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歷史와文學/說苑

劉向과 說苑

柳川 2022. 2. 17. 20:14

                                                         劉向과 說苑

 

 

                                                                                                     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宋赫基

 

1. 저자 劉向에 대하여


《說苑》은 중국 前漢時代의 劉向이 先賢의 逸話와 言說을 모아서 주제별로 분류하여 기록한 책이다. 劉向(B.C. 77~B.C. 6)은 漢 王朝의 宗室로서 漢 高祖의 아우인 楚元王 劉交의 4세손이며, 字는 子政, 본명은 更生이다. 董仲舒와 司馬遷의 뒤를 이은 西漢의 대표적 학자인 유향은 經學, 文學, 그리고 目錄學에 걸쳐 많은 학문적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유향은 漢 宣帝 때 출사하였으나, 元帝 때 권력을 독점하고 전횡하던 宦官과 外戚들을 탄핵하다가 몇 차례 옥고를 치르고 庶民으로 강등되었다. 이후 成帝가 즉위했을 때 다시 임용되어 光祿大夫에 올랐으나, 여전히 劉氏 宗室의 입장에 서서 ‘현명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등용해야 한다.[任賢選能]’는 儒家 논리를 근거로 외척과 환관의 정권 장악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줄곧 이들의 배척을 받아 높은 지위에 오르지 못했다.
이처럼 정치적으로 현달하지 못한 유향은 만년에 주로 典籍을 校勘하고 정리하는 일에 종사하였는데, 이를 통해 동아시아 학술사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되었다. 그의 가장 중요한 학문적 업적은 秦漢 古籍의 전면적인 정리를 주도하면서 校勘學, 目錄學의 기초를 다졌다는 점이다. 그는 成帝의 명으로 고적의 板本을 널리 모으고, 그 同異를 비교하고, 錯誤와 脫落을 교정하고, 중복된 것을 삭제하고, 목차를 편성하고, 편장을 구분한 뒤에 필사하여 책으로 만드는 일에 오랜 기간 종사하면서, 그 방법을 모색하고 정립함으로써 후대의 교감학, 목록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유향은 모든 종의 책을 황제에게 바치면서 각각 敍錄을 붙였는데, 이는 서명과 편명, 교감과정, 저자생애, 저술경위, 책의 진위, 내용의 시비, 학술원류 등의 항목을 포함하는 일종의 校勘 整理 報告書이자 目錄 解題였다. 그는 이 敍錄들을 모아서 《別錄》 20권을 편찬하였다. 秦始皇의 焚書로 인해 散逸된 고적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그의 이러한 작업은 매우 중요하면서도 번잡한 일이어서 생전에 임무를 완수할 수 없었다. 그의 사후에 막내 아들 劉歆이 이 일을 계승하여 저술한 것이 바로 《別錄》을 기초로 한 《七略》 7권이다. 이것은 중국 최초의 종합적인 도서목록으로서 큰 의미를 지닌다. 《별록》과 《칠략》은 세상에 널리 유통되지 못한 채 산일되었지만, 東漢時代의 班固가 찬술한 《漢書》 〈藝文志〉가 기본적으로 《칠략》을 본뜬 것이어서, 여기에서 유향과 유흠 부자의 저술의 대강을 살필 수 있다.
유향의 저작으로는 이 밖에도 《疾讒》, 《擿要》, 《世頌》, 《洪範五行傳》, 《新序》, 《說苑》, 《世說》 등이 있고, 별도로 〈說老子〉 4편과 賦 33편이 있으나,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은 《新序》, 《說苑》, 《列女傳》 3종뿐이다. 그 외에 神怪小說인 《列仙傳》이 유향의 저작으로 알려져왔지만, 魏晉時代 神仙術을 따르는 方士들이 그의 이름을 빌려 저술한 것으로 보인다. 明代에 張溥(1602~1641)가 여기저기 흩어진 유향의 글을 모아서 엮은 《劉子政集》이 《漢魏六朝百三家集》에 실려 전한다.

 

 

