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 卷六十. 三王世家
卷六十. 三王世家
<삼왕이 왕으로 책봉되는 과정> “대사마(大司馬) 신(信) 곽거병(霍去病), 죽음을 무릅쓰고 엎드려 황제 폐하께 아뢰옵니다. 폐하께서 잘못된 말을 들으시고 신 곽거병을 군에서 죄 받기를 기다리게 하셨사오니, 마땅히 변방의 일에 전심전력을 다해 전장에서 해골이 된다 하여도 그 은혜에 보답할 수 없을 것이옵니다. 이에 감히 직분을 벗어나서 이 일에 간섭하고자 하는 것은 폐하께서 천하를 걱정하시고 자신을 잊은 채, 백성을 가엾게 여기시느라 드시는 것과 즐기는 것을 줄이시고 낭관의 수도 줄이신 것을 진정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황자께서 하늘의 도움으로 스스로 옷을 입고, 걸어서 인사를 드릴 만큼 자라셨습니다만 지금까지 봉호가 없고 스승도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공경과 겸양 때문에, 신하들은 사사로이 관망만 하면서 직분을 벗어나 감히 아뢰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에 신은 견마(犬馬)와 같은 충심으로 죽음을 무릅쓰고 엎드려 황제 폐하께 아뢰오니 담당관에게 명하시어 여름 좋은 날을 잡아 황자 자리를 정하게 하시옵소서. 폐하께 삼가 헤아려주시길 신 곽거병 죽음을 무릅쓰고 엎드려 황제 폐하께 아뢰옵니다!” 3월 을해일에 어사(御史)이자 대리 상서령(尙書令)인 광(光)이 미앙궁(未央宮)에 상소문을 올리자 “어사부로 내려 보내라”라는 황제의 명이 있었다. 원수(元狩) 6년 3월 을해일에 어사이자 대리 상서령인 광과 상서승(尙書丞) 비(非)가 어사부에 내려 보낸 글은 이랬다. “승상 장청적(莊靑翟), 어사대부 장탕(張湯), 태상(太常) 조충(趙充), 대행령(大行令) 이식(李息), 태자소부(太子少傅) 겸 종정(宗正) 임안(任安) 등은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옵니다. 대사마 곽거병이 상소해 아뢰기를 ‘폐하께서 잘못된 말을 들으시고 신 곽거병을 군에서 죄 받기를 기다리게 하셨사오니, 마땅히 변방의 일에 전심전력을 다해 전장에서 해골이 된다 하여도 그 은혜에 보답할 수 없을 것이옵니다. 이에 감히 직분을 벗어나서 이 일에 간섭하고자 하는 것은 혜하께서 천하를 걱정하시고 자신을 잊은 백성을 가엾게 여기시느라 드시는 것과 즐기는 것을 줄이시고 낭관의 수도 줄이신 것을 진정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황자께서 하늘의 도움으로 스스로 옷을 입고 걸어서 인사를 드릴 만큼 자라셨습니다만 지금까지 봉호가 없고 선생도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공경과 겸양 때문에, 신하들은 사사로이 관망만 하면서 직분을 벗어나 감히 아뢰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에 신은 견마(犬馬)와 같은 충심으로 죽음을 무릅쓰고 엎드려 황제 폐하께 아뢰오니 담당관에게 명하시어 여름 좋은 날을 잡아 황자 자리를 정하게 하시옵소서. 폐하께 삼가 헤아려주시길 신 곽거병 죽음을 무릅쓰고 엎드려 황제 폐하께 아뢰옵니다!’라 했던바, 폐하께서는 ‘어사부로 내려 보내라’고 하셨습니다. 신들이 중2천석(中二千石), 2천석(二千石) 공손하(公孫賀) 등과 이렇게 논의했사옵니다. 