列傳第四 乙支文德·居柒夫·居道·異斯夫·金仁問
列傳第四 乙支文德·居柒夫·居道·異斯夫·金仁問 良圖 附 ※ ·金陽 金昕附 ※ ·黑齒常之·張保皐 鄭年附 ※ ·斯多含 乙 ※支文德 未詳其世系 資沈鷙有智數 兼解屬文 隋開皇 ※中 煬帝下詔征高句麗 於是左翊衛大將軍宇文述 出扶餘道 右翊衛大將軍于仲文 出樂浪道 與九軍至鴨淥水 文德受王命 詣其營詐降 實欲觀其虛實 述與仲文 先奉密旨 若遇王及文德來 則執之 仲文等 將留之 尙書右丞劉士龍爲慰撫使 固止之遂聽 文德歸深 ※悔之 遣人紿文德曰 “更欲有議 可復來” 文德不顧 遂濟鴨淥而歸 述與仲文 旣失文德 內不自安 述以粮盡欲還 仲文謂 ※“以精銳追文德 可以有功” 述止之 仲文怒曰 “將軍仗十萬兵 不能破小賊 何顔以見帝” 述等不得已而從之 度 ※鴨淥水追之 文德見隋軍士有饑色 欲疲之 每戰輒北 ※ 述等一日之中 七戰皆捷 旣恃驟勝 又逼群議 遂進東 濟薩水 去平壤城三十里 因山爲營 文德遺仲文詩曰 “神策究天文 妙算 ※窮地理 戰勝功旣高 知足願云止” 仲文答書諭之 文德又 ※遣使詐降 請於述曰 “若旋師者 當奉王 朝行在所” 述見士卒疲弊 不可復戰 又平壤城險固 難以猝拔 遂因其詐而還 爲方陣而行 文德出軍 四面鈔擊之 述等且戰且行 至薩水 軍半濟 文德進軍 擊其後軍 殺右屯衛將軍辛世雄 於是 諸軍俱潰 不可禁止 九軍將士奔還 一日一夜 至鴨淥水 行四百五十里 初 度 ※遼 九軍三十萬五千人 及還至遼東城 唯二千七百人 ※ 【論曰】 煬帝遼東之役 出師之盛 前古未之有也 高句麗一偏方小國 而能拒之 不唯自保而已 滅其軍幾盡者 文德一人之力也 傳曰 『不有君子 其能國乎』 信哉 [교주:44권1] 良圖 附 「良圖 附」, 原本 缺刻. 本書 目錄에 의거 보충. [교주:44권2] 附 「金昕 附」, 原本 缺刻. 本書 目錄에 의거 보충. [교주:44권3] 附 「鄭年 附」, 原本에는 없으나 本書 目錄에 의거 추가. [교주:44권4] 乙 革命記 「尉」. 資治通鑑 卷181 考異 참조. [교주:44권5] 皇 「開皇」, 뒤에 나오는 고구려정벌의 조칙은 大業 8년(嬰陽王 23年, 612)이므로 本書 高句麗本紀에 의거하여 수정되어야 한다. 李丙燾本 참조. [교주:44권6] 深 隋書 卷60 于仲文傳 「尋」. 資治通鑑 卷181 「旣而」. [교주:44권7] 謂 本書 卷20 嬰陽王 23年條 「議」. [교주:44권8] 度 「渡」와 相通. [교주:44권9] 北 「每戰輒北」, 隋書 卷60 于仲文傳 「每戰破賊」. 資治通鑑 卷181 「每戰輒走」. 隋書 卷61 于文述傳 「每鬪便北」. [교주:44권10] 算 原本 「筭」. 文意로 보아 수정. 三國史節要·鑄字本 「筭」. 朝 「筭」. [교주:44권11] 又 本書 卷20 嬰陽王 23年條, 隋書 卷61 于文述傳, 資治通鑑 「復」. [교주:44권12] 度 「渡」와 相通. [교주:44권13] 人 「二千七百人」, 隋書 卷4 煬帝本紀 下 「二千餘騎」. 北史 卷12 隋 本紀 「千餘騎」. 北史 卷79 于文述傳 「二千七百人」. [역주:44권1] 을지문덕(乙支文德) 고구려의 명장. 평양 출신이다(《新增東國輿地勝覽》). 洪良浩의 《海東名將傳》에서는 평양 石多山(조선조 甑山縣 所在)출신이라 하였다. 《西友》 제1호(1906)의 人物考에서는 평양군 석다산 사람으로 기술하고 있다. 《革命記》에는 ‘乙’자를 ‘尉’로 표기하였으나 《北史》와 《隋書》에 ‘乙’자로 기록되어 《資治通鑑》에서는 ‘乙’자로 쓴다고 하였다. 그의 이름이 尉遲文德이라고 표현하던 것을 통하여 원래 흥안령 동쪽 흑룡강 지류에 살고 있던 拓拔氏의 일파로서 고구려에 귀화하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김원룡, 〈을지문덕의 출자에 대한 의론〉,《전해종박사화갑기념사학논총》, 1979 및 〈을지문덕의 出自에 대하여〉, 《東國史學》 15·16합집, 1981 참조). 본서 권20 고구려본기 영양왕 23년조에는 ‘王遣大臣乙支文德’이라 하여 그의 지위가 대신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대신은 당시의 관직 명칭은 아니다. 589년에 전 중국을 통일한 후 隋나라 文帝는 598년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수륙으로 고구려 침략에 나섰다가 패배하자 그 뒤를 이은 煬帝는 607년 고구려 영양왕(590∼618)의 入朝를 요구하였다. 고구려가 이를 완강히 거부하자 영양왕 23년(612)에 수 양제는 大軍을 동원하여 직접 고구려에 쳐들어 왔다. 