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 卷五五.留侯世家
卷五五.留侯世家
留侯1)張良者,2) 其先韓人也.3) 大父開地,4) 相韓昭侯、宣恵王、襄哀王. 父平, 相釐王、悼恵王.5) 悼恵王二十三年, 平卒. 卒二十歳, 秦滅韓. 良年少, 未宦事韓. 韓破, 良家僮三百人, 弟死不葬, 悉以家財求客刺秦王, 為韓報仇, 以大父、父五世相韓故.6)
유후(留侯) 장량(張良)은 그 선조가 한(韓)나라 사람이다. 조부 희개지(姬開地)는 한(韓)나라의 소후(昭侯) 선혜왕(宣惠王), 양애왕(襄哀王)의 재상을 지냈고, 아버지 희평(姬平)은 희왕(釐王), 도혜왕(悼惠王)의 재상을 지냈다.
도혜왕 23년에 그 아버지 희평이 죽었고, 그 후 20년 만에 진(秦)나라가 한(韓)나라를 멸망시켰다. 당시 장량은 나이가 어려서 한나라에 벼슬을 하지는 않았으나, 한나라가 멸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집에는 노복(奴僕)이 3백 명이나 있었다. 이 무렵 그는 동생이 죽었는데도 크게 장례를 치르기는커녕 오히려 모든 가산을 다 털어 진시황제(秦始皇帝)를 죽일 자객을 구해서 한나라의 원수를 갚고자 했는데, 그것은 곧 조부와 부친이 한나라의 5대 왕에 걸쳐서 재상을 지냈기 때문이었다.
良嘗学礼淮陽.7) 東見倉海君.8) 得力士, 為鉄椎重百二十斤. 秦皇帝東游, 良與客狙9)撃秦皇帝博浪沙中,10) 誤中副車.11) 秦皇帝大怒, 大索天下, 求賊甚急, 為張良故也. 良乃更名姓, 亡匿下邳.
장량은 일찍이 회양(淮陽)에서 예(禮)를 배웠고, 동방으로 가서 창해군(倉海君)을 찾아뵙고 힘센 력사(大力士) 한 사람을 찾아내어 120근의 철퇴 하나를 만들었다. 그리고 진시황이 동방을 순시할 때, 장량과 대력사는 박랑사(博浪沙) 가운데에 매복했다가 그를 저격했으나 잘못해 뒤따르는 수레를 맞추고 말았다. 이에 진시황은 크게 노하여 전국 각지를 대거 수색해 긴급히 자객들을 붙잡아들였는데, 이는 완전히 장량 때문이었다. 장량은 이에 이름을 바꾸고 하비(下邳)로 달아나 숨었다.
良嘗閒従容12)歩游下邳13)圯上,14) 有一老父, 衣褐, 至良所, 直堕其履圯下,15) 顧謂良曰:「孺子, 下取履!」良鄂然, 欲殴之.16) 為其老, 彊忍, 下取履. 父曰:「履我!」良業為取履, 因長跪履之.17) 父以足受, 笑而去. 良殊大驚, 随目之. 父去里所, 复還,18) 曰:「孺子可教矣. 後五日平明, 與我会此.」良因怪之, 跪曰:「諾.」五日平明, 良往. 父已先在, 怒曰:「與老人期, 後, 何也?」去, 曰:「後五日早会.」五日雞鳴, 良往. 父又先在, 复怒曰:「後, 何也?」去, 曰:「後五日复早來.」五日, 良夜未半往. 有頃, 父亦來, 喜曰:「當如是.」出一編書,19) 曰:「読此則為王者師矣. 後十年興. 十三年孺子見我済北, 谷城山下黄石即我矣.」20)遂去, 無他言, 不复見. 旦日視其書, 乃太公兵法也.21) 良因異之, 常習誦読之.
장량은 일찍이 한가한 틈을 타 하비의 다리 위를 천천히 산책했는데, 한 노인이 거친 삼베옷을 걸치고 그에게 다가와 일부러 신을 다리 밑으로 떨어뜨리고는 그를 돌아보고 “얘야, 내려가서 내 신을 주워오너라!”라 했다. 장량은 의아해하며 한바탕 때려주려고도 했으나 그 사람이 노인이었으므로 억지로 참고 다리 아래로 내려가서 신을 주워왔다. 그러자 노인이 이번에는 또 “나에게 신겨라!”라 했다. 장량은 기왕에 노인을 위해서 신을 주워왔으므로 윗몸을 곧게 세우고 꿇어앉아 신을 신겨주었다. 노인은 발을 뻗어 신을 신기게 하고는 웃으면서 가버렸다.
장량은 매우 놀라서 노인이 가는 대로 물끄러미 바라다보았다. 노인은 1리쯤 가다가 다시 돌아와서 말하기를 “너 이놈, 참으로 가르칠 만하구나! 닷새 뒤 새벽에 여기서 나와 만나자꾸나.”라고 했으며, 그러자 장량은 더욱 괴이하게 여기며 꿇어앉아 “예” 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닷새째 되는 날 새벽에 장량이 그곳으로 가보니 노인은 벌써 나와 있었다. 노인은 화를 내며 “늙은이와 약속을 하고서 뒤늦게 오다니 어찌 된 노릇이냐?”라고 하고는 되돌아가면서 “닷새 뒤에 좀 더 일찍 다시 오너라.”라 했다. 닷새가 지나 새벽닭이 울 때 장량은 다시 그곳으로 갔다. 노인은 또 먼저 그곳에 와 있었으며, 다시 화를 내며 “또 늦게 오다니, 어찌 된 거냐?”라고 하고 그곳을 떠나가면서 “닷새 뒤에 좀 더 일찍 오너라.”라 했다. 다시 닷새 뒤 장량은 밤이 반도 지나지 않아서 그곳으로 갔다.
그랬더니 조금 뒤 노인도 그곳으로 와서는 기뻐하며 “마땅히 이렇게 해야지”라고 했고, 책 한 권을 내놓으며 말하기를 “이 책을 읽으면 제왕의 스승이 될 수 있으며, 10년 후에는 그 뜻을 이룰 것이다. 그리고 13년 뒤에 너는 또 제수(濟水) 북쪽에서 나를 만날 수 있을 것인데, 곡성산(穀城山) 아래의 누런 돌[黃石]이 바로 나이니라”라고 하고는 그곳을 떠나가며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않았으며, 그러고 나서 다시는 그를 볼 수가 없었다. 날이 밝아 그 책을 보았더니 바로 『태공병법(太公兵法)』이었다. 이리하여 장량은 그 책을 기이하게 여겨 늘 익히고 송독(誦讀)했다.
居下邳, 為任侠. 項伯常殺人, 従良匿.
장량이 하비에 있을 때 협객이 되었는데, 항백(項伯)이 일찍이 사람을 죽인 일이 있어 장량을 따라다니며 숨어 지냈다.
後十年, 陳渉等起兵, 良亦聚少年百余人. 景駒自立為楚仮王, 在留. 良欲往従之, 道還沛公. 沛公将數千人, 略地下邳西, 遂属焉. 沛公拝良為厩将.22) 良數以太公兵法説沛公, 沛公善之, 常用其策. 良為他人者, 皆不省. 良曰:「沛公殆天授.」23)故遂従之, 不去見景駒.
10년 뒤 진섭(陳涉) 등이 봉기하자 장량도 청년 1백여 명을 모았다. 경구(景駒)는 자립해 초 나라의 대리왕(代理王)이 되어 유현(留縣)에 있었다. 그래서 장량은 그곳으로 가서 그를 따르려고 했는데, 도중에 패공(沛公)을 만났다.
이때 패공은 무리 수천 명을 거느리고 하비 서쪽의 땅을 공격해 점령하고 있었으므로 장량은 마침내 패공을 따라갔다. 이에 패공은 장량을 구장(廐將)으로 임명했다. 장량이 자주 『태공병법』으로 패공에게 유세하자 패공이 그를 좋게 여겨 항상 그의 계책을 취하곤 했다. 장량은 또 다른 사람에게도 『태공병법』을 말했으나 그들은 모두 이해하지 못했다. 장량은 “패공은 아마도 하늘이 낸 인물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장량은 패공을 따랐고 경구를 보러 가지 않았다.
及沛公之薛, 見項梁. 項梁立楚懐王. 良乃説項梁曰:「君已立楚後, 而韓諸公子横陽君成賢, 可立為王, 益樹党.」項梁使良求韓成, 立以為韓王. 以良為韓申徒,24) 與韓王将千余人西略韓地, 得數城, 秦輒复取之, 往來為游兵潁川.