옛날 땅을 나누어 나라를 세움과 동시에 제후들을 세워 천자를 보위한 것은 종묘사직을 높이 받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지금 신 곽거병이 상소하여 그 직분을 잊지 않고, 폐하의 은혜를 선양하고, 천자가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겸양을 말하며 천하를 걱정한 것은 황자에게 아직 봉호가 없음을 염려해서입니다. 신 청적, 신 탕 등이 마땅히 직분을 지켰어야 하지만 어리석어 일을 따라잡지 못했사옵니다. 바야흐로 지금이 여름 좋은 날이니 신 적청, 신 탕 등은 죽음을 무릅쓰고 황자 유굉(劉閎), 유단(劉旦), 유서(劉胥)를 제후왕으로 봉하시길 청하옵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나라 이름을 정하시길 청하옵니다.” 황제는 이렇게 명했다. “대개 듣자하니 주(周)나라가 800 제후를 봉할 때 (왕실과 같은) 희성(姬姓)은 동시에 봉하여 자작(子爵), 남작(男爵), 부용(附庸)이라 했다고 한다. 『예기(禮記)』에는 ‘지자(支子)는 조상에 제사를 지낼 수 없다’고 했다. 제후를 함께 세우는 것이 사직을 중시하는 일이라 했지만, 짐은 듣지 못했다. 그리고 하늘이 군주를 위해 백성을 내려주신 것이 아니다. 짐이 부덕하여 해내가 미흡한데 아직 배우지도 못한 자들을 억지로 여러 성을 다스리는 군주로 만들라 하니 다른 신하들에게 뭐라 권하겠는가? 다시 상의하여 열후로서 집안을 이루도록 하라.” 3월 병자일에 미앙궁에 아뢰었다. “승상 신 청적과 어사대부 신 탕이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옵니다. 신들이 삼가 열후신 영제(嬰齊), 중2천석, 이천석 신 하, 간대부(諫大夫) 박사(博士) 신 안(安) 등과 이렇게 상의하였사옵니다. 삼가 듣자온대 주나라가 800 제후를 봉할 때 희성을 함께 올려 천자를 받들게 했습니다. 강숙(康叔)은 조부와 부친으로 해서 귀하게 되었고, 백금(伯禽)은 (아버지) 주공(周公)으로 해서 봉해졌습니다. 모두 나라를 세워 제후가 되니 (조정에서 보낸) 승상과 태부의 보좌를 받으며 백관들은 법을 받들어 각자 그 자리를 지키니 나라의 강령이 갖추어졌습니다. 신들이 제후를 함께 세우십사 하는 것은 이로써 사직을 소중히 여기고 사해의 제후들이 각기 직분에 따라 공물과 제사를 받들기 때문입니다. (맏아들 외에) 다른 자식들이 조종의 제사를 받들 수 없는 것은 예법입니다. 그래서 나라를 세워 울타리처럼 지키게 함으로써 제왕의 공덕과 교화를 돕게 하는 것입니다. 폐하께서 하늘의 법통을 받들어 계승하시어 영명하고 성스러운 뜻을 펼치셨고, 유능한 인재를 존중하고 공신들을 드러내셨으며, 없어질 자들을 흥하게 하시고 끊어질 자들을 잇게 하셨습니다. 문종후(文終侯) 소하(蕭何)의 후손을 찬현(酇縣)에 봉해 잇게 하셨고, 평진후(平津侯) 공손홍(公孫弘) 등을 포상하고 격려하셨습니다. 육친(六親)의 순서를 밝히고 천륜의 은정을 널리 베풀기 위해 제후 왕들과 군(君)들이 자식과 동생에게 땅을 나눠줄 수 있게 하는 추은령(推恩令)으로 호칭과 나라를 만들게 하시니, 이를 가진 자가 백이 넘습니다. 그런데 황자를 열후로서 집안을 이루게 하는 것은 존비가 뒤바뀌는 것이자 서열과 질서를 잃는 것으로서 만세에 물려줄 법통이 될 수 없사옵니다. 신들은 신 굉, 신 단, 신 서를 제후왕으로 세울 것을 바라옵나이다.” 황제는 다음과 같이 명령했다. “강숙의 형제는 열 명이었지만 혼자 귀해진 것은 그 덕을 표창 받아서이다. 주공이 (천자급 제사인) 교(郊) 제사로 하늘에 제사를 드리고, 이에 따라 노(魯)나라가 순백색과 순홍색의 수소를 희생으로 쓸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공들은 순수하지 못한 털의 희생을 썼으니 이는 어질고 불초함의 차이 때문이었다. ‘높은 산은 우러러보고 큰 길은 따라 간다’고 했듯이 짐은 이들을 몹시 사모한다. 