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歷史/三國史記

三國史記 卷第二十六

柳川 2019. 12. 25. 04:15

三國史記 卷第二十六



百濟本紀 第四 文周王·三斤王·東城王·武寧王·聖王

文周王
或作汶洲 蓋鹵王之子也 初毗有王薨 蓋鹵嗣位 文周輔之 位至上佐平 蓋鹵在位二十一年 高句麗來侵圍漢城 蓋鹵嬰城自固 使文周求救於新羅 得兵一萬廻 麗兵雖退 城破王死 遂卽位 性柔不斷 而亦愛民 百姓愛之 冬十月  都於熊津

二年 春二月 修葺大豆山城 移漢北民戶 三月 遣使朝宋 高句麗塞路 不達而還 夏四月   羅國獻方物 王喜 拜使者爲恩率 秋八月 拜解仇爲兵官佐平

三年 春二月 重修宮室 夏四月 拜王弟昆支爲內臣佐平 封長子三斤爲太子 五月 黑龍見熊津 秋七月 內臣佐平昆支卒


  秋八月 兵官佐平解仇 擅權亂法 有無君之心 王不能制 九月 王出獵 宿於外 解仇使盜害之 遂薨


[교주:26권1] 移
原本 判讀不能. 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수정.
[교주:26권2] 耽
原本 「躭」. 「耽」의 俗字. 以下 同.
[교주:26권3] 四
本書 卷30 年表 中 및 三國史節要 「三」. 舜 「三」, 燾 「四(三)」.




[역주:26권1] 문주왕(文周王)
백제 제22대 왕. 재위기간은 475~477년. 개로왕이 고구려군에게 죽임을 당하자 한성에서 왕위에 올라 웅진으로 천도를 하였다. 그러나 재위 4년에 兵官좌평 解仇에 의해 피살되었다. 문주왕의 이름에 대해 본 기사의 細注에는 文洲로, 《三國遺事》 王曆篇에는 『文周王一作文明』으로, 《日本書紀》 권14 雄略紀 21년(477년)조에는 汶洲로 나온다. 한편 《南齊書》 권58 열전 백제 전에 『(前略) 使兼謁者僕射孫副 策命大襲亡祖父牟都爲百濟王』이라 한 기사에 보이는 백제왕 牟都는 《宋書》 권97 열전 백제전에 보이는 『輔國將軍 餘都』와 동일인이며 문주왕으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李基東, 〈中國史書에 보이는 百濟王 牟都에 대하여〉, 《歷史學報》 62, 1974, 30~33쪽).
[역주:26권2] 문주왕(文周王)은 개로왕(蓋鹵王)의 아들이다
문주왕의 出自에 대해서는 본 기사와 《三國遺事》 王曆篇에는 개로왕의 아들로 나오고, 《日本書紀》 권14 雄略紀 21년조에는 『春三月 天皇聞百濟爲高麗所破 以久麻那利賜汶洲王 救與其國…(汶洲王蓋鹵王母弟也)』라 하여 개로왕의 동생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 두 설 가운데 문주가 개로왕대에 上佐平으로 활약하였다는 것과 輔國將軍의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중시할 때 개로왕의 동생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李基白, 〈百濟王位繼承考〉, 《歷史學報》 11, 1959, 26쪽; 千寬宇, 〈三韓의 國家形成〉 하, 《韓國學報》 3, 1976, 141쪽; 李道學, 〈漢城末 熊津時代 百濟王系의 檢討〉, 《韓國史硏究》 45, 1984, 8~11쪽).
[역주:26권3] 개로는 … 신라에 구원을 요청하게 하였다.
문주가 신라로 구원병을 청하러 간 시기에 대해 본 기사와 본서 권6 고구려본기 장수왕 63년조에는 475년으로 되어 있다. 반면에 본서 권3 신라본기 慈悲麻立干 17년조에는 474년(개로왕 20년) 가을 7월로 되어 있다. 그러나 신라본기의 기사는 개로왕이 고구려가 공격하기 거의 1년 전에 문주를 신라에 보내 구원군을 요청한 것이되므로 취신하기 어렵다고 본다.
[역주:26권4] 성은 파괴되고 왕은 죽었으므로
고구려가 백제 왕도를 함락함으로써 백제가 입은 피해에 대해 본서 권18 고구려본기 장수왕 63년(475)조에는 『九月 王師兵三萬 侵百濟 陷王所都漢城 殺其王扶餘慶 虜男女八千而歸』로 나온다. 한편 《일본서기》 권14 雄略紀 20년조에는 『冬 高麗王大發軍兵 伐盡百濟…(百濟記云 蓋國王乙卯年冬 狛大軍來政大城 七日七夜 王城降陷 遂失慰禮 國王及大后王子等皆沒敵手)』라 하여 왕을 비롯하여 大后와 왕자 등도 모두 죽은 것으로 나온다.
[역주:26권5] [문주가] … 드디어 왕위에 올랐다
개로왕의 동생인 문주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왕도 한성의 함락으로 개로왕과 왕비 및 왕자 등이 모두 고구려군에 의해 피살되어 왕위를 이을 적통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신라에 가서 구원병으로 데리고 온 1만명의 군사는 그의 즉위에 군사적 배경이 된 것으로 보인다.
[역주:26권6] 웅진(熊津)
문주왕 즉위년(475년)부터 성왕이 16년(538)에 사비로 천도하기까지 63년간의 백제의 왕도, 현재의 충남 公州市이다. 문주왕이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시기에 대해 《日本書紀》 권14 雄略紀에는 웅략21년(477: 文周王 3년)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이다. 이 웅진은 성왕 16년(536)에 수도가 사비로 옮겨지면서 백제 5方중의 하나인 北方으로서 군사상의 거점이 되었다. 백제가 멸망한 후에는 唐은 웅진에 웅진도독부를 두어 백제고지 지배의 중심지로 삼았다. 그후 신라 神文王대에 熊川州로, 景德王 16년(757)에 熊州로 개칭되었다. 수도 웅진의 명칭에 대해 《삼국유사》 王曆篇에는 『移都熊川』으로, 《梁書》 권54 열전 백제전에는 『號所治城曰固麻 謂邑曰檐魯 如中國之言郡縣也』라 하여 固麻城으로, 《周書》 권49 열전 백제전에도 『其地東極新羅 北接高句麗…南北九百餘里 治固麻城 其外更有五方』이라 하여 역시 固麻城으로 그리고 《일본서기》 권14 雄略紀 21년조에는 『春三月 天皇聞百濟爲高麗所破 以久麻那利賜汶洲王…(日本舊記云 以久麻那利 賜末多王 蓋是誤也 久麻那利者 任那國下哆呼利縣之別邑也)』이라 하여 久麻那利로 나온다.
[역주:26권7] 대두산성(大豆山城)
본서 권37 잡지 지리 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나온다. 동일한 지명이 본서 권23 온조왕 27년(서기후 9년)조에도 보이고 있다. 熊津으로 천도한 이후의 대두산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충남 燕岐 지방으로 비정하는 견해(千寬宇, 〈三韓의 國家形成〉 하, 《韓國學報》 3, 1976, 132쪽), 충남 牙山市 陰峰面 水漢山城에 비정하는 견해(李基白, 〈熊津時代 百濟의 貴族勢力〉, 《百濟硏究》 9, 1982), 충남 牙山市 靈仁面 靈仁山城에 비정하는 견해(兪元載, 〈百濟 湯井城 硏究〉, 《百濟論叢》 3집, 1992) 등이 있다.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의 한강 유역 일대는 고구려의 영역이 되었다. 그리고 백제가 이 지역을 일시적이나마 회복한 것은 성왕 29년(551)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서에는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에도 한강을 비롯하여 한강 이북의 지명이 다수 나온다. 대두성도 그러한 城 가운데의 하나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 일시적으로 한강유역을 회복한 결과로 보는 견해(梁起錫, 〈百濟 專制王權 成立過程硏究〉, 단국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0, 143쪽), 웅진천도 후에도 한성시기의 지명을 移置하여 사용한 결과로 보는 견해(李基白, 〈熊津時代 百濟의 貴族勢力〉, 《백제연구》,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편, 1982, 38쪽), 백제 왕실이 한강 유역에 대한 전통적 영유의식에서 웅진기의 지명에다 한성기의 지명을 의도적으로 대입한 것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는 견해(李道學, 〈漢城 末·熊津시대 百濟王系의 검토〉, 《한국사연구》 45, 25쪽) 등이 있다. 이 문제는 백제의 한강유역 탈환시기와도 연관되는 것이므로 앞으로 해명되어야 할 과제라 할 것이다.
[역주:26권8] 한강 이북[漢北]
한강은 漢水라고도 하는데 현재의 서울의 한강이다. 이 한강은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에는 이미 고구려의 영역이 되었다. 본 기사의 한강을 현재의 한강으로 본다면 고구려 영역내에 있는 민호들을 이주시킨 것으로 되어 사실과 맞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면 이 기사의 한강은 현재의 한강이 아닌 다른 강으로 비정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느 강이 웅진도읍기의 한강인지는 구체적으로 비정하기 어렵다.
[역주:26권9] 탐라국(耽羅國)
현재의 제주도. 본서 권24 백제본기 동성왕 20년 조에는 耽牟羅로, 《三國志》 권30 魏書 동이전 한전에는 州湖로, 《魏書》 권100 열전 고구려전에는 涉羅로, 《삼국유사》 권1 紀異篇 馬韓條에 인용된 《海東安弘記》에는 乇羅로 표기되었다. 한편 《日本書紀》 권9 神功紀 섭정 49년조에 보이는 忱彌多禮를 탐라에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末松保和, 《任那興亡史》, 吉川弘文館, 1956, 47 ~ 49쪽). 탐라의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고려사》 권57 지11 지리2에 『…至十五代孫 高厚高淸昆弟三人 造舟渡海 至于耽津 蓋新羅盛時也…遂朝新羅王嘉之 稱長子曰星主 二子曰王子 季子曰都內 邑號曰耽羅 盖以來時 初泊耽津故也』라 하여 탐라 國主의 아들들이 신라에 입조할 때 耽津에 최초로 碇泊하였던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나온다. 이 기사는 탐라가 백제와 통교한 최초의 기록이다. 그러나 《日本書紀》 권17 繼體紀 2년 12월조에는 『南海中耽羅人初通百濟國』이라 하여 508년(武寧王 8)에 탐라가 백제에 처음으로 사람을 보낸 것으로 되어 있어 본 기사와 차이가 난다.
이 탐라국은 백제 문주왕 2년(476)에 백제와 처음으로 통교를 하였고, 신라 문무왕 2년(662)에 신라의 속국이 되었다. 고려 태조 21년(938)에 고려의 속국이 되었고, 고려 숙종 10년(1105)에 郡을 설치하고 관리를 파견하여 직접 다스리게 되었다. 이 탐라에는 高氏·梁氏·夫氏라고 하는 3姓의 開闢설화가 있는데(《고려사》 권57 志11 지리2)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다.
[역주:26권10] 해구(解仇)
백제 문주왕대의 인물. 대성팔족의 하나인 解氏출신. 문주왕대에 兵官佐平이 되어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 해구를 比流王 9년(312)조에 보이는 병관좌평 解仇와 동일인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李弘稙, 〈百濟人名考〉, 《韓國古代史의 硏究》, 1971, 352~353쪽), 同名異人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문주왕을 죽이고 어린 삼근왕을 세워 軍國政事를 專斷하다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역주:26권11] 곤지(昆支)
백제 문주왕의 동생. 내신좌평의 직에 있었으며 그의 아들은 후일 동성왕이 되었다. 곤지의 표기는 일본측 자료에는 다양하게 나온다. 《日本書紀》 권14 雄略紀 5년조의 본문에는 軍君(崐支君)으로, 웅략기 5년조에 인용된 《百濟新撰》에는 琨支君으로, 권16 武烈紀 4년조에는 混支로, 《新撰姓氏錄》 河內諸蕃 飛鳥戶條와 에는 琨支로, 《日本三代實錄》 권7 貞觀 5년 8월조에는 琨支로, 권7 정관 4년 7월조에는 混伎로 표기되어 있다. 이 昆支의 계보에 대해 文周王본기에는 문주왕의 동생으로, 《日本書紀》 권14 雄略紀 5년조의 본문과 거기에 인용된 《百濟新撰》에는 개로왕의 동생으로, 《新撰姓氏錄》 河內諸蕃 飛鳥戶造條에는 毗有王의 아들로 나온다. 그런데 앞의 주석 1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문주왕이 개로왕의 동생이라고 하면 개로왕과 문주왕 및 곤지는 모두 비유왕의 아들로서 형제관계가 된다(李道學, 〈漢城末 熊津時代 百濟王系의 檢討〉, 《韓國史硏究》 54, 1984, 8~11쪽). 한편 이 곤지를 《宋書》 권97 열전 백제전에 보이는 征虜將軍 左賢王 餘昆과 동일인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李基東, 〈中國史書에 보이는 百濟王 牟都에 대하여〉, 《歷史學報》 62, 1974, 32~33쪽).
[역주:26권12] 4년
문주왕의 재위 기간. 그러나 본서 권30 年表 中에 의하면 문주왕은 즉위 3년만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어 본 기사와 1년의 차이가 있다. 이 문제에 대해 문주왕의 피살 시기는 연표의 것이 옳다고 하면서 본문의 “四年” 2字는 衍文이고 8월 이하의 귀절은 前年(3년)조에 접속시켜야 한다는 견해(李丙燾, 《國譯 三國史記》, 1977, 397쪽의 注6)도 있다. 한편 문주왕의 재위기간에 대해 《三國遺事》 王曆篇에는 『乙卯立 移都熊川 理二年』으로 나와 본 기사와는 2년의 차이가 있다. 《三國遺事》는 踰年稱元法을 따랐으므로 실제로는 1년의 차이가 나며, 본 기사를 3년으로 보면 서로 일치한다.




