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歷史와文學/史記世家

史記 卷五六. 陳丞相世家

柳川 2019. 6. 23. 13:29

                             卷五六. 陳丞相世家

 

<진평의 집안과 젊은날 생활>


진()나라 승상 평()은 양무() 호유향() 사람이다. 젊었을 때는 가난하고 독서를 좋아했다. 30무()의 땅이 있었고 혼자서 형인 진백()과 함께 살았다. 진백은 늘 농사일을 하면서 진평에게 마음껏 돌아다니며 공부하게 했다. 진평은 키가 크고 잘 생겼다. 사람들이 간혹 진평에게 “가난한데 뭘 먹고 그렇게 살이 쪘냐?”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형수는 진평이 집안의 생계를 돌보지 않자, 화가 나서 “쌀겨나 먹을 수밖에! 시동생이라는 게 저 모양이니 없는 편이 낫지!”라고 했다. 진백이 이를 듣고는 자기 아내를 내쫓아 버렸다.

진평이 장성하여 아내를 얻을 때가 되었지만 부잣집은 (딸을) 주려하지 않았고, 가난한 집은 진평이 부끄럽게 여겼다. 그렇게 한참이 지났다. 호유향에 장부()라는 부자가 있었다. 장부의 손녀딸은 다섯 번 시집을 갔는데 줄줄이 남편이 죽어서 아내로 맞이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진평이 그녀를 얻고 싶었다.

마을에 마침 초상이 나서 가난한 진평이 장례를 돕게 되었는데 먼저 가서 나중에 나오는 것으로 도움을 주었다. 장부가 상가에서 진평을 보게 되었는데, 특별히 풍채가 좋은 진평을 눈 여겨 보았다. 진평 역시 일부러 맨 나중에 자리를 떴다. 장부가 진평을 따라 그 집에 가보니 집은 성 담장 근처의 궁색한 골목에 다 헤어진 돗자리 같은 것을 문으로 삼고 있었지만 문밖에는 신분 있는 자들이 다녀간 수레바퀴 자국이 많았다.

장부가 돌아와 그 아들 중()에게 “내가 손녀를 진평에게 주려고 한다.”라고 했다. 장중이 “진평은 가난하고 일도 하지 않아, 현 사람들이 모두 그것을 비웃는데 어찌 딸을 줘야 한단 말입니까?”라고 했다. 장부가 “진평 처럼 저렇게 잘 생긴 사람이 언제까지 가난하고 천하게 지내겠느냐?”며 기어이 딸을 주었다. 진평이 가난했기 때문에 돈을 빌려주어 예를 차리게 하고, 술이며 고기 살 돈을 주어 아내를 맞이하게 했다. 장부는 손녀딸에게 “가난하다고 사람을 섬김에 소홀함이 없도록 해라. 그 형님 진백은 아버지 모시듯 하고, 그 형수는 어머니처럼 섬겨라.”라고 주의를 주었다. 진평이 장씨 딸을 아내로 얻고는 쓸 돈이 넉넉해져 교류 범위가 갈수록 넓어졌다.

마을에 마침 제사가 있어 진평이 주재()했는데 고기를 아주 고르게 잘 나누었다. 어른들이 “잘 하는구나, 진씨 젊은이가 주재 노릇을!”라고 했다. 진평이 “어허, 진평에게 천하를 주재하게 해도 고기 나누듯 잘 한텐데!”라고 했다.


마을 제사에서 고기를 공평하게 나누는 진평

<여섯 차례의 기이한 계책과 그 역할>


진섭()이 봉기하여 진()나라에서 왕이 되어 주시()에게 위()나라 지역을 평정하고 위구()를 위왕()으로 세워서는 임제()에서 진()나라 군대와 싸우게 했다. 진평은 그에 앞서 그 형 진백과 이별하고 젊은이들을 따라 임제로 가서 위왕 구()를 모셨다. 위왕이 그를 태복()으로 삼았다. 위왕에게 유세했으나 듣지 않았고, 누군가 그를 헐뜯어서 진평은 도망쳤다.

