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歷史/三國史記

列傳 第七 奚論

柳川 2019. 12. 25. 19:52

列傳 第七 奚論

父讚德 附 ※
·素那
父沈那 附 ※
·驟徒
兄夫果·弟逼實 附 ※
·訥催·薛罽頭·金令胤
祖欽春·父盤屈 附 ※
·官昌·金歆運·裂起
仇近 附 ※
·丕寧子 子擧眞·奴合節 附 ※·竹竹·匹夫·階伯

奚論 牟梁人也 其父讚德 有勇志英節 名高一時 建福二十七年庚午 眞平大王 選爲椵岑城縣令 明年辛未冬十月 百濟大發兵 來攻椵岑城一百餘日 眞平王命將 以上州·下州·新州之兵救之 遂往與百濟人戰不克 引還 讚德憤恨之 謂士卒曰 “三州軍帥見敵强不進 城危不救 是無義也 與其無義而生 不若有義而死” 乃激昻奮勵 且戰且守 以至粮盡水竭 而猶食屍飮尿 力戰不怠 至春正月 人旣疲 城將破 勢不可復完 乃仰天大呼曰 “吾王委我以一城 而不能全 爲敵所敗 願死爲大厲 喫盡百濟人 以復此城” 遂攘臂瞋目 走觸槐樹而死 於是城陷 軍士皆降奚論年二十餘歲 以父功 爲大奈麻 至建福三十五年戊寅 王命奚論 爲金山幢主 與漢山州都督邊品 興師襲椵岑城 取之 百濟聞之 擧兵來 奚論等逆之 兵旣相交 奚論謂諸將曰 “昔吾父殞身於此 我今亦與百濟人戰於此 是我死日也” 遂以短兵赴敵 殺數人而死 王聞之 爲流涕 贈卹其家甚厚 時人無不哀悼 爲作長歌弔之


[교주:47권1] 父讚德 附
「父讚德 附」, 原本에는 없으나 本書 目錄에 의거 추가.
[교주:47권2] 父沈那 附
「父沈那 附」, 上同.
[교주:47권3] 兄夫果·弟逼實 附
「兄夫果·弟逼實 附」, 上同.
[교주:47권4] 祖欽春·父盤屈 附
「祖欽春·父盤屈 附」, 上同.
[교주:47권5] 仇近 附
「仇近 附」, 上同.
[교주:47권6] 子擧眞·奴合節 附
「子擧眞·奴合節 附」, 上同.


[역주:47권1] 해론(奚論)

    ?∼618. 신라 진평왕대의 장군. 경주 牟梁部 출신. 아버지는 縣令 讚德. 椵岑城 전투에서 전사한 아버지의 덕으로 20여 세에 大奈麻에 올랐다. 진평왕 40년(618) 해론은 金山幢主에 임명되어 한산주 도독 邊品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가잠성 전투에 참가하였다. 아버지가 가잠성에서 전사한 사실을 상기하고는 백제군과 죽을 것을 각오하고 싸우다 전사하였다. 왕은 이를 듣고 감복하여 그 가족에게 후하게 상을 베풀었으며,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長歌를 지어 조문하였다.

[역주:47권2] 모량(牟梁)
漸梁部 혹은 岑喙部(〈蔚珍 鳳坪新羅碑〉)라고도 한다. 현재의 경북 경주시 西川 지류인 毛良川 북쪽의 西兄山 기슭에 있었다고 추정된다.
[역주:47권3] 찬덕(讚德)
?∼612. 신라 진평왕 때의 지방관. 경주 牟梁部출신. 진평왕 32년(610)에 假岑城 縣令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10월 백제 무왕이 대군을 동원하여 가잠성을 포위 공격하여 100일간의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구원병이 구원하러 왔으나, 백제군과 싸우다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612년 정월 무기가 다하고 힘이 다하자 이에 하늘을 우러러 보며 “우리 임금이 나에게 하나의 성을 맡겼는데 이를 온전하게 지키지 못하고 적에게 패하니 원컨대 죽어서 큰 귀신이 되어 백제인을 다 물어 죽여 이 성을 되찾게 하겠다!”고 외치고 팔뚝을 걷어 부치고 눈을 부릅 뜨고 달려 느티나무에 부딪혀 죽었다. 이에 성은 함락되고 군사가 모두 항복하였다. 그의 아들 奚論 또한 뒷날 가잠성에서 용감히 싸우다 전사하였다
[역주:47권4] 건복(建福)
진평왕 6년(584)에 개원하여 선덕왕 2년(633)까지 사용된 신라의 연호.
[역주:47권5] 가잠성(椵岑城)
7세기 초부터 백제와 신라 사이의 쟁탈의 요충지로서 신라 漢州 介山面(경기도 안성군 죽산면)의 옛지명인 개차산군과 같은 곳으로 볼 수 있을 듯하다(金泰植, 〈百濟의 加耶地域 關係史〉, 《백제의 중앙과 지방》, 충남대학교백제연구소, 1997. 77쪽) 현재의 충북 괴산지방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井上秀雄 譯註, 《三國史記》, 1984, 118쪽). 이 위치를 시사해 주는 자료는 본권에 실린 金令胤傳에 보덕국(익산)에서 반란을 일으킨 고구려의 殘賊 悉伏을 칠 때에 가잠성 남쪽 7리에 진을 쳤다는 기사이다.
[역주:47권6] 백제에서 대군을 출동시켜
본서 권28 백제본기 義慈王 7년조에는 백제 장군 義直이 步騎 3천 명을 이끌고 침입하였다고 좀 더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역주:47권7] 금산(金山)
尙州 開寧郡의 金山縣으로 현재의 경북 김천시 지역이다. 본서 권34 주석 141 참조.
[역주:47권8] 한산주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평왕 40년조에는 ‘北漢山州’로 기록되었는데 본기의 기록이 정확하다고 판단된다.
[역주:47권9] 변품(邊品)
신라 진평왕 때의 장수. 진평왕 40년(618)에 변품은 北漢山州의 軍主로서 군사를 크게 일으켜 동왕 33년(611)에 백제에 빼앗긴 椵岑城을 회복하였다.
[역주:47권10] 장가(長歌)
말의 뜻으로 풀이하면 긴 노래이지만 이는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장송곡이라 할 수 있다.



素那
或云金川 白城郡蛇山人也 其父沈那
或云 ※
 ※力過人 身輕且捷 蛇山境與百濟相錯 故互相寇擊無虛月 沈那每出戰 所向無堅陣 仁平中 白城郡出兵 往抄百濟邊邑 百濟出精兵急擊之 我士卒亂退 沈那獨立拔劒 怒目大叱 斬殺數十餘人 賊懼不敢當 遂引兵而走 百濟人 指沈那曰 “新羅飛將” 因相謂曰 “沈那尙生 莫近白城” 素那雄豪有父風 百濟滅後 漢州都督都儒公請大王遷素那於阿達城 鄙禦北鄙 上元二年乙亥春 阿達城 ※守級湌漢宣 敎民以某日齊出種麻 不得違令 靺鞨諜者認之 歸告 ※酋長 至其日 百姓皆出城在田 靺鞨潛師猝入城 剽掠一城 老幼狼狽 不知所爲 素那奮刃向賊 大呼曰 “爾等知新羅有沈那之子素那乎 固不畏死以圖生 欲鬪者曷不來耶” 遂憤怒突賊 賊不敢迫 但向射之 素那亦射 飛矢如蜂 自辰至酉 素那身矢如猬 遂倒而死 素那妻 加林郡良家女子 初素那以阿達城鄰敵國 獨行 留其妻而在家 郡人聞素那死 弔之 其妻哭而對曰 “吾夫常曰 ‘丈夫固當兵死 豈可臥牀席 死家人之手乎’ 其平昔之言如此 今死如其志也” 大王聞之 涕泣沾襟曰 “父子勇於國事 可謂世濟忠義矣” 贈官迊湌



[교주:47권7] 熄
原本 「煌」. 誠庵本에 의거 수정. 鑄字本 「煌」. 榮·朝·北·權·烈·燾·浩 「煌」.
[교주:47권8] 膂
原本·誠庵本 「旅」. 三國史節要(卷11-2面)에 의거 수정.
[교주:47권9] 太
原本·誠庵本 「大」. 三國史節要(卷11-3面)·鑄字本에 의거 수정.
[교주:47권10] 其
原本·誠庵本 「某」. 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수정.