三斤王

或云壬乞 
文周王之長子 王薨 繼位 年十三歲 軍國政事一切委於佐平解仇

二年 春 佐平解仇與恩率燕信聚衆 據大豆城叛 王命佐平眞男 以兵二千討之 不克 更命德率眞老 帥精兵五百 擊殺解仇 燕信奔高句麗 收其妻子 斬於熊 【論曰】 春秋之法 君弑而賊不討 則深責之 以爲無臣子也 解仇賊害文周 其子三斤繼立 非徒不能誅之 又委之以國政 至於據一城以叛 然後再興大兵以克之 所謂履霜不戒 馴致堅氷 熒熒不滅 至于炎炎 其所由來漸矣 唐憲宗之弑 三世而後 僅能殺其賊 況海隅之荒僻 三斤之童蒙 又烏足道哉三月己酉朔 日有食之

三年 春夏 大旱 秋九月 移大 城於斗谷 冬十一月 王薨


[교주:26권4] 或云壬乞
三國遺事 王曆篇 「三斤王(一作三乞)」.
[교주:26권5] 津
原本 「建」. 三國史節要에 의거 수정.
[교주:26권6] 豆
原本 「且」. 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수정.



[역주:26권13] 삼근왕(三斤王)
백제 제23대 왕. 문주왕의 장자. 재위기간은 477~479년. 삼근왕의 이름에 대해 본 기사의 세주에는 壬乞로, 《三國遺事》 王曆篇에는 三乞王으로, 《日本書紀》 권14 雄略紀 23년조에는 文斤王으로 나온다. 그러나 《양서》 권50 열전 백제전에는 삼근왕의 존재는 없고, 동성왕이 문주왕의 뒤를 이은 것으로 나오는데 이는 잘못이라 할 것이다.
[역주:26권14] 연신(燕信)
삼근왕대의 인물. 백제 大姓중의 하나인 연씨 출신. 《일본서기》 권19 흠명기 4년조에 『奈率 燕比善那』가 보이는데 ‘燕’씨는 복성인 '燕比'를 단성으로 축약한 것으로 보인다. 이 燕氏의 세력 근거지는 湯井城(현재의 충남 牙山市 湯井面)으로 비정되고 있다(李基白, 〈態津時代 百濟의 貴族勢力〉, 《百濟硏究》, 지식산업사, 1982).
[역주:26권15] 진로(眞老)
백제 동성왕대의 인물. 덕솔의 관등에 있었다. 삼근왕대에 해구의 반란을 토평하는데 공로를 세웠고, 동성왕을 옹립하였으며, 병관좌평이 되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역주:26권16] 저자[市]에서 목을 베었다.
저자에서 목을 베는 것을 棄市利 이라고 한다. 기시형은 군중이 보는 데서 형벌을 내려 다시는 죄를 짓지 못하도록 威爀을 가하기 위한 목적에서 행한다고 한다(田鳳德, 〈新羅律令考〉, 《韓國法制史硏究》에 재수록, 1968).
[역주:26권17] 춘추(春秋)
중국의 유교경전으로서 5經의 하나. 중국 周代의 魯나라 年代記를 바탕으로 하여 孔子가 엮었다고 한다. 隱公으로 부터 哀公에 이르기까지의 242년간의 역사서이다.
[역주:26권18] 신하[臣子]된 사람이 없다.
이 기사의 내용은 《春秋公羊傳》 隱公 11년에 『壬辰公薨 何以不書葬 春秋 君弑賊不討 不書葬 以爲無臣子也 子沈子曰 君弑 臣不討賊 非臣也 不復讐 非子也 葬生子之事也 春秋君弑賊不討 不書葬 以爲不繫乎臣子也』에 나온다. 그러나 본 사론의 기본틀은 《新唐書》 권8 穆宗 敬宗 文宗 武宗 宣宗本紀에 『贊曰 春秋之法 君弑而賊不討 則深責其國 以爲無臣子也 憲宗之弑 歷三世而 賊猶在 至於文宗 不能明弘志等罪惡 以正國之典刑 僅能殺之而已 是可歎也 穆敬昏童失德 以其在位不久 故天下未至於敗亂 而敬宗卒及其身 是豈有討賊之志裁』라는 贊文에 나오고 있다. 金富軾은 《신당서》의 기존 贊文을 근거로 하여 본 史論을 재구성한 것으로 보인다(李康來, 《三國史記 典據論》, 민족사, 1996, 328~329쪽).
[역주:26권19] 헌종(憲宗)
唐나라 제11대 황제. 順宗의 맏아들. 이름은 純이다. 재위기간은 805~819년. 宦官에게 시해되었다.
[역주:26권20] 당나라 헌종(憲宗)이 시해되었으나 … 그 역적을 죽였다.
당나라 헌종은 宦官에게 시해되었는데(《신당서》 권7 德宗 順宗 憲宗本紀 헌종 15년조의 『正月 宦者陳弘志等反 庚子 皇帝崩 年四十三』이라 한 기사 참조), 이 시해자들은 穆宗과 敬宗을 거쳐 文宗대에 와서 문종 太和 9년(835) 11월에 左軍中衛 仇士良에 의해 제거된 것(《舊唐書》 권184 宦官 王守澄傳 『於是誰何之卒及御史臺從人 持兵入宣政殿院 宦官死者甚衆 輦旣入閤門 內官呼萬歲 俄而(仇)士良等率禁兵五百餘人 露刃出東上閤門 逢人卽殺…』이라 한 기사 참조)을 말한다. 그리고 본 기사의 3世는 왕의 代數로서 穆宗·敬宗·文宗을 말한다.
[역주:26권21] 3년
삼근왕의 재위기간. 그러나 《삼국유사》 王曆篇에는 『丁巳立 理二年』으로 나와 본 기사와는 1년의 차이가 있다.
[역주:26권22] 두곡(斗谷)
현재의 위치는 미상. 이 두곡을 충남 公州의 斗谷驛이나 舒川의 斗谷驛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千寬宇, 〈三韓의 國家形成〉 下, 《韓國學報》 3, 130쪽 주 1).




東城王 諱牟大 或作摩 
文周王弟昆支之子 膽力過人 善射百發百中 三斤王薨 卽位

四年 春正月 拜眞老爲兵官佐平 兼知內外兵馬事 秋九月 靺鞨襲破漢山城 虜三百餘戶以歸 冬十月 大雪丈餘

五年 春 王以獵出 至漢山城 撫問軍民 浹旬乃還 夏四月 獵於熊津北 獲神鹿

六年 春二月 王聞南齊祖道成 冊高句麗巨璉爲驃騎大將軍 遣使上表請內屬 許之 秋七月 遣內法佐平沙若思 如南齊朝貢 若思至西海中 遇高句麗兵 不進

七年 夏五月 遣使聘新羅

八年 春二月 拜 加爲衛士佐平 三月 遣使南齊朝貢 秋七月 重修宮室 築牛頭城 冬十月 大閱於宮南

十年 魏遣兵來伐 爲我所敗

十一年 秋 大有年 國南海村人 獻合穎禾 冬十月 王設壇祭天地 十一月 宴羣臣於南堂

十二年 秋七月 徵 部人年十五歲已上 築沙峴·耳山二城 九月 王田於國西泗 原 拜燕突爲達率 冬十一月 無氷

十三年 夏六月 熊川水漲 漂沒王都二百餘家 秋七月 民饑 亡入新羅者 六百餘家

十四年 春三月 雪 夏四月 大風拔木 冬十月 王獵牛鳴谷 親射鹿

十五年 春三月 王遣使新羅請婚 羅王以伊飡比智女 歸之

十六年 秋七月 高句麗與新羅戰薩水之原 新羅不克 退保犬牙城 高句麗圍之 王遣兵三千救 解圍

十七年 夏五月甲戌朔 日有食之 秋八月 高句麗來圍雉壤城 王遣使新羅請救 羅王命將軍德智 帥兵救之 麗兵退歸

十九年 夏五月 兵官佐平眞老卒 拜達率燕突爲兵官佐平 夏六月 大雨 漂毁民屋

二十年 設熊津橋 秋七月 築沙井城 以狠率毗陁鎭之 八月 王以耽羅不修貢賦 親征至武珍州 耽羅聞之 遣使乞罪 乃止 耽羅 卽耽牟羅

二十一年 夏大旱 民饑相食 盜賊多起 臣寮請發倉賑救 王不聽 漢山人亡入高句麗者二千 冬十月 大疫

二十二年 春 起臨流閣於宮東 高五丈 又穿池養奇禽 諫臣抗疏 不報 恐有復諫者 閉宮門【論曰】 良藥苦口 利於病 忠言逆耳 利於行 是以古之明君 虛己問政 和顔受諫 猶恐人之不言 懸敢諫之鼓 立誹謗之木而不已 今牟大王諫書上而不省 復閉門以拒之 莊子曰 『見過不更 聞諫愈甚 謂之狠』 其牟大王之謂乎夏四月 田於牛頭  遇雨雹乃止 五月 旱 王與左右宴臨流閣 終夜極歡

二十三年 春正月 王都老嫗化狐而去 二虎鬪於南山 捕之不得 三月 降霜害麥 夏五月 不雨至秋 七月 設柵於炭峴 以備新羅 八月 築加林城 以衛士佐平 加鎭之 冬十月 王獵於泗沘東原 十一月 獵於熊川北原 又田於泗沘西原 阻大雪 宿於馬浦村 初王以苩加鎭加林城 加不欲往  以疾 王不許 是以怨王 至是使人刺王 至十二月乃薨 諡曰東城王 冊府元龜云 南齊建 元二年 百濟王牟都遣使貢獻 詔曰 『寶命惟新 澤被絶域 牟都世蕃東表 守職遐外 可卽授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 又永明八年 百濟王牟大遣使上表 遣謁者僕射孫副 策命大襲亡祖父牟都爲百濟王 曰 『於戱 惟爾世襲忠勤 誠著遐表 海路肅澄 要貢無替 式循彛典 用纂顯命 往敬哉 其敬膺休業 可不愼歟 行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百濟王』 而三韓古記 無牟都爲王之事 又按牟大盖鹵王之孫 盖鹵第二子昆支之子 不言其祖牟都 則齊書所載不可不疑


[교주:26권7] 牟
三國遺事 王曆篇 「東城王(一名牟大 一云麻帝 又餘大)」.
[교주:26권8] 苩
東國史略·三國史節要·東國通鑑 「芍」. 以下 同.
[교주:26권9] 北
原本 「比」. 文意로 보아 수정.
[교주:26권10] 沘
原本 「泚」. 本書 卷26 東城王 23年條에 의거 수정. 榮·朝·權·烈 「泚」.
[교주:26권11] 城
東國史略 「山」.
[교주:26권12] 苩
原本 「苗」. 東城王 8年條와 鑄字本에 의거 수정. 東國史略·三國史節要·東國通鑑 「芍」.
[교주:26권13] 辭
原本 「辝」. 「辤」의 古篆. 「辤」는 「辭」의 本字.
[교주:26권14] 齊建
原本 「濟」. 南史에 의거 수정. 原本 「津」. 高麗 太祖의 이름 「建」의 缺劃避諱時 誤刻.