이때 隋나라에서 동원한 군대는 전투부대만 113만 3천 8백명이고, 식량 등을 나르는 인부는 그 두 배에 달했다. 이같은 대군을 맞아 乙支文德은 후퇴작전을 통하여 적의 30만 5천에 달하는 別動部隊를 平壤城 북쪽 30리 지점까지 유인했다가 갑자기 이를 반격하여 薩水(淸川江)에서 그 主力을 섬멸함에 성공했다. 그리하여 별동부대 30만 명 중에서 목숨을 건지고 돌아간 자는 겨우 2천 7백 명이었다. 당시 遼東城을 공격 중이던 煬帝는 이 敗報를 듣자 기가 꺾여서 곧바로 전군을 철수하여 본국에 돌아갔다. 본 열전은 《隋書》의 권60의 于仲文傳과 권61의 于文述傳의 관계기사와 《資治通鑑》의 글에서 인용하여 쓴 것이다. 그가 쓴 글로는 宇仲文에게 보낸 五言詩가 전하고 있다. [역주:44권2] 자질이 침착하고 … 글을 알고 지을 수 있었다 이 기록은 열전에만 나오는 기록이다(李弘稙, 〈三國史記高句麗人傳의 檢討〉, 《史叢》 4, 1959: 《韓國古代史의 硏究》, 1971 재수록, 244쪽 참조). [역주:44권3] 개황(開皇) 연간 開皇(581∼600)은 隋 文帝代의 연호. 양제의 고구려 침입은 大業(605∼618: 煬帝의 연호)으로 고쳐져야 한다. 이는 본서 찬자가 文帝의 開皇 18년(598, 고구려 영양왕 8년)조의 침입을 착각하여 잘못 기술한 것이다(이홍직, 앞의 논문, 245쪽). 정확한 연대는 대업 8년(612) 영양왕 23년이다. [역주:44권4] 좌익위(左翊衛) 隋代에 처음 설치된 황제의 친위부대의 하나. 이에는 좌익위와 우익위가 있었다. 翊衛는 護衛라는 뜻이다. [역주:44권5] 우문술(宇文述) 수나라의 명장. 周나라에서 아버지의 군공으로 開府에 임명되고 開皇初에 右衛大將軍에 임명되었다가 아들이 공주와 결혼하여 賞賜를 많이 받았다. 양제가 즉위하자 左衛大將軍에 임명되고 許國公에 봉해졌다. 고구려 정벌에 유일하게 아내를 대동하였고 그는 최고 사령관이었다. 이 전쟁에서 대패하여 吏로 전락되었다가 명년에 요동정벌에 복직되어 참여하였다.(《隋書》 권61 열전 26 宇文述傳 참조) [역주:44권6] 부여도(扶餘道) 군대가 거치는 길을 道라 하는데 부여도는 북만주 쪽을 경유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반드시 부여라는 지명의 곳을 거치는 것이 아니라 편의상 붙인 이름일 뿐이다. 수·당나라의 군대가 출정할 때의 부대명칭을 목표지의 과거의 역사적 지명을 붙이는 관례가 있었다. [역주:44권7] 우중문(于仲文) 수나라 장군. 아버지는 周나라 淵國公 寔. 어려서 총명하여 글도 많이 배웠다. 문제 때에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고, 양제가 즉위하자 右翊衛大將軍에 임명되어 문무관의 인선에도 참여하였다. 고구려 침략에 참여하여 대패하자 吏로 전락되었으며 여러 장수들이 모두 책임을 우중문에게 전가시켜 감옥에 갇혔다. 《漢書刊繁》 30권, 《略覽》 30권 등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隋書》 권60 열전25 于仲文傳 참조. [역주:44권8] 낙랑도(樂浪道) 이는 요동 남부 지방으로 행군하는 길을 의미한 듯하다. [역주:44권9] 아홉 개의 군부대[九軍] 본서 권20 고구려본기 영양왕 23년(612)조에 9군의 장군 명칭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수나라 大業 8년(612) 정월 辛巳條에 실제로 전투에 참여한 부대는 좌·우 각 12부대로 총 24軍(부대)이 참여하여 평양에 총 집결하도록 되었다. 7월 壬寅條에 살수에서 패망한 기록을 『九軍이 함몰하였는데 도망쳐 온 자는 2千餘 騎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隋書》 권4 帝紀 제4 煬帝 下 참조. [역주:44권10] 상서우승(尙書右丞) 수나라 尙書都省의 屬官. 左右丞이 있었다. 六部의 尙書 밑에서 일을 좌우승이 분장하여 맡았다.(《隋書》 권27 百官 中 참조) [역주:44권11] 유사룡(劉士龍) 수나라 고구려 정벌시에 慰撫使로 파견된 관리. 을지문덕의 억류를 극구 반대하였다. 고구려본기에도 같은 기록이 나오고 있다. 이는 《隋書》 권60 于仲文傳에 보이고 있다. [역주:44권12] 곧 바로 원문에는 ‘深’(깊이)로 되어 있으나 《隋書》 권60 宇仲文傳에는 ‘尋’(곧 바로)으로 《資治通鑑》 및 본서 권20 고구려본기 영양왕 23년(612)조에는 ‘旣而’(조금 지나서)로 표현되었다. 