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우리歷史/三國史記

三國史記 卷 第二

by 柳川 2016. 9. 19.

                                    三國史記 卷 第二

 

新羅本紀 第二 阿達羅尼師今 伐休尼師今 奈解尼師今 助賁尼師今 沾解尼師今 味鄒尼師今 儒禮尼師今 

基臨尼師今 訖解尼師今。

 

阿達羅尼師今立 逸聖長子也 身長七尺 豊準 有奇相 母朴氏 支所禮王之女 妃朴氏 內禮夫人 祇摩王之女也。


元年 三月 以繼元爲伊湌 委軍國政事

二年 春正月 親祀始祖廟(舊本無始字) 大赦 以興宣爲一吉湌

三年 夏四月 隕霜 開雞立領路

四年 春二月 始置甘勿-馬山二縣 三月 巡幸長嶺鎭 勞戌卒 各賜征袍

五年 春三月 開竹嶺 倭人來聘

七年 夏四月 暴雨 閼川水溢 漂流人家 金城北門自毁

八年 秋七月 蝗害殼 海魚多出死

九年 巡幸沙道城 勞戌卒

十一年 春二月 龍見京都

十二年 冬十月 阿湌吉宣謀叛 發覺懼誅 亡入百濟 王移書求之 百濟不許 王怒出師伐之 百濟嬰城守不出 

                我軍粮盡 乃歸。

十三年 春正月辛亥朔 日有食之

十四年 秋七月 百濟襲破國西二城 虜獲民口一千而去 八月 命一吉湌興宣 領兵二萬伐之 王又率騎八千 

                自漢水臨之 百濟大懼 還其所掠男女 乞和

十五年 夏四月 伊湌繼元卒 以興宣爲伊湌

十七年 春二月 重修始祖廟 秋七月 京師地震 霜雹害穀 冬十月 百濟寇邊

十八年 春 穀貴 民飢

十九年 春正月 以仇道爲波珍湌 仇須兮爲一吉湌 二月 有事始祖廟 京都大疫

二十年 夏五月 倭女王卑彌乎 遣使來聘

二十一年 春正月 雨土(舊本作王 蓋吳也) 二月 旱 井泉渴

三十一年 春三月 王薨

 


[교주:02권1] 禮
原本 「礼」. 「禮」의 古字.
[교주:02권2] 始
原本에는 없으나 鑄字本에 의거 추가.
[교주:02권3] 一
原本 缺刻. 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보충.
[교주:02권4] 土
原本 「王」. 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수정.
[교주:02권5] 渴
原本 「竭」. 鑄字本에 의거 수정. 三國史節要 「竭」. 榮·舜 「竭」.



[역주:02권1] 아달라 이사금(阿達羅尼師今)
신라의 제8대 임금. 재위기간은 154년 ~ 184년이다. 이 왕을 마지막으로 上代 박씨왕통은 끊어지고 석 씨가 왕위를 이어 받았다. 아달라왕은 비로소 雞立嶺과 竹嶺의 길을 열어 신라가 소백산맥 이북까지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 하였다.
[역주:02권2] 내례 부인(內禮夫人)
아달라왕의 부인이고 伐休王의 어머니이다. 그런데 본서 권2 신라본기 나해 이사금 즉위년조에는 나해왕의 어머니 역시 內禮夫人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내례부인은 벌휴왕의 둘째 아들인 伊買의 처에 해당된다. 내례 부인이 同名異人인지 아니면 아달라왕이 죽은 후 伊買에게 再婚하여 나해를 낳았는지 분명하지 않다.
[역주:02권3] 흥선(興宣)
아달라왕 2년에 일길찬이 되었다가 동왕 14년(167) 7월에 백제가 신라의 서쪽 2성을 공격하여 백성 1천여 명을 사로잡아 갔을 때 흥선 등이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하여 백 성들을 되찾아 왔으며, 다음해 4월에 繼元을 이어서 이찬이 되었다.
[역주:02권4] 계립령(雞立嶺)
현재의 경북 문경군 가은면과 충북 괴산군 연풍면 사이에 있는 고개로 麻木峴, 麻骨站, 雞立峴 등이라고도 하였다. 이 길은 후에 신라가 백제의 북쪽 지방 특히 한강 하류지역으로 진출하는 주요한 통로가 되었다.
[역주:02권5] 감물현(甘物縣)
본서 권37 잡지 지리(4)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수록된 지명이다. 감물현의 위치를 옛날 甘文小國이 있던 현재의 경북 김천시 개령면으로 추정하기도 하고(井上秀雄 譯註, 《三國史記》 1, 平凡社, 東京, 1980, 61쪽), 혹은 충북 충주시 남쪽 45리 되는 지점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千寬宇, 《古朝鮮史·三韓史硏究》, 일조각, 1989, 188쪽 및 297쪽).
[역주:02권6] 마산현(馬山縣)
현재의 충남 서천군 한산면의 백제 때 이름이 馬山縣이었다. 그러나 여기서의 마산이 현재의 서천군 한산면일 수 없으므로, 마산을 현재의 경남 함안군 安義面에 비정하기도 하고(井上秀雄, 앞의 책, 1980, 61쪽), 혹은 충북 충주시 서쪽 30리 되는 지점에 비 정하기도 한다(千寬宇, 앞의 책, 1989, 188쪽 및 297쪽).
[역주:02권7] 장령진(長嶺鎭)
본서 권37 잡지 지리(4)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수록된 지명으로, 《新增東國輿地勝覽》 권21 慶州府條에 따르면 현재의 경북 경주시 동쪽 약 10km 지점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본서 권37 주석 304 참조.
[역주:02권8] 죽령(竹嶺)
현재의 경북 영주시 풍기읍과 충북 단양군 대강면 사이에 있는 고개로 높이가 해발 689m이다. 죽령재, 대재라고도 한다. 이 길은 신라가 고구려의 동남쪽 지방과 주로 통행하던 길이었다.
[역주:02권9] 사도성(沙道城)
본서 권37 잡지 지리(4)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수록된 지명으로, 〈南山新城碑〉 제2비에 보이는 '沙刀城’과 동일지명 일 가능성도 있다. 본서 권23 백제본기 초고왕 45년조 및 같은 책 권 24 구수왕 3년과 4년 조에도 沙道城이 보이나 서로 다른 지역이다. 신라본기에서의 사도성 위치에 관하여, 경북 영일군 只沓面 곧 포항시 장기면으로 보기도 하고(中田勳, 〈古代日韓航路考〉, 《古代日韓交涉史斷 片考》, 1956, 139쪽), 경남 함안군 竹南面 혹은 경북 영덕군 영덕면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李丙燾,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1977, 22쪽), 이 곳은 왜병의 신라 侵入路로서 유례왕 9년(292) 6월에는 왜병에 의하여 함락되기도 하였다.
[역주:02권10] 12년(165) 겨울 10월에 아찬 길선(吉宣)이 … 달아났다
본서 권23 백제본기 개루왕 28년(155)조와 《三國史節要》 권2에는 155년(아달라왕 2)에 길선이 모반하려다가 일이 발각되어 백제로 도망해왔다고 하여, 본서 권2 신라본기와는 10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본서의 백제본기와 신라본기 가운데 어느 쪽이 사실인지 알 수 없다.
[역주:02권11] 정월 초하루 신해에 일식이 있었다.
《後漢書》 권7 桓帝 延熹 9년 정월조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역주:02권12] 백제가 … 붙잡아 돌아갔다
본서 권23 백제본기 肖古王 2년(167) 7월조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역주:02권13] 한수로부터 [그 곳에] 다다랐다
원문 『自漢水臨之』와 동일한 사실을 기록한 본서 권23 백제본기 肖古王 2년 8월 조 『羅王又親帥精八千繼之 掩至漢水』의 문장과 비교해 보면, 신라본기의 서술에 표현 상의 잘못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신라본기의 이 부분을 굳이 해석 한다면 '漢水로부터 백제의 [수도 가까이에] 다다랐다'로 풀이할 수 있다. 이 경우 신라본기에서의 漢水는 남한강을 지칭하고, 백제본기의 漢水는 현재 서울의 한강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역주:02권14] 서울[京師]
京師는 나라의 首都를 미화하여 사용하는 말로, 크고[京] 많은[師]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뜻이다.
[역주:02권15] 백제가 변경을 노략질하였다
본서 권23 백제본기 초고왕 5년(170) 10월조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역주:02권16] 구도(仇道)
《三國遺事》 권1 紀異篇 김알지 탈해왕대조에는 仇刀로 표기하였다. 알지의 6세손으로 미추왕의 아버지이고 나물왕의 할아버지이다. 또한 조분왕의 외할아버지였고, 그의 처는 박씨 述禮夫人이었다. 구도는 아달라왕 19년(172)에 파진찬에 임명되었고 벌휴왕 2년(185)에 파진찬으로서 左軍主가 되어 召文國을 정벌하였으며, 동왕 5년(188) 2월에는 母山城을 침입한 백제군을 격퇴하였다. 그리 고 다음해 7월에 백제와의 狗壤城 싸움에서 500여 명을 죽이는 전공을 세웠으며 벌휴왕 7년(190) 8월에는 백제군과 缶谷城에서 싸우다가 패하여 缶谷城主로 좌천되었다. 그 후의 구체적인 행적은 알 수 없는데, 미추왕 2년(263)에 葛文王으로 추봉되었다.
[역주:02권17] 구수혜(仇首兮)
아달라왕 19년(172)에 일길찬이 되었다가 벌휴왕 2년(185) 2월에 右軍主로 임명되어 구도와 함께 召文國을 정벌하였다.
[역주:02권18] 시조묘에 변고가 있었다
원문 『有事始祖廟」를 지금까지의 번역본에서는 모두 '제사가 있었다' 혹은 '제사지냈다'로 옮겼다. 그런데 '有事'가 ‘제사하다'는 뜻으로 쓰이기는 하지만, 본서 신라본기에 의하면 유리왕 이래로 즉위 직후에 몸소 제사지내는 것이 통례였고 아달라왕도 즉위 다음해에 몸소 시조묘에 제사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의 『有事始祖廟』는 박씨와 석씨의 왕실교체의 前奏로서 시조묘에 某種의 변고가 있었던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타당하다(千寬宇, 앞의 책, 1989, 298쪽).
[역주:02권19] 비미호(卑彌乎)
2세기 말에서 3세기 전반의 일본 邪馬台國의 여왕인 卑彌呼를 말한다. 그는 2세기 후반경 倭國의 혼란 와중에서 180년경에 왕으로 共立되었다가 247년에 狗奴國의 전란 와중에서 죽었다. 《三國志》 권30 魏書 東夷傳 倭條에 의하면, 魏나라 景初 3년(239)과 正始 4년(243)에 비미호가 魏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했다고 한다. 卑稱乎의 실체에 대하여 邪馬台國 九州說에서는 비미호를 熊襲의 女酋혹은 天照大神으로 비정하고, 邪馬台國 大和說에서는 神功皇后 혹은 倭迹迹日百襲姬命이라 하여 통일된 정설이 없는 실정이다.
[역주:02권20] 흙이 비처럼 내렸다[雨土]
가벼운 흙이 바람에 날려 비처럼 떨어지는 현상으로, 매년 초봄에 일어나는 黃沙 현상의 일종으로 보인다.