한참 뒤, 항우()가 각지를 공략하여 황하 부근에 이르자 진평은 항우에게 가서 그를 따라 진나라를 격파하자, 항우는 진평에게 경()의 작위를 내렸다. 항우는 동쪽 팽성()으로 가서 왕이 되었다. 한왕은 (관중으로) 돌아와 삼진을 평정하고 동쪽으로 나아갔는데, 은왕()이 초나라를 배반했다. 항우는 이에 진평을 신무군()으로 삼아 초나라에 몸을 맡기고 있던 위왕 구를 데리고 은왕을 쳐서 항복하게 한 다음 돌아오게 했다. 항왕은 항한()을 시켜 진평을 도위()에 임명하고 황금 20일()을 내리게 했다.

얼마 되지 않아, 한왕이 은왕을 공격하여 함락시키자 항왕은 노하여 (지난번) 은왕을 평정했던 장수와 관리들을 죽이려 했다. 진평은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 황금과 도장을 잘 싸서 사람을 시켜 항왕에게 돌려주고, 혼자 검 한 자루를 챙겨 샛길로 도망쳤다. 황하를 건너는데 뱃사공이 잘 생긴 사내가 혼자 다니는 것을 보고는 도망친 장수로 허리춤에 틀림없이 금이며 옥 따위가 있을 것으로 의심하여 눈여겨보고 있다가 죽이려 했다. 진평이 겁이 나서 바로 옷을 벗고 알몸이 되어 노 젓는 것을 거들었다. 사공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는 생각을 접었다.

진평이 수무()에 이르러 한나라에 투항한 다음 위무지()를 통해 한왕을 만나길 청하자 한왕이 불러들였다. 이때 만석군() 석분()이 한왕의 중연()이었는데 진평의 명함을 받고는 진평을 데리고 들어갔다. 진평 등 일곱 사람이 함께 들어갔는데 먹을 것을 주면서 한왕이 “끝나면 숙소로 가라.”고 했다. 진평은 “신은 일이 있어 왔고, 해야 할 말은 오늘을 넘길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이에 한왕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는 기뻐하며 “그대는 초나라에서 어떤 자리에 있었는가?”라고 물었다. 진평이 “도위였습니다.”라고 답하자 그날로 진평을 도위에 임명하고 함께 수레를 탈 수 있는 참승()으로 군대를 감독하게 했다.

여러 장수들이 모두 “대왕께서 오늘 하루 만에 초나라에서 도망쳐온 졸병을 얻어 그 능력이 어떤 지도 모른 채 바로 함께 수레에 탈 수 있게 하고 게다가 고참들을 감독하게 하시다니요?”라며 아우성을 쳤다. 한왕이 그런 말을 듣자 진평을 더욱 총애했다.

드디어 함께 동쪽으로 항왕을 쳐서, 팽성에 이르렀으나 초나라에게 패했다. 군대를 이끌고 돌아오면서 흩어진 병사들을 수습하여 형양()에 이르러 진평을 아장()으로 삼아 한왕() 한신()에게 예속시켜 광무()에 주둔하게 했다.

강후(), 관영() 등이 모두 진평에 대해 “진평이 잘 생긴 사내이긴 하지만 모자에 장식하는 옥과 같아, 분명 그 속에 든 것이 없습니다. 신들이 듣기에 진평이 집에 있을 때 그 형수를 훔쳤고, 위나라를 섬겼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초나라로 도망쳤으며, 초나라에 붙어서도 제대로 되지 않자, 다시 한나라로 도망쳐왔습니다. 그리고 오늘 대왕께서 높은 자리를 주고 군을 감독하게 했습니다. 신이 듣기에 진평은 장수들에게 금을 받았는데, 금이 많으면 잘 봐주고 금이 적으면 나쁘게 대한다고 합니다. 진평은 왔다 갔다 하며 혼란만 일으키는 난신일 뿐입니다. 왕께서는 잘 살피십시오!”라고 헐뜯었다.

한왕이 의심을 들어, 위무지를 불러 꾸짖자 위무지는 이렇게 말했다.

“신이 드린 말씀은 능력이고, 대왕께서 물으신 것은 행실입니다. 지금 미생()이나 효기()와 같은 효행이 있다고 한들 승부를 가르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폐하께서는 언제 그를 쓰실 것입니까? 초나라와 한나라가 서로 맞선 상황에서 신이 기발한 능력을 가진 인재를 추천한 바, 그 계책이 진짜 나라에 이로운지 여부를 따지면 그만이지, 형수를 훔치고 금을 받은 일이 무슨 의심거리가 된단 말입니까?”