[역주:47권11] 소나(素那)
?∼675. 신라 문무왕 때의 장수. 일명 金川. 白城郡 蛇山(현재의 충남 천안시 직산면) 출신. 沈那의 아들이다. 그는 백제가 망한 뒤 북쪽 변경의 阿達城에 배치되었다. 문무왕 15년(675) 봄에 아달성의 태수 漢宣이 성의 백성들로 하여금 성 밖의 밭에 나가 삼을 심게 하였는데 말갈이 미리 이를 알고 빈 성을 갑자기 습격하여 노략질하였다. 이때 소나가 신라에 심나의 아들 소나가 있다는 것을 아느냐 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우다 죽었다. 迊湌에 추증되었다.
[역주:47권12] 금천(金川)
素那의 다른 이름. 이를 훈독하면 ‘쇠나’로서 素那에 대한 한자식 표현이다.
[역주:47권13] 백성군(白城郡)
현재의 경기조 안성군 안성읍. 고구려의 奈兮忽이었으며, 경덕왕 때에 백성군으로 개칭하였다. 고려조에 안성군으로 개칭되었다. 본서 권35 주석 38 참조.
[역주:47권14] 심나(沈那)
신라 선덕왕 때의 장수. 白城郡 蛇山 출신. 熄川이라고도 하였다. 북한 고전연구실 번역본, 이재호본, 신호열본에서 모두 ‘심나’로 읽었다. 본서에의 원문에서 ‘或云煌川’으로 주를 붙이고 있는 바 지금까지 ‘煌’자로 판독되었다. 趙炳舜 소장본에는 ‘熄’자에 가까운 자로 되어 있다. ‘熄’은 ‘심(沈)’자의 다른 표현이며, ‘川’은 훈독하여 ‘나’로 읽었을 것으로 판단한다.
그는 힘이 남보다 세고 몸이 가볍고도 민첩하였다. 현재의 충남 천안시 직산지역은 7세기 신라와 백제의 접경지대로서, 크고 작은 충돌이 자주 있었다. 이를 심나가 막아내곤 하였다. 仁平年間(634∼647)에 신라에서 白城郡(현재의 경기도 안성군)의 군사를 이끌고 백제의 변방 고을을 빼앗았는데 백제의 정예군사가 와서 쳤다. 군사들이 모두 물러났으나 그만이 홀로 적 수십 명을 베니 백제군이 달아났다고 한다. 이때 백제인들이 그를 ‘신라의 날으는 장수[飛將]’라고 불렀다.
[역주:47권15] 인평(仁平)
선덕여왕 때의 연호. 동왕 3년(634)에 개원하였다. 그러므로 仁平년간은 634년으로부터 신라에서 당나라 연호를 사용하기 전인 647까지 사용된 것으로 생각된다.
[역주:47권16] 도유(都儒)
?∼668. 성은 朴씨이며 이름이 都儒. 7세기의 신라의 진골귀족. 한성주 도독을 지냈다. 문무왕 8년(668) 6월에 고구려 정벌시에 대아찬으로서 아찬 龍長과 함께 漢城州行軍摠管이 되어 출전하였고, 백제의 부녀자와 결혼하였는데 백제 잔민들이 신라병기를 훔치려는 모의에 연루되어 참형을 받았다(본서 권7 신라본기 문무왕 11년 7월 26일 ‘大王報云書’ 참조).
[역주:47권17] 대왕
문무대왕을 말한다.
[역주:47권18] 아달성(阿達城)
현재의 강원도 伊川郡 安峽面에 비정할 수 있다. 아달성은 신라 漢州 兎山郡 安峽縣(이천군 안협면)의 옛지명인 阿珍押縣과 같은 곳으로 이해된다. 이는 본서 권6·7 신라본기 및 권43 열전 김유신전의 문무왕7년(667) 10월 2일조의 阿珍含城과도 같은 곳으로 생각한다. 본서 권35 주석 132 참조.
[역주:47권19] 상원(上元) 2년 을해(문무왕 15:675) 봄에 아달성(阿達城)
본서 권7 신라본기 문무왕 15년조에는 말갈의 침입시기를 이 해 가을 9월 이후 기사로 서술하고 있다.
[역주:47권20] 태수(太守)
이는 본서 권7 신라본기 문무왕 15년조의 기사에서는 城主로 되어 있고 성주는 소나라고 기록하고 있을 뿐 태수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아달성 태수라는 표현은 신라의 지방관제로 볼 때 어긋난 표현이다.
[역주:47권21] 한선(漢宣)
여기에 단 한번 나오는 사람으로, 아달성의 태수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태수라는 직함이 맞는다면 이를 관장하는 兎山郡 태수이거나 아니면 아달성의 관장하는 安峽縣의 少守일 가능성이 높다.
[역주:47권22] “어느 날 모두 나가 삼을 … 말도록 하라!”
이 자료는 신라의 이 시기 농업방식을 유추할 수 있는 자료이다. 성안의 주민이 공동경작을 하였으며 이는 성주의 명에 의하여 동원되었음을 알려준다.
[역주:47권23] 말갈
후일의 여진족을 말한다. 당나라 때에 말갈이라 칭하였다. 본 열전에서는 단순히 말갈의 침입으로 서술되어 있으나 이는 당나라 군대가 신라군을 고구려 강역에서 몰아내기 위하여 거란, 말갈족을 이용한 침입임을 본서 신라본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역주:47권24] 잡찬
잡찬은 진골 신분만이 받을 수 있는 신라의 제3관등이었다. 지방 출신인 소나에게 잡찬의 관등을 추증한 것은 예에 없는 파격적인 대우이었다. 일반적으로 전사한 자에게 급찬(제9등급), 특별히 높이 주어야 사찬(제8등급)으로 올려 주었다.