2. 體制와 內容의 槪觀


20편으로 이루어진 現傳本 《說苑》은 先秦時代로부터 西漢 初期에 이르기까지의 史事, 遺聞, 佚事, 傳說 등을 수록하고 있는데, 主旨에 따라 〈君道〉, 〈臣術〉, 〈建本〉, 〈立節〉, 〈貴德〉, 〈復恩〉, 〈政理〉, 〈尊賢〉, 〈正諫〉, 〈敬愼〉, 〈善說〉, 〈奉使〉, 〈權謀〉, 〈至公〉, 〈指武〉, 〈說叢〉, 〈雜言〉, 〈辯物〉, 〈修文〉, 〈反質〉 등으로 나뉘어 있다.
각 편은 대체로 처음 몇 조항에서 편별 주제를 집약해서 보여주는 言說이나 問答을 제시한 뒤, 그와 관련되는 여러 실례들을 열거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컨대 첫 번째 편인 〈君道〉는 ‘人君之道’와 ‘人君之事’에 대한 총론적 진술에 해당하는 문답이 처음 세 조항에서 제시되었고, 그 이하로 42조항은 이에 대한 각론이라고 할 수 있는 故事와 問答들이 열거되어 있다. 고사와 문답들은 첫머리에 제시한 임금의 도리에 대한 일반적 진술이 다채롭고 생동감 있는 인물, 사건들과 함께 입체적으로 이해될 수 있도록 구성한 것이다.
두 번째 편인 〈臣術〉 역시 마찬가지이다. 첫 번째 조항에서 ‘人臣之術’의 원칙으로 추구해야 할 ‘六正’과 행하지 말아야 할 ‘六邪’를 일목요연하게 제시하였고, 이하 24조항은 이와 관련한 각종 고사와 문답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어지는 〈建本〉 역시 첫 번째 조항에서 《論語》, 《詩經》, 《周易》을 인용하여 근본을 세우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한 뒤, 이하 29조항에 이 주제로 묶일 수 있는 일화들을 배치하였다.
나머지 편들도 대개 같은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立節〉에서는 절의를 지킴, 〈貴德〉에서는 덕을 베풂, 〈復恩〉에서는 은혜를 갚음, 〈政理〉에서는 왕도정치의 이념, 〈尊賢〉에서는 인재 등용, 〈正諫〉에서는 충직한 간언, 〈敬愼〉에서는 근신과 겸손, 〈善說〉에서는 명확하고 올바르며 설득력 있는 언설, 〈奉使〉에서는 使臣의 도리, 〈權謀〉에서는 올바른 권모와 지략, 〈至公〉에서는 公平無私함, 〈指武〉에서는 국가적 위기의 대비를 위한 武力, 〈辯物〉에서는 天文地理와 物類變化, 〈修文〉에서는 禮樂文物, 〈反質〉에서는 꾸밈이 아닌 實質의 중요성을 주제로 각각 관련 고사와 문답을 모아두었다.
다만 〈說叢〉은 話者를 밝히지 않고 짤막한 名言 警句들을 모아두었고, 〈雜言〉의 경우 화자는 대체로 밝혔으나 특정한 주제 없이 여러 賢人들의 지혜로운 말을 모아 기록하였다는 점에서 다른 편들과 체제가 다소 상이하다.
이처럼 《설원》의 문체는 〈설총〉 한 편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인물간의 대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이 대화가 특정한 역사적 인물 사이에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역사적 배경을 지닌 故事, 즉 이야기체의 성격을 함께 지니고 있다. 이는 ‘說’을 書名으로 삼은 고대의 전적들에 공통적으로 보이는 현상인데, 현전하지는 않지만 유향이 저작한 것으로 알려진 《世說》을 계승하여 400년 뒤에 나온 《世說新語》 역시 마찬가지이다. 《說苑校證》(中華書局)에 서문을 쓴 屈守元은 이러한 문체를 중국 고대의 특색 있는 형식인 ‘說話’로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전통이 후대의 傳奇를 거쳐 결국 중국소설사의 성립과 연관된다고 보았다. 《설원》이 일정한 고대소설집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본 것이다. 요컨대 《설원》의 문체는 대화 형식의 이야기체 성격을 지니고 있고, 이는 내용뿐 아니라 문체로서도 후대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3. 著述 背景과 思想


