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歷史와文學/史記世家

史記 卷四三. 趙世家[肅侯 · 武霊王]

柳川 2019. 6. 23. 11:18

                                卷四三. 趙世家[肅侯 · 武霊王]

 

 

 

粛侯元年, 奪晉君端氏, 徙処屯留.1) 二年, 與魏恵王遇於陰晉.2) 三年, 公子范襲邯鄲, 不勝而死. 四年, 朝天子. 六年, 攻斉, 抜高唐. 七年, 公子刻攻魏首垣.3) 十一年, 秦孝公使商君伐魏, 虜其将公子卬. 趙伐魏. 十二年, 秦孝公卒, 商君死. 十五年, 起寿陵.4) 魏恵王卒.

 

 

숙후 원년, 진군(晉君)의 단씨현을 빼앗고 그를 둔류(屯留)로 이주시켰다. 2년, 위 혜왕과 음진(陰晉)에서 만났다. 3년, 공자 조범(趙范)이 한단을 습격했다가 이기지 못하고 전사했다. 4년, 주(周) 천자를 조현(朝見)했다. 6년, 제나라를 공격해 고당(高唐)을 빼앗았다. 7년, 공자 조각(趙刻)이 위(魏)나라의 수원(首垣)을 공격했다. 11년, 진 효공(秦孝公)이 상군(商君)을 시켜 위(魏)나라를 정벌하게 해 장군인 공자 앙(卬)을 포로로 잡았다. 조나라가 위(魏)나라를 공격했다. 12년, 진 효공이 세상을 떠나고 상군도 죽었다. 15년, 수릉(壽陵)을 축조했다. 위 혜왕이 죽었다.

 

 

十六年, 粛侯游大陵,5) 出於鹿門,6) 大戊午扣馬7)曰:「耕事方急, 一日不作, 百日不食.」粛侯下車謝.

 

 

16년, 숙후가 대릉(大陵)을 유람하고 녹문(鹿門)을 나섰다. 대무오(大戊午)가 말고삐를 잡고서 “지금은 농사 일이 급한 때입니다. 하루 일을 하지 않으면 백일 동안 먹을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자, 숙후는 말에서 내려 사죄했다.

 

 

十七年, 囲魏黄, 不克.8) 築長城.9)

 

 

17년, 위(魏)나라의 황성(黃城)을 포위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장성(長城)을 쌓았다.

 

十八年, 斉、魏伐我, 我決河水潅之, 兵去. 二十二年, 張儀相秦. 趙疵與秦戦, 敗, 秦殺疵河西, 取我藺、離石. 二十三年, 韓挙10)與斉、魏戦, 死于桑丘.11)

 

18년, 제나라와 위(魏)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하자, 조나라는 황하의 물을 끌어대어 적들에게 부어대니 적병은 도망갔다. 22년, 장의(張儀)가 진(秦)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조자(趙疵)가 진(秦)나라와 싸워 패하니 진나라 군사는 하서(河西)에서 조자를 죽이고 조나라의 인(藺)과 이석(離石) 지방을 빼앗았다. 23년, 한거(韓擧)가 제나라, 위(魏)나라와 싸우다 상구(桑丘)에서 전사했다.

 

二十四年, 粛侯卒. 秦、楚、燕、斉、魏出鋭師各萬人來会葬. 子武霊王立.12)

 

 

24년, 숙후가 죽었다. 진(秦), 초(楚), 연(燕), 제(齊), 위(魏) 각 나라가 정예 병사 만 명씩을 보내 장례에 참석했다. 아들 무령왕(武靈王)이 즉위했다.

 

 

각주

1 正義括地志云:「屯留故城在潞州長子県東北三十里, 本漢屯留県城也.」

2 正義地理志云華陰県, 魏之陰晉, 秦恵文王更名寧秦, 高帝更名華陰. 今属華州.

3 正義蓋在河北也.

4 正義徐広云:「在常山.」

5 集解徐広曰:「太原有大陵県, 亦曰陸.」 正義括地志云:「大陵城在并州文水県北十三里, 漢大陵県城.」

6 正義并州盂県西有白鹿泓, 源出白鹿山南渚, 蓋鹿門在北山水之側也.

7 集解呂忱曰:「扣, 牽馬.」

8 集解地理志曰山陽有黄県. 正義黄城在魏州, 前抜之, 卻為魏, 今趙囲之矣.

9 正義劉伯荘云「蓋従雲中以北至代」. 按:趙長城従蔚州北西至嵐州北, 尽趙界. 又疑此長城在(潭)[漳]水之北, 趙南界.

10 集解徐広曰:「韓将.」

11 集解地理志云泰山有桑丘県. 正義括地志云:「桑丘城在易州遂城県界.」或云在泰山, 非也. 此時斉伐燕桑丘, 三晉皆來救之, 不得在泰山(有)[之]桑丘県, 此説甚誤也.

12 索隠名雍.

 

 

 

 

武霊王元年,1) 陽文君趙豹相. 梁襄王與太子嗣, 韓宣王與太子倉來朝信宮.2) 武霊王少, 未能聴政, 博聞師三人, 左右司過三人. 及聴政, 先問先王貴臣肥義, 加其秩;国三老年八十, 月致其礼.

