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漢詩/陶淵明

讀史述九章

柳川 2021. 4. 18. 04:45

                                                                 讀史述九章

 

 

 

夷齊

 

二子讓國相將海隅。                두 아들은 나라를 양보하고 서로 바닷가에서 만났도다. 

天人革命,絶景窮居。                천명을 받은 사람이 혁명을 일으키자 세상을 떠나 어렵게 살았도다. 

采薇高歌慨想黃虞。                고사리 캐며 소리높여 노래부르고, 개탄하며 황제와 순임금을 생각했도다.          

貞風淩俗爰感懦夫。                곧은 품성은 세속을 뛰어넘어 나약한 사내를 감동시켰도다. 

 

 

伯夷叔齊

 

論語에 子曰, 「伯夷叔齊 不念舊惡。怨是用希。」라 하였고(公冶長 第五. 21),

孟子에 「伯夷非其君不事,  非其友不友,  不立於惡人之朝,  不與惡人言。立於惡人之朝, 與惡人言, 如以朝衣朝冠坐於塗炭, 推惡惡之心思與鄕人立, 其冠不正, 望望然去之若將浼焉,  是故諸侯雖有善其辭命而至者, 不受也, 不受也者, 是亦不屑就已。」라 하였다.(公孫丑 上 第9章)

 

史記 伯夷列傳에 나온 글을 옮긴다.

 

伯夷、叔齊,孤竹君之二子也。父欲立叔齊,及父卒,叔齊讓伯夷。伯夷曰:“父命也。”遂逃去。叔齊亦不肯立而逃之。國人立其中子。於是伯夷、叔齊聞西伯昌善養老,盍往歸焉。及至,西伯卒,武王載木主,號爲文王,東伐紂。伯夷、叔齊叩馬而諫曰:“父死不葬,爰及干戈,可謂孝乎?以臣弑君,可謂仁乎?”左右欲兵之。太公曰:“此義人也。”  扶而去之。武王已平殷亂,天下宗周,而伯夷、叔齊恥之,義不食周粟,隱於首陽山,采薇而食之。及餓且死,作歌。其辭曰:“登彼西山兮,采其薇矣。以暴易暴兮,不知其非矣。神農、虞、夏忽焉沒兮,我安適歸矣?于嗟徂兮,命之衰矣!”  遂餓死於首陽山。 由此觀之,怨邪非邪?   <史記 卷61. 伯夷列傳>

 

 

 

 

箕子

 

去鄕之感猶有遲遲。                고향을 떠나는 심경은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도다. 

矧伊代謝觸物皆非。                하물며 나라가 바뀌니 접하는 만물이  모두 옛 것이 아니로다. 

哀哀箕子雲胡能夷!                슬프고나 기자여 ! 어떻게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겠는가.    

狡童之歌淒矣其悲。                교활한 아이의 노래 처절하고 슬프고나. 

 

 

☞ 箕子

 

箕子者, 紂親戚也. 紂始爲象箸, 箕子歎曰:「彼爲象箸, 必爲玉桮;爲桮, 則必思遠方珍怪之物而御之矣. 輿馬宮室之漸自此始, 不可振也.」紂爲淫泆, 箕子諫, 不聽. 人或曰:「可以去矣.」箕子曰:「爲人臣諫不聽而去, 是彰君之惡而自說於民, 吾不忍爲也.」乃被髮詳狂而爲奴. 遂隱而鼓琴以自悲, 故傳之曰箕子操. ........ 武王既克殷, 訪問箕子.  .......  於是武王乃封箕子於朝鮮而不臣也.

其後箕子朝周, 過故殷虚, 感宮室毀壊, 生禾黍, 箕子傷之, 欲哭則不可, 欲泣爲其近婦人, 乃作麥秀之詩以歌詠之. 其詩曰:麥秀漸漸兮, 禾黍油油. 彼狡僮兮, 不與我好兮! 所謂狡童者, 紂也. 殷民聞之, 皆爲流涕. <史記 卷38. 宋微子世家>

 

論語에 "微子去之, 箕子爲之奴, 比干 諫而死. 孔子曰, 「殷有三仁焉。」"라 했다.(微子 第18. 1.)

 

遲遲 :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더디게 감.  맹자(萬章 下 1.)에    孔子之去齊, 接淅而行。 去魯, 曰, 「遲遲吾行也。」라 했고 

        柳宗元이 弔屈原文에 맹자를 인용하여  「但仲尼之去魯兮! 曰吾行之遲遲。」라 했다. 