[역주:26권23] 동성왕(東城王)
백제 제24대 왕. 이름은 牟大이다. 《일본서기》 권14 웅략기 23년조에는 末多王으로 나온다. 재위기간은 479~501년. 熊津천도 후 南齊와 통교를 열었고, 신라에 청혼하여 혼인동맹을 맺었으며, 臨流閣을 세우고 加林城을 축조하였다. 후에 衛士佐平 苩加에 의해 암살당하였다.
[역주:26권24] 모대(牟大)
동성왕의 이름. 동성왕의 이름에 대해 본 기사에는 牟大·摩牟로, 《남제서》 권58 열전 백제전에는 牟大로, 《삼국유사》 王曆篇에는 牟大·麻帝·餘大로, 《日本書紀》 권14 雄略紀 23년조와 武烈紀 4년조에는 末多王으로 나온다. 《삼국유사》의 餘大는 왕의 姓인 扶餘氏와 왕의 이름인 牟大를 略하여 쓴 것으로 보인다(李丙燾, 《國譯 三國史記》, 1977, 399쪽의 주 2). 한편 《고려사》 권57 志 권10 지리2 金馬郡條에 나오는 末通大王을 末多王=東城王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李丙燾, 〈薯童說話의 新考察〉, 《韓國古代史硏究》에 재수록, 박영사, 1976, 541~542쪽).
[역주:26권25] 곤지(昆支)의 아들이다.
동성왕의 출계에 대해 본 기사에는 문주왕의 동생인 곤지의 아들로, 《三國遺事》 王曆篇에는 삼근왕의 堂弟로, 《日本書紀》 권14 雄略紀 23년조에는 곤지의 다섯 아들 중 둘째 아들로 나온다. '堂弟'나 곤지의 '5子중 제2자'는 모두 곤지의 아들이라는 데는 동일하다. 한편 《南齊書》 권58 열전 백제전에는 동성왕인 牟大를 牟都의 孫이라 하였고, 《梁書》 권54 열전 백제전에는 牟都의 아들이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牟都를 문주왕으로 보는 견해를 따른다면(본서 권26 주석 1 참조) 牟大(東城王)을 牟都(文周王)의 孫이라고 한 《남제서》의 기록은 취신하기 어렵다(李道學, 〈漢城末 熊津時代의 百濟王系의 檢討〉, 《韓國史硏究》 45, 한국사연구회, 1984, 11~14쪽).
[역주:26권26] 말갈(靺鞨)
만주지역에 거주하였던 종족 명칭. 이 말갈은 先秦시대에는 肅愼으로, 漢代에는 邑婁로, 北魏代에는 勿吉로 불리다가 唐代에 와서 靺鞨로 불리게 되었다. 시대적으로 보아 본 기사에 보이는 말갈은 唐代의 말갈이라고 할 수가 없다. 종래의 연구에서는 본서 백제본기 초기기록에 보이는 말갈은 僞靺鞨로서 함경도 지역에 거주하던 東歲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왔다(李丙燾, 《國譯 三國史記》, 1977, 357쪽 주 1; 兪元載, 〈三國史記 僞靺鞨考〉 《史學硏究》 29, 1979 참조). 그러나 5세기 후반인 본 기사에 보이는 말갈을 과연 東濊로 간주해야 할 것인지는 재고를 요한다.
[역주:26권27] 한산성(漢山城)
漢城이라고도 한다. 백제가 한성에 도읍을 하고 있을 때의 한산성은 南漢山城을 가리킨다. 그런데 공주로 수도를 옮긴 이후에는 雅山灣에서 盈德을 잇는 지역의 북쪽은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기 때문에 본 기사의 한산성을 남한산성에 비정할 수가 없다. 본 기사의 한산성은 옛 한성의 민호를 옮겨 살게 한 곳으로 보고, 웅진 천도 이후 옮겨진 한성의 위치를 慰禮城이 있었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는 충남 천안시 稷山(《新增東國輿地勝覽》 권16 稷山縣 建置浩 革條)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이기백, 〈웅진시대 백제의 귀족세력〉, 《백제연구》, 지식산업사, 1982, 38~39쪽).
[역주:26권28] 남제(南齊)
중국 南北朝 시대의 南朝의 하나. 蕭道成이 479년에 南宋 順帝로부터 禪位를 받아 세웠다. 南京에 도읍하였고 7대 23년만에 梁나라 武帝에게 망하였다.
[역주:26권29] 소도성(蕭道成)
중국 남북조시대의 南齊의 太祖 高皇帝. 字는 紹伯. 중국 江蘇省 武進사람. 479년에 南宋의 順帝로부터 禪位를 받아 남제를 세웠다. 재위기간은 479~482년이다.
[역주:26권30]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중국 남북조시대의 將軍職의 하나. 《宋書》 권39 志29 백관 상에는 『漢西京制 大將軍 驃騎將軍位次丞相』이라 하고 있는데 관품은 第2品이었다(《송서》 권40 지30 백관 하의 관품표 참조). 고구려 장수왕이 南齊로부터 표기대장군의 책봉을 받은 사실은 본서 권18 고구려본기 장수왕 68년(480: 동성왕 2년)조에 실려 있다. 이에 의하면 동성왕은 고구려 장수왕이 표기대장군의 작호를 받은 4년 후에 그 소식을 들은 셈이 된다.
[역주:26권31] 사약사(沙若思)
백제 동성왕대 인물. 大姓人族의 하나인 沙氏 출신 인물. 동성왕대에 內法좌평이 되었다. 남제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으나 고구려군의 방해로 되돌아 왔다. 沙氏는 扶餘지방을 기반으로 한 세력으로서 웅진천도 이후 두각을 나타내었고, 사비천도를 계기로 백제 대성팔족의 선두를 차지하게 되었다(盧重國, 《百濟政治史硏究》, 1988, 166쪽).
[역주:26권32] 사신을 신라에 보내 예방하였다.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3 신라본기 炤知마립간 7년(485) 5월조에 실려있다.
[역주:26권33] 백가(苩加)
백제 동성왕대의 인물. 동성왕 8년(486)에 위사좌평으로 발탁되었다. 苩氏출신이다. 苩氏는 大姓8族의 하나인데 '苩'이 웅진의 '能'을 표시하는 '狛' 혹은 웅진을 흐르는 錦江의 별명인 白江의 '白'과 관계가 있으므로 웅진지역을 기반으로 한 세력이라 할 수 있다(李基白, 〈熊津時代 百濟의 貴族勢力〉, 《百濟硏究》,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1982, 41~43쪽 참조). 이 苩氏는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 후 신진세력으로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역주:26권34] 우두성(牛頭城)
현재의 위치는 미상이다. 이 牛頭城은 온조왕 18년조에도 보이는데 온조왕 18년조의 우두성은 春川으로 비정되고 있다. 그러나 웅진천도후 백제가 춘천지역에 성을 쌓았다고 하는 것은 성립될 수 없다. 따라서 웅진천도 이후 우두성의 위치는 미상이다. 한편 김정호의 《大東地志》 권5 韓山 城池條에는 『乾止山古城(卽牛頭城 周三千六十一尺 泉七 池一 古有倉) 百濟 武王 三十三年 改築 馬山城』이라 하여 한산의 건지산고성에 비정하고 있다.
[역주:26권35] 위(魏)나라
중국 남북조시대의 北朝의 첫 나라. 존속기간은 386~534년. 鮮卑族 拓拔珪(道武帝)가 386년에 현재의 중국 山西省 大同에서 세웠다. 처음에는 盛樂에 도읍하였다가 493년에 洛陽으로 천도하였다. 손자 太武帝는 五胡十六國으로 분립한 화북을 통일하여 남조 宋과 대립하였다. 534년에 東魏와 西魏로 나뉘어지면서 멸망하였다.
[역주:26권36] 위(魏)나라가 … 우리에게 패하였다.
본 기사는 《資治通鑑》 권136 齊紀2 世祖武皇帝 上之下 永明 6년(488)조 末尾에 의거한 것이다. 《南齊書》 권58 열전 백제전에는 『是歲 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 入其界 牟大遣將沙法名 贊首流 解禮昆 木干那率衆 襲擊虜軍 大破之…去年庚午 獫狁弗焌 擧兵深逼 臣遺沙法名等領軍逆討…』이라 하여 동일한 내용이 보인다. 그러나 唐나라 許嵩이 756년경에 撰述한 《建康實錄》 永明 2년조에는 『魏虜征之 大破百濟王牟都』라 하여 魏虜가 백제를 대파하였다는 기사가 나온다. 《남제서》 권58 백제전의 庚午年 기사는 永明 8년(490: 동성왕 12년)이 되어 《자치통감》의 연대와 2년의 차이가 있다. 이 기사의 성격에 대해서는 북위가 백제의 “不修職貢”을 이유로 하여 海路로 군사를 보내어 백제를 공격하다가 실패한 것으로 보는 견해(李丙燾, 《國譯 三國史記》, 1977, 399쪽 주 5), 遊牧民族인 北魏의 수군이 바다를 건너 한반도내의 백제를 공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에서 이 기사는 《宋書》 권97 열전 백제전에 『其後高驪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濟所治 謂之晉平郡晉平縣』이라 한 기사에 백제가 遼西지역으로 진출하여 晉平郡 晉平縣을 두었다고 한 것과 더불어 백제가 華北(遼西)지방으로 진출한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는 견해(金庠基, 〈百濟의 遼西經略에 대하여〉, 《白山學報》 3, 1967; 方善柱, 〈百濟軍의 華北進出과 그 背景〉, 《白山學報》 11집, 1971) 등이 있다. 이와는 달리 《남제서》 백제전에 보이는 魏虜를 獫狁(匈奴)=魏虜가 아니라 匈梨로서 바로 고구려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兪元載, 《中國正史 百濟傳 硏究》, 학연문화사, 1995, 263~289쪽).
[역주:26권37] 남당(南堂)
본래는 원시집회소로서의 기능을 가졌으나 뒤에 중앙집권적 국가체제가 갖추어지면서 정사를 논의 ·집행하는 政廳으로 되었다. 그러나 후에 이 남당은 會議機關과 實務執行部署와의 분리가 이루어지면서 점차 의례적인 것으로 성격이 변하게 되었다(李丙燾, 〈古代南堂考〉, 《韓國古代史硏究》에 재수록, 1976, 623~642쪽). 남당에 대해서는 본서 권2 주석 82 참조.
[역주:26권38] 나이 15세
이 기사는 삼국시대에 築城 등을 위해 국가에서 勞動力을 징발할 때 대체적으로 15세 이상인 자를 동원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한편 15세 이상을 동원하는 것은 노동력을 동원할 때의 연령기준이고 병역동원 때에는 20세가 기준이었다는 견해도 있다(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조선전사》 5 중세편 발해 및 후기신라사, 1979, 228쪽).
[역주:26권39] 사현성(沙現城)
현재의 충남 公州市 正安面 廣亭里山城에 비정된다(井上秀雄, 〈朝鮮城郭一覽〉, 《조선학보》 104, 조선학회, 1982, 150쪽). 광정리 산성은 차령을 넘어 공주로 진입하는 통로이기 때문에 수도 방어의 요충지라 할 수 있다(金英心, 〈百濟 地方統治體制 硏究-5~7세기를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7, 204쪽).
[역주:26권40] 이산성(耳山城)
본서 권37 잡지 지리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나온다. 현재의 위치는 미상이다. 이를 충북 槐山郡 道安面의 尼聖山城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閔德植, 〈高句麗 道西縣城考〉, 《史學硏究》 36, 사학연구회, 1983 참조). 한편 耳山城을 현재의 경북 고령군 고령읍의 主山城에 비정하는 견해(井上秀雄 譯註, 《三國史記》 2, 1983, 373쪽)도 있으나 성립되지 않는다.
[역주:26권41] 사비(泗沘)
지금의 충남 扶餘郡이다. 《삼국유사》 권2 紀異篇 남부여 ·전백제조에는 泗沘로 표기되었다. 사비는 성왕이 16년(538)에 도읍을 이곳으로 옮김으로써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수도가 되었다. 동성왕이 이곳에 자주 전렵을 간 것은 새로운 수도의 후보지를 물색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생각된다.
[역주:26권42] 연돌(燕突)
백제 동성왕대의 重臣. 백제 대성팔족의 하나인 燕氏출신. 이 燕氏는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 후 신진세력의 하나로서 중앙에 두각을 나타내었다. 동성왕 12년에 달솔로 임명된 그는 동성왕 19년에 兵官좌평이 되어 군사권을 장악하였다.
[역주:26권43] 이찬(伊湌)
신라 17관등 중의 제2관등. 그런데 동일한 내용을 전하는 본서 권3 신라본기 炤知마립간 15년조에는 伊伐湌으로 되어 있어 본 기사와 차이가 난다. 伊湌에 대해서는 본서 권38 주석12 참조.
[역주:26권44] 비지(比智)
신라 소지마립간 시기의 귀족. 그의 딸이 백제왕에게 시집간 것에서 미루어 볼 때 김씨로서 진골출신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외의 구체적인 행적은 알 수 없다.
[역주:26권45] 신라왕은 … 비지(比智)의 딸을 시집보냈다.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3 신라본기 炤知마립간 15년(493)조에 실려 있다. 양국의 결혼은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의 남하 압력에 공동으로 대항하기 위해 毗有王 이래의 濟羅동맹관계를 한층 강화하기 위한 목적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婚姻同盟의 사실을 로맨틱하게 꾸며낸 것이 삼국유사에 보이는 서동설화라고 하는 견해도 있으나(李丙燾, 〈薯童說話에 대한 新考察〉, 《韓國古代史硏究》에 재수록, 박영사, 1976, 535~542쪽), 薯童說話에 보이는 백제와 신라왕실간의 혼인은 백제 무왕과 신라 진평왕의 3녀와의 결혼이어서 본 기사에 보이는 혼인과는 구별하여 보아야 할 것이다(盧重國, 《百濟政治史硏究》, 일조각, 1988, 203~207쪽).
[역주:26권46] 살수(薩水)
현재의 충북 槐山郡 靑川面에 비정된다(李丙燾, 《國譯 三國史記》, 박영사, 1977, 400쪽). 본서 권34 잡지 지리1 신라 尙州 三年山郡 淸川縣조의 『淸川縣 本産買縣 景德王改名 今因之』에 나오는 '薩買'의 ‘買’는 '水'같은 의미이다. 그러므로 薩水는 바로 薩買라고 할 수 있다.
[역주:26권47] 견아성(犬牙城)
본서 권37 잡지 지리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나온다. 살수와의 관계에서 미루어 볼 때 현재의 충북 괴산 부근으로 추정된다. 이를 경북 聞慶 서쪽에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이병도, 앞의 책, 400쪽).
[역주:26권48] 고구려와 신라가 …. 포위를 풀어 주었다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3 신라본기 炤知麻立干 16년조와 같은 책 권19 고구려본기 文咨明王 3년조에 나온다. 동성왕이 이처럼 고구려의 공격을 받은 신라를 구원해 준 것은 15년에 신라와 혼인동맹을 맺은 후 양국 사이의 돈독한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역주:26권49] 치양성(雉壤城)