전후 문장의 논리로 볼 때 ‘곧 바로’가 적절하다고 생각하여 이렇게 번역하였다. [역주:44권13] 식량이 떨어졌으므로 요동지방인 瀘河, 懷遠鎭을 출발할 때에 식량을 100일 분을 지급하였고, 輜重兵에게는 3석 이상을 주었으는데 무거워 땅을 파고 묻었으므로 식량을 버리는 자는 목을 벤다고 엄명하였으나 실효가 없었다. 그 결과 중간에서 이미 식량이 떨어졌다.(본서 권20 고구려본기 영양왕 23년조 참조) [역주:44권14] 천문(天文) 天體의 온갖 현상. [역주:44권15] 지리(地理) 지형의 高低와 廣狹, 험하고 평탄한 것들을 말한다. 《周易》 繫辭 上에 『仰以觀天文 俯以察地理』라는 구절이 있다. [역주:44권16] 족한 줄 알아 그만 두시지[知足願云止] 이 귀절은 《老子》 44章에 『知足不辱 知止不殆』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이 시는 乙支文德의 이른바 五言詩로,《隋書》 권60 于仲文傳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 시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五言古體詩라는 점에서도 漢文學的 의의가 크다. 겉으로는 상대방을 칭송하듯이 꾸미고는 反語的인 의미로 허세를 비꼬았으니, 李奎報는 白雲小說의 서두에다 이 詩를 인용해 놓고서 『句法奇古 無綺麗雕飾之習 豈後世委靡者 所可企及哉』라 하여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며, 許筠은 『惺所覆瓿藁』에서 『吾東僻在海隅 唐以上 文獻邈如 雖乙支文德之詩 彙在史家 不敢信其果出於其手也』라 하여 을지문덕의 自作이란 점을 회의까지 하였고 柳得恭은 二十一都懷古詩에서 ‘薩水에서 벌레마냥 쓸려서 遼海로 몇 조각 깃발만 돌아갔음’을 읊으면서 『乙支文德眞才士 倡五言麗冠大東』이라고 하였다(김도련, 〈漢文學篇〉, 《韓國學基礎資料選集-古代篇-》, 1987, 826쪽 해설 참조). [역주:44권17] 행재소(行在所) 황제나 왕이 행차할 때 머무는 임시 처소. [역주:44권18] 방진(方陳) 사방으로 적을 대항할 수 있도록 다이아몬드형으로 군사를 펼치는 陣法. [역주:44권19] 신세웅(辛世雄) 수나라 장군. 612년 고구려 침입시에 右屯衛 장군으로서 遼東道로 나왔다가 퇴각시에 패배하여 전사하였다. [역주:44권20] 경전(經傳)에 이르기를 여기서의 경전은 《春秋左氏傳》을 지칭한다. 다음의 인용귀절은 《春秋左氏傳》 권9 文公 12년조에 魯의 襄仲이 한 말이다. |
居柒夫
或云荒宗 姓金氏 奈勿王五世孫 祖仍宿角干 父勿力伊湌 居柒夫少 跅弛有遠志 祝髮爲僧 遊觀四方 便欲覘高句麗 入其境 聞法師惠亮開堂說經 遂詣聽講經 一日惠亮問曰 “沙彌從何來” 對曰 “某新羅人也” 其夕法師招來相見 握手密言曰 “吾閱人多矣 見汝容貌 定非常流 其殆有異心乎” 答曰 “某生於偏方 未聞道理 聞師之德譽 來伏下風 願師不拒 以卒發蒙” 師曰 “老僧不敏 亦能識子 此國雖小 不可謂無知人者 恐子見執 故密告之 宜疾其歸” 居柒夫欲還 師又語曰 “相汝鷰頜鷹視 將來必爲將帥 ※ 若以兵行 無貽我害” 居柒夫曰 “若如師言 所不與師同好者 有如皦日” 遂還國返本從仕 職至大阿湌 眞興大王六年乙丑 承朝旨 集諸文士 修撰國史 加官波珍湌 十二年辛未 王命居柒夫及仇珍大角湌·比台角湌·耽知迊湌·非西迊湌 奴夫波珍湌·西力夫波珍湌·比次夫大阿湌·未珍夫阿湌等八將軍 與百濟侵高句麗 百濟人先攻破平壤 居柒夫等 乘勝取竹嶺以外高峴以內十郡 至是惠亮法師 領其徒出路上 居柒夫下馬 以軍禮揖拜 進曰 “昔遊學之日 蒙法師之恩 得保性命 今邂逅相遇 不知何以爲報” 對曰 “今我國政亂 滅亡無日 願致之貴域” 於是居柒夫同載以歸 見之於王 王以爲僧統 始置百座講會及八關之法 眞智王元年丙申 居柒夫爲上大等 以軍國事務自任 至老終於家 享年七十八
나물왕의 5대손. 할아버지는 각간 仍宿. 아버지는 소지왕의 장인인 이찬 勿力. 신라 6부의 啄部 출신. 일찍이 승려가 되어 고구려 강역에 들어가 惠亮法師의 講說을 들었다. 진흥왕 8년(547)에 대아찬으로서 왕명을 받아 國史를 편찬하였고 진흥왕 12년(551) 소백산맥을 넘어 고구려 영토의 10개 군현을 탈취하였다. 이 밖에 한강 유역의 점령, 대가야의 복속 등 활발한 정복전쟁의 주역이 되었다. 진지왕 원년(576) 이찬으로 상대등에 임명되었다.