패공이 설읍(薛邑)으로 가서 항량(項梁)을 만났다. 항량은 초 회왕(楚懷王)을 옹립했다. 장량은 이에 항량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이미 초 나라 후예를 세웠는데, 한(韓)나라의 여러 공자 가운데 횡양군(橫陽君) 한성(韓成)이 가장 현명하니 그를 왕으로 세워 우군(友軍)을 증강하십시오.”라고 하니, 항량이 장량에게 한성을 찾게 해 그를 세워 한왕(韓王)으로 삼았다. 그리고 장량을 한(韓)나라 사도(司徒)로 삼아 한왕을 따르게 했다. 또 1천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서쪽으로 나아가 한나라 원래의 땅을 공략하게 해 몇 개의 성을 빼앗았지만, 번번이 진(秦)나라가 그 성을 다시 탈환해 갔다. 이리하여 한나라 군대는 영천(潁川) 땅에서 왔다갔다 옮겨 다니며 싸움을 하는 처지가 되었다.
沛公之従雒陽南出轘轅, 良引兵従沛公, 下韓十余城, 撃破楊熊軍. 沛公乃令韓王成留守陽翟, 與良倶南, 攻下宛, 西入武関. 沛公欲以兵二萬人撃秦嶢下軍,25) 良説曰:「秦兵尚彊, 未可軽. 臣聞其将屠者子, 賈豎易動以利. 願沛公且留壁, 使人先行, 為五萬人具食,26) 益為張旗幟27)諸山上, 為疑兵, 令酈食其持重宝啗秦将.」秦将果畔, 欲連和倶西襲咸陽, 沛公欲聴之. 良曰:「此独其将欲叛耳, 恐士卒不従. 不従必危, 不如因其解28)撃之.」沛公乃引兵撃秦軍, 大破之. (遂)[逐]北至藍田, 再戦, 秦兵竟敗. 遂至咸陽, 秦王子嬰降沛公.
패공이 낙양(雒陽)에서 남으로 환원산(轘轅山)으로 나아갔을 때, 장량은 군대를 거느리고 패공을 따라 한나라 땅 10여 성을 무너뜨리고 양웅(楊熊)의 군대를 격파했다. 패공은 이에 한왕(韓王) 한성으로 하여금 남아서 양책(陽翟)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장량과 함께 남하해 원(宛)을 격파하고 서쪽 무관(武關)으로 들어갔다. 패공이 병사 2만 명으로 요관(嶢關)을 지키는 진(秦)나라 군대를 치려고 하자 장량이 이렇게 말했다.
진나라 군대가 아직은 강성하니 가볍게 볼 수가 없습니다. 제가 듣건대 그들의 장수는 백정의 자식이라고 하니, 장사꾼은 돈이나 재물로 쉽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원컨대 패공께서는 잠시 진영 내에 머물러 계시고, 사람을 시켜 먼저 가서 5만 명의 식량을 준비하고, 또 모든 산 위에 많은 깃발을 세워 의병(疑兵)으로 삼게 하시고, 역이기(酈食其)로 하여금 많은 보물을 가져다가 진나라 장수를 매수하게 하소서.
진나라 장수가 과연 진나라를 배반하고 패공과 연합해 서쪽으로 함양(咸陽)을 공격하려고 했다. 이에 패공이 곧 진나라 장수의 요구를 들어주려고 하자 장량이 말하기를 “다만 저 장수는 진나라를 배반하려고 합니다만, 신은 그 병졸들이 따르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만약 따르지 않는다면 위험하오니 그들이 태만해진 틈을 타서 공격하는 것만 못합니다.”라 했다. 패공이 이에 군사를 이끌고 진나라 군대를 공격해 대파하고, 패잔병을 쫓아 남전(藍田)에 이르러 다시 싸우니 진나라 군대는 마침내 붕괴되고 말았다. 그리고 드디어 함양에 다다르니 진나라 왕 자영(子嬰)이 패공에게 항복했다.
沛公入秦宮, 宮室帷帳狗馬重宝婦女以千數, 意欲留居之. 樊噲諫沛公出舎, 沛公不聴.29) 良曰:「夫秦為無道, 故沛公得至此. 夫為天下除残賊, 宜縞素為資.30) 今始入秦, 即安其樂, 此所謂『助桀為虐』. 且『忠言逆耳利於行, 毒薬苦口利於病』,31) 願沛公聴樊噲言.」沛公乃還軍霸上.
패공은 진나라 궁궐로 들어가서 궁실, 휘장, 개와 말, 값진 보배, 부녀자 등이 수천을 헤아릴 정도로 많은 것을 보고 내심 그곳에 머물고 싶어 했다. 번쾌(樊噲)가 패공에게 궁궐 밖으로 나가기를 충간했으나 패공이 듣지 않았다. 이에 장량이 이렇게 말했다.
무릇 진나라가 무도했기 때문에 패공께서 여기에 오실 수가 있었습니다. 모름지기 천하 사람을 위해 잔적(殘賊)을 제거하시려면 마땅히 검소함을 바탕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런데 비로소 진나라에 들어온 지금 바로 그 즐거움을 편안히 누리신다면 이는 곧 이른바 “걸(桀)이 포학한 짓을 하게 돕는 것”입니다. 또 “충성스러운 말은 귀에 거슬리지만 행실에 이롭고, 독한 약은 입에 쓰지만 병에 이롭다”라고 했습니다. 원컨대 번쾌의 말을 들으소서. 패공은 이에 곧 패상(霸上)으로 환군했다.
項羽至鴻門下, 欲撃沛公, 項伯乃夜馳入沛公軍, 私見張良, 欲與倶去. 良曰:「臣為韓王送沛公, 今事有急, 亡去不義.」乃具以語沛公. 沛公大驚, 曰:「為将柰何?」良曰:「沛公誠欲倍項羽邪?」沛公曰:「鯫生32)教我距関無内諸侯, 秦地可尽王, 故聴之.」良曰:「沛公自度能卻項羽乎?」沛公黙然良久, 曰:「固不能也. 今為柰何?」良乃固要項伯. 項伯見沛公. 沛公與飲為寿, 結賓婚. 令項伯具言沛公不敢倍項羽, 所以距関者, 備他盗也. 及見項羽後解, 語在項羽事中.
항우가 홍문(鴻門) 아래에 이르러 패공을 공격하려고 하자, 항백이 밤중에 패공의 군영으로 달려 들어와 사사로이 장량을 만나 함께 달아나자고 했다. 그러자 장량이 말하기를 “저는 한왕(韓王)을 대신해 패공을 호송(護送)하고 있는데, 지금 일이 위급하다고 해 도망을 가는 것은 의롭지 못합니다.”라고 했으며, 그리고 모든 사정을 패공에게 아뢰었다.
패공이 크게 놀라서 “장차 어떻게 해야겠소?”라 했다. 장량이 말하기를 “패공께서는 진실로 항우를 배반하려고 하십니까?”라고 하자, 패공이 말하기를 “소인배들이 나더러 함곡관(函谷關)을 막고 다른 제후의 군대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진나라 땅 전부를 차지해 왕이 될 수 있다고 하기에 내가 그 말을 따른 것이오.”라 했다.
장량이 말하기를 “패공께서 스스로 헤아리시기에 항우를 물리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패공은 한참 동안 묵묵히 있다가 말했다. “물론 물리칠 수 없소. 지금 당장 어떻게 하면 되겠소?” 장량은 이에 굳이 항백을 청해 패공과 만나게 했다. 그리하여 항백이 와서 패공을 만나자 패공은 그와 함께 술을 마시며 축수(祝壽)하고 서로 친구가 됨과, 아울러 인척의 관계를 맺었다. 그리고는 항백에게 패공은 항우를 감히 배반하지 않았으며, 함곡관을 지킨 것은 다른 도적들을 막기 위한 것이었음을 자세히 이야기하게 했다. 나중에 패공이 항우를 만난 후 두 사람은 화해를 했는데, 그 이야기는 「항우본기(項羽本紀)」에 기록되어 있다.
漢元年正月, 沛公為漢王, 王巴蜀. 漢王賜良金百溢, 珠二斗, 良具以献項伯. 漢王亦因令良厚遺項伯, 使請漢中地.33) 項王乃許之, 遂得漢中地. 漢王之国, 良送至褒中,34) 遣良帰韓. 良因説漢王曰:「王何不焼絶所過桟道, 示天下無還心, 以固項王意.」乃使良還. 行, 焼絶桟道.
한(漢) 원년(元年) 정월에 패공은 한왕(漢王)이 되어 파(巴), 촉(蜀)을 통치했다. 한왕은 장량에게 황금 1백 일(溢)과 진주 2말을 상으로 내렸는데, 장량은 그것을 모두 항백에게 바쳤다.