그러니 아직 성숙하지 못한 자식들은 억제하여 열후로서 집안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4월 무인일에 미앙궁에 아뢰었다. “승상 신 청적, 어사대부 신 탕이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신 청적 등과 열후, 2천석 관리, 간대부, 박사 신 경(慶) 등이 상의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황자들을 제후왕에 봉하십시사 청하였던 바,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강숙의 형제는 열 명이었지만 혼자 귀해진 것은 그 덕을 표창 받아서이다. 주공이 (천자급 제사인) 교(郊) 제사로 하늘에 제사를 드리고, 이에 따라 노(魯)나라가 순백색과 순홍색의 수소를 희생으로 쓸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공들은 순수하지 못한 털의 희생을 썼으니 이는 어질고 불초함의 차이 때문이었다. ‘높은 산은 우러러보고 큰 길은 따라 간다’고 했듯이 짐은 이들을 몹시 사모한다. 그러니 아직 성숙하지 못한 자식들은 억제하여 열후로서 집안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신 청적, 신 탕, 박사 신 장행(將行) 등은 삼가 이렇게 들었사옵니다. 강숙의 형제는 열이었습니다. 무왕은 왕위를 이었고, 주공은 성왕을 보좌했으며 나머지 8명은 모두 조부와 부친의 존엄에 힘입어 큰 나라에 봉해졌습니다. 강숙은 아직 어리고 주공은 삼공(三公)의 자리에 있었기에 백금을 노나라에 부임하게 한 것인데 대개 작위를 받을 때 성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강숙은 훗날 녹보(祿父)의 난을 막았고, 백금은 회이(淮夷)의 난을 없앴습니다. 옛날 오제는 제도가 달랐고, 주나라의 작위는 5등급이었으며, 춘추는 3등급이었던 것은 시대에 따라 서열과 존비를 정했기 때문입니다. 고황제(高皇帝)께서 난세를 바로잡아 지극한 덕을 밝히시고 해내를 평정하고 제후들을 봉하셨을 때 작위는 2등급이었습니다. 황자들 중 일부는 강보에 쌓여 있었지만 제후왕으로 세워 천자를 받들게 하였으니, 이는 만세의 법칙으로 바꿀 수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몸소 인의(仁義)와 성스러운 덕을 실행하시니 문왕과 무왕의 덕을 갖추셨습니다. 인자하고 효성스러운 자들을 드러내고 널리 유능한 자들을 위한 길을 넓히셨습니다. 안으로는 덕이 있는 자를 표창하고, 밖으로는 포악한 자들을 토벌하셨습니다. 북쪽 끝으로 한해(瀚海)에 이르렀고, 서쪽으로는 월지(月氏)와 통하니 흉노와 서역이 나라를 들어 폐하의 군대를 받들었습니다. 수레와 기계의 비용을 백성들에게 부과하지 않으셨고, 궁중 창고를 비워 장병들에게 상을 내리셨으며, 궁정의 식량 창고를 열어 가난하고 주린 자들을 구제하셨고, 변방 요역을 절반으로 줄여주셨습니다. 남방의 수많은 오랑캐 군주들은 이 소문에 귀화하여 뜻을 따르고 받들지 않은 자들이 없었습니다. 풍속이 다른 먼 지방에서는 몇 번의 통역을 거쳐 조회하러 오니, 은택이 강역 밖까지 미쳤습니다. 이에 따라 진귀한 짐승들이 나타나고 상서로운 곡식들이 자나라니 하늘이 이에 응한 징험이 더욱 드러난 것이었습니다. 이제 제후의 서자들은 제후왕에 봉했는데 황자를 열후로 삼는다는 것은, 신 청적, 신 탕 등이 삼가 엎드려 숙고한 결과 존비의 질서를 잃는 것으로 천하를 실망케 할 일이니 아니 되옵니다. 