居道 失其族姓 不知何所人也 仕脫解尼師今爲干 時于尸山國·居柒山國 介居鄰境 頗爲國患 居道爲邊官 潛懷幷呑之志 每年一度 集羣馬於張吐之野 使兵士騎之 馳走以爲戱樂 時人稱爲馬技 ※ 兩國人 習見之 以爲新羅常事 不以爲怪 於是起兵馬 擊其不意 以滅二國
[역주:44권34] 거도(居道)
異斯夫 [교주:44권16] 阿 本書 卷4 智證麻立干 13年條와 卷35 地理志 및 三國史節要 「何」. 北 「阿(何)」. [교주:44권17] 計 原本 「討」. 誠庵本·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수정. [교주:44권18] 師 「獅」와 相通. [교주:44권19] 王 原本·誠庵本 「主」. 三國史節要에 의거 수정. 北·燾 「主(王)」 [교주:44권20] 甲 原本 「申」. 本書 卷4 眞興王 11年條와 誠庵本·三國史節要에 의거 수정. [교주:44권21] 士 本書 卷4 眞興王 11年條에는 「一千」 추가. [역주:44권40] 이사부(異斯夫) 신라 진흥왕대의 장군, 정치가. 나물왕의 4대손. 탁부 출신. 『苔宗』으로 표기되기도 하였는데 이는 訓讀하였을 것이다. 〈丹陽赤城碑〉에는 『伊史夫』, 《三國遺事》에는 『伊宗』, 《日本書紀》에는 『伊叱夫礼』로 표기되어 있다. 智證王 5년(505) 悉直州가 설치되자 그 州의 軍主로 임명되었고, 동왕 13년(512) 伊湌으로서 何瑟羅州 軍主가 되었을 적에 于山國을 정복하였으며, 眞興王 2년(541)에 兵部令이 되어 중앙과 지방의 군사엄무를 담당하였다. 동왕 6년(545)에는 이찬으로서 국사의 편찬을 건의하였고, 동왕 11년(550)에는 고구려와 백제가 서로 싸워 지친 틈을 타서 고구려의 道薩城과 백제의 金峴城을 빼앗아 두 성을 증축하였으며 동왕 23년(562)에 가야가 반란을 일으키자 斯多含과 함께 5만의 기병을 인솔하여 이를 진압하였다. [역주:44권41] 태종(苔宗) 이사부의 다른 표기. 이를 훈독하면 ‘잇부’가 된다. 그러나 이 이름이 실제로 사용되지는 않은 듯하고 후대에 이렇게 기록되었다고 생각된다. [역주:44권42] 성(姓)이 김씨(金氏) 《三國遺事》 권1 紀異篇 智哲路王조에는 異斯夫를 朴伊宗이라 하여 박씨로 하였고 이런 예는 提上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異斯夫는 내물왕의 4대손이므로 김씨임이 분명하다는 설도 있다(이병도, 《國譯 三國史記》, 645쪽). 그러나 이 시기에는 아직 성이 사용되지 않았다. 후에 성이 사용되면서 성을 追記하였기 때문에 이런 혼동이 일어난 것으로 생각한다. [역주:44권43] 지도로왕(智度路王) 智證王 재위시의 칭호. 본서 권4 주석 1, 2 참조. 5세기말 당시 금석문인 〈迎日冷水里新羅碑〉에는 ‘智度路葛文王’으로 나오고 있다. [역주:44권44] 지도로왕 때 … 가야국(加耶國)을 속여 취하였다 가야의 정복기사는 본서 권4 신라본기 지증왕조에는 나오지 않고 있다. 혹 本加耶의 복속을 의미한다면 이는 법흥왕 19년에 해당한다. 그러나 가야정벌 기사는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흥왕 23년(562)에 다루어져 있는데 열전에는 이 기사가 빠져 있다. 이 기사는 본가야의 점령이 아니라 가야연맹 가운데 일부를 점령한 것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다. [역주:44권45] 대보(大寶) 梁 簡文帝代의 연호. 550∼551년 2년간 사용되었다. [역주:44권46] 도살성(道薩城) 현재의 충북 괴산군 도안면. 괴산군의 고명은 道西縣이다(閔德植, 〈高句麗 道西縣城考〉, 《史學硏究》 36, 1983). 본서 권37 주석 364 참조. 天安으로 추정한 견해도 있다(이병도, 《國譯 三國史記》, 645쪽). 도살성의 공격은 백제 성왕 28년 정월의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역주:44권47] 금현성(金峴城) 현재의 충북 진천군 진천읍으로 비정하는 견해(閔德植, 앞의 논문〈고구려도서현성고〉)와 충남 연기군 전의로 비정하는 견해가(이병도, 《國譯 三國史記》, 645쪽) 있다. 이 성의 공격에 대한 기록은 본서 권26 백제본기 백제 성왕 28년(550) 3월 기사에 자세히 나오고 있다. 또한 본서 권19 고구려본기 양원왕 6년(550)조에도 언급되어 있다. [역주:44권48] 두 성 도살성과 금현성을 지칭한다. 그러나 명칭을 알 수 없는 또 다른 고구려의 2성으로 보고 적성비에 있는 赤城과 高頭林城으로 보고 있는 견해도 있다(朱甫暾, 〈丹陽赤城碑의 再檢討〉, 《경북사학》 7, 1984, 40∼41쪽). [역주:44권49] 갑사(甲士) 무장한 군사 즉 精兵.