 

狡童之歌 : 麥秀之歎

        麥秀漸漸兮、  [맥수점점혜]           보리 이삭은 무럭무럭 자라나고

        禾黍油油兮、  [화서유유혜]           벼와 기장도 기름지고나

        彼狡偅兮、     [피교동혜]              교활한 저 철부지 아이가

        不與我好兮!  [불여아호혜]           내 말을 듣지 않은 탓이지

 

 

 

 

管鮑

 

知人未易相知實難。                사람을 알아보는 것은 쉽지 않으며  서로 알아 본다는 것은 실로 어렵다.

淡美初交利乖歲寒。                담백하고 아름다운 첫 교분은 이익 앞에서도 변함없었다네.

管生稱心鮑叔必安。                관중의 마음에 맞으면  포숙은 반드시 마음이 편안했다네.      

奇情雙亮令名俱完。                아름다운 우정이 똑같이 빛나니 높은 명성도 함께 이루었도다. 

 

 

☞ 管仲, 鮑叔

 

管仲夷吾者,潁上人也。少時常與鮑叔牙游,鮑叔知其賢。管仲貧困,常欺鮑叔,鮑叔終善遇之,不以為言。......... 管仲曰:“吾始困時,嘗與鮑叔賈,分財利多自與,鮑叔不以我為貪,知我貧也。吾嘗為鮑叔謀事而更窮困,鮑叔不以我為愚,知時有利不利也。吾嘗三仕三見逐於君,鮑叔不以我為不肖,知我不遭時也。吾嘗三戰三走,鮑叔不以我怯,知我有老母也。公子糾敗,召忽死之,吾幽囚受辱,鮑叔不以我為無恥,知我不羞小睗而恥功名不顯于天下也。生我者父母,知我者鮑子也。”   .....................

管仲既任政相齊,以區區之齊在海濱,通貨積財,富國彊兵,與俗同好惡。故其稱曰:“倉廩實而知禮節,衣食足而知榮辱,上服度則六親固。四維不張,國乃滅亡。下令如流水之原,令順民心。”故論卑而易行。俗之所欲,因而予之;俗之所否,因而去之。

<史記 卷 62. 管晏列傳>                        四維 : 禮義廉恥

 

淡美 : 담백하고 아름다움. 

군자의 사귐은 담백하기가 물과 같고 소인의 교제는 달기가 단술과 같다. 군자는 담백하기 때문에 가까워지고 소인은 달기 때문에 끊어진다.    君子之交淡若水, 小人之交甘若醴. 君子淡以親, 小人甘以絶.   <莊子 外篇 山木> 

 

歲寒 :

論語(子罕 第27章)에 子曰, 「歲寒然後, 知松柏之後彫也。」라 했는데 선비란 지조와 절개를 중시해 상황이 변해도 한결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程杵

 

遺生良難士爲知己。                살아남기가 참으로 어려워도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자를 위해 죽도다.

望義如歸允伊二子。                의를 위해 죽기를 바란 자가 있다면 진실로 이 두사람이로다. 

程生揮劍懼茲餘恥。                정영이 조씨 후손을 살리고 자결한 것은 치욕으로 남을까 두려워서였네.

令德永聞百代見紀。                아름다운 덕행 길이 남아 영원토록 벼리가 되리라.

 

 

程杵 : 春秋時代 晉나라의 程嬰, 公孫杵臼

 

屠岸賈者, 始有寵於靈公, 及至於景公而賈爲司寇, 將作難, 乃治靈公之賊以致趙盾, 遍告諸將曰:「盾雖不知, 猶爲賊首. 以臣弑君, 子孫在朝, 何以懲罪? 請誅之.」 ..........  韓厥告趙朔趣亡。朔不肯, 曰:「子必不絶趙祀, 朔死不恨.」 韓厥許諾, 稱疾不出. 賈不請而擅與諸將攻趙氏於下宮, 殺趙朔、趙同、趙括、趙嬰齊, 皆滅其族.

