述而。第 6章. 志於道, ~ 第10章. 用之則行,
第 6章
子曰, 「志於道, 據於德, 依於仁, 游於藝。」
공자가 말씀하셨다.
"도에 뜻을 두고, 덕을 지키며, 인에서 떠나지 않고, 예에 노닌다."
○志者心之所之之謂, 道則人倫日用之間, 所當行者 是也. 知此而心必之焉, 則所適者, 正而無他歧之惑矣.
○據者 執守之意, 德則行道而有得於心者也. 得之於心而守之不失, 則終始惟一 而有日新之功矣.
○依者 不違之謂, 仁則私欲盡去, 而心德之全也. 工夫至此 而無終食之違, 則存養之熟, 無適而非天理之流行矣.
○지라는 것은 마음의 가는 바를 이름이오, 도는 인륜의 날로 쓰이는 사이에 마땅히 행하는 바가 이것이라. 이것을 알고 마음이 반드시 갈 것 같으면 곧 가는 바가 바루어지고 다른 갈림길의 혹됨이 없으리라.
○거라는 것은 지킴을 잡는 뜻이고, 덕은 도를 행하여 마음에 얻음이 있음이라. 마음에 얻어지고 지키고 잃지 아니하면 끝이나 처음이나 오직 한결같아 날로 새로워지는 공이 있음이라.
○의라는 것은 어기지 않음을 이름이오, 인은 사욕이 다 제거되어 마음의 덕이 온전함이라. 공부가 이에 이르면 밥을 먹는 사이라도 어김이 없으면 곧 존양(존하고 기름)함이 익혀져(성숙해져) 어디를 가든지 천리의 유행이 아님이 없느니라.
○游者 玩物適情之謂, 藝則禮樂之文, 射御書數之法, 皆至理所寓而日用之不可闕者也. 朝夕游焉, 以博其義理之趣, 則應務有餘而心亦無所放矣.
○此章 言人之爲學 當如是也. 蓋學莫先於立志, 志道則心存於正而不他, 據德則道得於心而不失, 依仁則德性常用而物欲不行, 游藝則小物不遺而動息有養, 學者於此 有以不失其先後之序, 輕重之倫焉, 則本末兼該, 內外交養, 日用之間 無少間隙而涵泳從容, 忽不自知其入於聖賢之域矣.
○유라는 것은 물건을 완미하고 실정에 맞춤을 이름이오, 예는 예악의 문과 활쏘고, 말타고, 글쓰고 수놓는 방법이니, 다 지극한 이치가 붙은 것이고 날로 씀에 가히 빼놓지 못하는 것이라. 아침 저녁으로 놀아서(遊觀하여) 써 그 의리의 취미를 넓히면 응하는데 힘쓰고 여유가 있게 되어 마음이 또한 방종하지 않느니라.
○이 장은 사람의 학문함이 마땅히 이와 같이 하여야 함을 말씀하심이라. 대개 학문은 뜻을 세우는 것보다 먼저할 것이 없으니, 도에 뜻을 두면 마음이 바른 데에 존해져 달리함이 없고 덕에 웅거한다면 도가 마음에 얻어져 잃지 않게 되고, 인에 의지한다면 덕의 성품이 항상 쓰여져 물욕이 행하지 못할 것이고, 예술에 논다면 작은 물건이라도 버리지 않고 동할 때나 쉴 때나 길러짐이 있으니, 배우는 자가 이에 써 그 선후의 차례와 경중의 윤리를 잃지 아니하면 본말이 겸해서 해당하고 내외가 사귀어 길러져 날로 쓰는 사이에 조금도 틈이 없어서 무젖어 조용해져 홀연히 스스로 그 성현의 경지에 들어감을 아지 못하느니라.
第 7章
子曰, 「自行束修以上, 吾未嘗無誨焉。」
공자가 말씀하셨다.
"스스로 한 다발의 육포라도 가지고 와서 예를 갖추면, 나는 누구든지 가르쳐주지 않은 적이 없었다."