한왕이 진평을 불러 “선생은 위나라를 섬기다 맞지 않자 초나라를 섬겼고, 지금 또 나를 따르려 한다. 신의를 아는 사람이면 정말이지 여러 마음을 품을 수 있나?”라고 나무랐다. 진평은 이렇게 말했다.

“신이 위왕을 섬겼지만 위왕은 신의 말을 쓰지 않았기에 떠나서 항왕을 섬겼습니다. 항왕은 남을 믿지 못했고, 자기가 믿고 아끼는 사람이라고는 항씨 아니면 처의 가족들 뿐이었습니다. 특별한 인재가 있어도 기용하지 못했기에 진평은 초나라를 떠났던 것입니다. 한왕께서 사람을 잘 쓰신다고 하기에 대왕에게 몸을 맡겼습니다. 신은 맨 몸으로 왔기에 돈을 받지 않으면 쓸 것이 없습니다. 신의 계획에 취할 만한 것이 있으면 대왕께서는 그것을 쓰십시오. 쓸 만한 것이 없으면 돈은 그대로 있으니 잘 싸서 관청으로 보내게 하고 저는 제 자리로 돌아가게 해주십시오.”

한왕이 이에 사과하고, 많은 상을 내리고는 호군중위()에 임명하여 모든 장수들을 감독하게 하니 장수들이 다시는 말하지 못했다.

그 후 초나라가 급하게 공격하여 한나라의 식량 보급로를 끊고 형양성()에서 한왕을 포위했다. 얼마 뒤, 한왕이 이 상황을 걱정하며 형양 서쪽 땅을 떼어주고 강화를 청했지만 항왕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왕이 진평에게 “이 어지러운 천하가 언제나 안정되겠소?”라고 하자 진평은 이렇게 말했다.

“항왕이란 사람은 남을 공경하고 사랑하여 절개 있고 예를 좋아하는 선비들이 많이 그에게 몸을 맡깁니다. 공을 논하여 벼슬과 땅을 주어야 할 때는 아까워하여 선비들이 또 이 때문에 가까이하지 않습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오만하고 예의를 가벼이 여기기 때문에 청렴하고 절개 있는 사람들이 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대왕께서는 벼슬과 땅을 잘 주시기 때문에 절개 없고 이익을 바라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이 한나라로 많이 몸을 맡기는 것입니다.

둘의 단점은 버리고 장점을 취한다면 천하는 손가락만 저어도 안정될 것입니다. 그러나 대왕께서는 멋대로 사람을 욕하기 때문에 청렴하고 절개 있는 선비들을 못 얻는 것입니다. 보아하니 초나라를 어지럽힐 수는 있습니다. 저 항왕의 강직한 신하들이라면 아보(), 종리매(), 용차(), 주은() 등 몇 사람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왕께서 만약에 금 수 만 근을 내놓으실 수 있다면 이간책으로 군신을 갈라놓아 그 마음을 서로 의심하게 할 수 있습니다. 항왕은 질투심이 강한 사람이라 헐뜯는 말을 믿고 틀림없이 서로를 죽이게 될 것입니다. 한나라는 이 틈에 군대를 일으켜 공격하면 반드시 초나라를 격파할 것입니다.”

한왕은 그럴듯하다고 여기고 바로 금 4만 근을 내어 진평에게 주면서 마음대로 쓰게 하되 (돈의) 출입은 묻지 않았다.

진평이 많은 금으로 초나라 군대에 대해 이간책을 썼는데, 종리매 등 장수들이 항왕의 장수가 되어 공이 많은데도 땅을 떼어 끝내 왕이 되지 못해서 한왕과 하나가 되어 항씨를 멸하고 그 땅을 나누어 왕이 되려 한다고 선전했다.

항왕이 과연 종리매 등을 불신했다. 항왕이 이들을 의심되자 한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한왕은 태뢰()급 음식을 마련해 들고 들어가서는 초나라의 사신을 보고 짐짓 놀란 듯 “나는 아보의 사신을 줄 알았는데 항왕의 사신이군!”라며 (태뢰를) 다시 들고 나가게 하고 형편없는 음식을 초나라의 사신에게 바꾸어 들이게 했다. 초나라의 사신이 돌아와 항왕에게 모두 보고하자 항왕은 아니나 다를까 아보를 크게 의심했다. 아보는 서둘러 형양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려 했으나 항왕은 믿지 않고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아보는 항왕이 자신을 의심한다는 말을 듣고는 화를 내며 “천하 대사가 정해졌으니 군왕이 스스로 알아서 아시오! 나는 내 자리로 돌아가길 원합니다.”라고 했다.