驟徒 沙梁人 奈麻聚福之子 史失其姓 兄弟三人 長夫果 仲驟徒 季逼實 驟徒嘗出家 名道玉 居實際寺  ※宗大王時 百濟來伐助川城 大王興師出戰 未決 於是 道玉語其徒曰 “吾聞爲僧者 上則精術業 以復性 次則起道用 以益他’ 我形似桑門而已 無一善可取 不如從軍殺身 以報國” 脫法衣 著戎服 改名曰驟徒 意謂馳驟而爲徒也 乃詣兵部 請屬三千幢 遂隨軍赴敵場 及旗鼓相當 持槍劒 突陣力鬪 殺賊數人而死 後咸享二年辛未 文武大王發兵 使踐百濟邊地之禾 遂與百濟人 戰於熊津之南時夫果以幢主戰死 論功第一 文明元年甲申 高句麗殘賊 據報德城而叛 神文大王命將討之 以逼實爲貴幢弟監 臨行 謂其婦曰 “吾二兄 旣死於王事 名垂不朽 吾雖不肖 何得畏死而苟存乎 今日與爾生離 終是死別也 好住無傷” 及對陣 獨出奮擊 斬殺數十人而死 大王聞之 流涕嘆曰 “驟徒知死所 而激昆弟之心 夫果·逼實亦能勇於義 不顧其身 不其壯歟” 皆追贈官沙湌


[교주:47권11] 太
原本·誠庵本 「大」. 鑄字本에 의거 수정.




[역주:47권25] 취도(驟徒)
7세기의 신라 경주인. 나마 聚福의 둘째 아들. 일찍이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법명은 道玉이었고 實際寺에 머물렀다. 백제와의 전투가 치열해지자 그는 승복을 벗고 三千幢에 들어가 태종대왕 때에 助川城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형 夫果, 동생 逼實을 격분시켜 세 사람이 모두 통일 전쟁에 참여하여 전사하였다.
[역주:47권26] 성이 전하지 않는다
원래 성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역주:47권27] 부과(夫果)
?∼671. 신라 문무왕 때의 군관. 경주 沙梁部 출신. 奈麻 聚福의 맏아들이다. 문무왕 11년(671)에 백제부흥군과 熊津에서 싸울 때 幢主로서 출전하여 전사하였다. 싸움이 끝난 뒤 논공서열이 제일 높았다. 아우 驟徒 ·逼實과 함께 沙湌에 추증되었다.
[역주:47권28] 핍실(逼實)
?∼684. 신라 신문왕 때의 장수. 경주 沙梁部출신. 奈麻 聚福의 셋째 아들이다. 핍실의 두 형인 夫果와 聚徒는 앞서 나라를 위하여 싸우다가 죽었다. 684년에 안승의 族子 大文(또는 悉伏)과 고구려 유민들이 보덕국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신문왕은 군사를 일으켜 핍실을 貴幢弟監으로 삼아 토벌하도록 하였다. 그는 떠날 때에 아내에게 두 형의 공적을 헛되게 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자신도 죽기를 각오하고 출전하여 전사하였다. 홀로 나가 분전하여 고구려군 수십 인을 죽이고는 전사하였다. 이를 전해들은 신문왕은 이들 형제의 용맹에 탄복하여 이들에게 모두 沙湌의 벼슬을 추증하였다.
[역주:47권29] 실제사(實際寺)
경주 주위에 있었던 사찰. 현재 그 위치는 알 수 없으나 《三國遺事》 권5 避隱篇 迎如師條에 一然이 살았던 때까지 國師房으로 불리어지고 있었다고 하였다.
[역주:47권30] 조천성(助川城)
현재의 충북 영동군 양산면 가곡리에 있는 비봉산성. 이곳은 소백산맥의 추풍령을 넘어 금강 상류를 따라 부여로 갈 수 있는 요충지이다. 양산면 柯谷里(面所)의 飛鳳山城로 비정한 견해(성주탁, 〈 조천성의 위치에 대하여〉, 《백제연구》 4, 충남대학교백제연구소, 1973)와 陽山面 元塘里 大王山의 大陽山城로 보는 견해가 있다(정영호, 〈백제조천성고〉, 《백제연구》 3, 충남대학교백제연구소, 1972). 본서 권34 주석 150 참조.
[역주:47권31] 태종대왕 때 백제가 … 처들어오자
이는 태종 무열왕 2년(655)에 백제와 고구려가 함께 신라의 서북변 33성을 공격하여 탈취한 전쟁을 말한다(본서 권5 신라본기 태종 무열왕 2년조,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15년조, 본서 권22 고구려본기 보장왕 22년조). 이는 신라가 최대의 위기로서 태종 무열왕은 이를 당에 보고하고 구원병을 얻어오는 계기가 되었다.
[역주:47권32] 삼천당(三千幢)
본서 권40 잡지 직관지에 실린 신라의 23개 부대명 중 삼천당은 보이지 않고 사천당이 보이고 신삼천당이 있다. 사천당은 진평왕 13년(591)에 설치되었다고 하며 신삼천당은 문무왕 12년(672)에 설치되었는데 이는 외삼천이라고도 불렀다는 점에서 지방의 부대인 듯하다. 삼천당은 신삼천당이 설치되기 이전에 편성된 것으로 생각되며 이는 태종 무열왕 2년에 고구려와 백제의 연합 공격으로 북방의 33성을 빼앗기는 위기에서 지원병을 모집하여 편성한 부대가 아닌가 생각한다. 본서 권40 잡지 직관지에 나오는 三千卒이라는 부대와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 삼천졸은 15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본서 권40 주석 90 참조.
[역주:47권33] 보덕성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이는 신문왕 4년에 安勝의 族子인 장군 大文의 반란을 말한다(본서 권8 신라본기 참조).
[역주:47권34] 귀당(貴幢)
신라시대 지방군단의 한 단위부대명. 귀당은 육정 군단의 하나로 진흥왕 13년(552년)에 설치된 상주정(上州停)을 문무왕 13년(673)에 개칭한 것이다.
[역주:47권35] 제감(弟監)
신라의 군관의 명칭으로 진흥왕 23년(562)에 마련되었는데 귀당에는 5명의 弟監이 있었다.




訥催 沙梁人 大奈麻都非之子也 眞平王建福四十一年甲申冬十月 百濟大擧來侵 分兵圍攻速含·櫻岑· ※岑·烽岑·旗懸· ※柵等六城 王命上州·下州·貴幢·法幢·誓幢五軍 往救之 旣到 見百濟兵陣堂堂 鋒不可當 盤桓不進 或立議曰 “大王以五軍 委之諸將 國之存亡 在此一役 兵家之言曰 ‘見可而進 知難而退’ 今强敵在前 不以好謀而直進 萬一有不如意 則悔不可追” 將佐皆以爲然 而業已受命出師 不得徒還 先是 國家欲築奴珍等六城而未遑 遂於其地 築畢而歸 於是 百濟侵攻愈急 速含· ※岑·穴柵三城 或滅或降 訥催以三城固守 及聞五軍不救而還 慷慨流涕 謂士卒曰 “陽春和氣 草木皆華 至於歲寒 獨松栢後彫 今孤城無援 日益阽危 此誠志士義夫 盡節揚名之秋 汝等將若之何” 士卒揮淚曰 “不敢惜死 唯命是從” 及城將隤 軍士死亡無幾 人皆殊死戰 無苟免之心 訥催有一奴 强力善射 或嘗語曰 “小人而有異才 鮮不爲害 此奴宜遠之” 訥催不聽 至是 城陷賊 ※ 奴張弓挾矢 在訥催前 射不虛發 賊懼不能前 有一賊出後 以斧擊訥催 乃仆 奴反與鬪俱死 王聞之 悲慟 追贈訥催職級湌



[교주:47권12] 歧
原本 「岐」. 本書 卷27 武王 25年條와 卷4 眞平王 46年條에 의거 수정. 鑄字本 「岐」. 榮·朝·北·權·烈·燾·浩 「岐」. 「岐」와 「歧」는 同字.
[교주:47권13] 穴
原本·誠庵本 「冗」. 本書 卷3 眞平王 46年條와 三國史節要(卷8-4面)에 의거 수정. 鑄字本 「冗」. 榮·朝·北·權·烈·浩 「冗」, 燾 「冗(穴)」.
[교주:47권14] 歧
誠庵本 「歧」. 三國史節要·鑄字本 「岐」. 榮·朝·北·權·烈·燾·浩 「岐」.
[교주:47권15] 入
原本·誠庵本 「人」. 鑄字本에 의거 수정.