앞서 간략히 언급한 것처럼 작자 劉向의 정치적 입장과 사상적 배경은 분명히 儒家였지만, 《說苑》에 인용된 자료들은 유가에 국한되지 않고 광범위하다. 《설원》을 《文心雕龍》에서는 ‘雜說을 蔓延하였다.’고 하여 ‘諸子’의 하나로 분류하였고, 《宋史》 〈藝文志〉에서는 子部의 雜家로 분류하기도 하였다. 《漢書》 〈藝文志〉 이하 대부분의 正史 藝文志나 經籍志에서는 子部의 儒家로 분류하였지만, 이처럼 어떤 부류의 서적에 분속시킬 것인가에 대한 견해가 일치되지 않았다는 점은 다양한 출전과 느슨한 구조를 지닌 이 책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宋代의 曾鞏은 《설원》의 내용이 純正하지 않고 題材의 取捨에 문제가 있다고 비판하였고, 이와 비슷한 비판은 이후로도 줄곧 있어왔다. 그러나 이는 유향이 살았던 서한 말엽의 시대상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견해로 보인다. 春秋戰國時代에서 秦漢 교체기까지 유가는 諸子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유가가 명실공히 중국사상의 주류에 서게 된 것은, 漢 武帝의 이념정책과 그에 부응한 董仲舒의 학술적 성과에 의해 비로소 유가의 경전이 다른 諸子書와는 다른 ‘經’의 반열에 오르게 되면서부터였다. 그런데 이때 한나라의 國是로 제시된 유가는, 실은 孔子와 孟子의 原始儒家만이 아니라 陰陽家, 法家, 墨家, 名家 등을 융합하여 한나라의 정치적 필요에 의해 새롭게 개조해낸 사상으로 보는 것이 온당하다. 이를 두고 ‘新儒學的 今文經學’이라고 지칭하는 현대 학자들도 있다.
유향은 바로 이런 사상적 배경에서 성장한 인물이다. 따라서 그가 편찬한 《설원》에서 유가 이외의 여러 학설과 주장을 인용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取材의 출전이 다양하다 하더라도 이 책 전체를 일관하는 사상의 주축은 여전히 공자로 대표되는 儒家의 道이다. 유향이 《설원》 전체를 통해 강조하고자 한 것은, 통치자 자신의 修身이 정치적 성패를 좌우하는 관건이라는 점이다. 〈君道〉와 〈臣術〉을 논한 첫 두 편에서 聖君과 賢臣의 모범을 제시하였고, 〈建本〉, 〈立節〉, 〈貴德〉, 〈復恩〉, 〈敬愼〉, 〈至公〉, 〈反質〉 등의 편들 역시 통치자가 갖추어야 할 근본적인 덕성을 주된 내용으로 하였다. 보다 정치실무와 관련되는 내용을 다룬 〈政理〉, 〈尊賢〉, 〈正諫〉, 〈權謀〉, 〈奉使〉, 〈指武〉 등의 경우에도 여전히 강조하는 것은 통치자의 도량과 덕성이다.
《설원》 전체를 통해 볼 수 있는 이러한 정치적 견해는 한마디로 ‘仁政’과 ‘德治’를 표방하는 王道政治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政理〉에서 나눈 정치의 세 등급이다. 그에 의하면 정치는 敎化를 위주로 하는 王者의 政治, 威勢에 의지하는 霸者의 정치, 그리고 脅迫을 통한 强者의 정치로 나눌 수 있는데, 이 가운데 최고의 정치가 왕자의 정치라고 하였다. 물론 어느 하나 없어서는 안 될 二機로써 德과 刑을 함께 제시하기는 하였으나, 어디까지나 德에 의한 교화를 위주로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통치자가 먼저 검소함을 숭상하고 사치를 억제하여 백성의 부역과 세금을 줄여야 하며, 법령은 느슨하게 제정하되 공평하게 집행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한편 《설원》에는 당시 유행하던 陰陽五行說의 영향도 보인다. 음양오행설은 원시유가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인데, 전한시대에 매우 유행하면서 儒學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漢書》 〈列傳〉에 실린 그의 奏議文 다섯 편 모두에서 음양설에 입각한 災異와 吉祥의 이론이 언급되었다는 데에서, 유향 역시 이를 신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설원》에서도 특히 〈君道〉, 〈辯物〉 등의 편에 음양오행과 災異, 祈福 등의 주장과 사례들이 집중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결정론적인 운명론과는 달리 유향은 天命과 함께 人事를 강조하는 면을 보인다. 〈君道〉에 인용된 “吉하더라도 善을 행하지 않으면 福이 이르지 않고, 재앙 가운데에서도 선을 행할 수 있으면 禍가 이르지 않는다.”라는 말에서 이러한 입장을 읽을 수 있다.
《설원》에 담긴 사상을 이해함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저자 유향이 지닌 諫言의 의도이다. 앞서 살핀 것처럼 유향은 直言으로 諫하다가 여러 차례 곤경을 당했다.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直諫을 멈추지 않았던 그로서는, 《설원》의 편찬을 통해 올바른 통치의 이념과 실제에 관한 고금의 일화와 언론을 제시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간언이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儒家에만 국한하지 않고 여타의 諸家는 물론 民間 傳承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자료를 섭렵하여 集成한 것이다.

 

 