(아보가 집으로) 돌아가다가 팽성에 이르기 전에 등창이 나서 죽고 말았다. 진평은 바로 밤중에 여자 2천 명을 형양성 동쪽 문으로 내보냈고 초나라는 그것을 공격했다. 이에 진평은 한왕과 성 서쪽 문을 통해 밤중에 빠져나갔다. 이렇게 관중으로 들어가 흩어진 병력을 수습하여 다시 동쪽으로 나아갔다.


진평의 이간책에 희생된 항우의 책사 범증


그 이듬해(기원전 203년)에 회음후()가 제()나라를 격파하고 스스로 제왕이 되어 사신을 보내 한왕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한왕이 크게 성을 내자 진평이 한왕의 발을 밟았고 한왕도 깨달은 바가 있어 제나라의 사신을 후하게 대접하는 한편 장자방을 시켜 한신을 결국 제왕으로 세웠다. 진평에게 호유향()을 봉해 주었다. 그의 기묘한 계책을 써서 마침내 초나라를 멸망시켰다. 일찍이 호군중위로서 한왕을 따라 연왕() 장도()를 평정하기도 했다.

한 6년에 누군가가 초왕() 한신이 모반했다고 글을 올렸다. 고제가 장수들에게 묻자 장수들은 “서둘러 군대를 내서 그 놈을 파묻어야 합니다!”라고 했다. 고제는 말이 없었다. 진평에게 묻자 진평은 한사코 말하길 사양하다가 “장수들은 뭐라 하던가요?”라고 물었다. 주상이 다 말해주자 진평이 이렇게 물었다.

“누군가 글을 올려 한신이 모반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또 있습니까?” 
“모르지.” 
“한신은 알고 있습니까?” 
“모르지.” 
“폐하의 정예병은 초나라와 누가 더 낫습니까?” 
“못 이기지.” 
“폐하의 장수들이 용병에서 한신을 능가하는 자가 있습니까?” 
“못 미치지.” 
“지금 병력은 초나라에 비해 날카롭지 못하고, 장수도 미치지 못하는데 군대를 일으켜 그를 공격하는 것은 싸움을 부추기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폐하가 위험합니다.” 
“그럼 어찌 해야 하오?”

이에 진평은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 천자가 순수()를 나가면 제후들을 만났습니다. 남방에 운몽()이라곳이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그냥 운몽으로 시찰나간다고 하시고 진()나라에서 제후들을 만나십시오. 진나라는 초나라의 서쪽 경계인데 한신이 천자께서 즐겁게 놀러 나왔다는 말을 들으면 별다른 상황이 아니니 교외로 맞이하러 나와 인사를 올릴 것입니다. 인사를 올리면 폐하께서 그 때 잡으면 되는데, 이 일은 그저 역사 한 사람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고제가 괜찮다고 여겨 바로 사신을 보내 제후들에게 “내가 남쪽 운몽으로 놀러나갈 것이다.”라며 진에서 만나자고 일렀다. 주상은 바로 행차했다. 일행이 진에 이르기 전에 초왕 한신이 과연 교외 길로 나와 맞이했다. 고제는 무사들을 준비시켰다가 한신이 도착하는 것을 보고는 바로 잡아 묶어서는 뒤따르는 수레에 태웠다. 한신이 “천하가 이미 평정되었으니 나는 삶기는 것도 당연하지!”라고 고함을 질렀다. 고제가 한신을 돌아보며 “너는 아무 소리하지 말라! 너의 모반이 이미 분명해졌다!”라고 했다. 무사들이 등 뒤로 두 손을 묶었다.

이윽고 진나라에서 제후들을 만나고 초나라 지역을 완전히 평정했다. 돌아오다가 낙양()에 이르러 한신을 사면하여 회음후()에 봉하고, 공신들에게 부절()을 나누어 주며 봉지()를 정해주었다.

그리고 진평에게도 부절을 주며 대대손손 끊어지지 않도록 하고 호유후()로 삼았다. 진평은 “이는 신의 공이 아닙니다.”라며 사양했다. 주상이 “내가 선생의 계책을 사용하여 싸워 적을 무찔러 이겼는데 공이 아니라니 무슨 말이오?”라고 했다. 진평은 “위무지가 아니었으면 신이 어찌 여기까지 왔겠습니까?”라고 했다. 주상이 “그대야말로 근본을 배반하지 않는 사람이라 할 수 있겠소!”라며 위무지에게도 상을 내렸다.

