군대를 대파했다.

 

 

 

十四年, 宋景公滅曹. 二十年, 斉田常弑其君簡公, 而常相於斉. 二十二年, 楚恵王滅陳. 孔子卒.

 

 

14년, 송 경공(宋景公)이 조(曹)나라를 멸망시켰다.

 

 

20년, 제나라의 전상(田常)이 그의 국왕 간공(簡公)을 살해하고, 제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22년, 초 혜왕(楚惠王)이 진(陳)나라를 멸망시켰다. 공자(孔子)가 세상을 떠났다.

 

 

 

三十六年, 晉知伯伐鄭, 取九邑.

 

 

36년, 진(晉)나라의 지백(知伯)이 정나라를 공격해, 9개의 성(城)을 탈취했다.

 

 

 

三十七年, 声公卒, 子哀公易立.4) 哀公八年, 鄭人弑哀公而立声公弟丑, 是為共公. 共公三年, 三晉滅知伯. 三十一年, 共公卒, 子幽公已立. 幽公元年, 韓武子伐鄭, 殺幽公. 鄭人立幽公弟駘, 是為繻公.5)

 

 

37년, 정 성공이 세상을 떠나자, 아들 애공(哀公) 희역(姬易)이 왕위에 올랐다.

 

 

애공 8년, 정나라 사람이 애공을 살해하고 성공의 동생 희축(姬丑)을 옹립하니, 그가 곧 공공(共公)이다.

 

 

공공 3년, 삼진(三晉)이 지백을 멸망시켰다.

 

 

31년, 공공이 세상을 떠나자, 아들 유공(幽公) 희이(姬已)가 왕위에 올랐다.

 

 

유공 원년, 한 무자(韓武子)가 정나라를 공격해, 유공을 살해했다. 정나라 사람들이 유공의 동생 희태(姬駘)를 옹립하니, 이가 곧 수공(繻公)이다.

 

 

 

繻公十五年, 韓景侯伐鄭, 取雍丘. 鄭城京.

 

 

수공 15년, 한 경후(韓景侯)가 정나라를 공격해, 옹구(雍丘)를 탈취했다. 정나라는 경읍(京邑)에 성을 쌓았다.

 

 

 

十六年, 鄭伐韓, 敗韓兵於負黍.6) 二十年, 韓、趙、魏列為諸侯. 二十三年, 鄭囲韓之陽翟.

 

 

16년, 정나라가 한(韓)나라를 공격해, 부서(負黍)에서 한나라 군대를 대파했다.

 

 

20년, 한, 위, 조 삼가가 제후의 열위(列位)에 올랐다.

 

 

23년, 정나라가 한나라의 양책(陽翟)을 포위하며 공격했다.

 

 

 

二十五年, 鄭君殺其相子陽. 二十七, 子陽之党共弑繻公駘而立幽公弟乙為君, 是為鄭君.7)

 

 

25년, 정 수공이 그의 재상 자양(子陽)을 살해했다.

 

 

27년, 자양의 무리들이 공동으로 수공 희태를 살해하고, 유공의 동생 희을(姬乙)을 옹립하니, 그가 곧 정군(鄭君)이다.

 

 

 

鄭君乙立二年, 鄭負黍反, 复帰韓. 十一年, 韓伐鄭, 取陽城.

 

 

정군 희을이 왕위에 오른 지 2년째 되는 해에, 정나라의 부서 지역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한(韓)나라에 귀속했다.

 

 

11년, 한나라가 정나라를 공격해, 양성(陽城)을 탈취했다.

 

 

 

二十一年, 韓哀侯滅鄭, 并其国.

 

 

21년, 한 애후(韓哀侯)가 정나라를 멸망시키고, 영토를 병합했다.

 

 

 

 

太史公曰:語有之, 「以権利合者, 権利尽而交疏」, 甫瑕是也. 甫瑕雖以劫殺鄭子内厲公, 厲公終背而殺之, 此與晉之里克何異? 守節如荀息, 身死而不能存奚斉. 変所従來, 亦多故矣!

 

 

태사공은 말한다.

 

“속담에 ‘권력에 의지해서 이익을 도모하면, 권세와 재물은 없어지고 서로의 관계도 멀어진다.’라는 말이 있다.

보하(甫瑕)가 곧 이와 같았다. 보하는 비록 정자(鄭子)를 살해하고 정 여공(鄭厲公)을 다시 옹립했지만, 여공도 끝내는 맹서를 저버리고 그를 살해했다. 이것은 진(晉)나라의 이극(里克)과 다른 점이 어디 있는가? 순식(荀息)처럼 절개를 지켜 자신을 희생했지만, 해제(奚齊)를 보전하지 못하기도 하는 것이다. 변란이 발생하는 것은 여러 가지 원인이 있기 때문이리라!”

 

 

각주

1 正義括地志云:「子産墓在新鄭県西南三十五里. 酈元注水経云『子産墓在潩水上, 累石為方墳, 墳東北向鄭城, 杜預云言不忘本』.」

2 集解賈逵曰:「愛, 恵也.」杜預曰:「子産見愛, 有古人遺風也.」

3 集解杜預曰:「戚城南鉄丘.」 正義括地志云:「鉄丘在滑州衛南県東南十五里.」

4 集解年表云三十八年.

5 集解年表云鄭立幽公子駘繻. 或作「繚」.

6 集解徐広曰:「在陽城.」 正義括地志云:「負黍亭在洛州陽城県西南三十五里, 故周邑也.」

7 集解徐広曰:「一本云『立幽公弟乙陽為君, 是為康公』. 六国年表云立幽公子駘, 又以鄭君陽為鄭康公乙. 班固云『鄭康公乙為韓所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