4. 수록 逸話의 事實性


제재를 취사한 기준의 문제와 더불어 《說苑》에 대한 후대의 비판이 가장 많이 가해진 지점은, 수록한 제재들의 진실성 여부이다. 唐代의 劉知幾는 《史通》에서 劉向이 虛事를 널리 늘어놓고 僞辭를 잔뜩 만들어내었으며, 異說을 조작하여 후대 사람을 혼란에 빠뜨렸다고 비판하였다. 宋代 葉大慶은 《考古質疑》에서 이 책에 실린 기사 가운데 시대의 선후가 맞지 않는 것이 많다고 하면서 구체적으로 아홉 조목을 뽑아 제시하였고, 나아가 淸代 蘇時學은 《爻山筆話》에서 시대에 맞지 않는 것이 109조목에 이른다고 지적하였다.
등장인물의 시대에 있어서 《설원》의 일부 내용에 오류가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는 실증적인 분석을 가하여 바로잡아야 할 사안이지, 이 때문에 이 책의 의의가 통째로 부정되는 것은 온당치 않다. 바로 앞 시기에 나온 司馬遷의 《史記》는 중국 正史의 효시로서 동서고금에 손꼽을 만한 높은 가치를 지니는 저작이지만, 《漢書》와 《史通》 등에서 이미 《사기》에 사실관계에 있어서 모순된 내용이 적지 않다는 지적이 있어왔다. 金代 王若虛의 《史記辨惑》, 淸代 梁玉繩의 《史記志疑》 등이 모두 《사기》의 이런 잘못을 고증하여 교정한 전문 저서이다. 더욱이 《설원》은 전문적인 역사서를 표방한 것이 아니라 逸話를 모아 엮은 雜著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부분적 오류를 이 책의 가치를 결정짓는 관건으로 삼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본다.
《설원》의 일부 조목 내용이 正史의 기록과 현저히 다르다는 점 때문에 이 책의 역사적 사실성이 의심되어 오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秦始皇에 대한 기사인데, 예컨대 〈至公〉에서는 진시황이 일찍이 한번 천하를 양위할 것을 생각하였는데, 鮑白令之의 간언으로 인해 이런 생각을 접었다고 하였다. 또 〈反質〉에서는 진시황이 方士 侯生을 붙잡은 뒤에 그에게 자신의 과실을 열거해보라고 하였고, 그것을 듣고는 묵묵히 말이 없다가 뜻밖에 후생을 석방했다고 하였다. 두 조항의 제재들은 모두 《史記》 〈秦始皇本紀〉의 내용과 어긋나기 때문에 淸代 王謨는 이를 두고 이 책 전체에서 매우 괴이한 점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런 기록에 관해서 만약 충분한 증거가 없다면 경솔히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 없다. 그것이 진시황의 다른 측면을 적절하게 표현한 것일 수도 있고, 正史의 부족하고 치우친 부분을 보완하는 것일 수도 있다. 후대인의 입장에서 말하면, 이는 오히려 선택과 비교를 할 수 있는 제재를 제공한 셈이 된다.
마지막으로, 《설원》에는 어떤 한 주제를 제시하기 위해서 근거나 출처가 확실치 못한 일화를 허구적으로 구성한 측면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이는 《설원》의 경우만 그런 것이 아니다. 先秦諸子書 가운데에는 寓言과 史實을 분명하게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나아가 《설원》의 일부 조항들에서 보이는 허구성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오히려 고대소설사의 시각에서 설화적 요소로서 새롭게 조명될 여지도 있다.

 

 

5. 수록 內容의 淵源


《說苑》에 실린 先賢의 逸話와 言說들은 劉向이 당시에 전하던 典籍들에서 발췌하여 편집한 것이 대부분이다. 물론 그 가운데에는 現傳하지 않는 전적들도 있어서, 오늘의 관점에서 《설원》을 1차 자료로 볼 수 있는 내용들도 없지 않지만, 편찬 당시로서는 유향의 著作이라기보다는 기존 자료의 集錄의 성격이 강하다. 여기서는 현전 전적에서 확인할 수 있는 내용들을 중심으로 하여 《설원》 수록 내용의 淵源을 살펴보고자 한다.
全載 혹은 拔萃․加筆 등의 형태로 《설원》의 내용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전적은 先秦時代의 역사서인 《春秋左氏傳》, 《春秋公羊傳》, 《春秋穀梁傳》, 《國語》 등과 유향 자신이 補整하여 編輯한 《戰國策》, 그리고 西漢 初에 나온 司馬遷(B.C. 145~B.C. 86)의 《史記》 등이다. 그 외에 《尙書》, 《論語》, 《禮記》 등 당대에 이미 經書의 반열에 든 전적들을 비롯하여 선진제자들의 일화와 언설이 담긴 《管子》, 《孟子》, 《荀子》, 《韓非子》 등에서 상당 부분이 取材되었다.
前述한 것처럼 유향은 자료의 대상을 正統儒家書나 歷史書에만 국한하지 않고 통치이념과 관련된 일화와 언설을 두루 섭렵하여 모았다. 先秦時代의 일화가 풍부하게 실린 《晏子春秋》, 《呂氏春秋》 등은 물론, 서한 초기로부터 유향의 시대에 이르는 저술들도 폭넓게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 가운데 《설원》 수록 내용의 출처로써 빈도가 높은 것으로 劉安(B.C. 179~B.C. 122)이 先秦諸子의 學說을 채집한 《淮南子》, 賈誼(B.C. 200~B.C. 168)의 政論書인 《新書》, 董仲舒(B.C. 179~B.C. 104)의 思想書인 《春秋繁露》, 韓嬰(B.C. 2세기)의 詩 解說書인 《韓詩外傳》 등을 들 수 있다.