그 이듬해에 호군중위로 (고제를) 따라 반역자 한왕() 신()을 대()에서 공격하여 곧장 평성()에까지 이르렀는데, 흉노에게 포위당해 7일 동안 먹지도 못했다. 고제가 진평의 기이한 계책을 써서 선우()의 연지()에게 사람을 보내고서야 포위를 풀 수 있었다. 고제가 탈출했지만 그 계책은 비밀이라서 세상에 들은 사람이 없었다.


<여태후의 집권과 진평의 처세>


고제가 남쪽 곡역()을 지나다가 그 성에 올라 그 집들이 아주 큰 것을 보고는 “정말 장관이로구나! 내가 천하를 다녔지만 낙양과 이곳뿐이다!”라 하고는 고개를 돌려 어사에게 “곡역의 호구가 몇인가?”라고 물었다. 어사가 “처음 진나라 때는 3만 호가 넘었지만 최근 전쟁이 여러 번 있어 많이들 숨고 하여 지금은 5천 호 정도만 보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고제는 어사에게 조서를 내려 진평을 곡역후()로 바꾸고 곡역 전체를 식읍으로 주는 한편 이전 호유향 식읍은 취소했다.

그 후에도 늘 호군중위로서 (고제를) 따라 진희()와 경포()를 공격했다. 모두 여섯 번 기이한 계책을 낼 때마다 식읍이 더 늘었고 모두 여섯 차례 더 봉해졌다. 기이한 계책은 자못 신비스러워 세상에서 그것을 들을 수는 없었다.

고제가 경포를 격파하고 전선에서 돌아오는데 부상이 심해져 천천히 장안에 이르렀다. 연왕() 노관()이 반란을 일으키자 주상은 번쾌()에게 상국()의 신분으로 군대를 거느리고 그를 공격하게 했다. 이미 떠났는데 누군가 번쾌에 대해 나쁜 말을 했다.

고제가 노하여 “번쾌가 내가 병난 것을 보고 내가 죽기를 바란단 말인가?”라며 진평의 계책을 써서 강후() 주발()을 병상으로 불러 “진평은 서둘러 주발을 역참의 수레에 태우고 달려가서 번쾌를 대신하여 군을 이끌게 하고, 진평은 군중에 이르면 바로 번쾌의 목을 베어라!”라는 조서를 내렸다.

두 사람이 조서를 받고는 역참의 수레를 타고 갔는데 군중에 이르기 전에 도중에 서로 상의하길 “번쾌는 황제의 오랜 친구로서 공도 많고 또 여후의 동생 여수()의 남편으로 황제의 친인척이자 귀한 몸이다. 황제께서 한 순간 화가 나서 목을 베려 하지만 후회하실까 두렵소. 차라리 그를 묶어 주상에게 보내 주상이 친히 죽이게 하는 것이 낫겠소.”라고 했다. 군중에 이르기 전에 단을 만들어 부절로 번쾌를 소환하여 번쾌가 조서를 받자 두 손을 뒤로 묶어 죄수용 수레에 실어 장안으로 보냈다. 그리고 강후 주발에게 대신 장수가 되어 병사를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킨 연나라의 현들을 평정하게 했다.


진평의 기지로 목숨을 건지게 되는 번쾌


진평이 돌아오는 길에 고제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진평은 여태후와 여수가 화를 낼까봐 두려워 마차를 몰아 먼저 갔다. 도중에 진평과 관영에게 형양에 주둔하라는 조서를 가진 사신을 만났다. 조서를 받은 진평은 다시 수레를 몰아 궁으로 들어가 슬프게 곡을 하면서 그 틈에 고제가 죽기 전에 있었던 일을 아뢰었다. 여태후가 진평을 가엽게 여기며 “그대는 수고했으니 가서 쉬도록 하시오.”라고 했다. 진평은 (자신이 없을 때) 참소가 전해질까 두려워 궁정에서 숙위하겠다고 강하게 요청했다. 태후는 바로 낭중령에 임명하면서 “효혜제를 잘 보좌하도록 하시오.”라고 했다. 이후 여수의 참소는 행해지지 못했다. 번쾌는 (장안에) 이르러 사면을 받고 벼슬과 땅을 회복했다.