[본문해설]
공자가 돈을 벌려거나 다른 욕심으로 남을 가르친 것이 아니고, 교육을 받을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성의는 가지고 와서 시작하여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곧 육포 한 속(束修, 육포 10장)을 최하로 잡고 그 이상을 가져오는 사람을 일찍이 가르치지 않은 적이 없음을 말하고 있다. 주역 산수몽(山水蒙)에서도 ‘匪我 求童蒙, 童蒙 求我.’, 곧 내가 동몽을 구함이 아니라, 동몽이 나를 구한다고 하였다.
○修 脯也. 十脡 爲束. 古者相見, 必執贄以爲禮, 束修 其至薄者. 蓋人之有生, 同具此理. 故 聖人之於人, 無不欲其入於善, 但不知來學, 則無往敎之禮. 故 苟以禮來 則無不有以敎之也.
○수는 육포이니 열 장이 한 묶음이라. 옛 적에 서로 볼 적에 반드시 폐백을 가지고서 써 예를 삼았으니 속수는 그 지극히 박함이라. 대개 사람이 살아감에 있어 한가지로 이러한 이치를 갖추었느니라. 그러므로 성인이 사람에게 그 선에 들어가게 하고자 아님이 없으되 다만 와서 배울 줄을 아지 못하면 가서 가르치는 예는 없느니라. 그러므로 진실로 예로써 오면 써 가르치지 아니함이 없느니라.
修 : = 脩. 脡 : 포 정, 포. 곧은 포. 희생으로 쓰는 고기의 등줄기 중앙부의 살을 말함. 곧다. 똑바름.
☞ 서진(西晉)시대의 문신ㆍ학자인 魯褒가 쓴 <錢神論>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公子曰, 「詩不雲乎? 幣帛筐篚, 以將其厚意, 然後忠臣嘉賓, 得盡其心。《禮》不雲乎? 贄玉帛禽鳥, 女贄榛栗棗修。」
사공공자가 말했다. "시에 이르기를, 예물바구니로써 후의를 베풀어야 충신과 귀빈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 하지 않았습니까? 또, 예기에 의하면 남자는 예물로 옥과 비단, 짐승과 새를, 그리고 여자는 귤과 밤 대추 육포(脩)를 예물로 삼는다 하지 않았습니까?"
여기에서 詩라 함은 詩經/小雅/鹿鳴之什/鹿鳴의 毛詩序에 나옴. "鹿鳴 燕群臣嘉賓也. 旣飮食之, 又實幣帛筐篚, 以將其厚意, 然後忠臣嘉賓 得盡其心矣. "
第 8章
子曰, 「不憤不啓, 不悱不發, 擧一隅不以三隅反, 則不復也。」
공자가 말씀하셨다.
“나는 배우는 자가 스스로 알려고 분발하지 않으면 열어주지 않았고, 표현하려 해도 잘 안 되어 답답해 하지 않으면 터주지 않았다. 한 모서리를 제시하였는데 배우는 자가 그것을 가지고 나머지 세 모서리를 반증하지 못하면 다시 가르쳐 주지 않았다.”
悱 : 표현 못할 비. 표현하지 못하다. 알면서도 표현하지 못함. 슬프다. 슬퍼함.
○憤者 心求通而未得之意, 悱者 口欲言而未能之貌. 啓 謂開其意, 發 謂達其辭. 物之有四隅者, 擧一 可知其三. 反者 還以相證之義. 復 再告也. 上章 已言聖人誨人不倦之意, 因幷記此, 欲學者 勉於用力, 以爲受敎之地也.
○程子曰, 憤悱 誠意之見於色辭者也, 待其誠至而後 告之. 旣告之 又必待其自得, 乃復告爾. 又曰不待憤悱而發, 則知之不能堅固, 待其憤悱而後 發則沛然矣.
○분이라는 것은 마음이 통함을 구하는데도 얻지 못한 뜻이고, 비라는 것은 입으로 말을 하고자 하는데도 능치 못한 모양이라(말이 잘되지 않아 애태우는 모양이라). 계는 그 뜻을 열어줌을 이름이오, 발은 그 말을 통하도록 함을 이름이라. 물건은 네 귀퉁이가 있으니 하나를 듦에 그 셋을 앎이라. 반이라는 것은 돌이켜서 써 서로 증명하는 뜻이라. 부는 두 번 가르침이라. 윗장에 이미 성인이 사람을 가르침에 게을리 아니한다는 뜻을 말하고, 아울러 인하여 이를 기록하여(不憤不啓, 不悱不發, 擧一隅不以三隅反則不復也) 배우고자 하는 자로 힘을 쓰게 하여서 써 가르침을 받는 땅을 삼느니라.