 

 

6. 刊行과 流通


《說苑》은 《漢書》, 《隋書》, 《舊唐書》, 《新唐書》 등의 正史 藝文志나 經籍志에 모두 언급되어 있다. 《漢書》 〈藝文志〉에는 서명만 언급되었으나, 《隋書》 〈經籍志〉에는 20권으로 명시되었다. 《舊唐書》 〈經籍志〉, 《新唐書》 〈藝文志〉에는 30권으로 적혀 있으나 대개의 후대 학자들은 이를 20권의 오류로 본다.
그런데 宋代 初에 王堯臣 등이 편찬한 《崇文總目》에 의하면 당시에 이미 《설원》은 散佚되어 20편 가운데 겨우 다섯 편만 남아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이후 오래지 않아 曾鞏(1019~1083)이 《설원》의 逸文을 수집, 보충하여 20권을 채워서 원래의 모양을 어느 정도 회복하였다. 다음은 증공이 《설원》을 편찬하면서 붙인 序文의 첫머리이다.
劉向이 편찬한 《설원》은 20편이었는데, 《숭문총목》에 의하면 지금 남은 것은 다섯 편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망실되었다고 합니다. 臣이 여러 사대부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모아서 15편을 구해서 이전의 5편과 합하여 20편을 만들고, 빠지거나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되 확실치 않은 부분은 일단 그대로 둔 채로 그 篇目을 편찬하였습니다.
증공에 의해 《설원》 20편이 복구되었으나, 이것이 완전한 판본은 아니었다. 晁公武(生沒年 未詳, 宋 高宗 때 사람)의 《郡齋讀書志》에 의하면, 증공이 권19 〈修文〉을 둘로 나누어서 그 한 권을 〈反質〉로 만들어서 20편의 수를 채웠다고 한다. 여전히 빠져 있던 이 마지막 권 〈反質〉을 채우는 일은 高麗에 남아 있던 본을 입수함으로써 가능해졌다.
李德芻가 말했다. “館中의 《설원》 20권은 〈反質〉 한 권이 빠져 있다. 그래서 증공이 〈修文〉을 上下로 나누어 20권을 채운 것이다. 뒤에 고려에서 한 권을 進上하여 결국 다 채워지게 되었다.”
陸游의 〈跋說苑〉(《渭南文集》 권27)에 실린 내용이다. 결국 고려본을 얻음으로써 《설원》 20권이 비로소 완전해졌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후 통행본의 근간이 된다. 둔황 석실의 문헌 중에 《說苑》 〈反質〉篇 잔권이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이 현전하는 판본과 큰 차이가 없어서 이 통행본이 缺落 없이 다 갖추어진 판본이라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北宋 曾鞏의 뒤를 이어서 《설원》을 정리하고 판각한 이들은 시대마다 있어왔고 다양한 異本들을 양산하였다. 그 가운데 비교적 많이 유통된 판본으로 南宋 咸淳本, 明代의 楚府本, 何良俊本, 程榮本, 楊鏜本, 何鏜本, 天一閣本, 王謨本, 崇文局本, 新景印明鈔本 등이 있다. 1787년에 간행된 淸代 盧文弨의 《群書拾補》에서는 전대의 여러 본들과 주석서들에 근거하여 校勘하고 逸文 25조를 추가로 보충하였다. 이어서 《설원》을 교감한 이들로 孫志祖, 趙曦明, 劉台拱, 兪樾, 孫詒讓, 陳壽祺, 戴淸 등이 있다. 근래에 가장 훌륭한 교감본으로 인정받는 向宗魯의 《說苑校證》은 이러한 역대의 교감 성과를 바탕으로 한 정밀한 연구 끝에 제출된 성과이다.

 

 