신 등은 신 굉, 신 단, 신 서를 제후왕으로 삼으시길 청하옵니다.” 4월 계미일에 미앙궁으로 다음과 같은 상소가 올라갔으나 궁중에 놓아두고 내려 보내지 않았다. “승상 신 청적, 태복(太僕) 신 하, 태상 조충, 어사대부 대리 겸 태상 신 충, 태자소부 겸 종정 대리 신 안이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옵니다. 신 청적 등이 일전에 대사마 신 거병의 ‘황자에게 봉호가 아직 없다’는 상소를 아뢰었고, 신이 삼가 어사대부 신 탕, 중2천석, 2천석, 간대부, 박사 신 경 등과 죽음을 무릅쓰고 황자 신 굉 등을 제후왕으로 삼으십사 청하였습니다. 폐하께서는 겸양의 말씀으로 감히 문왕과 무왕에 비할 수 없다고 하시면서, 자신에게 더욱 엄격하셨고 황자들이 아직 가르침을 받지 못했다고 하셨습니다. 신하들이 상의할 때 어떤 유생은 자신이 배운 것으로 의견을 나타내기도 했고, 마음과 어긋난 말도 있었습니다. 폐하께서는 한사코 사양하시며 허락하시지 않고 황자들을 열후로 집안을 세우게 하라 하셨습니다. 신 청적 등이 삼가 열후인 신 수성(壽成) 등 27인과 상의한 바, 모두가 존비의 질서를 잃은 것이라 하였습니다. 고황제께서 나라를 세우시고 한의 태조가 되셔서 자손들을 왕으로 삼고 서자들을 많이 세워 울타리로 보좌하게 하셨습니다. 선제들께서 이를 법칙으로 삼아 바꾸지 않은 것은 지극한 존엄을 선양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신하들은 청하옵니다. 사관에게 길일을 택하여 예의를 갖추고, 어사에게는 지도를 바치게 하며, 나머지 일들은 모두 과거에 따르게 하시옵소서.” 황제는 “그렇게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4월 병신일에 미앙궁에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태복 신 하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옵니다. 태상 신 충이 점을 쳤더니 4월 28일 을사일이 제후왕을 세우기에 좋다고 나왔습니다. 신이 죽음을 각오하고 지도를 올리니, 나라 이름을 지어주시길 청하옵니다. (련련한) 의례는 따로 아뢰옵니다. 신 죽음을 무릅쓰고 청하옵니다.” 황제는 “황자 유굉은 제왕(齊王)으로, 유단은 연왕(燕王)으로, 유서는 광릉왕(廣陵王)으로 삼노라”라는 명을 내렸다. 4월 정유일에 미앙궁에 아뢰었다. 원수 6년 4월 계묘일에 어사대부 탕이 승상에게 하달했고, 승상은 중2천석에게, 2천석은 군 태수와 제후의 상(相)들에게, 승서종사(丞書從事)는 담당 관리들에게 하달하니 율령에 따랐다.
<세 편의 책문> 위는 제왕의 책봉문이다. “원수 6년 4월 을사일에 황제께서 어사대부 탕에게 태묘에서 황자 단을 연왕(燕王)으로 삼으시면서 이르시되 ‘오, 아들 단은 이 검은색 흙을 받을 지어다! 짐은 조부와 부친을 계승하여 옛 법도에 따라 네 나라를 세워 북쪽 땅에 봉하니 대대로 한나라의 울타리가 되어 보좌하라. 오호라! 훈육(葷粥)은 노인을 학대하는 금수의 마음으로 늘 (우리 땅을) 침입하고 노략질하면서 변방 사람들을 어지럽혔다. 오호라! 짐이 장수에게 그 죄를 토벌하라고 명하니 만부장(萬夫長), 천부장(千夫長) 등 32명의 군장들이 모두 와서 항복하니, 깃발은 눕고 군대는 흩어졌다. 훈육이 멀리 사막 북쪽으로 도망가자 북방이 안정되었다. 너의 마음을 다하여 원한을 짓지 말고, 덕을 저버리지 말 것이며, (훈육에 대한) 대비를 없애지 말라. 훈련 받지 않은 병사를 징발해서는 안 된다. 오호라!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려면 공경스럽지 않으면 안 된다. 