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書/中庸

中庸章句 序

柳川 2020. 1. 5. 23:42

中庸章句 序

 

中庸何為而作也?子思子憂道學之失其傳而作也。蓋自上古聖神繼天立極,而道統之傳有自來矣。其見於經,則「允執厥中」者,堯之所以授舜也;「人心惟危,道心惟微,惟精惟一,允執厥中」者,舜之所以授禹也。堯之一言,至矣,盡矣!而舜復益之以三言者,則所以明夫堯之一言,必如是而後可庶幾也。

  

蓋嘗論之:心之虛靈知覺,一而已矣,而以為有人心、道心之異者,則以其或生於形氣之私,或原於性命之正,而所以為知覺者不同,是以或危殆而不安,或微妙而難見耳。然人莫不有是形,故雖上智不能無人心,亦莫不有是性,故雖下愚不能無道心。二者雜於方寸之間,而不知所以治之,則危者愈危,微者愈微,而天理之公卒無以勝夫人欲之私矣。精則察夫二者之間而不雜也,一則守其本心之正而不離也。從事於斯,無少閒斷,必使道心常為一身之主,而人心每聽命焉,則危者安、微者著,而動靜雲為自無過不及之差矣。

  

夫堯、舜、禹,天下之大聖也。以天下相傳,天下之大事也。以天下之大聖,行天下之大事,而其授受之際,丁寧告戒,不過如此。則天下之理,豈有以加於此哉?自是以來,聖聖相承:若成湯、文、武之為君,皋陶、伊、傅、周、召之為臣,既皆以此而接夫道統之傳,若吾夫子,則雖不得其位,而所以繼往聖、開來學,其功反有賢於堯舜者。然當是時,見而知之者,惟顏氏、曾氏之傳得其宗。及曾氏之再傳,而復得夫子之孫子思,則去聖遠而異端起矣。子思懼夫愈久而愈失其真也,於是推本堯舜以來相傳之意,質以平日所聞父師之言,更互演繹,作為此書,以詔後之學者。蓋其憂之也深,故其言之也切;其慮之也遠,故其說之也詳。其曰「天命率性」,則道心之謂也;其曰「擇善固執」,則精一之謂也;其曰「君子時中」,則執中之謂也。世之相後,千有餘年,而其言之不異,如合符節。歷選前聖之書,所以提挈綱維、開示蘊奧,未有若是之明且盡者也。自是而又再傳以得孟氏,為能推明是書,以承先聖之統,及其沒而遂失其傳焉。則吾道之所寄不越乎言語文字之閒,而異端之說日新月盛,以至於老佛之徒出,則彌近理而大亂真矣。然而尚幸此書之不泯,故程夫子兄弟者出,得有所考,以續夫千載不傳之緒;得有所據,以斥夫二家似是之非。蓋子思之功於是為大,而微程夫子,則亦莫能因其語而得其心也。惜乎!其所以為說者不傳,而凡石氏之所輯錄,僅出於其門人之所記,是以大義雖明,而微言未析。至其門人所自為說,則雖頗詳盡而多所發明,然倍其師說而淫於老佛者,亦有之矣。

  

熹自蚤歲即嘗受讀而竊疑之,沈潛反覆,蓋亦有年,一旦恍然似有以得其要領者,然後乃敢會眾說而折其中,既為定著章句一篇,以俟後之君子。而一二同志復取石氏書,刪其繁亂,名以輯略,且記所嘗論辯取捨之意,別為或問,以附其後。然後此書之旨,支分節解、脈絡貫通、詳略相因、鉅細畢舉,而凡諸說之同異得失,亦得以曲暢旁通,而各極其趣。雖於道統之傳,不敢妄議,然初學之士,或有取焉,則亦庶乎行遠升高之一助云爾。

  

淳熙己酉春三月戊申,新安朱熹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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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庸何爲而作也?

 

중용은 무슨 까닭으로 지었습니까?

