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歷史/三國史記
三國史記 卷第二十三
柳川
2019. 12. 25. 03:49
多婁王 溫祚王之元子 器宇寬厚 有威望 溫祚王在位第二十八年 立爲太子 至四十六年 王薨 繼位
二年 春正月 謁始祖東明廟 二月 王祀天地於南壇
三年 冬十月 東部屹于與靺鞨戰於馬首山西 克之 殺獲甚衆 王喜 賞屹于馬十匹·租五百石
四年 秋八月 高木城昆優與靺鞨戰 大克 斬首二百餘級 九月 王田於橫岳下 連中雙鹿 衆人歎美之
六年 春正月 立元子己婁爲太子 大赦 二月 下令國南州郡 始作稻田
七年 春二月 右輔解婁卒 年九十歲 以東部屹于爲右輔 夏四月 東方有赤氣 秋九月 靺鞨攻陷馬首城 放火燒百姓廬屋 冬十月 又襲甁山柵
十年 冬十月 右輔屹于爲左輔 北部眞會爲右輔 十一月 地震聲如雷
十一年 秋 穀不成 禁百姓私釀酒 冬十月 王巡撫東西兩部 貧不能自存者 給穀人二石
二十一年 春二月 宮中大槐樹自枯 三月 左輔屹于卒 王哭之哀
二十八年 春夏 旱 慮囚 赦死罪 秋八月 靺鞨侵北鄙
二十九年 春二月 王命東部 築牛谷城 以備靺鞨
三十六年 冬十月 王拓地至娘子谷城 仍遣使新羅請會 不從
三十七年 ※
王遣兵攻新羅蛙山城 不克 ※ 移兵攻狗壤城 新羅發騎兵二千 逆擊走之
三十九年 攻取蛙山城 留二百人守之 尋爲新羅所敗
四十三年 遣兵侵新羅
四十六年 夏五月戊午晦 日有食之
四十七年 秋八月 遣將侵新羅
四十八年 冬十月 又攻蛙山城 拔之
四十九年 秋九月 蛙山城爲新羅所復
五十年 秋九月 王薨
二年 春正月 謁始祖東明廟 二月 王祀天地於南壇
三年 冬十月 東部屹于與靺鞨戰於馬首山西 克之 殺獲甚衆 王喜 賞屹于馬十匹·租五百石
四年 秋八月 高木城昆優與靺鞨戰 大克 斬首二百餘級 九月 王田於橫岳下 連中雙鹿 衆人歎美之
六年 春正月 立元子己婁爲太子 大赦 二月 下令國南州郡 始作稻田
七年 春二月 右輔解婁卒 年九十歲 以東部屹于爲右輔 夏四月 東方有赤氣 秋九月 靺鞨攻陷馬首城 放火燒百姓廬屋 冬十月 又襲甁山柵
十年 冬十月 右輔屹于爲左輔 北部眞會爲右輔 十一月 地震聲如雷
十一年 秋 穀不成 禁百姓私釀酒 冬十月 王巡撫東西兩部 貧不能自存者 給穀人二石
二十一年 春二月 宮中大槐樹自枯 三月 左輔屹于卒 王哭之哀
二十八年 春夏 旱 慮囚 赦死罪 秋八月 靺鞨侵北鄙
二十九年 春二月 王命東部 築牛谷城 以備靺鞨
三十六年 冬十月 王拓地至娘子谷城 仍遣使新羅請會 不從
三十七年 ※
王遣兵攻新羅蛙山城 不克 ※ 移兵攻狗壤城 新羅發騎兵二千 逆擊走之
三十九年 攻取蛙山城 留二百人守之 尋爲新羅所敗
四十三年 遣兵侵新羅
四十六年 夏五月戊午晦 日有食之
四十七年 秋八月 遣將侵新羅
四十八年 冬十月 又攻蛙山城 拔之
四十九年 秋九月 蛙山城爲新羅所復
五十年 秋九月 王薨
[교주:23권18] 年
本書 卷1 脫解王 八年條 및 三國史節要 「秋八月」 추가.
[교주:23권19] 克
本書 卷1 脫解王 八年條 및 三國史節要 「冬十月」 추가.
[역주:23권95] 다루왕(多婁王)
백제의 제2대 왕. 온조왕의 맏아들. 재위기간은 서기 28~77년. 온조왕 재위 28년(서기 10)에 태자로 책봉되면서 중앙과 지방의 군사 업무를 관장하였다. 百濟의 초기 王系는 溫祚系와 沸流系가 연맹장의 지위를 교대로 차지함으로써 이원적인 구성을 가졌던 것인데 후일 온조계가 왕위를 세습하게 되면서 온조계 중심으로 일원화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러한 견해에서는 초기 왕계 중에서 多婁王-己婁王-盖婁王은 '婁'를 공통의 末字로 가지고 있고, 이것은 沸流系의 시조인 解夫婁의 '婁'와 상통하고 있는 것에 주목하여 沸流系 왕통으로 파악하고, 肖古王-仇首王으로 이어지는 이후의 왕계를 溫祚系 왕통으로 파악하고 있다(盧重國, 앞의 책, 65~77쪽).
[역주:23권96] 흘우(屹于)
백제 다루왕대의 인물. 동부의 실권자였다. 말갈의 공격을 馬首山 서쪽에서 격파하여 큰 상을 받았다. 후에 右輔 解婁가 죽자 우보의 직을 맡았고, 다루왕 10년(서기 37)에 左輔직이 신설되면서 최초로 좌보의 직을 맡았다.