왕은 이를 경계할 지어다!’라 하셨습니다.” 위는 연왕을 책봉문이다. “원수 6년 4월 을사일에 황제께서 어사대부 탕에게 태묘에서 황자 서를 광릉왕(廣陵王)으로 삼으시면서 이르시되 ‘오, 아들 단은 이 붉은색 흙을 받을 지어다! 짐은 조부와 부친을 계승하여 옛 법도에 따라 네 나라를 세워 남쪽 땅에 봉하니 대대로 한나라의 울타리가 되어 보좌하라.’ 옛 사람의 말씀에 ‘장강(長江) 남쪽과 오호(五湖) 사이의 사람들은 경솔하다. 양주(楊州) 지역은 삼대 때 요복(要服)으로 통치가 미치지 못했다’고 했다. 오호라! 너의 마음을 다하여 전전긍긍 은혜를 베풀고 따를 것이며, 안일함에 빠지지 말고, 소인배를 가까이 하지 않고, 오로지 법칙대로 할 지어다. <상서>에 ‘신하된 자는 위세도 복도 짓지 말라’고 했듯이 그래야 훗날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오호라!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려면 공경스럽지 않으면 안 된다. 왕은 이를 경계할 지어다!”라 하셨사옵니다. 위는 광릉왕의 책봉문이다.
<사마천의 논평> “옛사람이 말하길 ‘사랑하면 부유하게 해주고 싶고, 가까우면 귀하게 만들고 싶다’고 했다. 따라서 왕이 된 사람들은 땅을 나누어 나라를 세워 자제들을 그곳에 봉했다. 그래서 친인척들을 포상하고, 골육의 순서를 매기고, 선조를 높이고, 자손들을 귀하게 만들어 같은 성들을 천하에 널리 퍼지게 했다. 이로써 형세를 강화하고 왕실을 안정시킨 것인데 자고로 그 유래가 오래이기 때문에 달리 할 말은 없으므로 논하지 않겠다. 연나라와 제나라의 일은 취하기에 부족하다. 그러나 세 왕을 봉하면서 천자가 겸양을 보이고 신하들의 의리를 지킨 것과 (조서의) 문장이 아름다운 것은 아주 봐줄 만해서 세가에 덧붙였다.”
<저소손의 보충> 내가 다행히 문학(文學)으로 시랑(侍郎)이 되어 태사공의 열전(列傳, 태사공자서)을 즐겨 읽었다. 열전에서 「삼왕세가(三王世家)」의 문장이 볼 만하다고 말했으나 아무리 해도 세가에서 그 문장을 찾을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 고사를 좋아하는 노인에게서 그 책봉 책서를 얻어 그 사건을 편성하여 전함으로써 후세가 어진 군주의 뜻을 알게 하고자 한다. 대체로 듣기에 무제(武帝) 때 같은 날 세 아들을 모두 왕으로 봉했다. 한 아들은 제에, 한 아들은 광릉에, 한 아들은 연에 봉했다. 각각 재능과 지력, 토지의 특징, 백성의 습속에 맞추어 책문을 지어 경계하면서 왕들에게 “대대로 한나라의 울타리가 되어 보좌하라.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려면 공경스럽지 않으면 안 된다. 왕은 이를 경계할지어다!”라고 했다. 현명한 군주의 책문은 천박한 사람은 이해할 수 없고, 두루 듣고 잘 기억하는 군자가 아니고서는 그 뜻을 제대로 다 이해하지 못한다. 그 순서와 단락, 문자의 안배, 문장의 길이와 차이가 모두 의미가 있어 사람이 제대로 알 수 없다. 삼가 초고와 조서를 아래와 같이 편집하여 열람자가 그 뜻을 알아서 해석할 수 있게 했다. 왕(王) 부인은 조나라 사람으로 위(衛) 부인과 함께 무제의 총애를 받아 아들 굉을 낳았다. 굉이 왕에 봉해질 즈음 그 어머니가 병이 나자 무제가 몸소 문안을 와서는 “아들이 왕이 될 터인데 어디다 두길 바라시오”라고 물었다. 왕부인은 “폐하께서 계신데 첩이 무슨 말씀을 드릴 수 있겠사옵니까”라고 했다. 무제는 “그렇더라도 원하는 곳이 있을 터이니 어디 왕이었으면 좋겠소”라고 했다. 왕부인은 “낙양에 두길 원하옵니다”라고 했다. 