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歷史와文學/史記世家

史記 卷四六. 田敬仲完世家[襄王 · 建]

柳川 2019. 6. 23. 12:41

                                    卷四六. 田敬仲完世家[襄王 · 建]



襄王既立, 立太史氏女為王后, 是為君王后, 生子建. 太史■曰:「女不取媒因自嫁, 非吾種也, 汚吾世.」終身不睹君王后. 君王后賢, 不以不睹故失人子之礼.

 

양왕이 즉위한 뒤에 태사의 여식을 왕후로 삼으니, 그가 바로 군 왕후(君王后)로 그녀는 아들 건(建)을 낳았다. 태사 교가 말하기를 “여식이 중매인도 없이 스스로 시집을 갔으니, 내 자식도 아니다. 우리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라고 하고, 평생토록 군 왕후를 보지 않았다. 군 왕후는 어진 여인이라, 이로 인해 자식의 예를 벗어난 적이 없다.

 

襄王在莒五年, 田単以即墨攻破燕軍, 迎襄王於莒, 入臨菑. 斉故地尽复属斉. 斉封田単為安平君.1)

 

 

양왕이 거 나라에서 산 지 5년이 되었을 때, 전단(田單)이 즉묵(卽墨)의 군대를 근거지로 해 연나라 군을 격파했고, 거 나라에서 양왕을 맞이해 임치로 들어갔다. 제나라의 옛 땅은 모두 다시금 제나라에 귀속 되었다. 제나라는 전단을 안평군(安平君)으로 삼았다.

 

十四年, 秦撃我剛寿. 十九年, 襄王卒, 子建立.

 

14년에는 진(秦)나라가 제나라의 강(剛)과 수(壽)를 공격했다. 19년에는 양왕이 죽고, 아들 건(建)이 즉위했다.

 

王建立六年, 秦攻趙, 斉楚救之. 秦計曰:「斉楚救趙, 親則退兵, 不親遂攻之.」趙無食, 請粟於斉, 斉不聴. 周子2)曰:「不如聴之以退秦兵, 不聴則秦兵不卻, 是秦之計中而斉楚之計過也. 且趙之於斉楚, 扞蔽也,3) 猶歯之有脣也, 脣亡則歯寒. 今日亡趙, 明日患及斉楚. 且救趙之務, 宜若奉漏甕沃焦釜也. 夫救趙, 高義也;卻秦兵, 顕名也. 義救亡国, 威卻彊秦之兵, 不務為此而務愛粟, 為国計者過矣.」斉王弗聴. 秦破趙於長平四十余萬, 遂囲邯鄲.

 

제나라 왕 건이 즉위한 지 6년이 되어, 진(秦)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해, 제와 초 나라가 조나라를 구원했다.

 

 

진나라에서는 모의해 말하기를 “제와 초 나라가 조나라를 구원하는데, 그들의 관계가 친밀하면 철군시키고, 친밀하지 않으면 공격하기로 합시다.”라 했다. 조나라는 식량이 부족해 제나라에 곡식을 청했으나 제나라가 승낙하지 않았다. 주자(周子)가 말하기를 “승낙해 진나라 군이 퇴각하게 하는 것이 낫습니다. 승낙하지 않아서 진나라 군이 철수하지 않는다면, 진나라의 계략이 적중하는 것이고, 제와 초 나라의 계략이 실패하는 것입니다. 황차 조나라는 제와 초 나라에는 방해물로서, 치아가 입술을 얻는 격으로, 입술이 상하면 치아가 시리게 됩니다.

 

오늘 조나라가 망하면, 훗날 화가 제와 초 나라에 미칩니다. 또한 조나라를 구하는 일은 마치 새는 항아리를 들고서 달구어진 솥단지에 물을 부어야 하듯 다급한 일입니다. 대저 조나라를 구하는 것은 고매한 일이고, 진나라 군을 물리치는 것은 명성을 떨치는 일입니다. 망하는 나라를 의롭게 구원하고, 강력한 진나라 군대를 물리치는 것은 위세를 떨치는 것인데, 이에 힘쓰지 않고서 곡식을 아끼는 일에 힘쓴다면, 나라를 위해 계획하는 이의 잘못이 되는 것입니다.”라 했다.

 

그러나 제나라 왕이 듣지 않았다. 진나라가 장평(長平)에서 조나라 군 40만여 명을 무찌르고, 한단을 포위했다.

 

十六年, 秦滅周. 君王后卒. 二十三年, 秦置東郡. 二十八年, 王入朝秦, 秦王政置酒咸陽. 三十五年, 秦滅韓. 三十七年, 秦滅趙. 三十八年, 燕使荊軻刺秦王, 秦王覚, 殺軻. 明年, 秦破燕, 燕王亡走遼東. 明年, 秦滅魏, 秦兵次於歴下. 四十二年, 秦滅楚. 明年, 虜代王嘉, 滅燕王喜.

 

16년에는 진(秦)나라가 주(周)나라를 멸망시켰다. 군왕후가 죽었다. 23년에는 진나라가 동군(東軍)을 설치했다. 28년에는 제나라 왕이 진나라에 입조(入朝)했고, 진왕(秦王) 정(政)이 함양(咸陽)에서 술상을 차려놓고 그를 환대했다. 35년에는 진나라가 한나라를 멸망시켰다. 37년에는 진나라가 조나라를 멸망시켰다. 38년에는 연나라가 형가(荊軻)를 시켜서 진왕을 자살(刺殺)하게 하려다, 진왕에게 발각되어, 진왕이 가(軻)를 죽였다. 다음해에는 진나라가 연나라를 격파하고, 연나라 왕은 요동(遼東)으로 도망쳤다. 그 다음해에는 진나라가 위(魏)나라를 멸망시키고, 진나라 군을 역하(歷下)에 주둔시켰다. 42년에는 진나라가 초 나라를 멸망시켰다. 다음해에는 대왕(代王) 가(嘉)를 생포했고, 연나라 왕 희(喜)를 죽였다.