[역주:23권97] 곤우(昆優)
백제 다루왕대의 인물. 高木城을 기반으로 한 유력자였다. 昆氏는 본래 '昆解'라는 複姓이 單姓化된 것이다. 《新撰姓氏錄》에 의하면 昆解氏는 일본에서 후일 高雁氏로 개칭되었는데 백제 仇首王의 후손이라고 한다. 따라서 곤해씨는 백제왕실과 관련이 있는 가문으로 볼 수 있다(盧重國, 〈百濟의 貴族家門硏究〉, 《大丘史學》 48, 대구사학회, 1994, 5~6쪽).
[역주:23권98] 횡악(橫岳)
현재의 서울시 三角山에 비정된다. 본서 권37 地理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실려 있다. 김정호의 《大東地志》 漢城府 山水條에 『三角山距北十五里 百濟稱負兒嶽 又云橫岳 又云擧山』이라 한 기사 참조. 본서 권25 백제본기 진사왕 7년(309)에 이곳에서 田獵을 하고, 11년(402)에 祈雨祭를 지낸 것에서 미루어 볼 때 橫岳은 漢城시기에 神聖之所의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역주:23권99] 주·군(州郡)
州郡은 본래 중국의 지방통치조직의 명칭이다. 郡은 중국의 秦나라 始皇이 천하를 통일한 후 郡縣制를 실시하면서 시행되었고, 州制는 중국 漢나라 武帝가 元鳳 5년(서기전 106)에 전국을 13州로 나누고 刺史를 파견하여 감찰하게 한데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백제의 지방통치조직 명칭은 漢城 및 熊津도읍기에는 檐魯制이고, 泗沘도읍기에는 方·郡-城(縣)制였다. 한편 신라는 통일 이전에는 주·군-성(촌)제였는데 통일 이후 전국을 주·군-현으로 편제하였다. 이에서 미루어 볼 때 본 기사의 州郡은 통일신라가 백제지역을 州·郡-縣制로 재편성한 이후의 사실이 遡及·附會된 것으로 보인다.
[역주:23권100] 좌보(左輔)
백제 초기 軍國政事를 관장한 직. 우보와 더불어 左·右輔制를 구성하였다. 安鼎福은 이를 후대의 宰相과 같은 존재로 파악하고 있다(安鼎福, 《東史綱目》 圖下 官職沿革圖 참조).
[역주:23권101] 진회(眞會)
백제 다루왕대의 인물. 우보의 직에 있었으며, 북부의 실권자였다. 眞氏는 본래 眞慕氏·眞牟氏 등으로 표기되는複姓이었는데 후일 眞氏로 單字姓化되었다. 진씨가 백제 지배세력 내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이다. 이후 진씨세력은 고이왕의 왕권강화과정에서 활약하여 眞忠과 眞勿이 左將이 되어 軍事權을 장악하였으며, 比流王대에는 眞義가 內臣佐平이 되었다. 近肖古王대에 와서 진씨 출신의 여자를 왕비로 맞이함으로써 이후 阿莘王대까지 眞氏가문은 왕비를 배출하여 한성시기 최고의 귀족가문이 되었다. 그러나 腆支王의 즉위과정에서 아신왕의 막내 동생 蝶禮를 지지하였다가 실패함으로써 태자 전지를 지지한 解氏세력에게 밀려나게 되었다.
[역주:23권102] 홰나무[槐樹]
콩과에 속하는 闊葉喬木. 한국 각지 및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며, 꽃과 과실은 藥用으로 사용하였다.
[역주:23권103] 사형할 죄[死罪]도 사면하였다.
죄수의 赦免은 天災地變과 같은 異常 현상이 발생하였을 때 이를 掃除하기 위한 목적에서 행해졌다. 이 기사에서 이때 죽여 마땅한 죄수들도 사면해 준 것은 이해 봄과 여름에 한발이 심하였기 때문에 취해진 조치였다.
[역주:23권104] 낭자곡성(娘子谷城)
현재의 충북 淸原郡 北二面의 娘臂城. 이는 본서 권37 잡지 지리4 백제 熊川州條에 『西原(一云娘臂城 一云娘子谷)』이라 하고 있고, 《新增東國輿地勝覽》 권15 충청도 淸州牧조에 『本百濟上党縣(一云娘臂城 一云娘子谷)이라 한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娘臂城에 대해서는 李元根, 〈百濟 娘臂城考〉 《사학지》 10, 단국대사학회, 1976 참조) 그런데 金正浩는 《大東地志》 권6 충청도 淸州條에서 『淸州本百濟上黨(三國史百濟地志云 娘子谷城 一云娘臂城者 皆誤也 娘子谷城 今忠州 娘臂城 無所考)』라 하여 娘子谷城=淸州설을 부정하고, 娘子谷城=忠州라고 하는 견해를 제시하였으나 취신할 수 없다.
[역주:23권105] 왕이 영토를 개척하여 … [신라가] 듣지 않았다.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1 신라본기 脫解尼師今 7년(서기 63)조에 나온다. 이 기사는 본서에서 백제와 신라의 접촉을 최초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서기 1세기 중엽경의 신라가 청주지역까지 영역으로 하였을까는 문제이다. 이 문제에 대해 본서 신라본기 초기기록에 보이는 신라의 대외관계 기사를 경주세력 관계의 것과 辰韓族의 것이 單一編年史 속에 정리된 것으로 보고 낭자곡성에서 백제와 접촉을 가진 것은 경주계 세력이 아니라 남하해 내려오는 辰韓族이라고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千寬宇, 〈三韓의 成立過程〉, 《史學硏究》 26, 한국사학회, 1976 및 〈三韓의 國家形成〉 상, 《韓國學報》 2, 일지사, 1976 참조).