현재의 위치는 미상이다. 이 치양성은 근초고왕 24년(369)조에 보이는데 이때의 치양성은 황해도 白川으로 비정되고 있다(본서 권24 주석 104 참조). 그러나 이 시기에는 황해도 지역은 이미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기 때문에 본 기사에서 보이는 雉壤城을 배천으로 비정할 수 없다. 따라서 이 치양성도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 후 한성시대의 지명을 移置한데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되나 구체적인 위치는 알 수 없다.
[역주:26권50] 덕지(德智)
신라 소지왕대의 장군. 백제의 요청에 따라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고구려 군대를 물리쳤다. 그리고 자비마립간 6년(463)에는 歃良城(경남 梁山)에 침입해온 왜군을 물리쳤다. 덕지에 대해서는 본서 권3 주석 72 참조.
[역주:26권51] 고구려 군사가 물러나 돌아갔다.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3 신라본기 炤知麻立干 17년조와 같은 책 권19 고구려본기 문자명왕 4년조에 보인다.
[역주:26권52] 달솔 연돌(燕突)을 병관 좌평으로 삼았다.
연돌은 연씨 출신으로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 동성왕대에 두각을 나타낸 신진 귀족의 하나이다. 解仇의 반란을 평정하여 實權을 장악한 진로가 죽은 후 신진세력의 하나인 燕氏출신의 연돌이 병관좌평이 된 것은 동성왕의 정치운영이 漢城에서 남하해온 舊貴族보다는 錦江유역을 기반으로 한 신진 귀족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을 반영해 주는 것이다(盧重國, 《百濟政治史硏究》, 일조각, 1988, 154~156쪽).
[역주:26권53] 사정성(沙井城)
본서 권37 잡지 지리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나온다. 현재의 대전광역시 중구 沙井洞으로 비정되고 있다(成周鐸, 〈大田地域 古代城址硏究〉, 《百藩硏究》 5, 1974, 116쪽).
[역주:26권54] 무진주(武珍州)
현재의 광주광역시에 비정된다. 무진주는 본서 권36 잡지 지리3 武州條에 『武州本百濟地 神文王六年 爲武珍州 景德王改爲武州 今光州』라 한 것에서 보듯이 신라 신문왕대의 명칭이고, 武州는 경덕왕대의 명칭이다. 따라서 백제 당시의 지명은 본서 권36 잡지 지리4에 『武珍州(一云奴只)』라 한 기사에 나오는 奴只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웅진도읍기의 백제의 지방통치조직은 檐魯制여서 州制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무진주는 통일기 신라의 명칭이 이 시기에로 소급·부회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盧重國, 〈漢城 時代 百濟의 檐魯制 실시와 編制기준〉, 《啓明史學》 2, 계명사학회, 1991).
[역주:26권55] 왕은 … 무진주(武珍州)에 이르렀다.
동성왕이 무진주에 이르른 것을 근거로 하여 이때에 와서 전라도 지역이 백제의 영역이 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李道學, 〈漢城후기의 百濟王權과 支配體制의 정비〉, 《百濟論叢》 2, 1990, 305쪽). 그러나 본 기사는 동성왕이 탐라를 정벌하기 위해 무진주에 간 것을 보여주는 것이므로 무진주는 동성왕 20년 이전에 백제의 영역이 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무진주 지역이 백제의 영역으로 편입된 시기는 근초고왕이 현재의 전남지역에 남아 있던 馬韓殘餘세력을 정벌한 369년 경으로 보는 것(이병도, 〈近肖古王 拓境考〉, 《韓國古代史硏究》에 재수록, 박영사, 1976)이 타당할 것이다.
[역주:26권56] 한산(漢山) 사람으로 … 2천 명이었다.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19 고구려본기 文咨明王 8년조에 보인다.
[역주:26권57] 임류각(臨流閣)
동성왕이 궁궐 서쪽에 세운 閣. 현재의 충남 公州市 公山城內의 동쪽 최고 지대인 光復樓 서쪽 구릉 아래에 있는 광장 북쪽의 약간 두드러진 곳에서 주춧돌과 '流'와 비슷한 글자가 새겨진 기와 조각이 발견되어 이 곳이 臨流閣址로 추정되고 있다.(임류각지에 대해서는 金永培, 〈公州 百濟王宮 및 臨流閣址 小考〉, 《考古美術》 6-3 ·6-4, 1965 및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公山城》, 1982 참조)
[역주:26권58] 좋은 약은 입에 쓰나 … 품행에는 이롭다.
이 말은 《孔子家語》 六本篇과 《說苑》 正覺篇의 『孔子曰 良藥苦於口而利於病 忠言逆於耳而利於行 湯武以諤諤而昌 桀紂以唯唯而亡』이라 한 기사에 나온다. 그리고 《史記》 권55 留侯世家 제25에는 『良曰… 且忠言逆耳利於行 毒藥苦口利於病』으로 나온다.
[역주:26권59] 감히 간쟁할 수 있는 북[敢諫之鼓]
중국의 堯임금이 朝廷에 북을 달아서 임금에게 간하려고 하는 자로 하여금 이를 쳐서 통하게 하였다는 古事에서 나왔다. 朝鼓라고도 한다. 敢諫의 북과 뒤에 나오는 誹謗의 나무에 대해 《大戴禮》 保傳 48에 『有誹謗之木 有敢諫之鼓 鼓史誦詩 工誦正諫 士傳民語 習與智長 故切而不壤 化與心成 故中道若生 是殷周所以長有道也』로 나온다. 그리고(《淮南子》 主術訓에 『堯置敢諫之鼓 舜立誹謗之木』이라 하였고, 《後漢書》 권54 楊震列傳에 『帝發怒 遂收考詔獄 結以罔上不道 震復上疏救之曰 臣聞堯舜之世 敢鼓謗木 立之於朝』라 하였다.
[역주:26권60] 비방하는 나무[誹謗之木]
중국의 舜임금이 橋梁 위에 나무를 세워 정치의 過失을 쓰게 하여 반성하였다고 하는 故事에서 나왔다. 앞의 주석 59 참조
[역주:26권61] 모대왕(牟大王)
동성왕의 生時의 이름으로 왕명을 붙인 것이다. 모대왕처럼 생시의 이름으로 왕을 부른 예로는 근래 부여 陵山里 寺址에서 발견된 花崗石製舍利嵌에 새겨진 銘文에 나오는 昌王(死後 威德王으로 諡號됨)을 들 수 있다. 동성왕의 이름에 대해서는 본서 권26 주석 24 참조.
[역주:26권62] 장자(莊子)
중국 戰國時代 楚나라 사상가인 莊子가 지은 책. 장자는 唐나라 玄宗이 天寶 년간에 南華眞人으로 追號하였으며, 老子와 함께 道家의 祖로 칭해졌다. 생몰년은 서기전 365~290년이다. 그는 10萬言으로 이루어진 《莊子》를 저술하였는데 이 책은 一名 《南華眞經》이라고도 한다. 《장자》의 卷數에 대해 《漢書》 권30 藝文志 제10에는 52篇으로, 《隋書》 권34 志제29 經籍3 子에는 20권, 16권 30권 등으로 나온다. 현행의 《장자》는 內篇 7편, 外篇 15편, 雜篇 21편으로 모두 33편으로 되어 있다.
[역주:26권63] 허물을 보고 … 사납다고 한다.
본 기사는 《莊子》 雜篇 漁父 제31에 『人有八疵 事有四患…所謂四患者 好經大事 變更易常 以掛功名 謂之叨 事知擅事 侵人自用 謂之貪 見過不更 聞諫愈甚 謂之狼 人同於己則可 不同於己 雖善不善 謂之矜 此四患也』에 나온다.
[역주:26권64] 23년
동성왕의 재위기간. 그러나 《삼국유사》 王曆篇에는 『己未立 理二十六年』으로 나와 3년의 시차가 있다.
[역주:26권65] 탄현(炭峴)
沉峴으로도 나온다. 현재의 大田광역시 東區와 충북 沃川郡 郡北面의 경계가 되는 食藏山 馬道嶺에 비정된다(李丙燾, 앞의 책, 1977, 401쪽). 이와는 달리 전북 完州郡 雲洲面 三巨里의 炭峴으로 보는 견해(洪思俊, 〈炭峴考〉, 《역사학보》 35·36합집, 1967; 全榮來, 〈炭峴에 관한 硏究〉, 《全北遺蹟調査報告》 13집), 충남 扶餘郡 石城面 正覺里 숯고개로 보는 견해(金正浩, 《大東地志》 권5 扶餘 山水條), 충남 錦山郡 珍山面 校村里 숯고개로 보는 견해(成周鐸, 〈百濟 炭峴 小考-金庾信將軍의 百濟 攻擊路를 중심으로-〉, 《百濟論叢》 2, 1990) 등이 있다.
[역주:26권66] 가림성(加林城)
현재의 충남 扶餘郡 林川面의 聖興山城을 말한다(李丙燾, 앞의 책, 1977, 401쪽). 김정호의 《대동지지》 권5 林川 城池條에 『聖興山古城(古加林城 周二千七百五尺 井三 舊有倉)』이라 한 기사 참조. 이 가림성은 백제 멸망후 復興軍의 중심지의 하나가 되었으며(본서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20년조), 나당 전쟁때(671 ~ 672)의 격전지였다(본서 권7 신라본기 文武王 11~12년조 참조).
[역주:26권67] 마포촌(馬浦村)
본서 권제37 지리 제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나온다. 현재의 충남 舒川郡 韓山面의 옛 이름이 馬山·馬邑인 것에 미루어 볼 때 馬浦村을 서천군 한산면에 비정하는 것이 타당할 듯 하다(李丙燾, 앞의 책, 1977, 401쪽 주4 참조).
[역주:26권68] [백가는] 왕을 칼로 찔렀다.
《일본서기》 권16 武烈紀 4년조에는 『是歲 百濟末多王無道 暴虐百姓 國人遂除而立島王 是爲武寧王』이라 하여 포학한 동성왕을 國人이 제거한 것으로 나온다. 동성왕을 제거한 國人의 실체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를 본 기사와 연계시켜 보면 苩加를 중심으로 한 동성왕 반대세력이 바로 국인의 핵심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역주:26권69] 시호(諡號)를 동성왕(東城王)
諡號는 先王의 공덕이나 卿相儒賢들이 죽은 뒤에 그들의 行蹟을 칭송하여 임금이 追贈한 이름을 말한다. 이 기사는 백제에서 諡號制의 실시를 보여주는 최초의 기사이다. 그러나 武寧王陵에서 출토된 誌石에는 무령왕의 生前의 이름인 斯麻王으로 표기되어 있다. 따라서 ‘東城’이라는 시호는 사후 일정한 기간이 지난 이후에 붙혀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역주:26권70] 책부원귀(冊府元龜)
중국 北宋의 王欽若·楊億 등이 眞宗의 명을 받들어 1005년에 편집에 착수하여 1013년에 완성한 책. 1000권으로 이루어졌다. 古代로부터 五代에 이르기까지의 역대 정치에 관한 사적을 帝王部에서 外臣部에 이르기까지 31개 부문으로 分類·列記하였다. 《文苑英華》·《太平御覽》 등과 더불어 북송조에 편찬한 대표적인 類書(叢書)이다. 뒤이어 나오는 기사는 《冊府元龜》 권963 外臣 部 封冊에 실려 있다.
[역주:26권71] 남제(南齊)
중국 남북조시대의 남조의 나라. 蕭道成이 宋나라를 멸망시키고 세웠다. 도읍은 建康(현재의 중국 南京). 7대 24년만에 양나라에게 망하였다. 존속기간은 479 ~ 502년이다.
[역주:26권72] 건원(建元)
중국 南齊 高帝의 연호. 479 ~ 482년까지이다.
[역주:26권73] 모도(牟都)
문주왕을 말한다. 본서 권26 주석 1 참조. 《송서》 권97 열전 백제전에 나오는 ‘行輔國將軍 餘都’의 ‘餘都’는 '扶餘牟都'를 축약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牟都를 牟大의 異寫로 보아 동성왕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李丙燾, 《國譯 三國史記》, 1977, 403쪽 주 2).
[역주:26권74]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
중국 남제의 武散階의 하나. 晉나라 때는 鎭東대장군으로서 開府한 자는 位가 公과 같았으며 品秩과 俸賜도 公과 같았다. 齊나라에 와서도 鎭東대장군은 位가 公과 같았으며, 司馬·長史 등의 官屬도 公과 같았다(《十通分類總簒》 권61 大將軍 職官類13 諸將 大將軍條 참조). 魏나라의 관품으로는 진동대장군은 2품이었다.
[역주:26권75] 영명(永明)
중국 南齊의 武帝의 연호. 483 ~ 493년까지이다.
[역주:26권76] 알자복야(謁者僕射)
南齊에서 관직 拜授 및 百官의 班次를 관장한 직. 謁者는 秦나라가 설치하였고, 漢이 이어 받았는데 賓贊을 관장하였다. 후한 때에 謁者僕射를 謁者臺士로 고치고 銅印과 靑綬를 주관하게 하였다. 魏나라는 僕射를 두어 大拜授 및 百官 班次를 장악하게 하였고, 晉나라 武帝는 복야를 생략하고 알자가 蘭臺를 겸하게 하였다. 宋나라 武帝는 다시 알자를 설치하여 小拜授 및 百官報章을 관장하게 하였는데 남제는 宋의 제도를 이어받았다(《十通分類總纂》 권52 職官類4 中書省 通事舍人條 참조).
[역주:26권77] 손부(孫副)
중국 南齊 高帝때의 인물. 謁者僕射의 직에 있었으며 백제에 사신으로 왔다.
[역주:26권78] 돌아가신 조부 모도
牟都의 실체에 대해서는 文周王설, 東城王설 등이 있으나 문주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李基東, 〈中國史書에 보이는 百濟王 牟都에 대하여〉, 《歷史學報》 62, 1974, 30~33쪽). 문주왕은 개로왕의 동생으로 동성왕의 아버지인 昆支와는 형제간이다. 그렇다고 하면 본 기사에서 牟都(문주왕)를 동성왕의 祖父라고 한 것은 잘못이라 할 것이다.
[역주:26권79] 삼한고기(三韓古記)
古記類의 일종. 이것이 특정한 書目인지 아닌지는 분명히 하기 어렵다. 三韓이란 7세기에 들어서면서 馬韓·辰韓·弁韓이라는 역사적 실체와는 관계없이 삼국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였으며, 이것이 고려시대에도 지속되어 '我邦'을 뜻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盧泰敦, 〈三韓에 대한 認識의 變遷〉, 《韓國史硏究》 38, 한국사연구회, 1982 참조). 따라서 三韓古記는 '三韓의 古記'로서 특정한 書目이 아니라 중국에 대한 우리나라의 고기라는 의미로 파악하여야 할 것이다(李康來, 《三國史記 典據論》, 민족사, 1996, 115~123쪽). 이를 書名으로 본 견해도 있다(井上秀雄, 앞의 책, 373쪽).
[역주:26권80] 개로왕(蓋鹵王)의 손자요 … 곤지(昆支)의 아들
본서 권26 주석 11에서 보듯이 곤지는 개로왕의 동생이다. 따라서 곤지의 아들인 牟大(동성왕)는 개로왕의 손자가 아니라 조카로 고쳐 보아야 할 것이다.
[역주:26권81] 제서(齊書)
《南齊書》를 말한다. 《남제서》는 梁나라 蕭子顯이 쓴 중국 남북조시대의 南齊의 歷史書이다. 本紀 8권, 志 11권, 列傳 40권 등 도합 59권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백제전의 앞부분은 떨어져나가 불완전하다. 이 백제전에는 백제의 동성왕이 신하들을 王·侯·太守로 私署한 후 남제에 사신을 보내 정식으로 冊封해 달라고 하는 國書가 실려 있어 웅진도읍기의 백제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武寧王 諱斯 
或云 
牟大王之第二子也 身長八尺 眉目如畫 仁慈寬厚 民心歸附 牟大在位二十三年薨 卽位 春正月 佐平苩加據加林城叛 王帥兵馬 至牛頭城 命 率解明討之 苩加出降 王斬之 投於白江【論曰】 
春秋曰 『人臣無將 將而必誅』 若苩加之元惡大憝 則天地所不容 不卽罪之 至是自知難免 謀叛而後誅之 晩也冬十一月 遣達率優永 帥兵五千 襲高句麗水谷城