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흥왕 11년(550)년조에는 군사 1천 명으로 기술하고 있다. 金仁問 字仁壽 太 ※宗大王第二子也 幼而就學多讀儒家之書 兼涉莊·老·浮屠之說 又善隸書射御鄕樂 行藝純熟 識量宏弘 時人推許 永徽二年 仁問年二十三歲 受王 ※命 入 ※大唐宿衛 高宗謂 “涉海來朝 忠誠可尙” 特授左領軍衛將軍 四年 詔許歸國覲省 太宗大王授以押督州摠 ※管 於是 築獐山城以設險 太宗錄其功 授食邑三百戶 新羅屢爲百濟所侵 願得唐兵爲援助 以雪羞 ※恥 擬諭宿衛仁問乞師 會高宗以蘇定方爲神丘道大摠管 率師討百濟 帝徵仁問 問道路險易 去就便宜 仁問應對尤詳 帝悅制授神丘道副大摠管 勑赴軍中 遂與定方濟海 到德物島 王 ※命太子 與將軍庾信·眞珠·天存等 以巨艦一百艘載兵迎 延之至熊津口 賊瀕江屯兵 戰破之 乘勝入其都城滅之 定方俘王義慈及太子孝·王子泰等 廻唐 大王嘉尙仁問功業 授波珍湌 又加角干 尋入唐宿衛如前 龍朔元年 高宗召謂曰 “朕旣滅百濟 除爾國患 今高句麗負固 與穢貊同惡 違事大之禮 棄善鄰之義 朕欲遣兵致討 爾歸告國王 出師同伐 以殲垂亡之虜” 仁問便歸國 以致帝命 國王使仁問與庾信等 練兵以待 皇帝命邢國公蘇定方 爲遼東道行軍大摠管 以六軍長驅萬里 迕麗人於浿 ※江 擊破之 遂圍平壤 麗人固守 故不能克 士馬多死傷 糧道不繼 仁問與留鎭劉仁願 率兵兼輸米四千石·租二萬餘斛 赴之 唐人得食 以大雪解圍還 羅人將歸 高句麗謀要擊於半塗 仁問與庾信 詭謀夜遁 麗人翌日 覺而追之 仁問等 廻擊大敗之 斬首一萬餘級 獲人五千餘口而歸 仁問又入唐 以乾封元年 扈駕登封泰山 加授右驍衛大將軍 食邑四百戶 摠章元年戊辰 高宗皇帝遣英國公李勣 帥師伐高句麗 又遣仁問徵兵於我 文武大王與仁問 出兵二十萬 行至北漢山城 王住此 先遣仁問等 領兵會唐兵 擊平壤月餘 執王臧 仁問使王 ※跪於英公前 數其罪 王再拜 英公禮答之 卽以王及男産·男建·男生等還 文武大王 以仁問英略勇功 特異常倫 賜故大琢 ※角干朴紐食邑五百戶 高宗亦聞仁問屢有戰功 制曰 “爪牙良將 文武英材 制爵疏封 尤宜嘉命” 仍加爵秩 食邑二千戶 自後侍衛宮禁 多歷年所 上元元年 文武王納高句麗叛衆 又據百濟故地 唐皇帝大怒 以劉仁軌爲雞林道大摠管 發兵來討 詔削王官爵 時 仁問爲右驍衛員外大將軍臨海郡公 在京師 立以爲王 令歸國以代其兄 仍策爲雞林州大都督開府儀同三司 仁問懇辭不得命 遂上道 會 王遣使入貢且謝罪 皇帝赦之 復王官爵 仁問中路而還 亦復前銜 調露元年 轉鎭軍大將軍行右武威衛大將軍 載初元年 授輔國大將軍上柱國臨海郡開國公左羽林軍將軍 延載元年四月二十九日 寢疾薨於帝都 享年六十六 訃聞上震悼 贈襚加等 命朝散大夫行司禮寺大醫署令陸元景·判官朝散郞直司禮寺某等 押送靈柩 孝昭 ※大王追贈太大角干 命有司 以延載二年十月二十七日 窆于京西原 仁問七入大唐 在朝宿衛 計月日 凡二十二年 時亦有良圖海湌 六入唐 死于西京 失其行事始末 [교주:44권22] 太 原本 「大」. 誠庵本에 의거 수정. [교주:44권23] 王 原本·誠庵本 「主」. 文意로 보아 수정. 鑄字本 「主」. 朝·權·浩 「主」, 北·燾 「主(王)」. [교주:44권24] 入 原本 缺刻. 誠庵本·鑄字本에 의거 보충. [교주:44권25] 摠 原本 「援」. 鑄字本에 의거 수정. 誠庵本 判讀不能. [교주:44권26] 羞 原本·誠庵本 「着」. 鑄字本에 의거 수정. [교주:44권27] 王 原本 「主」. 文意로 보아 수정. 北·燾 「主(王)」. [교주:44권28] 浿 原本 「須」. 誠庵本·鑄字本에 의거 수정. [교주:44권29] 王 原本·誠庵本 「主」. 다음에 곧바로 「王再拜」가 나오므로 이에 의거 수정. 北·燾 「主(王)」. [교주:44권30] 琢 이 글자는 잘못 들어간 글자인 듯하다. 李丙燾本 참조. [교주:44권31] 昭 新羅皇福寺石塔金銅舍利函銘 「照」. [역주:44권50] 김인문(金仁問) 629∼694. 태종 무열왕의 둘째 아들. 문무왕의 아우. 자는 仁壽. 어려서부터 유가서는 물론 장자 노자 불서를 많이 섭렵하였다. 특히 隸書를 잘 썼고,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하였고 향악을 잘 하였다. 그는 651년에 진덕여왕의 명을 받들어 당에 들어가 宿衛한 이래 모두 일곱 차례나 당에 갔다 왔고, 22년 간이나 그곳에 체류하면서 본국 왕의 연락 임무 및 현지의 대당 외교에 종사했다. 그는 태종 무열왕 3년(656) 귀국하여 押督州 軍主을 지내면서 獐山城을 쌓아 그 공로로 식읍 300호를 받았고, 태종 무열왕 7년(660)년에는 당의 副大摠管으로 백제 원정에 종군하였다. 문무왕 2년(662)년에는 평양부근에 와 있던 소정방에게 김유신, 良圖와 함께 식량 2만여 섬을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하였고, 문무왕 4년(664)에는 각간에 승진하였다. 문무왕 8년(668)년에는 大幢摠管의 한 사람으로 신라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 원정에 종군하여 唐軍과 합세 평양성을 함락시키는 등의 軍功을 세웠고 당군을 따라 중국에 다시 갔다. 