[역주:23권106] 와산성(蛙山城)
현재의 충북 報恩 지방에 비정된다(千寬宇, 〈三韓의 成立過程〉, 《史學硏究》 26, 1976, 45~47쪽). 본서 권37 잡지 地理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실려 있다.
[역주:23권107] 구양성(狗壤城)
현재의 충북 槐山지방에 비정하는 견해(천관우, 앞의 논문 〈三韓의 國家形成〉 상, 45~47쪽)와 충북 沃川지방으로 추정하는 견해(李丙燾, 《國譯 三國史記》, 361쪽)가 있다.
[역주:23권108] 왕은 군사를 보내 … 구양성(狗壤城)을 공격하였다.
본 기사에는 백제가 신라를 공격한 月이 나와 있지 않으나 본서 권1 신라 본기 탈해 이사금 8년조에는 백제의 와산성 공격은 ‘秋八月’로, 구양성을 공격한 것은 '冬十月'로 나온다. 백제와 신라가 와산성과 구양성 에서 싸운 것을 남하해 내려오던 진한족 세력이 백제와 싸운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천관우, 《고조선사 ·삼한사연구》, 일조각, 1989, 180~185 쪽 참조).
[역주:23권109] 신라가 기병 2천 명을 … 패주시켰다.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1 신라본기 탈해 이사금 8년(서기 64)조에 보인다.
[역주:23권110] 와산성을 공격하여 … 신라에게 패하였다.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1 신라본기 탈해 이사금 10년(서기 66)조에 보인다.
[역주:23권111] 군사를 보내 신라를 쳤다.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1 신라본기 탈해 이사금 14년(서기 70)조에 보인다.
[역주:23권112] 장수를 보내 신라를 쳤다.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1 신라본기 탈해 이사금 18년(서기 74)조에 보이는데, 군사를 보내 막았다는 내용이 첨가되어 있다.
[역주:23권113] 와산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1 신라본기 탈해 이사금 19년(서기 75)조에 보인다.
[역주:23권114] 와산성이 신라에게 회복되었다.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1 신라본기 탈해 이사금 20년(서기 76)조에 보이는데, 이때 백제인으로서 와산성에 주둔하였던 200여 명이 모두 신라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는 내용이 첨가되어 있다.
[역주:23권115] 50년
다루왕의 재위기간. 그러나 《삼국유사》 王曆篇에는 『戊子立 理四十九年』이라 하여 본 기사와는 1년의 차이가 있다. 이 차이는 《三國遺事》가 踰年稱元法을 따랐기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己婁王 多婁王之元子 志識宏遠 不留心細事 多婁王在位第六年立爲太子 至五十年王薨 繼位
九年 春正月 遣兵侵新羅邊境 夏四月乙巳 客星入紫微
十一年 秋八月乙未晦 日有食之
十三年 夏六月 地震裂陷民屋 死者多
十四年 春三月 大旱 無麥 ※ 夏六月 大風拔木
十六年 夏六月戊戌朔 日有食之
十七年 秋八月 橫岳大石五 一時隕落
二十一年 夏四月 二龍見漢江
二十三年 秋八月 隕霜殺菽 冬十月 雨雹
二十七年 王獵漢山 獲神鹿
二十九年 遣使新羅請和
三十一年 冬 無氷
三十二年 春夏 旱 年饑民相食 秋七月 靺鞨入牛谷 奪掠民口而歸
三十五年 春三月 地震 冬十月 又震
三十七年 遣使聘新羅
四十年 夏四月 鸛巢于都城門上 六月 大雨浹旬 漢江水漲 漂毁民屋 秋七月 命有司補水損 ※之田
四十九年 新羅爲靺鞨所侵掠 移書請兵 王遣五將軍救之
五十二年 冬十一月 王薨
九年 春正月 遣兵侵新羅邊境 夏四月乙巳 客星入紫微
十一年 秋八月乙未晦 日有食之
十三年 夏六月 地震裂陷民屋 死者多
十四年 春三月 大旱 無麥 ※ 夏六月 大風拔木
十六年 夏六月戊戌朔 日有食之
十七年 秋八月 橫岳大石五 一時隕落
二十一年 夏四月 二龍見漢江
二十三年 秋八月 隕霜殺菽 冬十月 雨雹
二十七年 王獵漢山 獲神鹿
二十九年 遣使新羅請和
三十一年 冬 無氷
三十二年 春夏 旱 年饑民相食 秋七月 靺鞨入牛谷 奪掠民口而歸
三十五年 春三月 地震 冬十月 又震
三十七年 遣使聘新羅
四十年 夏四月 鸛巢于都城門上 六月 大雨浹旬 漢江水漲 漂毁民屋 秋七月 命有司補水損 ※之田
四十九年 新羅爲靺鞨所侵掠 移書請兵 王遣五將軍救之
五十二年 冬十一月 王薨
[교주:23권20] 麥
原本 誤刻. 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수정,
[교주:23권21] 損
原本 誤刻. 鑄字本에 의거 수정.
[역주:23권116] 기루왕(己婁王)
백제 제3대 왕. 다루왕의 맏아들, 재위기간은 서기 77~128년. 다루왕 재위 6년에 태자로 되었다가 왕위에 올랐다. '婁'를 왕명의 末字로 가지고 있는 것에서 미루어 볼 때 沸流系의 왕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앞의 주석 95 참조.
[역주:23권117] 군사를 보내 신라의 변경을 쳤다.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1 신라본기 婆錢尼師今 6년(서기 85)조에 보인다.
[역주:23권118] 객성(客星)
평상시에 나타나지 않고 임시로 나타나는 별. 이 객성에는 周伯·老子·王蓬絮·國皇·溫星의 다섯 종류가 있다고 한다.