 

 

[해설]

 

중용장구서는 자사가 중용을 지은 뜻에 대하여 주자가 스스로 질문을 던지며 답해 나가는 글이다. 자사(기원전 483년~기원전 402년)는 춘추시대 때의 학자로 공자의 제자인 증자의 제자이자 공자의 손자이다. 자사는 字이며 이름은 급(伋)이다.

주자(1130~1200)는 남송시대의 학자로 이름은 희(憙), 호는 회암(晦庵)으로 정자 형제의 학문을 계승하고, 공자의 학문을 더욱 발전시켜 ‘주자학’이라는 一家를 이루었으며 조선시대의 정치와 학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경전에 대해 꼼꼼한 해설을 달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의 해설을 통하지 않고는 경전에 대한 이해를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정통 유학의 큰 스승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일반인들에게는 ‘少年易老學難成 一寸光陰不可輕’이라고 시작되는 그의 권학문(勸學文)이 잘 알려져 있다.

 

 

 

子思子憂道學之失其傳而作也。

 

자사선생이 도학을 전하지 못할까 근심하여 지었다. 

 

 

[해설]

 

자사라는 이름 뒤에 붙인 子는 孔子, 孟子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선생이란 뜻으로 붙인 것이다. 즉 일정 단계의 공부를 마치고 다시 一家를 이룰 정도의 학문이 있는 큰 스승을 뜻한다.

 

유학은 그 시대와 학파에 따라 각기 다른 특성을 가지고 발달하였다. 이를 테면, 공자(孔子)와 맹자(孟子) 그리고 순자(荀子)를 중심으로 한 원초유학(原初儒學)은 한대(漢代)의 훈고학(訓詁學), 당대(唐代)의 문장 위주의 사장지학(詞章之學), 송대의 철학사상을 기본으로 한 정주성리학(程朱性理學), 명대의 심학(心學)으로 발달한 양명학(陽明學), 그리고 청대에 와서 고증학(考證學)과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 등 시대에 따라 특징을 달리해 발전하였다.

그 가운데 도학은 송대에 와서 크게 일어난 정주성리학의 별칭이니, 북송의 주돈이(周敦頤)·장재(張載)·소옹(邵雍)·정호(程顥)·정이(程頤) 등 이른바 오군자(五君子)에 의해 창도, 전개되고, 남송의 주희(朱熹)에 의하여 집대성된 송학(宋學)을 말한다.

그러므로 선진(先秦)이나 한·당 시대의 유학은 도학이라 하지 않고, 송대에 이르러 새롭게 재구성된 유학을 일컬어 비로소 도학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그래서 도학을 일명 송학이라고도 하며, 그 대표적 완성자인 주희의 이름을 따 주자학이라고도 한다. 도학은 지난 8세기에 걸쳐 중국뿐 아니라 아시아 여러 나라, 특히 고려 말에 도입된 이래, 조선의 사상과 문화의 초석으로 기능했다. 

<다음백과에서 인용>


 

 

蓋自上古, 聖神繼天立極, 而道統之傳, 有自來矣.

 

대개 상고로부터 성신(성인으로서 신비로운 분이라는 뜻)이 하늘을 이어 나라를 세우고 왕위에 등극하였던 바,  도의 계통이 전해 진 것이 이로부터 왔다.

 

 

[해설]

 

오랜 옛날부터 성인이라 일컫는 복희, 신농, 황제, 요, 순, 우, 탕, 문왕, 무왕은 하늘의 명을 받아(繼天) 나라를 세우고 임금으로 등극(登極)하셨으니(立極) 그분들로 도의 계통이 이어져 왔음을 설명하였다. 비록 왕위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무왕을 도와 선정을 베푼 주공과 주역의 도를 완성한 공자까지를 성인이라 일컫는다.