 

 

무령왕 원년, 양문군(陽文君) 조표(趙豹)가 재상이 되었다. 양 양왕(梁襄王)과 태자 사(嗣), 그리고 한 선왕(韓宣王)과 태자 창(倉)이 신궁(信宮)에 와서 조하(朝賀)했다. 무령왕이 어려서 정무를 처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박식한 관리 세 사람과 좌우 사과(司過) 세 사람이 보좌했다.

 

 

정무를 처리하게 되었을 때에 먼저 선왕 때의 현신(賢臣)인 비의(肥義)에게 가르침을 구하고 그의 봉록을 높여주었으며, 나라 안의 80세 이상 되는 덕망 높은 노인에게 매월 선물을 보냈다.

 

 

三年, 城鄗. 四年, 與韓会于区鼠.3) 五年, 娶韓女為夫人.

 

 

3년, 호(鄗)에 성을 건축했다. 4년, 한나라와 우서(區鼠)에서 회합했다. 5년, 한나라 여자를 부인으로 맞이했다.

 

 

八年, 韓撃秦, 不勝而去. 五国相王, 趙独否, 曰:「無其実, 敢処其名乎!」令国人謂已曰「君」.

 

 

8년, 한나라가 진(秦)나라를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다섯 나라가 서로 ‘왕(王)’을 칭했으나, 조나라만은 그렇게 하지 않으며 “실질적인 알맹이도 없으면서 어찌 허황된 명분에 안주하겠는가?”라고 말하고서는 나라 사람들에게 자기를 ‘군(君)’이라고 부르도록 명령했다.

 

 

九年, 與韓、魏共撃秦, 秦敗我, 斬首八萬級. 斉敗我観沢.4) 十年, 秦取我中都及西陽.5) 斉破燕. 燕相子之為君, 君反為臣. 十一年, 王召公子職於韓, 立以為燕王,6) 使樂池送之.7) 十三年, 秦抜我藺, 虜将軍趙荘.8) 楚、魏王來, 過邯鄲. 十四年, 趙何攻魏.

 

 

9년, 한나라, 위(魏)나라와 더불어 진(秦)나라를 공격했으나 진나라는 세 나라의 연합군을 무찌르고 8만 명의 목을 베어갔다. 제나라가 관택(觀澤)에서 조나라를 무찔렀다. 10년, 진(秦)나라가 조나라의 중도(中都)와 서양(西陽)을 빼앗았다. 제나라가 연나라를 무찔렀다. 연나라 재상 자지(子之)가 군주가 되고 군주는 반대로 신하가 되었다. 11년, 무령왕이 공자(公子) 직(職)을 한나라에서 불러들여 연왕(燕王)으로 세우고 악지(樂池)를 시켜 호위하게 했다. 13년, 진(秦)나라가 조나라의 인(藺) 지방을 함락시키고 장군 조장(趙莊)을 포로로 잡아갔다. 초 나라와 위(魏)나라의 왕이 한단을 방문했다. 14년, 조하(趙何)가 위(魏)나라를 공격했다.

 

 

十六年, 秦恵王卒. 王遊大陵. 他日, 王夢見処女鼓琴而歌詩曰:「美人熒熒兮, 顔若苕之栄.9) 命乎命乎, 曾無我嬴!」10)異日, 王飲酒樂, 數言所夢, 想見其状. 呉広聞之, 因夫人而内其女娃嬴.11) 孟姚也.12) 孟姚甚有寵於王, 是為恵后.

 

 

16년, 진 혜왕(秦惠王)이 죽었다. 무령왕이 대릉(大陵)을 유람했다. 어느 날 왕이 꿈속에서 처녀가 거문고를 타며 시 한 수를 노래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 내용은 “미인이여! 광채가 눈부시도다. 그 모습 농염한 능소화(凌霄花) 같아라. 운명이여! 내 가련한 운명이여, 뜻밖에 이 왜영(娃嬴)을 몰라주다니.”라는 것이었다. 다른 날 왕이 술을 마시며 즐기다가 몇 번이나 꿈 이야기를 하며 꿈에 보았던 미인의 용모를 상상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오광(吳廣)이 부인을 통해 그의 딸 왜영을 궁중에 들여보냈는데, 이가 바로 맹요(孟姚)이다. 맹요는 왕의 총애를 듬뿍 받았으니 그녀가 바로 혜후(惠后)이다.

 

 

十七年, 王出九門,13) 為野台,14) 以望斉、中山之境.

 

 

17년, 왕이 구문(九門)을 나와 조망대를 만들어 제나라와 중산국의 경내를 살피었다.

 

 

十八年, 秦武王與孟説挙竜文赤鼎, 絶臏15)而死. 趙王使代相趙固迎公子稷於燕, 送帰, 立為秦王, 是為昭王.

 

 

18년, 진 무왕(秦武王)이 맹열(孟說)과 용 무늬의 적색 정(鼎)을 들다가 정강이뼈가 부러져 죽었다. 무령왕은 대(代)의 재상 조고(趙固)를 시켜 공자 직(稷)을 연나라에서 영접해 진(秦)나라로 호송하고 진왕(秦王)으로 세우니, 그가 바로 소왕(昭王)이다.

 

 

十九年春正月, 大朝信宮. 召肥義與議天下, 五日而畢. 王北略中山之地, 至於房子,16) 遂之代, 北至無窮, 西至河, 登黄華之上.17) 召樓緩謀曰:「我先王因世之変, 以長南藩之地, 属阻漳、滏之険, 立長城, 又取藺、郭狼, 敗林人18)於荏, 而功未遂. 今中山在我腹心, 北有燕,19) 東有胡,20) 西有林胡、樓煩、秦、韓之邊,21) 而無彊兵之救, 是亡社稷, 柰何? 夫有高世之名, 必有遺俗之累. 吾欲胡服.」樓緩曰:「善.」群臣皆不欲.