伐休(一作發暉)尼師今立 姓昔 脫解王子仇鄒角于之子也 母姓金氏 兄珍內禮夫人 阿達羅薨 無子 國人立

之 王占風雲 預知水旱及年之豊儉 又知人邪正 人謂之聖。


二年 春正月 親祀始祖廟 大赦 二月 拜波珍湌仇道-一吉湌仇須兮 爲左右軍主 伐召文國 軍主之名 始於

             此(軍主以下七字 亦見智證麻立干六年條)。

三年 春正月 巡幸州郡 觀察風俗 夏五月壬申晦 日有食之 秋七月 南新縣進嘉禾

四年 春三月 下令州郡 無作土木之事 以奪農時 冬十月 北地大雪 深一丈

五年 春二月 百濟來攻母山城 命波珍湌仇道 出兵拒之

六年 秋七月 仇道與百濟 戰於狗壤 勝之 殺獲五百餘級

七年 秋八月 百濟襲西境圓山鄕 又進圍缶谷城 仇道率勁騎五百擊之 百濟兵佯走 仇道追及蛙山 爲百濟

             所敗 王以仇道失策 貶爲缶谷城主 以薛支爲左軍主

八年 秋九月 蚩尤旗見于角亢

九年 春正月 拜國良爲阿湌 述明爲一吉湌 四月 京都雪 深三尺 夏五月 大水 山崩十餘所

十年 春正月甲寅朔 日有食之 三月 漢祇部女一産四男一女 六月 倭人大饑 來求食者千餘人

十一年 夏六月乙巳晦 日有食之

十三年 春二月 重修宮室 三月 旱 夏四月 震宮南大樹 又震金城東門 王薨

 


[교주:02권6] 辰
原本 「申」. 本書 卷16 故國川王 8年條, 後漢書 卷8 中平 3年條 및 三國史節要에 의거 수정. 鑄字本 「申」. 榮·北·權·烈·燾·浩 「申」.
[교주:02권7] 襲
原本 誤刻. 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수정.
[교주:02권8] 缶
原本 「?」. 「缶」의 俗字.
[교주:02권9] 缶
上同.
[교주:02권10] 三
原本 缺刻. 三國史節要에 의거 보충. 鑄字本 「四」. 朝·北·權·烈·燾·浩 「四」, 榮 「夏四」.


[역주:02권21] 벌휴 이사금(伐休尼師今)
신라의 제9대 임금, 재위기간은 184년 ~ 196년이다. 벌휴왕은 탈해왕 이후 끊어졌던 昔氏王統을 이었으므로 석씨 왕조의 中始祖로 인식된다. 이 왕대에 左右軍主를 처음으로 설치하여 召文國을 정벌하는 등 신라 영토확장의 端初를 열었다.
[역주:02권22] 탈해왕의 아들 구추(仇鄒) 각간의 아들이다
여기서 구추는 탈해의 아들이고 벌휴왕의 아버지라 하였으나, 벌휴는 탈해가 죽은 지 104년이 지난 후에 왕위에 올랐으므로 仇鄒의 계보에는 무언가 잘못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脫解-仇鄒-伐休로 이어진다는 본서의 계보는 허구이고 벌휴는 탈해와 혈연적인 관계가 없다는 견해도 있다. 즉 脫解系와는 다른 집단인 伐林系가 북방에서 남하하여 경주에 도래한 후, 경주 지역에서 이미 吐含山神으로 숭배되고 있던 탈해의 계보에 자신의 계보를 附會하여 자칭 탈해의 후손이라고 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千寬宇, 앞의 책, 1989, 300쪽).
[역주:02권23] 좌 ·우군주(左右軍主)
신라 초기에 兵權을 맡은 관리로, 左軍主와 右軍主를 말한다. 이것이 신라에서 軍主의 이름을 쓰기 시작한 시초였다. 한편 본서 권4 신라본기 지증 마립간 6년 2월조에서는 이 사부를 悉直州 軍主로 삼은 것이 군주 명칭의 시작이었다고 하였다. 지증왕 6년에 설치된 군주는 州의 장관으로서 일정지역에 주둔하면서 행정·군사를 총괄하던 常設官職으로서의 군주인 반면에 벌휴왕 2년의 左右軍主는 지방에 장기간 주둔하지 않고 有事時에만 군대를 통솔하는 중앙의 임시적인 관직이 아니었을까 한다.
[역주:02권24] 소문국(召文國)
현재의 경북 의성군 금성면에 있던 소국으로, 벌휴왕 2년에 신라에 병합되었다가 경덕왕대에 聞韶郡이 되었다. 본서 권34 주석 109 참조.
[역주:02권25] 5월 그믐 임진에 일식이 있었다
《後漢書》 권8 靈帝 中平 3 년(186) 5월조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역주:02권26] 모산성(母山城)
본서 권34 잡지 지리(1) 康州 天嶺郡條에서는 현재의 전남 남원군 雲峰面 일대가 백제의 母山縣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본서 권3 신라본기 소지 마립간 6년 7월조에의 母山城은 신라의 북변에 있다고 하였으므로 백제의 母山縣과는 다른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모산성의 위치에 관하여, 1) 충북 진천군 대모산성으로 보는 설(李丙燾, 《國譯 三國史記》, 1977, 25쪽), 2) 경북 의성 방면설(千寬宇, 앞의 책, 1989, 302쪽) 등이 있다. 한편 이때 백제가 신라의 모산성을 공격한 사실은 본서 권23 백제본기 초고왕 23년 2월조에도 수록되어 있다.
[역주:02권27] 구양(狗壤)
본서 권37 잡지 지리(4)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수록 된 지명으로, 본서 권1 신라본기 탈해 이사금 8년 10월조에 보이는 狗壤城과 동일지명이다. 본서 권1 주석 154 참조.
[역주:02권28] 구도가 …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본서 권23 백제본기 초고왕 24년 7월조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三國史節要》(권3)에서는 구양성 전투를 벌휴왕 5년 7월조에 수록하여, 본서와 1 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역주:02권29] 원산향(圓山鄕)
경북 예천군 龍宮面으로 보기도 하고 혹은 충북 진천군 柏谷面 石峴里 일대에 비정하는 견해도 있으나, 어느 것도 확실치는 않다.
[역주:02권30] 부곡성(缶谷城)
경북 군위군 岳溪面 혹은 충북 괴산군 남쪽의 基谷에 비정하는 견해가 있으나, 어느 것도 확실치는 않다.
[역주:02권31] 구도가 뒤쫓아가 … 패하였다
본서 권23 백제본기 초고왕 25년 8월조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역주:02권32] 치우기(蚩尤旗)
蚩尤는 중국 고대 제후의 이름으로 兵亂을 좋아하다가 黃帝에게 주살당하였다. 蚩尤旗는 이 제후의 이름을 따서 붙인 별이름으로, 살별의 일종인데 빛의 꼬리가 굽어서 깃발 모양을 한 것을 말한다. 이 별이 나타나면 王者가 사방을 정벌하는 兵亂이 일어난다고 한다(《史記》 권27, 天官書).
[역주:02권33] 각(角)·항(亢)
角과 亢은 28宿의 하나로 모두 동쪽에 있는 별자리이다. 한편 이때 蚩尤旗가 角과 亢 별자리에 나타났다는 본서의 기사는 《後漢書》 권9 獻帝 初平 2년(191) 9월조에도 수록되어 있다.
[역주:02권34] 3월
中宗壬申刊本에는 결각되어 있고, 顯宗 鑄字本과 현행 모든 역주본 《三國史記》에는 모두 '四月'이라 하였다. 그러나 본서의 서술원칙에 의하면 봄, 여름, 가을, 겨울은 初出時에만 표시하고 같은 계절을 거듭 나타내지 않았다. 그런데 이 부분이 만약 '四月'이라면 앞에 '여름[夏]'으로 표기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의 5월에 ‘夏五月’이라 하여 비로소 '여름'을 명기하고 있다. 이 점으로 보아 이곳은 4월일 수 없다. 더욱이 《三國史節要》(권3)에 ‘三月'로 되어 있으므로 본 역주본에서는 '3월'로 勘校, 飜譯하였다.
[역주:02권35] 정월 초하루 갑인에 일식이 있었다
《後漢書》 권9 獻帝 初平 4년(193) 정월조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역주:02권36] 6월 그믐 을사에 일식이 있었다
《後漢書》 권9 獻帝 興平 元年(194) 6월조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柰解尼師今立 伐休王之孫也 母內禮夫人 妃昔氏 助賁王之妹 容儀雄偉 有俊才 前王太子骨正及第二子