 

 

 

其見於經, 則允執厥中者 堯之所以授舜也,

 

그것이 서경에 나타난 바, 미덥게 그 중을 잡아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전수하였으며,

 

 

[해설]

 

요임금이 나이 70이 되어 정신이 혼미해 정치를 하기 어려우니 신하들에게 뒤를 이를 사람을 찾으라 하였다. 이에 신하들이 요임금의 아들인 단주(丹朱)를 추천하였다. 그러자 요임금은 ‘내 아들은 모질고 사나워서 아니된다’라고 하며 다른 이를 찾도록 하였다. 이때 추천된 이가 순(舜)이었다. 신하들이 이구동성으로 순을 추천하자 요임금은 두 딸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을 시집보내면서까지 순을 두루 관찰하고 시험해 본 뒤에야 비로소 제위를 선양하였다. 그때 전한 말이 윤집궐중(允執厥中)이다. 즉 요임금이 순에게 윤집궐중의 자세 즉 중용지도로 정치할 것을 전한 것이다.

 

 

 

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者, 舜之所以授禹也,

 

사람의 마음은 오직 위태하고 도의 마음은 오직 미미하니, 오로지 정미롭고 오로지 한결같이 하여 미덥게 그 중을 잡는다는 것을 순임금이 우임금에게 전수한 바이며,

 

 

[해설]

 

순임금 또한 요임금처럼 왕위를 우임금에게 선양하였는데 이때 순임금은 요임금으로부터 전해받은 윤집궐중에다 인심유위(人心惟危) 도심유미(道心惟微) 유정유일(惟精惟一)을 덧붙여 하나라를 세운 우임금에게 전해 중부(中孚)의 뜻을 더욱 정미롭게 하였다.

 

 

 

堯之一言 至矣(而)盡矣, 而舜復益之以三言者,  則所以明夫堯之一言, 必如是而後, 可庶幾也。

 

요임금의 윤집궐중이라는 한마디 말이 한 말씀(윤집궐중)이 지극하고 극진하였으나,  순임금이 다시 세 가지 말(인심유위 도심유미 유정유일)로 더한 것은, 무릇 요임금의 한 마디 말에 반드시 이와같이 더한 후에야 거의 본뜻에 가까워질 수 있음을 밝힌 것이다.

 

 

[해설]

 

요임금의 윤집궐중이라는 한 마디에 순임금의 세 마디 말(인심유위 도심유미 유정유일)이 덧붙여져 더욱 그 뜻이 밝아졌다. 여기서 ‘무릇 부(夫)’ 이하의 글은 모두 明의 보어로 해석해야 한다.

 

 

 

蓋嘗論之, 心之虛靈知覺  一而已矣, 而以爲有人心道心之異者, 則以其或生於形氣之私, 或原於性命之正, 而所以爲知覺者不同, 是以或危殆而不安, 或微妙而難見耳。

 

본격적으로 그것을 논해 본다면, 마음의 허령과 지각이 하나일 뿐이지만,  사람의 마음과 도의 마음에 다른 점이 있다고 하는 것은 혹 형기(形氣)의 사사로움에서 나오기도 하고, 혹 성명의 바른데서 근원하기도 하는데, 알아서 깨닫는 것이 같지 않기 때문에 이로써 위태롭고 불안하기도 하고 혹 미묘해서 보기 어려울 뿐이다.

 

 

蓋嘗論之 :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시작하겠다”는 표현인데, 嘗試論之도 같은 의미로 잘 쓰인다.

虛靈 ; 마음이 잡념없이 신묘하게 움직일 수 있는 體를 뜻함.   知覺 :  알소 깨닳을 수 있는 마음의 用을 뜻함.

形氣 : 겉으로 드러나는 사물의 모양이나 상태와  기운

 

 

[해설]

 

대개가 허령이니 지각이라는 것은 모두 태극에서 나와서 하나이겠지만 각각의 몸뚱들이 있으므로 다르다. 형기지사(形氣之私)는 형체와 기질의 사사로움으로 인심(人心)을 가리키는 말이고, 원래 바르게 타고난 성명지정(性命之正)은 근원적인 것으로 도심(道心)을 말한다. 그러나 근원적인 도심은 사사로운 인심에 가려 보기가 쉽지 않다.