 

 

19년 봄 정월, 신궁(信宮)에서 성대한 조회를 개최했다. 비의(肥義)를 불러 천하 대사를 의논했는데 5일 후에야 끝마쳤다. 왕은 북쪽으로 중산국의 영토를 공략하고 방자(房子) 지역에 이르러 대(代) 땅으로 갔으며, 북상해 무궁(無窮)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황하에 이르러 황화산(黃華山) 꼭대기에 올랐다. 누완(樓緩)을 불러 의논하기를 “나의 선왕은 세사의 변화에 따라 남방 속국의 우두머리를 하시고 장수(漳水)와 부수(滏水)의 험난한 지세를 연결해 장성을 쌓으셨으며, 인(藺)과 곽랑(郭狼)을 탈취하시고 임(荏)에서 임호(林胡)를 무찌르셨으나 대업은 아직 완수하지 못했다.

 

 

지금 중산국은 우리나라의 중심 부분에 위치하고 있고, 북쪽으로는 연나라, 동쪽으로는 동호(東胡), 서쪽으로는 임호, 누번(樓煩), 진(秦)나라, 한나라의 국경과 접하고 있지만, 강력한 병력의 보호가 없어 이러다가는 사직이 망하게 되었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무릇 세상에서 뛰어난 업적을 이루려면 세상의 습속(習俗)을 위배했다는 책망을 받기 마련이니, 나는 호복(胡服)을 입고자 한다.”라고 하자, 누완은 “좋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대신들은 모두 이를 원하지 않았다.

 

 

於是肥義侍, 王曰:「簡、襄主之烈, 計胡、翟之利. 為人臣者, 寵有孝弟長幼順明之節, 通有補民益主之業,22) 此両者臣之分也. 今吾欲継襄主之跡, 開於胡、翟之郷, 而卒世不見也.23) 為敵弱,24) 用力少而功多, 可以毋尽百姓之勞, 而序往古之勳.25) 夫有高世之功者, 負遺俗之累;26)有独智之慮者, 任驁民之怨.27) 今吾将胡服騎射以教百姓, 而世必議寡人, 柰何?」肥義曰:「臣聞疑事無功, 疑行無名. 王既定負遺俗之慮, 殆無顧天下之議矣. 夫論至徳者不和於俗, 成大功者不謀於衆. 昔者舜舞有苗, 禹袒裸国, 非以養欲而樂志也, 務以論徳而約功也. 愚者闇成事, 智者睹未形, 則王何疑焉.」王曰:「吾不疑胡服也, 吾恐天下笑我也. 狂夫之樂, 智者哀焉;愚者所笑, 賢者察焉. 世有順我者, 胡服之功未可知也. 雖駆世以笑我, 胡地中山吾必有之.」於是遂胡服矣.

 

 

이때 비의가 왕을 모시고 있었는데, 왕이 “간자와 양자 두 주군의 업적은 호(胡)와 적(狄)에 대해 이로움을 꾀한 데 있소. 신하된 자로서, 총애를 받을 때에는 효제(孝悌)하고 장유(長幼)를 알며 명리(明理)에 순종하는 절조가 있어야 하고, 현달했을 때에는 백성을 돕고 군주에게 이롭게 하는 업적이 있어야 하니, 이 두 가지가 신하의 본분이오. 이제 나는 양자의 업적을 계승해 호와 적의 영토를 개척하려고 하는데, 죽을 때까지 그러한 현신(賢臣)을 만나지 못할 것 같소. (내가 호복을 입는 것은) 적을 약하게 해 힘은 적게 들이고 공을 많이 얻을 수 있는 효과가 있으니, 백성들을 고달프게 하지 않고서도 순리적으로 간자와 양자 두 선왕의 업적을 계승할 수 있을 것이오. 무릇 세상에서 뛰어난 업적을 이루려면 세상의 습속을 위배했다는 책망을 받기 마련이며, 심오한 지략(智略)을 지니고 있는 자는 오만한 백성들의 원망을 사기 마련이오. 이제 나는 앞으로 백성들에게 호복의 착용과 말 타고 활 쏘는 것을 가르치려고 하는데, 세상에서는 틀림없이 과인에 대해 의론이 분분할 것이니 어찌하면 좋겠소?”라 했다.

 

 

 

그러자 비의가 “신이 듣기에 일을 하려고 할 때 머뭇거리면 성공하지 못하고 행동할 때에 주저하면 명예를 얻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왕께서 기왕 세상의 습속을 위배했다는 비난을 감수하시려고 결심하셨으니 세상 사람들의 의론은 생각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무릇 최고의 덕행을 추구하는 자는 세속적인 것에 부화뇌동하지 않으며, 큰 공적을 이루고자 하는 자는 범부(凡夫)와 모의하지 않는 법입니다. 옛날 순임금은 묘인(苗人)의 춤을 추어 그들을 감화시켰고 우임금은 나국(裸國)에서 옷을 벗었는데, 이는 욕망을 만족시키고 마음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덕정을 선양해 공적을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일이 이미 성사된 뒤에도 그 연유를 모르지만 현명한 자는 일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파악할 수 있는 것이거늘 왕께서는 무엇을 주저하고 계십니까?”라 했다.