二年 春 民饑且疫 冬十一月 遣兵侵高句麗邊 

三年 秋九月 靺鞨燒馬首柵 進攻高木城 王遣兵五千 擊退之 冬無氷

六年 春 大疫 三月至五月不雨 川澤竭 民饑 發倉賑救 秋七月 靺鞨來侵 破高木城 殺虜六百餘人

七年 夏五月 立二柵於高木城南 又築長嶺城 以備靺鞨 冬十月 高句麗將高老 與靺鞨謀欲攻漢城 進屯於橫岳下 王出師 戰退之

十年 春正月 下令完固隄防 驅內外游食者歸農

十二年 夏四月 遣使入梁朝貢 秋九月 高句麗襲取加弗城 移兵破圓山城 殺掠甚  王帥勇騎三千 戰於葦川之北 麗人見王軍  易之不設陣 王出奇急擊 大破之

十六年 春三月戊辰朔 日有食之

二十一年 夏五月 大水 秋八月 蝗害穀 民饑 亡入新羅者九百戶 冬十一月 遣使入梁朝貢 先是爲高句麗所破  弱累年 至是上表 稱 “累破高句麗 始與通好 而更爲强國” 十二月 高祖詔冊王曰 『行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百濟王餘隆 守藩海外 遠修貢職 迺誠款到 朕有嘉焉 宜率舊章 授玆榮命 可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寧東大將軍』

二十二年 秋九月 王獵于狐山之原 冬十月 地震

二十三年 春二月 王幸漢城 命佐平因 ·達率沙烏等 徵漢北州郡民年十五歲已上 築雙峴城 三月 至自漢城 夏五    諡曰武寧


[교주:26권15] 摩
百濟武寧王陵誌石 「麻」.
[교주:26권16] 隆
三國史節要 「餘隆」.
[교주:26권17] 扞
原本 「扦」. 三國史節要에 의거 수정.
[교주:26권18] 曰】
原本 「日」. 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수정.
[교주:26권19] 境
原本 判讀不能. 鑄字本에 의거 수정.
[교주:26권20] 衆
「殺掠甚衆」, 本書 卷19 文咨王 21年條 「虜獲男女二千餘口」.
[교주:26권21] 少
原本 「小」. 三國史節要에 의거 수정. 鑄字本 「小」. 朝·權·浩 「小」.
[교주:26권22] 衰
原本 誤刻. 鑄字本에 의거 수정.
[교주:26권23] 友
三國史節要 「支」.
[교주:26권24] 月
武寧王陵誌石 「七日 壬辰」 추가.
[교주:26권25] 薨
武寧王陵誌石 「崩」.