 

 

 

然人莫不有是形。 故 雖上智, 不能無人心, 亦莫不有是性。 故 雖下愚 不能無道心,  二者雜於方寸之間, 而不知所以治之, 則危者愈危, 微者愈微, 而天理之公, 卒無以勝夫人欲之私矣。

 

그러나 사람이 이 형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비록 성현(聖賢)이라 할지라도 사람의 마음이 없을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이 성품이 없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랫 사람이 어리석다 할지라도 도심이 없을 수 없으며, 이 두 가지는 방촌지간에 섞여 있어 다스려야 할 바를 알지 못하니 위험한 것은 더욱 위험해지고 미미한 것은 더욱 미미해져서, 하늘의 이치의 공변됨이 마침내 사람의 욕심의 사사로움을 이길 수 없게 되는 것이다.

 

 

方寸 : 속마음을 이르는 말. 사람의 마음은 가슴속의 한 치 사방 넓이 속에 깃들어 있는 것이라는 뜻이다.

 

 

[해설]

 

성현도 형체를 타고 났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이 있고 우매한 사람이라도 성품을 타고 났기에 도심이 있다. 그러면 성인이냐 우매한 사람이냐 하는 것은 한 치의 차밖에 되지 않는다. 인심을 잘 다스리면 성인이 될 수 있고, 도심을 타고 났더라도 잘 다스리지 못하면 우매해진다. 천리의 공변된 가운데서 사람이 나왔음에도 사람들 스스로가 인욕의 사사로움을 이기지 못하면 도심이 미미해져 위태로워진다.

 

 

 

精則察夫二者之間而不雜也,  一則守其本心之正而不離也。從事於斯, 無小間斷, 必使道心常爲一身之主, 而人心每聽命焉, 則危者安, 微者著, 而動靜云爲, 自無過不及之差矣。

 

정미(精微)하다면 둘 사이를 잘 살펴 섞이지 않게 할 것이고,  한결같다면 본심의 바름을 지켜 떠나지 않게 할 것이다. 이를 좇아 일을 함에 잠시라도 중단함이 없어,  반드시 도심이 항상 일신의 主가 되게 하여, 사람의 마음이 명을 들을 때마다 위태로운 것은 안정되고, 미미한 것은 드러나, 일상의 동정과 언행이 지나치거나 모자라는 차이가 저절로 없어지게 될 것이다.

 

 

[해설]

 

정일(精一) 곧 유정유일(惟靜惟一)을 가지고 설명한 글로, 인심과 도심을 잘 닦아야 도심 속에 인심이 함부로 파고 들지 못함을 설명하고 있다. 천명에 항상 귀 기울이면 인심이 도심을 넘지 못해 편안해지고, 도심은 더욱 확연해져 일동일정 하나하나와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도심으로써 움직여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夫堯舜禹天下之大聖也, 以天下相傳天下之大事也。以天下之大聖, 行天下之大事, 而其授受之際,  丁寧告戒不過如此, 則天下之理, 豈有以加於此哉。自是以來聖聖相承, 若成湯文武之爲君, 皐陶伊傅周召之爲臣, 旣皆以此而接夫道統之傳, 若吾夫子, 則雖不得其位, 而所以繼往聖開來學, 其功反有賢於堯舜者。

 

요임금 순임금 우임금은 천하의 대성인이며, 천하를 서로 전하는 것은 천하의 큰 일이었다. 천하의 대성인으로서 천하의 큰 일을 행하면서, 천하를 주고 받는 즈음에 분명히 알리고 경계함에 이와 같이 지나침이 없었으니 천하의 이치가 어찌 이에 더해야 할 것이 있겠는가.

이 때부터 성인과 성인이 서로 계승하여, 탕왕과 문왕, 무왕이 임금이 되고, 고요, 이윤과 부열, 주공과 소공같은 자들이 신하가 되어, 모두 이로써 도의 정통을 전하였는데, 우리 선생님인 공자는 천자의 지위는 얻지 못하였으나 옛 성인의 도를 계승하고 다가올 후학들의 길을 열어준 것은 그 공이 오히려 요순보다 낫다.