그러자 한왕 역시 장량을 시켜 많은 재물을 항백에게 주면서, 한중(漢中) 땅을 달라고 항우에게 부탁하게 했다. 그리고 항왕(項王)이 이를 허락함으로써 마침내 한중 땅을 얻게 되었다. 한왕이 자신의 봉국(封國)으로 갈 때, 장량이 배웅해 포중(褒中)에 이르자 장량을 한(韓)나라로 돌아가게 했다. 장량이 이에 한왕에게 권해 말하기를 “대왕께서는 어찌해 지나가는 곳의 잔도(棧道)를 불태워 끊어서 천하 사람들에게 동쪽으로 돌아올 뜻이 없음을 보여주고, 그것으로써 항왕의 마음을 안정시키지 않으십니까?”라고 하자, 한왕은 장량을 한(韓)나라로 돌아가게 하고 자신은 앞으로 나아가면서 지나온 잔도를 모두 불태워 끊어버렸다.
良至韓, 韓王成以良従漢王故, 項王不遣成之国, 従與倶東. 良説項王曰:「漢王焼絶桟道, 無還心矣.」乃以斉王田栄反, 書告項王. 項王以此無西憂漢心, 而発兵北撃斉.
장량이 한(韓)나라에 이르렀을 때, 일찍이 장량이 한왕(漢王)을 따라간 것 때문에 항왕은 한왕(韓王) 한성을 그 봉국(封國)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자신을 따라 함께 동진하게 했다. 이에 장량이 항왕에게 말하기를 “한왕(漢王)은 잔도를 태워 끊어버렸으니 돌아올 마음이 없습니다.”라 했다. 그리고 장량은 또 제왕(齊王) 전영(田榮)이 모반했다는 사실을 편지로 항왕에게 아뢰었다. 이리하여 항왕은 서쪽의 한왕(漢王)을 걱정하는 마음이 없어졌으며, 곧 군대를 내어 북쪽으로 제나라를 공격했다.
項王竟不肯遣韓王, 乃以為侯, 又殺之彭城. 良亡, 閒行帰漢王, 漢王亦已還定三秦矣. 复以良為成信侯, 従東撃楚. 至彭城, 漢敗而還. 至下邑, 漢王下馬踞鞍而問曰:「吾欲捐関以東等棄之, 誰可與共功者?」良進曰:「九江王黥布, 楚梟将, 與項王有郄;彭越與斉王田栄反梁地:此両人可急使. 而漢王之将独韓信可属大事, 當一面. 即欲捐之, 捐之此三人, 則楚可破也.」漢王乃遣随何説九江王布, 而使人連彭越. 及魏王豹反, 使韓信将兵撃之, 因挙燕、代、斉、趙. 然卒破楚者, 此三人力也.
항왕은 끝내 한왕(韓王)을 돌려보내려고 하지 않았고, 그를 다시 후(侯)에 봉했다가 팽성(彭城)에서 살해했다. 장량은 달아나서 샛길을 택해 한왕(漢王)에게로 돌아갔다. 이때 한왕도 역시 이미 회군해 삼진(三秦)을 평정했다. 한왕은 다시 장량을 성신후(成信侯)로 봉했고 동쪽으로 초 나라를 공격하는 데 따르게 했다.
그러나 팽성에 이르러 한나라 군대는 패해 돌아왔다. 하읍(下邑)에 이르자 한왕이 말에서 내려 말안장에 기대어 묻기를 “내가 함곡관 동쪽을 떼어서 상으로 주고자 하는데, 누가 나와 통일 천하 건립의 대공(大功)을 함께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자, 장량이 말하기를 “구강왕(九江王) 경포(黥布)는 초 나라의 맹장이나 항왕과 사이가 좋지 않고, 팽월은 제왕 전영과 더불어 양(梁) 땅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니 이 두 사람을 급히 써야 합니다. 그리고 대왕의 장수들 중에는 한신(韓信)만이 큰일을 맡기면 한 방면을 담당할 수가 있습니다. 만약 그 지역을 떼어내어 상으로 주고자 하신다면 이 세 사람에게 주어야만 초 나라를 격파할 수가 있습니다”라 했다.
한왕이 이에 수하(隧何)를 보내어 구강왕 경포를 설득하게 했고, 또 팽월에게도 사람을 보내어 연락하게 했다. 그리고 위왕(魏王) 표(豹)가 반란을 일으키자 한왕은 곧 한신을 시켜 군사를 이끌고 가서 그를 치게 했고, 그 기세를 몰아 연나라, 대(代)나라, 제나라, 조나라 땅을 모두 점령하게 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초 나라를 격파한 것은 바로 이 세 사람의 힘 때문이었다.
張良多病, 未嘗特将也, 常為畫策, 時時従漢王.
장량은 병이 많았기 때문에 일찍이 독자적으로 군대를 통솔한 적은 없었고, 늘 계책을 내는 신하가 되었으며 때때로 한왕을 수행했다.
漢三年, 項羽急囲漢王滎陽, 漢王恐憂, 與酈食其謀橈楚権. 食其曰:「昔湯伐桀, 封其後於杞. 武王伐紂, 封其後於宋. 今秦失徳棄義, 侵伐諸侯社稷, 滅六国之後, 使無立錐之地. 陛下誠能复立六国後世, 畢已受印, 此其君臣百姓必皆戴陛下之徳, 莫不郷風慕義, 願為臣妾. 徳義已行, 陛下南郷称霸, 楚必斂衽而朝.」漢王曰:「善. 趣刻印, 先生因行佩之矣.」
한(漢) 3년, 항우가 급히 형양(滎陽)에서 한왕을 포위하자, 한왕이 두려워하고 걱정하며 역이기와 함께 초 나라의 권세를 약화시키려고 했다. 역이기가 이렇게 말했다.
“옛날 은(殷)나라 탕왕(湯王)은 하(夏)나라 걸왕(桀王)을 토벌하고 그 후 손을 기(杞)나라에 봉해 주었고, 주(周)나라 무왕(武王)은 은나라 주왕(紂王)을 토벌하고 그 후 손을 송(宋)나라에 봉해 주었습니다. 지금 진(秦)나라가 덕을 잃고 도의를 저버리고 각 제후국을 침입해 토벌하고 6국(六國)의 후대를 끊어버려 그들에게 송곳 하나 세울 곳이 없게 했습니다. 대왕께서 진실로 6국의 후손을 복위시켜 그들 모두에게 대왕의 관인(官印)을 받게 하면, 그 나라의 군신과 백성이 반드시 대왕의 은덕을 우러러 받들게 될 것이고, 대왕의 덕의(德義)를 흠모해 마지않을 것이며, 대왕의 신하와 백성이 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덕의가 행해지면 대왕께서는 남면(南面)해 패왕(覇王)이라 불릴 것이고, 초 나라는 반드시 옷깃을 여미고 조회할 것입니다.”
그러자 한왕이 말했다. “좋소. 급히 관인을 새길 것이니 선생이 직접 6국에 가지고 가시오.”
食其未行, 張良従外來謁. 漢王方食, 曰:「子房前! 客有為我計橈楚権者.」其以酈生語告, 曰:「於子房何如?」良曰:「誰為陛下畫此計者? 陛下事去矣.」漢王曰:「何哉?」張良対曰:「臣請藉前箸為大王籌之.」35)曰:「昔者湯伐桀而封其後於杞者, 度能制桀之死命也. 今陛下能制項籍之死命乎?」曰:「未能也.」「其不可一也. 武王伐紂封其後於宋者, 度能得紂之頭也. 今陛下能得項籍之頭乎?」曰:「未能也.」「其不可二也. 武王入殷, 表商容之閭,36) 釈箕子之拘,37) 封比干之墓. 今陛下能封聖人之墓, 表賢者之閭, 式智者之門乎?」曰:「未能也.」「其不可三也. 発鉅橋之粟, 散鹿台之銭, 以賜貧窮. 今陛下能散府庫以賜貧窮乎?」曰:「未能也.」「其不可四矣. 殷事已畢, 偃革為軒,38) 倒置干戈, 覆以虎皮, 以示天下不复用兵. 今陛下能偃武行文, 不复用兵乎?」曰:「未能也.」「其不可五矣. 休馬華山之陽, 示以無所為. 今陛下能休馬無所用乎?」曰:「未能也.」「其不可六矣. 放牛桃林之陰,39) 以示不复輸積. 今陛下能放牛不复輸積乎?」曰:「未能也.」「其不可七矣. 且天下游士離其親戚, 棄墳墓, 去故旧, 従陛下游者, 徒欲日夜望咫尺之地. 今复六国, 立韓、魏、燕、趙、斉、楚之後, 天下游士各帰事其主, 従其親戚, 反其故旧墳墓, 陛下與誰取天下乎? 其不可八矣. 且夫楚唯無彊, 六国立者复橈而従之,40) 陛下焉得而臣之? 誠用客之謀, 陛下事去矣.」漢王輟食吐哺, 罵曰:「豎儒, 幾敗而公事!」41)令趣銷印.
역이기가 떠나기 전에 장량이 마침 외지에서 돌아와 한왕을 뵈었다.