[역주:26권82] 무령왕(武寧王)
백제 제24대 왕. 재위기간은 501~523년. 《三國遺事》 王曆篇에는 虎寧王으로 나오는 데 이는 《三國遺事》의 찬자가 고려 定宗의 이름인 武를 避諱해서 虎로 고쳐 쓴 것이다. 武寧王陵에서 출토된 誌石에 의하면 무령왕은 개로왕 8년(462년)에 태어났고,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할 당시에는 14세였으며 즉위할 당시의 나이는 40세였고, 돌아갈 때의 나이는 62세였다. 즉위 초 苩加의 난을 평정한 후 왕권강화를 도모하였고, 중국의 梁나라에 사신을 보내 백제가 다시 强國이 되었음을 천명하기도 하였다. 그의 무덤은 1971년에 발굴되었는데 塼으로 축조한 터널형 구조였다. 내부에서는 誌石·金銅冠 裝飾·木棺·石獸·五銖錢을 비롯하여 토기 등 많은 부장품이 출토되었다. 이 무령왕릉은 도굴되지 않은 처녀분으로 발굴되었을 뿐만 아니라 墓誌石이 출토되어 백제사 연구에 획기를 이루게 되었다. 무령왕릉에 대해서는 문화재관리국, 《武寧王陵》, 1983 참조.
[역주:26권83] 사마(斯摩)
무령왕의 이름. 무령왕의 이름에 대한 표기는 본 기사에는 斯摩 및 隆이라 하여 두 가지를 전해주고 있다. 무령왕릉 출토 誌石과 《三國遺事》 王曆篇에는 斯摩로, 《日本書紀》 권16 武烈紀 4년에 인용된 《百濟新撰》에는 斯麻王 또는 嶋王(シマ王)으로, 중국측 사서인 《梁書》 권54 열전 백제전과 《南史》 권79 열전 백제전에는 餘隆으로 나온다. 餘隆에 대해 《三國遺事》 王曆篇에는 『南史云 名扶餘隆 誤矣 隆乃寶臧(義慈의 誤記: 譯註者)之太子 詳見唐史』라 하여 扶餘隆을 무령왕의 이름이라 한 《南史》의 기록을 잘못된 것으로 보고 있다. 반면에 隆이라는 이름을 백제가 중국과의 외교문서에 사용하기 위한 중국식 이름일 것으로 보는 해석도 있다(李丙燾, 《國譯 三國史記》, 403쪽). 한편 《日本書紀》 권16 武烈紀 4년조에 인용된 《百濟新撰》에는 개로왕의 동생인 琨支가 임신한 부인을 데리고 일본으로 가다가 섬에서 낳게 되었기 때문에 이름을 嶋王(シマ王)으로 하였다는 출생담이 나온다. 嶋의 일본어 시마(シマ)는 斯麻와 음이 비슷하다. 한편 隅田八幡神社 所藏 人物畵像鏡에 새겨진 명문에 나오는 '斯摩念長'을 武寧王(斯摩王)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蘇鎭轍, 《金石文으로 본 百濟 武寧王의 世界》, 원광대 출판부, 1994).
[역주:26권84] 모대왕(牟大王)의 둘째 아들
무령왕의 계보에 대해 본 기사에는 동성왕의 둘째 아들로 나온다. 그러나 《日本書紀》 권16 武烈紀 4년조에는 『是歲 百濟末多王無道 暴虐百姓 國人遂除而立嶋王 是爲武寧王(百濟新撰云 末多王無道 暴虐百姓 國人共除 武寧立 諱斯摩王 是琨支王子之子 則末多王異母兄也…今案 嶋王是蓋鹵王之子也 末多王是琨支王之子也 此曰異母兄 未詳也』라 하여 무령왕은 琨支의 아들로서 末多王(동성왕)의 異母兄이라고 하는 설을 전해주고 있다. 그런데 武寧王陵誌石에 의하면 무령왕이 즉위할 당시의 나이는 40세여서 개로왕 8년(462)에 출생한 셈이 되어 동성왕의 아들로 보기는 어렵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할 때 무령왕은 곤지의 아들로서 동성왕과는 異母兄弟라고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李道學, 〈漢城末 熊津時代 百濟王 系의 檢討〉, 《韓國史硏究》, 54, 1984 참조).
[역주:26권85] 백강(白江)
현재의 錦江을 말한다.
[역주:26권86] 남의 신하가 된 자는 … 반드시 죽여야 한다.
이 귀절은 《春秋公羊傳》 昭公 원년에 나온다. 그러나 본 기사의 人臣은 《춘추공양전》에는 『君親無將 將而必誅焉』이라 君親으로 되어 있다. 본서의 撰者가 이렇게 君親을 人臣으로 變改한 배경에 대해 苩加의 일이 '君親'의 문제가 아니라 ‘人臣’의 문제이기 때문이든가, 아니면 高麗의 현재적 상황 즉 肅宗이 자기의 조카인 獻宗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올랐다든가, 仁宗의 嗣位를 전후하여 睿宗의 아우들 중 帶方公 俌·大原公 侾 등이 화를 입었다든가 하는 ‘君親’ 문제가 미묘하게 얽혀 있던 상황 때문에 '君親'으로 直書하지 못하고 ‘人臣’으로 표현하였을 것으로 추론하는 견해가 있다(李康來, 앞의 책, 330~331쪽).
[역주:26권87] 수곡성(水谷城)
한성 시기의 수곡성은 현재의 황해도 新溪지역에 비정된다. 그런데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 고구려의 영토가 牙山灣에서 盈德郡에 이르는 지역에까지 이르렀다는 사실에 의할 때 이 시기의 백제가 황해도 신계까지 진격하였다는 것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따라서 이 기사에 보이는 수곡성은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 후 한성시대의 지명을 移置시킨 것 중의 하나가 아닐까 한다. 그러나 지명을 이치한 이후의 수곡성의 위치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이와는 달리 백제가 웅진천도 후 일시적으로 이 지역까지 진출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梁起錫, 〈百濟 專制王權 成立過程硏究〉, 단국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43쪽).
[역주:26권88] 달솔(達率) 우영(優永) … 수곡성(水谷城)을 습격하였다.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19 고구려본기 文客明王 12년(503)조에 보인다. 그러나 이 사건이 일어난 무령왕의 즉위년은 501년이어서 고구려본기 기사와는 2년의 差가 있다.
[역주:26권89] 군사를 보내 고구려의 변경을 쳤다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19 고구려본기 문자명왕 11년(502)조에 보인다.
[역주:26권90] 말갈(靺鞨)
靺鞨이라는 명칭은 중국에서는 唐代에 와서야 나온다. 따라서 본 기사에 나오는 말갈은 唐代의 말갈이 아니라 함경도 지역에 근거를 둔 濊族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왔다. 본권 주석 26 참조.
[역주:26권91] 마수책(馬首柵)
백제가 한성에 도읍을 하고 있을 당시에도 보이는 지명으로서 고구려의 馬忽郡(현재의 경기도 抱川郡 郡內面 지역)으로 비정된다. 그러나 웅진천도 후의 마수책의 위치는 알 수가 없다. 이 지명도 아마 백제가 남천후 한성시대의 지명을 그대로 移置하여 사용한 결과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한다.
[역주:26권92] 고목성(高木城)
마수성과 함께 백제가 한성에 도읍을 하고 있을 당시에도 보이는 지명이다. 한성도읍기의 고목성은 현재의 경기도 連川郡 連川邑이다. 그러나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의 고목성의 위치는 알 수가 없다.
[역주:26권93] 장령성(長嶺城)
고목성과 함께 말갈에 대비하여 쌓았다고 하는 것에서 미루어 볼 때 백제가 한성에 도읍할 당시의 장령성은 고목성(현재의 경기도 連川郡 連川邑)의 남쪽 방면의 어느 지점으로 비정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 장령성의 위치는 어디인지 알 수 없다.
[역주:26권94] 한성(漢城)
백제가 한강유역에 도읍을 하고 있을 당시의 수도의 명칭. 그러나 수도 한성은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의 군대에 의해 패배하고 전사함으로써 고구려의 영역이 되었다. 그러므로 백제가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의 한성의 위치가 어디인지는 분명히 하기 어렵다. 이를 稷山의 慰禮城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李基白, 〈熊津時代 百濟의 貴族勢力〉, 《百濟硏究》, 지식산업사, 1978 참조).
[역주:26권95] 횡악(橫岳)
한성시대의 횡악은 서울의 삼각산에 비정된다(본서 권23 주석 88 참조). 그러나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의 횡악의 위치는 미상이다.
[역주:26권96] 왕은 … 이를 물리쳤다.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19 고구려본기 文咨明王 16년(507)조에 실려있다.
[역주:26권97] 놀고 먹는 자[遊食者]
농토를 떠나 일하지 않고 생활하는 사람을 말한다. 《筍子》 成相篇에 『臣下職 莫游食(注 游食 謂不勤於事 素殖游手也)』라 한 기사 참조.
[역주:26권98] 제방을 튼튼하게 … 농사를 짓게 하였다.
무령왕이 제방을 튼튼하게 하고 游食者들을 농토에 돌아가게 한 것은 금강유역권을 개발하여 생산력을 높이고 또 농업노동력을 확보하려는 정책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유식자의 歸農조치는 《日本書紀》 권17 繼體紀 3년조의 『遣使于百濟 括出在任那日本縣邑百濟百姓 浮逃絶貫三四歲者 幷遷百濟附貫』이라 한 流民推刷策과 궤도를 같이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역주:26권99] 양(梁)나라
중국 남북조 시대의 남조의 하나. 502~557년까지 존속하였다. 蕭衍이 세웠으며, 4대 56년만에 陳나라에게 망하였다.
[역주:26권100] 원산성(圓山城)
명칭에서 볼 때 圓山鄕이 연결된다. 원산향은 경북 醴泉郡 龍宮面에 비정되고 있다(본서 권23 주석 79 참조). 그러나 이 시기의 예천 지역은 백제의 영토가 아니라 신라의 영토였다. 따라서 이 기사에 보이는 원산성의 위치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역주:26권101] 약탈한 것이 매우 많았다.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19 고구려 본기 文咨明王 21년(512)조에 보이는데 『虜獲男女一千餘口』가 첨가되어 있다.
[역주:26권102] 고구려를 깨뜨려 … 다시 강한 나라가 되었다.
이 기사는 《梁書》 권54 열전 백제전의 내용을 轉寫한 것이다.
[역주:26권103] 고조(高祖)
梁나라 高祖 즉 武帝를 말한다. 재위기간은 502 ~549년이다.
[역주:26권104]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
중국 남북조시대 梁나라의 武散階의 하나. 송의 관품표에 의하면 정3품의 장군직이다.
[역주:26권105] 영동대장군(寧東大將軍)
중국 남북조시대 梁나라의 무산계의 하나. 梁나라의 武散階는 齊나라의 것을 仍襲하였는데, 宋나라의 官品表에 의하면 寧東大將軍의 관품은 정3품이다. 무령왕이 이때 梁나라 高祖로부터 받은 寧東大將軍이라는 작호는 무령왕릉 誌石에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중국으로부터 받은 작호가 백제의 국내에서 사용된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본서 권26 주석 74 참조
[역주:26권106] 사지절(使持節) … 영동대장군(寧東大將軍)이 가(可)하다.
이 기사는 《梁書》 권54 열전 백제전의 기사를 그대로 轉載한 것이다.
[역주:26권107] 23년
무령왕의 재위기간. 그러나 《삼국유사》 王曆篇에는 『辛巳立 理二十二年』으로 나온다. 무령왕이 사망한 시기에 대해 《梁書》 권54 백제전에는 普通 5년(524)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무령왕릉 지석과 《日本書紀》 권17 계체기 17년조에는 523년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어 본서의 사망연대인 523년과 일치한다. 따라서 《梁書》의 기록은 잘못이라 할 것이다.
[역주:26권108] 쌍현성(雙峴城)
본서 권37 雜志 지리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나온다. 그러나 현재의 위치는 미상이다.
[역주:26권109] 시호를 무령(武寧)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지석에는 생시의 이름인 斯麻王으로 나오고 있어 무령왕은 死後 3년이 되기까지는 諡號를 받지 못한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무령이란 시호는 3年喪을 치루고 일정한 기간이 지난 이후에 올려진 것으로 생각된다.