趙朔妻成公姊, 有遺腹, 走公宮匿. 趙朔客曰公孫杵臼, 杵臼謂朔友人程嬰曰:「胡不死?」  程嬰曰:「朔之婦有遺腹, 若幸而男, 吾奉之;即女也, 吾徐死耳.」  居無何, 而朔婦免身, 生男. 屠岸賈聞之, 索於宮中. 夫人置兒叱罅中, 祝曰:「趙宗滅乎, 若號;卽不滅, 若無聲.」

及索, 兒竟無聲.  已脱, 程嬰謂公孫杵臼曰:「今一索不得, 後必且复索之, 柰何?」  公孫杵臼曰:「立孤與死, 孰難?」 程嬰曰:「死易, 立孤難耳.」  公孫杵臼曰:「趙氏先君遇子厚, 子彊爲其難者, 吾爲其易者, 請先死.」 乃二人謀取他人嬰兒負之, 衣以文葆, 匿山中。程嬰出, 謬謂諸將軍曰:「嬰不肖, 不能立趙孤. 誰能與我千金, 吾告趙氏孤處.」  諸將皆喜, 許之。發師隨程嬰攻公孫杵臼. 杵臼謬曰:「小人哉, 程嬰! 昔下宮之難不能死, 與我謀匿趙氏孤兒, 今又賣我. 縱不能立, 而忍賣之乎!」  抱兒呼曰:「天乎天乎! 趙氏孤兒何罪? 請活之, 獨殺杵臼可也.」  諸將不許, 遂殺杵臼與孤兒. 諸將以爲趙氏孤兒良已死, 皆喜. 然趙氏眞孤乃反在, 程嬰卒與倶匿山中.  ........... 景公問:「趙尙有後子孫乎?」  韓厥具以實告. ...... 复與趙武田邑如故.  .............  程嬰曰:「不可. 彼以我爲能成事, 故先我死;今我不報, 是以我事爲不成.」  遂自殺. 趙武服齊衰三年, 爲之祭邑, 春秋祠之, 世世勿絶.   <史記 卷43. 趙世家>

 

無何 : 머지 않다. 오래지 않다. 아무 일도 없다. 아무렇지도 않다.     免身 : 아기를 낳다.      若 : 爾, 汝.  文葆 : 紋褓. 

罅 : 틈 하. 틈, 구멍. 갈라지다. 그릇에 금이 감. 골짜기. 褲 (바지 고. 바지, 사타구니)      葆 : 더부룩히 날 보.    良 : 진실로. 

 

 

士爲知己 : 豫讓의 故事에 나오는 말로 「士爲知己者死」를 줄여서 쓴 듯하다.

 

豫讓者,晉人也,故嘗事范氏及中行氏,而無所知名。去而事智伯,智伯甚尊寵之。及智伯伐趙襄子,趙襄子與韓、魏合謀滅智伯,滅智伯之後而三分其地。趙襄子最怨智伯,漆其頭以為飲器。豫讓遁逃山中,曰:「嗟乎!士為知己者死,女為說己者容。今智伯知我,我必為報讎而死,以報智伯,則吾魂魄不愧矣。」乃變名姓為刑人.     <史記  卷86. 刺客列傳>

 

 

 

 

七十二弟子

 

恂恂舞雩莫曰匪賢。                무우에서 정성스러웠던 제자들은  현자 아닌 자가 없었다.

俱映日月共餐至言。                모두 일월처럼 빛났으니  함께 지극한 가르침을 받았도다.           

慟由才難感爲情牽。                공자는 인재 얻기가 어려워 슬퍼했고  마음은 정에 이끌렸도다.

回也早夭賜獨長年。                안회는 일찍 죽었으나 자공 홀로 장수했도다.

 

 

七十二弟子 :  孔子以詩書礼樂教, 弟子蓋三千焉, 身通六藝者七十有二人. 如顔濁鄒之徒,218) 頗受業者甚衆. <史記 卷47. 孔子世家>

                  孔子曰「受業身通者七十有七人」, 皆異能之士也. <史記 卷67. 仲尼弟子列傳>

 

舞雩 :  노나라 군주가 하늘에 기우제를 올리는 장소로 지금의 곡부시 남쪽에 있었다.

         論語(先進 第11. 25)에서 공자와 제자간의 문답중에 舞雩가 나온다.

         「點, 爾如何?」 鼓瑟希, 鏗爾舍瑟而作對曰, 「異乎三子者之撰。」 子曰, 「何傷乎。亦各言其志也。」  曰, 「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     夫子喟然嘆曰, 「吾與點也。」

 

回 : 顔回(BC 521~BC 490).  공자의 제자로 字는 子淵.  학덕이 높고 자질이 뛰어나 공자가 가장 아꼈으나 요절하였다. 