 

  

[해설]

 

요임금과 순임금과 하나라를 세운 우임금으로 이어지는 윤집궐중과 유정유일의 도로써 정치를 이어간 인군으로는 은나라를 세운 탕 임금(흔히 成湯이라고도 부른다.)과 주나라를 세운 문왕과 무왕이 있으며, 신하로는 순임금을 도와 공평무사한 법치를 실현한 고요와 은나라 탕임금 때의 신하인 이윤(伊尹)과 고종의 신하인 부열(傅說), 그리고 주나라를 세운 무왕의 아우인 주공과 소공이라는 성인들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왕의 자리에 오르지 못해 정치를 하지 않았지만 앞서간 성인들을 이으시고 뒤에 올 후학들을 위해 크게 학문을 연(繼往聖開來學) 이는 공자이시다. 계왕성개래학(繼往聖開來學)을 한 공자야말로 오히려 요순보다 나음을 주자는 강조하고 있다.

 

 

 

然當是時, 見而知之者, 惟顔氏曾氏之傳, 得其宗, 及曾氏之再傳, 而復得夫子之孫子思, 則去聖遠而異端起矣。

 

그러나 당시 보고 아는 자 가운데  오직 안자(顔淵)와 증자(曾參)가 전한 것이 도의 근본이 되었는데, 증자가 다시 전함에 이르러 다시 공자의 손자인 자사를 얻었으나, 성인과의 시대가 멀어져 이단이 일어나게 되었다.

 

 

[해설]

 

자사가 중용을 왜 지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견이지지(見而知之)란 선생의 하는 일동일정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배우는 것을 말하는데 이렇게 한 공자의 3천 제자 중 72인을 신통귀재(神通鬼才)라 하고 그중 수제자는 안자와 증자가 그 종을 얻었다. 하지만 안자(顔回)는 32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돌아가시어 스승인 공자를 매우 애통하게 했다. 그리하여 증자가 공자가 돌아가신 뒤 그 도를 전한 증자를 일컬어 재전제자(再傳弟子)라 한다. 공자가 증자를 얻듯이 증자 역시 자사를 얻었다. 하지만 공자가 돌아가시고 오랜 세월이 흐르자 여기저기서 이단이 일어나기 시작했음을 말하고 있다.

 

 

 

子思懼夫兪久而愈失其眞也, 於是推本堯舜以來相傳之意, 質以平日所聞父師之言, 更互演繹, 作爲此書, 以詔後之學者, 蓋其憂之也深。 故其言之也切, 其慮之也遠。 故其說之也詳, 其曰天命率性, 則道心之謂也, 其曰擇善固執, 則精一之謂也, 其曰君子時中, 則執中之謂也。

 

자사가 오래될수록 더욱 그 참된 뜻을 잃을까 두려워하였는데, 이에 요순이래 전해져 내려온 뜻을 근본으로 받들고, 평소에 들은 부친과 스승의 말을 바탕으로 삼아 고치고 이어서 이 글을 지어 후학을 가르쳤으니, 아마 근심이 깊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말이 간절하고 사려가 멀리까지 미쳤다. 그러므로 설명이 상세하여, '하늘이 명했다.', '도를 따른다.'고 한 것은 도심을 말한 것이며, '좋은 것을 가려 굳게 지킨다.' 고 한 것은 정밀하게 살펴 한결같이 지킨다는 것을 말하고, '군자는 때에 맞게 처신한다.' 고 한 것은 중도를 지킨다는 것을 말한다.

  

 

[해설]

 

자사가 세월이 오래가면 오래갈수록 이단은 더욱 많아지고 도의 참됨을 잃을까봐 중용을 지었는데 요임금과 순임금을 근본으로 하여 평상시 아버지(공리, 孔鯉)와 스승에게 들은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넓게 펼치고 서로 이어(演繹) 후학들에게 일깨워주었다. 그 중요한 내용이 천명솔성(天命率性)과 택선고집(擇善固執), 군자시중(君子時中)임을 주자는 들고 있다.