聖王 諱明襛 武寧王之子也 智識英邁 能斷事 武寧薨 繼位 國人稱爲聖王 秋八月 高句麗兵至浿水 王命左將志忠 帥步騎一萬 出戰退之


二年 梁高祖詔 冊王爲持節都督百濟諸軍事綏東將軍百濟王

三年 春二月 與新羅交聘

四年 冬十月 修葺熊津城 立沙井柵

七年 冬十月 高句麗王興安 躬帥兵馬來侵 拔北鄙穴城 命佐平燕謨 領步騎三萬 拒戰於五谷之原 不克 死者二千餘人

十年 秋七月甲辰 星隕如雨

十二年 春三月 遣使入梁朝貢 夏四月丁卯 熒惑犯南斗

十六年 春 移都於泗 ※
一名所夫 ※
國號南扶餘

十八年 秋九月 王命將軍燕會 攻高句麗牛山城 不克

十九年 王遣使入梁朝貢 兼表請毛詩博士·涅槃等經義幷工匠·畵師等 從之

二十五 春正月己亥朔 日有食之

二十六年 春正月 高句麗王平成 與濊謀 攻漢北獨山城 王遣使請救於新羅 羅王命將軍朱 ※ 領甲卒三千發之 朱珍日夜兼程 至獨山城下 與麗兵一戰 大破之

二十七年 春正月庚申 白虹貫日 冬十月 王 ※知梁京師有寇賊 遣使朝貢 使人旣至 見城闕荒毁 竝號泣於端門外 行路見者 莫不灑淚 侯景聞之大怒 執囚之 及景平 方得還國

二十八年 春 ※月 王遣將軍達已 領兵一萬 攻取高句麗道薩城 三月 高句麗兵圍金峴城

三十一年 秋七月 新羅取東北鄙 置新州 冬十月 王女歸于新羅

三十二年 秋七月 王欲襲新羅 親帥步騎五十 夜至狗川 新羅伏兵發與戰 爲亂兵所害 ※ 諡曰聖


[교주:26권26] 沘
東國史略 「泚」.
[교주:26권27] 里
三國史節要 「或云古省津」 추가.
[교주:26권28] 珍
本書 卷4 眞興王 9年條 「玲」.
[교주:26권29] 不
原本 誤刻. 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보충.
[교주:26권30] 正
原本 「五」. 뒤의 3月 記事와 本書 卷4 眞興王 11年條에 의거 수정.
[교주:26권31] 薨
「王欲襲…害薨」, 本書 卷4 眞興王 15年條 「裨將三年山郡高干都刀 急擊殺百濟王」.