7. 우리나라에서의 《說苑》 수용과 국가적 보급


우리나라에 《說苑》이 언제 처음 수용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적어도 高麗 건국 이전에 이미 많이 읽혔던 것으로 보인다. 기록상 확인할 수 있는 것은 《高麗史節要》 제4권 德宗敬康大王 甲戌 3년(1034)의 아래와 같은 언급이다.
여름 4월에 동지중추원사 崔冲이 아뢰기를 “成宗 때에 내외 모든 관청 벽에 모두 《설원》의 六正․六邪의 글과 漢 刺史의 六條令을 써서 붙이게 하였는데, 지금은 세대가 이미 오래되었으니 다시 새로 써 붙여서 벼슬에 있는 사람에게 신칙할 바를 알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르셨다.
위 기록에 의하면 고려 제6대 군주인 成宗(재위 981~997) 때에 이미 《설원》은 국가 공공기관에 지켜야 할 강령으로 게시될 만큼 보편적으로 읽혔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앞서 판본 문제에서 언급한 고려본의 進上과 관련한 기록이 《高麗史》 〈世家〉 宣宗 8년(1091)조에 보이며, 이는 18세기 후반 北學派의 일원인 李德懋(1741~1793)의 《耳目口心書》 제6권에도 그대로 인용되었다.
고려 선종 8년 丙午에 進奉使 李資義 등이 宋나라에서 돌아와 아뢰기를 “황제께서 우리나라에 좋은 서적이 많음을 들으시고 館伴에게 명하여 구할 도서의 목록을 써 주게 하고 말하시기를 ‘卷帙이 완전하지 못한 것이 있더라도 반드시 베껴서 보내라.’ 하셨습니다.” 하였다.
이하 제시된 100여 종의 서적 목록 가운데 《설원》 20권이 들어 있다. 宋 哲宗 元祐 6년의 일이다. 이 요구에 응하여 고려에서 《설원》을 진상함으로써 비로소 이후에 유통된 완전한 질이 갖추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설원》 고려본에 대해서 19세기 초의 考證學的 經學者 成海應(1760∼1839)은 〈說苑高麗本說〉이라는 제목으로 별도의 논설을 지어 고찰하였다.
陸放翁(陸游)이 《說苑》 跋文에서 “李德芻가 말하기를 ‘館中의 《說苑》 20권은 〈反質〉 한 권이 빠져 있다. 그래서 曾鞏이 〈修文〉을 上下로 나누어서 20권을 채운 것이다. 뒤에 고려에서 한 권을 진상하여 결국 다 채워지게 되었다.’ 하였다.”라고 하였다. 내가 고금의 書目을 보니 옛 經籍이 兵亂을 한 번 거치고 나면 잃어버리고 흩어져서 다시 남아 있는 것이 없게 된다. 漢末의 黃巾賊과 董卓의 난으로부터 저 晉나라 때 劉石의 禍에 이르는 시기가 가장 심했으니, 前漢의 藝文志에 실린 書目 가운데 오늘날 전해지지 않는 것이 열에 여섯 일곱은 된다. 그러니 典籍의 재앙이란 秦나라 때의 焚書만 그런 것이 아니다. 樂浪 때 朝貢을 하다가 혹 《설원》의 秘本이 우리나라로 들어왔다가 고려 때에 이르러서 송나라에 다시 바친 것이 아닌가 한다.……다른 책들과 달리 《설원》의 경우는 말이 웅장하고 뜻이 심오하여 남겨두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濊貊이나 高句麗 같은 荒陋한 시기에도 망실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硏經齋全集》 續集 책11)
우리나라 역대 문헌에서 《설원》이 언급되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통치이념의 제시로써 국가적으로 게시 혹은 반포하는 경우이다. 앞서 고려 성종이 관청 벽에 《설원》의 구절을 게시하도록 하였고, 덕종 역시 이를 다시 시행하였다고 한 것이 그 한 예이다. 이는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지속되었다.
禮曹에서 傳旨하기를 “어진 이를 보거든 그와 같아지기를 생각하고, 어질지 아니한 자를 보거든 안으로 自省하는 것은 人情의 떳떳한 일이다. 이제 內外의 모든 관청의 벽에 《설원》의 六正과 六邪의 글을 써서 게시하여 관직에 있는 자로 하여금 경계하여 힘쓸 바를 알게 하라.” 하였다. (1475년, 《成宗實錄》 제62권)
유향이 지은 《설원》의 〈臣術〉편을 承政院에 내리며 일렀다. “祖宗朝 때에는 〈大寶箴〉을 써서 內殿에 걸어놓고 〈待漏院記〉를 써서 外殿에 걸어놓았었는데, 이는 위아래를 모두 警戒시키기 위해서였다. 《설원》을 보니, 人臣에게 六正과 六邪가 있다고 했는데, 그 말이 아주 좋았다. 근래의 일을 가지고 볼 때 더욱 깊고 절실하다. 그것을 써서 새겨 〈대루원기〉와 함께 걸어놓고 경계하는 도리를 보존하게 하라.” (1537년, 《中宗實錄》 제86권)
역시 《설원》의 〈臣術〉에 나오는 六正과 六邪를 신료들에게 게시하고 가르쳐야 한다는 내용이다. 六正이란 바람직한 신하상으로서 聖臣, 良臣, 忠臣, 智臣, 貞臣, 直臣을 가리키고, 六邪란 배격해야 할 신하상으로서 具臣, 諛臣, 姦臣, 讒臣, 賊臣, 亡國臣을 가리킨다.
이처럼 군주가 신하들에게 강령으로 제시하였을 뿐 아니라, 신하가 왕에게 풍속의 교화를 위해 더 널리 반포하여야 한다고 상소한 사례들도 눈에 띈다. 대표적인 예로, 李景奭은 인조 때 올린 1645년의 상소에서 고려시대 성종과 덕종의 예를 들면서 《설원》의 六正과 六邪의 글을 議政府와 六曹는 물론 八道의 監司와 兩府의 留守에게까지 내려보내서 모든 고을의 관청 벽에 써 붙이도록 하라는 건의를 하였고, 이것이 시행되지 않자 다시 현종 때 올린 1660년의 상소에서 이를 다시 언급하기도 하였다. 이경석이 이처럼 《설원》의 六正과 六邪를 강조하는 이유는 풍속을 교화하고 국가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이보다 더 간명하고 핵심적인 조항이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8. 우리나라 문헌에 보이는 《說苑》의 영향


