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下 9. 白雲子神駿掛冠
白雲子神駿掛冠神虎, 歸隱公州山莊。郡守遣其子受業有年。應擧京師, 以一絶送之,
信陵公子統精兵,
遠赴邯鄲立大名。
天下英雄皆法從,
可憐揮涕老侯嬴。
神駿 : 성명은 미상. 호는 白雲子이며, 神駿은 법호이다. 무신정변이 일어나자 유관(儒冠)을 벗어버리고 불교에 귀의하여 명산을 두루 방
랑하다가 끝내 환속(還俗)하지 않고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掛冠 : 관직에 있는 사람이 관을 벗어 걸어 놓다. 벼슬을 그만두는 것을 비유하는 말. 《후한서(後漢書) 〈봉맹전(逢萌傳)〉》과 진(晉) 원굉
(袁宏)의 《후한기(後漢紀) 〈광무제기(光武帝紀)〉》에 나온다. 봉맹이 옷과 모자를 벗어 성문에 걸어 놓고 떠났다는 이야기에서 ‘괘
관’이 유래하여 벼슬을 그만두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갓을 걸어 놓고 떠난다는 뜻의 ‘괘관이거(掛冠而去)’, 갓을
걸어 놓고 돌아간다는 뜻의 ‘괘관귀거(掛冠歸去)’라고도 한다.
後漢의 봉맹(逢萌)은 집안이 빈한하여 학문을 하지 못하고, 호구지책으로 亭長을 했다. 그러다가 뜻한 바가 있어 그만두고 장안
으로 가 학문을 연마한 결과 춘추에 정통한 학자가 되었다.
그럴 즈음 한나라의 황제 애제(哀帝, 재위 BC7∼BC1)가 죽자 대사마 왕망(王莽)은 평제(平帝, 재위 BC1∼AD5)를 옹립했다. 왕망
은 자신의 권력에 영향을 끼칠까 봐 평제의 생모 위희(衛姬)를 도성인 장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으며, 이를 간하는 자기 장남
왕우(王宇)마저 죽여 버렸다. 그리고 그 해 음모를 꾸몄다는 이유로 위희를 주살했다.
이 소식을 들은 봉맹은 친구에게 “삼강의 도는 이미 끊어져 버렸네. 앞으로 그 재앙이 우리에게까지 미칠 것이야.”라고 말한 다
음, 옷과 모자를 벗어 동도(東都)의 성문에 걸어 놓고 가족들을 거느리고 요동(遼東)으로 가 살았다.
逢萌聞王莽居攝, 子宇諫, 莽殺之. 萌會友人曰, 三綱絶矣, 禍將及人. 卽解衣冠, 掛東都城門, 將家屬客於遼東.
信陵公子 : 魏의 信陵君. 邯鄲 : 전국시대 曺의 도읍.
侯嬴 : 魏 隱士가 나이 칠십에 집안이 가난하여 大梁夷門監이 되었으나, 신릉군이 上客으로 대접하였으며, 그의 책략으로 魏兵을 거느리
고 邯鄲으로 가서 秦兵을 무찌르고 趙를 구함. 처음 신릉군이 출병할 때, 侯贏이 울면서 내가 늙어서 따라갈 수 없으니 公子께서 邯
鄲에 도착하는 날짜를 헤아려 자결하겠다고 하고 한 후 신릉군이 조를 구한 후 군영에 이르자 자결함. <史記 卷77. 魏公子列傳>
백운자(白雲子) 신준(神駿)이 신호문(神虎門)에 갓을 걸어두고, 공주에 있는 산장으로 돌아가 은거하였는데, 군수가 자신의 아들을 보내 수업을 듣게 한 것이 몇 년이 되었다. 과거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서울[京師]로 가게 되니, 시 한 절을 써서 전송하였다.
신릉공자가 정예병을 통솔하여,
멀리 한단으로 나아가 큰 이름 세우려고 한다네.
천하의 영웅이 모두 따르는데,
가련하다! 늙은 후영 눈물만 뿌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