○정자 가라사대 분비는 성의가 얼굴빛(憤)과 말(悱)에 나타남이니 그 성의가 이르기를 기다린 후에 가르침이라. 이미 가르치고 또 반드시 그 스스로 얻어짐을 기다려서 이에 다시 가르쳐줌이라. 또 가라사대 분비를 기다리지 아니하고 발표해주면 아는 것이 능히 견고해지지 못하고 그 분비를 기다린 후에 발표해주면 패연해지느니라(비가 퍼붓듯 한꺼번에 확 깨달아 알게 되니라).
第 9章
子食於有喪者之側, 未嘗飽也。臨喪哀不能甘也。 子於是日哭則不歌。
공자께서는 상(喪)을 당한 사람의 곁에서 식사할 때 배부르게 먹은 적이 없으셨다. 상을 당하여 슬퍼하고 있는데 달게 드실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공자께서는 조문(弔問)을 가셔서 곡(哭)을 한 날에는 노래를 부르지 않으셨다.
○哭 謂弔哭, 一日之內 餘哀未忘, 自不能歌也.
○謝氏曰, 學者於此二者 可見聖人情性之正也. 能識聖人之情性然後 可以學道.
○곡은 조상가서 곡함을 이름이니 하루 안에는 남은 슬픔을 잊지 아니하여 스스로 능히 노래하지 않음이라.
○사씨 가로대 배우는 자가 이 두 가지에 가히 성인의 성정의 바름을 볼지니 능히 성인의 성정을 안 연후에 가히 써 도를 배우니라.
第10章
子謂顔淵曰, 「用之則行, 舍之則藏, 惟我與爾有是夫 !」 子路曰, 「子行三軍則誰與?」
子曰, 「暴虎憑河, 死而無悔者, 吾不與也, 必也臨事而懼, 好謀而成者也。」
공자가 안연에게 말씀하셨다.
"등용되면 나아가 도를 행하고, 써주지 않으면 물러나 은둔하는 것은 오직 나와 너만이 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자로가 물었다.
"선생님께서 삼군을 통솔하신다면 누구와 함께 하시겠습니까?"
공자가 말씀하셨다.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으려 하고 맨몸으로 황하를 건너려다가 죽어도 후회하지 않을 자와는 함께 하지 않겠다. 반드시 일에 임하여 두려워하고, 지모(知謨)를 좋아하여 성공하는 자와 함께 할 것이다.”
[본문 해설]
“나라에서 써주면 배운 대로 뜻을 펴보고 써주지 아니하면 은둔생활을 하는데 나와 네가 그렇구나!”하고 공자가 안연에게 말씀하셨다.
○尹氏曰, 用舍無與於己, 行藏 安於所遇, 命 不足道也. 顔子 幾於聖人. 故 亦能之.
○윤씨 가로대 쓰고 버림은 몸에 관계하지 않고(나라가 하는 일이지,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며), 행하고 감춤은 만난 바에 편안하니(쓰면 나가고 쓰지 않으면 나가지 않고), 운명은 족히 말하지 않느니라(운명 따위는 거론하지 않느니라). 안자는 성인에 가까우니라. 그러므로 또한 능하시니라.
子路曰, 子行三軍則誰與?
자로가 물었다. "선생님께서 삼군을 통솔하신다면 누구와 함께 하시겠습니까?"
[본문 해설]
공자가 안연에게 하는 말씀을 듣고 있던 자로가 안연처럼 칭찬을 듣고 싶어 자신에게 걸맞을 것이라는 일을 찾아내 선생님께 여쭈었다. 내가 용맹이 최고니까 선생님께서 삼군을 지휘하는 데는 나와 더불어 하실 것이다라는 생각을 갖고 우쭐해 하며 물었다.
○萬二千五百人 爲軍, 大國 三軍. 子路見孔子, 獨美顔淵, 自負其勇, 意夫子 若行三軍, 必與己同.