買 先死 大孫尙幼少 及立伊買之子 是爲奈解尼帥今 是年 自正月至四月 不雨 及王卽位之日 大雨 百

姓歡慶。


二年 春正月 謁始祖廟

三年 夏四月 始祖廟前 臥柳自起 五月 國西大水 免遭水州縣一年租調 秋七月 遣使撫問

四年 秋七月 百濟侵境

五年 秋七月 太白晝見 隕霜殺草 九月庚午朔 日有食之 大閱於閼川

六年 春二月 加耶國請和 三月丁卯朔 日有食之 大旱 錄內外繫囚 原輕罪

八年 冬十月 靺鞨犯境 桃李華 人大疫

十年 春二月 拜眞忠爲一伐湌 以參國政 秋七月 霜雹殺穀 太白犯月 八月 狐嗚金城及始祖廟庭

十二年 春正月 拜王子利音(或云奈音) 爲伊伐湌 兼知內外兵馬事

十三年 春二月 西巡郡邑 浹旬而返 夏四月 倭人犯境 遣伊伐湌利音 將兵拒之

十四年 秋七月 浦上八國 謀侵加羅(加羅 勿稽子傳皆作阿羅) 加羅王子來請救 王命太子于老 與伊伐湌利

               音 將六部兵 往救之 擊殺八國將軍 奪所虜六千人 還之

十五年 春夏 旱 發使錄郡邑獄囚 除二死餘悉原之

十六年 春正月 拜萱堅爲伊湌 允宗爲一吉湌

十七年 春三月 加耶送王子爲質 夏五月 大雨 漂毁民屋

十九年 春三月 大風折木 秋七月 百濟來攻國西腰車城 殺城主薛夫 王命伊伐湌利音 率精兵六千伐百濟 

                破沙峴城 冬十二月 雷

二十三年 秋七月 武庫兵物自出 百濟人來圍獐山城(圍 舊本作國 誤也) 王親率兵 出擊走之

二十五年 春三月 伊伐湌利音卒 以忠萱爲伊伐湌 兼知兵馬事 秋七月 大閱楊山西

二十七年 夏四月 雹傷菽麥(菽 舊本作⃞) 南新縣人死 歷月復活 冬十月 百濟兵入牛頭州 伊伐湌忠萱將兵

                拒之 至熊谷 爲賊所敗 單騎而返 貶爲鎭主 以連珍爲伊伐湌 兼知兵馬事

二十九年 秋七月 伊伐湌連珍與百濟 戰烽山下破之 殺獲一千餘級 八月 築烽山城

三十一年 春 不雨 至秋七月 乃雨 民飢 發倉廩賑給 冬十月 錄內外獄囚原輕罪

三十二年 春二月 巡狩西南郡邑 三月 還 拜波珍湌康萱爲伊湌

三十四年 夏四月 蛇鳴南庫三日 秋九月 地震 冬十月 大雪 深五尺

三十五年 春三月 王薨

 


[교주:02권11] 子
原本 「十」. 三國史節要에 의거 수정. 鑄字本 「十」.
[교주:02권12] 太
原本 「大」. 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수정.
[교주:02권13] 送
原本 誤刻. 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수정.
[교주:02권14] 木
原本 「才」. 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수정.
[교주:02권15] 圍
原本 「國」. 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수정.
[교주:02권16] 菽
原本 誤刻. 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수정.
[교주:02권17] 蛇
原本 「虵」은 「蛇」의 俗字.