[역주:26권110] 성왕(聖王)
백제 제26대 왕. 무령왕의 아들. 재위기간은 523 ~554년. 성왕의 즉위년도에 대해 본 기사에는 무령왕이 죽은 해(523)에 즉위한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일본서기》 권17 繼體紀 17년(523)조에는 『夏五月 百濟國王武寧薨』으로 나오고 18년(524)조에는 『春丁月 百濟太子明卽位』라 하여 524년에 즉위한 것으로 되어 1년의 차이가 난다. 한편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第二十六 聖王 名明穠虎寧王子 癸巳立』이라 하여 계사년에 즉위한 것으로 나온다. 계사년은 513년으로 武寧王 13년이어서 취신할 수 없다. 이 계사년은 523년인 癸卯年으로 고쳐야 할 것이다. 성왕은 16년(538)에 사비로 천도하고 6좌평 ·16관등제 등 중앙관제를 정비하고 또 5方·郡-城(縣)의 구조를 갖는 지방통치조직을 정비하여 왕권을 확립하였다. 그리고 謙益이 인도로부터 가지고온 律部를 번역하여 백제 戒律을 확립함으로써 불교 교단을 정비하였다. 이렇게 중흥을 이룩한 성왕은 29년(551)에 신라군·가야군과 함께 고구려를 쳐서 한강 하류의 6군을 회복하였으나 31년(553)에 신라 진흥왕에게 한강 하류지역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에 성왕은 32년(554)에 신라를 정토하기 위한 군대를 일으켰으나 관산성 전투에서 패배하여 전사하고 말았다. (성왕대의 정치에 대해서는 梁起錫, 〈百濟 聖王代의 政治改革과 그 性格〉, 《한국고대사연구》 4, 1991 참조)
[역주:26권111] 명농(明襛)
성왕의 이름. 성왕의 이름 표기는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흥왕 15년(554)조에는 明襛으로, 《삼국유사》 王曆篇에는 明穠으로, 《梁書》 권54 百濟傳과 《日本書紀》 권17 繼體紀 18년조에는 明으로 나온다. 그리고 《일본서기》 권19 欽明紀 15년조에는 明王으로, 16년조에는 聖明王 또는 聖王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중 聖王 또는 明王은 聖明王을 略稱한 것이라 할 것이다.
[역주:26권112] 지혜와 식견이 빼어나고 일을 잘 결단하였다.
성왕의 이러한 지식과 능력에 대해서는 《日本書紀》 권19 흠명기 16년조에는 『聖王妙達天道地理 名流四表八方』이라 하고 있다.
[역주:26권113] 패수(浿水)
浿河라고도 한다. 한성시대의 浿水는 현재의 예성강을 말한다(본서 권23 주석 30 참조). 그러나 웅진천도 이후 이 패수의 위치는 알 수 없다.
[역주:26권114] 고구려 군사가 패수(浿水)에 이르렀다.
본서 권19 고구려본기 안장왕 5년(523)조에는 『遣兵侵百濟』로 나온다.
[역주:26권115] 수동장군(綏東將軍)
중국 남북조시대 梁나라 武散階의 하나. 그러나 《宋書》 권39 백관 상에는 綏東將軍이 보이지 않는다.
[역주:26권116] 사정책(沙井柵)
이 사정책은 東城王 16년(494)에 축조된 沙井城과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沙井柵(沙井城)은 현재의 대전광역시 중구 沙井洞에 비정된다(成周鐸, 〈新羅三年山郡硏究〉, 《百濟硏究》 7, 1976, 152쪽).
[역주:26권117] 오곡(五谷)
현재의 위치는 미상이다. 이를 황해도 瑞興이 아닐까 추론하는 견해도 있다(李丙燾, 《國譯 三國史記》, 1977, 406쪽). 이를 서흥이라 할 경우 이 지역은 이 시기에 이미 고구려의 영역이기 때문에 백제가 과연 서흥까지 진격하였는지는 의문이다.
[역주:26권118] 오곡(五谷)의 벌판에서 … 죽은 자가 2천여 명이었다.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19 고구려본기 安臧王 11년(529)조에 나온다.
[역주:26권119] 사신을 양(梁)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梁書》 권54 열전 백제전에는 梁나라 武帝 中大通 6년(534)에 백제가 사신을 파견한 것으로 나온다.
[역주:26권120] 형혹(熒惑)
火星의 다른 이름. 熒惑星이라고도 한다. 형혹이 나타나면 질병과 기근 또는 병화가 있다고 한다. 《史記》 권27 天官書에는 『察剛氣以處熒感 曰南方火 主夏…禮失 罰出熒惑 熒惑失行是也 出卽有兵 入卽兵散….熒惑爲勃亂 殘賊 疾 喪 饑 兵』이라 하고 있다.
[역주:26권121] 남두(南斗)
별이름. 남방에 있고 모양이 말(斗)과 비슷하여 南斗라 하였다. 천자의 壽命과 宰相 爵綠의 位를 주관한다고 한다. 《史記》 권27 天官書에 『南斗爲廟(正義 南斗六星 在南也)』라 한 기사 참조
[역주:26권122] 사비(泗沘)
백제의 마지막 수도. 所夫里라고도 하였다. 현재 의 충남 부여군 扶餘邑이다. 《三國遺事》 王曆篇 聖王條와 같은 책 권2 紀異篇 南夫餘·前百濟條에는 『按三國史記百濟聖王二十六年戊午春 移都於泗泚 國號南夫餘 注曰其地名所夫里 泗泚今之古省津也 所夫里者扶餘之別號也…後至聖王 移都於泗泚 今夫餘郡』이라 하여 泗泚로, 본조에 인용된 《古典記》에는 『至二十六世聖王 移都所夫里 國號南夫餘』로 나온다. 사비천도는 백제 왕실이 中興을 이룩하기 위해 성왕이 계획적으로 단행한 것이다. 고구려에 의해 한성을 함락당하고 개로왕이 피살된 후 황급히 천도한 웅진천도와는 다르다. 사비 천도를 계기로 성왕은 6佐平·16官等制·22部制 등 중앙통치조직을 정비하였고, 수도를 5部-5巷制로 편성하였으며, 지방통치조직으로서 方·郡-城(縣)制를 실시하였다.
[역주:26권123] 남부여(南扶餘)
성왕이 사비로 천도하면서 개칭한 국호. 백제 왕실은 蓋鹵王이 『臣與高句麗 源出扶餘』라고 한 기사(《魏書》 권100 열전 百濟傳)와 《周書》 권49 열전 百濟傳에 『其先蓋馬韓之屬國 夫餘之別種』이라 한 기사에서 보듯이 扶餘族의 일파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성왕이 사비로 천도하면서 국호를 남부여로 개칭한 것은 扶餘族으로서의 전통을 강조하여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목적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南扶餘라는 국호는 천도 후 일시적으로 사용되다가 곧 백제로 복구된 것 같다.
[역주:26권124] 왕은 장군 연회(燕會) … 이기지 못하였다.
본서 권19 고구려본기 安原王 10년(540)조에 『秋九月 百濟圍牛山城 王遺精騎五千擊走之』로 나온다.
[역주:26권125] 모시박사(毛詩博士)
《毛詩》에 밝은 사람이다. 《毛詩》는 중국 最古의 詩集으로서 《詩經》(詩傳)을 말한다. 이 《詩經》은 중국 漢나라 때의 毛亨·毛長이 箋하였기 때문에 《毛詩》라고도 한다. 毛詩 博士는 《詩經》에 정통한 학자를 말한다. 백제에 초빙된 모시박사의 이름은 알 수 없다. 이 시기에 백제는 梁나라로부터 모시박사를 초빙한 것 외에 陳나라로부터 講禮博士 陸詡를 초빙하였고(《晉書》 권33 儒林 鄭灼傳附陸詡傳), 武寧王은 五經博士 段楊爾와 高安茂를 倭에 파견하였다(《日本書紀》 권17 繼體紀 7年條·10年條). 이러한 사실들은 백제의 유학에 대한 이해가 상당한 정도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역주:26권126] 열반(涅槃)
《涅槃經》을 말한다. 《涅槃經》에는 小乘의 《열반경》과 大乘의 《열반경》이 있다. 소승의 《열반경》은 佛陀가 만년에 王舍城을 출발하여 최후를 맞게 된 쿠시나가라에 이르기까지의 旅程과 그 事跡·說法의 모양과 入滅 후의 火葬·遺骨의 分配 등을 기술하고 있다. 대승의 《열반경》은 석가모니불이 入滅하기 전 1주야에 說한 내용으로 되어 있으며, 그 사상은 佛身常住·悉有佛性·闡提成佛로 요약된다. 후에 이 열반경은 중국과 한국 등지에서 佛性思想의 보편화에 큰 역할을 하였다.
[역주:26권127] 경의(經義)
불교 經典의 註釋書를 말한다.
[역주:26권128] 공장(工匠)
도구를 사용하여 물건을 만드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 匠色 또는 匠人이라고도 한다. 백제가 梁으로부터 工匠을 초빙하여 기술을 배운 것은 공주지역에서 출토된 『梁官瓦爲師』라는 명문이 있는 塼에 의해서도 입증된다.
[역주:26권129] 화사(畵師)
畵工을 말한다. 성왕은 倭에 佛像과 佛經을 전해주고(《일본서기》 권19 흠명기 13년조에 『冬十月 百濟聖明王 遣西部姬氏達率怒唎斯致契等 獻釋迦佛金銅像一軀 幡盖若干 經論若干卷 別表讚流通禮拜功德云…』이라 한 기사 참조), 또 謙益이 인도에서 가지고 온 律部를 번역하여 百濟戒律을 확립하는 등(李能和, 《朝鮮佛敎通史》 상편, 중앙대 한국학연구소, 1977, 성왕 31년조의 彌勒佛光寺事蹟 참조) 불교의 융성과 교단의 정비에 노력하였다. 이러한 사실에서 미루어 볼 때 성왕이 工匠과 畫師 등을 梁으로부터 초빙한 것은 사찰의 건립 및 불상의 장엄화를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역주:26권130] 왕이 사신을 … [양나라에서] 이를 허락하였다.
동일한 내용이 《梁書》 권54 열전 百濟傳에 『累遣使獻方物 兼請涅盤等經義毛詩博土幷工匠畵師等 勅幷給之』라 나와 있다.
[역주:26권131] 예(濊)
현재의 함경도 지역에 위치하였던 東濊를 말한다. 이 때의 濊는 고구려의 영역으로 편입된 후이기 때문에 독립적인 정치체가 아니라 종족으로서의 예족이라 할 것이다.
[역주:26권132] 독산성(獨山城)
본서 권37 잡지 지리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나온다. 獨山은 孤山과 같은 뜻의 지명으로서 현재의 충남 禮山郡 禮山邑에 비정된다(본서 권37 잡지 地理4의 都督府一十三縣條의 支尋州의 屬縣중에 『馬津縣本孤山』이라 한 기사와 金正浩, 《大東地志》 권5 禮山條에도 『本百濟孤山 --云烏山 唐改爲馬津』이라 한 기사 및 《新增東國輿地勝覽》 권20 禮山縣條에 『禮山本百濟烏山 新羅改爲任城』이라 한 기사 참조). 한편 《日本書紀》 권19 欽明紀 9年條에 『馬津城之役(正月辛丑 高麗卒衆圍馬津城)』이라 하여 고구려 군대가 마진성을 포위한 사건을 전해주고 있다. 흠명 9년은 백제 성왕 26년(548)에 해당되는데 이 마진성이 獨山城=禮山에 비정된다고 하면 '馬津城役'은 성왕 26년에 고구려가 독산성을 공격한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역주:26권133] 주진(朱珍)
신라 진흥왕대의 장군. 고구려가 백제의 독산성 을 공격해 오자 신라 진흥왕은 그를 파견하여 백제를 돕도록 하였다.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흥왕 9년(548)조에는 朱玲으로 나온다.
[역주:26권134] 주진이 … 크게 격파하였다.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흥왕 9년조에 나온다.
[역주:26권135] 양(梁)나라의 서울[京師]
현재의 중국 南京의 동남쪽인 江寧이다.
[역주:26권136] 반란[寇賊]
양나라 侯景이 548년에 반란을 일으킨 것을 말한다.
[역주:26권137] 단문(端門)
宮殿의 정문을 말한다. 《漢書》 권40 張陳王周傳에 『滕公曰 就舍少府 乃奉天子法駕 迎皇帝代邸 報曰 宮謹除 皇帝入未央宮 有謁者十人 持戟衛端門(師古曰 端門 殿之正門)…』이라 한 기사 참조.
[역주:26권138] 후경(侯景)
중국 남북조시대의 사람. 字는 萬景. 중국 朔方人(雁門人이라는 설도 있다)이다. 힘이 세고 騎射를 잘하였다. 東魏에 벼슬하다가 梁에 歸附하자 梁 武帝는 그를 河南王으로 삼았다. 뒤에 반란을 일으켜 建康(현재의 중국 南京 東南쪽의 江寧)을 포위하고 臺城을 함락시키니 武帝는 울분하여 죽었다. 侯景은 簡文帝를 옹립하였다가 곧 폐하고 자립하여 漢帝라 칭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陳覇先·王僧辨에게 討平되고 말았다. 《梁書》 권56 侯景傳 참조.
[역주:26권139] 양나라의 서울[京師]에 반란[寇城]이 … 바야흐로 還國할 수 있었다.
동일한 내용이 《梁書》 권54 열전 百濟傳에 실려 있다.
[역주:26권140] 도살성(道薩城)
현재의 충북 槐山郡 도안면에 비정된다(閔德植, 〈高句麗道西縣考〉, 《史學硏究》 36, 사학연구회, 1983). 그러나 이를 현재의 충남 天安지방에 비정하는 견해(이병도, 《國譯 三國史記》, 406쪽)도 있다.
[역주:26권141] 금현성(金峴城)
본서 권37 잡지 지리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나온다. 본서 권35 잡지 지리2 신라 漢州 黑壤郡의 고구려때 지명인 今勿奴郡과 같은 곳으로 추정되는데 현재의 충북 鎭川郡 鎭川邑에 비정된다(閔德植, 앞의 논문 참조). 그러나 이를 충남 全義 지방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이병도, 앞의 책, 406쪽).
[역주:26권142] 고구려 군사가 금현성(金峴城)을 포위하였다.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19 고구려본기 陽原王 6년(550)조에는 『春正月 百濟來侵陷道薩城 三月 攻百濟金峴城 新羅人乘間 取二城』으로, 같은 책 권4 신라본기 진흥왕 11년(550)조에는 『春正月 百濟拔高句麗道薩城 三月 高句麗陷百濟金峴城 王乘兩國兵疲 命伊湌異斯夫 出兵擊之 取二城 增築 留甲士一千戍之』로 나온다. 이 기사들에는 백제와 고구려가 싸우는 틈을 타서 신라가 漁父之利로 두 성을 취한 것이 첨가되어 있다.
[역주:26권143] 신주(新州)
신라 진흥왕이 553년에 백제의 한강유역을 점령 한 후 새로이 설치한 州이다.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4 신라본기 眞興王 14년(553)조에는 『秋七月 取百濟東北鄙 置新州 以阿湌武力爲軍主』로 나온다. 이때 설치된 新州는 → 南川州(현재의 경기도 이천시) → 北漢山州(현재의 서울시) → 한산주(현재의 경기도 河南市)로 置廢를 거듭하였다. 신라 진흥왕의 신주 설치 과정은 다음과 같다. 백제의 성왕은 재위 29년(551)에 고구려에게 빼앗긴 한강유역을 회복하기 위해 신라군·가야군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이 싸움에서 백제는 漢城과 平壤을 비롯하여 6郡을 회복하였고(《일본서기》 권19 흠명기 12년조에 『是歲 百濟聖明王親率衆及二國兵「二國謂新羅任那也」 往伐高麗 獲漢城之地 又進軍討平壤 凡六郡之地 遂復故地』라 한 기사 참조), 신라는 竹嶺 以外 高峴 以內의 10郡을 차지하였다(본서 권44 열전 居柒夫傳에 『十二年辛未 王命居柒夫及仇珍大角湌 比台角湌 耽知迊湌 非西迊湌 奴夫波珍湌 西力夫波珍湌 比次夫大阿湌 未珍夫阿湌等 八將軍 與百濟侵高句麗 百濟人先攻破平壤 居柒夫等乘勝 取竹嶺以外高峴以內十郡』이라 한 기사 참조). 그러나 553년에 진흥왕은 군사를 돌이켜 백제가 점령한 지역마저도 차지하여 여기에 新州를 두고 阿湌 武力을 軍主로 삼아 다스리도록 하였다.
[역주:26권144] 왕의 딸이 신라에 시집갔다.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흥왕 14년(553)조에 『娶百濟王女爲小妃』로 나온다. 성왕이 한 강유역을 신라에게 빼앗긴 직후에 왕녀를 진흥왕의 小妃로 보낸 것 은 신라군으로부터 한강 하류지역을 반환받기 위한 苦肉策에서 나온 조처로 생각된다(金秉柱, 〈羅濟同盟에 관한 연구〉, 《한국사연구》 46, 1984, 37~39쪽). 그러나 신라와 仇讐 관계에 놓이게 된 이때에 양 왕실간에 혼인이 맺어졌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408쪽 주2).
[역주:26권145] 32년
성왕의 재위기간. 그러나 《삼국유사》 王曆篇에는 『癸巳立 理三十一年』으로 나온다.
[역주:26권146] 구천(狗川)
본서 권37 잡지 지리 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나온다. 현재의 충남 沃川부근에 비정된다(이병도, 앞의 책, 408쪽). 옥천은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흥왕 15년조에는 '管山城'으로, 권43 열전 김유신전 하에는 '古利山'으로, 《일본서기》 권19 흠명기 15년조에는 '函山'으로 나온다. 한편 본서 권23 백제본기 온조왕 11년조에 狗川柵이 나오는데 이 狗川柵은 황해도 남부방면으로 추정되어 본 기사의 狗川과는 다른 곳이다.
[역주:26권147] 왕은 …. 난병(亂兵)에게 해침을 당하여 죽었다.
이 사건은 성왕이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유역을 되찾기 위해 군대를 일으켜 신라를 치다가 管山城 전투에서 패하여 왕이 전사한 것을 말한다. 이 싸움에서 성왕은 신라의 裨將인 三年山郡 高干 都刀에 의해 참수되었으며, 佐平 4명을 비롯하여 3만에 가까운 사졸이 전사하였다(管山城 전투에 대해서는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흥왕 15년조 참조). 한편 《日本書紀》에 의하면 성왕은 신라정벌을 불가하다고 말리는 耆老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왕자 餘昌과 더불어 군대를 일으켜 신라의 管山城을 공격하였다. 이 공격에서 여창은 久陀牟羅塞를 쌓고 최전방에서 군을 지휘하였다. 성왕은 왕자 여창의 수고를 위로하기 위해 가다가 이 기밀을 탐지한 신라가 대군을 일으켜 길을 차단하고 공격하여, 성왕은 붙잡혀 죽었고 여창도 간신히 죽음을 모면하였다. 성왕을 붙잡아 죽인 자는 佐知村飼馬奴苦都였으며, 신라는 성왕의 머리를 北廳 계단밑에 묻고 나머지 유골은 백제에 보냈다고 되어 있다(《日本書紀》 권19 欽明紀 15년조). 이 관산성 전투는 백제의 전사자가 약 3만명에 이르고, 신라도 거국적으로 군대를 동원하였다고 한 것에서 보듯이 백제와 신라 사이에 벌어진 일대 會戰이었으며, 이 싸움에서의 승패는 이후 백제와 신라의 역사 전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盧重國, 《百濟政治史硏究》, 1988, 176~17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