○1만2천5백인이 군이 되니 대국은 삼군이라. 자로가 공자께서 홀로 안연만을 아름다이 여기심을 보고, 스스로 그 용맹을 자부하여 부자께서 만약 삼군을 행하신다면 반드시 나와 더불어 같이할 것임을 뜻함이라.
子曰, 「暴虎憑河, 死而無悔者 吾不與也, 必也臨事而懼, 好謀而成者也。」
공자가 말씀하셨다.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으려 하고 맨몸으로 황하를 건너려다가 죽어도 후회하지 않을 자와는 함께 하지 않겠다. 반드시 일에 임하여 두려워하고, 지모(知謨)를 좋아하여 성공하는 자와 함께 할 것이다.”
○暴虎 徒搏, 馮河 徒涉. 懼 謂敬其事, 成 謂成其謀. 言此皆以抑其勇而敎之. 然 行師之要 實不外此, 子路蓋不知也.
○謝氏曰, 聖人於行藏之間, 無意無必, 其行非貪位, 其藏非獨善也, 若有欲心, 則不用而求行, 舍之而不藏矣. 是以惟顔子爲可以與於此. 子路 雖非有欲心者, 然 未能無固必也, 至以行三軍爲問, 則其論益卑矣. 夫子之言 蓋因其失而救之. 夫不謀無成, 不懼必敗, 小事 尙然 而況於行三軍乎.
○폭호는 한갓 맨손으로 때려잡는 것이오, 빙하는 한갓 걸어 건넘이라. 구는 그 일을 공경함을 이름이고, 성은 그 꾀를 이룸을 이름이라. 이것은 다 써 그 용맹을 누르고 가르침을 말씀이라. 그러나 군사를 행하는 중요함은 실지로 이(臨事而懼, 好謀而成)에 바깥하지 아니하니 자로가 대개 아지 못함이라.
○사씨 가로대 성인이 행하고 은둔하는 사이에 뜻도 없고 반드시도 없어서(無意無必無固) 그 행함이 자리를 탐함이 없고, 그 은둔함이 독선이 없으니, 만약 욕심이 있다면 (나라에서) 써주지 않는데도 행함을 구할 것이오, 버려도 은둔하지 아니하리라. 이로써 오직 안자는 가히 써 이에 참여가 되니라. 자로는 비록 욕심이 있지는 않는 자라. 그러나 능히 고집하고 기필코 함이 없지 아니하고, 삼군을 행함으로써 물음을 하는데 이르러서는 그 의논이 더욱 비루하도다. 부자의 말씀은 대개 그 실수로 인하여 구원해주심이니라. 무릇 도모하지 아니함은 이룸이 없고, 두려워함이 없음은 반드시 패할 것이니, 작은 일도 오히려 그러하곤 하물며 삼군을 행하는 데에서라야!
☞ 參考
公冶長 第 6章에서 孔子는 자로에게 "너는 용맹이 지나쳐서 취할 바가 없다." (由也, 好勇過我, 無所取材。)고 충고한 바 있으며, 先進 第12章에서는 "자로는 강하고, ..... 자로같은 사람은 제명을 다할 수 없을 것이다." (子路行行如也, ...... 若由也 不得其死然。)라고 예언한 바도 있다.
자로는 결국 孔文子의 가신이 되었다가 태자였던 괴외(蒯聵)와 그 아들 첩(輒)과의 분쟁중에 사망했는데 그 顚末이 史記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三十九年, 太子蒯聵與靈公夫人南子有惡欲殺南子. 蒯聵與其徒戱陽遫謀, 朝, 使殺夫人. 戱陽後悔, 不果. 蒯聵數目之, 夫人覺之, 懼, 呼曰:「太子欲殺我!」 靈公怒, 太子蒯聵奔宋, 已而之晉趙氏. ..................