[역주:02권37] 나해 이사금(奈解尼師今)
신라의 제10대 임금, 재위기간은 196년 ~ 230년이다. 벌휴왕의 적손 곧 태자 骨正의 아들이 어렸기 때문에 나해가 즉위하였다. 이 왕대에 가야와 화친을 맺고 浦上 8국이 가야를 침입한 것을 구원해 주었다.
[역주:02권38] 내례 부인(內禮夫人)
아달라왕의 왕비와 이름이 같다. 同名異人인지 아니면 아달라왕 死後에 伊買에게 시집와서 나해를 낳았는지 분명하지 않다.
[역주:02권39] 골정(骨正)
忽爭이라고도 하였다. 조분왕과 첨해왕의 아버지이다. 골정은 벌휴왕의 맏아들이었으나 벌휴왕보다 먼저 죽었기 때문에 왕위에 오르지 못하였다. 첨해왕 원년(247)에 世神葛文王으로 추봉되었다.
[역주:02권40] 백제가 변경에 침입하였다
본서 권23 백제본기 肖古王 4년 7월조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역주:02권41] 9월 초하루 경오에 일식이 있었다
《後漢書》 권9 獻帝 建安 5년(200) 9월조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역주:02권42] 3월 초하루 정묘에 일식이 있었다
《後漢書》 권9 獻帝 建安 6년(201) 3월조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역주:02권43] 일벌찬(一伐湌)
17관등 중의 최고 관등인 伊伐湌의 다른 이름이다. 본서 권38 주석 10 참조.
[역주:02권44] 이음(利音)
奈音 혹은 본서 권48 열전 勿稽子傳에는 捺音, 《三國遺事》권5 避隱篇 물계자조에서는 㮈音이라 하였다. 한편 그의 혈통에 대하여 《三國遺事》, 권5 避隱篇 勿稽子條에서는 이음을 나해왕의 태자라 하였고, 본서 권48 열전 물계자전에서는 단순히 王孫이라 하였는데, 《三國遺事》의 기록이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李基東, 〈于老傳說의 世界〉, 《韓國古代의 國家와 社會》, 1985, 184~185쪽). 이음은 나해왕 12년(207)에 이벌찬이 되어 중앙과 지방의 군사를 통괄하였고, 동왕 13년 4월에 왜의 침입을 격퇴하였으며, 다음해 7월에는 浦上 8국의 加羅 침입을 우로와 함께 격퇴하였다. 그리고 나해왕 9년(204) 혹은 동왕 19년(214) 7월에는 백제군을 沙峴城에서 깨뜨렸다. 그는 나해왕 25년(220)에 죽었다.
[역주:02권45] 포상(浦上)의 여덟 나라
낙동강 하류 유역에 있던 8나라로, 丁若鏞은 〈弁辰別考〉에서 김해 서쪽의 웅천, 창원, 칠원, 함안, 진해, 고성, 사천, 곤양 등지에 있던 나라라 하였다. 본서 권48 열전 勿稽子傳과 《三國遺事》권5 避隱篇 勿稽子條를 종합해 보면 8나라 중 骨浦國(현재의 마산), 菜浦國(현재의 칠원), 古史浦國(현재의 고성), 保羅國, 史勿國(현재의 사천) 등 5나라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함안의 阿羅國도 浦上 8국에 속해 있으면서 이들을 배후에서 지원했다는 견해가 있다(權珠賢, 〈阿羅加耶의 成立과 發展〉, 《啓明史學》 4, 1993, 23쪽. 金泰植, 〈咸安 安羅國의 成長과 變遷〉, 《韓國史硏究》 86, 1994, 58쪽).
[역주:02권46] 가라(加羅)
본서 권48 열전 勿稽子傳에는 阿羅國(함안)이라 하였으나, 浦上 8국이 침입한 加羅는 현재의 경남 김해시에 있던 금관가야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千寬宇, 앞의 책, 1989, 336쪽, 李基東, 앞의 논문, 1985, 186쪽. 金泰植, 앞의 논문, 1994, 55~57쪽). 여기서의 加羅를 함안의 安羅加耶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金泰植은 토기 문화권의 측면에서 함안지역은 마산의 서쪽지방과 유사한 반면에 김해지역과는 구별된다는 점에서 浦上 8국의 공격대상이 아라국일 수는 없다고 한다(金泰植, 앞의 논문, 1994, 55~57쪽). 그리고 丁若鏞은 〈弁辰別考〉에서, 이들 나라는 원래 首露의 통치를 받고 있었는데, 수로가 죽자 8나라가 마침내 난을 일으켰으므로 居登王이 신라에 구원을 요청 했다고 한다.
[역주:02권47] 우로(于老)
흘해왕의 아버지로, 부인은 命元夫人이다. 신라의 장군으로서 여러 차례 무공을 세웠으나 마침내는 왜인에 의하여 살해당하였다. 본서 권45 열전 昔于老傳 참조.
[역주:02권48] 6부의 군사를 이끌고
본서 권48 열전 물계자전에서는, 이때 于老 등이 이끌고 간 군사는 6부의 군사뿐만 아니라 隣近 郡의 군사도 함께 거느리고 갔다고 한다.
[역주:02권49] 가야(加耶)
가야에 대한 표기는 加羅·加耶·伽倻·駕洛·加耶·狗邪 등 다양하게 표기되었는데, 본서에서는 대부분 ‘加耶’로 표기하였다. 이러한 '가야'는 처음에는 金海의 금관가야를 지칭하는 말이었으나 언제부터인가는 高靈의 대가야 세력이 이를 그대로 이어받아 사용했다고 한다(金泰植, 《加耶聯盟史》, 일조각, 1993, 16~20쪽). 본서 권2 신라본기 나해 이사금 17년조에 나오는 가야는 同王 14년(209)에 포상 8국의 침입에 대하여 구원을 요청한 ‘加羅’ 곧 김해의 金官加耶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역주:02권50] 19년(214) … 가을 7월
본서 권23 백제본기에는 이와 동일한 기사가 신라본기보다 꼭 10년 빠른 백제 초고왕 39년(204) 7월조에 수록되어 있다.
[역주:02권51] 요거성(腰車城)
본서 권37 잡지 지리(4)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수록된 지명인데, 이를 충북 보은군 懷南面 扮谷 혹은 경북 상주시의 舊要濟院 자리에 비정하기도 하나(李丙燾, 《國譯 三國史記》, 1977, 27쪽) 어느 것도 확실치는 않다.
[역주:02권52] 설부(薛夫)
활동연대가 비슷하고 '夫'와 '支'의 자형상 유사점으로 보아, 벌휴왕 7년(190) 左軍主에 임명된 薛支와 동일인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역주:02권53] 19년(214) … 사현성(沙峴城)을 함락시켰다
본서 권23 백제 본기 肖古王 39년(204)조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는데, 백제본기에는 신라본기보다 10년 앞서 일어난 일로 기록하였다. 《三國史節要》(권3)에서도 본서 백제본기와 마찬가지이다.
[역주:02권54] 장산성(獐山城)
현재의 경북 慶山市 지방으로 원래는 押督(梁)小國이었는데, 지마왕 때 신라에 병합되었다. 본서 권34 주석 253 참조.
[역주:02권55] 백제인이 와서 에워쌌으므로 … 달아나게 하였다
본서 권24 백제본기 구수왕 5년조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역주:02권56] 충훤(忠萱)
나해왕 25년(220)에 이벌찬이 되어 중앙과 지방의 군사를 통괄하였는데, 동왕 27년 10월에 백제의 牛頭州 침입을 방어 하다가 패하여 그 벌로 鎭主로 강등되었다.
[역주:02권57] 양산(楊山)
현재의 경북 경주시에 있는 남산으로 추정된다. 본서 권1 주석 9 참조.
[역주:02권58] 우두주(牛頭州)
현재의 강원도 춘천지방을 일반적으로 우두주 혹은 牛首州,首若州라 하였다. 그런데 본서 권35 잡지 지리(2) 朔州條에 의하면, 善德王 6년에 우수주를 설치했다 하였고 또 나해왕 때 이 지방은 아직 신라에 속하지 않았으므로, 이 기사의 신빙성에는 문제가 있다(李丙燾, 《國譯 三國史記》, 1977, 29쪽).
[역주:02권59] 웅곡(熊谷)
본서 권37 잡지 지리(4)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수록된 지명이다. 웅곡의 현재 위치에 관해서는 춘천시 동남쪽의 甘溪說, 강원도 횡성군 횡성면설,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설 등이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통일신라시대 中祀의 대상인 四鎭 중의 하나인 ‘熊谷岳'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역주:02권60] 백제 군사가 … 돌아왔으므로
본서 권24 백제본기 仇首王 9년(222)조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역주:02권61] 진주(鎭主)
군사상의 요지에 설치한 鎭의 우두머리 관직. 통일신라시대 鎭의 장관 명칭은 頭上大監 또는 都護(兒江鎭), 軍主(大谷鎭), 大使(淸海鎭) 그리고 鎭頭(穴口鎭) 등 각기 다르게 표기되었다.
[역주:02권62] 봉산(烽山)
본서 권37 잡지 지리(4)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수록된 지명으로, 현재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첨해왕과 미추왕대에도 백제와 격전을 치룬 곳이다.
[역주:02권63] 이벌찬 연진이 … 사로잡았다
본서 권24 백제본기 구수왕 11년(224)조에 동일한 기사가 실려 있다.




助賁尼師今(立一云諸貴) 姓昔氏 伐休尼師今之孫也 父骨正(一作忽爭)葛文王 母金氏 玉帽夫人 仇道葛文

王之女 妃阿爾兮夫人 柰解王之女也 前王將死遺言 以壻助賁繼位 王身長美儀采 臨事明斷 國人畏敬之。


元年 拜連忠爲伊湌 委軍國事 秋七月 謁始祖廟

二年 秋七月 以伊湌于老爲大將軍 討破甘文國 以其地爲郡

三年 夏四月 倭人猝至圍金城 王親出戰 賊潰走 遣輕騎追擊之 殺獲一千餘級

四年 夏四月 大風飛屋瓦 五月 倭兵寇東邊 秋七月 伊湌于老與倭人 戰沙道 乘風縱火焚舟 賊赴水死盡

六年 春正月 東巡撫恤

七年 春二月 骨伐國王阿音夫 率衆來降 賜第宅-田莊安之 以其地爲郡

八年 秋八月 蝗害穀

十一年 百濟侵西邊

十三年 秋 大有年 古陀郡進嘉禾

十五年 春正月 拜伊湌于老爲舒弗邯 兼知兵馬事

十六年 冬十月 高句麗侵北邊 于老將兵出擊之 不克 退保馬頭柵 其夜苦寒 于老勞士卒 躬燒柴煖之 羣心

               感激

十七年 冬十月 東南有白氣如匹練 十一月 京都地震

十八年 夏五月 王薨




[교주:02권18] 貴
三國遺事 王曆篇 「賁」. 北 「貴(賁)」.
[교주:02권19] 表
原本 誤刻. 三國史節要에 의거 수정. 鑄字本 「采」. 榮·朝·北·權·培·烈·燾·浩 「采」.
[교주:02권20] 始
原本 誤刻. 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수정.
[교주:02권21] 于
原本 「干」. 本書 卷45 于老傳과 鑄字本에 의거 수정.