무제는 “낙양에는 무기과 오창(敖倉)이 있고 천하의 요충인 한나라의 큰 도회지라 낙양의 왕이 된 아들은 없소. 낙양을 빼고 나머지는 다 괜찮소.”라고 했다. 왕 부인은 대꾸하지 않았다. 무제는 “관동의 나라로서 제나라보다 큰 나라는 없소. 제나라는 동으로 바다를 등에 지고 있고 성곽이 커서 옛날 임치(臨菑) 한 곳만 10만 호였을 정도였으며 천하에 땅 기름지기로는 제나라보다 좋은 곳은 없소.”라고 했다. 왕 부인이 손으로 머리를 때리면서 감사해 하며 “참으로 좋사옵니다.”라 했다. 왕 부인이 죽자 무제를 가슴 아파하며 사신을 보내 절하게 하면서 “황제께서 삼가 태중대부 명(明)에게 벽옥 하나를 바치고 부인을 제왕(齊王)의 태후(太后)로 봉하게 하셨나이다.”라 했다. 아들 굉이 제나라 왕이 되었으나 나이가 어리고 아들이 없이 즉위하여 불행하게 일찍 죽는 바람에 나라가 끊어져 군으로 편입되었다. 천하는 제나라가 왕에게 맞지 않았다고들 했다. ‘이 흙을 받으라’는 말은 제후왕이 처음 봉해질 때 반드시 천자의 사직단에서 가져온 흙을 받아 자기 나라의 사직단을 세우고 매년 때맞추어 제사를 드리는 것을 말한다. 『춘추대전(春秋大傳)』에 “천자의 나라에는 태사(泰社)가 있는데, 동방은 푸른색, 서방은 흰색, 남방은 붉은색, 북방은 검은색, 중앙은 누런색이다.”라 했다. 따라서 동방에 봉해지면 푸른색 흙, 서방에 봉해지면 흰색 흙, 남방에 봉해지면 붉은색 흙, 북방에 봉해지면 검은색 흙, 중앙에 봉해지면 누런색 흙을 취한다. 각기 해당 색깔의 흙을 취해 흰 띠풀로 싸서 각자 사직단을 세운다. 이렇게 시작하여 천자가 봉하는 것이다. 이것을 주토(主土)라 한다. 주토는 사직단을 세우기 위해 받드는 것이다. ‘짐승조고(朕承祖考)’에서 ‘조(祖)’는 할아버지, ‘고(考)’는 아버지를 말한다. ‘유계고(維稽古)’에서 ‘유(維)’는 ‘헤아린다, 유념한다’는 뜻이며, ‘계(稽)’는 ‘당연히’라는 뜻으로 당연히 옛 법도를 따른다는 것이다. 제나라 땅은 속임술이 많고 예의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짐의 조서를 받들어라. 천명은 불변이 아니다. 사람이 덕을 좋아하면 환하게 드러날 것이다. 의리를 꾀하지 않으면 군자들이 실망할 것이다. 네 마음을 다하여 중용의 도를 지키면 하늘의 녹이 영원할 것이다. 나쁜 일만 일삼고 좋은 일을 하지 않으면 나라에 해가 되고 네 자신에게도 해가 될 것이다.”라고 경계한 것이다. 제왕이 나라에 도착하여 좌우 신하들이 예의로 보필했으나 불행하게 중년에 요절했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잘못이 없어 책문의 뜻과 맞았다. 고서에 “푸른색은 쪽에서 나왔으나 쪽보다 더 푸르다.”고 했으니 교육으로 그리 된 것이다. 멀리 내다보는 현명한 군주는 남다른 식견을 갖고 있기에 제왕에게는 안으로 신중할 것을, 연왕에게는 원한을 짓기 말것과 덕을 저버리지 말 것을, 광릉에게는 나라 밖의 일을 신중히 할 것과 복도 화도 짓지 말 것을 경계한 것이다. 대개 광릉은 오월의 땅이라 그 백성들이 사납지만 경박하기 때문에 “강호(江湖) 사이의 사람들은 경솔하다. 양주 일대는 삼대 때 중국의 습속을 따르라고 했으나 정치와 교화가 그다지 미치지 못하여 덕으로 감화시켰을 뿐이다. 안일함에 빠지지 말고, 소인배를 가까이 하지 않고, 오로지 법칙대로 할 지어다. 늘 오락 따위에 빠져 사냥다니고 음탕함에 빠지 말고 소인배를 가까이 말라. 항상 법도에 유념하면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라고 경계했던 것이다. 삼강과 오호는 어업과 염업의 이점이 있고 풍부한 동광산이 있어 천하가 부러워한다. 