[역주:47권36] 눌최(訥崔)
?∼624. 대나마 都非의 아들. 신라 진평왕 때의 용장. 백제와의 함양지역의 전투에서 홀로 성을 지키다가 전사하였다.
[역주:47권37] 기현(旗懸)
현재의 전북 남원시 운봉읍의 箕峴으로 추정된다.
[역주:47권38] 혈책(穴柵)
현재의 위치를 알 수 없다. 중종임신간본과 성암본의 《三國史記》에는 ‘冗’(용) 자로 되어 있으나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평왕 36년조 및 《삼국사절요》의 기사에 의거하여 혈책으로 읽었다. 모든 번역본에서 이를 ‘용책’으로 읽었다.
[역주:47권39] 상주(上州)
이 때의 上州는 지금의 경북 善山에 州治가 있었다. 上州는 원래 상주에 설치된 군사적 행정구역으로서 신라 진평왕 36년(614)에 尙州에서 선산으로 옮겼다.
[역주:47권40] 하주(下州)
이 때의 下州의 州治는 진흥왕 26년(565)에 경남 昌寧에서 陜川으로 옮겼다.
[역주:47권41] 법당(法幢)
신라시대의 부대명. 6세기 초에 창설되어 7세기 중엽 신라 군제가 재편성될 때까지 유력한 군단으로 활약하였다. 본서 권40 주석 54 참조.
[역주:47권42] 서당(誓幢)
신라의 군단 명칭. 진평왕 5년(583)에 처음으로 조직되었다. 진평왕 35년(613)에 종래의 誓幢을 綠衿誓幢으로 개칭하였다. 본서 권40 주석 110 참조.



一本作 ※
罽頭
 亦新羅衣冠子孫也 嘗與親友四人 同會燕飮 各言其志 罽頭曰 “新羅用人論骨品 苟非其族 雖有鴻才傑功 不能踰越 我願西 ※遊中華國 奮不世之略 立非常之功 自致榮路 備簪紳劒佩 出入天子之側 足矣” 武德四年辛巳 潛隨海舶入唐 會 ※宗文皇帝親征高句麗 自薦爲左武衛果毅 至遼東 與麗人戰駐蹕山下 深入疾鬪而死 功一等 皇帝問 “是何許人” 左右奏新羅人薛罽頭也 皇帝泫然曰 “吾人尙畏死 顧望不前 而外國人 爲吾死事 何以報其功乎” 問從者 聞其平生之願 脫御衣覆之 授職爲大將軍 以禮葬之


[교주:47권16] 薩
原本 「薛」. 誠庵本에 의거 수정. 鑄字本 「薛」. 北·烈 「薛」, 朝·權·浩 「?」, 燾 「薛(蒒)」.
[교주:47권17] 西
原本 缺刻. 誠庵本·鑄字本에 의거 보충.
[교주:47권18] 太
原本·誠庵本 「大」. 鑄字本 「大」.




[역주:47권43] 설계두(薛罽頭)
7세기의 신라 사람. 신라의 골품제도에 대한 불만을 품고 당나라로 가서 左武衛 果毅로 645년 당태종의 고구려 침입에 참여하였다가 전사하였다. 무관의 최고직인 大將軍의 직에 추증되었다.
[역주:47권44] 귀족 가문의 자손이었다[衣冠子孫]
일반적인 의미로는 귀족의 자손이라는 뜻이나 설계두가 골품제에 불만을 가진 점으로 보아 그는 6두품 이하 출신이 아닐까 한다.
[역주:47권45] 무덕(武德)
당 고조의 연호. 618∼626년의 8년간 사용되었다.
[역주:47권46] 문황제(文皇帝)가 … 친히 정벌하였으므로
문황제는 당 태종의 시호를 약칭한 말. 당나라 태종이 645년(보장왕 4년, 貞觀 19년)에 고구려를 침입한 것을 말한다.
[역주:47권47] 주필산(駐蹕山)
당 태종이 보장왕 4년(645)에 친히 고구려 침략 때에 머물렀던 산. 당 태종이 요동성을 함락시킨 후 安市城을 공략하려 할 때 원군으로 왔던 高延壽·高惠眞 군대를 안시성 동남 8리의 산에서 공략하여 대승을 거두고 그들의 항복을 받았는데 이 때에 태종이 머무른 산을 주필산이라고 칭하였다(본서 권21 고구려본기 보장왕 4년조).
[역주:47권48] 대장군
당나라 무관 중 최고의 직명으로 正三品직이다.



金令胤 沙梁人 級湌盤屈之子 祖欽春

或云欽純角干 眞平王時爲花郞 仁深信厚 能得衆心 及壯 文武大王陟爲冢宰 事上以忠 臨民以恕 國人翕然稱爲賢相  ※宗大王七年庚申 唐高宗命大將軍蘇定方 伐百濟 欽春受王命 與將軍庾信等 率精兵五萬以應之 秋七月 至黃山之原 値百濟將軍階伯 戰不利 欽春召子盤屈曰 “爲臣莫若忠 爲子莫若孝 見危致命 忠孝兩全” 盤屈曰 “唯” 乃入賊陣 力戰死令胤生長世家 以名節自許 神文大王時 高句麗殘賊悉伏 以報德城叛 王命討之 以令胤爲黃衿誓幢步騎監 將行 謂人曰 “吾此行也 不使宗族朋友 聞其惡聲” 及見悉伏出椵岑城南七里 結陣以待之 或告曰 “今此凶黨 譬如鷰巢幕上 魚戲鼎中 出萬死以爭一日之命耳 語曰 ‘窮寇勿迫’ 宜左次以待疲極而擊之 可不血刃而擒也” 諸將然其言 暫退 獨令胤不肯之而欲戰 從者告曰 “今諸將豈盡偸生之人 惜死之輩哉 而以向者之言爲然者 將俟其隙而得其便者也 而子獨直前 其不可乎” 令胤曰 “臨陣無勇 禮經之所 ※ 有進無退 士卒之常分也 丈夫臨事自決 何必從衆” 遂赴敵陣 格鬪而死 王聞之 悽慟流涕曰 “無是父 無是子 其義烈可嘉者也” 追贈爵賞尤厚


[교주:47권19] 太
原本·誠庵本 「大」. 鑄字本에 의거 수정.
[교주:47권20] 誡
原本 「識」. 誠庵本·三國史節要(卷11-15面)에 의거 수정. 鑄字本 「識」. 朝·北·權·浩 「識」, 榮·烈 「譏」, 燾 「識(誡)」.