[역주:02권64] 조분 이사금(助道尼師今)
신라의 제11대 임금, 재위기간은 230년 ~ 247년이다. 벌휴왕의 태자인 骨正의 아들이고 벌휴왕의 嫡孫이다. 이 왕대에 甘文國과 骨伐國을 병합하였다.
[역주:02권65] 제귀(諸貴)
《三國遺事》 王曆篇에는 ‘諸貴’이라 하였으나, ‘貴’ 와 ‘賁’은 자형상 유사한 점에서 ‘諸貴’는 ‘諸賁’의 誤記 혹은 誤刻으로 보인다.
[역주:02권66] 옥모부인(玉帽夫人)
구도갈문왕의 딸로 骨正의 부인이다.
[역주:02권67] 아이혜부인(阿爾兮夫人)
본서에서 아이혜부인을 나해왕의 딸 이라 하였으므로, 아이혜부인은 조분왕의 姪女에 해당한다.
[역주:02권68] 감문국(甘文國)
현재의 경북 김천시 개령면에 있던 소국으로, 《三國志》권30 魏書 東夷傳 韓條에 ‘甘路國'으로 나온다. 문무왕 1년에 甘文郡이라 하였다가 경덕왕대에 개령군으로 개칭하였다. 우로가 감문국을 토벌한 사실은 본서 권45 열전 昔于老傳에도 실려 있다.
[역주:02권69] 골벌국(骨伐國)
본서 권37 잡지 지리(4)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수록되어 있으나, 骨火國과 동일한 지명으로 현재의 경북 영천지방이다. 경북 영천시 화산면과 신령면 일대에서 발견되는 세형동검과 銅戈 그리고 금호면에서 출토된 청동기 일괄 유물은 골벌국 때의 유물로 추정되고 있다(李賢惠, 《三韓社會形成過程硏究》, 일조각, 1984, 82쪽), 지증왕 5년에 이곳에 성을 쌓았으며 통일신라시대에는 臨皐縣이 되었다.
[역주:02권70] 백제가 서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본서 권24 백제본기 고이왕 17년(240)조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역주:02권71] 서불한(舒弗邯)
17 관등 가운데 최고 관등인 이벌찬의 다른 이름, 舒發翰으로도 표기되었다.
[역주:02권72] 고구려가 북쪽 변경에 침입하였으므로
본서 권17 고구려본기 동천왕 19년(245) 10월조에 동일한 사실이 실려 있다.
[역주:02권73] 우로(于老)가 사졸을 위로하고 … 감격하였다
본서 권45 열전 書于老傳에 동일한 내용이 실려 있다.
[역주:02권74] 동남쪽에 … 걸어놓은 것 같았다
원문 『東南有白氣如匹練』을 井上秀雄은 '동남지방에 짙은 안개가 발생하여, 白布로 싼 것 같았다'로 번역하였으나(井上秀雄 譯註 《三國史記》 1, 1980, 49쪽), 이는 잘못된 해석이다.


 

沾解尼師今立 助賁王之同母弟也


元年 秋七月 謁始祖廟 封父骨正爲世神葛文王. 論曰 漢宣帝卽位 有司秦 爲人後者 爲之子也 故降其父母 

             不得祭 尊祖之義也 是以 帝所生父稱親 諡曰悼 母曰悼后 此諸侯王 比合經義 爲萬世法 故後

             漢光武帝 宋英宗法而行之 新羅自王親 入繼大統之君 無不封崇其父稱王 非特如此而己 封其

             外舅者亦有之 此非禮 固不可以爲法也

二年 春正月 以伊湌長萱爲舒弗邯 以參國政 二月 遣使高句麗結和

三年 夏四月 倭人殺舒弗邯于老 秋七月 作南堂於宮南(南堂或云都堂) 以良夫爲伊湌

五年 春正月 始聽政於南堂 漢祇部人夫道者 家貧無諂 工書算著名於時 王徵之爲阿湌 委以物藏庫事務

七年 夏四月 龍見宮東池 金城南臥柳自起 自五月至七月 不雨 禱祀祖廟及名山 乃雨 年饑 多盜賊

九年 秋九月 百濟來侵 一伐湌翊宗逆戰於槐谷西 爲賊所殺 冬十月 百濟攻烽山城 不下

十年 春三月 國東海出大漁三 長三丈 高丈有二尺 冬十月晦 日有食之

十三年 秋七月 旱蝗 年荒 多盜

十四年 夏 大雨 山崩四十餘所 秋七月 星패于東方 二十五日而滅

十五年 春二月 築達伐城 以奈麻克宗爲城主 三月 百濟遣使請和 不許 冬十二月二十八日 王暴疾薨

 



[교주:02권22] 槐
原本 判讀不能. 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보충.


[역주:02권75] 첨해 이사금(沾解尼師今)
신라의 제12대 임금, 재위기간은 247년 ~ 261년이다. 《三國遺事》 王曆篇에서는 ‘理解尼此今'이라 하고 세주에 ‘詀解'라 하였다. 골정의 둘째 아들로 조분왕을 이어서 즉위하였다. 이 왕대에 고구려와 화친을 맺었고, 南堂을 처음으로 설치하였다.
[역주:02권76] 선제(宣帝)
漢나라 제9대 임금으로, 재위기간은 서기전 74~ 49년이다.
[역주:02권77] 남의 뒤를 이은 사람은 … 하여야 합니다
이 내용은 《漢書》 권63 열전 武五子傳 및 《資治通鑑) 권24 宣帝 本始 원년 6월조에 수록되어 있다.
[역주:02권78]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와 송(宋)나라 영종(英宗)이 …. 그대로 행하였다
光武帝는 漢나라 高祖의 9세손으로 이름은 秀이다. 그는 王葬의 新을 무너뜨리고 漢을 부흥시켰는데, 재위기간은 서기 25년 ~ 57년이다. 英宗은 송나라 제5대 임금으로, 재위기간은 1063년 ~1067년이다. 이들은 모두 제왕의 아들이 아닌 종실 친척으로서 帝位에 올랐으므로, 자신의 친부모를 宗廟에서 제사하지 못하였다.
[역주:02권79]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맺었다
본서 권17 고구려본기 동천왕 22년 2월조에 동일한 사실이 실려 있다. 그리고 《三國遺事》 王曆篇에서는 이 사실을 『始與高句麗通聘』이라 표현하였다.
[역주:02권80] 3년
《三國史節要》(권3)에 『春正月 遺于老將兵討沙梁伐國(一云沙伐)滅之 沙梁伐舊屈新羅 今貳百濟也』이라 하여 본서에 없는 기사가 실려 있다. 그리고 본서 권45 열전 昔于老傳에도 첨해왕대에 우로가 사량벌국을 토벌하였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역주:02권81] 왜인이 서불한 우로(于老)를 죽였다
본서 권45 열전 昔于老 傳에서는 첨해왕 7년(253)에 우로가 왜의 사신에게 失言한 것이 禍根이 되어 왜군에게 잡혀 불에 타 죽었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본서 권 45 열전 昔于老傳 참조.
[역주:02권82] 남당(南堂)
마을의 원시적인 집회소에서 기원하는 일종의 政廳이다. 초기의 남당은 政事를 논의한다던지 행정사무의 처리 및 집행, 혹은 연회 기타 여러가지 의식을 거행하는 기능을 가졌으나 정부가 복잡해짐에 따라 실무 행정업무는 다른 기관으로 분리되어 가고 오로지 군신회의, 회견, 의식만을 거행하는 기관으로 변질되었다(李丙燾, 〈古代南堂考〉, 《韓國古代史硏究》, 1976, 614~642쪽).
[역주:02권83] 부도(夫道)
신라 왕경의 한기부 출신의 인물로, 物藏庫의 사무를 맡았다는 사실 외에는 알려진 바가 없다. 한편 南堂會議와 관련 하여 부도를 신라 최초의 稟主로 보는 견해도 있다(井上秀雄, 〈新羅の政治體制〉, 《古代史講座》 4, 1962).
[역주:02권84] 물장고(物藏庫)
명칭으로 보아 나라의 재물을 보관하던 창고 의 일을 맡아보던 관서로 추정된다. 이는 신라 내성 소속의 物藏典과 태봉의 物藏省과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역주:02권85] 괴곡(槐谷)
槐壤과 동일한 지명으로, 현재의 충북 괴산군 괴산읍 일대로 추정된다.
[역주:02권86] 백제가 …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본서 권24 백제본기 고이왕 22년 10월조에 동일한 사실이 실려 있다.
[역주:02권87] 달벌성(達伐城)
達伐은 達句火,達古伐, 혹은 達丘伐로도 표기되는데, 현재의 대구광역시 달성동에 있는 達城이 곧 달벌성이다. 한편 본서 권37 잡지 지리(4)에는 達伐을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수록하였다.
[역주:02권88] 백제가 … 허락하지 않았다
본서 권24 고이왕 28년 3월조에 동일한 내용이 실려 있다.