 

孔子謂安回曰 : 「回來, 家貧居卑, 胡不仕乎?」 安回對曰 : 「不願仕。回有郭外之田五十畝, 足以給飦粥。郭內之田十畝, 足以爲絲麻。鼓琴足以自娛, 所學夫子之道者, 足以自樂也。回不願仕。」  孔子愀然變容曰 : 「善哉!回之意。丘聞之, 『知足者, 不以利自累也, 審自得者, 失之而不懼, 行修於內者, 無位而不怍。』 丘誦之久矣, 今於回而後見之。是丘之得也。」。」    <莊子 讓王章>

 

 

賜 : 이름은 사(), 字는 자공(子貢).

 

原憲居魯,環堵之室,茨以蒿萊,蓬戶甕牖,桷桑而無樞,上漏下濕,匡坐而絃歌。子貢乘肥馬,衣輕裘,中紺而表素,軒不容巷,而往見之。原憲楮冠黎杖而應門,正冠則纓絶,振襟則肘見,納履則踵決。

子貢曰:「嘻!先生何病也!」

原憲仰而應之曰:「憲聞之:無財之謂貧,學而不能行之謂病。憲、貧也,非病也。若夫希世而行,比周而友,學以爲人,敎以爲己,仁義之匿,車馬之飾,衣裘之麗,憲不忍爲之也。」

子貢逡巡,面有慚色,不辭而去。原憲乃徐步曳杖,歌商頌而反,聲淪於天地,如出金石。天子不得而臣也,諸侯不得而友也。故養身者忘家,養志者忘身,身且不愛,孰能忝之。詩曰:「我心匪石,不可轉也;我心匪席,不可卷也。」        <莊子 讓王章>

 

 

 

 

屈賈

 

進德修業,將以及時。                덕에 힘쓰고 학업을 닦는 것은  장차 때가 오기를 기다리기 위한 것이다. 

如彼稷契孰不願之?                저 후직과 설이 했던 바와 같이  그 역할을 누가 원하지 않겠는가?

嗟乎二賢逢世多疑。                아아! 두 현자(굴원과 가의)는 의심많은 세상을 만났도다.

候瞻寫誌感鵩獻辭。                굴원은 정첨윤에게 뜻을 토로했고 가의는 올빼미에 감응하여 글을 바쳤도다.

 

 

☞屈賈 : 屈原과 賈誼

 

屈原 :

이름은 평(平)이고 원(原)은 字이다. 굴원(屈原)은 춘추전국시대 말기인 기원전 3세기초 초나라 회왕때 사람으로 문장에 능했고 마음이 곧아 왕의 신임을 받고 삼려대부의 직책에 올랐다.

회왕은 굴원을 신임하여 모든 정사를 의논 했으나 굴원은 간신의 모략을 받아 내침을 당했는데 이에 굴원은 슬프고 억울해 분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멱라수에 빠져  죽었다.  그는 이러한 아픔을 시 ‘이소(離騷)’에 담아내었다. 주요 작품으로는 〈이소〉, 〈어부사〉, 〈애영〉이 있다.  

 

賈誼 :

漢초기  孝文帝때의 정치가, 시인. 雒陽사람이다. 18세에 이미 수재라는 평판이 높았고, 22세 때에 박사관(博士官)에 임명되었으며 다시 태중대부(太中大夫)에 발탁되었다. 그는 그때 전한의 제도와 역법을 개정할 것을 문제에게 진언하였지만 주발등의 수구파 대신의 반대를 받아 25세 때에 長沙王의 태부로 전출되었는데 이때 鵩鳥賦를 지었다. 그후 1년여만에 중앙에 소환되고, 문제의 막내 아들인 회왕의 태부가 되었다. 그러나 회왕은 낙마사고로 인하여 사망하였고 가의도 이듬해 33세의 나이로 죽었다.  대표작으로 鵩鳥賦, 悼屈原賦가 있다. 

 

進德修業 : 周易에 "군자가 덕에 나아가고 업을 닦는 것은 때 맞추어 이르고자 함이니 그러므로 허물이 없다." 하였고,  菜根譚에  덕을

              기르고 도를 닦음에는 모름지기 목석과 같이 굳은 마음을 지녀야 한다 하였다. 