한왕이 막 식사를 하던 중에 말하기를 “자방(子房)은 어서 들어오시오! 손님 가운데 나를 위해 초 나라 권세를 약하게 할 계책을 낸 사람이 있었소”라고 하고는 역이기의 말을 다 장량에게 이르고 말하기를 “자방은 어떻게 생각하오?”라 했다.
장량이 말하기를 “누가 대왕을 위해 이런 계획을 세웠습니까? 이 계획대로 하면 대왕의 일은 가망이 없습니다.”라고 하니, 한왕이 “무엇 때문이오?” 하고 물었다.
장량이 대답했다.
“청컨대 앞에 있는 젓가락을 빌려주시면 대왕을 위해 당면한 형세를 하나하나 따져보겠습니다”라고 하고는 이어서 말하기를
“옛날 은나라 탕왕이 하나라 걸왕을 토벌하고서 그 후손들을 기나라에 봉해 준 것은 걸왕을 사지(死地)에 몰아넣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항우를 사지에 몰아넣으실 수 있습니까?”라고 하니,
한왕이 “할 수 없소”라 했다.
장량이 말하기를 “이것이 6국의 후손을 봉하는 것이 불가(不可)한 첫 번째 이유입니다. 주 무왕이 은나라 주왕을 토벌하고 그 후손을 송나라에 봉해 준 것은 은나라 주왕의 머리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입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항우의 머리를 얻으실 수 있습니까?”라고 하니, 한왕은 “얻을 수 없소”라 했다.
이에 장량이 말하기를 “이것이 그 불가한 두 번째 이유입니다. 무왕이 은나라로 쳐들어갈 때 상용(商容)의 마을 문에 그의 덕행을 표창했고, 감옥 속에 구금되어 있는 기자(箕子)를 석방했으며, 비간(比干)의 무덤에 흙을 북돋워주었습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성인의 무덤에 흙을 북돋우거나 현자의 마을 문에 그 덕행을 표창하거나 지자(智者)의 문 앞을 지나며 경의를 표시하실 수 있습니까?”라고 하니,
한왕은 “할 수 없소”라 했다.
장량이 말하기를 “이것이 불가한 세 번째 이유입니다. 주 무왕은 일찍이 거교(鉅橋)의 곡식을 풀었고, 녹대(鹿臺) 창고의 돈을 꺼내어 빈궁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창고를 열어 돈과 식량을 빈궁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실 수 있습니까?”라고 하니, 한왕은 “할 수 없소”라 했다.
장량이 말하기를 “이것이 불가한 네 번째 이유입니다. 은나라를 치는 일이 이미 끝나자 주 무왕은 병거(兵車)를 고쳐서 일반 수레로 만들고 병기를 거꾸로 해 창고 속에 넣고 호랑이 가죽으로 덮어씌워, 천하에 더 이상 병기를 사용하지 않을 것을 보였습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무력을 버리고 문교(文敎)를 행해 다시는 병기를 사용하지 않으실 수 있습니까?”라고 하니,
한왕은 “할 수 없소”라 했다.
장랑이 말하기를 “이것이 불가한 다섯 번째 이유입니다. 주 무왕은 전쟁에 쓰던 말을 화산(華山) 남쪽에 풀어놓고 사용하지 않을 것임을 나타내었습니다. 지금 대왕께서도 말을 풀어놓고 사용하지 않으실 수 있습니까?”라고 하니,
한왕은 “할 수 없소”라 했다.
장량이 말하기를 “이것이 불가한 여섯 번째 이유입니다. 주 무왕은 군대 수송용으로 쓰는 소를 도림(桃林) 북쪽에 풀어놓고 다시는 군수품을 운반하거나 식량이나 (馬草)를 한곳에 모으는 데 쓰지 않을 것임을 보였습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소를 풀어놓고 다시는 군 수송용으로 쓰지 않으실 수 있으십니까?”라고 하니,
한왕은 “할 수 없소”라 했다.
장량이 말하기를 “이것이 그 불가한 일곱 번째 이유입니다. 게다가 천하의 유사(游士)들이 친척과 헤어지고 조상의 분묘를 버려두고 친구를 떠나 대왕을 따라 분주히 다니는 것은 단지 밤낮으로 작은 땅덩어리라도 떼어주기를 바라서입니다. 그런데 지금 6국을 회복해 한(韓), 위(魏), 연(燕), 조(趙), 제(齊), 초(楚)의 후대를 세우면 천하의 유사들이 각자 돌아가 그의 주인을 섬길 것이고, 그 친척을 따라 그의 친구와 조상의 분묘가 있는 곳으로 돌아갈 것이니, 대왕께서는 누구와 더불어 천하를 차지하시겠습니까?
이것이 그 불가한 여덟 번째 이유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은 오직 초 나라로 하여금 강성할 도리가 없게만 하시지만, 만약 초 나라가 강성해진다면 대왕께서 세운 6국의 후손들이 다시 굽히고 초 나라를 따르게 될 것이니, 대왕께서는 어떻게 그들을 신하로 삼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진정 그 객(客)의 꾀를 쓰신다면 대왕의 일은 다 그르치고 말 것입니다”라고 하니, 한왕이 입 안의 음식을 뱉고 꾸짖기를 “이런 유생(儒生)놈이 하마터면 대사를 그르치게 할 뻔했구나!”라고 하고는 황급히 관인을 녹여버리게 했다.
漢四年, 韓信破斉而欲自立為斉王, 漢王怒. 張良説漢王, 漢王使良授斉王信印, 語在淮陰事中. 其秋, 漢王追楚至陽夏南, 戦不利而壁固陵, 諸侯期不至. 良説漢王, 漢王用其計, 諸侯皆至. 語在項籍事中.
한(漢) 4년, 한신이 제나라를 격파하고 스스로 제왕(齊王)이 되려고 하자 한왕이 노했다. 장량이 한왕을 진정시키자 한왕이 장량을 보내어 한신에게 제왕의 관인을 주게 했는데, 이 이야기는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에 기록되어 있다.
그해 가을, 한왕은 초 나라 군대를 추격해 양하(陽夏) 남쪽에 이르렀으나 전세가 불리해 고릉(固陵)의 보루를 굳게 지키고 있었는데, 제후들이 약속한 기일이 되어도 통 오지를 않았다. 장량이 한왕을 설득하매 한왕이 그의 계책을 쓰자 제후들이 모두 이르렀다. 이 이야기는 「항우본기」에 기록되어 있다.
漢六年正月, 封功臣. 良未嘗有戦鬥功, 高帝曰:「運籌策帷帳中, 決勝千里外, 子房功也. 自択斉三萬戸.」良曰:「始臣起下邳, 與上会留, 此天以臣授陛下. 陛下用臣計, 幸而時中, 臣願封留足矣, 不敢當三萬戸.」乃封張良為留侯, 與蕭何等倶封.
한 6년 정월에 공신들을 크게 봉했다. 장량은 일찍이 별다른 전공이 없었는데도 고제(高帝)는 오히려 말하기를 “영중의 장막 안에서 계책을 운용해 천리 밖에서 승리를 결정지었으니, 이것은 모두 자방의 공로이다. 스스로 제(齊) 땅에서 3만 호(戶)를 고르라”라고 하자, 장량이 이렇게 말했다.
"신이 처음 하비(下邳)에서 일어나 폐하와 유(留) 땅에서 만났는데, 이는 하늘이 신을 폐하께 주신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신의 계책을 쓰셨고, 다행스럽게도 예상은 우연히 적중했습니다. 신은 원컨대 유후(留侯)에 봉해지는 것으로 족하겠으며, 3만 호는 도저히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이에 장량을 봉해 유후로 삼았는데, 이는 소하(蕭何) 등과 동시에 봉을 받은 것이었다.
(六年)上已封大功臣二十余人, 其余日夜争功不決, 未得行封. 上在雒陽南宮, 従复道42)望見諸将往往相與坐沙中語. 上曰:「此何語?」留侯曰:「陛下不知乎? 此謀反耳.」上曰:「天下属安定, 何故反乎?」留侯曰:「陛下起布衣, 以此属取天下, 今陛下為天子, 而所封皆蕭、曹故人所親愛, 而所誅者皆生平所仇怨. 今軍吏計功, 以天下不足遍封, 此属畏陛下不能尽封, 恐又見疑平生43)過失及誅, 故即相聚謀反耳.」上乃憂曰:「為之柰何?」留侯曰:「上平生所憎, 群臣所共知, 誰最甚者?」上曰:「雍歯與我故,44) 數嘗窘辱我. 我欲殺之, 為其功多, 故不忍.」留侯曰:「今急先封雍歯以示群臣, 群臣見雍歯封, 則人人自堅矣.」於是上乃置酒, 封雍歯為什方侯,45) 而急趣丞相、御史定功行封. 群臣罷酒, 皆喜曰:「雍歯尚為侯, 我属無患矣.」
황제가 이미 큰 공신 20여 명을 봉했으나, 그 나머지 사람들은 밤낮으로 공을 다투어 결정을 하지 못해 봉할 수가 없었다.