 

왕이 “나는 호복을 입는 것을 주저하는 것이 아니고 천하 사람들이 나를 비웃지나 않을까 그것이 두렵소. 무지한 자의 즐거움은 현명한 자의 슬픔이며, 어리석은 자가 비웃은 일은 어진 자가 통찰하고 있는 일이오. 세상에서 나를 따르는 자가 호복의 효능을 이루 다 짐작할 수가 없을 것이니, 설사 세상 사람들이 이 일로 나를 비웃는다고 할지라도 오랑캐 땅과 중산국은 내가 꼭 차지할 것이오.”라 했다. 이때부터 왕은 마침내 호복을 입었다.

 

 

使王告公子成曰:「寡人胡服, 将以朝也, 亦欲叔服之. 家聴於親而国聴於君, 古今之公行也. 子不反親, 臣不逆君, 兄弟之通義也.28) 今寡人作教易服而叔不服, 吾恐天下議之也. 制国有常, 利民為本;従政有経, 令行為上. 明徳先論於賎, 而行政先信於貴. 今胡服之意, 非以養欲而樂志也;事有所止而功有所出,29) 事成功立, 然后善也. 今寡人恐叔之逆従政之経, 以輔叔之議. 且寡人聞之, 事利国者行無邪, 因貴戚者名不累, 故願慕公叔之義, 以成胡服之功. 使謁之叔,30) 請服焉.」公子成再拝稽首曰:「臣固聞王之胡服也. 臣不佞, 寝疾, 未能趨走以滋進也. 王命之, 臣敢対, 因竭其愚忠. 曰:臣聞中国者, 蓋聡明徇智之所居也,31) 萬物財用之所聚也, 賢聖之所教也, 仁義之所施也, 詩書礼樂之所用也, 異敏技能之所試也, 遠方之所観赴也, 蛮夷之所義行也. 今王舎此而襲遠方之服, 変古之教, 易古人道, 逆人之心, 而怫学者, 離中国, 故臣願王図之也.」使者以報. 王曰:「吾固聞叔之疾也, 我将自往請之.」

 

 

왕은 왕설(王緤)을 파견해 공자(公子) 성(成)에게 “과인이 호복을 입고 조회에 참석할 것이니 숙부께서도 입으시기 바라오. 집 안에서는 부모의 말씀에 따라야 하고 나라 안에서는 군주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것이 고금의 공인된 행동원칙이오. 아들은 부모에게 반대해서는 안 되고 신하는 군주를 거역해서는 안 되는 것이 상하간의 통념이오. 지금 과인이 교지(敎旨)를 내려 복장을 바꾸어 입게 했는데 숙부께서 입지 않으시면, 천하 사람들이 비난할까 두렵소. 나라를 다스리는 데 상도(常道)가 있으니 백성을 이롭게 함이 그 근본이며, 정치에 참여하는 데 원칙이 있으니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오. 덕정(德政)을 펴려면 먼저 평민 백성들을 이해시켜야 하며, 정령(政令)을 시행하려면 먼저 귀족들에게서 신임을 얻어야 하오.

 

 

지금 호복을 입는 목적은 욕망을 만족시키고 마음을 즐겁게 하려는 것이 아니오. 일을 하는 데에는 목적한 바에 도달해야 공적이 이루어지며, 일이 완성되어 공적을 이룬 후에야 비로소 완벽한 것이라고 할 수 있소. 지금 과인은 숙부께서 정치참여의 원칙에 어긋나게 행동해 세상의 비난을 자초할까 두렵소. 아울러 과인이 듣기에 국익에 관련된 일은 행함에 사악함이 없고, 귀척(貴戚)에 의지하면 명예에 손상을 입지 않는다고 하니, 나는 숙부의 위엄과 명망을 빌려서 호복의 위업을 달성하고자 하오. 왕설을 시켜 숙부를 뵙도록 하오니 호복을 입어주시오.”라 했다.

 

 

공자 성이 재배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신은 본래 이미 왕께서 호복을 입으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신은 재주도 없고 병들어 누워 있는 몸이라 조정에 나가 자주 진언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왕께서 저에게 명령하시니 신이 감히 이에 응대함으로써 저의 우매한 충정을 다하고자 합니다. 신이 듣건대 중국은 총명하고 예지 있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이고, 만물과 재화가 모이는 곳이며, 성현이 교화를 행한 곳이고, 인의가 베풀어진 곳이며, 『시(詩)』, 『서(書)』와 예악(禮樂)이 쓰이는 곳이고, 특이하고 우수한 기능이 시험되는 곳이며, 먼 곳의 사람들이 관람하러 오는 곳이고, 만이(蠻夷)가 모범으로 삼는 곳이라고 합니다.

 

 

지금 왕께서는 이를 버리시고 먼 나라의 복장을 입으시니 이것은 고대의 교화를 개변함이요, 고대의 도를 바꿈이며, 민심을 거스르는 것이고, 학자의 가르침을 저버리는 것이며, 중국의 풍속과는 동떨어진 것이니, 신은 왕께서 이 일을 신중히 고려하시기를 바랍니다.”라 했다. 사자가 이 말을 왕에게 보고하자, 왕은 “내가 원래 숙부께서 병이 드셨다고 들었는데 친히 가서 부탁드려야겠다.”라 했다.