欒甯將飲酒, 炙未熟, 聞亂, 使告仲由. 召護駕乘車, 行爵食炙, 奉出公輒奔魯. 仲由將入, 遇子羔將出, 曰:「門已閉矣.」子路曰:「吾姑至矣.」 子羔曰:「不及, 莫踐其難.」 子路曰:「食焉不辟其難.」 子羔遂出. 子路入, 及門, 公孫敢闔門, 曰:「毋入爲也!」 子路曰:「是公孫也? 求利而逃其難. 由不然, 利其祿, 必救其患.」 有使者出, 子路乃得入. 曰:「太子焉用孔悝? 雖殺之, 必或繼之.」 且曰:「太子無勇. 若燔台, 必舎孔叔.」 太子聞之, 懼, 下石乞、盂黶敵子路, 以戈擊之, 割纓. 子路曰:「君子死, 冠不免.」 結纓而死. 孔子聞衛亂, 曰:「嗟乎! 柴也其來乎? 由也其死矣.」孔悝竟立太子蒯聵, 是爲莊公. <史記 衛康叔世家>
(靈公)39년에 태자 괴외(蒯聵)가 영공의 부인인 남자(南子)를 미워해 그녀를 살해하려고 마음먹었다. 괴외는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통솔하는 가신(家臣)인 희양속(戱陽遫)과 거사를 논의하고는 조회(朝會) 시간에 그녀를 해치우려고 계획을 세웠다. 희양속은 뒷일이 걱정이 되어서 과감히 나서지 못하고 머뭇거리고만 있었다. 괴외가 희양속에게 수차에 걸쳐 눈짓을 하는 바람에 그녀가 눈치를 채고는 두려움에 떨면서 큰 소리로 “태자가 나를 죽이려고 해요!”라고 외쳤다. 그 소리를 들은 영공이 크게 화를 내자 태자 괴외는 송(宋)나라로 달아났다. 얼마 후 그는 다시 진(晉)나라로 가서 조씨(趙氏)에게 몸을 기탁했다.
난녕이 술을 마시려고 고기를 굽다가 고기가 채 익지 않을 즈음에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사람을 보내어 중유(仲由)에게 알렸다. 대부 소호(召護)는 병거(兵車)가 아닌 일반 수레를 타고 술잔을 기울이고 안주로 불고기를 먹으면서 출공 희첩을 호송해 노나라로 달아났다.
중유, 즉 자로(子路)가 공씨 집에 막 들어가려는 참에 문을 막 나오는 자고(子羔)와 마주쳤다. 그는 자로에게 “문이 이미 닫혀버렸소이다”라고 말했다. 자로는 “잠시 기다리게! 내가 문 앞에 가 볼 테니.”라고 말했다. 자고는 “이미 다 끝장났소! 괜히 불똥이나 당하지 마시오!”라고 대꾸했다.
이에 자로가 “이 집의 밥을 먹고 있는 이상 이 재난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잖소!”라고 말하자 자고는 아무 대꾸도 없이 곧장 나가버렸다. 자로가 가서 문 앞에 당도하자 공손감(公孫敢)이 문을 닫으면서 “들어오지 말라! 들어와서 뭘 하려고 그래!”라고 소리를 질렀다. 자로는 “공손 자네! 봉록(俸祿)은 탐하면서 재난은 모른 체하다니! 나는 그렇지 않아! 그의 봉록을 먹는 이상 반드시 그를 재난으로부터 구해내고야 말겠어!”라고 말하며, 한 심부름꾼이 나가는 틈을 이용해서야 겨우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는 태자가 공회를 사로잡고 있는 누대 아래로 가서 “태자께서 공회를 사로 잡으신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설령 그를 죽인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누군가가 계속해서 그 뒤를 이어 태자를 공격할 것입니다!”라고 외쳤다. 그래도 태자는 듣지 않았다. 그러나 자로는 여러 사람들에게 외쳤다. “태자는 용기가 없는 사람이니 만약 누대를 불살라버리면 반드시 공회를 석방할 것이오!” 태자가 자로의 이 말을 듣고는 겁에 질려 석기(石乞)와 우염(盂黶) 두 신하를 보내어 자로를 대적하게 했다. 그들이 창으로 자로를 쳐서 갓끈을 싹둑 잘라버렸다.
자로는 “군자는 죽음을 그대로 당할지언정 갓을 벗지는 않는 법이다!”라고 외치고는 갓끈을 여미며 죽었다.
공자(孔子)가 위나라에 난리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아! 자고는 돌아올 것이겠지만 자로는 죽고 말겠구나!”라고 탄식했다. 결국에는 하는 수 없이 공회가 태자 괴외를 옹립했으니, 그가 바로 장공(莊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