우리나라 문헌에서 《說苑》이 많이 언급된 것은 經書의 해석과 관련해서이다. 그 가운데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이 《論語》의 ‘管仲有三歸’에 대한 朱熹의 註釋과 관련된 언급들이다. 孔子가 “管仲의 그릇은 작도다!”라 한 데 대해, 어떤 이가 “관중이 검소하다는 말씀이십니까?”라 묻자, 공자는 “管氏는 三歸를 두었으며 家臣의 일을 몇 사람에게 兼職시키지 않고 관직 수만큼의 사람을 일일이 두었으니, 어찌 검소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 대답하였다.(《論語 八佾》) 이 부분에 대한 주석에서 주희는 “三歸는 臺의 이름이니, 이에 대한 일이 《설원》에 보인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論語集註大全》에 실린 細註에는 《설원》 〈善說〉에 나오는 해당 부분을 인용해두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桓公이 管仲을 높여 仲父로 세우고 大夫들을 불러 말했다. “내가 잘했다고 여기는 사람은 문에 들어와 오른쪽에 서고, 내가 못했다고 여기는 사람은 문에 들어와 왼쪽에 서시오.” 그러자 문의 중앙에 서 있는 이가 있었는데 환공이 그에게 까닭을 물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관중의 지혜는 천하를 의논할 수 있고, 그의 굳셈은 천하를 취할 수가 있습니다. 임금께서는 그의 誠信을 믿으십니까? 국내의 정치를 맡기시고 외교의 일을 결단케 하시며 백성을 몰아 귀의하게 하셨으니, 이런 권력을 좀 빼앗아야 될 것입니다.” 환공이 말했다. “좋은 말이다.” 곧 관중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정사를 모두 그대에게 돌려줄 것이니, 정사가 제대로 미치지 못하면 다만 그대를 바로잡겠소.” 관중이 이 때문에 三歸臺를 지어 스스로 백성들에게 자신을 손상시켰다.
三歸에 대해서는 역대의 주석이 다양하게 갈렸는데, 주희 이전의 주도적인 설은 세 姓氏의 여인을 아내로 맞았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다. 주희는 이에 반대하여 臺 이름으로 풀이하고 그 근거로 《설원》의 기록을 언급하였는데, 사서집주 전체에서 《설원》을 인용한 것은 이 부분이 유일하다. 그런데 ‘三歸’를 ‘세 성씨의 여인과 혼인함’으로 이해하면 관중이 사치를 일삼았다는 문맥으로 이해하기에 오히려 더 자연스러워 보이는 면이 있다. 그래서 주희의 설에 반대하여 여전히 ‘세 성씨의 여인과 혼인함’으로 풀이하는 주석이 많다. 조선 후기의 丁若鏞 역시 이를 따랐다. 이런 이유로 주희의 주석을 尊信하던 대부분의 조선시대 학자들 사이에서도 이 부분은 논란의 여지가 적지 않았다.
16세기 말 17세기 초 博學의 기풍을 대표하는 학자 李睟光(1563~1628)은 《芝峯類說》 권6에서 《설원》을 근거로 삼은 朱熹 註가 이전까지의 古註와 대비된다는 점을 언급한 바 있는데, 이는 후대에 지속적인 문제 제기로 이어진다. 17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官人이자 學者였던 朴世采(1631~1695)는 李箕洪(1641~1708)에게 답한 편지 〈答李汝九問〉(《南溪先生朴文純公文正集》 권39)에서 三歸에 대한 여러 설들을 두루 언급하며 판단을 유보하고 있다. 《논어》에서 공자가 관중을 평하면서 검소하지도 않고 예를 아는 것도 아니라고 하였는데, 三歸를 한 번에 세 성씨의 여인과 혼인한다는 의미로 풀면 이는 ‘不儉’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 다음 단에 나오는 ‘不知禮’에 대한 내용이 되므로 문맥상 맞지 않는다는 주희의 말을 인정하면서도, 《戰國策》과 仁山 金氏의 설을 들어서 異見이 있을 수 있음을 열어둔 것이다.
적극적으로 經筵을 주도한 18세기의 君師 正祖(1752~1800)에 이르러서도 이 문제는 다시 언급된다. 정조는 《經史講義》 〈論語〉에서 박세채 등의 전대 학자들이 《전국책》을 인용하며 주희와 다른 의견을 제시하였다는 것을 잘 알고 의문을 제기하였고, 이 문제를 策問으로 내기까지 하였다.(《弘齋全書》 권50)
《설원》이 조선시대 문헌에서 가장 높은 빈도로 인용된 예가 바로 朱熹의 《四書集註》에서 유일하게 인용된 부분과 관련된다는 사실은, 주자학의 나라였던 조선의 학술 경향을 잘 보여주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설원》은 그 외에도 선진시대 문헌의 字句 考證과 관련하여 적지 않게 인용되어 왔다.
李睟光이 그의 百科全書的 저술인 《芝峯類說》의 곳곳에서 《설원》을 언급하였고, 앞서 〈說苑高麗本說〉의 작자로 소개한 成海應(1760∼1839)이 〈僞泰誓〉(《硏經齋全集》 外集 권5), 〈周尺攷〉(《硏經齋全集》 外集 권62), 〈河廣〉(《硏經齋全集》 續集 책1) 등의 글에서 《설원》을 논거로 활용하였다.
조선시대의 대표적 저작들을 대략 일별한 결과, 《설원》을 가장 많이 인용한 것으로 보이는 인물은 앞서 언급한 正祖와 19세기 초의 대표적인 실학자 丁若鏞(1762~1836)인 것으로 보인다. 정조는 《經史講義》의 곳곳에서 《설원》을 인용하여 신료들에게 질문을 던졌고, 정약용은 《孟子要義》, 《論語古今註》, 《詩經講義》, 《尙書古訓》, 《梅氏書平》, 《春秋考徵》, 《喪禮四箋》 등의 주요 저서에서 《설원》을 인증 출처로 인용하였다.
그리고 《설원》이 문집 간행과 관련한 字句 考證의 자료로 활용된 대표적인 예로, 《退溪先生文集攷證》을 들 수 있다. 이 책은 柳道源(1721~1791)이 자신의 隨錄과 洪汝河(1621~1678)가 詩卷에 隨記한 訓解, 그리고 金江漢이 書簡 부분을 주석한 退溪集考證을 합하여 1788년 정리 편집한 것으로써, 이후 그의 현손인 柳建鎬가 저자의 후손 李野淳이 隨記한 要存錄을 각 권말에 첨부하여 1891년에 목판으로 간행되었다. 이 책의 주석에 《설원》이 근거 자료로써 다수 인용되었다.