味鄒尼師今立一云味照 姓金 母朴氏 葛文王伊柒之女 妃昔氏 光明夫人 助賁王之女 其先閼智 出於雞林 

脫解王得之 養於宮中 後拜爲大輔 閼智生勢漢 勢漢生阿道 阿道生首留 首留生郁甫 郁甫生仇道 仇道則

味鄒之考也 沾解無子 國人立味鄒 此金氏有國之始也。


元年 春三月 龍見宮東池 秋七月 金城西門災 延燒人家百餘區(百 舊本作三百)

二年 春正月 拜伊湌良夫爲舒弗邯 兼知內外兵馬事 二月 親祀國祖廟 大赦 封考仇道爲葛文王

三年 春二月 東巡幸望海 三月 幸黃山 問高年及貧不能自存者 賑恤之

五年 秋八月 百濟來攻烽山城 城主直宣率壯士二百人 出擊之 賊敗走 王聞之 拜直宣爲一吉湌 厚賞士卒

七年 春夏 不雨 會羣臣於南堂 親問政刑得失 又遣使五人 巡問百姓苦患

十一年 春二月 下令 凡有害農事者 一切除之 秋七月 霜雹害穀 冬十一月 百濟侵邊

十五年 春二月 臣寮請改作宮室 上重勞人不從

十七年 夏四月 暴風拔木 冬十月 百濟兵來圍槐谷城 命波珍湌正源 領兵拒之

十九年 夏四月 旱 錄囚

二十年 春正月 拜弘權爲伊湌 良質爲一吉湌 光謙爲沙湌 二月 謁廟 秋九月 大閱楊山西

二十二年 秋九月 百濟侵邊 冬十月 圍槐谷城 命一吉湌良質 領兵禦之

二十三年 春二月 巡撫國西諸城 冬十月 王薨 葬大陵(一云竹長陵)

 



[교주:02권23] 百
「三百」, 鑄字本 「百」. 榮·朝·北·權·烈·燾·浩 「百」.
[교주:02권24] 上
三國史節要 「王」. 舜 「王」.
[교주:02권25] 波
原本 「彼」. 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수정.
[교주:02권26] 祖
原本에는 없으나 三國史節要에 의거 추가. 鑄字本 原本과 同. 榮·朝·北·權·烈·燾·浩 原本과 同.
[교주:02권27] 竹
原本 「什」. 三國遺事 卷1 未鄒王竹葉軍條와 三國史節要에 의거 수정. 鑄字本 「什」. 榮·烈 「什」.



[역주:02권89] 미추 이사금(味鄒尼師今)
신라의 제13대 임금, 재위기간은 262년 ~ 284년이다. 《三國遺事》 王曆篇과 같은 책 권1 未鄒王 竹葉軍條에서는 未鄒, 味昭, 未祖, 未召, 未古 등으로도 표기하였다. 미추왕은 김알지의 7세손으로 아버지는 구도갈문왕이고 김씨로서는 처음으로 왕위에 오른 사람이다. 한편 미추는 '元', '本'의 뜻으로 시조왕이란 의미를 가진다고도 한다(前間恭作, 〈新羅王の世次と其名心就いて〉, 《東洋學報》 15-2, 1925).
[역주:02권90] 이칠(伊柒)의 딸이고
《三國遺事》 王曆篇에서는 伊柒을 伊非로 표기하였고 그를 갈문왕이라 하였다. 그리고 伊柒의 딸인 미추왕의 어머니를 生乎夫人 혹은 述禮夫人이라 하였다.
[역주:02권91] 광명부인(光明夫人)
《三國遺事》 王曆篇에서는 光明娘이라 하였다.
[역주:02권92] 선조 알지(智)는 … 대보(大輔)로 삼았다
알지의 출현에 관해서는 본서 권1 신라본기 탈해왕 9년조 및 《三國遺事》, 권1 紀異篇 金閼智 脫解王代條에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알지가 대보에 임명되었다는 기사는 보이지 않는다.
[역주:02권93] 세한(勢漢)
《三國遺事》권1 紀異篇 金閼智 脫解王代條에서는 熱漢이라 하였다. 한편 〈文武王陵碑〉·〈廣照寺 眞澈大師碑〉·〈興德 王陵碑片〉에 보이는 星漢, 〈비로암진공대사비>의 聖韓이 발음상 본서에서 말하는 勢漢과 비슷하다고 하여 양자를 동일시하는 견해가 있으나(前間恭作, 〈新羅王の世次と其名心就いて〉, 《東洋學報》 15~2, 1925), 星漢을 신라 왕실의 태조라 한 점에서 세한과 동일인으로 보기는 어렵다. 이점에 관해서는 李基東의 〈新羅 太祖星漢의 문제와 興德王陵碑의 발견〉(《大丘史學》 15·16 합집, 1978)과 金昌鎬의 〈新羅太祖星漢의 再檢討〉(《歷史敎育論集》 5, 1983) 참조.
[역주:02권94] 아도(阿道)
미추왕의 會祖라는 사실 밖에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런데 일성왕 15년에 葛文王으로 봉해진 朴阿道, 본서 권45 열전 朴堤上傳에서 박제상의 할아버지라 한 阿道葛文王과 동일인인지도 모르겠다.
[역주:02권95] 국조묘(國祖廟)
시조묘와 동일한 뜻으로, 신라의 건국자인 朴赫居世를 모신 사당이라는 견해가 있다(崔光植, 《古代 韓國의 國家와 祭祀》, 한길사, 1994, 165~174쪽).
[역주:02권96] 동쪽으로 순행하여 … 망제(望祭)를 지냈다
원문 『東巡幸望海」를 ‘동으로 望海에 순행하여'로 번역하여 望海를 지명으로 보기도 하고(李丙燾, 《國譯 三國史記》, 1977, 32쪽. 이재호 역, 《삼국사기》 1, 한국자유교육협회, 1971, 48쪽), 혹은 '동쪽에 순행하여 바다를 보았다'로 해석 하기도 하나(井上秀雄 譯註, 《三國史記》 1, 1980, 53쪽) 잘못이다. 한편 望祭는 가뭄 등의 재해가 있을 때 名山과 大川 혹은 바다에 재앙을 물리쳐 주기를 기원하며 지내던 제사이다.
[역주:02권97] 황산(黃山)
현재의 경남 양산시 院洞面에서 낙동강 하구의 乙島 사이에 흐르던 낙동강이 黃山河였으므로(金泰植, 《加耶聯盟史》, 1993, 70쪽), 黃山은 아마 그 부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역주:02권98] 백제가 … 패하여 달아났다
본서 권24 백제본기 고이왕 33년 8월조에 동일한 사실이 실려 있다.
[역주:02권99] 백제가 변경을 침범하였다
본서 권24 백제본기 고이왕 39년 11월조에 동일한 사실이 실려 있다.
[역주:02권100] 백제 군사가 … 가서 막게 하였다
본서 권24 백제본기 고이왕 45년 10월조에 동일한 사실이 실려 있다.
[역주:02권101] 홍권(弘權)
미추왕 20년(281)에 이찬이 되었다가 유례왕 2년(285)에 서불한이 되어 나라의 정치에 참여하였으며, 동왕 12년(295) 봄에 유례왕이 백제와 연합하여 왜를 정벌하려고 하였을 때 홍권이 반대하여 그만두게 하였다.
[역주:02권102] 양질(良質)
미추왕 20년에 일길찬이 되었다가 동왕 22년(283) 10월에 槐谷城을 포위한 백제군을 방어하였다.
[역주:02권103] 백제가 변경을 침범하였다
본서 권24 고이왕 50년 9월조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역주:02권104] 대릉(大陵) 또는 죽장릉(竹長陵)
《三國遺事》 권1 紀異篇 미추왕 죽엽군조에서는 竹現陵이라 하고 왕릉은 흥륜사 동쪽에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미추왕릉을 속칭 始現堂이라 하였으며 次序를 오릉의 상위에 놓아 大廟라 일컬었다고 한다. 미추왕릉은 현재의 경북 경주시 황남동 대릉원 안에 있는데, 이 능은 원형 봉토분으로 지름이 56.7m이고 높이가 12.2m이다.