한 혜제 6년에 상국() 조참()이 죽자, 안국후() 왕릉()이 우승상, 진평이 좌승상이 되었다.

왕릉은 옛 패현() 사람이다. 당초 현의 호협()으로서 고제가 보잘 것 없던 시절 왕릉을 형님으로 섬겼다. 왕릉은 예의를 잘 따지지 않고 기분 내키는 대로 하며 직언하길 좋아했다.

고조가 패현에서 봉기해 함양에 들어갔을 때 왕릉도 스스로 무리 수 천을 모아 남양을 거점으로 삼고 패공을 따르려 하지 않았다. 한왕이 (관중으로) 돌아와 항적을 공격하자 왕릉은 바로 군사를 한에 소속시켰다. 항우가 왕릉의 어머니를 잡아 군중에 두었는데, 왕릉이 사람을 보내자 왕릉의 어머니를 동쪽 상석에 앉힘으로써 왕릉을 끌어들이려 했다.

왕릉의 어머니는 사신과 송별할 때 개인적으로 눈물을 흘리며 “늙은이를 위해 왕릉에게 한왕을 잘 모실 것이며, 한왕은 장자이시니 늙은이 때문에 두 마음을 품지 말라고 하시오. 이 늙은이는 죽음으로 사신을 떠나보내리다.”라 하고는 검으로 자결했다. 항왕이 노하여 왕릉 어머니를 삶아 버렸다. 왕릉은 한왕을 따라 끝내 천하를 평정했다. 옹치()와 사이가 좋았으나 옹치는 한왕의 원수인데다 왕릉이 당초 고제를 따를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늦게야 안국후()에 봉해졌다.


장렬하게 자결하는 왕릉의 어머니


안국후가 우승상()이 된 지 2년에 혜제()가 세상을 떠났다. 여후가 여씨들을 왕으로 세우고자 하여 왕릉에게 물었더니 왕릉은 “안 됩니다.”라고 했다. 진평에게 물었더니 진평은 “괜찮습니다.”라고 했다.

여후가 화가 나서 왕릉을 황제의 태부로 옮기는 것처럼 하여 실제로 왕릉을 기용하지 않았다. 왕릉은 화가 나서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는 문을 닫고 조정에 나오지 않다가 7년 만에 죽었다.

왕릉이 승상에서 면직되자 여후는 바로 진평을 우승상으로 옮기고 벽양후() 심이기()를 좌승상으로 임명했다. 좌승상은 일할 장소가 없어 늘 궁중에서 복무했다.

심이기도 패현 사람이다. 한왕이 팽성에서 패하여 서쪽으로 갔을 때 초나라가 태상황(한왕의 아버지)과 여후를 인질로 잡았는데 심이기가 측근으로서 여후를 모셨다. 그 뒤 (고조를) 따라 항적을 격파하여 후에 봉해졌고, 여후의 사랑을 받았다. 상이 되어 궁중에 거주하게 되자 백관들이 모두 그를 통해 일을 결재했다.

여수()는 늘 진평이 전에 고제에게 번쾌를 잡을 계책을 냈던 일로 여러 차례 “진평이 승상이 되어서는 일은 않고 날마다 술이나 마시고 부녀자를 희롱합니다.”라고 헐뜯었다. 진평이 이 이야기를 듣고는 날마다 더 심하게 했다. 여태후가 이를 듣고는 혼자 기뻐했다. 여수가 있는 자리에서 진평에게 “속담에 ‘아녀자의 입은 믿을 수 없다’고 했으니 그대와 내가 어떤가를 보면 그만이지 여수의 참소는 두려워하지 마시오.”라고 했다.

여후가 여씨들을 왕으로 세우자 진평은 짐짓 거기에 따랐다. 여태후가 세상을 떠나자 진평은 태위 주발과 함께 모의하여 끝내 여씨들을 죽이고 효문제를 옹립하니 진평이 주모자였다. 심이기가 승상에서 면직되었다.


<문제 통치기에 진평의 행적>


문제가 즉위하여 태위 주발이 몸소 병사를 이끌고 여씨들을 죽인 공이 많다고 여겼다. 이에 진평은 주발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병을 핑계로 사직하려고 했다. 효문제가 막 즉위하여 진평이 병을 핑계 대는 것이 괴이하여 물었다. 진평은 “고제 때 주발의 공은 신 진평만 못했습니다. 여씨들을 죽인 일에서 신의 공은 주발만 못합니다. 원하옵건대 우승상을 주발에게 양보하고자 합니다.”라고 했다. 이에 효문제는 강후 주발을 우승상에게 임명하니 서열 제일이었다. 진평을 좌승상으로 옮기니 서열 두 번째였다. 진평에게 금 1천 근을 내리고 식읍 3천 호를 더했다.