 

 

 

世之相後千有餘年, 而其言之不異, 如合符節。 歷選前聖之書, 所以提挈綱維, 開示蘊奧, 未有若是之明且盡者也。

 

세대의 이어짐이 천여년이 지났으나 그 말이 다르지 않고 부절을 맞춘 것 같이 딱 맞았다.  옛 성인의 글을 일일이 가려서 강령을 잡아  깊고 오묘한 것을 보여주니, 이와 같이 분명하고 극진한 것이 없다.

 

 

[해설]

 

세대란 늘 뒤로 이어지므로 세지상후(世之相後)로 표현했다. 공자(기원전 552년~기원전 479) 이후 주자(1130~1200)까지는 천여 년이 넘었음에도 그 말씀은 그때나 지금이나(주자가 살던 시대) 병가(兵家)의 부절처럼 이치에 잘 맞음(如合符節)을 주자는 확인하고 있다. 그리하여 주자가 앞선 성인들을 글을 가려 뽑아서 보건데 모두가 사람들이 사는 벼리를 끌어당겨서 그 속에 깊이 쌓인 도덕적 진리를 보여주고 있으니 이 중용보다 더한 글이 어디 있겠는가 하고 감탄하고 있다.

 


 

自是而又再傳以得孟氏,  爲能推明是書, 以承先聖之統, 及其沒而遂失其傳焉, 則吾道之所寄, 不越乎言語文字之間, 而異端之說日新月盛, 以至於老佛之道出, 則彌近理而大亂眞矣。

 

이로부터 또 다시 전해져 맹자가 나타나 이 글을 밝히고 선대 성인의 법통을 이었는데, 그가 죽자 결국 그 전한 것을 잃었으니, 우리의 도가 기댈 곳은 언어와 문자의 사이를 넘지 못하고, 이단의 말들이 날로 새롭고 달이 갈수록 성해져 노자와 불교의 도가 나오기에 이르러서는 더욱 이치가 가까워져 참 뜻을 크게 어지럽혔다.

 

 

[해설]

 

비록 견이지지와 재전제자는 아니지만 자사가 맹자를 얻어 앞선 성인들의 도를 이었지만 돌아가시고 난 뒤에는 그 도가 전해지지 못했다. 자사의 문하생에게 배웠다는 맹자의 출생년도는 정확하지 않으나 전국시대 때의 인물로 공자의 도를 충실히 계승하여 『맹자』를 썼다. 하지만 맹자 사후 글을 배워 유식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글 잘 짓고 말은 잘하지만 실천에 옮기지 않고 이단만이 날로 성해짐을 설명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이단으로 노장사상과 불교를 들고 있는데 현실의 인륜도덕은 없어지고 사이비만이 판을 치고 있음을 주자는 한탄하고 있다.

 

 

 

然而尙幸此書之不泯。 故 程夫子兄弟者出, 得有所考, 以續夫千載不傳之緖, 得有所據, 以斥夫二家似是之非, 蓋子思之功,  於是爲大。 而微程夫子, 則亦莫能因其語而得其心也。

 

그러나 아직 다행히도 이 글은 없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정이, 정호 두 형제분이 나와  이 글을 상고하여 천년동안 전해지지 않은 실마리를 잇고 이에 근거하여 노자, 부처 양가의 옳은 것 같으면서도 그릇된 설을 배척하였으니, 모두 자사의 공이 이에 컸다.

그러나 정선생의 형제가 아니었다면 또한 그 말로 인하여 성인들의 마음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해설]

 

정부자(程夫子)라 함은 북송시대를 살았던 정이(程頤, 1033~1107, 伊川先生이라 불림)와 그의 형인 정호(程顥, 1032~1085, 明道先生이라고도 불림)를 높여 일컫는 말로 흔히 이정(二程)이라 부른다. 주돈이(周敦頤 : 호는 濂溪)의 제자로 정부자의 학설은 주자에게 이어져 주자학을 정주학(程朱學)이라고도 한다. 자사에게로 이어진 성인의 도가 천여년이 지난 뒤에야 정부자 형제분에게로 다시 이어짐을 밝혔다.