[역주:47권49] 김영윤(金令胤)
?∼684. 통일신라 신문왕 때의 장군. 경주 沙梁部 출신. 김유신의 동생인 欽春의 손자이며, 盤屈의 아들이다. 신문왕 4년(684) 11월에 안승의 조카뻘[族子]되는 장군 悉伏(일명 大文)이 金馬渚에 있으면서 고구려 유민들과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평정하는 전투에 黃衿誓幢의 步騎監으로 임명되어 출전하였다. 실복이 椵岑城 남쪽 7리에 나와 진을 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지구전을 펴자는 의견에 따라 함께 출전한 다른 장수들은 잠시 물러났다. 그러나 그는 홀로 적진에 나가 싸우다가 죽었다. 신문왕이 이를 듣고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반굴과 영윤 부자를 칭송하고 벼슬과 상을 후하게 추증하였다.
[역주:47권50] 급찬(級湌)
신라의 제9관등.
[역주:47권51] 반굴(盤屈)
?∼660. 김흠춘의 아들. 태종 대왕 7년(660) 백제 정벌에 아버지를 따라 전투에 참여하여 아버지 명에 따라 용감하게 전사하여 사기를 진작하였다.
[역주:47권52] 흠춘(欽春)
신라의 진골 장군. 欽純이라고도 한다. 열전에서는 주로 흠춘이라고 썼고, 본기에서는 주로 흠순이라고 썼다. 아버지는 서현이며 김유신의 동생이다. 어려서 화랑이 되었다. 660년 황산벌 싸움에서 신라군은 네 번이나 싸워 패하여 신라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지자 흠춘은 아들 반굴에게 나라가 위기에 처하여 목숨을 바쳐 충효를 다하라 하여 아들을 전사하게 하였다. 이어 장군 품일의 아들 관창도 나가 싸워 죽으니 신라 군대가 분발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661년에는 평양에 와 있는 소정방에게 군량을 전하기 위하여 김유신과 함께 고구려 영역을 통과하여 식량을 전달하였고, 662년부터 663까지에는 內斯只城(현재의 충남 대전광역시 유성구), 居列城(현재의 경남 거창), 沙平城(현재의 당진군 신평면), 德安城(현재의 충남 논산군 은진면)의 백제 부흥군을 토벌하였다.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전쟁에서는 김인문과 함께 신라군을 이끄는 총대장으로서 고구려의 격멸에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그는 669년에는 파진찬 양도와 함께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양도는 감옥에 갇히고, 그는 다음해에 환국하였다.
[역주:47권53] 실복(悉伏)
고구려의 후예. 신라가 보덕국을 없애려하자 반란을 일으켰다. 본서 권8 신라본기 신문왕 4년조의 말미에는 보덕국에서 고구려 부흥운동을 꾀하였던 안승의 族子 大文을 다른 기록에는 悉伏이라고 한다고 주를 달고 있다. 그러나 大文은 반란을 꾀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주살되자 이를 본 다른 사람들이 관리를 살해하고 읍을 들어 반란을 일으켰다(본서 권8 신라본기 신문왕 4년조 참조). 이때 반란군의 지휘자가 실복이었음을 본 전기에서 보여 주고 있다.
[역주:47권54] 보덕성(報德城)
지금의 전북 익산군 금마지역에 있는 산성.
[역주:47권55] 황금서당(黃衿誓幢)
통일 신라 중앙군인 9서당의 한 부대. 神文王 3년에 고구려 백성이었던 사람으로 조직한 군단. 군복의 옷깃 색이 黃赤이었다.



官昌
一云官狀 新羅將軍品日之子 儀表都雅 少而爲花郞 善與人交 年十六 能騎馬彎弓 大監某薦之 ※宗大王 至唐顯慶五年庚申 王出師 與唐將軍侵百濟 以官昌爲副將 至黃山之野 兩兵相對 父品日謂曰 “爾雖幼年 有志氣 今日是立功名取富貴之時 其可無勇乎” 官昌曰 “唯” 卽上馬橫槍 直擣敵陣 馳殺數人 而彼衆我寡 爲賊所虜 生致百濟元帥階伯前 階伯俾脫胄 愛其少且勇 不忍加害 乃嘆曰 “新羅多奇士 少年尙如此 況壯士乎” 乃許生還 官昌曰 “向吾入賊中 不能斬將搴旗 深所恨也 再入必能成功” 以手掬井水 飮訖 再突賊陣疾鬪 階伯擒斬首 繫馬鞍送之 品日執其首 袖拭血曰 “吾兒面目如生 能死於王事 無所悔矣” 三軍見之 慷慨有立志 鼓噪進擊 百濟大敗 大王贈位級湌 以禮葬之 賻其家唐絹三十匹·二十升布三十匹·穀一百石


[교주:47권21] 太
原本·誠庵本 「大」. 鑄字本에 의거 수정.





[역주:47권56] 관창(官昌)
645∼660. 신라의 진골 출신 화랑. 官狀(관장)이라고도 한다. 장군 품일의 아들. 16세에 660년 백제 전투에 군대의 사기를 진작시키려 흠순의 아들 반굴이 전사하자 두 번이나 혼자 돌진하였다가 죽었다.
[역주:47권57] 품일(品日)
신라의 진골 출신의 장군. 관창의 아버지. 무열왕 7년(660)에 左將軍인 그는 김유신, 김흠순과 함께 5만의 정예병을 이끌고 백제를 공격할 때 황산벌에서 계백의 결사대와 싸워 네차례나 패배하자 아들인 16세의 관창에게 용기를 보일 것을 권유하여 죽게함으로써 신라 군대의 사기를 격앙시켜 백제 공멸에 큰 공을 세웠다. 661년 2월 사비성의 잔적을 칠 때에는 大幢將軍으로서 출정하였다. 같은해 7월에는 그는 忠常, 義服과 함께 上州摠管으로 대장군 김유신 휘하에서 고구려 공격에 출정하였으며, 문무왕 4년(664) 7월에는 일선, 한산 등 2州의 병을 이끌고 고구려 突沙城을 격파하였고, 668년 6월 21일에는 귀당 총관으로 고구려 공멸에 참여하였다. 670년에는 당군이 지배하고 있는 웅진도독부 하의 63성을 탈취하는 전투에 참여하였다.
[역주:47권58] 대감(大監)
병부의 차관직. 또는 장군 아래의 무관직. 본서 권38 주석 71 및 권40 주석 6 참조.



金歆運 奈密王八世孫也 父達福迊湌 歆運少遊花郞文努之門 時 徒衆言及某戰死 留名至今 歆運慨然流涕 有激勵思齊之貌 同門僧轉密曰 “此人若赴敵 必不還也” 永徽六年  ※宗大王憤百濟與高句麗梗邊 謀伐之 及出師 以歆運爲郞幢大監 於是 不宿於家 風梳雨沐 與士卒同甘苦 抵百濟之地 營陽山下 欲進攻助川城 百濟人乘夜疾驅 黎明緣壘而入 我軍驚 ※顚沛 不能定 賊因亂急擊 飛矢雨集 歆運橫馬握槊待敵 大舍詮知說曰 “今賊起暗中 咫尺不相辨 公雖死 人無識者 況公新羅之貴骨 大王之半子 若死賊人手 則百濟所誇詫 而吾人之所深羞者矣” 歆運曰 “大丈夫旣以身許國 人知之與不知一也 豈敢求名乎” 强立不動 從者 握轡勸還 歆運拔劒揮之 與賊鬪 殺數人而死 於是 大監穢破·少監狄得相與戰死 步騎幢主 ※用那聞歆運死曰 “彼骨貴而勢榮 人所愛惜 而猶守節以死 況寶用那生而無益 死而無損乎” 遂赴敵 殺三數人而死 大王聞之傷慟 贈歆運·穢破位一吉湌 寶用那·狄得位大奈麻 時人聞之 作陽山歌 以傷之


【論曰】 羅人患無以知人 欲使類聚羣遊 以觀其行義 然後擧用之 遂取美貌男子 糚飾之 名花郞以奉之 徒衆雲集 或相磨以道義 或相悅以歌樂 遊娛山水 無遠不至 因此知其邪正 擇而薦之於朝 故大問曰 “賢佐·忠臣 從此而秀 良將·勇卒 由是而生者” 此也 三代花郞 無慮二百餘人 而芳名美事 具如傳記 若歆運者 亦郞徒也 能致命於王事 可謂不辱其名者也


[교주:47권22] 太
上同.
[교주:47권23] 駭
原本 「䭾」. 誠庵本·三國史節要(卷9-19面)·鑄字本에 의거 수정. 浩 「骸」.
[교주:47권24] 寶
原本·誠庵本 「宝」. 「寶」의 俗字.