[역주:23권119] 자미(紫微)
북두칠성의 북쪽에 있는 별의 이름. 천제가 살고 있는 곳을 말하기도 한다. 《晉書》 권11 志1 天文 上에 『紫宮垣十五星 其西蕃七 東蕃八 在北斗北 一曰紫微 大帝之坐也 天子之常居也 主命主度也』라 한 기사 참조.
[역주:23권120] 객성(客星)이 자미(紫微) [별자리]로 들어갔다.
객성이 자미로 들어갔다는 것은 微賤한 자가 천자의 居所를 침입함을 말하는 것이므로, 왕위의 쇠약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역주:23권121] 용(龍)
상상적 동물의 하나. 胴部는 뱀과 비슷하며 비늘이 있고 네 개의 발을 가졌으며, 깊은 못이나 바다에 潛在하고 때로는 자유로 공중을 날아 구름과 비를 몰아 풍운 조화를 부린다고 한다. 유럽·인도·중국 등을 비롯하여 신비적 민속적인 신앙 숭배의 대상이 되고, 불교에서는 四天王의 하나로, 중국에서는 麒麟·鳳凰·거북과 함께 상서로운 四靈으로 불리워졌다. 본서에서 龍은 왕권을 상징하는 동물로서 왕권의 변화나 왕의 안위와 관련되어 나타나고 있다.
[역주:23권122] 사신을 신라에 보내 화친을 청하였다.
본 기사에는 사신을 보낸 月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1 신라본기 婆娑尼師今 26년(105) 春正月條에 기록되어 있다.
[역주:23권123] 사신을 신라에 보내 예방하였다.
본 기사에는 사신을 보낸 月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본서 권1 신라본기 祇摩尼師今 2년(113) 3월조에 동일한 내용이 보인다.
[역주:23권124] 황새[鸛]
白鷺科에 속하는 大白鷺·白鷺·中白鷺의 총칭. 몸빛은 백색, 눈의 주위는 황백색, 긴 부리와 다리는 흑색이다. 해오라기 ·鷺鷥·白鳥라고도 한다.
[역주:23권125] 신라가 말갈의 침략을 받자 … 장군을 보내 이를 구원하였다
본 기사에는 백제가 사신을 보낸 月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본서 권1 신라본기 祗摩尼師今 14년(125) 추7월조에 동일한 내용이 보인다.
[역주:23권126] 52년
기루왕의 재위기간. 그러나 《삼국유사》 王曆篇에는 『丁丑立 理五十五年』이라 하여 본 기사와는 3년의 차이가 있다. 3년 중 1년은 稱元法의 차이에서 온 것이므로 실제로는 2년의 차이이다.
蓋婁王 己婁王之子 性恭順有操行 己婁在位五十二年薨 卽位
四年 夏四月 王獵漢山
五年 春二月 築北漢山城
十年 秋八月庚子 熒惑犯南斗 ※
二 ※十八年 春正月丙申晦 日有食之 冬十月 新羅阿湌吉宣謀叛 事露來奔 羅王移書請之 不送 羅王怒 出師來伐 諸城堅壁自守不出 羅兵絶糧而歸【論曰】 春秋時 莒僕來奔魯 季文子曰 “見有禮於其君者 事之如孝子之養父母也 見無禮於其君者 誅之如鷹鸇之逐鳥雀也 觀莒僕 不度於善而在於凶德 是以去之” 今吉宣亦姦賊之人 百濟王納而匿之 是謂“掩賊爲藏”者也 由是 失鄰國之和 使民困於兵革之役 其不明甚矣
三十九年 王薨
四年 夏四月 王獵漢山
五年 春二月 築北漢山城
十年 秋八月庚子 熒惑犯南斗 ※
二 ※十八年 春正月丙申晦 日有食之 冬十月 新羅阿湌吉宣謀叛 事露來奔 羅王移書請之 不送 羅王怒 出師來伐 諸城堅壁自守不出 羅兵絶糧而歸【論曰】 春秋時 莒僕來奔魯 季文子曰 “見有禮於其君者 事之如孝子之養父母也 見無禮於其君者 誅之如鷹鸇之逐鳥雀也 觀莒僕 不度於善而在於凶德 是以去之” 今吉宣亦姦賊之人 百濟王納而匿之 是謂“掩賊爲藏”者也 由是 失鄰國之和 使民困於兵革之役 其不明甚矣
三十九年 王薨
[교주:23권22] 斗
原本 「斗一」. 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수정. 燾 「(一)衍文」.
[교주:23권23] 二
三國史節要 「三」. 朝·權·浩 「三」.
[역주:23권127] 개루왕(蓋婁王)
백제 제4대 왕. 기루왕의 아들. 재위기간은 128~166년. 그가 태자로 책립된 해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본서 권 24 백제본기 蓋鹵王 즉위년조에 개로왕을 『或云近蓋婁』라고 하고 있는데 '近蓋妻'는 '蓋婁'에 '近'字를 앞에 붙인 것이다. 이는 개로왕과 개루왕과의 친연관계를 반영해 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역주:23권128] 북한산성(北漢山城)
현재의 경기도 高陽郡 新都邑 北漢里에 위치하였다. 都城 慰禮城을 지키기 위해 축조하였다. 그러나 과연 2세기 전반에 백제가 북한산성을 축조하였는지는 의문이다. 金正浩는 《大東地志》 권3 경기도 楊州 古城條에서 『百濟蓋婁王 五年 築北漢山者非是…此城始於百濟時 而非百濟之都城』이라 하여 개루왕 5년의 북한산성 축조설을 부정하고 있다. 比流王 24년(327)에는 내신 좌평 優福이 이곳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역주:23권129] 형혹(熒惑)
火星의 다른 이름. 災禍·兵亂의 조짐을 나타낸다. 《漢書》 권26 天文志 제6에 『熒惑曰南方夏火 禮也 禮虧視失 逆夏令 傷火氣 罰見刑獄…熒惑爲亂爲敗 爲疾爲喪 爲飢爲病 所居之宿國受殃…一曰 熒惑出則有大兵 入則兵散 周還止息 乃爲其死喪…熒感 天子理也 故曰 雖有明天子 必視熒惑所在』라 한 기사 참조.