황제가 낙양의 남궁(南宮)에 있으면서 구름다리 위에서, 여러 장수들이 이따금 모래밭에 모여앉아 대화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황제가 “저기서 무슨 말들을 하는가?”라고 묻자,
유후가 아뢰기를 “폐하께서는 모르고 계십니까? 저것은 모반을 도모하고 있는 것입니다”라 했다.
황제가 말하기를 “천하가 막 안정되었는데 무슨 까닭으로 모반을 하려는가?”라고 하니,
유후가 아뢰기를 “폐하께서는 포의(布衣)의 신분으로 일어나 저 무리들에게 의지해 천하를 차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폐하께서 천자가 되셔서 봉한 자들은 모두 폐하께서 친애하는 소하나 조참(曹參) 같은 옛 친구들이고, 죽인 자들은 모두 평소에 원한이 있었던 이들이었습니다. 지금 군(軍) 인사관이 공로를 따져보고는 천하의 땅을 다 가지고도 모든 사람들을 전부 상으로 봉해 주기에는 부족하다고 했으니, 저들은 폐하께서 모두를 봉해 주지 않으실까 두렵고 또 평소의 과실을 의심받아 죽게 될까 두렵기 때문에 서로 모여서 모반하려는 것입니다”라 했다.
황제가 이를 걱정해 이르기를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라고 하니,
유후가 아뢰기를 “황제께서 평소에 미워하시는 사람으로서 여러 신하들이 다 아는 자 가운데 가장 심한 이가 누구입니까?” 하고 묻자,
황제가 대답하기를 “옹치(雍齒)와 짐은 묵은 원한이 있는데, 자주 짐을 곤욕스럽게 해 짐이 그를 죽이려고 했으나, 그의 공이 많기 때문에 참고 있소.”라 했다.
유후가 아뢰기를 “지금 급히 옹치를 봉해 여러 신하들에게 보이십시오. 옹치가 봉해지는 것을 여러 신하들이 보게 되면 그들은 자신들도 봉해질 것을 스스로 굳게 믿게 될 것입니다”라 했다.
이에 황제는 곧 술자리를 베풀고 옹치를 십방후(什方侯)에 봉하고, 급히 승상과 어사(御史)를 재촉해 공로를 정하고 봉(封)을 행했다. 여러 신하들이 술자리가 끝나자 모두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옹치도 또한 후(侯)에 봉해졌으니 우리들은 걱정할 것도 없다.”라 했다.
劉敬説高帝曰:「都関中.」上疑之. 左右大臣皆山東人, 多勧上都雒陽:「雒陽東有成皐, 西有殽黽, 倍河, 向伊雒, 其固亦足恃.」留侯曰:「雒陽雖有此固, 其中小, 不過數百里, 田地薄, 四面受敵, 此非用武之国也. 夫関中左殽函,46) 右隴蜀,47) 沃野千里, 南有巴蜀之饒, 北有胡苑之利,48) 阻三面而守, 独以一面東制諸侯. 諸侯安定, 河渭漕輓天下, 西給京師;諸侯有変, 順流而下, 足以委輸. 此所謂金城千里, 天府之国也,49) 劉敬説是也.」於是高帝即日駕, 西都関中.50) 留侯従入関. 留侯性多病, 即道引不食谷,51) 杜門不出歳余.
유경(劉敬)이 고제(高帝)를 설득해 “관중(關中)에 도읍하십시오.”라고 하니 황제가 머뭇거리며 결정을 하지 못했다.
당시 좌우 대신들이 모두 산동(山東) 사람들이었다. 이에 대다수가 황제에게 낙양에 도읍을 정하게 권하면서 말했다.
“낙양 동쪽에는 성고(成皐)가 있고, 서쪽에는 효산(崤山), 민지(澠池)가 있으며, 황하를 등지고 이수(伊水)와 낙수(雒水)를 마주하고 있어 그 견고함이 족히 안심할 만합니다.”
유후가 이렇게 말했다.
“낙양이 비록 그토록 견고하기는 하나, 그 중심지역이 좁아 수백 리에 불과하며 땅은 척박하고, 사방에서 적의 공격을 받을 수 있는 곳이어서 힘을 쓸 만한 곳이 아니옵니다. 반면 저 관중 지역은 동쪽으로는 효산과 함곡관이 있고, 서쪽으로는 농산(隴山)과 촉산(蜀山)이 있으며, 중심지에는 비옥한 들이 천리에 뻗어 있고, 남쪽으로는 파촉(巴蜀)의 풍부한 자원이 있으며, 북쪽으로는 소와 말을 목축할 수 있는 이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삼면은 험준한 지형에 의지해 굳게 지켜질 수 있으므로, 단지 동쪽 한 방면만 제후를 통제하면 됩니다. 제후가 안정되면 황하, 위수(渭水)를 통해 천하의 식량을 운반해 서쪽으로 도성에 공급할 수 있고, 제후가 반란을 일으키면 물길을 따라 내려가 충분히 군대와 군수 물자를 수송할 수 있습니다. 이는 곧 이른바 천리의 철옹성이며 천부(天府)의 지역이니 유경의 말이 옳습니다.”
이에 고제는 즉시 그날로 수레를 타고 서쪽으로 발진해 관중에 도읍했다.
유후도 고제를 따라 관중으로 들어갔다. 유후는 천성적으로 병이 많았기 때문에 도인(道引)을 하면서 곡식을 먹지 않고 1년여 동안을 두문불출했다.
上欲廃太子, 立戚夫人子趙王如意. 大臣多諫争, 未能得堅決者也. 呂后恐, 不知所為. 人或謂呂后曰:「留侯善畫計筴, 上信用之.」 呂后乃使建成侯呂沢劫留侯, 曰:「君常為上謀臣, 今上欲易太子, 君安得高枕而臥乎?」留侯曰:「始上數在困急之中, 幸用臣筴. 今天下安定, 以愛欲易太子, 骨肉之閒, 雖臣等百余人何益.」呂沢彊要曰:「為我畫計.」留侯曰:「此難以口舌争也. 顧上有不能致者, 天下有四人.52) 四人者年老矣, 皆以為上慢侮人, 故逃匿山中, 義不為漢臣. 然上高此四人. 今公誠能無愛金玉璧帛, 令太子為書, 卑辞安車, 因使辯士固請, 宜來. 來, 以為客, 時時従入朝, 令上見之, 則必異而問之. 問之, 上知此四人賢, 則一助也.」於是呂后令呂沢使人奉太子書, 卑辞厚礼, 迎此四人. 四人至, 客建成侯所.
황제가 태자(太子)를 폐하고 척부인(戚夫人)의 아들 조왕(趙王) 유여의(劉如意)를 세우고자 했다. 대신들 대부분이 다투어 충간을 했으나 명확한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여후(呂后)가 두려워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때 어떤 사람이 여후에게 말했다.
“유후는 대책을 잘 세워서, 황제께서 그를 신임하십니다.”
여후는 곧 건성후(建成侯) 여택(呂澤)을 시켜 유후를 위협해 말했다.
“그대는 일찍이 황제의 모신(謀臣)이 되었으면서 지금 황제께서 태자를 바꾸려고 하시는데도 어찌 베개를 높이 하고 누워만 있을 수 있소?”
유후가 대답했다.
“이전에 황제께서는 여러 차례 곤경하고 위급한 상황에 처하셨을 때, 다행스럽게도 저의 계책을 써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천하가 안정되어 편애하는 자식으로 태자를 바꾸려고 하시니, 이는 곧 골육간의 일이므로 저와 같은 사람이 1백여 명이 있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 했다.
여택이 강압적으로 요구해 말했다. “나를 위해서 계책을 세워주시오.”
그러자 유후가 이렇게 말했다.
“이는 말로써 다투어내기가 어렵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황제께서 마음대로 불러올 수 없었던 사람으로 천하에 네 명이 있습니다. 이 네 명은 연로한데, 그들은 모두 황제께서 사람을 무시하고 업신여긴다고 생각한 까닭에 상산(商山)으로 피해 은거해 절조를 지키며 한나라의 신하가 되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황제께서는 이 네 사람을 존경합니다. 지금 공(公)께서 진실로 금옥과 비단을 아끼지 않고 태자께 편지를 쓰시게 해 말을 공손하게 하고 안거(安車)를 준비해 말 잘하는 변사(辯士)를 시켜 간곡히 청한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올 것입니다. 그렇게 해 그들이 오거든 귀한 손님으로 대우하고 때때로 태자를 따라 조정으로 들어가 조회하게 해 황제로 하여금 그들을 보시게 하면 반드시 기이하게 여기셔서 그들에 대해서 물으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황제께서는 이 네 사람이 현자임을 알게 되실 것이고, 그러면 그것은 곧 태자께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에 여후는 여택에게 사람을 시켜 태자의 편지를 받들어 겸손한 말과 후한 예물로 이 네 사람을 맞아오게 했다. 그리하여 네 사람이 도착했고, 그들은 귀한 손님 대접을 받으며 건성후의 집에 묵게 되었다.