 

 

王遂往之公子成家, 因自請之, 曰:「夫服者, 所以便用也;礼者, 所以便事也. 聖人観郷而順宜, 因事而制礼, 所以利其民而厚其国也. 夫翦髪文身, 錯臂左衽,32) 甌越之民也.33) 黒歯雕題,34) 卻冠秫絀,35) 大呉之国也. 故礼服莫同, 其便一也. 郷異而用変, 事異而礼易. 是以聖人果可以利其国, 不一其用;果可以便其事, 不同其礼. 儒者一師而俗異, 中国同礼而教離, 況於山谷之便乎? 故去就之変, 智者不能一;遠近之服, 賢聖不能同. 窮郷多異, 曲学多辯. 不知而不疑, 異於己而不非者, 公焉而衆求尽善也. 今叔之所言者俗也, 吾所言者所以制俗也. 吾国東有河、薄洛之水,36) 與斉、中山同之,37) 無舟楫之用. 自常山以至代、上党,38) 東有燕、東胡之境, 而西有樓煩、秦、韓之邊, 今無騎射之備. 故寡人無舟楫之用, 夾水居之民, 将何以守河、薄洛之水;変服騎射, 以備燕、三胡、39)秦、韓之邊. 且昔者簡主不塞晉陽以及上党, 而襄主并戎取代以攘諸胡, 此愚智所明也. 先時中山負斉之彊兵, 侵暴吾地, 係累40)吾民, 引水囲鄗, 微社稷之神霊, 則鄗幾於不守也. 先王醜之, 而怨未能報也. 今騎射之備, 近可以便上党之形, 而遠可以報中山之怨. 而叔順中国之俗以逆簡、襄之意, 悪変服之名以忘鄗事之醜, 非寡人之所望也.」公字成再拝稽首曰:「臣愚, 不達於王之義, 敢道世俗之聞, 臣之罪也. 今王将継簡、襄之意以順先王之志, 臣敢不聴命乎!」再拝稽首. 乃賜胡服. 明日, 服而朝. 於是始出胡服令也.

 

 

왕은 이윽고 공자 성의 집에 친히 찾아가 다음과 같이 부탁했다.

 

 

“무릇 의복이란 입기에 편리하기 위한 것이고 예의란 일을 도모하는 데 편리하기 위한 것입니다. 성인은 지방의 풍속을 관찰해 그에 적합하게 행동하고,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서 예의를 제정하니 이는 국민에게 이익을 가져다주고 국가를 부강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몸에 문신을 하고 팔에 무늬를 아로새기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것은 구월(甌越) 일대 백성들의 습관입니다. 이를 검게 물들이고 이마에 무늬를 새기고 어피(魚皮)로 만든 모자를 쓰고 조악하게 만들어진 옷을 입는 것은 오(吳)나라의 풍습입니다. 그러므로 예법이나 복장은 같지 않으나 편리함을 추구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지방이 다르기 때문에 사용함에 변화가 있고 일이 다르기 때문에 예법도 바뀌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인은 진실로 나라에 이익이 된다면 그 방법을 일치시킬 필요가 없으며, 정말로 일하는데 편리하다면 그 예법을 동일하게 할 필요는 없다고 여겼습니다.

 

 

유자(儒者)는 동일한 스승에게서 전수받지만 예속(禮俗)은 천차만별이며, 중국에도 예의는 동일하나 교화가 서로 차별이 있는데, 하물며 산간벽지의 편리함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시세에 따른 취사선택의 변화에서는 총명한 사람도 억지로 일치함을 요구할 수 없고, 먼 곳과 가까운 곳의 의복에 대해는 성인도 일치됨을 강요할 수 없습니다. 궁벽한 벽촌은 다른 풍속이 많으며 천박한 견해에는 궤변이 많은 법입니다. 알지 못하면서도 의심을 품지 않고 자기 의견과 달라도 비난하지 않는 것은, 공개적으로 널리 중지를 모아 완벽함을 추구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숙부께서 말씀하신 것은 일반적인 풍습이고 제가 말하는 것은 풍속을 조성하는 이치입니다.

 

 

우리나라는 동쪽으로 황하와 장수(漳水)가 있어 제나라, 중산국과 공유하고 있으나 선박 시설이 없습니다. 상산(常山)에서부터 대(代), 상당(上黨)에 이르기까지 동쪽으로는 연나라, 동호(東胡)와의 변경이 있고 서쪽으로는 누번, 진(秦)나라, 한나라와의 변경이 있거늘, 지금 기병(騎兵)과 사수(射手)의 방비가 없습니다. 따라서 과인은 선박 시설도 없는데 물가에 사는 주민들이 장차 어떻게 황하와 장수를 지킬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복장을 바꾸고 말 타기와 활 쏘기를 배워 연나라 삼호(三胡), 진(秦)나라, 한나라의 변경을 지키자는 것입니다. 하물며 예전에 간자께서는 진양에서부터 상당에 이르는 요충지를 두절하지 않으셨고, 양자께서는 융(戎)을 병합하고 대(代)를 점거해 오랑캐 각 부족을 물리치셨으니 이는 어리석은 자나 총명한 자나 모두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과거에 중산국이 제나라의 강력한 병력을 믿고 우리 땅을 침범해 짓밟았으며, 우리 백성을 약탈하고 물을 끌어대어 호성(鄗城)을 포위했는데, 만약 사직의 신령이 보우하지 않았더라면 호성은 거의 지키지 못했을 것입니다. 선왕께서는 이를 수치스럽게 여기셨으나, 이 원한은 아직 보복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기병과 사수로써 방비하면 가까이는 상당의 지형을 손쉽게 관찰할 수 있고 멀리는 중산국의 원한을 갚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숙부께서는 풍속에 순종하느라 간자, 양자 두 분의 유지를 어기고 있으니 복장을 개변했다는 평판을 싫어해 호성의 수치를 망각하는 것은 과인이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그러자 공자 성은 재배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신이 어리석어 왕의 깊은 뜻을 모르고 감히 세속의 견문을 아뢰었으니 이는 신의 잘못입니다. 지금 왕께서 간자, 양자의 유지를 계승하고 선왕의 뜻에 따른다고 하시니 신이 감히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며 다시 재배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왕은 이에 호복을 하사했다. 다음날 공자 성이 호복을 입고 조회에 나가니 그제에서야 호복을 입으라는 명령을 공포했다.