 

 

 

惜乎 !  其所以爲說者不傳, 而凡石氏之所輯錄, 僅出於其門人之所記, 是以大義雖明, 而微言未析, 至其門人之所自爲說, 則雖頗詳盡而多所發明,  然倍其師說, 而淫於老佛者亦有之矣。

 

애석하구나!  정선생의 말이 전하지 못하고, 석씨가 기록을 모은 것이 가까스로 그 문인의 기록에서 나왔으니, 이로써 큰 뜻은 밝혀졌다 해도 미묘한 말은 분석되지 못하였고, 그 문인들이 스스로 말한 바에 이르러서는 꽤 상세하고 밝혀진 바도 많지만 그러나 그 스승의 말을 거스르고, 노자와 불가의 설에 빠진 자도 있었다.

 

 

[해설]

 

주자는 정부자 두 형제분보다 백여년 뒤의 사람으로 그 사이 정씨 형제의 도가 석씨(이름은 돈으로, 정확한 이력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진 바가 없다)에게 전해졌지만 그 문인들이 스승의 말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도가와 불가의 가르침과 서로 뒤섞여 전해짐을 한탄하고 있다.

 

 

 

熹自蚤歲,  卽嘗受讀而竊疑之, 沈潛反復, 蓋亦有年, 一旦恍然, 似有得其要領者。然後乃敢會衆說而折其衷, 旣爲定著章句一篇, 以俟後之君子。而一二同志, 復取石氏書, 刪其繁亂, 名以輯略, 且記所嘗論辨取舍之意, 別爲或問, 以附其後。 然後此書之旨, 支分節解, 脉絡貫通, 詳略相因, 巨細畢擧。而凡諸說之同異得失,  亦得以曲暢旁通, 而各極其趣。雖於道統之傳, 不敢妄議,  然初學之士, 或有取焉, 則亦庶乎行遠升高之一助云爾。

 

 

내가 어렸을 때부터 이 글을 받아 읽고 내심 그 내용에 의문이 있어 깊이 생각하기를 반복하여 몇 해가 지났는데 하루 아침에 황홀해져 그 요지와 강령을 터득하게 된 것 같았다.

그 후, 감히 많은 사람의 의견을 모으고 절충하여 장구 한편을 지어 후세의 군자를 기다린다. 그리고 몇 동지들과 또 석씨의 글을 취하여 번거롭고 어지러운 내용을 가다듬어 그 이름을 집략(輯略)이라 하고, 또 토론하고 변론했던 것을 취사하고 그 뜻을 기록하여  별도로 혹문(或問)을 지어 말미에 붙였다. 그런 후에 이 책의 뜻이 가지가 분명해지고 마디가 풀려 맥락이 관통하며, 자세함과 간략함이 보완되고 크고 작은 것들이 모두 갖추어졌다.  모든 학설의 이동(異同)과 득실이 또한 분명해지고 널리 통할 수 있게 되어 각각 그 취지에 이르게 되었다.  도의 정통을 전함에 감히 함부로 논의할 수는 없지만 처음 배우는 선비가 혹 취할 바가 있다면 또한 멀리 가고 높이 오르는 학문의 길에 작은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刪 : 깎을 산. 깍다. 삭제함. 정하다. 골라잡음.      脉 : = 脈.       曲暢旁通 : 말이나 글이 조리가 분명하고 널리 통함

 

 

[해설]

 

주자가 장구본을 짓고 집략과 혹문을 쓴 뜻을 상세히 서술해 놓은 글이다.

 

 

 

淳熙 己酉 春三月 戊申. 新安 朱熹序。

 

순희 기유년 춘삼월 무신일에 신안 주희는 서하노라.

 

 

[해설]

 

순희는 남송 효종(孝宗)의 연호이며 신안은 주자가 살던 지명이다. 기유년은 주자가 60세 되던 해이니까 1189년 3월 무신일 즉 3월 18일에 서문을 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