漢十一年, 黥布反, 上病, 欲使太子将, 往撃之. 四人相謂曰:「凡來者, 将以存太子. 太子将兵, 事危矣.」乃説建成侯曰:「太子将兵, 有功則位不益太子;無功還, 則従此受禍矣. 且太子所與倶諸将, 皆嘗與上定天下梟将也, 今使太子将之, 此無異使羊将狼也, 皆不肯為尽力, 其無功必矣. 臣聞『母愛者子抱』,53) 今戚夫人日夜待御, 趙王如意常抱居前, 上曰『終不使不肖子居愛子之上』, 明乎其代太子位必矣. 君何不急請呂后承閒為上泣言:『黥布, 天下猛将也, 善用兵, 今諸将皆陛下故等夷,54) 乃令太子将此属, 無異使羊将狼, 莫肯為用, 且使布聞之, 則鼓行而西耳.55) 上雖病, 彊載輜車, 臥而護之, 諸将不敢不尽力. 上雖苦, 為妻子自彊.』」於是呂沢立夜見呂后, 呂后承閒為上泣涕而言, 如四人意. 上曰:「吾惟豎子固不足遣, 而公自行耳.」於是上自将兵而東, 群臣居守, 皆送至灞上. 留侯病, 自彊起, 至曲郵,56) 見上曰:「臣宜従, 病甚. 楚人剽疾, 願上無與楚人争鋒.」因説上曰:「令太子為将軍, 監関中兵.」上曰:「子房雖病, 彊臥而傅太子.」是時叔孫通為太傅, 留侯行少傅事.
한(漢) 11년, 경포(黥布)가 모반했는데, 황제는 마침 병이 나서 태자를 대장으로 삼아 출병해 그를 토벌케 하려고 했다.
네 노인은 서로 의논해 말했다.
“우리들이 온 것은 장차 태자를 보위하기 위해서입니다. 태자가 군대를 거느리고 싸운다면 일이 위험해질 것입니다.”라고 하고는 곧 건성후를 설득해 이렇게 말했다.
“태자께서 군대를 거느리고 출정해 공을 세우더라도 태자의 권위에는 더 이상의 보탬이 없을 것이지만, 만약에 공을 세우지 못하고 돌아오신다면 바로 그 때문에 화를 입게 될 것이오. 또 태자와 함께 출정할 여러 장수들은 모두가 일찍이 황제와 더불어 천하를 평정한 맹장들이오. 지금 태자께 그들을 거느리게 한다면 이는 양에게 이리를 거느리게 하는 것과 다름없어서 그들은 모두 태자를 위해서 힘을 다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니, 태자께서 공을 세우지 못할 것은 틀림이 없소이다. 저희들이 듣기로 '어미가 총애를 받으면 그 자식도 귀여움을 받는다.' 라고 했는데, 지금 척부인이 밤낮으로 황제를 받들어 모시니 조왕(趙王) 유여의는 늘 황제 앞에 안기어 있고, 황제 또한 '아무래도 불초한 자식으로 하여금 사랑스러운 자식 위에 있게 할 수는 없다.' 라고 하시니, 분명 그가 태자의 지위를 대신할 것은 틀림이 없소.
그런데 그대는 어찌해 급히 여후에게 기회를 봐서 황제께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하게 청하지 않소이까? '경포는 천하의 맹장이고 군사를 쓰는 것이 뛰어납니다. 지금 여러 장군들은 모두 폐하의 옛 동료들인데, 바로 태자에게 그들을 거느리게 하시면 양에게 이리를 거느리게 하는 것과 다름없어서 그들이 힘을 쓰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게다가 만약 경포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분명 북을 치며 서쪽(장안)으로 진군해 올 것입니다. 폐하께서 비록 병환 중이시기는 하지만 억지로라도 큰 수레를 준비하시어 누워서라도 여러 장수들을 통솔하시면 여러 장수들이 감히 힘을 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폐하께서 비록 고통스러우시겠지만 처자를 위해 친히 힘써 주시옵소서.' 라고 말이오.”
이에 여택은 그날 밤 즉시 여후를 만났고, 여후는 틈을 보아 황제께 눈물을 흘리며 네 사람의 의도대로 말했다.
그러자 황제가 말했다.
“짐도 본디 그 어린 아이는 보낼 만하지 않다고 생각했으니, 짐이 직접 가겠소.”
그리하여 황제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가니 뭇 신하들과 유수(留守)들이 모두 파상(灞上)까지 전송했다. 유후는 병상에 있었으나 억지로 일어나 전송하며 곡우(曲郵)에 이르러 황제를 알현하고 아뢰었다.
“신이 마땅히 따라가야 하나 병이 심합니다. 초 나라 사람은 용맹하고 민첩하오니, 원컨대 폐하께서는 초 나라 사람과 정면으로 칼날을 다투지 마십시오.”라고 하고,
다시 기회를 보아서 황제를 설득해 아뢰기를 “태자를 장군으로 삼아 관중의 군대를 감독하게 하십시오.”라 했다.
황제가 말했다.
“자방은 병중이기는 하지만 누워서라도 애써 태자를 보좌하시오”라 했다.
이때 숙손통(叔孫通)은 태자태부(太子太傅)였고, 유후는 태자소부(太子少傅)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
漢十二年, 上従撃破布軍帰, 疾益甚, 愈欲易太子. 留侯諫, 不聴, 因疾不視事. 叔孫太傅称説引古今, 以死争太子. 上詳許之, 猶欲易之. 及燕, 置酒, 太子侍. 四人従太子, 年皆八十有余, 鬚眉皓白, 衣冠甚偉. 上怪之, 問曰:「彼何為者?」四人前対, 各言名姓, 曰東園公, 角里先生, 綺里季, 夏黄公. 上乃大驚, 曰:「吾求公數歳, 公辟逃我, 今公何自従吾児游乎?」四人皆曰:「陛下軽士善罵, 臣等義不受辱, 故恐而亡匿. 窃聞太子為人仁孝, 恭敬愛士, 天下莫不延頚欲為太子死者, 故臣等來耳.」上曰:「煩公幸卒調護太子.」57)
한(漢) 12년, 황제가 경포의 군사를 격파하고 돌아와서 병이 더욱 심해지자 더더욱 태자를 바꾸고자 했다.
이에 유후가 그만두기를 간했으나 황제가 듣지 않자, 병을 핑계삼아 공무를 돌보지 않았다. 태자태부 숙손통이 고금의 일을 인용해 설득하며 죽을 각오로 태자를 보위하기 위해서 애썼다. 황제는 거짓으로 그의 말을 들어주는 것처럼 했으나, 실제로는 여전히 바꾸려고 했다. 그러다가 연회에 술자리가 마련되었을 때 태자가 황제를 모시게 되었는데, 네 사람의 은자가 태자를 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나이가 80이 넘었고 수염과 눈썹이 희었으며 의관은 매우 위엄 있었다.
황제가 괴이하게 여겨 물었다.
“저들은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가?”
네 사람이 앞으로 나아가 대답하며 각각 이름을 말하기를 동원공(東園公), 녹리선생(甪里先生), 기리계(綺里季), 하황공(夏黃公)이라 했다. 그러자 황제는 크게 놀라며 물었다.
“짐이 공(公)들을 가까이 하고자 한 것이 몇 년이나 되었는데, 공들은 기어이 짐을 피해 도망가더니, 이제 공들이 어찌해 스스로 태자를 따라 노니는가?”
네 사람이 모두 아뢰었다.
“폐하께서는 선비를 업신여기시고 잘 꾸짖으시므로 신들이 의(義)에 욕되지나 않을까 해 두려운 나머지 도망해 숨었습니다. 그런데 삼가 듣건대, 태자께서는 사람됨이 어질고 효성스러우시며 사람을 공경하고 선비를 사랑하시어 천하에 목을 빼고 태자를 위해서 죽고자 하지 않는 이가 없다고 하므로 신들이 온 것입니다”
황제는 이에 말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공들께서 끝까지 태자를 잘 돌보아주기를 바라오.”