[역주:23권130] 남두(南斗)
二十八宿의 여덟 번째의 별. 小暑節의 中星으로서 남방에 있으며 모두 여섯 개로 구성되어 있다. 그 모양이 斗와 비슷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천자의 수명과 宰相의 爵祿을 주관한다고 한다. 《史記》 권27 天官書 제5에 『南斗爲廟 其北建星(正義 南斗六星在南)』이라 한 기사 참조.
[역주:23권131] 아찬(阿湌)
신라 17관등 중 제6관등. 重阿湌에서 4重阿湌으로 분화되었다. 신라 골품제 하에서는 6두품 출신자가 오를 수 있는 상한선의 관등이다. 본서 권38 주석 18 참조.
[역주:23권132] 길선(吉宣)
신라 阿達羅尼師今代의 인물. 아찬의 관등을 가졌다. 모반을 꾀하다가 발각되어 백제로 도망하였다. 자세한 것은 본서 권2 신라본기 아달라 이사금 12년조 참조.
[역주:23권133] 신라의 아찬(阿湌) 길선(吉宣)이 … 군사들은 군량이 떨어져 돌아갔다.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2 신라본기 阿達羅尼師今 12년(165)조에 보이나 본 기사의 연대인 개루왕 28년(155)과는 10년의 차이가 난다. 그러나 두 기사 가운데 어느 것이 옳은지 분명히 하기 어렵다.
[역주:23권134] 춘추시대(春秋時代)
중국의 周나라 平王이 서기전 700년에 東遷해서부터 晉의 大夫 韓·魏·趙가 독립하기까지(서기전 403년)의 360년간의 시대. 공자가 撰述한 《春秋》는 魯의 隱公 원년부터 哀公 14년에 이르기까지 242년의 記述인데 이 시대의 일이 대략 記載되어 있기 때문에 《春秋》의 書名을 따서 시대명으로 하였다. 이 시대에는 周나라가 더욱 쇠약하여 그 위력을 잃고 諸侯는 서로 병탄을 일삼아 전쟁이 끊이지 않은 弱肉强食의 世態를 이루었다.
[역주:23권135] 거복(莒僕)
춘추시대 莒國 紀公의 태자인 僕을 말한다. 莒國은 周나라 武王이 玆輿期를 莒에 封함으로 성립되었는데 지금의 중국 山東省 莒縣에 있었다. 紀公은 태자 僕과 季佗를 낳았는데 계타를 사랑하여 僕을 내쫓고 무례를 행함이 많았다. 이에 僕은 國人의 힘을 빌려 기공을 죽이고 그 財寶를 가지고 도망해 와서 魯나라 宣公에게 바쳤다. 《춘추좌씨전》 文公 18년에 『莒紀公子生太子僕 又生季佗 愛季佗而黜僕 且多行無禮於國 僕因國人 以弑紀公 以其寶玉 來奔 納諸宣公…』이라 한 기사 참조.
[역주:23권136] 노(魯)나라
중국 춘추시대의 列國의 하나. 지금의 山東省 袞州府 曲阜縣이다. 國祖는 周나라 武王의 아우인 周公旦이다. 旦은 무왕을 도운 공으로 曲阜에 봉함을 받았고, 成王은 그의 아들 伯禽을 魯에 봉하였다. 頃公(서기전 249년) 때에 초나라의 考烈王에게 망하였다. 《詩經》 魯頌 駉之什 魯頌譜 箋에 『周公歸政 成王封其元子伯禽於魯』라 한 기사 참조.
[역주:23권137] 계문자(季文子)
춘추시대 魯나라의 대부인 季孫行父를 말한다. 시호는 文이다. 文公 초에 卿이 되었고, 宣公·魏公·讓公의 相이 되었다(《春秋左氏傳》 文公 6년 12년 및 成公 16년조 참조). 계문자가 한 말은 《春秋左氏傳》 문공 18년에 『公問其故 季文子使大史克對曰 先大夫臧文仲敎行父事君之禮 行父奉以周旋 不敢失墜 曰見有禮於其君者 事之如孝子之養父母也 見無禮於其君者 誅之如鷹鸇之逐鳥雀也…行父還觀莒僕 莫可則也 孝敬忠信爲吉德 盜賊藏姦爲凶德 夫莒僕 則其孝敬則弒其君父矣 則其忠信則竊寶玉矣 其人則盜賊也 其器則姦兆也 保而利之則主藏也 以訓則昏民無則焉 不度於善而皆在於凶德 是以去之』로 나온다. 한편 『역적을 비호하여 숨기는 것[掩賊爲藏]』이라는 말도 《春秋左氏傳》 文公 18년의 季文子가 한 말인 『其先君周公…作誓命曰 毁則爲賊 掩賊爲藏 竊賄爲盜 盜器爲姦 主藏之名 賴姦之用 爲大凶德 有常無赦 在九刑不忘』에 나온다.
[역주:23권138] 39년
개루왕의 재위기간. 《삼국유사》 王曆篇에는 『戊辰立理三十八年』이라 하여 본 기사보다 1년이 적다. 《三國遺事》는 踰年稱元法을 따랐으므로 실제로는 2년의 차이가 있게 된 셈이다. 이 2년의 차이는 기루왕의 재위년수가 《三國遺事》에서는 2년 길게 나온 것과 연관시켜 보아야 할 것이다.