              君子進德修業, 欲及時也, 故无咎。<周易 乾卦 文言傳>  進德修道, 要個木石的念頭. <菜根譚 前集 46.>

 

稷契 : 后稷과 설(契)을 말한다. 

后稷은 이름이 기()이며, 周文王의 선조로 어릴 때부터 농사일을 좋아해 즐겨 온갖 곡식을 심었으며 백성들이 그를 본받았다. 순임금은 기를 태()에 봉하고 후직이라 부르는 한편 희씨(姬氏) 성을 별도로 내렸다.<史記 卷4. 周本記

()은 商()나라를 세운 湯의 선조이다. 설은 장성해서 우의 치수에 공을 세웠다. 제순이 설에게 백관이 친목하지 않고 오륜이 어지러우니 그대가 사도(司徒) 벼슬을 맡아 오륜을 가르치되 경건하고 너그럽게 하시오라고 명했다. () 땅에 봉하고 자씨(子氏)라는 성을 내렸다. 설은 당요, 우순, 대우 때 흥하여 백성들에게 공업을 드러내니 백성이 평안했다.   <史記 卷 3. 殷本紀>

 

候瞻寫誌 : 굴원이 태복(太卜) 정첨윤(鄭詹尹)에게 점을 쳐 자신의 뜻을 토로하다. 誌는 志와 통하여 ‘뜻’. 굴원은 한때 왕의 총애를 받아 고위 관직에 오르기도 하였으나, 주위의 시기와 참언으로 관직을 박탈당하고 유배 생활을 하였다. 그는 태복(太卜) 정첨윤(鄭詹尹)에게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면서 끝까지 충정을 지켜는 것이 좋은지 아니면 뜻을 굽히는 것이 좋은지 점을 쳐 달라고 부탁하였다. 정첨윤은 “무릇 척(尺)도 짧을 때가 있고, 촌(寸)도 길 때가 있으며, 물건도 부족할 때가 있고, 지혜도 밝지 못할 때가 있으며, 점복(占卜)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 있고, 신령함도 통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夫尺有所短, 寸有所長, 物有所不足, 智有所不明, 數有所不逮, 神有所不通.)”라고 대답하여, 점을 쳐서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일렀다. (尺短寸長) <屈原 楚辭 · 卜居〉

 

感鵩獻辭 : 가생이 장사왕의 태부가 된 지 3년이 되던 어느 날 부엉이가 가생의 집에 날아 들어와서 방 가장자리에 앉았다. 초나라 사람들은 부엉이를 ‘복(鵩)’이라고 불렀다.가생은 장사로 쫓겨 와서 살고 있는데 장사의 지대가 낮고 습기가 많아 스스로 수명이 길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늘 상심하고 있었기에 鵩鳥賦를 지어 스스로를 위안했다. <史記 卷84. 屈原賈生列傳>

 

 

 

 

韓非

 

豐狐隱穴以文自殘。                살찐 여우는 동굴에 숨어 있어도 아름다운 무늬의 가죽때문에 스스로를 죽인다네.

君子失時白首抱關。                군자도 때를 놓치면 늙어서까지 관문이나 지킨다네. 

巧行居災忮辯召患。                계책을 세워 행해도 재앙에 빠지고 거슬리는 말은 환난을 부른다네.      

哀矣韓生竟死說難。                애처롭도다 한생이여! 마침내 세난으로 죽었구나. 

 

 

韓非 :

韓의 여러 공자들 중 한 사람이었다. 형명과 법가 학술을 좋아했으나 그 근본은 황로로 귀착된다. 한비는 사람이 말을 더듬어서 말은 못했지만 글은 잘 썼다. 李斯와 함께 荀卿을 스승으로 모셨는데, 이사는 스스로 한비만 못하다고 여겼다.

한비는 고국인 한이 쇠약해지는 것을 보고 여러 차례 글을 올려 한왕에게 직언했으나 한왕은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해 유능한 인재를 구하는 데는 힘을 쏟지 않고 쓸모없는 인재를 중용하는 것을 가슴아파 하면서 10여만 자의 글을 지었는데 그것이 오늘날의 「韓非子」이다.

누군가가 그 책을 秦나라에 가지고 가서 진왕에게 바쳤는데 진왕이 읽고 감탄하여 한비자를 보고 싶어하던중 한나라와의 전쟁중에 사신으로 온 한비자를 만났으나 이사와 요고(姚賈)의 간계에 빠져 독살시켰다. 