 

 

趙文、趙造、周秘、41)趙俊皆諫止王毋胡服, 如故法便. 王曰:「先王不同俗, 何古之法? 帝王不相襲, 何礼之循? 虙戯、神農教而不誅, 黄帝、尭、舜誅而不怒. 及至三王, 随時制法, 因事制礼. 法度制令各順其宜, 衣服器械各便其用. 故礼也不必一道, 而便国不必古. 聖人之興也不相襲而王, 夏、殷之衰也不易礼而滅. 然則反古未可非, 而循礼未足多也. 且服奇者志淫, 則是鄒、魯無奇行也;42)俗辟者民易, 則是呉、越無秀士也.43) 且聖人利身謂之服, 便事謂之礼. 夫進退之節, 衣服之制者, 所以斉常民也, 非所以論賢者也. 故斉民與俗流, 賢者與変倶. 故諺曰『以書御者不尽馬之情, 以古制今者不達事之変』. 循法之功, 不足以高世;法古之学, 不足以制今. 子不及也.」遂胡服招騎射.

 

 

조문(趙文), 조조(趙造), 주소(周祒), 조준(趙俊)은 모두 왕에게 호복을 입지 말고 옛날 방식이 편하다고 간언하며 말렸다. 그러자 왕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선왕들의 풍속이 같지 않은데 어떤 옛 방식을 본받을 것인가? 제왕들이 서로 답습하지 않는데 어떤 예법을 따를 것인가? 복희(伏羲)와 신농(神農)은 교화에 치중하고 형벌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황제(黃帝)와 요(堯), 순(舜)은 형벌을 사용하되 잔혹하지 않았소. 삼왕(三王)에 이르러서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법규를 제정했으며 실제 상황에 따라 예법을 규정했소. 법령과 제도가 각각 실제 필요에 부합되었고, 의복과 기계는 각각 그 쓰임에 편리했소. 그러므로 예법 또한 꼭 한 가지 방식일 필요가 없고 국가의 편의를 추구하는 데 반드시 옛 것을 본받아야 할 필요는 없소. 성인이 나타나자 서로 답습하지 않았는데도 왕이 되었으며, 하나라와 은나라가 쇠약해지자 예법을 바꾸지 않았는데도 멸망했소. 그렇다면 옛 것을 위반했다고 해서 비난할 수는 없으며, 옛날의 예법을 따랐다고 해서 찬양할 것도 없소.

 

 

만약 기이한 의복을 입는 자는 마음이 음탕하다고 한다면 추(鄒)나라와 노(魯)나라에는 기행(奇行)이 없을 것이며, 풍속이 바르지 못한 곳에서는 백성이 경솔해진다면 오나라, 월나라에는 덕과 재능을 겸비한 인재가 없을 것이오. 하물며 성인께서는 신체에 편리한 것을 의복이라고 하셨고, 일할 때에는 편리한 것을 예법이라고 하셨소. 무릇 진퇴(進退)의 예절과 의복의 제도는 일반 백성을 다스리기 위한 것이지, 현자(賢者)를 논평하기 위한 것이 아니오. 그러므로 평민은 세속과 어울리고 현인은 변혁과 함께 하는 것이오. 옛 속담에 “책 속의 지식으로 말을 모는 자는 말의 속성을 다 이해할 수 없고, 옛날 법도로 지금을 다스리는 자는 사리의 변화에 통달할 수 없다.”라고 했으니, 옛날 법도만을 따라가지고는 세속을 초월하기 어렵고, 옛날 학문만을 본받아가지고는 지금을 다스리기 어려운 것이오. 그대들은 이런 점에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것이오.”

 

 

마침내 호복을 보급하고 기병과 사수를 모집했다.

 

 

二十年, 王略中山地, 至寧葭;44)西略胡地, 至楡中.45) 林胡王献馬. 帰, 使樓緩之秦, 仇液之韓, 王賁之楚, 富丁之魏, 趙爵之斉. 代相趙固主胡, 致其兵.

 

 

20년, 왕은 중산국의 영토를 공략해 영가(寧葭)에 이르렀고, 서쪽으로는 호(胡) 땅을 침략해 유중(楡中)에 이르렀다. 임호(林胡)의 왕은 말을 헌상했다. 돌아와서 누완(樓緩)을 진(秦)나라에, 구액(仇液)을 초 나라에, 부정(富丁)을 위(魏)나라에, 조작(趙爵)을 제나라에 각각 사신으로 보냈다. 대(代) 땅의 재상 조고(趙固)가 호(胡) 땅에 주둔해 관리하며 호병(胡兵)을 모집했다.