肖古王
一云素古 蓋婁王之子 蓋婁在位三十九年薨 嗣位
二年 秋七月 潛師襲破新羅西鄙二城 虜獲男女一千而還 八月 羅王遣一吉湌興宣 領兵二萬 來侵國東諸城 ※ 羅王又親帥精騎八千繼之 掩至漢水 王度羅兵衆不可敵 乃還前所掠 ※
五年 春三月丙寅晦 日有食之 冬十月 出兵侵新羅邊鄙
二十一年 冬十月 無雲而雷 星孛于西北 二十日而滅
二十二年 夏五月 王都井及漢水皆竭
二十三年 春二月 重修宮室 出師攻新羅母山城
二十四 ※年 夏四月丙午 ※朔 日有食之 秋七月 我軍與新羅戰於狗壤敗北 死者五百餘人
二十五年 秋八月 出兵襲新羅西境圓山鄕 進圍缶 ※谷城 新羅將軍仇道帥馬兵五百拒之 我兵佯退 仇道追至蛙山 我兵反擊之 大克
二十六年 秋九月 蚩尤旗見于角·亢
三十四年 秋七月 地震 遣兵侵新羅邊境
三十九年 秋七月 出兵攻新羅腰車城拔之 殺其城主薛夫 羅王奈解怒 命伊伐湌利音爲將 帥六部精兵 ※ 來攻我沙峴城 ※ 冬十月 星孛于東井
四十年 秋七月 太白犯月
四十三年 秋 蝗 旱 穀不順成 盜賊多起 王撫安之
四十四年 冬十月 大風拔木
四十五年 春二月 築赤峴·沙道二城 移東部民戶 冬十月 靺鞨來攻沙道城不克 焚燒城門而遁
四十六年 秋八月 國南蝗害穀 民饑 冬十一月 無氷
四十七年 夏六月庚寅晦 日 ※有食之
四十八年 秋七月 西部人茴 ※會獲白鹿獻之 王以爲瑞 賜穀一百石
四十九年 秋九月 命北部眞果領兵一千 襲取靺鞨石門城 冬十月 靺鞨以勁騎來侵 至于述川 王薨
一云素古 蓋婁王之子 蓋婁在位三十九年薨 嗣位
二年 秋七月 潛師襲破新羅西鄙二城 虜獲男女一千而還 八月 羅王遣一吉湌興宣 領兵二萬 來侵國東諸城 ※ 羅王又親帥精騎八千繼之 掩至漢水 王度羅兵衆不可敵 乃還前所掠 ※
五年 春三月丙寅晦 日有食之 冬十月 出兵侵新羅邊鄙
二十一年 冬十月 無雲而雷 星孛于西北 二十日而滅
二十二年 夏五月 王都井及漢水皆竭
二十三年 春二月 重修宮室 出師攻新羅母山城
二十四 ※年 夏四月丙午 ※朔 日有食之 秋七月 我軍與新羅戰於狗壤敗北 死者五百餘人
二十五年 秋八月 出兵襲新羅西境圓山鄕 進圍缶 ※谷城 新羅將軍仇道帥馬兵五百拒之 我兵佯退 仇道追至蛙山 我兵反擊之 大克
二十六年 秋九月 蚩尤旗見于角·亢
三十四年 秋七月 地震 遣兵侵新羅邊境
三十九年 秋七月 出兵攻新羅腰車城拔之 殺其城主薛夫 羅王奈解怒 命伊伐湌利音爲將 帥六部精兵 ※ 來攻我沙峴城 ※ 冬十月 星孛于東井
四十年 秋七月 太白犯月
四十三年 秋 蝗 旱 穀不順成 盜賊多起 王撫安之
四十四年 冬十月 大風拔木
四十五年 春二月 築赤峴·沙道二城 移東部民戶 冬十月 靺鞨來攻沙道城不克 焚燒城門而遁
四十六年 秋八月 國南蝗害穀 民饑 冬十一月 無氷
四十七年 夏六月庚寅晦 日 ※有食之
四十八年 秋七月 西部人茴 ※會獲白鹿獻之 王以爲瑞 賜穀一百石
四十九年 秋九月 命北部眞果領兵一千 襲取靺鞨石門城 冬十月 靺鞨以勁騎來侵 至于述川 王薨
[교주:23권24] 城
原本 判讀不能. 鑄字本에 의거 수정.
[교주:23권25] 掠
本書 卷2 阿達羅尼師今 十四年條 「乞和」 추가.
[교주:23권26] 四
三國史節要 「三」.
[교주:23권27] 午
三國史節要 「寅」.
[교주:23권28] 缶
原本 「?」. 「缶」의 俗字.
[교주:23권29] 兵
「六部精兵」, 本書 卷2 奈解尼師今 十九年條 「精兵六千」.
[교주:23권30] 城
「出兵…沙峴城」, 本書 卷2 新羅本紀에는 奈解尼師今 十九年條(百濟 仇須王 卽位年:214)에 기록됨.
[교주:23권31] 日
原本 「目」. 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수정.
[교주:23권32] 茴
三國史節要 「筍」.
[역주:23권139] 초고왕(肖古王)
백제 제5대 왕. 개루왕의 아들. 素古라고도 하였다. 재위기간은 166~214년. 백제의 초기 왕계가 沸流系와 溫祚系로 구성되었다는 견해에서는 다루왕-기루왕-개루왕을 비류계 해씨의 王統으로 보고 초고왕 이후부터를 온조계 扶餘氏의 왕통으로 파악하고 있다(노중국, 앞의 책, 65~77쪽). 近肖古王의 이름이 肖古에 ‘近’字를 앞에 붙여서 이루어진 것인데 이는 초고왕이 백제 王系에서 中始祖的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일본서기》 권9 신공기 49년조와 55년조에 나오는 肖古王은 근초고왕을 가리킨다.