고구려 원정의 공로로 668년 12월에는 대각간으로 승진하였다. 고구려 멸망 직후부터 벌어지기 시작한 나당전쟁으로 인하여 당나라와 신라의 관계가 악화되자 문무왕 14년(674)에 당나라에서는 문무왕의 官爵을 빼앗고 당시 長安에 있던 右驍衛員外大將軍 臨海郡公 金仁問을 신라의 왕으로 삼아 귀국케 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문무왕의 관작이 곧 회복되어 그는 귀국 도중에 당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 후 계속 당의 수도에 체류하다가 효소왕 3년(694) 4월 29일 그 곳에서 죽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 그의 靈柩는 고국으로 돌아와 경주 西原 태종 무열왕릉 아래에 묻혔다. [역주:44권51] 향악(鄕樂) 우리나라 음악을 중국 음악에 기준하여 칭한 이름. 통일신라의 음악문화는 신라악의 전통 위에 백제악과 고구려악을 수용하여 鄕樂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기본적인 자료를 제공하는 자료가 바로 본서 권32 잡지 樂조이다. 최치원의 鄕樂雜詠 5首에 나오는 鄕樂은 唐(618∼907) 이전에 우리나라에서 수용된 외래음악을 포괄하는 뜻으로 사용되었다(李惠求, 《한국음악연구》, 1957, 87쪽; 宋芳松, 〈 音樂篇〉,《韓國學基礎資料選集-고대편-》 참조). 본서 권32 주석 333 참조. [역주:44권52] 영휘(永徽) 당 고종의 연호. 650∼665년까지 6년간 사용되었다. [역주:44권53] 좌령군위장군(左領軍衛將軍) 左領軍衛는 당나라 중앙군단인 16衛 중의 한 부대인 左右領軍衛의 하나이다. 皇城의 西面 助鋪 및 京城, 苑城의 여러 문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장군은 2명이었으며 종3품의 무관직이다.(《新唐書》 권49 上, 百官志 4 참조) [역주:44권54] 장산성(獐山城) 현재의 경북 慶山市. 본서 권2 주석 54 및 권6 주석 178 참조. [역주:44권55] 용삭(龍朔) 唐 高宗의 연호. 661∼663년까지 3년간 사용되었다. [역주:44권56] 예맥(穢貊) 당시 고구려에 예속된 말갈족을 가리킨 것으로보인다. [역주:44권57] 형국공(邢國公) 당나라 소정방이 당 고종 때에 賀魯를 쳐 세운 공로로 받은 封爵號.(《舊唐書》 권83 蘇定方傳 참조) [역주:44권58] 소정방(蘇定方) 592∼667. 이름은 烈. 자는 定方. 자를 주로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冀州 武邑 출신으로 邕의 아들, 어려서부터 용맹을 떨쳐 아버지가 죽자 그 향당의 무리를 거느렸다. 백제 의자왕 20년(660) 3월에 좌무위대장군으로서 新丘道行軍大摠管이 되어 13만 군대를 끌고와 백제를 멸하여 11월에 의자왕 등을 포로로 잡아 바쳤고 보장왕 19년(660) 12월에 遼東道行軍大摠管으로 출전하여 평양성을 포위하고 신라에 군량을 요구하였으나 식량을 공급하자 곧 바로 귀국하였다. 그 다음해 661년에 4월에 당나라에서는 35군을 동원하여 고구려 침략하였는데, 이때 소정방은 平壤道行軍摠管으로 고구려 침략에 참여하였다. [역주:44권59] 요동도(遼東道) 행군대총관(行軍大摠管) 당나라에서 고구려 침공시에 요동길로 출병하는 부대의 총지휘관. 이는 보장왕 19년(660) 12월 침략시에 소정방이 맡은 군직이었다. 이 때에 35道의 군사가 파견되었다. [역주:44권60] 쌀 4천 섬과 조(租) 2만여 섬 본서 권6 신라본기 문무왕 2년(662)조에는 租 2만2천여 석으로 기록되어 있다. [역주:44권61] 속이는 꾀를 내어 이에 대하여는 본서 권42 열전 김유신전 中에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역주:44권62] 건봉(乾封) 唐 高宗代의 연호. 666∼7의 2년간 사용되었다. [역주:44권63] 태산(泰山) 중국 山東省에 있는 명산. 중국 황제가 이에 올라 제천행사를 하는 곳이다. [역주:44권64] 봉선(封禪) 1) 중국고대의 제천의식. 2) 산에 흙을 쌓고 땅에 제사를 올리는 것. 3) 帝王이 泰山에 올라 壇을 만들고 하늘에 제사드리는 것. 4) 태산 위에 흙을 쌓아 단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를 지내어 하늘의 공에 보답하는 것을 ‘封’이라 하고, 태산 아래의 작은 산 위에 올라가 소제하고 땅의 공에 보답하는 것을 ‘禪’이라고 하는데 禪은 神을 말한다(《史記》 권28 封禪書 註 史記正義 참조). 