 

 

二十一年, 攻中山. 趙秘為右軍, 許鈞為左軍, 公子章為中軍, 王并将之. 牛翦将車騎, 趙希并将胡、代. 趙與之陘,46) 合軍曲陽,47) 攻取丹丘、48)華陽、49)鴟之塞.50) 王軍取鄗、石邑、51)封竜、52)東垣. 中山献四邑和, 王許之, 罷兵. 二十三年, 攻中山. 二十五年, 恵后卒.53) 使周秘胡服傅王子何. 二十六年, 复攻中山, 攘地北至燕、代, 西至雲中、九原.

 

 

21년, 중산국을 공격했다. 조소가 우군(右軍)을 거느리고 허균(許鈞)이 좌군(左軍)을 거느리며, 공자 장(章)이 중군(中軍)을 거느리고, 왕이 그들을 통괄해 지휘했다. 우전(牛翦)이 전차와 기병을 이끌고, 조희(趙希)는 호와 대의 병사를 통괄해 거느렸다. 조희는 여러 군사와 더불어 골짜기를 지나 곡양(曲陽)에서 합류해 단구(丹丘), 화양(華陽), 그리고 치(鴟)의 요새를 공격해 점령했다. 무령왕의 군대는 호(鄗), 석읍(石邑), 봉룡(封龍), 동원(東垣) 등지를 점령했다. 중산국이 4개의 성읍을 바치며 강화하기를 원하자, 왕은 이를 허락하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23년, 다시 중산국을 공격했다. 25년, 혜후(惠后)가 죽었다. 주소로 하여금 호복을 입고 왕자 조하(趙何)를 훈도하게 했다. 26년, 다시 중산국을 공격했다. 이로써 탈취한 땅이 북쪽으로는 연(燕)과 대(代)에까지 이르고, 서쪽으로는 운중(雲中)과 구원(九原)에까지 이르렀다.

 

 

二十七年五月戊申, 大朝於東宮, 傳国, 立王子何以為王. 王廟見礼畢, 出臨朝. 大夫悉為臣, 肥義為相国, 并傅王. 是為恵文王. 恵文王, 恵后呉娃子也. 武霊王自号為主父.

 

 

27년 5월 무신일(戊申日), 동궁에서 성대한 조회를 거행하고 무령왕은 왕자 하(何)에게 왕위를 물려주어 그를 왕으로 세웠다. 새 왕은 묘현(廟見)의 예를 마치고 조정에 들어 정사를 처리했다. 대부들은 모두 신하로서 복종하고, 비의는 재상이 되었으며 아울러 새 왕의 사부가 되었다. 그가 바로 혜문왕(惠文王)이다. 혜문왕은 혜후 오왜(吳娃)의 아들이다. 무령왕은 주부(主父)로 자칭했다.

 

 

각주

1 集解徐広曰:「年表云魏敗我趙護.」

2 正義在洺州臨洺県也.

3 正義蓋在河北.

4 正義括地志云:「観沢故城在魏州頓丘県東十八里也.」

5 集解徐広曰:「年表云『秦取中都、西陽、安邑. 十一年, 秦敗我将軍英』. 太原有中都県, 西河有中陽県.」

6 集解徐広曰:「紀年亦云爾.」

7 集解按燕世家, 子之死後, 燕人共立太子平, 是為燕昭王, 無趙送公子職為燕王之事, 當是趙聞燕亂, 遥立職為燕王, 雖使樂池送之, 竟不能就. 索隠燕系家無其事, 蓋是疏也. 今此云「使樂池送之」, 必是憑旧史為説. 且紀年之書, 其説又同, 則裴駰之解得其旨矣.

8 正義本一作「芘」, 音疋婢反.

9 集解綦毋邃曰:「陵苕之草其華紫.」 正義苕音条. 毛詩疏云:「苕, 饒也. 幽州謂之翹饒. 蔓似■豆而細, 葉似蒺■而青, 其華細綠色, 可生食, 味如小豆藿也.」又本草経云:「陵苕生下溼水中, 七八月生, 華紫, 草可以染帛, 煮沐頭, 髪即黒也.」

10 集解綦毋邃曰:「言有命祿, 生遇其時, 人莫知己貴盛盈満也.」 正義按:命, 名也. 嬴, 姓嬴也. 言世衆名其美好, 曾無我好嬴也. 重言「名乎」者, 以談説衆也.

11 集解方言曰:「娃, 美也. 呉有館娃之宮.」

12 集解徐広曰;「古史考云内其女曰娃.」 索隠孟姚, 呉広女也. 広, 舜之後, 故上文云「余思虞舜之勳, 故命其冑女孟姚以配而七代之孫」是已. 然舜後封虞, 在河東大陽山西上虞城是, 亦曰呉城. 虞呉音相近, 故舜後亦姓呉, 非独太伯、虞仲之裔.

13 集解徐広曰:「在常山.」 正義本戦国時趙邑. 戦国策云:「本有宮室而居, 趙武霊王改為九門.」

14 集解徐広曰:「野, 一作『望』.」 正義括地志云:「野台一名義台, 在定州新樂県西南六十三里.」

15 集解徐広曰:「一作『絶瞑』. 音亡丁反.」

16 正義趙州県也.

17 正義黄華蓋西河側之山名也.