[역주:47권59] 김흠운(金欽運)
?∼655. 7세기 신라 진골 출신의 장군. 나물왕의 8세손. 아버지는 잡찬 達福. 화랑 文奴의 낭도. 태종 무열왕의 사위. 신문왕의 장인. 태종 무열왕 2년(655) 고구려와 백제가 33성을 빼앗자 충북 영동군 조천성 전투에서 郎幢大監으로 참전하여 병사와 고락을 함께 하였다. 백제 땅 양산 밑에서 진을 치고 조천성을 공략하려다가 백제군의 기습을 받아 패배하자 大舍 詮知가 후퇴하여 후일을 기약하자는 권유를 뿌리치고, 싸우다가 끝내 大監 穢破·小監 狄得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사람들은 陽山歌를 지어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제7관등인 일길찬에 추증되었다. 신문왕 3년에 그의 작은 딸이 왕비가 되어 효소왕을 낳았다.
[역주:47권60] 나밀왕(奈密王)
신라 17대 왕인 나물왕. 본서 권3의 신라본기에서는 奈勿尼師今으로 기록하고 그 註에서 ‘奈勿 一云 那密’이라고 적고 있고 《三國遺事》에서도 ‘那密王’으로 적고 있는 바 ‘奈密’과 ‘那密’은 같은 음을 다른 자로 표기한 것이다.
[역주:47권61] 낭당(郎幢)
신라의 부대 명칭. 언제 설치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신라본기 문무왕 원년(661) 7월조에 義光을 郞幢摠管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대감은 총관 아래의 직이다. 본서 권40 주석 116 참조.
[역주:47권62] 양산가
조천성에서 전사한 김흠운의 죽음을 애도하여 읊은 노래. 이는 조선조 많은 문인들의 海東樂府體 詩의 소재가 되어 왔다.
[역주:47권63] 삼대(三代)
신라의 전기간을 상대, 중대, 하대로 구분한 삼대를 말한다. 그 구체적인 구분은 본서와 《三國遺事》에서 달리하고 있다. 즉 본서에서는 眞德王까지를 上代, 무열왕으로부터 혜공왕까지를 中代, 宣德王으로부터 敬順王까지를 下代로 설명하였으며(본서 권12 신라본기 경순왕 말년조), 《三國遺事》에서는 지증왕 이상을 上古, 법흥왕으로부터 眞德王까지를 中古, 무열왕 이후를 下古라 하였다(王曆條).



裂起 史失族姓 文武王元年 唐皇帝遣蘇定方 討高句麗 圍平壤城 含資道 ※管劉德敏傳宣國王 送軍資平壤 王命大角干金庾信 輸米四千石·租二萬二千二百五十石 到獐塞 風雪沍寒 人馬多凍死 麗人知兵疲 欲要擊之 距唐營三萬餘步而不能前 欲移書而難其人 時裂起以步騎監輔行 進而言曰 “某雖駑蹇 願備行人之數” 遂與軍師仇近等十五人 持弓劒走馬 麗人望之 不能遮閼 凡兩日致命於蘇將軍 唐人聞之 喜慰廻書 裂起又兩日廻 庾信嘉其勇 與級湌位 及軍還 庾信告王曰 “裂起·仇近 天下之勇士也 臣以便宜許位級湌 而未副功勞 願加位沙湌” 王曰 “沙湌之秩 不亦過乎” 庾信再拜曰 “爵祿公器 所以酬功 何謂過乎” 王允之 後庾信之子三光執政 裂起就求郡守 不許 裂起與祇園寺僧順憬曰 “我之功大 請郡不得 三光殆以父死而忘我乎” 順憬說三光 三光授以三年山郡 ※守 仇近從元貞公 築西原述城 元貞公聞人言 謂怠於事 杖之 仇近曰 “僕嘗與裂起入不測之地 不辱大角干之命 大角干不以僕爲無能 待以國士 今以浮言罪之 平生之辱 無大此焉” 元貞聞之 終身羞悔




[교주:47권25] 摠
原本·誠庵本 「惣」. 「摠」의 俗字.
[교주:47권26] 太
原本·誠庵本 「大」. 三國史節要(卷10-45面)에 의거 수정. 鑄字本 「大」. 榮·朝·權·烈 「大」.