 

四十四年, 秦兵撃斉. 斉王聴相后勝計, 不戦, 以兵降秦. 秦虜王建, 遷之共.4) 遂滅斉為郡. 天下壱并於秦, 秦王政立号為皇帝. 始, 君王后賢, 事秦謹, 與諸侯信, 斉亦東邊海上, 秦日夜攻三晉、燕、楚, 五国各自救於秦, 以故王建立四十余年不受兵. 君王后死, 后勝相斉, 多受秦閒金, 多使賓客入秦, 秦又多予金, 客皆為反閒, 勧王去従朝秦, 不脩攻戦之備, 不助五国攻秦, 秦以故得滅五国. 五国已亡, 秦兵卒入臨淄, 民莫敢格者. 王建遂降, 遷於共. 故斉人怨王建不蚤與諸侯合従攻秦, 聴姦臣賓客以亡其国, 歌之曰:「松耶柏耶? 住建共者客耶?」5)疾建用客之不詳也.6)

 

44년에는 진나라 군이 제나라를 공격했다. 제나라 왕은 재상 후승(后勝)의 책략을 듣고서, 전쟁을 하지 않고 군대를 이끌고서 진나라에 투항했다. 진나라가 제나라 왕 건을 생포해, 공(共)으로 보냈다. 이에 제나라를 멸망시키고 군(郡)으로 삼았다. 이윽고 천하는 진나라 하나로 통일되었고, 진왕 정(政)이 즉위해 황제(皇帝)로 불렸다. 초기에는 군왕후가 현명해, 진나라를 섬김이 근엄했고, 제후들과도 믿음이 깊었다. 또 제나라는 동쪽 해변가에 위치하고 있어서 진나라와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진나라는 날마다 삼진(三晉), 연(燕), 초(楚)를 공격했고, 다섯 나라는 각기 진나라의 공격으로부터 자신들을 구하기 바빠서, 제나라 왕 건이 즉위한 지 40여 년이 되도록 적군의 침공을 받지 않았다.

 

군왕후가 죽은 후에 후승이 재상이 되어, 진나라 첩자의 뇌물을 많이 받았고, 자주 빈객들을 진나라에 입조하게 했으니, 진나라는 금품을 더 많이 주어, 객들이 돌아와서 첩자가 되게 했다. 그들은 왕에게 진나라에 입조하게 권유했다. 침공에 대한 대비를 하지 말고, 5개국이 서로 도와 진나라를 공격하지 않게 함으로써 진나라가 5개국을 멸망시킬 수 있었다. 5개국이 이미 멸망하고, 진나라 군이 끝내 임치에 들어오니, 백성들이 감히 저항하지 못했다.

 

제나라 왕 건이 이내 항복하고, 공(共)으로 옮겨갔다. 그리하여 제나라 사람들은 건이 일찌감치 제후들과 합종(合縱)해 진나라를 공격하지 않고, 간신과 빈객들의 말을 듣고 나라를 망하게 한 것을 원망해, 노래하기를 “소나무인가? 잣나무인가? 왕 건을 공(共)에서 살게 한 사람은 빈객들인가?”라고 하며, 왕 건이 빈객들을 신중하게 살피지 못한 것을 한했다.

 

太史公曰:蓋孔子晩而喜易. 易之為術, 幽明遠矣, 非通人達才孰能注意焉! 故周太史之卦田敬仲完, 占至十世之後;及完奔斉, 懿仲卜之亦云. 田乞及常所以比犯二君,7) 専斉国之政, 非必事勢之漸然也, 蓋若遵厭兆祥云.

 

태사공은 말한다.

 

“공자(孔子)는 만년(晩年)에 『주역(周易)』을 즐겨 읽었다. 역(易)이라는 학문은 너무도 심오해, 사물에 통달하고 전적(典籍)에 정통하지 못한 사람이 이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주나라의 태사가 전경중완(田敬仲完)에게 점을 쳐서, 10대 이후의 일까지 추산한 것이다. 완이 제나라로 도망쳤을 때, 의중(懿仲)이 그에게 이와 같은 점을 쳤다. 전기(田乞)와 전상(田常)이 연이어 제나라의 두 왕을 살해하고, 제나라의 정권을 장악한 것은, 형세가 점차 진행되었다기보다는 점괘의 예언에 따라서 진행된 듯싶다.”

 

 

각주

1 正義安平城在青州臨淄県東十九里, 古紀之酅邑也.

2 索隠蓋斉之謀臣, 史失名也. 戦国策以「周子」為「蘇秦」, 而「楚」字皆作「燕」, 然此時蘇秦死已久矣.

3 正義此時秦伐趙上党欲克, 無意伐斉、楚, 故言趙之於斉、楚為扞蔽也.

4 集解地理志河内有共県. 正義今衛州共城県也.

5 集解徐広曰:「戦国策云秦処建於共松柏閒也.」 索隠耶音邪. 謂是建客邪, 客説建住言遂乃失策, 令建遷共. 共, 今在河内也.

6 索隠謂不詳審用客, 不知其善否也.

7 索隠比如字, 又頻律反. 二君即悼公、簡公也. 僖子廃晏孺子, 鮑牧以乞故殺悼公, 而成子又殺簡公, 故云田氏比犯二君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