四人為寿已畢, 趨去. 上目送之, 召戚夫人指示四人者曰:「我欲易之, 彼四人輔之, 羽翼已成, 難動矣. 呂后真而主矣.」戚夫人泣, 上曰:「為我楚舞, 吾為若楚歌.」歌曰:「鴻鵠高飛, 一挙千里. 羽翮已就, 横絶四海. 横絶四海, 當可柰何! 雖有矰繳,58) 尚安所施!」歌數闋,59) 戚夫人嘘唏流涕, 上起去, 罷酒. 竟不易太子者, 留侯本招此四人之力也.
네 사람이 축수(祝壽)를 마치고 급히 떠나가자, 황제는 눈길로 그들을 전송해 보내면서 척부인을 불러 그 네 사람을 가리켜 보이며 말했다. “짐이 태자를 바꾸고자 했으나, 저 네 사람이 보좌해 태자의 우익(羽翼)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그 지위를 어떻게 할 수가 없소. 여후(呂后)는 진정으로 그대의 주인이오.”
척부인이 흐느끼자 황제가 말했다. “짐을 위해서 초 나라 춤을 춰 보여주오. 짐도 부인을 위해서 초 나라 노래를 부르리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큰 고니 높디 높이 날아
한 번에 천리를 날거니
날개가 어느덧 다 자라나매
온 천하를 마음껏 날아다니도다.
온 천하를 마음껏 날아다니니
마땅히 또 어떻게 하겠는가!
설령 주살이 있다고 한들
오히려 그 무슨 소용 있으리요!
몇 번 연달아 노래를 부르매 척부인은 한숨을 내쉬며 눈물을 흘렸다. 황제가 일어나 자리를 뜨자, 술자리는 끝이 났다. 결국 태자를 바꾸지 못한 것은 근본적으로 유후가 이 네 사람을 불러오게 했기 때문이었다.
留侯従上撃代, 出奇計馬邑下,60) 及立蕭何相国,61) 所與上従容言天下事甚衆, 非天下所以存亡, 故不著. 留侯乃称曰:「家世相韓, 及韓滅, 不愛萬金之資, 為韓報讎彊秦, 天下振動. 今以三寸舌62)為帝者師, 封萬戸, 位列侯, 此布衣之極, 於良足矣. 願棄人閒事, 欲従赤松子63)游耳.」 乃学辟64)谷, 道引軽身.65) 会高帝崩, 呂后徳留侯, 乃彊食之, 曰:「人生一世閒, 如白駒過隙, 何至自苦如此乎!」留侯不得已, 彊聴而食.
유후가 황제를 따라 대(代) 땅을 공격하며 마읍(馬邑) 성 아래에서 기이한 계책을 내었고 소하를 상국(相國)에 임명하게 건의하는 등 황제와 함께 조용히 천하 대사를 논의한 것이 매우 많았지만, 그것들은 천하존망(天下存亡)에 관계된 바가 아니므로 여기에 일일이 기록하지는 않는다. 유후는 그즈음 늘 공언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한(韓)나라 재상을 지냈는데, 한나라가 멸망하자 만금의 가산을 아끼지 않고 한나라를 위해서 강대한 진나라에 복수를 해 천하를 떠들썩하게 했다. 그리고 지금은 세 치의 혀로 황제의 군사(軍師)가 되어 식읍이 만 호에 이르고 지위가 제후의 반열에 올랐으니, 이는 평민으로서는 최고의 지위로 나 장량으로서는 매우 만족스럽다. 그러므로 원컨대 세속의 일일랑 떨쳐버리고 적송자(赤松子)를 따라 고고히 노닐고자 한다."
그리하여 벽곡(辟穀)을 배워 오곡을 먹지 않았고, 도인(道引)을 행해 몸을 가벼이 했다. 그런데 때마침 고제가 붕어하니, 여후가 유후의 은덕에 감격해 억지로 음식을 먹게 하면서 말했다.
“사람이 한세상을 살아감은 마치 흰 망아지가 틈바구니를 지나는 것과 같은데, 굳이 스스로 그토록 고통스럽게까지 할 필요가 있습니까?” 라고 하자, 유후는 하는 수 없이 태후의 말을 듣고 음식을 먹었다.
後八年卒, 謚為文成侯. 子不疑代侯.66)
8년 뒤, 유후가 세상을 떠나니, 시호를 문성후(文成侯)라 했다. 그리고 그 아들 장불의(張不疑)가 아버지의 후작(侯爵)을 이어받았다.
子房始所見下邳圯上老父與太公書者, 後十三年従高帝過済北, 果見谷城山下黄石, 取而葆祠之.67) 留侯死, 并葬黄石(冢).68) 毎上冢伏臘, 祠黄石. 留侯不疑, 孝文帝五年坐不敬, 国除.
자방(子房) 장량이 처음 하비(下邳)의 다리 위에서 자신에게 『태공병법』을 준 노인을 만난 지 13년 후, 고제(高帝)를 따라 제북(濟北)을 지나갔는데 과연 곡성산(穀成山) 아래에서 누런 돌을 보게 되었다. 이에 장량은 그것을 가지고 돌아와 보물처럼 받들며 제사까지 지냈다. 유후가 죽자 누런 돌을 그와 함께 안장했다. 그 후 사람들은 성묘하는 날이나 복일(伏日), 납일(臘日)이면 으레 장량뿐만 아니라 누런 돌에게도 제사를 지냈다.
유후 장불의가 효문제(孝文帝) 5년에 불경죄를 범함으로써 그의 후국(侯國)은 폐지되고 말았다.
太史公曰:学者多言無鬼神, 然言有物.69) 至如留侯所見老父予書, 亦可怪矣.70) 高祖離困者數矣, 而留侯常有功力焉, 豈可謂非天乎? 上曰:「夫運籌筴帷帳之中, 決勝千里外, 吾不如子房.」余以為其人計魁梧奇偉,71) 至見其図, 状貌如婦人好女. 蓋孔子曰:「以貌取人, 失之子羽.」72)留侯亦云.
태사공이 말했다.
“학자들은 대부분 귀신은 없다고 말하면서도 또 괴이한 일이 있다고들 한다. 즉 유후(留侯)가 만난 노인이 그에게 책을 준 것과 같은 일은 괴이하다고 할 것이다. 한 고제(漢高帝)가 곤궁에 처한 것이 여러 차례였는데, 유후는 그때마다 늘 공로를 세웠으니, 이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고제가 일찍이 말하기를 ‘군정(軍情)을 분석해 군영 안에서 계책을 세워 천리 밖의 승부를 결정짓는 데에 나는 자방(子房)만 못하다’라 했다. 나는 본디 자방은 아마 체격이 몹시 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그의 화상(畵像)을 보았더니 얼굴 생김새가 여자처럼 예뻤다. 원래 공자(孔子)도 ‘용모로써 사람을 평가한다면 나는 자우(子羽)에 대해서는 실수를 했다’라고 말했듯이, 유후에 대해서도 또한 그러할 것이다.”
[각주]
1 索隠韋昭云「留, 今属彭城」. 按:良求封留, 以始見高祖於留故也. 正義括地志云:「故留城在徐州沛県東南五十五里. 今城内有張良廟也.」
2 索隠漢書云字子房. 按:王符、皇甫謐並以良為韓之公族, 姫姓也. 秦索賊急, 乃改姓名. 而韓先有張去疾乃張譴, 恐非良之先代.
3 索隠良既歴代相韓, 故知其先韓人. 顧氏按:後漢書云「張良出於城父」, 城父県属潁川也. 正義括地志云:「城父在汝州郟城県東三十里, 韓(里)[地]也.」
4 集解應劭曰:「大父, 祖父. 開地, 名.」
5 集解韓系家及系本作桓恵王.
6 索隠謂大父及父相韓五王, 故云五代.
7 正義今陳州也.
8 集解如淳曰:「秦郡県無倉海. 或曰東夷君長.」 索隠姚察以武帝時東夷穢君降, 為倉海郡, 或因以名, 蓋得其近也. 正義漢書武帝紀云「[元朔]元年, 東夷穢君南閭等降, 為倉海郡, 今貊穢国」, 得之. 太史公修史時已降為郡, 自書之. 括地志云:「穢貊在高麗南, 新羅北, 東至大海西.」
9 集解服虔曰:「狙, 伺候也.」應劭曰:「狙, 七預反, 伺也.」徐広曰:「伺候也, 音千恕反.」 索隠按:應劭云「狙, 伺也.」一曰狙, 伏伺也, 音七予反. 謂狙之伺物, 必伏而候之, 故今云「狙候」是也.
10 索隠服虔云「地在陽武南」. 按:今浚儀西北四十里有博浪城. 正義晉地理記云「鄭陽武県有博浪沙」. 按:今當官道也.
11 索隠按:漢官儀天子属車三十六乗. 属車即副車, 而奉車郎御而従後.
12 索隠嘗訓経也. 閒, 閑字也. 従容, 閒暇也. 従容謂従任其容止, 不矜荘也.