따라서 “신하된 자로서 복을 짓지 말라”고 경고한 것이니 재물과 화폐를 남용하고 상을 지나치게 내려 자신의 명성과 명예를 세우지 않는다면 사방에서 귀의할 것이다. 또 “신하된 자로서 위세도 부리지 말라.”고 한 것은 경솔하게 의리를 저버리지 말하는 경고이다. 무제가 세상을 떠나고 소제(昭帝)가 막 즉위하여 먼저 광릉의 유서(劉胥)를 입조케 하여 3천만 여에 이르는 후한 상금과 재물을 내리고 백 리의 땅과 만 호를 더해 주었다. 소제가 세상을 뜨고 선제(宣帝)가 막 즉위하여 골육의 정을 생각하여 은혜와 의리를 널리 베풀었다. 본시(本始) 원년(기원전 73년)에 한나라 조정의 땅을 떼어서 광릉왕의 네 아들 모두에게 나누어 주니 유성(劉聖)은 조양후(朝陽侯), 유증(劉曾)은 평곡후(平曲侯), 유창(劉昌)은 남리후(南利侯)로 봉하고, 가장 총애하는 막내아들 유홍(劉弘)은 고밀왕(高密王)에 봉했다. 그후 유서는 과연 위세와 복을 함부로 지으며 초왕과 사신을 주고 받았다. 이에 초왕은 “나의 선조 원왕(元王)은 고제(高帝)의 동생으로 32개의 성에 봉해졌었다. 지금 땅과 성읍이 더욱 줄어드니 내가 광릉왕과 함께 군대를 일으켜 광릉왕을 황상으로 옹립하고 나는 원왕 때처럼 초의 32개 성을 되찾고자 한다.”고 선언했다. 일이 발각되자 공경과 담당 관리들은 (유서를) 죽이라고 청했다. 천자는 골육인지라 차마 유서를 법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조서를 내려 광릉왕은 다스리지 말고 괴수 초왕만 죽이게 했다. 고서에 “쑥이 삼 밭에 자라면 붙들어 매지 않아도 절로 곧게 자라고, 흰 모래가 진흙 속에 있으면 함께 검어진다.”고 했듯이 그 땅과 교화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 뒤 유서는 다시 저주하며 반역을 꾀하다 자살하고 나라는 해제되었다. 연나라는 땅이 척박하고 북으로 흉노와 바짝 붙어 있어 그 백성들이 용감하긴 하지만 사려가 없었다. 그래서 “훈육(葷粥)은 노인을 학대하는 금수의 마음으로 늘 (우리 땅을) 침입하고 노략질하면서 변방 사람들을 어지럽혔다. 오호라! 짐이 장수에게 그 죄를 토벌하라고 명하니 만부장(萬夫長), 천부장(千夫長) 등 32명의 군장들이 모두 와서 항복하니 깃발은 눕고 군대는 흩어졌다. 훈육이 멀리 사막 북쪽으로 도망가자 북방이 안정되었다.”고 경계한 것이고, “너의 마음을 다하여 원한을 짓지 말라”고 한 것은 습속에 따라 원망을 일읔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다. “덕을 저버리지 말라”고 한 것은 왕에게 덕을 저버리지 말 것을 경계한 것이다. “대비를 없애지 말라”고 한 것은 무력 대비를 소홀히하지 말고 늘 흉노에 대비하라는 말이다. “훈련 받지 않은 병사를 징발해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은 예의를 모르는 자를 옆에 두지 말하는 것이다. 무제는 나이가 들었을 때 태자가 불행하게 죽었다. 태자를 세우지 않고 있는데 유단이 사신을 보내 장안에 와서 몸소 숙위(宿衛)하고 싶다는 글을 올렸다. 효무제는 그 글을 보고는 땅바닥에 내던지며 “아들을 낳으면 제, 노와 같은 예의를 차리는 고장으로 보내야 하거늘 연, 조에 두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다투는 마음이 생겨 양보하지 않으려는 싹이 이미 생겼구나.”라며 성을 냈다. 그리고는 사람을 보내 궁궐 아래에서 사신의 목을 베게 했다. 무제가 세상을 뜨고 소제가 새로 즉위하자 유단은 과연 원한을 품고 대신들을 원망했다. 그는 맏아들이 즉위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제왕의 아들 유택(劉澤) 등과 반역을 꾀하면서 “나한테 어찌 이런 동생이 있을 수 있을소냐! 