禹王이 순수하면서 명산대천을 봉하는 의식에서 봉선은 비롯되어 전국시대에 일시 중단되었다가 진시황 이후 다시 시작되어 漢·唐 이래 종종 행해져 왔다. [역주:44권65] 우효위(右驍衛) 우효위는 당나라 16위의 하나인 좌우효위의 한 부대. 궁성 내외를 지키는 일을 맡았다.(《新唐書》 권49 上 백관4 上 참조) [역주:44권66] 총장(摠章) 唐나라 高宗의 연호. 668∼669 2년간 사용되었다. 《舊唐書》, 《新唐書》및 《資治通鑑》에는 ‘總章’으로 기록되어 있다. 본서에는 모두 ‘摠’자로 쓰고 있다. ‘摠’자는 ‘總’자와 상통된다. 이는 ‘摠官’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역주:44권67] 이적(李勣) 583∼669. 曹州 離狐 출신. 본성은 徐氏. 본명은 世勣. 당 태종의 휘(世民)에 걸려 이름을 勣으로 사용하였다. 668년 遼東道行軍摠管으로 고구려 침략에 성공하였다. 그의 졸년과 나이에 대하여 《新唐書》 권93 李勣傳에는 總章 2년(669)에 86세로 죽었다고 기록되었으며, 《舊唐書》 권67 李勣傳에는 乾封 2년(666) 76세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舊唐書》의 기록이 잘못이다. 당나라 고조에 의하여 賜姓되고 당태종 3년(629)년에 英公에 봉하여졌고 고종의 廟庭에 배향된 공신이다. 《舊唐書》에서는 그가 英國公에 봉해진 연대를 정관 11년(637)으로 기록하고 있다. [역주:44권68] 북한산성(北漢山城) 본서 권6 신라본기 문무왕 9년(669)조에는 漢山州라 했다. 본기가 옳을 것이다(이병도, 《國譯 三國史記》, 647쪽). [역주:44권69] 장(臧) 보장왕의 이름. 이름을 쓴 것은 貶下한 것이다. [역주:44권70] [영공은] 곧 왕과 남산(男産)·남건(男建)·남생(男生) 등을 데리고 돌아갔다. 남산, 남건, 남생은 연개소문의 세 아들이다. 장남인 남생을 맨 마지막에 쓴 것은 보장왕 25년(666) 형제간의 불화로 인하여 당에 항복하였기 때문이며, 둘째인 남건은 평양성을 끝까지 사수하려다가 자살하려 하였으나 포로로 잡혔고, 셋째인 남산은 평양이 포위되자 왕명을 받아 首領 98명을 거느리고 항복하였다(본서 권22 보장왕 27년 9월조). 그리고 이때 당나라에 잡혀간 고구려의 대신 등 모두 20만에 달하였다(본서 권7 신라본기 문무왕 8년 9월 21일조 참조). [역주:44권71] 대각간(大角干) 중종임신간본과 誠庵本 《三國史記》에 는 ‘大琢角干’으로 되어 있으나 琢자는 빠져야 할 글자이다. 감교본에서는 삭제하지 않았으나 번역본에서는 이를 삭제하였다. 본서 권7 신라본기 문무왕 8년(668)조에는 10월 22일조에 대각간으로 기록되어 있다. [역주:44권72] 제서(制書) 황제의 글. 제후나 왕의 경우 敎旨 또는 王旨라 칭한다. [역주:44권73] 상원(上元) 唐 高宗의 연호. 674∼675 2년간 사용되었다. [역주:44권74] 유인궤(劉仁軌) 597∼681. 당나라 초기의 장군. 汴州 尉氏 출신. 641년에 給事中에 임명되었으나 간신의 참소로 삭탈관직되어 유배되었다가 백제 정벌에 백의종군하였다. 소정방이 백제를 침공하여 멸한 후에 檢校帶方州刺史로 임명하여 백제지역의 통치에 책략을 내었고 백제 부흥군을 잘 수습한 공로로 6등급을 뛰어 帶方州刺史가 되었다. 668년 고구려 침공시에는 遼東道副大總管으로 李勣의 부관으로 참여하여 고구려 멸망에 공을 세웠다.(《舊唐書》 권84 劉仁軌傳 및 《新唐書》 권108 劉仁軌傳 참조) [역주:44권75] 우효위(右驍衛) 원외대장군(員外大將軍) 임해군공(臨海郡公) 우효위는 당나라 16위 중의 하나인 부대 명칭이고, 원외대장군은 정원이 아닌 직이었다. 김인문에게 고구려 멸망의 공로로 당나라에서 봉해준 작호이다. [역주:44권76] 계림주대도독(雞林州大都督)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이 책봉기사의 원문 뒷부분의 ‘新羅王’ 3자가 더 있었다고 판단된다. 계림주는 신라를 의미하며 ‘開府’는 開建府署의 뜻으로 漢代에 三公(司馬·司徒·司空)들만이 설치할 수 있던 독자적 관부였으나 후대에는 군벌 장군들도 이를 갖게 되어 보통 外方의 군사 실력자들을 지칭하게 된 것이다. ‘儀同三司’는 三司(三公)과 동등한 지위의 大將軍(文官은 光祿大夫 이상) 들에게 수여한 爵位인데 隋·唐대에는 實職 없는 명칭만 남게 되었다. 개부의동삼사라는 직은 당나라 종1품의 文散官 벼슬로서, 儀制가 三公과 같다는 뜻의 명칭이다. 신라에서는 진덕왕이 처음으로 이 벼슬을 받았고, 그 후 무열왕, 문무왕, 김인문, 성덕왕 등이 이 직함을 당으로부터 받았다. 