13 索隠邳, 被眉反. 按:地理志下邳県属東海. 又云邳在薛, 後徙此. 有上邳, 故此曰下邳也.
14 集解徐広曰:「圯, 橋也, 東楚謂之圯. 音怡.」 索隠李奇云「下邳人謂橋為圯, 音怡」. 文穎曰「沂水上橋也」. 應劭云「沂水之上也」. 姚察見史記本有作土旁者, 乃引今会稽東湖大橋名為霊圯. 圯亦音夷, 理或然也.
15 索隠崔浩云「直猶故也」, 亦恐不然. 直言正也, 謂至良所正堕其履也.
16 集解徐広曰:「一云『良怒, 欲罵之』.」 索隠殴音烏后反.
17 索隠業猶本先也. 謂良心先已為取履, 故遂跪而履之.
18 集解徐広曰:「一曰『為其老, 強忍, 下取履, 因進之. 父以足受, 笑而去. 良殊大驚. 父去里所, 复還』.」
19 集解徐広曰:「編, 一作『篇』.」
20 正義括地志云:「谷城山一名黄山, 在済州東阿県東. 済州, 故済北郡. 孔文祥云『黄石公[状], 鬚眉皆白, (状)杖丹黎, 履赤舃』.」
21 正義七錄云:「太公兵法一■三巻. 太公, 姜子牙, 周文王師, 封斉侯也.」
22 集解漢書音義曰:「官名.」
23 索隠殆訓近也.
24 集解徐広曰:「即司徒耳, 但語音訛転, 故字亦随改.」
25 集解徐広曰:「嶢音尭.」
26 集解徐広曰:「五, 一作『百』.」
27 索隠音其試二音.
28 索隠謂卒将離心而懈怠.
29 集解徐広曰:「一本『噲諫曰:「沛公欲有天下邪? 将欲為富家翁邪?」沛公曰:「吾欲有天下.」噲曰:「今臣従入秦宮, 所観宮室帷帳珠玉重宝鍾鼓之飾, 奇物不可勝極, 入其後宮, 美人婦女以千數, 此皆秦所以亡天下也. 願沛公急還霸上, 無留宮中.」沛公不聴』.」
30 集解晉灼曰:「資, 藉也. 欲沛公反秦奢泰, 服倹素以為藉也.」
31 索隠按:此語見孔子家語.
32 集解徐広曰:「呂静曰鯫, 魚也, 音此垢反.」 索隠呂静云「鯫, 魚也, 謂小魚也, 音此垢反」. 臣瓚按:楚漢春秋鯫生本姓(解)[鯫].
33 集解如淳曰:「本但與巴蜀, 故請漢中地.」
34 正義括地志云:「褒谷在梁州褒城県北五十里南中山. 昔秦欲伐蜀, 路無由入, 乃刻石為牛五頭, 置金於後, 偽言此牛能屎金, 以遺蜀. 蜀侯貪, 信之, 乃令五丁共引牛, 塹山堙谷, 致之成都. 秦遂尋道伐之, 因号曰石牛道. 蜀賦以石門在漢中之西, 褒中之北是.」又云:「斜水源出褒城県西北衙嶺山, 與褒水同源而流派. 漢書溝洫志示褒水通沔, 斜水通渭, 皆以行船.」
35 集解張晏曰:「求借所食之箸用指畫也. 或曰前世湯武箸明之事, 以籌度今時之不若也.」
36 索隠按:崔浩云「表者, 標榜其里門也」. 商容, 紂時賢人也. 韓詩外傳曰「商容執羽籥馮於馬徒, 欲以化紂而不能, 遂去, 伏於太行山. 武王欲以為三公, 固辞不受」. 余解在商紀.
37 集解徐広曰:「釈, 一作『式』. 拘, 一作『囚』.」
38 集解如淳曰:「革者, 革車也;軒者, 赤黻乗軒也. 偃武備而治礼樂也.」 索隠蘇林云:「革者, 兵車也;軒者, 朱軒皮軒也. 謂廃兵車而用乗車也.」説文云:「軒, 曲周屏車.」
39 索隠按:晉灼云「在弘農閺郷南谷中」. 應劭. 十三州記「弘農有桃丘聚, 古桃林也」. 山海経云「夸父之山, 北有桃林, 広三百里」也.
40 集解漢書音義曰:「唯當使楚無彊, 彊則六国弱従之.」 索隠按:荀悦漢紀説此事云「独可使楚無彊, 若彊, 則六国屈橈而従之」. 又韋昭云「今無彊楚者, 言六国立必复屈橈従楚」. 是二説意同也.
41 索隠高祖罵酈生為豎儒, 謂此儒生豎子耳. 幾音祈. 幾者, 殆近也. 而公, 高祖自謂也. 漢書作「乃公」, 乃亦汝也.
42 集解如淳曰:「复音複. 上下有道, 故謂之复道.」韋昭曰:「閣道.」
43 集解徐広曰:「多作『生平』.」
44 集解漢書音義曰:「未起時有故怨.」
45 索隠地理志県名, 属広漢. 什音十. 正義括地志云:「雍歯城在益州什邡県南四十歩. 漢什邡県, 漢初封雍歯為侯国.」
46 正義殽, 二殽山也, 在洛州永寧県西北二十八里. 函谷関在陝州桃林県西南十二里.
47 正義隴山南連蜀之岷山, 故云右隴蜀也.
48 索隠崔浩云:「苑馬牧外接胡地, 馬生於胡, 故云胡苑之利.」 正義博物志云「北有胡苑之塞」. 按:上郡、北地之北與胡接, 可以牧養禽獣, 又多致胡馬, 故謂胡苑之利也.
49 索隠按:此言「謂」者, 皆是依憑古語. 言秦有四塞之国, 如金城也. 故淮南子云「雖有金城, 非粟不守」. 又蘇秦説秦恵王云「秦地勢形便, 所謂天府」. 是所憑也.
50 索隠按:周礼「二曰詢国遷」, 乃為大事. 高祖即日西遷者, 蓋謂其日即定計耳, 非即日遂行也.
51 集解漢書音義曰:「服辟谷之薬, 而静居行気.」
52 索隠四人, 四皓也, 謂東園公、綺里季、夏黄公、角里先生. 按:陳留志云「園公姓庾, 字宣明, 居園中, 因以為号. 夏黄公姓崔名広, 字少通, 斉人, 隠居夏里修道, 故号曰夏黄公. 角里先生, 河内軹人, 太伯之後, 姓周名術, 字元道, 京師号曰霸上先生, 一曰角里先生」. 又孔安国袐記作「祿里」. 此皆王劭拠崔氏、周氏系譜及陶元亮四八目而為此説.
53 索隠此語出韓子.
54 集解徐広曰:「夷猶儕也.」 索隠如淳云:「等夷, 言等輩.」
55 集解晉灼曰:「鼓行而西, 言無所畏也.」
56 集解司馬彪曰:「長安県東有曲郵聚.」 索隠郵音尤. 按:司馬彪漢書郡国志長安有曲郵聚. 今在新豊西, 俗謂之郵頭. 漢書旧儀云「五里一郵, 郵人居閒, 相去二里半」. 按:郵乃今之候也.
57 集解如淳曰:「調護猶営護也.」
58 集解韋昭曰:「繳, 弋射也. 其矢曰矰.」 索隠馬融注周礼云:「矰者, 繳繋短矢謂之矰.」一説云矰, 一弦, 可以仰高射, 故云矰也.
59 索隠音曲穴反, 謂曲終也. 説文曰:「闋, 事[已閉門]也.」
60 集解徐広曰:「一云『出奇計下馬邑』.」
61 集解漢書音義曰:「何時未為相国, 良勧高祖立之.」
62 索隠春秋緯云:「舌在口, 長三寸, 象斗玉衡.」
63 索隠列仙傳:「神農時雨師也, 能入火自焼, 崑崙山上随風雨上下也.」
64 索隠賓亦反.
65 集解徐広曰:「一云『乃学道引, 欲軽挙』也.」
66 集解徐広曰:「文成侯立十六年卒, 子不疑代立. 十年, 坐與門大夫吉謀殺故楚内史, 當死, 贖為城旦, 国除.」
67 集解徐広曰:「史記珍宝字皆作『葆』.」
68 正義括地志云:「漢張良墓在徐州沛県東六十五里, 與留城相近也.」
69 索隠按:物謂精怪及薬物也.
70 索隠按:詩緯云「風后, 黄帝師, 又化為老子, 以書授張良」. 亦異説.
71 集解應劭曰:「魁梧, 丘虚壮大之意.」 索隠蘇林云「梧音忤」. 蕭該云「今読為吾, 非也」. 小顔云「言其可驚悟」.
72 索隠子羽, 澹台滅明字也. 仲尼弟子傳云「状貌甚悪」. 又韓子云「子羽有君子之容, 而行不称其貌」, 與史記文相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