儒禮尼師今立(古記 第三-第十四二王同諱 儒理或云儒禮 未知孰是) 助賁王長子 母朴氏 葛文王奈音之女 

嘗夜行 星光入口 因有娠 載誕之夕 異香滿室。


二年 春正月 謁始祖廟 二月 拜伊湌弘權爲舒弗邯 委以機務

三年 春正月 百濟遣使 請和 三月 旱

四年 夏四月 倭人襲一禮部 (部 疑是郡之誤) 縱火燒之 虜人一千而去

六年 夏五月 聞倭兵至 理舟楫 繕甲兵

七年 夏五月 大水 月城頹毁

八年 春正月 拜末仇爲伊伐湌 末仇忠貞有智略 王常訪問政要

九年 夏六月 倭兵攻陷沙道城 命一吉湌大谷 領兵救完之 秋七月 旱蝗

十年 春二月 改築沙道城 移沙伐州豪民八十餘家

十一年 夏 倭兵來攻長峯城 不克 秋七月 多沙郡進嘉禾

十二年 春 王謂臣下曰 倭人屢犯我城邑 百姓不得安居 吾欲與百濟謀 一時浮海 入擊其國 如何 舒弗邯弘

        權 對曰 吾人不習水戰 冒險遠征 恐有不測之危 況百濟多詐 常有呑噬我國之心 亦恐難與同謀 

        王曰 善

十四年 春正月 以智良爲伊湌 長昕爲一吉湌 順宣爲沙湌 伊西古國來攻金城 我大擧兵防禦 不能壤 忽

        有異兵來 其數不可勝紀 人皆珥竹葉 與我軍同擊賊 破之 後不知其所歸 人或見竹葉數萬積於竹

        長陵 由是國人謂 先王以陰兵助戰也

十五年 春二月 京都大霧 不辯人 五日而霽 冬十二月 王薨

 



[교주:02권28] 朴
原本 「村」. 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수정.
[교주:02권29] 部
北·燾 「部(郡)」.
[교주:02권30] 日
原本 「月」. 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수정.



[역주:02권105] 유례 이사금(儒禮尼師今)
신라의 제14대 임금. 재위기간은 284년 ~ 298년이다. 《三國遺事》 王曆篇에서는 ‘世里智王'이라고도 하였다. 이 왕은 백제와 화친하여 함께 왜를 정벌하려다가 그만두었고, 伊西古國의 침략을 받기도 하였다.
[역주:02권106] 고기(古記)
본서에는 古記類가 본문 혹은 分註 형식으로 24곳에 인용되어 있다. 본서에 인용된 古記는 단일한 특정 書目을 지칭한다기 보다는 여러 옛 기록들에 대한 總稱 혹은 중국사서에 대비되는 우리나라의 옛날 기록 정도의 의미로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李康來, 〈三國史記와 古記〉, 《龍鳳論叢》 17·18 합집, 1989, 83~107쪽). 한편 본서에 등장하는 여러 古記類는 각자 다른 자료가 아니라 하나일 가능성이 있다는 견해도 있다(鄭求福, 〈三國史記의 原典資料〉, 《三國史記의 原典檢討》,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5, 15~18쪽).
[역주:02권107] 유리(儒理)를 또는 유례(儒禮)라 하였으니
儒理와 儒禮를 혼동하여 서술한 것으로는 《三國遺事》 권1 紀異篇 미추왕 죽엽군조에서 제14대 왕 儒禮를 儒理라 하였고, 같은 책 王曆篇에서는 제3대 왕 儒理를 弩禮 혹은 儒禮라 한 것이 대표적이다.
[역주:02권108] 어머니 박씨는 갈문왕 나음(奈音)의 딸이다
《三國遺事》 王曆篇에서는 유례왕의 어머니를 △召夫人이라 하였다. 한편 본서 권2 신라본기 조분 이사금 즉위년조에서, 조분왕의 비는 阿爾兮夫人으로 나해왕의 딸이라고 하였는데, 유례 이사금 즉위년조에서는 나음갈 문왕의 딸로 기술되어 있다. 그래서 유례왕은 조분왕의 孫子일 가능성이 있다는 견해도 있다(李鍾旭, 《新羅上代 王位繼承硏究》, 영남대 출판부, 1980, 77쪽).
[역주:02권109] 백제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였다
본서 권24 백제본기 고이왕 53년 정월조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역주:02권110] 일례부(一禮部)
현재의 위치는 알 수 없으나, 혹시 ‘部'는 '郡'의 誤記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렇다면 현재의 경북 고령군 星山面 지역이 一利郡이었으므로 一禮郡과 同一地名으로 볼 수 있다.
[역주:02권111] 말구(未仇)
仇道의 아들로 미추왕과는 형제지간이다. 또한 나물왕의 아버지로 처는 休禮夫人이다.
[역주:02권112] 사벌주(沙伐州)
첨해왕대 사벌국이 신라에 병합되어 州가 설치된 곳으로, 현재의 경북 상주지방이다. 본서 권34 주석 60 참조.
[역주:02권113] 장봉성(長峯城)
본서 권37 잡지 지리(4)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수록된 지명으로, 현재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그런데 長峯城 혹은 長峯鎭 관련 기사는 모두 왜인과의 전투와 관련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이곳은 왜의 신라침입로 중간에 있던 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역주:02권114] 다사군(多沙郡)
현재의 경남 하동군 고전면의 옛 지명인 韓多沙郡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多沙는 《日本書紀》 권17 機體紀 7년조에 帶沙로 나오는데, 帶沙에 대해서는 현재의 경북 달성군 하빈면의 옛 이름인 多斯只와 관련지어 보는 견해도 있다(千寬宇, 《加耶史硏究》, 일조각, 1991, 43~44쪽).
[역주:02권115] 이서고국(伊西古國)
현재의 경북 청도군 伊西面에 있던 소국으로, 《三國遺事》 권1 紀異篇 弩禮王條에 의하면, 유리왕 19년(서기 42)에 신라에 의하여 멸망되었다고 한다. 한편 유례왕 14년(297)에 이서고국이 신라를 침공한 사실은 《三國遺事》 권1 紀異篇 伊西國條 및 未鄒王 竹葉軍條에도 수록되어 있다.
[역주:02권116] 음병(陰兵)
'陰'은 밝음에 대한 어두움, 지상에 대한 지하, 그리고 이승에 대한 저승을 뜻하므로, 陰兵은 곧 귀신 군사를 말한다. 《三國遺事》권1 紀異篇 미추왕 죽엽군조에서는 '陰隲'이라 하였다.





基臨(一云基立)尼師今立 助賁尼師今之孫也 父乞淑用湌(一云乞淑助賁之孫也)(用 恐伊之誤) 性寬厚 

人皆稱之。


二年 春正月 拜長昕爲伊湌 兼知內外兵馬事 二月 祀始祖廟

三年 春正月 與倭國交聘 二月 巡幸比列忽 親問高年及貧窮者 賜穀有差 三月 至牛頭州 望祭太白山 

             樂浪-帶方兩國歸服

五年 春夏 旱

七年 秋八月 地震 泉湧 九月 京都地震 壤民屋有死者

十年 復國號新羅

十三年 夏五月 王寢疾彌留 赦內外獄因 六月 王薨

 



[교주:02권31] 立
原本 「丘」. 三國遺事 王曆篇에 의거 수정. 鑄字本 「丘」. 榮 「丘」.
[교주:02권32] 伊
原本 「用」. 字形과 文意로 보아 수정. 榮·朝 「用」, 燾 「用(伊)」.
[교주:02권33] 淑
三國史節要 「馭」. 舜 「馭」.
[교주:02권34] 差
原本 判讀不能. 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보충.
[교주:02권35] 號
原本 「号」. 「號」의 略字.
[교주:02권36] 留
原本 誤刻. 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수정.