고구려의 장수왕, 문자왕, 평원왕, 영양왕도 각기 宋·梁·後周·隋로부터 같은 벼슬을 받았다. [역주:44권77] 조로(調露) 당 고종의 연호. 679년 6월부터 다음해 8월까지 2년간 사용되었다. [역주:44권78] 진군대장군(鎭軍大將軍) 행우무위위대장군(行右武威衛大將軍) 진군대장군은 당나라 무산계의 종2품의 명칭이며(《新唐書》 권46 兵部조 참조), 무위위는 대궐을 경호하는 부대의 하나이다. 좌우무위에 대장군 각 1인, 장군 각 2인을 두었다(《구당서》 직관지 3 참조). 行은 위계가 높은 사람이 낮은 위계의 관직을 받을 때에 붙이는 것이다. 김인문이 종2품으로써 종3품의 직을 받았기 때문에 ‘行’자를 붙인 것이다. [역주:44권79] 재초(載初) 唐나라 중종대의 연호. 690년 1년간 사용되었다. [역주:44권80]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 상주국(上柱國) 임해군개국공(臨海郡開國公) 좌우림군장군(左羽林軍將軍) 보국대장군은 당나라 정2품의 무산계이고, ‘上柱國’은 楚의 최고 관작이었으며 隋代에는 勳勞에 대한 散官이었고 唐·宋代에는 正二品의 勳職이었다. 郡開國公은 제4등의 봉작제로서 이에는 식읍 2천 호가 주어지도록 되어 있다(《新唐書》 권46 吏部조 참조). 우림군은 당나라 16위의 하나로 北衙의 금군을 통솔하여 날랜 말을 타고 조회시에는 황제를 호위하며, 순행시에는 길 양쪽에서 호위하는 의장을 담당하는 군대이다. [역주:44권81] 연재(延載) 唐 中宗의 연호. 694년 1년간 사용되었다. [역주:44권82] 당나라 서울[帝都] ‘京師’라 하여, 수나라 문제 2년(582)에 漢나라의 長安 古城 남쪽 20리에 新都를 마련하였고, 당나라에서도 이를 수도로 하였다. 장안은 秦나라의 咸陽이었고, 한나라 대에 장안이라 하였다(《舊唐書》 권38 지리지1 참조). 이를 ‘上都’라고도 하였는데, 초기에는 ‘京城’, 天寶 원년(742)에 ‘西京’, 至德 2년(757)에는 ‘中京’이라 하였다가 上元 2년(761)에 ‘서경’으로 복귀하였고, 숙종 원년(756)에 ‘上都’라고 칭하였다(《新唐書》 권36 지리지 1 참조). [역주:44권83] 수의 시신을 염습하는 옷. [역주:44권84] 태대각간(太大角干) 신라 17위 官等과 大角干 위에 더한 非常位. 문무왕 8년(998)에 삼국을 통일하는데 공이 큰 김유신에게 준 것이 그 시초이다. 太大舒發翰이라고도 한다. [역주:44권85] 서원(西原) 경주 西岳 아래로, 1931년에 지금 西岳書院 構內에서 金仁問의 묘비 일부가 발견되었다. 그 분묘도 본래 그 구내에 있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그 형체가 없어지고 비석도 매몰되었다. 비석편은 현재 국립 경주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역주:44권86] 인문이 … 숙위한 월일을 계산하면 무릇 22년 김인문이 입당 숙위한 햇수는 진덕왕 5년(651)에 처음으로 입당 숙위한 때로부터 김삼광과 교체된 문무왕 6년(666)까지 15년임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신형식, 〈신라의 대당교섭상에 나타난 숙위에 대한 일고찰〉, 《역사교육》 9, 1966, 147쪽). 그러나 22년은 당나라에 머문 기간을 말한 것으로 해석하여야 할 것이다. [역주:44권87] 해찬(海湌) 신라 제3관등인 波珍湌의 다른 이름. ‘海干’이라고도 하였다. 본서 권38 주석 14 참조. [역주:44권88] 양도(良圖) 신라의 진골 귀족, 태종 무열왕 7년(660) 당군과 함께 백제를 공격하여 공을 세웠고, 다음 해(661) 2월에 그는 대아찬으로 대당장군 품일을 도와 백제부흥군이 사비성을 공격해오자 이를 막으러 출정하였으나 공을 세우지 못하였다. 그해 12월에는 평양을 포위하고 있던 소정방에게 군량을 갖다 주기 위한 임무를 수행한 김유신 휘하 9명의 장군 중 한 사람이었다. 양오에 이르러 중국말을 잘하는 김인문, 軍勝과 함께 그는 식량이 곧 도착할 것임을 알리는 임무를 맡았다. 식량이 도착하였으나 소정방은 곧 회군하였다. 이에 그는 800명의 식량 운반병을 배에 싣고 바다로 귀국하였으다. 669년 신라가 당나라 군대와 싸우게 된 것을 변명하기 위하여 흠순과 함께 당나라에 갔다가 흠순은 돌아오고 그는 감옥에 갇혀 감옥에서 죽었다. 당나라에 마지막으로 사신으로 갈 때 그는 파진찬이었다. 전후 여섯 번이나 당나라에 다녀왔다. [역주:44권89] 서경(西京) 당나라 수도 장안을 일컬은 말. 天寶 원년(742)에 장안을 ‘西京’이라 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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