[역주:47권64] 열기(裂起)
신라 문무왕 때의 장수. 문무왕 1년(661) 평양을 공격하고 있던 당나라의 蘇定方 식량조달의 요청이 있었다. 문무왕은 김유신에게 명하여 군량을 수송하게 하였다. 12월 20일에 쌀 4천 섬과 租 2만여 섬을 싣고 출발한 신라 군사는 2월 1일 온갖 지세의 험난함을 무릅쓰고 소정방 군영으로부터 100여 리 떨어진 獐塞에 이르렀다. 그러나 혹심한 추위로 군사와 말이 많이 얼어 죽고 피로하였고, 그 위에 고구려군의 습격을 받기 쉬워 더 전진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가운데에서 하루 빨리 소정방에게 군량을 가져왔음을 알려야 하였다. 이에 步騎監으로 있던 열기는 가기를 자청하여 軍師 仇近 등 15명과 함께 이틀 만에 소정방에게 이르러 사명을 전하고 그 회신을 받아 다시 이틀 만에 군진으로 돌아왔다. 김유신은 그 용기를 가상히 여겨 級湌의 관등을 주었다. 김유신은 서울로 돌아온 뒤에 다시 왕에게 주청하여 열기에게 한 등급 위인 沙湌을 주도록 하여 그의 공로를 높이 드러내었다. 열기는 김유신이 죽은 뒤 정권을 잡고 있던 김유신의 아들 三光에게 군태수를 청했다가 거절당했다. 그의 불만을 들은 승려 順憬이 삼광을 설득하여 三年山郡 태수에 임용되었다.
[역주:47권65] 문무왕 원년에 … 평양에 군량을 보내도록 하니
이 기사는 본서 권6 신라본기 문무왕 원년 10월 29일조에 실려 있다. 그러나 김유신의 출발은 본서 권42 열전 김유신전(中)에서는 전년 12월 20일에 출발하였고, 본서 권6 신라본기에는 문무왕 2년 정월에 군량을 보내도록 명하였다고 달리 기록하고 있다.
[역주:47권66] 장새(獐塞)에 이르러
문무왕 2년 2월 1일의 사건이다.
[역주:47권67] 3만여 보(步) 떨어져 있었는데
본서 권6 신라본기 문무왕 2년조에서는 평양과의 거리가 3만6천 보의 거리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步는 길이를 나타내는 단위로서 1보는 6尺이므로 1척을 고구려척인 22cm로 계산하면(본서 권41 주석 63 참조) 약 1.32m 정도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3만6천 보는 47.5 km로서 100리가 조금 넘는 거리였다.
[역주:47권68] 삼광(三光)이 집정하였을 때
삼광은 김유신의 장남으로 신문왕 3년(683)에 파진찬에 이르고 최후의 관등은 제 1등급의 이찬에까지 올랐다(본서 권43 주석 5 참조). 그러나 집정의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역주:47권69] 삼년산군(三年山郡)
신라 尙州 三年郡(현재의 충북 보은군 보은읍)의 옛 지명. 본서 권34 주석 161 참조.
[역주:47권70] 구근(仇近)
신라 文武王 때의 武將. 문무왕 2년(662) 1월에 문무왕이 金庾信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공격 중인 당나라 蘇定方에게 군량을 평양으로 보내줄 것을 명하였다. 군량을 싣고 獐塞에 이른 김유신은 바람과 눈이 몹시 차가워 사람과 말이 많이 얼어 죽었다. 당나라 군영과의 거리는 100여 리 떨어져 있었는데 더 전진할 수 없어 편지를 보내고자 하였으나 마땅한 사람을 찾지 못하였다. 그 때 步騎監 열기와 軍師 仇近 등 15명이 거의 이틀을 달려 蘇定方에게 명을 전달하였다. 답서를 가지고 다시 이틀을 걸려 되돌아왔다. 유신이 그 용기를 가상히 여겨 급찬 관등을 주었다. 그리고 열기, 구근은 ‘천하의 용사’라 하며 문무왕에게 청하여 沙湌의 관등을 주도록 했다. 그는 뒷날 김유신의 셋째아들인 元貞公을 따라 西原京의 述城을 쌓았는데, 원정공이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그가 일을 게을리 한다고 하여 곤장을 때렸다. 그러자 구근은 "대각간이 나를 무능하다고 하지 않고 國士로 대접하였는데 지금 뜬 소문을 듣고 나를 죄 주니 평생의 치욕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다.” 하였다. 원정이 이 말을 듣고 종신토록 부끄러워하고 후회하였다고 한다.
[역주:47권71] 원정(元貞)
신라 문무왕 때 대신. 金庾信의 셋째 아들. 海干(波珍湌)의 관등으로 西原述城의 축성책임자를 지냈다. 이때 고구려정벌 때 공이 많았던 仇近을 다른 사람의 말만 듣고, 일을 태만히 한다고 곤장을 쳤는데 이 일을 종신토록 부끄러워하고 후회하였다.


丕寧子 不知鄕邑族姓 眞德王元年丁未 百濟以大兵 來攻茂山·甘勿·桐岑等城 庾信率步騎一萬 拒之 百濟兵甚銳 苦戰不能克 士氣索而力憊 庾信知丕寧子有力戰深入之志 召謂曰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彫 今日之事 急矣 非子誰能奮勵出奇 以激衆心乎” 因與之飮酒 以示殷勤 丕寧子再拜云 “今於稠人廣衆之中 獨以事屬我 可謂知己矣 固當以死報之” 出謂奴合節曰 “吾今日上爲國家 下爲知己 死之 吾子擧眞 雖幼年有壯志 必欲與之俱死 若父子倂命 則家人其將疇依 汝其與擧眞 好收吾骸骨 歸以慰母心” 言畢 卽鞭馬橫槊  ※賊陣 格殺數人而死 擧眞望之欲去 合節請曰 “大人有言 令合節與阿郞還家 安慰夫人 今子負父命 ※母慈 可謂孝乎” 執馬轡不放 擧眞曰 “見父死而苟存 豈所謂孝子乎” 卽以劒擊折合節臂 奔入敵中戰死 合節曰 “私天崩矣 不死何爲” 亦交鋒而死 軍士見三人之死 感激爭進 所向挫鋒陷陣 大敗賊兵 斬首三千餘級 庾信收三屍 脫衣覆之 哭甚哀 大王聞之涕淚 以禮合葬於反知山 恩賞妻子九族尤渥


[교주:47권27] 突
原本 判讀不能. 誠庵本·三國史節要(卷9-5面)·鑄字本에 의거 보충.
[교주:47권28] 棄
原本·誠庵本 「弃」. 「棄」의 古字.




[역주:47권72] 비령자(丕寧子)
?∼647. 신라 진덕왕대의 용장. 진덕왕 원년(647년) 백제군이 茂山城, 甘勿城, 桐岑城 등 개령지방을 공격해오자 김유신은 1만 군사로써 대항하였으나 군의 사기가 떨어져 도저히 싸울 수 없었다. 이때 김유신은 비령자에게 사기 진작을 위해 힘쓰라고 하자 용감하게 싸워 전사하고 아들 거진도 따라 죽고 그의 종 합절까지도 죽었다. 이에 분격한 군사들은 용감히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비령자는 김유신이 화랑이었을 때의 낭도였던 것 같다.북한본에서는 ‘비령자’로 이재호본과 신호열본에서는 ‘비녕자’로 표기하였다. 이희승편의 《국어대사전》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비령자’로 표기하였으므로 이에 따랐다.
[역주:47권73] 무산성(茂山城)
현재의 전북 무주군 무풍면에 있었던 성. 이 곳은 신라시대에는 尙州 開寧郡의 영현인 茂豊縣이었고 본래의 명칭은 茂山縣이었다. 본서 권34 주석 145, 146참조.
[역주:47권74] 감물성(甘勿城)
현재의 경북 김천시 개령면에 있었던 城. 본서 권34 주석 137 참조.
[역주:47권75] 날씨가 … 늦게 낙엽짐[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
《論語》 子罕篇에 나오는 문구이다.
[역주:47권76] 거진(擧眞)
?∼647. 비령자의 아들. 아버지가 자기가 죽으면 아들이 함께 죽으려 할 것이라고 하여 그의 奴인 합절에게 죽지 않게 만류하여 어머니를 보살피게 하라고 권유하였으나 아버지가 죽는 것을 보고 합절이 만류하였으나 칼로 합절의 팔을 끊고 달려가 싸우다가 죽었다.
[역주:47권77] 합절(合節)
?∼647. 비령자의 奴로 비령자와 그 아들 거진이 죽자 함께 따라 싸우다가 죽었다. 국왕은 세 사람을 反知山에 합장으로 묻게 하였다.
[역주:47권78] 9족
친인척의 가까운 모든 사람이라는 뜻. 3종형제까지의 친족으로 본 견해도 있으나(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695쪽) 이는 조선시대적인 후대의 개념이다.