 

豐狐隱穴 : 살찐 여우가 동굴에 숨어있다. 장자에 나오는 문구.

저 살이 찐 여우와 무늬가 아름다운 표범이 산림속에서 살며 굴속에 엎드려 있는 것은 조용히 있으려 함이요, 밤에 움직이고 낮에는 들어박혀 있는 것은 경계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기갈이 심하고 곤궁해도 사람과 멀리 떨어진 강이나 호수가에서 먹이를 구하는 것은 마음을 하나로만 작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망이나 덫에 치이는 환난을 면할 수 없으니 그들에게 무슨 죄가 있습니까? 그 가죽이 재난을 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夫豐狐文豹, 棲於山林, 伏於岩穴, 靜也; 夜行晝居, 戒也; 雖飢渴隱約, 猶且胥疏於江湖之上而求食焉, 定也. 然且不免於罔羅機辟之患, 是何罪之有哉? 其皮爲之災也.  <莊子 山木 2.>

 

 

 

 

 

魯二儒

 

易代隨時迷變則愚。                때에 따라 세상은 변하는데 변화에 혼미하면 어리석음이로다.

介介若人特爲貞夫。                이 강직한 사람들은 매우 곧은 장부들이었네.

德不百年汙我詩書。                덕을 쌓은지 100년도 되지 않았는데 내 시서를 더럽힌다 하였도다. 

逝然不顧被褐幽居。                떠나면서 돌아보지도 않고 베옷 입고 속세를 떠나 숨어 살았다네.

 

 

魯二儒

 

漢五年....... 群臣飲酒爭功,醉或妄呼,拔劍擊柱,高帝患之。叔孫通知上益厭之也,說上曰:「夫儒者難與進取,可與守成。臣願徵魯諸生,與臣弟子共起朝儀。」 高帝曰:「得無難乎?」 叔孫通曰:「五帝異樂,三王不同禮。禮者,因時世人情爲之節文者也。故夏、殷、周之禮所因損益可知者,謂不相復也。臣願頗采古禮與秦儀雜就之。」上曰:「可試爲之,令易知,度吾所能行爲之。」

於是叔孫通使徵魯諸生三十餘人。魯有兩生不肯行,曰:「公所事者且十主,皆面諛以得親貴。今天下初定,死者未葬,傷者未起,又欲起禮樂。禮樂所由起,積德百年而後可興也。吾不忍爲公所爲。公所爲不合古,吾不行。公往矣,無汙我!」 叔孫通笑曰:「若眞鄙儒也,不知時變。」 ............  叔孫通因進曰:「諸弟子儒生隨臣久矣,與臣共爲儀,願陛下官之。」 高帝悉以爲郎。叔孫通出,皆以五百斤金賜諸生。諸生乃皆喜曰:「叔孫生誠聖人也,知當世之要務。」  <史記 卷99. 劉敬叔孫通列傳>

 

 

 

 

張長公

 

遠哉長公蕭然何事?                심오하구나 장공이여, 무슨 일로 쓸쓸히 지냈는가?

世路多端皆爲我異。                세상 살아가는 갈래가 많은 것은 모두 아집이 달랐기 때문이로다. 

斂轡朅來獨養其誌。                벼슬을 버리고 떠나와  홀로 그 뜻을 키웠네. 

寢跡窮年誰知斯意?                자취를 감추고 생을 마쳤는데 누가 그 뜻을 알까?

 

 

張長公 :

 

久之,釋之卒。其子曰張摯,字長公,官至大夫,免。以不能取容當世,故終身不仕。<史記 卷102. 張釋之馮唐列傳>

 

我 : 論語에 「子絶四, 毋意毋必毋固毋我。」라 하였는데  朱子는 다음과 같이 註를 달았다. <論語 第9. 子罕 4.>

     絶 無之盡者. 毋 史記作無是也. 意 私意也, 必 期必也, 固 執滯也, 我私己也, 四者相爲終始, 起於意, 遂於必, 留於固, 而成於我也.

     蓋意必 常在事前, 固我常在事後, 至於我又生意, 則物欲牽引 循環不窮矣. 

 

朅 : 갈 걸. 가다. 떠나감. 헌걸찬 모양, 씩씩한 모양. 어찌 하지 아니하느냐? 朅來空復辭.  언제. 이에, 대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