 

 

9. 《說苑》의 가치


《說苑》이 오래도록 읽히고 여러 차례 간행된 가장 큰 요인은, 생동감 있고 재미있는 문답과 이야기의 형식을 빌려 儒家의 통치이념과 윤리도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는 점 때문이다. 이는 왕으로서 신료들에게 敎示하거나 신하로서 왕에게 諫言하기에 적절한 자료 구실을 하였다. 조선시대에 여러 차례 게시와 반포의 명이 있었음을 앞서 살폈거니와, 중국에서도 1382년(明 洪武 15)에 이 책을 널리 반포하여 천하의 학자들로 하여금 읽고 연구하게 하였다는 기록을 살필 수 있다. 비록 經書나 性理書처럼 본격적인 학문의 대상이 되지는 못했으나, 정치 일선에서 활용하기에는 유용한 책이었던 것이다.
《설원》이 지니는 학술적 가치는, 내용의 정밀함보다는 고증 자료로써의 방대함에 있다. 그런 면에서, 先秦時代로부터 漢代까지의 다양한 자료들을 雜駁하게 끌어모았다는 점이야말로 《설원》이 지니는 가장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 母胎가 되는 자료 가운데에는 후대에 완전히 일실되어 버린 문헌들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앞서 살핀 것처럼 사실 관계에 있어서 자료적 신빙성을 따져보아야 한다는 제한점은 있으나, 古籍 保存의 공헌은 그것대로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으로 인해 《설원》은 經書를 비롯한 여타 고대 문헌들의 字句와 名物 考證의 자료로 많이 인용되어 왔다.
전술했듯이, 주로 구체적인 인물의 생생한 대화와 이야기로 이루어진 《설원》의 문체는 후대의 故事逸話, 筆記, 나아가 小說 文學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설원》이 전대의 문헌뿐 아니라 민간의 傳承까지 두루 제재로 취했고 이를 당대의 白話體로 보이는 대화체로 기술하였다는 점은, 고대의 어휘와 문법을 연구하는 참고자료로 이 책이 지니는 가치를 높여준다.
오늘날 儒家의 윤리와 정치이념은 어렵고 낡은 것으로 치부되는 경향이 없지 않다. 高談峻論으로 이루어진 대부분의 유가 고전들은 번역을 거친다 해도 일반 독서 대중이 선뜻 다가가기에 쉽지 않은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2천 년도 더 된 옛날의 인물들이 그들에게 주어진 역사의 굴곡을 살아가며 던진 말과 구체적인 이야기들 하나하나가 다채롭게 펼쳐져 있는 《설원》은, 유가 사상에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통로와도 같은 책이 아닌가 한다. 金言으로 삼을 만한 名句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짤막짤막한 문답과 일화들을 읽어나가다 보면, 멀고 고리타분하게 느껴졌던 유가의 윤리와 정치이념들이 어느새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의미를 지니고 다가서는 것을 느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출처 : 동양고전종합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