[역주:23권140] 일길찬(一吉湌)
신라 17관등 중 제7관등. 골품제와 연계시켜 볼 때 眞骨이나 6頭品 출신자들이 가질 수 있는 관등이었다. 본서 권 38 주석 21 참조.
[역주:23권141] 흥선(興宣)
신라 阿達羅尼師今대의 장군. 군사 2만을 거느리고 백제군의 공격을 물리쳤다.
[역주:23권142] 왕은 신라 군사의 수가 많아 … 돌려주었다.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2 신라본기 阿達羅尼師今 14년(167)조에 보이는데 『乞和』가 첨가되어 있다. 본서 권2 주석 13 참조.
[역주:23권143] 군사를 내어 신라의 변경을 침공하였다.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2 신라본기 阿達羅尼師今 17년(170)조에 보인다.
[역주:23권144] 살별[星孛]
빛나는 긴 꼬리를 끌고 해를 초점으로 하여 가늘고 긴 타원이나 포물선 또는 포물선에 가까운 쌍곡선의 궤도를 운행하는 천체. 尾星·살별·長星·流星·彗悖라고도 한다. 《史記》 권27 天官書 제5 『其失次舍以下 進而東北…三月生彗星(正義曰 天彗者 一名埽星 本類星 末類彗 小者數寸長 長或竟天 而體無光 假日之光 故夕見則東指 晨見則西指 若日南北 皆隨日光而指 光芒所及爲災變 見則兵起 陰舊布新 彗所指之處弱也)長二丈 類彗 退而西北』이라 한 기사 참조.
[역주:23권145] 모산성(母山城)
본서 권27 백제본기 武王 3년조의 『王出兵圍新羅阿莫山城(一名 母山城)』이라 한 기사에는 阿莫山城으로도 나온다. 현재의 전북 南原市 雲峰邑에 비정된다. 그러나 본서 권3 신라본기 소지 마립간 6년 7월조에 모산성이 신라의 북변에 있었다고 하였으므로, 여기의 모산성은 남원의 아막산성과는 다른 곳일 수도 있다. 신라 북변의 모산성에 대해서는 충북 진천군 대모산성으로 보는 설(李丙燾, 《국역 삼국사기》, 1977, 25쪽)과 경북 의성 방면으로 보는 설(千寬宇, 《古朝鮮史·三韓史硏究》, 일조각, 1989, 302쪽)이 있다.
[역주:23권146] 신라의 모산성(母山城)을 공격하였다.
동일한 사건이 본서 권2 신라본기 伐休尼師今 5년(188)조에 보이는데, 『命波珍湌仇道 出兵拒之』라는 기사가 첨가되어 있다.
[역주:23권147] 신라와 구양(狗壤)에서 싸워 … 죽은 자가 500여 명이었다.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2 신라본기 伐休尼師今 6년(189)조에 나온다. 그러나 《三國史節要》에는 이 내용이 초고왕 23년조에 실려 있다.
[역주:23권148] 원산향(圓山鄕)
현재의 경북 醴泉郡 龍宮面에 비정된다(千寬宇, 〈三韓의 國家形成〉 하, 《韓國學報》 3, 1976, 124쪽 및 《新增東國輿地勝覽》 권25 경상도 龍宮縣 建置沿革조에 『本新羅竺山(一云園山)』이라 한 기사 참조). 《新增東國輿地勝覽》 권7 경기도 驪州牧 古跡條에 『登神莊(在川寧東二十里 今按新羅建置州郡時 其田丁戶口未堪爲縣者 或置鄕 或置部曲 屬于所在之邑…』이라 한 기사에 의하면 田丁戶口가 군현이 되지 못하는 지역에 향이나 부곡을 두었다고 한다. 원산향의 경우 '鄕'이 붙어 있는 것에서 미루어 볼 때 鄕·部曲의 일종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러나 향·부곡제는 신라가 통일 이후 주군현제를 정비하게 되면서 제도화된 것이므로, 향·부곡제의 성립을 이 시기까지 올려 볼 수는 없을 것 같다.(신라의 향에 대해서는 木村誠, 〈新羅時代の鄕-部曲 成立史の再檢討〉, 《歷史評論》 403, 1983 및 朴宗基, 〈新羅시대 鄕·部曲의 성격에 관한 시론〉, 《韓國學論叢》 10, 국민대 한국학연구소, 1988 참조)
[역주:23권149] 부곡성(缶谷城)
본서 권37 地理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실려 있다. 현재의 경북 軍威郡 缶溪面에 비정된다(李丙燾,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1977, 364쪽).
[역주:23권150] 구도(仇道)
신라 阿達羅尼師今과 伐休尼師今대의 장군. 신라 味鄒尼師今의 아버지이다. 본서 권2 주석 16 참조.
[역주:23권151] 신라의 서쪽 국경의 원산향(圓山鄕)을 습격하고 … 크게 이겼다.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2 伐休尼師今 7년(190)조에 보이는데, 馬兵이 勁騎로 나온다.
[역주:23권152] 치우기(蚩尤旗)
혜성과 같으나 꼬리의 뒷부분이 굽었다. 이 별이 나타나면 兵亂이 일어난다고 한다. 《史記》 권27 天官書 제5에 『蚩尤之旗(晉灼曰 呂氏春秋云 其色黃上白下也) 類彗而後曲 象旗 見則王者征伐四方』이라 한 기사 참조.