진평과 여씨 세력을 척결하는 주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효문제는 갈수록 국가의 일에 익숙해졌다. 한번은 조회에서 우승상 주발에게 “천하에 1년 동안 처리하는 사건이 얼마나 되오?”라고 물었다. 주발은 사죄하며 “모릅니다.”라고 했다. 이어 “그럼 천하에 1년 동안 들어오고 나가는 돈과 곡식이 얼마나 됩니까?”라고 묻자 주발은 또 모른다고 사죄했는데 등에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하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했다.

이에 주상이 다시 좌승상 진평에게 물었다. 진평은 “주관자가 있습니다.”라고 했다. 주상이 “주관자가 누구인가?”라고 묻자 진평은 “폐하께서 사건 처리를 물으시려면 정위를 찾으시면 되고, 돈이나 곡식에 대해 알고 싶으시면 치속내사()를 찾으면 됩니다.”라고 했다.

주상이 “정말 각자 주관하는 자가 있다면 그대가 주관하는 일은 무엇이오?”라고 묻자 진평은 사죄하며 이렇게 말했다.

“신하들을 주관합니다. 폐하께서 신이 모자란 사람이란 것을 모르시고 재상이란 자리에 앉히셨습니다. 재상이란 위로는 천자를 보좌하여 음양을 다스리고 사시를 순조롭게 하며, 아래로는 만물을 알맞게 기르고, 밖으로는 사방 오랑캐와 제후들을 어루만지며, 안으로 백성들이 서로 친목하게 하고, 경대부로 하여금 각자 그 맡은 자리에서 충실하게 일하게 하는 것입니다.”

효문제는 좋다고 칭찬했다. 우승상은 크게 부끄러워 조정에서 나오자 “그대는 어째서 평소 나에게 그런 대답을 가르쳐 주지 않았단 말이오?”라며 진평을 나무랐다. 진평이 웃으며 “그대는 그 자리에 있으면서 그 임무를 몰랐단 말이오? 그럼 폐하께서 장안의 도둑들 숫자를 물으면 그대는 억지로 대답하려고 했소?”라고 했다. 이에 강후는 자신이 능력면에서 진평에 훨씬 못 미친다는 것을 알았다. 얼마 뒤 강후는 병을 핑계로 승상직 사퇴를 청했고, 진평이 홀로 승상을 맡게 되었다.

효문제 2년에 승상 진평이 죽었고, 시호를 헌후()라 했다. 아들 공후() 매()가 후작을 이었다가 2년 만에 죽었고 아들 간후() 진회()가 후작을 이어 받았다. 23년 뒤, 간후가 죽고 아들 진하()가 후작을 이었다. 23년 뒤 진하가 남의 아내를 강탈한 죄로 저자거리에 돌림을 당하는 사형을 받음으로써 나라가 없어졌다.

처음 진평은 “내가 은밀한 음모를 많이 냈는데 이는 도가에서 금기시하는 것들이다. 내 세대에서 (벼슬과 땅이) 폐지된다면 그걸로 끝이어서 다시는 부흥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음모를 많이 쓴 화근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그 증손 진장()이 위씨()와의 친인척 관계 때문에 귀해져서 진씨의 벼슬과 땅을 이어가길 원했지만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마천의 논평>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진 승상 평은 젊었을 때부터 황제와 노자의 법술을 좋아 했다. 또 그가 도마 위의 고기를 나눌 때부터 그 뜻이 이미 원대했다. 그 뒤 초나라와 위나라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다 마침내 고제에게로 갔다. 늘 기이한 책략을 내서 얽히고설킨 어려움을 풀고 국가의 근심을 털어냈다. 여후 때 일들이 많았으나 진평은 결국 자기 힘으로 벗어나 종묘를 안정시키고 명예스러운 명성을 끝까지 지킴으로써 유능한 재상이란 소리를 들었다. 이 어찌 처음과 끝이 다 좋았다고 하지 않겠는가? 지혜와 모략이 아니고서야 누가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