[역주:02권117] 기림 이사금(基臨尼師今)
신라의 제15대 임금. 재위기간은 298년 ~ 310년이다. 이 왕대에 왜국과 사신을 교환하였고 또 낙랑과 대방이 신라에 귀속하였다고 하나 의심스럽다.
[역주:02권118] 조분 이사금의 손자
《三國遺事》 王曆篇에서는 기림왕을 조분왕 동생의 둘째 아들이라 하였다.
[역주:02권119] 걸숙(乞淑)
《三國史節要》(권4)에서는 '乞馭’으로도 썼다. 한편 《三國遺事》 王曆篇에서 기림왕의 어머니를 아이혜부인이라 하였으나, 기림왕을 조분왕의 아들로 보기 어렵기 때문에(李鍾旭, 《新羅上代 王位繼承硏究》, 1980, 78쪽) 그의 어머니를 조분왕의 妃인 아이혜부인으로 볼 수 없다.
[역주:02권120] 비열홀(比列忽)
比烈忽이라고도 표기하였다. 현재의 함경남도 안변군 안변면이다. 이곳은 진흥왕대 비로소 신라의 영역에 편입된 듯한데, 여기서는 기림왕이 그 곳을 순행하였다고 하였으니 이 기사의 사실성이 의심스럽다.
[역주:02권121] 낙랑과 대방 … 항복하였다
낙랑과 대방은 313년에 고구려에 의하여 마침내 망한 중국 郡縣임에도 불구하고 본서에서는 기림왕 3년(300)에 두 나라가 신라에 와서 항복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기사는 낙랑과 대방의 완전한 복속이 아니라 3세기 후반부터 쇠퇴한 낙랑과 대방 소속의 일부 지역이 신라에 항복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역주:02권122] 나라 이름을 다시 신라(新羅)라 하였다
《三國遺事》王曆篇 에서도 丁卯年 곧 기림왕 10년(307)에 국호를 정하여 新羅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新羅'라는 정식 국호는 지증왕 4년에 제정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여기서 '나라 이름을 다시 신라라 하였다'는 기사는 閼智의 탄생을 계기로 '계림'이라 했던 국호를 다시 '신라' 혹은 '사로’로 환원한 것을 의미한다.






訖解尼師今立 奈解王孫也 父于老角干 母命元夫人 助賁王女也 于老事君有功 累爲舒弗邯 見訖解狀

貌俊異 心謄明敏 爲事異於常流 乃謂諸候曰 興吾家者 必北兒也 至是 基臨薨 無子 羣臣議曰 訖解幼

有老成之德 乃奉立之。


二年 春正月 以急利爲阿湌委以政要 兼知內外兵馬事 二月 親祀始祖廟

三年 春三月 倭國王遣使 爲子求婚 以阿湌急利女送之

四年 秋七月 旱蝗 民飢 發使救恤之

五年 春正月 拜阿湌急利爲伊湌 二月 重修宮闕 不雨乃止

八年 春夏 旱 王親錄囚 多原之

九年 春二月 下令 向以旱災 年不順成 今則土膏脈起 農事方始 凡所勞民之事 皆停之

二十一年 始開碧骨池 岸長一千八百步

二十八年 春二月 遣使聘百濟 三月 雨雹 夏四月 隕霜

三十五年 春二月 倭國遣使請婚 辭以女旣出嫁 夏四月 暴風拔宮南大樹

三十六年 春正月 拜康世爲伊伐湌 二月 倭王移書絶交

三十七年 倭兵猝至風島 抄掠邊戶 又進圍金城 急攻 王欲出兵相戰 伊伐湌康世曰 賊遠至 其鋒不可當 

          不若緩之待其師老 王然之 閉門不出 賊食盡 將退 命康世 率勁騎 追擊走之

三十九年 宮井水暴溢

四十一年 春三月 鸛巢月城隅 夏四月 大雨浹旬 平地水三四尺 漂沒官私屋舍 山崩十三所(十三 新本作三十)

四十七年 夏四月 王薨

 



[교주:02권37] 于
原本 「千」. 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수정.
[교주:02권38] 侯
原本 「候」. 文意와 鑄字本에 의거 수정.
[교주:02권39] 辭
原本 「辝」. 「辤」의 古篆. 「辤」는 「辭」의 本字.
[교주:02권40] 島
原本 「㠀」은 「島」의 本字.
[교주:02권41] 水
三國史節要 「水深」. 舜 「水深」.
[교주:02권42] 三
「十三」, 鑄字本 「三十」.


[역주:02권123] 흘해 이사금(訖解尼師今)
신라의 제16대 임금, 于老의 아들로 재위기간은 310년 ~ 356년이다. 《三國遺事》 王曆篇과 같은 책 권3 興法篇 原宗法條에서는 乞解라 하였다. 이 왕대에 벽골지를 만들었고 農時를 빼앗지 못하게 하는 令을 내리는 등 권농정책을 폈다.
[역주:02권124] 명원부인(命元夫人)
본서 권45 열전 昔于老傳에서, 于老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왜국의 사신을 유혹하여 죽인 ‘于老'의 妻'와 동 일인으로 보인다.
[역주:02권125] 여러 번 승진하여 서불한이 되었는데
원문 『累爲舒弗邯』을 직역하여 '여러 번 서불한이 되었다'로 번역한 경우도 있으나(李丙燾, 《國譯 三國史記》, 1977, 35쪽, 북한 고전연구실 편, 《삼국사기》 상, 1958, 52쪽), 우로의 행적으로 보아 '거듭 혹은 여러 번 승진하여 서불한이 되었다'로 번역하는 편이 옳을 듯하다. 한편 우로가 서불한이 되었던 때는 조분왕 15년(244) 정월이었다.
[역주:02권126] 급리(急利)
흘해왕 2년(311)에 아찬이 되어 정치의 주요한 일을 담당하였고, 동왕 3년에 딸을 왜의 왕자에게 시집보냈으며 동왕 5년(314)에 이찬이 되었다.
[역주:02권127] 벽골지(碧骨池)
현재의 전북 김제시 扶梁面에 있던 저수지로, 이 못의 길이는 약 3km이고 제방의 높이는 4.3m이다. 1975년의 벽골지에 대한 발굴 조사시 제방의 밑바닥에서 채취한 탄화된 식물을 시료로 하여 방사성탄소 연대측정을 한 결과, 이 저수지는 대략 4세기 중엽경에 축조되었음이 확인되었다(尹武兩, 〈金堤 碧骨堤 發掘報告〉, 《百濟硏究》 7, 1976, 11쪽). 한편 《三國遺事》 王曆篇에서는 흘해왕 20년 기축년(329)에 이 못을 팠다고 하여 본서와 1년의 차이가 있다. 그런데 현재의 김제지방은 당시 신라의 영토에 편입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므로, 이 기사는 백제의 것이 잘못 신라에 삽입된 것이 아닐까 하는 견해도 있다(李丙燾, 《國譯 三國史記》, 1977, 36쪽).
[역주:02권128] 둑의 길이가 1,800보였다
《三國遺事》 王曆篇에는 주위가 △만7천2십6보라 하였다.
[역주:02권129] 백제가 … 예방(禮訪)하였다
본서 권24 백제본기 비류왕 34년 2월조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역주:02권130] 강세(康世)
흘해왕 36년(345)에 이벌찬이 되었다가 다음해에 金城을 에워싼 왜군을 격퇴하였다.
[역주:02권131] 풍도(風島)
본서 권37 잡지 지리(4)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수록된 지명으로, 본서에 보이는 風島는 모두 왜와 관련되어 있다. 그러므로 風島는 왜의 신라침입로 중간에 있던 섬으로 추정되나, 현재의 위치는 미상이다.


'우리歷史 > 三國史記' 카테고리의 다른 글

三國史記 卷第六  (0) 2016.09.19
三國史記 卷第五  (0) 2016.09.19
三國史記 卷第四  (0) 2016.09.19
三國史記 卷 第三   (0) 2016.09.19
三國史記 卷 第一[新羅本記]  (0) 2016.09.19