[역주:23권153] 각(角)
二十八宿의 하나. 동방에 있는 靑龍의 首星. 刑과 兵을 주관하였다. 《晉書》 권11 지1 천문 상에 『東方 角二星爲天關 其間天門也 其內天庭也…左角爲天田 爲理 主刑…右角爲將 主兵』이라 한 기사 참조.
[역주:23권154] 항(亢)
28宿의 하나. 동방에 위치하였으며, 奏事와 獄訟을 맡았다. 《晉書》 권11 지1 천문 상에 『亢四星 天子之內朝也 總攝天下奏事 聽訟理獄錄功者也』라 한 기사 참조.
[역주:23권155] 군사를 보내 신라의 변경을 쳤다.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2 奈解尼師今 4년(199)조에 보인다.
[역주:23권156] 요거성(腰車城)
본서 권37 地理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실려 있다. 현재의 위치는 미상이다. 이를 尙州의 舊 要濟院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李丙燾,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1977, 356쪽).
[역주:23권157] 나해(奈解)
신라 제10대 왕. 재위기간은 196~230년. 본서 권2 신라본기 나해 이사금 즉위년조 참조.
[역주:23권158] 이벌찬(伊伐湌)
신라 17관등 중 제1관등. 角干·一伐干이라 고도 하였다. 본서 권38 주석 10 참조.
[역주:23권159] 이음(利音)
신라 奈解尼師今대의 장군. 태자 우로와 함께 浦上八國의 침입을 격퇴하였다. 《삼국유사》 권5 避隱篇 勿稽子條에는 『第十奈解王卽位十七年壬辰…王命太子捺音將軍一伐等 率兵拒之』라 하여 捺音으로도 표기되고 있다. 본서 권2 주석 44 참조.
[역주:23권160] 정예 군사
본서 권2 신라본기 나해 이사금 19년조에는 『정예군사 6천[精兵六千]』이라 하여 군사의 숫자를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역주:23권161] 나해(奈解)가 노하여 … 사현성(沙峴城)을 공격하였다.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2 신라본기 奈解尼師今 19년(214)조에 나오는데 사현성을 함락시킨 것으로 되어 있어 본 기사와 다르다. 그런데 나해 이사금 19년은 서기 214년으로 백제의 초고왕 39년(204)보다 10년의 차이가 있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 단정하기 어렵다.
[역주:23권162] 동정(東井)
井宿라고도 한다. 28宿의 하나로서 남방에 있었다. 水事를 주관하였다. 28宿는 옛날 천문학에서 하늘을 사궁(四宮: 四神을 말한다)으로 나누고 각 宮마다 일곱 星宿로 나눈 것을 말한다. 남방에 속한 星宿로는 井·鬼·柳·星·張·翼·軫이 있다. 《史記》 권27 天官書 제5에 『東井爲水事(索隱 元命包云 東井八星 主水衡也) 其西曲星曰鉞 鉞北北河 南南河…火守南北河 兵起 穀不登 故德成衡 觀成潢 傷成鉞 禍成井(集解 晉灼曰 東井主水事 火入一星居其傍 天子且以火敗 故曰禍也)』로 나온다.
[역주:23권163] 금성[太白]
태백은 金星의 다른 이름, 長庚星이라고도 한다. 《사기》 권27 천관서 제5에 『察日行以處位(索隱 案 太白晨出東方曰 啓明 故察日行以處太白之位也) 太白(索隱 韓詩云 太白晨出東方爲啓明 昏見西方爲長庚…正義 晉灼云 常以正月甲寅與熒惑 晨出東方 二百四十日而入 入四十日 又出西方 二百四十日入 入三十五日 而復出東方) 曰西方 秋 日庚 辛 主殺 殺失者 罰出太白…』으로 나온다. 한편 《漢書》 권26 天文志 제6에는 『太白曰西方 秋金 義也 言也 義虧言失 逆秋令 傷金氣 罰見太白…太白 兵象也 出而高 用兵深吉淺凶 埤 淺吉深 凶 行疾 用兵疾吉遲凶 行遲 用兵遲吉疾凶…』으로 나온다.
[역주:23권164] 누리[蝗]
비황(飛蝗)이라고도 한다. 메뚜기과에 속하는 곤충으로 풀무치와 비슷한 데 몸길이는 45~65mm 가량이다. 무리지어 하늘을 날아 이동할 때 해가 가리어지고, 그 떼가 앉는 곳에서는 순식간에 땅 위의 풀이 하나도 없게 된다고 한다.
[역주:23권165] 적현성(赤峴城)
현재의 위치는 미상. 본서 권37 잡지 地理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실려 있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충북 沃川·永春, 충남 韓山·唐津, 경북 開寧 등지에 赤峴의 지명이 보이지만 어느 곳이 타당한지 단정하기 어렵다.
[역주:23권166] 사도성(沙道城)
본서 권37 잡지 地理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실려 있다. 音韻上에서 볼 때 신라 漢州 兎山郡 朔邑縣의 옛 지명인 所邑豆縣 또는 石頭城과 같은 곳으로 생각되는데, 이곳은 현재의 경기도 漣川郡 朔寧邑에 해당된다. 본서 권37 주석 451, 460 참조
[역주:23권167] 회회(茴會)
백제 초고왕대의 인물. 西部의 유력자였다. 그가 사슴을 포획하여 바쳤다는 것은 그의 세력이 백제의 세력권으로 들어오게 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茴氏는 사비도읍기에 와서는 최고 귀족가문인 大姓八族의 하나가 되었다.
[역주:23권168] 49년
초고왕의 재위기간. 그러나 《삼국유사》 王曆篇에는 『丙午立 理五十年』이라 하여 1년의 차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