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 卷四三. 趙世家[献侯]
卷四三. 趙世家[献侯 · 烈侯] 献侯少即位, 治中牟.1)
헌후는 어린 나이에 즉위해 치소(治所)를 중모(中牟)에 설치했다.
襄子弟桓子2)逐献侯, 自立於代, 一年卒. 国人曰桓子立非襄子意, 乃共殺其子而复迎立献侯.
양자의 동생 환자(桓子)가 헌후를 내쫓고 대(代) 땅에서 스스로 자리에 올랐으나 1년 만에 죽었다. 백성들은 환자가 즉위한 것은 양자의 뜻이 아니라고 하며 다 함께 환자의 아들을 죽이고 다시 헌후를 맞이해 즉위하게 했다.
十年, 中山武公初立.3) 十三年, 城平邑.4) 十五年, 献侯卒, 子烈侯籍立.
헌후 10년, 중산국(中山國)의 무공(武公)이 처음으로 즉위했다. 13년, 평읍(平邑)에 성을 쌓았다. 15년, 헌후가 죽자 그의 아들인 열후(烈侯) 조적(趙籍)이 즉위했다.
각주 1 集解地理志曰河南中牟県, 趙献侯自耿徙此. 瓚曰:「中牟在春秋之時是鄭之疆内也, 及三卿分晉, 則在魏之邦土也. 趙界自漳水以北, 不及此. 春秋傳曰『衛侯如晉過中牟』, 按中牟非衛適晉之次也. 汲郡古文曰『斉師伐趙東鄙, 囲中牟』, 此中牟不在趙之東也. 按中牟當漯水之北.」 索隠此趙中牟在河北, 非鄭之中牟. 正義按:五鹿在魏州元城県東十二里, 鄴即相州蕩陰県西五十八里, 有牟山, 蓋中牟邑在此山側也. 2 索隠系本云襄子子桓子, 與此不同. 3 集解徐広曰:「西周桓公之子. 桓公者, 孝王弟而定王子.」 索隠按:中山, 古鮮虞国, 姫姓也. 系本云中山武公居顧, 桓公徙霊寿, 為趙武霊王所滅, 不言誰之子孫. 徐広云西周桓公之子, 亦無所拠, 蓋未能得其実耳. 4 集解地理志曰代郡有平邑県. |
烈侯元年, 魏文侯伐中山, 使太子撃守之. 六年, 魏、韓、趙皆相立為諸侯, 追尊献子為献侯.
열후 원년, 위 문후(魏文侯)가 중산국을 함락시키고 태자 격(擊)을 파견해 지키도록 했다. 6년, 위씨, 한씨, 조씨가 모두 서로 제후가 되고 조씨는 헌자(獻子)를 헌후(獻侯)로 추존했다.
烈侯好音, 謂相国公仲連曰:「寡人有愛, 可以貴之乎?」公仲曰:「富之可, 貴之則否.」烈侯曰:「然. 夫鄭歌者槍、石二人,1) 吾賜之田, 人萬畝.」公仲曰:「諾.」不與. 居一月, 烈侯従代來, 問歌者田. 公仲曰:「求, 未有可者.」有頃, 烈侯复問. 公仲終不與, 乃称疾不朝. 番吾君2)自代來, 謂公仲曰:「君実好善, 而未知所持. 今公仲相趙, 於今四年, 亦有進士乎?」公仲曰:「未也.」番吾君曰:「牛畜、荀欣、徐越皆可.」公仲乃進三人. 及朝, 烈侯复問:「歌者田何如?」公仲曰:「方使択其善者.」牛畜侍烈侯以仁義, 約以王道, 烈侯逌然.3) 明日, 荀欣侍, 以選練挙賢, 任官使能. 明日, 徐越侍, 以節財倹用, 察度功徳. 所與無不充, 君説. 烈侯使使謂相国曰:「歌者之田且止.」官牛畜為師, 荀欣為中尉, 徐越為内史,4) 賜相国衣二襲.5)
열후는 음악을 좋아해 재상 공중련(公仲連)에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에게 존귀한 지위를 주어도 될까?” 하고 묻자, 공중련이 “부유하게 해주는 것은 괜찮지만 존귀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안 됩니다.”라 했다. 열후가 “옳은 말이오. 정나라 가수 창(槍)과 석(石) 두 사람에게 나는 전지(田地) 각 만 무(畝)씩을 하사하겠소.”라 했다. 공중련은 “좋습니다.”라고 대답만 하고서는 주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나 열후가 대(代) 땅에서 돌아와 공중련에게 가수에게 전지를 하사하기로 한 일에 대해서 물었다. 공중련은 “마땅한 곳을 물색하고 있는데 적합한 곳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얼마 지나서 열후가 다시 물었다. 끝내 주지 않았던 공중련은 병을 핑계대며 조회에 나오지 않았다.
파오군(番吾君)이 대(代) 땅에서부터 와서 공중련에게 “그대는 진실로 선정을 베푸시려는 마음이 있으시기는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을 모르고 계십니다. 지금 공중련 그대가 조나라 재상의 지위에 있은 지 4년이나 되었는데 일찍이 인재를 추천한 적이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공중련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파오군이 “우축(牛畜), 순흔(荀欣), 서월(徐越)은 모두 추천할 만합니다.”라고 해 공중련은 이 세 사람을 추천했다. 공중련이 조정에 나가자, 열후가 다시 “가수의 전지는 어떻게 되었는가?”라고 물었다. 공중련이 “마침 좋은 곳을 고르게 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우축은 열후를 모시면서 인의(仁義)의 도리를 충고하고 왕도(王道)로써 제약하기를 권유하니 열후는 흔쾌히 동의했다. 다음날 순흔이 열후를 모시면서 뛰어나고 현명한 인재를 등용하고 관리로 임명할 때도 재능 있는 사람을 쓸 것을 건의했다. 그 다음날, 서월이 열후를 모시면서 재물을 절약하고 씀씀이를 절제하며 신하들의 공적과 덕행을 살펴 헤아릴 것을 건의했다. 그들이 건의한 말은 충분한 일리가 있어 열후는 매우 기뻐했다. 열후는 사람을 재상에게 보내 “가수에게 전지를 하사하는 일은 잠시 중단하라.”라 했다. 그리고는 우축을 사(師)에, 순흔을 중위(中尉)에, 서월을 내사(內史)에 임명하고, 재상에게 옷 두 벌을 하사했다.
九年, 烈侯卒, 弟武公立.6) 武公十三年卒, 趙复立烈侯太子章, 是為敬侯. 是歳, 魏文侯卒.
9년, 열후가 죽자 동생 무공(武公)이 즉위했다. 무공이 재위 13년 만에 죽자, 조나라는 다시 열후의 태자 장(章)을 즉위시키니 그가 바로 경후(敬侯)이다. 이해에 위문후(魏文侯)가 죽었다.
각주 1 索隠槍, 七羊反. 槍與石二人名. 2 集解徐広曰:「番音盤. 常山有番吾県.」 正義括地志云:「番吾故城在恆州房山県東二十里.」番蒲古今音異耳. 3 正義逌音由, 古字與「攸」同. 言牛畜以仁義約以王道, 故止歌者田. 攸攸, 気行貌, 寛緩也. 4 正義漢書百官公卿表云:「(少府)内史, 周官, 秦因之, 掌治京師.」 5 集解単複具為一襲. 6 索隠譙周云:「系本及説趙語者並無其事, 蓋別有所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