竹竹 大耶州人也 父郝 ※爲撰干 善德王時爲舍知 佐大耶城都 ※金品釋幢下 王十一年壬寅秋八月 百濟將軍允忠領兵 來攻其城 先是 都督品釋 見幕客舍知黔日之妻有色 奪之 黔日恨之 至是爲內應 燒其倉庫 故城中兇懼 恐不能固守 品釋之佐阿湌西川 一云 ※湌祗 ※ 登城謂允忠曰 “若將軍不殺我 願以城降” 允忠曰 “若如是 所不與公同好者 有如白日” 西川勸品釋及諸將士欲出城 竹竹止之曰 “百濟反覆之國 不可信也 而允忠之言 甘必誘我也 若出城 必爲賊之所虜 與其竄伏而求生 不若虎鬪而至死” 品釋不聽開門 士卒先出 百濟發伏兵 盡殺之 品釋將出 聞將士死 先殺妻子而自刎 竹竹收殘卒 閉城門自拒 舍知龍石謂竹竹曰 “今兵勢如此 必不得全 不若生降以圖後效” 答曰 “君言當矣 而吾父名我以竹竹者 使我歲寒不凋 可折而不可屈 豈可畏死而生降乎” 遂力戰 至城陷 與龍石同死 王聞之 哀傷 贈竹竹以級湌 龍石以大奈麻 賞其妻子 遷之王都


[교주:47권29] 熱
三國史節要(卷8-21面) 「勢」.
[교주:47권30] 督
三國史節要 「城主」.
[교주:47권31] 沙
原本 「汸」. 誠庵本·鑄字本에 의거 수정. 朝 「汸」, 燾 「汸(沙)」.
[교주:47권32] 彡
原本 「之」. 誠庵本에 의거 수정. 榮·朝·北·權·烈·燾·浩 「之」.




[역주:47권79] 죽죽(竹竹)
?∼642. 신라의 大耶州(경북 합천) 사람. 지방의 촌주세력인 撰干 郝熱의 아들. 선덕왕 때에 舍知가 되어 대야성 성주 김품석의 보좌를 맡았다. 성주 품석이 막객인 사지 검일의 아내를 겁탈하여 이에 원한을 품은 그가 백제군과 내통하여 창고가 불태워져 도저히 싸울 수 없었다. 품석이 항복하면 살려준다는 백제 장군의 말을 믿고 이에 따르려 하자 그는 出城을 반대하였다. 품석은 성문을 나가는 신라 군대가 백제의 복병에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고 자살하자 홀로 대야성을 사수하다가 비참하게 죽었다. 왕이 죽죽에게 級湌을 추증하고 그 처자를 王都로 옮겨 살게 하였다.
[역주:47권80] 찬간(撰干)
外位 11관등 중 제5관등으로서 중앙의 나마에 해당하는 위계이다.
[역주:47권81] 백제 장군 윤충이 군사를 거느리고
본서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2년(642)조에서는 백제 장군 允忠이 군사 1만명을 거느리고 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역주:47권82] 품석이 [이 말을] …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본서 권28 백제본기 義慈王 2년(642)조에는 品釋이 妻子와 함께 성을 나와 항복하자 백제 장군 允忠이 모두 죽여 그 머리를 잘라 王都(扶餘)에 전하였다고 기술되었다.
[역주:47권83] 성이 함락되자
이 전쟁의 결과 품석과 처자의 머리를 베어 수도로 보냈고 남녀 1천 명을 생포하여 서쪽의 주·현에 분거시켰다다고 본서 28 백제본기 의자왕 2년조에 기록하였다.



匹夫 沙梁人也 父尊臺阿湌  ※宗大王以百濟·高句麗·靺鞨 轉相親比爲脣齒 同謀侵奪 求忠勇材堪綏禦者 以匹夫爲七重城下縣令 其明年庚申秋七月 王與唐師滅百濟 於是 高句麗疾我 以冬十月 發兵來圍七重城 匹夫守且戰二十餘日 賊將見我士卒盡誠 鬪不內顧 謂不可猝拔 便欲引還 逆臣大奈麻比歃密遣人告賊 以城內食盡力窮 若攻之必降 賊遂復戰 匹夫知之 拔劒斬比歃首 投之城外 乃告軍士曰 “忠臣義士 死且不屈 勉哉努力 城之存亡 在此一戰” 乃奮拳一呼 病者皆起 爭先登 而士氣疲乏 死傷過半 賊乘風縱火 攻城突入 匹夫與上干本宿·謀支·美齊等 向賊對射 飛矢如雨 支體穿破 血流至踵 乃仆而死 大王聞之 哭甚痛 追贈級湌


[교주:47권33] 太
原本·誠庵本 「大」. 鑄字本에 의거 수정.




[역주:47권84] 필부(匹夫)
?∼660. 신라 왕경 사량인. 아버지는 아찬 尊臺. 태종대에 북변의 중요성이 커져 용맹한 사람을 구할 때에 천거되어 칠중성 관할의 현령이 되었다. 태종 무열왕 7년(660) 7월 당나라와 신라가 백제를 멸하자 이에 고구려는 10월에 칠중성을 공격하여 왔다. 필부가 20여 일이나 잘 지켜 고구려 군대가 퇴각하려고 할 때 比歃이란 사람이 고구려군과 내통하여 성내의 식량이 떨어짐을 알리자 고구려군이 다시 공격해왔다. 필부는 비삽의 머리를 쳐서 성밖으로 내던지고 끝까지 항전하다가 죽으니 왕은 그에게 급찬의 관등을 내려 주었다.
[역주:47권85] 칠중성(七重城)
현재의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에 있었던 城. 고구려의 칠중현이었다. 본서 권35 주석 97 참조.
[역주:47권86] 상간(上干)
신라 外位 11관등 중 제6관등으로 중앙의 제12관등인 大舍에 비견되는 外位.





 ※ 百濟人 仕爲達率 唐顯慶五年庚申 高宗以蘇定方爲神丘道大 ※管 率師濟海 與新羅伐百濟 階伯爲將軍 簡死士五千人拒之 曰 “以一國之人 當唐·羅之大兵 國之存亡 未可知也 恐吾妻孥 沒爲奴婢 與其生辱 不如死快” 遂盡殺之 至黃山之野 設三營 遇新羅兵將戰 誓衆曰 “昔句踐以五千人 破吳七十萬衆 今之日 宜各奮勵決勝 以報國恩” 遂鏖戰 無不以一當千 羅兵乃却 如是進退 至四合 力屈以死


[교주:47권34] 階
本書 卷5 太宗武烈王 7年條 및 卷28 義慈王 20年條 「堦」. 「階」와 「堦」는 相通.
[교주:47권35] 摠
原本·誠庵本 「愡」. 「摠」의 俗字.





[역주:47권87] 계백(階伯)
?∼660. 백제의 귀족 장군으로 백제의 최후를 지켰던 맹장. 백제본기와 신라본기에서는 ‘堦伯’으로 기록하고 있다. 관등은 달솔. 신라 김유신이 이끄는 5만 군대가 탄현을 넘어오고 당나라 소정방의 군대가 13만 군대를 동원하여 백강어구로 진입할 때에 그는 5천명의 결사대로 황산벌에서 신라 군사와 싸웠다. 싸움에 나가기 전에 처자들이 노비로 전락할 것을 알고 죽이고 나갔다. 황산벌에서 네 차례의 전투에서 신라의 군대의 전진을 막아 신라군이 전의를 상실하였다. 16세의 어린 관창이 홀로 달려오자 잡아 투구를 벗겨보니 미모의 소년이므로 돌려 보냈다. 관창이 다시 달려와 도전하자 계백은 목을 베어 말에 실어 보냈다. 그 결과 신라군이 분격하여 황산벌 전투에서 패배하고 사망하였다. 그의 묘소는 현재 충남 논산군 부적면 충곡리에 전하고 있다.
[역주:47권88] 구천(句踐)
中國 春秋時代 末期 越나라의 王. 아버지 允常이 吳王 闔廬에게 패배하자 구천이 보복을 하였고 그 아들 夫差에게 또 패배하였다. 10년의 전쟁 준비를 하여 오나라를 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