18 正義即林胡也.

19 正義地理志云趙分晉, 北有信都、中山, 又得涿郡之高陽、鄚州郷;東有清河、河閒, 又得渤海郡東平舒等七県. 在河以北, 故言「北有燕」.

20 正義趙東有瀛州之東北. 営州之境即東胡、烏丸之地. 服虔云:「東胡, 烏丸之先, 後為鮮卑也.」

21 正義林胡、樓煩即嵐、勝之北也. 嵐、勝以南石州、離石、藺等, 七国時趙邊邑也. 秦隔河也. 晉、洺、潞、沢等州皆七国時韓地, 為並趙西境也.

22 正義寵, 貴寵也. 通, 達理也. 凡為人臣, 有孝弟長幼順明之節制者, 得貴寵也;有補民益主之功業者, 為達理也.

23 正義卒, 子律反, 尽也. 言尽世閒不見補民益主之忠臣也.

24 正義我為胡服, 敵人必困弱也.

25 正義厚, 重也. 往古謂趙簡子、襄子也.

26 正義負, 留也. 言古周公、孔子留衣冠礼義之俗, 今変為胡服, 是負留風俗之譴累也.

27 正義言世有独計智之思慮者, 必任隠逸敖慢之民怨望也.

28 集解徐広曰:「兄弟, 一作『元夷』. 元, 始也;夷, 平也.」

29 正義鄭玄云:「止, 至也. 為人君止於仁, 為人臣止於敬, 為人子止於孝, 為人父止於慈, 與国人交止於信.」按:出猶成也.

30 索隠為句.

31 集解徐広曰:「五帝本紀云幼而徇斉.」

32 索隠錯臂亦文身, 謂以丹青錯畫其臂. 孔衍作「右臂左衽」, 謂右袒其臂也.

33 索隠劉氏云:「今珠崖、儋耳謂之甌人, 是有甌越.」 正義按:属南越, 故言甌越也. 輿地志云「交阯, 周時為駱越, 秦時曰西甌, 文身断髪避竜」. 則西甌駱又在番吾之西. 南越及甌駱皆羋姓也. 世本云「越, 羋姓也, 與楚同祖」是也.

34 集解劉逵曰:「以草染歯, 用白作黒.」鄭玄曰:「雕文謂刻其肌, 以青丹涅之.」

35 集解徐広曰:「戦国策作『秫縫』, 絀亦縫紩之別名也. 秫者, 綦鍼也. 古字多仮借, 故作『秫絀』耳. 此蓋言其女功鍼縷之麤拙也. 又一本作『鮭冠黎■』也.」

36 集解徐広曰:「安平経県西有漳水, 津名薄洛津.」 正義按:安平県属定州也.

37 正義爾時斉與中山相親, 中山、趙共薄洛水, 故言「與斉、中山同之」, 須有舟楫之備.

38 集解徐広曰:「一云『自常山以下, 代、上党以東』.」

39 索隠林胡, 樓煩, 東胡, 是三胡也.

40 正義上音計, 下力追反.

41 集解徐広曰:「戦国策作『紹』. 秘音紹.」

42 索隠按:鄒、魯好長纓, 是奇服, 非其志皆淫僻也, 而有孔門顔、冉之属, 豈是無奇行哉!

43 索隠言方俗僻処山谷, 而人皆改易不通大化, 則是呉、越無秀士, 何得有延州來及大夫種之属哉!

44 索隠一作「蔓葭」, 県名, 在中山.

45 正義勝州北河北岸也.

46 集解徐広曰:「一作『陸』, 又作『陘』. 或宜言『趙與之陘』. 陘者山絶之名. 常山有井陘, 中山有苦陘, 上党有閼與.」 正義與音與. 陘音荊. 陘, 陘山也, 在并州陘県東南十八里. 然趙希并将代、趙之兵, 與諸軍向井陘之側, 共出定州上曲陽県, 合軍攻取丹丘、華陽、鴟上之関.

47 集解徐広曰:「上曲陽在常山, 下曲陽在鉅鹿.」 正義括地志云:「上曲陽故城在定州曲陽県西五里.」按:合軍曲陽, 即上曲陽也, 以在常山郡也.

48 正義蓋邢州丹丘県也.

49 集解徐広曰:「華, 一作『爽』.」 正義括地志云:「北岳有五別名, 一曰蘭台府, 二曰列女宮, 三曰華陽台, 四曰紫台, 五曰太一宮.」按:北岳恆山在定州恆陽県北百四十里.

50 集解徐広曰:「鴟, 一作『鴻』.」 正義上昌之反, 下先代反. 徐広曰「鴟, 一作『鴻』」, 鴻上故関今名汝城, 在定州唐県東北六十里, 本晉鴻上関城也. 又有鴻上水, 源出唐県北葛洪山, 接北岳恆山, 與鴻上塞皆在定州. 然一本作「鳴」字, 誤也.

51 集解徐広曰:「在常山.」 正義括地志云:「石邑故城在恆州鹿泉県南三十五里, 六国時旧邑.」

52 正義括地志云:「封竜山一名飛竜山, 在恆州鹿泉県南四十五里. 邑因山為名.」

53 索隠按:謂武霊王之前后, 太子章之母, 恵文王之嫡母也. 恵后卒後, 呉娃始當正室, 至孝成二年称「恵文后卒」是也. 而下文又云「孟姚卒後, 何寵衰, 欲并立」, 亦誤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