지금 즉위한 자는 대장군의 아들이다.”라는 말을 내뱉으며 군대를 일으키려 했다. 일은 발각되었고 당연히 죽음이었다. 소제는 골육의 정 때문에 너그럽게 참으면서 일이 드러나지 않게 덮었다. 공경 대신들이 종정과 태중대부 공호만의(公戶滿意), 어사 2인을 함께 연나라로 보내 은근히 (잘못을) 깨닫도록 암시를 주자고 요청했다. 연나라에 도착하여 서로 날을 달리 하여 연왕을 만나 나무랐다. 종정은 종실 유씨들의 호적을 주관하는데, 먼저 왕을 만나 소제가 진짜 무제의 아들임을 낱낱이 설명했다. 시어사가 다시 왕을 만나 법에 따라 그를 나무라며 “왕이 군대를 일으키려 한 죄는 명백하니 당연히 죄를 물어야 합니다. 한나라 조정의 법에 왕은 아무리 작은 죄를 지어도 법으로 처단해야 하거늘 어찌 왕을 봐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은 다음 법 조문으로 위협했다. 연왕은 의기소침해지더니 겁을 먹었다. 공호만의는 유술에 익숙하여 맨 나중에 왕을 만나 고금의 큰 의리와 국가의 대례를 끌어들여 가며 이야기하니 그 말이 반듯했는데 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옛날 천자들은 궁정 안에 반드시 같은 성을 가진 대부를 두어 골육간의 일을 바로잡게 했습니다. 밖으로는 성이 다른 대부를 두어 다른 종족의 문제를 바로 잡았습니다. 주공이 성왕을 보좌하면서 두 동생을 죽였기 때문에 나라가 다스려진 것입니다. 무제께서 계실 때는 그나마 왕을 용서해주셨습니다. 지금 소제께서 막 즉위하시어 연세도 어리시고 아직 시간도 많아 정사에 임하시지 않고 대신들에에 위임하신 것입니다. 예로부터 친척을 가리지 않고 형을 집행했기에 천하가 다스려졌던 것입니다. 바야흐로 지금 대신들이 정사를 도우면서 법을 받들어 바르게 집행하여 감히 봐주는 것이 없으니 왕을 용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왕께서는 스스로 근신하시어 몸이 죽고 나라는 없어져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아애 연왕 유단은 두려움에 죄를 인정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했다. 대신들은 골육을 화합시키려고 그를 법으로 다치게 할 수 없었다. 그 후 유단은 다시 좌장군(左將軍) 상관걸(上官桀) 등과 반란을 꾀하며 “내가 태자 다음이다. 태자가 없으니 내가 즉위해야 마땅한데도 대신들이 모두 나를 억누른다.”는 따위의 말을 내뱉었다. 대장군 곽광(霍光)이 정사를 보좌하고 있었는데 공경 대신들과 상의하길 “연왕 단이 잘못을 뉘우쳐 바로 잡으려 하지 않고 변고를 일으키려 한다.”고 했다. 이에 법에 따라 단죄하여 사형에 판결했다. 유단은 자살하고 나라는 해체되니 책문에서 지적한 바와 같았다. 담당 관리가 단의 처자식까지 죽이자 청했으나 소제는 골육의 정 때문에 차마 법으로 다스리지 못하고 단의 처자식을 사면하고 평민으로 깎아버렸다. 고서에 “향기로운 난초 뿌리와 구리때를 오줌에 담그면 군자는 가까이하지 않고 평민도 복용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점차 구려지기 때문이다. 선제가 새로 즉위하여 은덕을 널리 베풀었던 바 본시 원년(기원전 73년)에 다시 연왕 단의 두 아들을 모두 봉하니 한 아들은 안정후(安定侯)가 되었고, 연왕의 태자였던 유건(劉建)은 광양왕(廣陽王)으로 세워 연왕의 제사를 받들게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